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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30일 월요일

1차대전 이전 프랑스군의 포병

배군님이 쓰신 마른전투와 1차대전 직전 프랑스군의 공격 위주의 군사사상에 대한 글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침 배군님의 글에 전쟁직전 프랑스군의 포병 이야기가 잠깐 나온 만큼 편승하는 포스팅을 하나 해보려 합니다.

프랑스 육군이 1차대전 발발당시 105mm급 이상의 대구경 야포에서 독일군에게 압도된 원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만 중요한 원인으로는 프랑스 육군이 전술교리의 문제 때문에 대구경 야포의 필요성을 경시했다는 점이 꼽히고 있습니다.

1차대전 이전 프랑스의 야포 운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랑글루아(Hippolyte Langlois) 장군이었습니다. 랑글루아는 1892년에 출간한 ‘야전포병과 타 병과에 대하여(L’Artillerie de Campagne en liaison avec les autres armes)’라는 저작에서 미래의 전장에서 속사가 가능한 야포가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가를 고찰하려 했습니다. 랑글루아는 전투가 ‘서전(緖戰)’, ‘포격전’, ‘소모 전투’, ‘결정적 공격’의 네 단계로 이루어 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중 전투의 ‘서전’에서 포병은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는 전위부대를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며 신속한 화력지원을 위해 전위의 보병 및 기병과 밀접한 접촉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야전부대가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무전기술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포병이 보병 및 기병과 긴밀한 협력을 하기 위해서는 관측병의 시야 범위내에서, 적을 직접 보고 사격할 수 있는 거리내에 배치되어야 했습니다. 랑글루아는 이러한 환경하에서는 기동이 편리하고 속사가 가능한 경량급 화포가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무거운 대구경 야포는 이러한 환경하에서는 사실상 쓸모가 없었습니다. 대구경 야포의 장점은 긴 사거리인데 적을 직접 보고 사격해야 하는 조건에서는 별 도움이 안되는 능력이니 말입니다.
두 번째 단계인 ‘포격전’ 단계는 양측의 주력이 전장에 집결하여 포격전을 가하는 단계인데 랑글루아는 이 두번째 단계에서 적의 포병을 격파하고 화력의 우세를 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으며 이 경우에도 속사가 가능한 경량급 야포가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 번째 단계인 ‘소모 전투’ 단계에서 포병은 공격하는 보병을 직접 지원하며 보병이 기동을 완료하면 새로운 진지에서 적군의 반격을 분쇄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랑글루아는 역시 이 단계에서도 속사가 가능한 경량급 야포가 유리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포병이 적 소화기의 유효사거리까지 전진해 화력지원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신속한 사격이 가능해야만 적의 보병을 무력화 시킬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1)
그리고 랑글루아의 저작이 출간된 뒤에 채용된 75mm Mle 1897은 이러한 교리에 적합한 장비였습니다. 우수한 속사능력을 갖춘 이 포는 당시 독일군 사단 포병의 주력장비인 77mm 야포를 단숨에 구식화 시켰습니다.

랑글루아의 견해는 당시의 군사기술을 고려한다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포병이 적 보병의 소화기 사거리내에서 작전을 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이미 보불전쟁의 여러 전투에서 입증된 바 있었습니다. 예를들어 1870년 8월 18일의 그라벨로(Gravelotte) 전투에서 만슈타인(Albrecht von Manstein)이 지휘하는 제9군단의 예하 포병대는 프랑스군의 소화기 공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물론 이 전투는 북독일연방측의 승리로 끝났으며 프랑스군 사상자의 70%가 독일 측의 포격에 의한 것이었다고 전해질 만큼 포병의 위력을 과시한 전투였지만 동시에 포병 전술의 한계를 보여준 전투이기도 했습니다.2)

러일전쟁의 결과도 프랑스군의 포병교리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일본군 포병은 엄폐된 포진지에서 사격을 했기 때문에 꽤 재미를 봤으나 포병 운용의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군에게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러시아군은 속사가 가능한 경량급 야포가 거둔 성과에 더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이 때문에 러일전쟁 이후의 러시아군 교리에서는 여전히 포병이 최대한 전방에 배치되어 적 포병과 보병을 제압해야 한다고 명시했습니다.3)
프랑스군도 러시아군과 동일한 결론을 내렸으며 러일전쟁의 전훈을 통해 랑글루아의 교리가 타당하다는 믿음을 더 강화했습니다. 당시 프랑스군 포병의 훈련을 보면 적으로부터 1800m 떨어진 거리에서 사격하는 경우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포병 자체의 안전을 희생하더라도 공격하는 보병에게 최대한의 화력지원을 제공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리고 포병의 방어는 포방패를 야포에 다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러일전쟁 직후까지도 포병이 후방에 위치할 경우 보병과 원활하게 소통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는 점도 프랑스군이 포병의 전진 배치를 선호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유선전화가 도입되고 있었으나 신뢰성 문제와 전화선이 포격에 절단될 수 있다는 점이 문제로 제기되었습니다.4)

