레이블이 요새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요새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1년 6월 28일 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1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2. 테렌스 주버VS로버트 폴리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3

S. 번외편 및 기타 사항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S-1


아. 연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슐리펜계획에 대한 논쟁’입니다. 지금보니 거의 두달 가까이 잊어버리고 있었네요;;;;

  지난 번 글에서는 로버트 폴리의 “The Real Schlieffen Plan”에 나타난 주버의 설에 대한 비판을 살펴봤습니다. 제가 지난번 글에서 밝혔던 것 처럼 “The Real Schlieffen Plan”은 주버가 사용한 핵심 사료에 대한 비판 등 매우 날카로운 지적이 많은 흥미로운 글 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테렌스 주버는 2007년  War in History, 14-1호에 “The 'Schlieffen Plan' and German War Guilt”라는 논문을 기고해 재 반론을 합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4
테렌스 주버의 재반론
“The 'Schlieffen Plan' and German War Guilt”


  테렌스 주버는 로버트 폴리가 군사적인 측면에서의 분석은 소홀히 한 채 테렌스 홈즈의 논리를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비판한 뒤 본격적인 반론에 들어갑니다.

 주버가 가장 먼저 반론을 제기한 것은 그의 핵심 사료인 참모부연습(Generalstabsreisen)에 대한 부분입니다. 지난번 글에서 설명한 것 처럼 로버트 폴리는 참모부연습은 실제 작전을 반영하는 문서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주버는 1차대전 초기 전역에서 슐리펜이 실시한 참모부연습의 내용이 반영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주버가 예로 든 사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1894년 동부 참모부연습 → 탄넨베르크 전투
1904, 1905, 1906, 1908년 서부 참모부연습 → 1914년 8월 15일 제5군에 대한 명령
1897, 1899, 1901, 1903년 동부 참모부연습 → 1914년 8월 24일 동부전선에 대한 증원명령
1901, 1903년 동부 참모부연습 →  1914년 가을 우치(Lodz) 방면 공세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작전은 모두 슐리펜의 기본적인 작전 계획이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의 공세를 맏받아치는 역습이라는 것을 입증해 준다고 주장합니다.
  다음으로 폴리는 1903년에 출간한 Alfred von Schlieffen’s Military Writings라는 저작에서 슐리펜이 실시한 참모부연습은 “슐리펜의 전쟁계획과 전략개념을 시험해 보는 수단”으로 서술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폴리가 홈즈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1904~1905년의 참모부연습이 슐리펜계획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었다고 주장한 부분도 지적합니다. 다음으로 독일육군 총참모부가 1938년 슐리펜의 동부 참모부연습 다섯개를 정리해서 단행본으로 출간했을때도 역시 서문에서 참모부연습이 슐리펜의 전략개념을 시험하고 작전구상을 가다듬는 것이었다고 밝힌 점도 지적합니다. 그러니 폴리가  “The Real Schlieffen Plan”에서 주장한 내용은 기존의 주장을 갑자기 180도 바꾼 것 이라는 겁니다. 또한 만약 참모부연습이 단순한 훈련 목적에 불과하다면 베를린 근처의 지역에서 실시하지 않고 최전선지역인 동프로이센과 로렌에서 실시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도 지적합니다.
  루덴도르프의 회고록에서 언급한 1905년의 서부 참모부연습에 대한 해석도 상이합니다. 폴리는 이 연습에서 ‘슐리펜계획’의 기본요소가 등장한다고 주장했는데 주버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 입니다. 주버는 루덴도르프 회고록의 내용을 보면 오히려 1904, 1906, 1908년 참모부연습과 동일하게 로렌을 향한 프랑스군의 공세에 대한 역습일 뿐이라고 반박합니다. 또한 폴리는 이 무렵 슐리펜이 프랑스와의 일대일 전쟁을 예측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주버는 루덴도르프의 회고록에서는 오히려 당시의 슐리펜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연계된 공세를 더 우려하고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루덴도르프의 회고록에 따르면 단지 프랑스군이 공세를 취하지 않을 경우에만 베르덩-벨포를 잇는 요새선을 우회하여 공격할 계획이었다고 합니다.
  주버는 폴리와 슐리펜계획의 정설을 확립한 리터 모두 슐리펜 시기의 군사교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슐리펜이 총참모장 재직시에 확립한 교리는 철도망이라는 내선의 이점을 활용해 부대를 신속히 기동하고 이를 통해 적의 공세를 재빨리 맞받아치는 것 을 핵심으로 한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리를 다양한 돌발변수에 맞춰 시험해 보는 것이 바로 참모부연습의 기능이라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참모부연습의 기밀 등급이 낮았고 일선부대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는 이유로 실제 작전과 거리가 먼 ‘교육용’이라는 폴리의 주장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단순한 교육용 자료에 기밀 등급이 붙여져 일선의 각 부대에서 수년간 보관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이냐는 겁니다.

  참모부연습의 사료적 가치 다음으로 지적하는 것은 연구의 방법입니다. 주버는 폴리가  “The Real Schlieffen Plan”에 서 사료인용의 문제를 지적한 것을 강하게 의식한 듯 이 문제를 설명하는데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주버는 자신의 주 사료인 빌헬름 디크만의 연구를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을 두가지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빌헬름 디크만은 슐리펜계획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믿고 연구를 시작한 인물이라는 점 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빌헬름 디크만이 이용한 사료를 통해 얻어낼 수 있는 정보입니다. 빌헬름 디크만은 슐리펜계획이 실재했다고 믿었지만 그가 인용한 사료들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폴리가 이 두가지 점의 차이를 모르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즉 빌헬름 디크만이 슐리펜계획이 실제로 존재한 계획이라고 믿었다는 것이 슐리펜계획의 실재여부를 증명해 주지는 못한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다음 논점을 슐리펜계획에 필요한 병력으로 돌립니다. 지금까지 여러번 강조했지만, 1905년 비망록에 따르면 서부전선에 투입될 독일군 병력은 96개 사단인데 실제 독일군 병력은 최대 72개 사단이 한계였습니다. 주버는 이 점을 들어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독일의 심각한 병력 부족문제였다는 기존의 주장을 반복합니다.
  폴리는 1차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이 새로이 6개 군단을 편성한 점을 들어 슐리펜계획에 명시된 병력의 부족문제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주버는 이에 대해 독일이 1914년 8월 급히 편성에 들어간 22~27예비군단은 자원한 학생등의 인력으로 편성된 것이지 사전에 계획된, 훈련된 예비병력이 아니라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편성한 6개 군단은 10월 중순까지도 전선에 투입할 수 없는 상태였으며 ‘슐리펜계획’에 따라 동원할 수 없는 부대였다고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1차대전 초 독일군의 대규모 우회기동을 뒷받침하는 계획은 무엇인가? 주버는 베젤러(Hans-Hartweg von Beseler)가 1900년에 작성한 비망록에서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군의 허를 찌르는 우회기동을 실시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을 뿐 슐리펜이 유사한 계획을 구상했다는 주장은 억측이라고 강조합니다.

  다음으로는 프랑스의 국경지대 요새 강화와 슐리펜계획의 연관성을 강조한 부분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이러한 폴리의 주장 역시 사료적인 뒷받침이 부족하다고 지적합니다. 폴리가 제시한 자료는 독일군 총참모부가 프랑스의 국경지대 요새선의 방어력을 강력하게 평가한 내용 정도이기 때문이란 것 입니다. 프랑스의 국경지대 요새선의 방어력을 강력하게 평가했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여기에서 벨기에를 통한 우회기동으로 계획이 발전했다는 내용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라는 게 주버의 논지입니다. 주버는 프랑스가 국경지대의 요새를 급속히 강화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베르덩, 에피날, 툴, 벨포르 등 핵심적인 요새들에 근대적인 방어시설이 보충되었을 뿐 프랑스의 국경지대 요새 상당수는 독일군의 군단급 장비인 210mm포로 쉽게 무력화 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당시에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주버는 독일군이 벨기에와 네덜란드 국경까지 우익을 확장한 원인은 프랑스군의 좌익이 메지에흐까지 확장된 것에 대한 대응조치일 뿐 ‘슐리펜계획’이나 프랑스군의 국경지대 요새 강화에 따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잡담하나. 주버는 이 글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고 있습니다. 슐리펜계획에 대한 사료는 워낙에 부족해서 마치 고대사를 연구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 입니다. 사실 이점은 슐리펜계획에 대한 논쟁이 시작된지 10년이 넘도록 계속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한방에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사료가 없는 상황이니 말입니다.

