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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30일 월요일

1차대전 이전 프랑스군의 포병

배군님이 쓰신 마른전투와 1차대전 직전 프랑스군의 공격 위주의 군사사상에 대한 글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침 배군님의 글에 전쟁직전 프랑스군의 포병 이야기가 잠깐 나온 만큼 편승하는 포스팅을 하나 해보려 합니다.

프랑스 육군이 1차대전 발발당시 105mm급 이상의 대구경 야포에서 독일군에게 압도된 원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만 중요한 원인으로는 프랑스 육군이 전술교리의 문제 때문에 대구경 야포의 필요성을 경시했다는 점이 꼽히고 있습니다.

1차대전 이전 프랑스의 야포 운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랑글루아(Hippolyte Langlois) 장군이었습니다. 랑글루아는 1892년에 출간한 ‘야전포병과 타 병과에 대하여(L’Artillerie de Campagne en liaison avec les autres armes)’라는 저작에서 미래의 전장에서 속사가 가능한 야포가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가를 고찰하려 했습니다. 랑글루아는 전투가 ‘서전(緖戰)’, ‘포격전’, ‘소모 전투’, ‘결정적 공격’의 네 단계로 이루어 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중 전투의 ‘서전’에서 포병은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는 전위부대를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며 신속한 화력지원을 위해 전위의 보병 및 기병과 밀접한 접촉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야전부대가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무전기술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포병이 보병 및 기병과 긴밀한 협력을 하기 위해서는 관측병의 시야 범위내에서, 적을 직접 보고 사격할 수 있는 거리내에 배치되어야 했습니다. 랑글루아는 이러한 환경하에서는 기동이 편리하고 속사가 가능한 경량급 화포가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무거운 대구경 야포는 이러한 환경하에서는 사실상 쓸모가 없었습니다. 대구경 야포의 장점은 긴 사거리인데 적을 직접 보고 사격해야 하는 조건에서는 별 도움이 안되는 능력이니 말입니다.
두 번째 단계인 ‘포격전’ 단계는 양측의 주력이 전장에 집결하여 포격전을 가하는 단계인데 랑글루아는 이 두번째 단계에서 적의 포병을 격파하고 화력의 우세를 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으며 이 경우에도 속사가 가능한 경량급 야포가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 번째 단계인 ‘소모 전투’ 단계에서 포병은 공격하는 보병을 직접 지원하며 보병이 기동을 완료하면 새로운 진지에서 적군의 반격을 분쇄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랑글루아는 역시 이 단계에서도 속사가 가능한 경량급 야포가 유리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포병이 적 소화기의 유효사거리까지 전진해 화력지원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신속한 사격이 가능해야만 적의 보병을 무력화 시킬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1)
그리고 랑글루아의 저작이 출간된 뒤에 채용된 75mm Mle 1897은 이러한 교리에 적합한 장비였습니다. 우수한 속사능력을 갖춘 이 포는 당시 독일군 사단 포병의 주력장비인 77mm 야포를 단숨에 구식화 시켰습니다.

랑글루아의 견해는 당시의 군사기술을 고려한다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포병이 적 보병의 소화기 사거리내에서 작전을 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이미 보불전쟁의 여러 전투에서 입증된 바 있었습니다. 예를들어 1870년 8월 18일의 그라벨로(Gravelotte) 전투에서 만슈타인(Albrecht von Manstein)이 지휘하는 제9군단의 예하 포병대는 프랑스군의 소화기 공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물론 이 전투는 북독일연방측의 승리로 끝났으며 프랑스군 사상자의 70%가 독일 측의 포격에 의한 것이었다고 전해질 만큼 포병의 위력을 과시한 전투였지만 동시에 포병 전술의 한계를 보여준 전투이기도 했습니다.2)

러일전쟁의 결과도 프랑스군의 포병교리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일본군 포병은 엄폐된 포진지에서 사격을 했기 때문에 꽤 재미를 봤으나 포병 운용의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군에게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러시아군은 속사가 가능한 경량급 야포가 거둔 성과에 더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이 때문에 러일전쟁 이후의 러시아군 교리에서는 여전히 포병이 최대한 전방에 배치되어 적 포병과 보병을 제압해야 한다고 명시했습니다.3)
프랑스군도 러시아군과 동일한 결론을 내렸으며 러일전쟁의 전훈을 통해 랑글루아의 교리가 타당하다는 믿음을 더 강화했습니다. 당시 프랑스군 포병의 훈련을 보면 적으로부터 1800m 떨어진 거리에서 사격하는 경우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포병 자체의 안전을 희생하더라도 공격하는 보병에게 최대한의 화력지원을 제공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리고 포병의 방어는 포방패를 야포에 다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러일전쟁 직후까지도 포병이 후방에 위치할 경우 보병과 원활하게 소통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는 점도 프랑스군이 포병의 전진 배치를 선호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유선전화가 도입되고 있었으나 신뢰성 문제와 전화선이 포격에 절단될 수 있다는 점이 문제로 제기되었습니다.4)

그러나 독일군이 105mm급 야포의 생산을 늘려갔기 때문에 프랑스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뒤늦게 대구경 야포의 개발과 배치에 들어가게 됩니다. 독일군은 이미 1900년부터 105mm l.FH 98을 양산하고 있었으며 1910년에는 개량형인 l.FH 98/09가 배치되기 시작했습니다. 1911년에는 독일군의 23개 군단에 3개 포대로 구성된 105mm 유탄포 대대가 배속되었으며 이보다 더 위력적인 150mm s.FH 02는 1913년까지 400문이 배치되었습니다.5)