그러나 독일군이 105mm급 야포의 생산을 늘려갔기 때문에 프랑스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뒤늦게 대구경 야포의 개발과 배치에 들어가게 됩니다. 독일군은 이미 1900년부터 105mm l.FH 98을 양산하고 있었으며 1910년에는 개량형인 l.FH 98/09가 배치되기 시작했습니다. 1911년에는 독일군의 23개 군단에 3개 포대로 구성된 105mm 유탄포 대대가 배속되었으며 이보다 더 위력적인 150mm s.FH 02는 1913년까지 400문이 배치되었습니다.5)

1910년 총참모장에 취임한 조프르(Joseph Joffre)는 1911년 최고군사평의회(Conseil Superieur de la Guerre)에서 독일의 대구경 야포 도입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군도 대구경 야포의 배치에 주력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조프르 뿐 아니라 새로 전쟁부 장관에 임명된 메시미(Adolphe-Marie Messimy) 또한 프랑스군이 중포 보유량에서 독일군 보다 열세에 있다는 점을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6)
그러나 중포에 대한 프랑스군의 인식은 여전히 낮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포병장비 도입을 담당하고 있던 총참모부 제3국의 국장 레미(Rémy) 대령은 75mm Mle 1897의 우수성을 확신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레미 대령은 독일군 포병의 3/4는 여전히 77mm 야포를 장비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프랑스군은 독일군에 대해 현저한 우위를 가지고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105mm 유탄포의 도입에 긍정적이었던 포병위원회의 위원장 라모트(de Lamothe) 장군도 이 이상의 대구경 야포는 야전포병이 아닌 공성포병의 장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7)

물론 군단포병 이하에서 운용되는 야전포병과 군급에서 운용되는 공성포병을 엄격히 분리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일반적인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120mm 이상의 구경은 공성포로 보았으며 이것은 150mm 중유탄포를 군단급에 배치한 독일군과 큰 차이가 있는 것 이었습니다. 이미 프랑스는 전쟁 시작 전부터 독일군의 동급 제대에게 한 수 지고 들어가는 모양이었습니다. 또한 독일군은 공성포병으로 분류하는 중포병 부대도 군단의 지휘하에 운용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8)

프랑스는 독일군에 비해 중포의 개발과 배치에서 뒤처져 있었으며 야전 중유탄포의 개발은 1911년 7월 27일에 시작되었습니다. 전쟁부는 신형 야전유탄포의 시제품의 사격시험 날짜를 1911년 12월 31일로 잡았으나 무리라는 것이 판명되었고 국영조병창을 고려해 사격시험 날짜를 4개월 늦추는 방안이 고려되었습니다. 결국은 1912년 2월 6일에 총 여섯 종류의 야포에 대한 사격시험이 실시하도록 결정됩니다. 이 시험에 참여할 것은 국영조병창의 120mm 유탄포, 105mm 유탄포, 120mm 캐논, 그리고 포신을 교체하는 방식의 75mm 야포/ 120mm 유탄포 겸용 모델과 슈나이더(Schneider)사의 105mm 유탄포와 106.7mm 캐논이었습니다. 그러나 개발을 서두른 탓에 사격시험은 계속 차질을 빚었습니다. 먼저 1912년 1월에 제3국 국장 레미 대령은 국영조병창의 120mm 캐논은 1912년 3월, 120mm 유탄포는 1912년 10월이나 되어야 시험사격이 가능할 것이라는 보고를 올렸습니다. 결국 2월과 3월에 두 차례의 사격시험이 실시되었으며 이때는 105mm 유탄포와 106.7mm 캐논이 시험 대상이었습니다. 신형야포의 개발을 담당한 칼레 위원회는 시험결과 105mm 급은 탄의 위력이 약하기 때문에 추가로 120mm 또는 155mm 유탄포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신형 야포의 개발이 계속 늦어졌기 때문에 전쟁부장관과 개발 책임자인 라모트 장군간에는 꽤 험악한(?) 편지가 오고 갔다고 하는군요.9)

발칸전쟁은 프랑스군에게 자신들의 교리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확신만을 심어줬습니다. 프랑스군 관전무관은 불가리아군이 포병과 보병간의 연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비효율적이었던 반면 세르비아군은 시야를 잘 확보할 수 있도록 능선에 포병을 배치한 덕분에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또한 엄폐한 포병의 사격은 비효율적이며 전통적인 교리에 따라 보병의 직접지원을 하는 쪽이 더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10) 이에 따라 대구경 야포의 개발은 어디까지나 소구경 야포의 보조적인 수준에 그치게 되었습니다.