2011년 4월 30일 토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1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2. 테렌스 주버VS로버트 폴리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2

S. 번외편 및 기타 사항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S-1


지난번 글에 서는 로버트 폴리의 주장에 대한 테렌스 주버의 반론을 다루었습니다. 로버트 폴리의 첫 번째 글과 여기에 대한 테렌스 주버의 반론은 전초전적인 성격으로 분량도 매우 소략했습니다. 하지만 로버트 폴리는 테렌스 주버의 반론을 접한 뒤 본격적인 반박에 들어갑니다. 이번에 다룰 글은 로버트 폴리가 2006년 War in History 13권 1호에 기고한 “The Real Schlieffen Plan”이라는 제목의 반박문으로 상당히 재미있는 글입니다. 로버트 폴리는 테렌스 주버의 사료 이용 등 근본적인 부분에서 의문을 제기하며 전통적인 학설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로버트 폴리의 이 글은 슐리펜 계획을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재미있는 글이고 1차대전 직전 독일육군 총참모부를 이해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3
로버트 폴리의 재반론


1. 테렌스 주버의 사료 해석에 대한 비판

로버트 폴리는 이 글에서 가장 먼저 테렌스 주버의 사료 이용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테렌스 주버가 사용한 주사료였던 빌헬름 디크만(Wilhelm Dieckmann)의 연구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폴리가 보기에 디크만의 연구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지만 치명적인 결함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인 1904~1905년에 대한 내용이 누락되어 있다는 점 입니다. 이것이 완성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이 문서가 1945년 소련군에 노획된 이후 1989년 독일에 반환될 때 까지의 시기에 사라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가장 중요한 시기가 누락되어 있는 것은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빌헬름 디크만이 연구를 하던 무렵 가용 가능했던 사료가 제한적이었다는 점 입니다. 테렌스 주버는 지난번 글에서 슐리펜계획이 실제 전쟁계획이었다는 역사왜곡을 한 독일군 참모부출신들이 빌헬름 디크만의 일급기밀자료 접근을 의도적으로 방해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로버트 폴리는 1918~1945년 사이 독일육군의 문서고가 1차대전 시기 독일군의 모든 문서를 갖추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우선 1918~1919년의 혼란기에 많은 사료가 파기된 것이 첫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로는 1914년 이전의 문서들 중 상당수가 정보 누출을 우려해 독일군 스스로의 손에 의해 파기되었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폴리는 이어서 가용한 사료가 부족했기 대문에 독일육군은 전간기 사이에 사료 수집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이 과정에서 슐리펜 집안이 소장하고 있던 비망록이 입수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테렌스 주버는 슐리펜계획이 실제 작전계획이 아니라는 증거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이 슐리펜 가문이 개별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문서라는 점을 지적했는데 폴리의 설명을 따르게 되면 이 점이야 말로 전통적인 학설을 뒷받침 하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는 주버가 디크만의 연구를 해석하는 방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디크만의 연구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가 1890년대 중반까지의 계획, 그리고 두 번째가 1890년대 중반에서 1903년 까지의 계획,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1904년에서 1905년까지의 계획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은 누락되어 있지만 목차에는 제목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로버트 폴리에 따르면 세 번째 부분의 제목은 바로 “포위 계획(Der Umfassungsplan)”이었습니다. 본문은 누락되어 있지만 제목만 보더라도 빌헬름 디크만은 슐리펜이 1904년 이후 대규모 우회 포위기동을 구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 입니다. 목차의 구성이야 말로 디크만의 연구는 슐리펜이 수많은 계획 변경을 통해 궁극적으로 프랑스군 좌익을 돌파하는 대규모 포위기동을 구상하는 방향으로 나갔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라는 것이지요. 주버는 디크만이 전통적인 학설을 따른 이유가 모든 음모를 꾸민 참모부 출신들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결과라는 해석을 하고 있지만 폴리는 이런 결론을 내리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라고 비판합니다.

두 번째로는 테렌스 주버가 디크만의 연구에서 누락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사용한 사료인 참모부연습 문서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주버의 기본적인 주장은 슐리펜이 1904년에 실시한 참모부연습과 1905년에 실시한 마지막 워게임(Kriegsspiel), 그리고 소(小)몰트케가 1906년과 1908년에 실시한 참모부연습에서 슐리펜계획과 유사한 요소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은 실제 전쟁계획이 아니며 슐리펜계획은 허구라는 것 입니다. 폴리는 이 주장이 일부 타당하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폴리는 먼저 논쟁을 시작한 테렌스 홈즈의 주장을 옹호하면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은 매우 융통성이 강하기 때문에 다양한 상황에 대응할 수 있어서 주버와 같은 방식으로 독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폴리는 주버가 독일군의 참모부연습의 성격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합니다. 주버는 참모부연습이 실제 전쟁계획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폴리는 참모부연습의 주목적은 전쟁계획을 시험하는 것 보다는 참모부 장교들의 교육훈련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폴리는 슐리펜계획에 대한 초기 연구중 하나인 헤르만 폰 쿨(Hermann von Kuhl)의 “1차대전기 독일 총참모부의 전쟁준비와 전쟁수행(Der deutsche Generalstab in Vorbereitung und Durchführung des Weltkrieges)”을 인용하여 슐리펜이 참모부연습을 특정한 작전의 연습이 아니라 다양한 환경에서 작전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 자유롭게 시험하려 했음을 강조합니다. 또한 참모부연습이 실제 전쟁계획을 시험하는 것 이었다면 기밀등급이 최고등급인 절대기밀(Streng Geheim)로 분류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일반 기밀(Geheim)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게다가 기밀등급이 낮을 뿐 아니라 참모부연습 결과를 25개 군단사령부 및 각급 기관에 배포한 점도 지적합니다. 실제 전쟁계획이라면 적국에 유출될 위험을 무릅쓰면서 평시에 잔뜩 뿌려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독일 육군은 기밀누출을 우려해 유효기간이 지난 기밀문서의 파기에 주의를 기울였는데 참모부연습은 파기 대상에도 속하지 않는 문서였다고 합니다.

세 번째로는 부대전개계획(Aufmarschpläne)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폴리는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하기 이전에 수립한 1905/06년도 부대전개계획만 살펴보더라도 슐리펜계획의 기본적인 요소가 나타난다고 강조합니다. 1905/06년 부대전개계획 I에서는 26개 군단과 20개 예비사단을 총 8개의 야전군으로 편성하고 주력을 메츠 북쪽에 집결시켜 저지대국가들을 통해 진격시키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대전개계획 II는 동부전선에 병력을 일부 보강하고 있지만 여전히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 계획에서는 23개 군단과 16개 예비사단을 7개 야전군으로 편성해 부대전개계획 I과 마찬가지로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침공하여 프랑스 북부로 진입하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슐리펜은 1905/06년 부대전개계획에서 벨기에의 철도망을 장악하는것을 중요시해 5개의 기병사단이 신속히 마스강의 철교를 점령하도록 하였습니다.

폴리는 주버의 가장 큰 문제가 주사료인 디크만의 연구를 잘못 해석한데 있다고 봅니다. 이 때문에 참모부연습과 부대전개계획 같은 다른 사료들도 오독하는 연쇄작용이 일어났다는 것 입니다.


2.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 문제

폴리는 사료해석의 문제 다음으로 주버의 당시 상황에 대한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전쟁 계획은 국제정세와 군사적 상황을 반영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해 없이는 독일의 전쟁 계획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입니다.