1910년 총참모장에 취임한 조프르(Joseph Joffre)는 1911년 최고군사평의회(Conseil Superieur de la Guerre)에서 독일의 대구경 야포 도입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군도 대구경 야포의 배치에 주력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조프르 뿐 아니라 새로 전쟁부 장관에 임명된 메시미(Adolphe-Marie Messimy) 또한 프랑스군이 중포 보유량에서 독일군 보다 열세에 있다는 점을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6)
그러나 중포에 대한 프랑스군의 인식은 여전히 낮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포병장비 도입을 담당하고 있던 총참모부 제3국의 국장 레미(Rémy) 대령은 75mm Mle 1897의 우수성을 확신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레미 대령은 독일군 포병의 3/4는 여전히 77mm 야포를 장비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프랑스군은 독일군에 대해 현저한 우위를 가지고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105mm 유탄포의 도입에 긍정적이었던 포병위원회의 위원장 라모트(de Lamothe) 장군도 이 이상의 대구경 야포는 야전포병이 아닌 공성포병의 장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7)

물론 군단포병 이하에서 운용되는 야전포병과 군급에서 운용되는 공성포병을 엄격히 분리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일반적인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120mm 이상의 구경은 공성포로 보았으며 이것은 150mm 중유탄포를 군단급에 배치한 독일군과 큰 차이가 있는 것 이었습니다. 이미 프랑스는 전쟁 시작 전부터 독일군의 동급 제대에게 한 수 지고 들어가는 모양이었습니다. 또한 독일군은 공성포병으로 분류하는 중포병 부대도 군단의 지휘하에 운용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8)

프랑스는 독일군에 비해 중포의 개발과 배치에서 뒤처져 있었으며 야전 중유탄포의 개발은 1911년 7월 27일에 시작되었습니다. 전쟁부는 신형 야전유탄포의 시제품의 사격시험 날짜를 1911년 12월 31일로 잡았으나 무리라는 것이 판명되었고 국영조병창을 고려해 사격시험 날짜를 4개월 늦추는 방안이 고려되었습니다. 결국은 1912년 2월 6일에 총 여섯 종류의 야포에 대한 사격시험이 실시하도록 결정됩니다. 이 시험에 참여할 것은 국영조병창의 120mm 유탄포, 105mm 유탄포, 120mm 캐논, 그리고 포신을 교체하는 방식의 75mm 야포/ 120mm 유탄포 겸용 모델과 슈나이더(Schneider)사의 105mm 유탄포와 106.7mm 캐논이었습니다. 그러나 개발을 서두른 탓에 사격시험은 계속 차질을 빚었습니다. 먼저 1912년 1월에 제3국 국장 레미 대령은 국영조병창의 120mm 캐논은 1912년 3월, 120mm 유탄포는 1912년 10월이나 되어야 시험사격이 가능할 것이라는 보고를 올렸습니다. 결국 2월과 3월에 두 차례의 사격시험이 실시되었으며 이때는 105mm 유탄포와 106.7mm 캐논이 시험 대상이었습니다. 신형야포의 개발을 담당한 칼레 위원회는 시험결과 105mm 급은 탄의 위력이 약하기 때문에 추가로 120mm 또는 155mm 유탄포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신형 야포의 개발이 계속 늦어졌기 때문에 전쟁부장관과 개발 책임자인 라모트 장군간에는 꽤 험악한(?) 편지가 오고 갔다고 하는군요.9)

발칸전쟁은 프랑스군에게 자신들의 교리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확신만을 심어줬습니다. 프랑스군 관전무관은 불가리아군이 포병과 보병간의 연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비효율적이었던 반면 세르비아군은 시야를 잘 확보할 수 있도록 능선에 포병을 배치한 덕분에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또한 엄폐한 포병의 사격은 비효율적이며 전통적인 교리에 따라 보병의 직접지원을 하는 쪽이 더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10) 이에 따라 대구경 야포의 개발은 어디까지나 소구경 야포의 보조적인 수준에 그치게 되었습니다.

한편, 칼레 위원회는 1913년 1월 106.7mm 캐논의 구경을 105mm로 낮춘 야포를 채용하기로 결정합니다. 라모트 장군은 105mm 야포는 야전군에서 운용할 수 있으며 보병의 공격을 지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구경이라고 생각했으며 120mm 이상은 어디까지나 공성포로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11)

결국 1차대전이 발발할 당시 프랑스군은 105mm 이상의 야포는 독일군 보다 훨씬 열세인 상태에 있었으며 전쟁 초기 막대한 손실을 입는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1914년의 전투는 프랑스측에게 자신들의 포병 교리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실패는 잘못된 교리가 가장 큰 원인이었고 기술적인 문제점은 교리의 문제점에 비하면 작은 것 이었습니다. 만약 기술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면 대전 전기간 동안 꽤나 난감한 풍경이 연출되었을 것 입니다.