한편, 칼레 위원회는 1913년 1월 106.7mm 캐논의 구경을 105mm로 낮춘 야포를 채용하기로 결정합니다. 라모트 장군은 105mm 야포는 야전군에서 운용할 수 있으며 보병의 공격을 지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구경이라고 생각했으며 120mm 이상은 어디까지나 공성포로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11)

결국 1차대전이 발발할 당시 프랑스군은 105mm 이상의 야포는 독일군 보다 훨씬 열세인 상태에 있었으며 전쟁 초기 막대한 손실을 입는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1914년의 전투는 프랑스측에게 자신들의 포병 교리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실패는 잘못된 교리가 가장 큰 원인이었고 기술적인 문제점은 교리의 문제점에 비하면 작은 것 이었습니다. 만약 기술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면 대전 전기간 동안 꽤나 난감한 풍경이 연출되었을 것 입니다.


<주>
1) Ripperger, Robert M. ‘The Development of the French Artillery for the Offensive, 1890~1914’,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59(Oct, 1995), pp.600~601
2) Wawro, Geofrrey. The Franco-Prussian War : The German Conquest of France in 1870~1871,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p.172~174
3) Menning, Bruce W.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Indiana University Press, 1992/2000, P.203, 258
4) Ripperger, ibid, pp.603~604
5) Brose, Eric Dorn. The Kaiser’s Army :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Oxford University Press, pp.149~151
6) Hermann, David G. The Arming of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First World War,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6, p.150
7) Ripperger, ibid, pp.607~608
8) Ripperger, ibid, pp.611~612
9) Hermann, ibid, p.151
10) Ripperger, ibid, p.614
11) Ripperger, ibid, p.615

2009년 10월 21일 수요일

미 육군의 프랑스제 야포 채용

예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번 했습니다만 이번에는 순수하게 "야포" 이야기만 해 볼까 합니다.

1차대전이 장기화 되면서 서부전선에서는 무시무시한 화력전이 전개되었고 여기에 대해서는 대서양 건너의 미육군에서도 심각하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대륙의 불똥이 언제 바다 건너까지 튈지 모르는 일이었으니 말입니다.

그 러나 비교적 19세기 말 유럽의 육군군비경쟁과는 무관하게 한발 물러서 있던 미육군의 포병전력은 세계대전에 뛰어들기에는 살짝 모자란 수준이었습니다. 1898년에 미서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육군이 보유한 야포는 123문의 3.2인치 야포, 22문의 3.6인치 야포, 22문의 3.6인치 유탄포, 그리고 소수의 공성포(siege gun)가 전부였습니다. 미국 전쟁부는 이때문에 포병 전력의 확충을 위해 영국으로 부터 34문의 암스트롱 4.7인치 야포와 8문의 6인치 포를 급히 구매해서 배치해야 했습니다.1) 미국 전쟁부는 이 전쟁의 경험과 유럽의 군비경쟁에 자극을 받아 포병전력의 확충에 고심했지만 1차대전에 참전하게 될 때 까지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전쟁부는 유럽대륙의 군비증강에 자극받아 1912년에 새로운 보병사단의 포병개편안을 내놓았습니다. 이 개편안은 1개 보병사단에 1개 포병여단을 두고 이 포병여단은 다시 2개 포병연대로, 그리고 각 포병연대는 2개 대대의 3인치 야포(각 대대당 3인치 야포 12문)과 1개 대대의 4.7인치 유탄포(대대 당 4.7인치 유탄포 8문)로 편성하는 것 이었습니다.2) 이 개편안의 목적은 미육군 보병사단의 포병전력을 유럽대륙의 보병사단 포병편제에 준하는 수준으로 증강하는 것 이었습니다.

※ 그리고 4.7인치 유탄포는 6인치 유탄포를 배치하는 방안으로 교체됩니다.