첫 번째로는 러일전쟁의 결과와 이것이 끼친 영향입니다. 테렌스 주버는 러시아가 러일전쟁의 피해로 부터 재빠르게 회복되었기 때문에 슐리펜은 결국 양면전쟁의 위협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폴리는 이에 대해 앞선 논쟁에서 테렌스 홈즈가 인용한 바 있는 1905년 6월 10일에 슐리펜이 독일 수상 베른하르트 폰 뷜로우(Bernhard von Bülow)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여 비판하고 있습니다. 슐리펜은 뷜로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러시아군이 예상 이상으로 약하며 전쟁 결과 더 약해졌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또한 러시아의 군개혁이 성과를 거둘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표했습니다. 슐리펜은 러시아군이 너무 취약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도 러시아군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슐리펜의 생각에 큰 영향을 끼친것은 러시아군에 파견된 관전무관들의 보고서였습니다. 폴리는 오토 폰 라우엔슈타인(Otto von Lauenstein)이 1905년 12월에 작성한 마지막 보고서를 인용했는데 이 보고서에서 러시아인들이 나태하고 어렵고 힘든 것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인종적 편견에 가득찬 결론을 내렸습니다. 또한 러시아 장교단은 위아래를 막론하고 형편없는 지휘능력을 가졌다고 혹평했습니다. 라우엔슈타인은 러시아군이 이런 문제들을 단기간에 해결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폴리는 다음으로 외교적 상황의 변화를 강조합니다. 1905년의 독일은 러시아를 다시 독일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외교적 노력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슐리펜이 프랑스에 전력을 집중하는 전쟁 계획을 수립한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폴리는 1906년 모로코 위기 당시 독일 정부내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된 프랑스를 상대로 예방전쟁을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슐리펜도 예방전쟁을 강력히 지지했다고 지적합니다. 프랑스에 대한 예방전쟁이 실행되지 못한 것은 프랑스와의 포병전력 격차를 우려한 전쟁부 장관 아이넴(Karl von Einem)이 황제와 수상을 설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슐리펜이 프랑스군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폴리에 따르면 슐리펜은 러일전쟁의 결과 프랑스가 러시아군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고 독일과 단독으로 승부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수세를 취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러일전쟁이 끝난 뒤 요새 강화에 막대한 예산을 배정했는데 이것은 프랑스가 수세를 취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는 것 입니다. 프랑스가 요새를 강화하는데 맞춰 독일군도 대구경 야포의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1905년 시점에서는 아직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 없었습니다. 결국 독일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프랑스군의 좌익을 노리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벨기에를 침공하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었습니다.

이렇게 러일전쟁 이후의 정세를 고려한다면 슐리펜 계획이 작성된 맥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폴리의 주장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타당한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3. 소(小) 몰트케의 전쟁 계획

세번째로는 소 몰트케가 총참모장에 취임한 이후의 계획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되는 것이 1905년 이후의 정세 변동입니다.

소 몰트케 취임 초기 독일군의 정보당국은 러시아가 러일전쟁과 혁명의 혼란을 수습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몰트케 초기의 부대전개계획은 슐리펜 말기의 계획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합니다. 폴리의 설명에 따르면 1906/07년 부대전개계획은 주력을 서부전선에 집결하여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침공한 뒤 프랑스군의 좌익으로 돌파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소몰트케는 1906/07년 계획에서 우익의 주력에 23개 현역군단과 11½개 예비군단을 배정하고 이를 7개 야전군으로 편성했습니다. 이 계획에서 각 야전군의 임무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제1군(5개  예비군단)은 안트베르펜으로 진격하여 우익을 엄호, 제2군(4개 군단)은 브뤼셀 방향으로 진격, 제3군(4개 군단+1개 예비군단)은 제4군(4개 군단+3개 예비사단)과 함께 리에쥬와 나무르의 벨기에군 요새를 공격, 제5군은 지베(Givet)-스당을 잇는 선으로 진격하여 우익의 주력과 제6군과 접촉을 유지, 제6군(5개 군단)은 이 대규모 우회기동의 중심축으로 카리냥(Carignan)-롱귀용(Longuyon)을 잇는 선으로 진격, 제8군(1개 군단+4개 예비군단)은 6군을 후속하여 진격하면서 베르덩 방면에서 예상되는 프랑스군의 역습을 견제, 좌익의 제7군(3개 군단+2개 예비군단)은 프랑스군을 정면에서 견제.

하지만 이러한 계획은 정세변동과 함께 수정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먼저 러시아가 러일전쟁의 영향에서 빨리 회복된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1910년 경에는 독일군 정보당국도 러시아군의 회복을 확실하게 인식하였고 몰트케는 같은해 8월 수상이었던 베트만 홀벡(Theobald von Bethmann Hollweg)에게 쓴 편지에서 러시아군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독일 정보당국은 러시아군이 신형 야포의 도입을 서두르면서 장교단을 교체하고 훈련을 강화하고 있는 점을 포착했습니다. 또한 러시아군은 동원체제를 개편하여 부대동원을 보다 신속히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소 몰트케는 러시아가 추진하고 있는 철도계획이 완성된다면 동원개시 13일차에 유럽전선에 투입할 병력의 2/3을, 18일차에 전 병력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폴리는 이러한 상황이 소 몰트케의 전쟁계획에서 서부전선의 중요성을 더욱 더 높아지게 했다고 설명합니다. 러시아군은 단기간에 격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지만 독일은 양면전쟁을 치루기 어렵기에 프랑스와의 승부를 더 빨리 내야 했다는 것 입니다. 소 몰트케는 프랑스는 가용한 인적자원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한차례의 결전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다면 서부전선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한다면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다시 돌리는 것이 가능해 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계속해서 국경지대의 요새를 강화하고 있었고 독일군의 야포 개발과 배치는 이것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취약점은 여전히 좌익에 있었고 프랑스와 벨기에 국경지대의 요새들은 1912년이 되어서야 겨우 제한적인 보강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소 몰트케가 이 지역에 더욱 더 관심을 기울 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반면 프랑스군은 보다 강화되었고 러시아가 다시 공격 능력을 갖추게 됨으로써 독일측은 프랑스가 수세만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남부 독일을 방어하기 위해서 좌익을 보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는 동맹국이었으나 점차 외교적인 태도가 변화하고 있었고 소 몰트케는 이탈리아군으로 프랑스군 일부를 견제하는 것이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폴리는 결국 이러한 변화가 소 몰트케의 계획을 더욱 더 신속한 공격에 집중하도록 만들었다고 지적합니다.  소 몰트케의 1908년 계획에서 좌익의 병력은 8개 군단으로 증강되는 한편 우익의 약화와 함께 장기전에 대비해 네덜란드를 독일의 대외 창구로 삼기 위해서 네덜란드 침공은 계획에서 누락되었습니다. 네덜란드의 철로를 이용할 수 없게 된 만큼 벨기에의 철로, 특히 철교들을 안전하게 탈취하는 것은 더욱 중요해 졌습니다. 주력인 제1군과 제2군을 합친 60만의 대군이 불과 12마일에 불과한 정면으로 진격해야 했으니 이 제한된 정면에 있는 철도망이 파괴된다면 그 뒷감당은 꽤 골치아픈 일이었을 것 입니다. 벨기에의 철도망을 신속하게 탈취하기 위해서 1908년 계획에서는 동원 11일차에 공격을 개시하도록 명시했는데 1913년 벨기에가 새 육군법을 제정해 육군 규모를 크게 늘리자 동원 5일차에 공격을 시작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소 몰트케 시기의 전쟁 계획에 대한 폴리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소 몰트케는 취임 초기만 하더라도 러시아군을 낮게 평가해 서부전선, 특히 우익에 주력을 집중하는 슐리펜의 계획을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가 점차 러일전쟁의 충격에서 회복되면서 계획을 변경해야만 하는 압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양면전쟁의 가능성이 높아진 가운데 소 몰트케는 독일이 장기전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 전장을 신속히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 결과 프랑스를 더 신속히 무너뜨려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고 이것은 병력동원과 공격일정을 더 앞당기는 것으로 반영되었습니다.

폴리는 주버가 지나치게 작전 단위의 분석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슐리펜 계획이라는 대전략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글에서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주버의 사료 인용은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2011년 4월 13일 수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1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2. 테렌스 주버VS로버트 폴리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1

S. 번외편 및 기타 사항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S-1

지난번 글에서는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논쟁 중 이 논쟁에 새롭게 참여한 로버트 폴리의 논문을 소개했습니다. 로버트 폴리는 “The Origins of the Schlieffen Plan” 이라는 논문에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전통적인 학설을 지지하면서 슐리펜 계획의 수립 시기를 1899-1900년으로 높여 잡았습니다. 테렌스 주버는 새롭게 논쟁에 개입한 폴리에 대해 War in History 2004년 2호에 “The Schlieffen Plan was an Orphan”이라는 제목의 반박논문을 기고합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2
테렌스 주버vs로버트 폴리(2)
주버의 반론