<주>
1) Ripperger, Robert M. ‘The Development of the French Artillery for the Offensive, 1890~1914’,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59(Oct, 1995), pp.600~601
2) Wawro, Geofrrey. The Franco-Prussian War : The German Conquest of France in 1870~1871,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p.172~174
3) Menning, Bruce W.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Indiana University Press, 1992/2000, P.203, 258
4) Ripperger, ibid, pp.603~604
5) Brose, Eric Dorn. The Kaiser’s Army :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Oxford University Press, pp.149~151
6) Hermann, David G. The Arming of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First World War,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6, p.150
7) Ripperger, ibid, pp.607~608
8) Ripperger, ibid, pp.611~612
9) Hermann, ibid, p.151
10) Ripperger, ibid, p.614
11) Ripperger, ibid, p.615

2009년 6월 12일 금요일

독일군의 대구경 야포 도입과 벨기에 요새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

이 글은 지난 5월 말에 배군님이 쓰신 「노기는 무능했는가?」을 읽고 생각난 것이 조금 있어 쓰는 것 입니다. 원래 배군님의 글을 읽고 바로 쓰려고 했는데 저도 먹고는 살아야 하다 보니 조금 늦어졌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대한 글을 계속 쓰다 보니 예전에 썼던 글들과 겹치는 내용도 꽤 많은데 이 점은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이번 글은 1차대전 발발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많은 중포를 보유했던 독일군이 전쟁 초기 벨기에의 요새를 공격하면서 겪은 고생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먼저 대전 이전 독일의 중포병(Fuß-artillerie)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보불전쟁 이후 독일의 전쟁 계획은 거의 대부분 서부와 동부의 양면전쟁을 대비해 작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부의 전쟁계획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요소는 바로 ‘현대화된 요새’의 건설이었습니다. 프랑스는 보불전쟁 이후 기본적으로 독일에 대해 방어적인 전략을 취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1874년 베르덩(Verdun), 툴(Toul), 에피날(Epinal), 벨포르(Belfort)를 연결하는 요새들을 현대화하는데 필요한 예산을 승인했습니다. 프랑스가 국경지대의 요새들을 현대화 하자 독일 측은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독일 육군 총참모장 대(大) 몰트케(Helmuth von Moltke)는 1879년 4월에 작성한 작전 개요에서 프랑스의 국경 요새들의 위협을 높게 평가하고 서부에서는 전략적 방어를 취하는 대신 동부에 주력을 집중하도록 했습니다.[Zuber, 2002, p.74] 아무래도 프랑스군의 방어에 휘말리는 위험을 감수하기 보다는 동부전선에서 과감한 기동전으로 승부를 보는게 현명하다는 판단 이었겠지요.
서부에서 전면 방어를 취한다는 몰트케의 계획은 1882년 부참모장(Generalquartiermeister)*으로 취임한 발더제(Alfred von Waldersee)에 의해 비판받았습니다. 발더제는 몰트케의 기본적인 구상을 바꾸고자 노력했지만 몰트케는 1887년 까지도 양면전쟁 발발시 서부에서 방어를 취하고 여건이 허락하면 반격한다는 개념을 버리지 않았습니다.[Zuber, 2002, pp.95-96]

요새의 근대화로 프랑스군의 방어력은 높아진 반면 독일군의 공격 능력이 발전하는 속도는 이것을 따라 잡지 못했습니다. 210mm 구포(Möser)의 C/83 유탄은 1883년에 있었던 사격시험에서 강력한 위력을 보이며 기존의 요새들을 구식화 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신형 고폭탄의 등장으로 몰트케와 발더제는 공세에 역점을 두어 전쟁계획을 수정합니다. 그러나 1880년대 중반부터 요새를 철근과 콘크리트로 강화하자 C-83 유탄은 순식간에 구식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프랑스는 1887년부터 1888년에 걸쳐 베르덩과 벨포르 등 국경의 주요 요새들에 콘크리트와 철근을 이용한 근대화 공사를 했습니다.[Brose, 2001, p.39] 무엇보다 당시 포병감으로 있던 보익트-레츠(Julius von Voigts-Rhetz) 포병대장이 120mm 유탄포 이상의 중포는 필요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점은 독일군의 중포 개발에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Brose, 2001, p.74]

발더제의 뒤를 이어 총참모장이 된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은 몰트케와 발더제의 계획을 이어받아 전쟁계획에서 공세적인 면을 강화했습니다. 슐리펜의 1893년 전쟁계획은 서부에 16개 군단과 15개 예비사단(총 48개 사단)을, 동부에는 4개 군단과 6개 예비사단(총 15개 사단)을 배치하고 주력으로 베르덩과 툴 사이를 돌파하는 것을 골격으로 했습니다.[Zuber, 2002, pp.143-144] 슐리펜의 1893년 계획안은 프랑스의 국경 요새선이 상대적으로 강력한 에피날-벨포르는 주력이 지향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쨌든 간에 ‘상대적으로 약한’ 베르덩과 툴의 요새선은 돌파해야 한다는 점 이었습니다. 1890년대 초반까지 독일군 포병의 주력이었던 90mm C/73의 경우 고폭탄도 발사할 수는 있었지만 탄도 자체가 직선에 가까워 야전축성을 상대로는 효과가 제한적이었습니다. 새로 개발된 77mm C/96도 근본적으로는 C/73의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슐리펜은 참호 등 적의 야전축성에 대한 효과적인 공략을 위해 유탄포(Howitzer)에 대한 연구를 지시했고 그 결과 105mm le.FH 98이 채용됩니다.[Brose, 2001, pp.65-67] 그러나 C/96에 비해 야전 기동성이 떨어지는 105mm 곡사포는 기동전을 중시하는 독일군의 특성상 환영 받기 어려운 존재였습니다. 1891년부터 1899년 까지 독일 육군 야전포병감을 지낸 호프바우어(Ernst Hoffbauer)는 처음부터 야전포병에 105mm le.FH 98을 채용하는데 부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호프바우어는 포병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적 포병의 제압이라고 생각했으며 보병과의 유기적인 협동 작전을 위해 기동성을 강조하는 입장이었습니다.[Echevarria II, 2000, pp.50-51] 군부 내의 병과간 알력, 예산 등등의 문제로 le.FH 98가 정식으로 양산에 들어간 것은 1900년에 들어가서 였습니다.[Brose, 2001, p.68]
야전포병의 대구경화와는 별도로 210mm 이상의 중포 개발은 계속해서 난항을 겪었습니다. 당시 황제였던 빌헬름 2세는 프랑스 요새의 지붕에 구멍을 뚫어줄 중포병을 육성하는데 왕성한 의욕을 보였지만 독일도 명색이 의회를 가진 나라이다 보니 모든게 황제의 마음대로 돌아가질 않았습니다. 1893년 독일 제국의회(Reichstag)은 중포병에 배정된 예산을 삭감해 버립니다.[Brose, 2001, p.76] 1890년대 초중반 프랑스와 러시아의 개량된 요새들은 2.5-3m 두께의 콘크리트 지붕을 가지고 있었는데 1894년에서 1896년에 걸친 시험에서 독일군의 305mm 구포는 1.5m 이상의 콘크리트 벽을 파괴하지 못했습니다. 독일군은 305mm 구포의 성능에 실망했지만 어쨌든 중포는 필요한지라 1896년에 9문을 주문합니다.[Brose, 2001, p.78]

슐리펜의 1899년 계획은 주력 부대의 진격로를 변경했습니다. 슐리펜은 프랑스군의 동원 완료가 독일군 보다 빠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고 슐리펜이 1898년에 작성한 작전 개념안은 프랑스군의 선제 공격을 저지한 뒤 반격할 것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슐리펜이 예측한 프랑스군의 예상 공격로에는 벨기에와 룩셈부르크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프랑스군이 이 방향으로 공격해 온다면 독일군의 반격도 이 지역에서 실시될 계획이었습니다. 아르덴느를 중심으로 한 베르덩 이북의 지역은 현대화된 요새가 별로 없어 상대적으로 기동전에 유리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벨기에를 통한 우회 기동의 개념은 1899년 계획을 통해 구체화 되었습니다. 1899년 계획은 프랑스와의 전쟁이 발발할 경우 서부에 58개 사단, 동부에 10개 사단을 배치하도록 했습니다.(양면 전쟁이 발발할 경우에는 동부에 23개 사단)[Zuber, 2002, pp.160-162] 이후 슐리펜은 벨기에를 통한 우회 기동을 더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합니다. 슐리펜이 퇴역하기 전 까지 시행한 여러 차례의 기동훈련에서는 벨기에를 통한 반격이 실시되었고 벨기에를 통한 우회기동은 슐리펜의 뒤를 이은 소(小) 몰트케 시기에도 꾸준히 연구되었습니다. 1890년대 까지도 베르덩 북쪽으로 현대화된 요새가 거의 전무했기 때문에 기동훈련에서도 210mm 이상의 중포를 동반하는 상황은 거의 없었습니다.

육군의 기동계획이 요새화가 상대적으로 낮은 지역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중포병은 1906년까지도 찬밥이었습니다. 중포병감 플라니츠(Heinrich Edler von der Planitz) 장군은 중포병 대대를 증강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했지만 육군과 제국의회 양쪽으로부터 무시당합니다. 1903년의 경우 독일 육군의 23개 군단 중 8개 군단은 예하에 중포병이 단 1개 포대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150mm 이상의 중포가 조금씩이라도 도입된 덕에 독일군은 다른 유럽군대들에 비해 우위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신형 150mm 유탄포인 s.FH-02의 도입이 시작되어 1904년에는 최초의 10개 포대가 전력화 되었습니다.[Brose, 2001, p.99]
중포병에 비해 야전포병은 중요시 되었기 때문에 야전포병의 장비인 105mm 포의 도입은 신속히 도입되었습니다. 1910년에는 le.FH 98의 개량형인 le.FH 98/09가 도입되었고 1913년까지 총 664문의 105mm 유탄포가 도입되었습니다. 같은 시기 프랑스군은 독일군 보다 열세에 있었고 러시아군의 경우는 동급 제대에 105mm급의 포가 단 1문도 없었다고 하지요.[Brose, 2001, p.149]
플라니츠가 1902년에 퇴역한 뒤에는 플라니츠가 중포병감으로 있을 때 그의 참모장으로 있었던 다이네스(Gustav Adolf Deines) 대령과 플라니츠의 후임 중포병감인 페어반트(von Perbandt)가 총참모부 내에서 중포병의 증강을 주장합니다.