이 논문은 총 6쪽으로 매우 소략합니다. 주버의 반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폴리가 슐리펜 계획의 원형이라고 주장한 1899/1900년도 부대전개계획 I(Aufmarschplan I)은 68개 사단을 서부전선에 집중하는 계획안입니다. 하지만 주버는 1899년 4월 1일부로 효력을 발휘한 부대전계계획 I은   불과 6개월도 못되어 수정안이 등장했기 때문에 효력이 없어졌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폴리의 주장과는 달리 1899/1900년도 부대전개계획 I에는 서부전선에서 승리를 거둔 뒤 동부전선으로 부대를 재배치하는 내용이 없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폴리의 주장과 달리 슐리펜은 1898년도에 작성한 비망록에서 전쟁 초기 부터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양쪽에서 싸움을 치러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폴리는 테렌스 주버가 주사료로 활용한 빌헬름 디크만의 연구에서 슐리펜 계획의 존재를 명기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주버는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빌헬름 디크만이 연구를 하고 있던 1930년대에는 슐리펜 계획이 실재했다는것을 의심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으며 결정적으로 디크만의 연구는 1904년까지 작성하다가 중단되었기 때문에 빌헬름 디크만이 실제로 1905년 이후의 전쟁계획에 대한 ‘1차사료’를 확인했는지는 불확실 하다는 것 입니다. 테렌스 주버의 기본적인 주장은 독일 군부가  1920년대에 ‘슐리펜 계획’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기밀자료였던 전쟁계획을 볼 수 없었던 당대의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았거나 하지 못했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슐리펜 계획’이라는 신화를 유지하려는 군 고위층에 의해 원사료에 대한 접근이 철저히 제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는 폴리가 제기한 병력 규모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폴리는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 I에서 23개 군단(46개 현역사단)과 19개 예비사단을 서부전선에 집중하도록 명시하고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은 96개 사단을 명시하고 있는데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은 물론 실제 독일군의 병력은 여기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1899년 4월 1일의 부대전개계획 I은 65개 사단, 그리고 1914년에 실제로 동원 가능했던 것이 72개 사단이니 슐리펜 계획이 실재했다치더라도 독일군의 병력은 24개 사단이나 부족하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폴리가 슐리펜 계획의 실재여부를 주장하면서 구체적인 전투서열 조차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가장 중요한 독일군 우익의 움직임도 중요한 비판의 대상입니다. 주버는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 I은 우익과 중앙의 병력 비율이 거의 1:1 수준인데 슐리펜 계획은 그렇지 않다는 점도 함께 지적합니다. 그리고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 I은 프랑스군이 아르덴느로  선제공격해 올 경우 역습에 나서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기 때문에 슐리펜 계획과 유사하다고 볼 수 없음을 지적합니다.

주버는 폴리의 주장을 이렇게 조롱하고 있습니다.

“1898년 비망록과 슐리펜 계획 비망록의 유사성은 돼지와 말의 유사성 정도이다. 1898년 비망록과 슐리펜 계획이 우익에 대해 신경쓰고 있는 정도는 돼지와 말의 유사성이 다리 네 개를 가진 정도인 것과 같다.”

다음으로는 독일의 국경지대 요새 문제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폴리는 독일이 서부전선 국경지대의 요새를 강화함으로써 우익으로 병력을 더 집중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주버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요새가 건설중이라는 것은 당시의 슐리펜도 알고 있었을 텐데 요새가 완성된 이후에야 슐리펜 계획에 반영되었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리고 실제 독일의 국경지대 요새들은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할 당시 완성되었다고 할 수준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국경지대 요새들이 1905년 비망록, 즉 슐리펜 계획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것은 어렵다는 것 입니다.

2011년 3월 14일 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1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S. 번외편 및 기타 사항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S-1


원래는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논쟁을 계속해서 1-8을 연재해야 되는데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일단 2003년에 들어와 다른 학자들이 논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 주버와 홈즈의 논쟁의 흐름이 다소 느려졌기 때문입니다. 2003년 부터는 주버와 로버트 폴리(Robert T. Foley), 그리고 아니카 몸바우어(Annika Mombauer)간의 논쟁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논쟁은 잠시 미뤄두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이번 글에서는 2003년 부터 시작된 테렌스 주버와 로버트 폴리의 논쟁을 다루겠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1
테렌스 주버vs로버트 폴리
Here comes a new challanger!!!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논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2003년, 독일 군사사를 전공하던 로버트 폴리가 새롭게 논쟁에 참여했습니다. 폴리는 논쟁의 주 무대인 War in History 10-2호에 The Origins of the Schlieffen Plan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전통적인 학설을 보완하는 견해를 내놓습니다.

폴리의 주된 논점은 슐리펜 계획의 실체는 인정하되 그 형성 시기를 훨씬 이른 시점으로 잡는 것 입니다. 폴리는 이미 1899년의 전쟁 계획에서 부터 슐리펜 계획의 근간이 되는 요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먼저 다이믈링(Berthold von Deimling)의 회고록에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다이믈링은 1900년 중령 계급으로 총참모부에 발령받아 전시 전투서열 작성의 감독과 전시 부대전개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했는데 업무가 업무인 만큼 슐리펜의 전쟁 계획 수립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이믈링은 1930년에 출간한 회고록에서 그가 총참모부에 발령받았을 때 이미 독일군의 주력을 서부전선에 집중하고 프랑스의 국경지대 요새선을 우회하기 위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공하는 기본 개념이 완성되어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폴리는 다이믈링이 회고록에서 언급한 계획은 바로 1899/1900년도 부대전개계획 I(Aufmarschplan I) 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연재를 시작 할 때 간략하게 이야기 하기도 했는데 부대전개계획 I은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중하는 계획이고 부대전계획 II는 동부전선에 조금 더 중점을 두는 계획입니다. 폴리는 주버와는 달리 부대전개계획 I이 서부전선에 집중한 계획이기는 하지만 제한적인 조건에서 양면전쟁도 고려한 계획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프랑스에 승리를 거둔 뒤 병력을 동부전선으로 재배치하는 개념이 들어있기 때문인데 이 해석은 제 개인적으로도 타당한 것 같습니다. 1899/1900년도 부대전개계획 I은 서부전선에 23개 정규군단, 19개 예비사단, 11개 기병사단, 13개 향토여단(Landwehr brigade)+1개 향토연대를 집중하고 동부전선에는 소규모의 부대만 배치했는데 이것은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 명시된 것과 유사합니다.