한편, 벨기에를 통한 우회기동 계획이 완성되어 갈수록 리에쥬(Liege) 요새의 점령 필요성이 커졌습니다. 리에쥬 요새를 측면에 남겨두고 기동할 경우 독일군 측면에 대한 반격의 거점이 될 위험성이 컸습니다. 벨기에를 침공할 경우 영국의 개입은 당연시 되었기 때문에 리에쥬가 반격의 거점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공세 초기에 점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러일전쟁 당시 뤼순 요새 전투의 결과 대구경 공성포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독일군은 러일전쟁, 특히 뤼순 요새 전투에서 일본군이 야전에 비해 더 높은 비율의 대구경 화포를 사용해 성과를 거둔 것에 주목했습니다.[Echevarria II, 2000, p.143]

1906년 이후 공성포 개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중포병 병과의 장교인 막스 바우어(Max Hermann Bauer) 였습니다. 바우어는 뤼순 요새 전투를 심층적으로 연구한 결과 대구경 공성포의 필요성을 확신했고 총참모부에 근무하게 되자 대구경 공성포의 개발을 건의해 개발 승인을 얻어냅니다. 그 결과 1909년 4월 크룹(Krupp)사가 제작한 420mm 감마(Gamma Gerät)가 시험 사격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바우어의 상관이었던 루덴도르프도 감마의 파괴력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루덴도르프는 420mm 감마와 305mm 베타를 충분히 도입해 벨기에의 요새들은 물론 베르덩-툴-낭시에 이르는 프랑스 국경지대의 요새선도 우회할 것 없이 개전 초반에 격파해 버리자는 제안을 하기까지 합니다.[Brose, 2001, p.169]

그러나 대량의 공성포를 단기간에 도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개전 직전까지 4문의 감마와 경량화된 420mm 공성포, M-Gerät 2문이 도입되는데 그쳤고 305mm 베타의 도입은 루덴도르프가 제안했던 16문 대신 12문만이 승인됩니다.

독일군의 중포 도입은 총참모부의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상당기간 지연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전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할 당시 독일육군은 중포병 예하에 총 140개 포대를 두고 있었습니다. 이 중 군단 예하 중포병이 총 27개 대대였고 야전군 사령부 예하의 중포병은 총 15개 대대였습니다.[Cron, 2006, p.142] 독일군의 주적인 프랑스군은 독일 다음으로 중포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지만 독일군과의 격차가 매우 컸습니다. 단적인 예로 독일군은 군단 예하에 16문의 150mm 유탄포를 보유한 반면 개전 초기 프랑스군은 군단 급 제대에 155mm 유탄포가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Echevarria II, 2000, p.146]

개전 초기 독일군은 리에쥬 요새를 단기간에 점령하기 위해 6개 여단, 4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신속한 기동을 위해 150mm와 210mm 구포만을 화력지원에 투입한 것은 큰 실책이었습니다. 독일군은 8월 5일부터 400문의 화포를 동원해 리에쥬를 이틀간 공격했지만 함락하지 못하고 4천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당초 예상으로는 150mm와 210mm로도 충분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리에쥬를 둘러싼 개별 요새들의 방어력은 독일군이 동원한 화포로 격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리에쥬의 벨기에군이 병력 부족으로 도시 전체를 방어하는 대신 개별 요새의 방어로 전환했기 때문에 시가지는 독일군의 손에 떨어졌으나 요새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독일군은 초기 공격이 실패한 뒤에야 요새를 격파하기 위해 대구경 공성포를 동원했는데 M-Gerät는 리에쥬 요새 공격이 시작될 때 까지도 훈련 중이었고 305mm 공성포는 숫자가 불충분해 오스트리아로부터 4문을 빌려와서 겨우 6문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M-Gerät는 8월 12일 리에쥬에 도착했고 그 강력한 위력으로 13일에는 뮤즈강 우안의 요새가, 16일에는 뮤즈강 좌안의 요새가 각각 함락되었습니다.[Strachan, 2003, pp.211-212] 독일군은 리에쥬를 함락하긴 했으나 비싼 대가를 치렀습니다. 요새 공격에 투입한 6개 여단은 모두 숙련도가 높은 현역 여단이었습니다. 또한 요새를 제압하기 위해 대량의 탄약이 소비되었는데 특히 210mm 포탄의 소모가 막심했습니다.[Brose, 2001, p.189] 그리고 리에쥬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리에쥬의 모든 요새들이 함락된 뒤에도 독일군은 진격로 상의 벨기에 요새들을 계속해서 격파해야 했습니다.

독일군은 유럽 국가들 중 대구경 화포의 도입이 가장 앞서 있는 나라였고 러일전쟁의 교훈을 가장 잘 이해한 나라였지만 개전 초기 벨기에의 요새선을 돌파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독일군은 전쟁 초반에 대량의 210mm 구포를 투입했으며 이것은 다른 어떤 나라 보다 월등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강화된 요새를 효과적으로 제압 하는데는 불충분 했습니다.


참고문헌
Eric Dorn Brose, The Kaiser’s Army :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Herman Cron/C.F.Colton(trans), Imperial German Army 1914-18 : Organisation, Structure, Orders of Battle, Helion, 1937/2006
Antulio J. Echevarria II, After Clausewitz : German Military Thinkers before the Great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0
David G. Hermann, The Arming of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First World War,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6
Hew Strachan, The First World War, Vol I. To Arms,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Terence Zuber,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 : German War Planning 1871-1914,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독일 제2제국 시기 독일군 총참모부의 Generalquartiermeister를 제 개인적으로 부참모장(副參謀長)으로 번역해서 쓰고 있는데 사실 아주 잘 맞는 번역어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실제 담당하는 업무를 고려한다면 아주 틀린 것도 아닌 것 같긴 한데... 좋은 생각 있으신 분 계십니까?

사족 하나. 이번에 참고한 서적 중 Terence Zuber의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은 슐리펜 계획에 대해 매우 도발적인 가설을 던지는 재미있는 저작입니다. 이미 읽어 보시고 이 책의 내용을 잘 알고 계신 분들도 꽤 계실 것 입니다. 나중에 Zuber의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과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에 대한 책 소개를 쓸 생각입니다.

2006년 8월 9일 수요일

독일 육군의 포병 1871-1914

1.1870-71년 전쟁

보불전쟁에서 크룹(Krupp)의 6파운드 포를 장비한 독일 포병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독일 포병은 불과 4년 전 보오전쟁의 쾨니히스그레츠(Königgrätz)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포병에 압도돼 보병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던 것과는 달리 주요 전투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전술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마-라 투르(Mars-la-Tour) 전투에서 프랑스군 사상자의 60%가 독일 포병에 의한 것 이었고 그 직후의 그라벨로(Gravelotte) 전투에서는 무려 70%였다고 한다.
특히 독일 포병은 그라벨로 전투에서 프랑스 포병보다 세배 많은 포탄을 발사하면서 화력면에서 프랑스군을 압도했으며 프랑스군의 국지적인 역습을 격퇴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프랑스 포병은 청동제 포신에 강선도 없는 포구 장전식 4파운드 포와 위력은 좋지만 기동전에는 부적합한 12파운드 포를 장비하고 있어 독일군 보다 화력면에서 뒤떨어 졌다. 그리고 수 년 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프랑스는 화력의 집중운용을 써먹어 크게 재미를 봤지만 이번 전쟁에서는 독일군이 이 방식을 써먹는 바람에 피박을 보게 됐다.

이 전쟁을 참관한 각국의 군사 관계자들은 독일군의 후미장전식 철제 강선포가 승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점에 크게 주목했다.
이미 벨기에는 1866년에 크룹의 철제 강선포를 도입했고 보불전쟁 이후 유럽 각국은 철제 강선포 확보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독일 포병은 전술 운용 면에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대표적인 문제는 보병에 대한 직접 화력지원을 위해 적의 소총 사거리 안 까지 무리하게 전진해서 사격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보오전쟁과 보불전쟁 당시 독일군 포병은 공격하는 보병중대의 600m 후방까지 따라붙어 직접화력지원을 했는데 보오전쟁 당시 오스트리아군의 소총은 이 거리에서 위협이 되지 못했던 반면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개틀링과 샤스포 소총은 900m 에서도 타격을 줄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그라벨로 전투에서 18 보병사단을 지원하던 포병들은 프랑스군의 샤스포 소총 사격을 많은 피해를 입었다.
보불전쟁에서 독일군 포병은 총 병력의 6.5%의 인명피해를 입었는데 이것은 기병의 6.3% 보다도 조금 높은 수치였다.

그러나 어쨌든 독일은 승리했다.
독일은 포병 전력의 우위를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신형 장비의 도입을 서둘렀다.

2.러시아-터키 전쟁과 대구경 야포 도입 문제 : 1872-1882

보불전쟁 이후 세계 각국의 군사 관계자들은 현대 전쟁에서 포병의 중요성과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게 됐다.
독일군이 보오전쟁과 보불전쟁에서 보여줬듯이 효과적인 공격준비 사격은 중요한 요소였지만 이를 위해서는 소총의 유효사거리 밖에서 효과적으로 포격을 할 수 있는 야포가 필요했다.

독일은 보불전쟁이 끝난 뒤 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6파운드 포를 대체할 신형 야포의 개발에 착수했다.
그 결과 1874년 채용된 것이 88mm C-73 이었다.
C-73의 최대 사거리는 7,000m로 6파운드 포에 비해 거의 2배 이상 늘어났으며 함께 도입된 신형 포탄의 파편효과도 크게 향상돼 보병에 대해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편효과가 두 배 향상된 C-76 유탄이 도입됐다.

그러나 아직 1870년대의 포병 장교들은 C-73의 향상된 사거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보다는 기존의 전술에 맞춰 사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 무렵의 일반적인 포병 전술은 2,000-2,500m 에서 적 포병을 무력화 시킨 뒤 600-700m 까지 전진해 직접 화력지원을 하는 것 이었다.
1876년 당시 포병 소령이었던 호프바우어(Ernst Hoffbauer)가, 그리고 1878년에는 포병 연대장이었던 쉘(Adolf von Schell)이 이런 내용의 교범을 저술했다. 특히 쉘의 경우 보병에 대한 직접화력 지원을 극단적으로 강조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1880년에 이르러 C-73이 기존의 야포들을 대체하면서 이 우수한 물건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방법이 강구됐고 점차 군사 이론가들은 보병을 뒤따르며 직접화력을 지원하는 것 보다는 보다 늘어난 최대사거리와 유효사거리를 활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인정하게 됐다.
먼저 1880년 몰트케가 직접 화력지원에는 포병 전력의 극히 일부만을 투입하고 대부분의 포병은 적 방어전면으로부터 최소 2,000m 이상 떨어진 위치에서 사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1881년 7월에는 이것이 문서로 공식화 됐다.
그리고 보병에 대한 직접화력 지원에 대한 중요성이 줄어 들면서 신속히 이동시킬 수 있는 소구경, 경량의 화포 보다는 장거리에서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대구경 화포에 대한 필요성이 증대되기 시작했다.
쉘 같이 기존의 포병 운용방식을 고집하는 이론가들은 이에 대해 반박하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러시아-터키 전쟁은 보수적인 이론가들에게도 충격을 안겨 줬다.