한편, 슐리펜은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을 염두에 두고 1898년 10월에 작성한 대 프랑스전 비망록에서 프랑스군이 개전 2주에서 3주차에 동원을 완료한 뒤 선제공격을 개시하는 상황을 가정하고 이에 대한 대응 방안을 구상했습니다. 슐리펜은 독일의 동원 완료는 4주가 걸릴 것이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선제 공격을 허용할 수 밖에 없는데 프랑스군의 주공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경지대의 요새선을 우회하기 위해 룩셈부르크와 벨기에 남부를 거쳐 독일로 향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슐리펜은 프랑스군 주력을 끌어들여서 우익의 1군과 2군, 그리고 좌익의 6군으로 양익 포위를 실시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익의 1군과 2군은 포위 섬멸을 위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공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이 선제공격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독일이 먼저 공격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는데 독일 또한 국경의 요새지대를 우회해야 했기 때문에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공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스위스는 처음부터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었는데 그 이유는 스위스군은 전쟁준비가 잘 되어 있고 프랑스로 이어지는 유라(Jura) 산맥은 요새화가 되어 있어 돌파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먼저 8개 군단으로 구성된 1군과 2군이 마스(Maas) 강을 도하해 프랑스군의 요새선의 후방으로 공격해 들어가고 1군과 2군의 좌익은 3군(4개 군단+2개 예비사단) 이, 우익은 7군(6개 예비사단)이 엄호합니다. 그리고 우익을 엄호하는 3군은 1군과 2군을 후속해 마스강을 도하합니다. 한편 8개 군단으로 구성된 4군과 5군은 자르브뤼켄(Saarbrücken)과 자르부르크(Saarburg)를 잇는 선에 전개해 상황이 유리할 경우 낭시(Nancy) 방면으로 진출, 낭시 동쪽의 요충을 점령한 다음 낭시와 툴(Toul)-에피날(Epinal) 사이를 돌파하도록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6군(4개 군단+6개 예비사단) 은 상 알자스에 전개해 독일군의 좌익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러시아군이 공격해 온다면 동부전선에서는 지연전을 실시하면 서부전선에서 증원군을 보내도록 했습니다.
폴리는 이것이 1905년 비망록의 내용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는 점도 함께 지적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익에 12개 군단과 8개 예비사단만 배치하고 있다는 점이 큰 차이입니다. 다음으로 우익의 우회기동도 1905년 비망록에 명시한 것 보다는 훨씬 작아서 프랑스군의 국경지대 요새선을 우회 포위하는데 그치고 있습니다. 폴리는 이러한 차이점 때문에 슐리펜 계획의 정설을 확립한 게르하르트 리터를 포함해 기존의 역사가들이 슐리펜 계획의 완성 시점을 훨씬 내려 잡은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차이점은 해당 문서가 작성될 시점의 정세를 반영한 것이며 핵심적인 내용은 1899/1900년의 부대전개계획과 1905년의 비망록 모두 차이가 없다고 봅니다. 필자는 먼저 1898/1900년 계획에서는 프랑스가 공격해 올 가능성을 높게 본 반면 1905년 비망록은 그러할 가능성을 낮게 보았다고 지적합니다. 1905년 시점에서 러시아는 러일전쟁으로 인해 프랑스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가 없었고 프랑스는 러시아 없이 단독으로 행동을 취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가 방어태세를 취하는 상태에서 독일군은 방어에 필요한 병력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1905년 비망록에서는 우익의 병력이 더 많아질 수 있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전쟁 계획도 중요한 변수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1899년의 14호 계획에서 독일과의 전쟁에 총 19개 군단과 12개 예비사단을 배정했습니다. 프랑스군이 독불국경에 병력을 밀집 배치하고 그 좌익을 상대적으로 취약하게 내버려둔 상태에서는 우회기동을 큰 규모로 실시하지 않더라도 포위 섬멸을 용이하게 실시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은 이미 1898년에 14호 계획의 상당 부분을 파악할 수 있었고 필자는 이 정보가 슐리펜의  1898년 비망록에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하 지만 프랑스가 1903년 3월 15호 계획을 채택하자 상황이 크게 바뀝니다. 이 계획에서 프랑스는 39개 보병사단과 12개 예비사단, 8개 기병사단을 4개 야전군으로 편성했는데 이 중 제4군을 독일군의 벨기에-룩셈부르크 침공을 대비해서 보다 북쪽으로 배치했습니다. 게다가 1905년 시점에서 독일군은 15호 계획에 대해서는 상세한 정보를 입수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독일 정보당국은 프랑스군이 독일군 우익의 돌파에 대응하기 위해 배치한 병력의 규모를 실제 이상으로 과대 평가하고 있었고 이에 맞춰 독일군의 우익을 더 강화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입니다.
다음으로는 독일의 요새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독일은 프랑스와의 전쟁에 대비해 알자스와 로렌의 방어를 강화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에 따라 메츠, 디덴호펜(Diedenhofen, 프랑스 명 티옹빌Thionville), 스트라스부르크의 요새가 강화되었습니다. 그리고 1899년 부터는 신형 화포에 대응하기 위해 기존의 요새를 강화하는 공사가 수행되었습니다. 폴리는 국경지대의 요새가 강화되었기 때문에 슐리펜은 그만큼 더 우익의 공세에 필요한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다시 요약하면 로버트 폴리는 슐리펜 계획의 기본 개념이 이미 1899/1900년에 확립되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폴리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학설을 지지하는 테렌스 홈즈가 슐리펜 계획이 완성된 시점을 1904년 이후로 보는 것과 이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 입니다.

2009년 6월 12일 금요일

독일군의 대구경 야포 도입과 벨기에 요새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

이 글은 지난 5월 말에 배군님이 쓰신 「노기는 무능했는가?」을 읽고 생각난 것이 조금 있어 쓰는 것 입니다. 원래 배군님의 글을 읽고 바로 쓰려고 했는데 저도 먹고는 살아야 하다 보니 조금 늦어졌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대한 글을 계속 쓰다 보니 예전에 썼던 글들과 겹치는 내용도 꽤 많은데 이 점은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이번 글은 1차대전 발발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많은 중포를 보유했던 독일군이 전쟁 초기 벨기에의 요새를 공격하면서 겪은 고생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먼저 대전 이전 독일의 중포병(Fuß-artillerie)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보불전쟁 이후 독일의 전쟁 계획은 거의 대부분 서부와 동부의 양면전쟁을 대비해 작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부의 전쟁계획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요소는 바로 ‘현대화된 요새’의 건설이었습니다. 프랑스는 보불전쟁 이후 기본적으로 독일에 대해 방어적인 전략을 취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1874년 베르덩(Verdun), 툴(Toul), 에피날(Epinal), 벨포르(Belfort)를 연결하는 요새들을 현대화하는데 필요한 예산을 승인했습니다. 프랑스가 국경지대의 요새들을 현대화 하자 독일 측은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독일 육군 총참모장 대(大) 몰트케(Helmuth von Moltke)는 1879년 4월에 작성한 작전 개요에서 프랑스의 국경 요새들의 위협을 높게 평가하고 서부에서는 전략적 방어를 취하는 대신 동부에 주력을 집중하도록 했습니다.[Zuber, 2002, p.74] 아무래도 프랑스군의 방어에 휘말리는 위험을 감수하기 보다는 동부전선에서 과감한 기동전으로 승부를 보는게 현명하다는 판단 이었겠지요.
서부에서 전면 방어를 취한다는 몰트케의 계획은 1882년 부참모장(Generalquartiermeister)*으로 취임한 발더제(Alfred von Waldersee)에 의해 비판받았습니다. 발더제는 몰트케의 기본적인 구상을 바꾸고자 노력했지만 몰트케는 1887년 까지도 양면전쟁 발발시 서부에서 방어를 취하고 여건이 허락하면 반격한다는 개념을 버리지 않았습니다.[Zuber, 2002, pp.95-96]

요새의 근대화로 프랑스군의 방어력은 높아진 반면 독일군의 공격 능력이 발전하는 속도는 이것을 따라 잡지 못했습니다. 210mm 구포(Möser)의 C/83 유탄은 1883년에 있었던 사격시험에서 강력한 위력을 보이며 기존의 요새들을 구식화 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신형 고폭탄의 등장으로 몰트케와 발더제는 공세에 역점을 두어 전쟁계획을 수정합니다. 그러나 1880년대 중반부터 요새를 철근과 콘크리트로 강화하자 C-83 유탄은 순식간에 구식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프랑스는 1887년부터 1888년에 걸쳐 베르덩과 벨포르 등 국경의 주요 요새들에 콘크리트와 철근을 이용한 근대화 공사를 했습니다.[Brose, 2001, p.39] 무엇보다 당시 포병감으로 있던 보익트-레츠(Julius von Voigts-Rhetz) 포병대장이 120mm 유탄포 이상의 중포는 필요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점은 독일군의 중포 개발에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Brose, 2001, p.74]

발더제의 뒤를 이어 총참모장이 된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은 몰트케와 발더제의 계획을 이어받아 전쟁계획에서 공세적인 면을 강화했습니다. 슐리펜의 1893년 전쟁계획은 서부에 16개 군단과 15개 예비사단(총 48개 사단)을, 동부에는 4개 군단과 6개 예비사단(총 15개 사단)을 배치하고 주력으로 베르덩과 툴 사이를 돌파하는 것을 골격으로 했습니다.[Zuber, 2002, pp.143-144] 슐리펜의 1893년 계획안은 프랑스의 국경 요새선이 상대적으로 강력한 에피날-벨포르는 주력이 지향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쨌든 간에 ‘상대적으로 약한’ 베르덩과 툴의 요새선은 돌파해야 한다는 점 이었습니다. 1890년대 초반까지 독일군 포병의 주력이었던 90mm C/73의 경우 고폭탄도 발사할 수는 있었지만 탄도 자체가 직선에 가까워 야전축성을 상대로는 효과가 제한적이었습니다. 새로 개발된 77mm C/96도 근본적으로는 C/73의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슐리펜은 참호 등 적의 야전축성에 대한 효과적인 공략을 위해 유탄포(Howitzer)에 대한 연구를 지시했고 그 결과 105mm le.FH 98이 채용됩니다.[Brose, 2001, pp.65-67] 그러나 C/96에 비해 야전 기동성이 떨어지는 105mm 곡사포는 기동전을 중시하는 독일군의 특성상 환영 받기 어려운 존재였습니다. 1891년부터 1899년 까지 독일 육군 야전포병감을 지낸 호프바우어(Ernst Hoffbauer)는 처음부터 야전포병에 105mm le.FH 98을 채용하는데 부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호프바우어는 포병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적 포병의 제압이라고 생각했으며 보병과의 유기적인 협동 작전을 위해 기동성을 강조하는 입장이었습니다.[Echevarria II, 2000, pp.50-51] 군부 내의 병과간 알력, 예산 등등의 문제로 le.FH 98가 정식으로 양산에 들어간 것은 1900년에 들어가서 였습니다.[Brose, 2001, p.68]
야전포병의 대구경화와는 별도로 210mm 이상의 중포 개발은 계속해서 난항을 겪었습니다. 당시 황제였던 빌헬름 2세는 프랑스 요새의 지붕에 구멍을 뚫어줄 중포병을 육성하는데 왕성한 의욕을 보였지만 독일도 명색이 의회를 가진 나라이다 보니 모든게 황제의 마음대로 돌아가질 않았습니다. 1893년 독일 제국의회(Reichstag)은 중포병에 배정된 예산을 삭감해 버립니다.[Brose, 2001, p.76] 1890년대 초중반 프랑스와 러시아의 개량된 요새들은 2.5-3m 두께의 콘크리트 지붕을 가지고 있었는데 1894년에서 1896년에 걸친 시험에서 독일군의 305mm 구포는 1.5m 이상의 콘크리트 벽을 파괴하지 못했습니다. 독일군은 305mm 구포의 성능에 실망했지만 어쨌든 중포는 필요한지라 1896년에 9문을 주문합니다.[Brose, 2001, p.78]

슐리펜의 1899년 계획은 주력 부대의 진격로를 변경했습니다. 슐리펜은 프랑스군의 동원 완료가 독일군 보다 빠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고 슐리펜이 1898년에 작성한 작전 개념안은 프랑스군의 선제 공격을 저지한 뒤 반격할 것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슐리펜이 예측한 프랑스군의 예상 공격로에는 벨기에와 룩셈부르크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프랑스군이 이 방향으로 공격해 온다면 독일군의 반격도 이 지역에서 실시될 계획이었습니다. 아르덴느를 중심으로 한 베르덩 이북의 지역은 현대화된 요새가 별로 없어 상대적으로 기동전에 유리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벨기에를 통한 우회 기동의 개념은 1899년 계획을 통해 구체화 되었습니다. 1899년 계획은 프랑스와의 전쟁이 발발할 경우 서부에 58개 사단, 동부에 10개 사단을 배치하도록 했습니다.(양면 전쟁이 발발할 경우에는 동부에 23개 사단)[Zuber, 2002, pp.160-162] 이후 슐리펜은 벨기에를 통한 우회 기동을 더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합니다. 슐리펜이 퇴역하기 전 까지 시행한 여러 차례의 기동훈련에서는 벨기에를 통한 반격이 실시되었고 벨기에를 통한 우회기동은 슐리펜의 뒤를 이은 소(小) 몰트케 시기에도 꾸준히 연구되었습니다. 1890년대 까지도 베르덩 북쪽으로 현대화된 요새가 거의 전무했기 때문에 기동훈련에서도 210mm 이상의 중포를 동반하는 상황은 거의 없었습니다.

육군의 기동계획이 요새화가 상대적으로 낮은 지역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중포병은 1906년까지도 찬밥이었습니다. 중포병감 플라니츠(Heinrich Edler von der Planitz) 장군은 중포병 대대를 증강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했지만 육군과 제국의회 양쪽으로부터 무시당합니다. 1903년의 경우 독일 육군의 23개 군단 중 8개 군단은 예하에 중포병이 단 1개 포대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150mm 이상의 중포가 조금씩이라도 도입된 덕에 독일군은 다른 유럽군대들에 비해 우위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신형 150mm 유탄포인 s.FH-02의 도입이 시작되어 1904년에는 최초의 10개 포대가 전력화 되었습니다.[Brose, 2001, p.99]
중포병에 비해 야전포병은 중요시 되었기 때문에 야전포병의 장비인 105mm 포의 도입은 신속히 도입되었습니다. 1910년에는 le.FH 98의 개량형인 le.FH 98/09가 도입되었고 1913년까지 총 664문의 105mm 유탄포가 도입되었습니다. 같은 시기 프랑스군은 독일군 보다 열세에 있었고 러시아군의 경우는 동급 제대에 105mm급의 포가 단 1문도 없었다고 하지요.[Brose, 2001, p.149]
플라니츠가 1902년에 퇴역한 뒤에는 플라니츠가 중포병감으로 있을 때 그의 참모장으로 있었던 다이네스(Gustav Adolf Deines) 대령과 플라니츠의 후임 중포병감인 페어반트(von Perbandt)가 총참모부 내에서 중포병의 증강을 주장합니다.

한편, 벨기에를 통한 우회기동 계획이 완성되어 갈수록 리에쥬(Liege) 요새의 점령 필요성이 커졌습니다. 리에쥬 요새를 측면에 남겨두고 기동할 경우 독일군 측면에 대한 반격의 거점이 될 위험성이 컸습니다. 벨기에를 침공할 경우 영국의 개입은 당연시 되었기 때문에 리에쥬가 반격의 거점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공세 초기에 점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러일전쟁 당시 뤼순 요새 전투의 결과 대구경 공성포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독일군은 러일전쟁, 특히 뤼순 요새 전투에서 일본군이 야전에 비해 더 높은 비율의 대구경 화포를 사용해 성과를 거둔 것에 주목했습니다.[Echevarria II, 2000, p.143]

1906년 이후 공성포 개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중포병 병과의 장교인 막스 바우어(Max Hermann Bauer) 였습니다. 바우어는 뤼순 요새 전투를 심층적으로 연구한 결과 대구경 공성포의 필요성을 확신했고 총참모부에 근무하게 되자 대구경 공성포의 개발을 건의해 개발 승인을 얻어냅니다. 그 결과 1909년 4월 크룹(Krupp)사가 제작한 420mm 감마(Gamma Gerät)가 시험 사격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바우어의 상관이었던 루덴도르프도 감마의 파괴력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루덴도르프는 420mm 감마와 305mm 베타를 충분히 도입해 벨기에의 요새들은 물론 베르덩-툴-낭시에 이르는 프랑스 국경지대의 요새선도 우회할 것 없이 개전 초반에 격파해 버리자는 제안을 하기까지 합니다.[Brose, 2001, p.169]

그러나 대량의 공성포를 단기간에 도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개전 직전까지 4문의 감마와 경량화된 420mm 공성포, M-Gerät 2문이 도입되는데 그쳤고 305mm 베타의 도입은 루덴도르프가 제안했던 16문 대신 12문만이 승인됩니다.

독일군의 중포 도입은 총참모부의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상당기간 지연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전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할 당시 독일육군은 중포병 예하에 총 140개 포대를 두고 있었습니다. 이 중 군단 예하 중포병이 총 27개 대대였고 야전군 사령부 예하의 중포병은 총 15개 대대였습니다.[Cron, 2006, p.142] 독일군의 주적인 프랑스군은 독일 다음으로 중포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지만 독일군과의 격차가 매우 컸습니다. 단적인 예로 독일군은 군단 예하에 16문의 150mm 유탄포를 보유한 반면 개전 초기 프랑스군은 군단 급 제대에 155mm 유탄포가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Echevarria II, 2000, p.146]

개전 초기 독일군은 리에쥬 요새를 단기간에 점령하기 위해 6개 여단, 4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신속한 기동을 위해 150mm와 210mm 구포만을 화력지원에 투입한 것은 큰 실책이었습니다. 독일군은 8월 5일부터 400문의 화포를 동원해 리에쥬를 이틀간 공격했지만 함락하지 못하고 4천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당초 예상으로는 150mm와 210mm로도 충분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리에쥬를 둘러싼 개별 요새들의 방어력은 독일군이 동원한 화포로 격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리에쥬의 벨기에군이 병력 부족으로 도시 전체를 방어하는 대신 개별 요새의 방어로 전환했기 때문에 시가지는 독일군의 손에 떨어졌으나 요새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독일군은 초기 공격이 실패한 뒤에야 요새를 격파하기 위해 대구경 공성포를 동원했는데 M-Gerät는 리에쥬 요새 공격이 시작될 때 까지도 훈련 중이었고 305mm 공성포는 숫자가 불충분해 오스트리아로부터 4문을 빌려와서 겨우 6문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M-Gerät는 8월 12일 리에쥬에 도착했고 그 강력한 위력으로 13일에는 뮤즈강 우안의 요새가, 16일에는 뮤즈강 좌안의 요새가 각각 함락되었습니다.[Strachan, 2003, pp.211-212] 독일군은 리에쥬를 함락하긴 했으나 비싼 대가를 치렀습니다. 요새 공격에 투입한 6개 여단은 모두 숙련도가 높은 현역 여단이었습니다. 또한 요새를 제압하기 위해 대량의 탄약이 소비되었는데 특히 210mm 포탄의 소모가 막심했습니다.[Brose, 2001, p.189] 그리고 리에쥬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리에쥬의 모든 요새들이 함락된 뒤에도 독일군은 진격로 상의 벨기에 요새들을 계속해서 격파해야 했습니다.