1877년의 플레브나(Plevna) 전투는 대구경 야포의 도입을 주장하던 이론가들에게는 복음과도 같았고 경량의 소구경 야포와 보병에 대한 직접지원을 강조하던 이론가들에게는 그들의 이론이 미래의 전쟁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 줬다.
러시아군은 플레브나의 터키군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매번 막대한 손실만 내고 실패했다. 러시아 포병은 주요 공세 때 마다 300-400문의 야포를 동원해 3-6시간의 공격 준비사격을 퍼부었으나 러시아군의 소구경 야포들은 참호로 강화된 터키군의 방어진을 분쇄하는데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독일 군사이론가들은 “현대전”에서 야전 축성의 중요성과 이를 분쇄하기 위한 대구경 화포의 필요성을 이미 남북전쟁 시기부터 제기하고 있었다.
남북전쟁 당시 중령의 계급으로 북군의 여러 요새 공격을 참관한 프로이센군의 쉘리아(von Scheliha)는 소구경 화포의 포격이 남군의 야전 축성에 거의 효과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어 보불전쟁에서도 4파운드 포와 6파운드 포는 참호에 들어앉은 프랑스군을 때려잡는데 효과가 적다는 것이 입증됐다.

보불전쟁 직후인 1872년, 젊은 포병 장교들은 보다 대구경인 120mm 유탄포의 도입을 요구했으나 군 상층부는 당시 개발 중이던 C-73으로 야전포병의 장비를 통일하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에 120mm 유탄포는 결국 도입되지 않았다.

그러나 플레브나 전투의 결과 독일의 보수적인 이론가들 조차 적의 야전 축성을 분쇄하기 위한 대구경 화포의 도입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C-73은 기존의 포병 교리에 맞춰 개발됐고 특히 탄도가 직사인데다가 사용하는 포탄도 파편효과를 노리고 개발된 것 들이어서 야전 축성에 대한 공격에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플레브나 전투 이후 몰트케는 총참모부에 현대 야전 축성과 이를 공략하기 위한 대구경 야포 문제를 적극적으로 연구하도록 명령했다.
독일군은 1882년 새로 도입한 150mm 구포(Mörser)와 1872년 도입된 210mm 구포로 적 참호에 대한 공격을 시험해 봤으나 두 종류 모두 매우 형편없는 결과를 보였다.
게다가 프랑스가 1885년과 1886년에 걸쳐 베르덩(Verdun), 벨포르(Belfort) 요새를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강화한 것은 독일군에게 또 다른 문제를 안겨줬다.
당시 독일 포병은 철근과 콘크리트로 구성된 야전 축성을 분쇄할 효과적인 수단이 사실상 전무했던 것이다.

3.프랑스의 도전과 러일전쟁의 영향 : 1883-1904

독일의 군사 이론가들이 새로운 전쟁 환경에 대해 전전긍긍하는 동안 프랑스는 복수의 칼을 열심히 갈고 있었다.
혁신적인 포병 장교단은 1886년부터 대구경 유탄포의 도입을 강력히 주장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1887년이 돼서야 뒤늦게 120mm 유탄포가 독일군에 도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20mm 유탄포의 초기 야전 실험은 포병들이 직사탄도를 가진 C-73에 익숙했기 때문에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여전히 보수적인 군 상층부에서는 C-73과 기존의 포병 운용방식을 고집하고 있었다.
1897년에 도입된 77mm C-96은 포신에 니켈 합금강을 사용해 C-73의 단점이었던 짧은 포신 수명을 극복했지만 기본적으로 20년이나 뒤떨어진 교리를 바탕으로 만들어 졌으며 프랑스가 1898년에 도입한 75mm 포에 비해 여러 면에서 뒤떨어지는 물건이었다.
프랑스군의 75mm 포는 유압식 제퇴기 등 최신 기술을 적용해 분당 발사속도가 최대 20발(!)에 달했는데 이것은 보병에 대한 직접지원사격을 중시하는 교리에서 보면 엄청난 장점이었다. 반면 C-96은 분당 발사속도가 5발 정도에 불과했다.

결국 이런 어수선한 상황을 해결한 것은 발더제의 뒤를 이어 육군 총참모장이 된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이었다.
슐리펜은 1896년 참모본부에 대구경 유탄포의 잠재성을 연구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 결과 105mm l.FH 98의 개발이 시작됐다. C-96을 선호한 보수적인 포병 장교들은 l.FH 98이 일곱 종류의 탄약을 사용해 신속한 이동과 운용이 어렵다는 점을 들어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특히 1891년에 포병감에 임명된 호프바우어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FH 98은 1900년부터 양산돼 대량으로 장비되기 시작했다. 결국 호프바우어를 중심으로 한 보수적인 포병장교단과 슐리펜을 중심으로 한 총참모부 및 개혁적인 포병장교단의 대결은 후자에게 유리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한편, 1900대 초 까지 88mm C-73과 77mm C-96이 주력 야포였던 독일군은 프랑스군의 유압식 제퇴기를 갖춘 75mm포의 등장으로 크게 한방 먹게 됐다.
무엇보다 프랑스군의 75mm포의 압도적인 발사 속도는 독일 총참모부에 큰 충격이었다.
1901년에 전쟁상 이었던 고슬러(Heinrich von Gossler)는 육군에 프랑스군의 75mm포에 대응할 야포의 개발을 명령했다.
특히 보어전쟁에서 영국군은 압도적인 포병 전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보어군이 사용한 막심 75mm 포의 속사에 큰 피해를 입었고 이것은 독일군에게도 속사가 가능한 야포의 개발을 서두르게 했다.
그 결과 1907년에 C-96을 개량한 C-96 n/A(neue Art)이 채용됐는데 이것은 한참 뒤의 이야기다.