독일군은 유럽 국가들 중 대구경 화포의 도입이 가장 앞서 있는 나라였고 러일전쟁의 교훈을 가장 잘 이해한 나라였지만 개전 초기 벨기에의 요새선을 돌파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독일군은 전쟁 초반에 대량의 210mm 구포를 투입했으며 이것은 다른 어떤 나라 보다 월등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강화된 요새를 효과적으로 제압 하는데는 불충분 했습니다.


참고문헌
Eric Dorn Brose, The Kaiser’s Army :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Herman Cron/C.F.Colton(trans), Imperial German Army 1914-18 : Organisation, Structure, Orders of Battle, Helion, 1937/2006
Antulio J. Echevarria II, After Clausewitz : German Military Thinkers before the Great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0
David G. Hermann, The Arming of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First World War,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6
Hew Strachan, The First World War, Vol I. To Arms,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Terence Zuber,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 : German War Planning 1871-1914,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독일 제2제국 시기 독일군 총참모부의 Generalquartiermeister를 제 개인적으로 부참모장(副參謀長)으로 번역해서 쓰고 있는데 사실 아주 잘 맞는 번역어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실제 담당하는 업무를 고려한다면 아주 틀린 것도 아닌 것 같긴 한데... 좋은 생각 있으신 분 계십니까?

사족 하나. 이번에 참고한 서적 중 Terence Zuber의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은 슐리펜 계획에 대해 매우 도발적인 가설을 던지는 재미있는 저작입니다. 이미 읽어 보시고 이 책의 내용을 잘 알고 계신 분들도 꽤 계실 것 입니다. 나중에 Zuber의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과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에 대한 책 소개를 쓸 생각입니다.

2008년 12월 18일 목요일

러시아군의 군수물자 부족문제 : 탄약을 중심으로, 1914~1917

1차대전 발발 직전 러시아는 거의 대부분의 군수물자를 국영공장에서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산업화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민간공업이 육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대부분의 생산 부담은 국영공장이 짊어 지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 입니다. 그러나 이런 체제 아래서는 탄약 수요가 급증할 경우 신속히 대처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쟁이 발발하자 그대로 현실이 됩니다.

1890년에서 러일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 러시아의 군수공업은 해외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러시아의 뒤떨어진 공업능력은 소총 조차도 충분히 조달할 수 없었는데 단적인 예로 모신-나강 소총이 처음 채용되었을 때 러시아 정부는 육군의 소요량을 신속히 조달하기 위해서 프랑스와 벨기에에 소총 생산을 발주했습니다. 그 결과 러시아군은 신속히 모신-나강 소총으로 기본화기를 교체했고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예비사단 까지도 신형소총을 지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필요한 소총을 획득한 뒤에는 외국으로 부터의 주문을 중단하고 국영조병창을 통해서만 소총을 생산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보충용 소총을 생산하는데 그쳤고 전쟁 발발시 수요량을 충족시킬 능력은 없었습니다. 또 러시아의 TNT 생산은 러시아에 설립된 독일 회사의 톨루엔(toluene)에 크게 의존했는데 독일 기업들은 톨루엔 생산에 필요한 석유제품을 독일에서 들여오고 있었습니다. 독일과 전쟁이 벌어진다면 러시아의 폭약생산에 차질이 빚어질 것은 뻔한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자체적인 톨루엔 생산능력 확충보다는 당장 편한 독일 기업으로 부터의 도입에 계속 의존했습니다.
결국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 정부는 급격히 증대된 군수물자의 수요를 채우기 위해 외국 기업에 대한 발주를 늘리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러시아 육군(전쟁성)의 경우 1903년에 260만 루블을 무기 수입에 사용했는데 이것은 1904년에는 1690만 루블로, 1905년에는 7310만 루블로 늘어납니다. 러시아 해군은 1903년에는 1천만루블을 무기 수입에 사용했고 1905년에는 6800만 루블을 수입에 사용합니다. 해외로 부터의 군수물자 수입은 발주에서 도착까지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전쟁 중에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러시아 정부는 러일전쟁이 종결된 뒤 군대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군수물자 생산능력의 확충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때문에 1차대전 발발 직전 러시아 정부는 미래의 전쟁에서는 러시아가 자체적으로 충분한 군수물자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전쟁상인 수호믈리노프(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ухомлинов)는 ‘장차 벌어질 전쟁에서 러시아 포병은 포탄이 부족하다고 불평할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포병은 많은 양의 장비를 보급받고 있으며 포탄의 보급(체제)도 잘 조직되어 있다’고 호언장담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군수공업은 여전히 생산능력이 부족하며 외국의 기술과 중간 생산재에 대한 의존이 높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쟁이 발발하자 바로 드러나 버립니다.

1차대전이 발발하자 모든 참전국의 군지휘부를 경악시킨 것은 전쟁 이전의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물자소모였습니다. 전쟁 준비가 가장 충실히 되어 있었다는 평을 받는 독일의 경우 포 1문 당 6개월 소요량으로 1천발의 포탄을 배정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전쟁이 발발한 뒤 6주만에 모조리 소비되어 버리고 일선 부대들은 탄약 부족으로 작전 수행이 어려운 상황에 처합니다.
러시아군 수뇌부 또한 독일과 비슷하게 유럽전선에서는 단기결전으로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고 포 1문당 1천발의 포탄이 있으면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충분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 포병은 전쟁 전 기간 동안 1,276문의 포를 투입해 918,000발의 포탄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포 1문당 평균 700발의 포탄을 소비하는데 불과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1천발도 ‘너무 많은 것이 아니냐’하는 의문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총탄의 경우 1개월에 5백만발이면 충분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탄약 뿐 아니라 전투장비의 소요량도 낙관적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소총의 경우 독일과의 전면전이 발발할 경우 동원병력 450만명분과 연간 보충 70만정 만 생산하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 하지만 전선의 물자 소요량은 엄청났습니다. 당초 520만정이면 충분할 것으로 예상한 소총의 경우 전쟁 기간 중 추가적인 병력 동원으로 550만정이 더 필요했으며, 여기에 전쟁 기간 동안의 손실을 보충하는데 720만정이 더 필요했다고 합니다.

전쟁 발발 이전의 낙관적인 예상은 전쟁이 시작되자 마자 철저히 깨지게 됩니다.

러시아군은 병력동원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의 예상보다 더 빨리 공세에 나설 수 있었지만 군수보급은 병력동원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1914년 8월부터 총참모부는 전쟁상 수호믈리노프에게 예상 보다 탄약 소요가 많을 수 있다고 경고했으나 수호믈리노프의 대답은 이랬다고 합니다.

“아껴 쓰는 방안을 강구할 수 는 없는가?”


사실상 러시아군은 소모전에 대한 대비가 안된 상황에서 전쟁에 돌입하게 된 것입니다.

러시아의 국영조병창은 물론 민간 기업들의 생산량을 합치더라도 전선의 요구량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1914년 9월 9일에 수호믈리노프가 러시아의 주요 기업관계자들을 소집해서 총 665만발의 포탄을 주문하고 한달 평균 150만발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러시아 기업들의 생산능력으로는 한달에 최대 50만발을 생산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결국은 러일전쟁 때 처럼 전선의 소요량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외국으로부터 군수물자를 도입하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러일전쟁과는 상황이 달라서 영국이나 프랑스도 자국군의 요구량을 생산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전쟁 초 러시아로부터 1백만발의 포탄을 주문 받았지만 1915년 9월까지 겨우 5천발을 보내는데 그쳤습니다. 아직 전쟁에 개입하지 않은 미국의 상황은 그나마 조금 나은 편이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의 회사들은 1916년 6월까지 러시아로부터 주문 받은 910만발의 76.2mm 포탄 중 875,000발을 생산해서 보냅니다 하지만 전쟁으로 발틱해가 봉쇄되었기 때문에 이것들은 아르항겔스크나 블라디보스톡으로 수송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열악한 철도망 때문에 미국에서 도착한 포탄들은 항구에 하역된 뒤 전선으로 수송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다른 군수물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러시아정부는 러시아의 부족한 소총 및 야포 생산능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미국, 영국 등에 소총과 야포를 대량으로 발주했는데 역시 외국 기업들은 러시아 정부의 발주량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1915년에 미국의 윈체스터에 30만정, 레밍턴에 150만정, 웨스팅하우스에 150만정의 모신-나강 소총의 생산을 발주했으며 각 기업들에게 1915년에는 1개월에 10만정, 1916년 까지 1개월에 20만정을 생산할 수 있도록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아직 군수물자 생산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1917년 3월까지 윈체스터는 주문량의 9%를, 레밍턴과 웨스팅하우스는 12%를 납품하는데 그쳤습니다.