한편, 러일전쟁은 독일군에게 현대적인 요새를 효과적으로 때려잡을 수 있는 대구경 화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해 줬다.
일본군은 려순 요새 공격에 총 443문의 야포를 투입했지만 18문의 280mm 포와 72문이 투입된 150mm 구포를 제외하면 러시아군의 방어망을 분쇄하는데 효과적인 물건은 별로 없었다. 특히 120문이 투입된 75mm 포는 잘 구축된 야전축성에 대해 거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 했다.

4.중포의 도입과 대구경 공성포의 개발 : 1905-1914

독일은 1903년 까지 총 23개 군단 중 105mm 이상의 중포를 장비한 군단이 단 하나도 없었으나 1904년 150mm s.FH 02가 채용되면서 조금씩 프랑스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1904년 10개 포대가 150mm s.FH 02를 장비한 이후 배치가 확대됐다.

그리고 위에서도 언급 했듯 프랑스군의 75mm 포에 대한 소극적인 대응으로 C-96의 개량형인 C-96 n/A가 1907년부터 육군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C-96 n/A는 유압식 제퇴기를 갖춰 프랑스군의 75mm와 거의 비슷한 발사 속도를 가지게 됐고 포 방패를 장비해 포병에 대한 보호도 강구 됐으나 신형 포신을 장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정거리는 프랑스의 75mm 보다 1,000m가 짧았다.
이와 함께 105mm l.FH 98를 개량한 l.FH 98/09가 1910년부터 생산에 들어갔다.
독일군은 신형 105mm 포의 생산과 함께 23개 군단에 각 3개 포대로 구성되는 105mm 포병 대대를 배속시키는 한편 1913년 까지 105mm 포의 배치를 664문으로 늘려 프랑스를 완전히 압도했다.
그리고 사단 포병의 1개 대대는 105mm l.FH 98/09를 장비해 프랑스군 사단을 화력면에서 완전히 압도할 수 있게 됐다.
또 150mm 유탄포는 1913년 까지 400문이 배치돼 각 군단은 4개 포대의 150mm를 보유할 수 있게 됐다.

신형 장비의 도입과 함께 포병 교리도 완전히 바뀌게 됐다.
1907년의 포병 교범은 이미 사실상 폐지된 것이나 다름 없던 보병에 대한 직접화력 지원을 폐기했다.
러일전쟁에서 드러 났듯 참호에 들어 앉은 보병을 1,000m 이내의 근거리에서 직접 사격으로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다.
그리고 1907년 포병감으로 임명된 슈베르트(Schubert) 장군은 프랑스 군과 마찬가지로 포 진지를 위장하고 관측장교의 통제에 따른 사격을 강조했다.
유선 전화의 도입은 전방의 관측 장교와 후방의 포대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효율적인 운용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1910년 독일군의 야전 기동을 참관한 프랑스 장교단은 자신들이 먼저 사용한 방식을 독일군이 능숙하게 사용하는 점에 주목했다.
물론 대개 보병 병과인 군단장급 장성들은 5,000m 이상의 거리에서 관측장교의 통제에 따라 사격하는 것을 포탄 낭비라고 생각했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갈수록 강화되는 벨기에와 프랑스의 요새들은 대구경 공성포의 개발을 가속시켰고 1903년에는 신형 210mm 구포가 배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일 총참모부는 여러 실험을 거친 결과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구축된 요새에 효과적인 물건은 1906년 당시 겨우 6문이 생산된 305mm 베타(Beta Gerät)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보다 더 강력한 공성포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마침내 1909년에는 420mm 유탄포인 감마(Gamma Gerät)가 개발됐다. 감마는 2년에 걸친 테스트를 받은 뒤 1911년 육군에 인도 됐다.
그러나 감마는 무려 175톤에 달하는 괴물이었기 때문에 육군에서는 크룹에 좀더 이동과 운용이 용이한 420mm 포를 개발할 것을 요청했고 이 결과 44톤에 불과한 420mm M Gerät가 개발됐다.
감마의 최대 사거리가 17km에 달한 반면 M Gerät는 그 절반에 불과한 9km에 불과했고 포탄의 위력도 약했다.
독일군은 전쟁 초기 벨기에와 프랑스의 요새들을 격파하기 서는 8문의 420mm와 16문의 305mm, 그리고 이를 지원할 100문 이상의 210mm급 구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305mm의 경우 배치된 수량이 부족해 1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는 오스트리아로부터 스코다제 305mm포를 빌려와야 했다.
독일군은 1911년 까지 예산 문제로 305mm 포를 10 문 확보하는데 그쳤는데 이것은 1년 평균 1 문도 생산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1914년 까지 추가로 2문이 더 생산되는 데 그쳤다.

독일군의 중포 및 공성포 배치는 원래 계획에는 조금 못 미치는 것 이었으나 다른 경쟁국들에 비하면 압도적인 것 이었다.
특히 개전초기의 전투에서 독일군의 강력한 화력은 벨기에의 요새들을 분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베낀 책 들
Eric D. Brose, The Kaiser’s Army –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Antulio J. Echevarraia Jr, After Clausewitz – German Military Thinkers before the Great War
David G. Herrmann, The Arming of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First World War
Jonathan M. House, Combined Arms Warfare in the Twentieth Century
Jay Luvaas, The Military Legacy of the Civil War – The European Inheritance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Geoffrey Wawro, The Franco-Prusian War – The German Conquest of France in 1870-18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