러시아의 자체적인 생산은 물론 수입조차 어려워지자 전선의 탄약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러시아군은 1914년 9월 까지만 해도 한달 평균 150만발의 포탄을 생산하면 충분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같은 해 10월에는 이것을 다시 250만발로 늘려 잡았고 결국에는 한달에 최소 350만발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본국의 탄약 생산이 차질을 빚고 있는 동안 전선의 러시아군은 독일군의 ‘물량공세’ 앞에 피박을 쓰게 됩니다. 1915년 독일군의 춘계 공세 당시 막켄젠(August von Mackensen)의 11군은 1백만 발의 포탄을 퍼부었는데 독일군의 주공을 얻어맞은 러시아 3군은 그 10분의 1도 안되는 포탄만 보급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독일군의 강력한 공세에 처한 러시아군은 급속히 붕괴되어 버립니다. 1915년 8~9월에 있었던 북부전선의 독일군 공세에서도 갈비츠(Max von Gallwitz)의 12군은 3백만발 이상의 포탄을 사용했는데 러시아군은 90만발을 보급받는데 그쳤습니다. 갈비츠의 공세로 러시아군은 빌뉴스를 상실하고 밀려납니다. 단순히 야포의 숫자로만 비교하면 독일군이 압도적 우위는 아니었지만 중요한 것은 포탄의 보급 문제였습니다.
게다가 러시아군은 요새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요새에 충분한 탄약을 비축하는데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야전군은 포탄 부족으로 고전하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부전선의 기동전 하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한 요새들에는 많은 포탄이 비축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노보게오르기프스크(Новогеоргиевск)와 코브노(Ковно) 요새가 함락되었을 때 독일군은 이 두 요새에서만 200만발에 가까운 포탄을 노획했습니다.
포탄 뿐만 아니라 소화기의 탄약도 부족했습니다. 그 결과 노획무기의 사용이 빈번했습니다. 예를 들어 1916년에 러시아 8군 예하의 2개 군단은 노획한 오스트리아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탄약보급이 잘 되지 않으니 아예 대량으로 노획되는 오스트리아 탄약을 사용하기 위해 부대 단위로 오스트리아 소총을 장비한 것 입니다. 물론 소총 자체의 보급 문제도 있었다고 있긴 했습니다만.
군수물자의 부족이 러시아군 패배의 모든 원인은 아니지만 심각한 문제였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급박한 상황에 직면한 러시아정부는 탄약생산 증대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정부의 대대적인 투자에 의해 러시아의 자체적인 탄약 생산은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1915년 2월에는 탄약 생산을 감독하기 위해 포병총국(Гравное Артиллерийское Управление) 예하에 폭약류 생산을 위한 위원회를 조직하기도 합니다. 러시아전쟁성은 1914년 9월 러시아 기업들에 1915년 10월까지 포탄의 월간 생산량을 1백만발로 늘리는 조건으로 1천만 루블을 투자합니다. 이 계획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914년 가을 한 달에 45만발의 포탄을 생산했는데 1915년 7월에는 90만발, 같은 해 9월에는 1백만발을 생산하는데 이릅니다. 폭약생산은 1915년 2월에 96톤이었으나 7월에는 820톤으로, 그리고 10월에는 1,366톤으로 급증했고 생산량 증가의 대부분은 러시아 민간기업에 힘입은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 조차 전선의 수요에는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 입니다.
러시아의 화약류 생산에 지장을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은 황산을 만드는데 필요한 황철석의 조달 문제였습니다. 러시아는 전쟁 이전에 스웨덴과 터키를 통해 황철석을 수입하고 있었고 이것은 전체 수요의 3분의 1 규모였습니다. 전쟁이 터지자 전자는 발틱해의 봉쇄로 수입이 끊기고, 후자는 적국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황철석 수입문제로 발틱해 연안에 건설된 러시아의 황산공장들이 독일군의 진격으로 점령되거나 점령을 피해 이전하는 통에 1915년 초에는 황산 조달이 위험할 정도로 격감했다고 합니다. 물론 나머지 2/3을 차지하는 우랄 지역은 독일군의 위협으로 무사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발트해 연안의 생산시설 상실과 전체 수요량의 30%가 일시에 사라진 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정부는 우랄 지역의 황철광 생산을 증대시켜 1915년 말에는 황산 생산문제가 해결되고 황산 생산량은 1916년 3월까지 월간 2만톤 이상으로 증가합니다.
한편, 독일군의 화학무기 사용도 심각한 위협이었습니다. 서부전선의 영국군 및 프랑스군과 달리 러시아군은 전쟁 기간 중 방독면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독일군이 1915년부터 동부전선에서 본격적으로 화학무기를 사용하자 러시아군도 이에 대응해 화학무기 개발과 방독면 생산을 시작합니다. 러시아는 독일군의 화학탄 사용에 맞서 1915년부터 염소가스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일반 포탄과 마찬가지로 화학탄 생산능력도 부족했습니다. 러시아군이 1915년 전 기간을 통틀어 사용한 화학무기는 200톤 정도였는데 이것은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단 한차례의 공격작전에 사용하는 규모에 불과했습니다. 예를 들어 1915년 4월의 이프르 전투에서 독일군이 첫날 사용한 염소가스는 150톤 정도였습니다.

※ 동부전선의 초기 화학전에 대해서는 ‘독일군의 화학무기 시험 : 1914~1915’에서 간단히 언급한 바 있습니다.

러시아 정부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러시아의 포탄 생산량은 1916년에는 월간 185만발 까지 증가했습니다. 러시아 측의 주장에 따르면 1차대전 기간 중 러시아군이 사용한 7230만발의 포탄 중 5660만발이 러시아가 자체적으로 생산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러시아군의 포탄 생산은 주로 76.2mm에서 122mm 구경의 포탄에 집중되었고 203mm 이상의 중포에 필요한 포탄의 생산은 전쟁이 끝날 때 까지도 문제였다고 합니다. 기묘하게도 포병을 중시하는 러시아군이 1차대전에서는 독일군에게 화력 면에서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1차대전 당시의 뼈저린 경험은 이 전쟁을 경험한 미래의 소련 장군들에게 소모전의 중요성을 각인시켰습니다. 러시아군의 기동전은 독일군의 기동전과 달리 소모의 개념도 중요한 요소로 들어가 있는데 이것은 1차대전의 동부전선 경험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투하체프스키 같은 군인들은 1차 5개년 계획기간 동안 스탈린 이상으로 군수물자 생산능력의 확충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비록 전쟁에는 패배했지만 제정러시아가 남긴 유산은 소련에게 거의 대부분 계승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노동자입니다. 1차대전을 통해 러시아의 화학공업은 양적으로 팽창했습니다. 1913년에 33,000명이던 화학공업 부문의 노동자는 1917년에는 117,000명으로 증가합니다. 이렇게 늘어난 노동자들은 소련의 산업화 초기 화학공업의 중핵이 되었습니다.
소련인들은 1차대전에서 얻은 교훈을 잘 살린 결과 2차대전에서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독일군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막연히 1차대전의 경험만 가지고 러시아를 과소평가한 독일인들은 그 대가를 혹독히 치루게 되지요.


참고문헌
Nathan M. Brooks, ‘Munitions, The Military, and Chemistry in Russia’, Frontline and Factory : Comparative Perspectives on the Chemical Industry at War 1914~1924, Springer, 2006
Martin van Creveld, ‘World War I and the Revolution in Logistics’, Great War, Total War : Combat and Mobilization on the Western Front, 1914~1918,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Jonathan Grant, ‘Tsarist Armament Strategies 1870~1914’, The Journal of Soviet Military Studies, 4-1(1991)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Indiana University Press, 1992/2000
Norman Stone, The Eastern Front 1914~1917, Penguin Boosk, 1975/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