사실 1차대전 직전에는 포병전력 뿐 아니라 미육군 자체가 전반적으로 전력 강화에 부진을 겪고 있었습니다. 예를들어 1916년의 국가방위법(National Defense Act)이 목표로 한 것은 1921년까지 정규군을 165,000명, 주방위군(민병대)을 450,000명으로 증강하는 것에 그치고 있었습니다.3) 포병 증강을 위한 시도는 1차대전 발발 이전부터 꾸준히 행해지고 있었지만 1917년 까지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채 계획만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포병 증강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조직된 트리트 위원회(Treat Board)는 1915년 4월 17일의 보고서에서 육군의 포병전력을 8년에 걸쳐 3인치 야포 1,968문, 3.8인치 유탄포 936문, 4.7인치 유탄포 312문, 4인치 야포 312문, 7.6인치 유탄포 104문, 11인치 유탄포 72문으로 증강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이 방대한 계획에 필요한 예산은 총 4억8천만 달러로 예상되었습니다.4) 이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단포병의 주력장비가 될 3인치 야포의 개량형, M1916을 예정에 따라 충분히 확보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여전히 현대적 야포의 생산에 필요한 기술적 정보가 부족했으며 이때문에 1916년에는 병기국의 힐맨(L. T. Hillman) 소령을 유럽에 파견하기로 결정합니다. 힐맨 소령은 프랑스, 영국 정부와 접촉해 미국이 필요로하는 기술을 획득하려 했습니다. 프랑스는 처음에 미국측에게 기술을 판매하는 것을 기피했으나 힐맨 소령이 영국과 접촉해 빅커스(Vickers)의 9.2인치 유탄포와 12인치 유탄포의 설계도와 기술을 구매하자 태도를 바꿉니다. 힐맨 소령은 프랑스로 부터 생샤몽(St. Chamond)사의 야포용 완충기 생산권 등 중요한 기술을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5)

미 전쟁부는 1917년 부터 유럽으로 부터 구매한 신기술을 대거 활용해 대규모 포병증강계획에 돌입합니다. 역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사단포병의 주력 장비인 3인치 야포와 6인치 유탄포의 대량생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게 되면서 자체적인 포병증강계획은 차질을 빚게 됩니다. 미국이 이제 막 유럽에서 도입한 신기술을 적용해 개량한 3인치 포는 시험 결과 수많은 문제를 일으켜 예정된 시간까지 유럽에 파견할 육군을 무장시키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M1916은 물론 영국제 18파운드을 바탕으로 한 M1917의 시험 결과도 신통찮았기 때문에 미육군 포병감 스노우(William J. Snow)소장은 "우리는 이번 전쟁에 우리 군대를 야포로 무장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한탄을 했다고 합니다.6) 미국정부는 미국 원정군이 독립적인 지위를 가질 수 있도록 가능한 "미국제" 장비로 무장하길 원하고 있었습니다.7) 하지만 현실은 미국의 "야무진 꿈"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 국 병기국장 크로지어(William Crozier) 소장과 프랑스 병기국장 갸네(M. J. M. Ganne)간에 1917년 5월 25일 진행된 회의에서는 프랑스제 야포를 도입해 미국원정군(AEF)을 무장시키고 미국제 야포는 국내에서 훈련용으로만 사용하는 결정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회의의 결과 프랑스 정부는 1917년 8월 1일 부터 75mm포를, 1917년 10월 1일 부터는 155mm포를 공급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에따라 7월 9일에는 공식적으로 보병사단의 포병편제에서 3인치 포를 프랑스의 75mm포로 교체하고 6인치 포는 155mm유탄포로 교체한다는 명령이 내려집니다.8) 이미 미국원정군의 제 1진 14,000명은 1917년 6월 28일에 프랑스의 생나제르(St. Nazaire)에 도착했으며9) 다음날인 1917년 7월 10일에는 퍼싱 장군이 1919년 6월 까지 총 95개 사단을 편성하고 이 중 80개 사단을 유럽전선에 투입한다는 계획을 제출했습니다. 이것은 유럽에 투입할 80개 사단을 무장시키는데만 총 3,840문의 75mm급 야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당시의' 미국으로써는 단시일내에 그정도의 국산 야포를 배치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는 1918년 11월 11일까지 미육군에 총 3,352문의 각종 야포를 원조하게 됩니다.10)

※ 물론 국제관계가 다 그렇듯 미국도 날로 먹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프랑스 정부에 75mm포 1문당 6톤의 강철을, 155mm유탄포 1문당 40톤의 강철을 제공하기로 했습니다.11)

하 지만 그동안 진행되고 있던 3인치포 등 국산 무기의 개발을 취소하고 새로이 프랑스의 기준에 맞춰 야포와 탄약을 생산하는 문제는 쉽지않은 것이었습니다. 특히 프랑스가 제공하는 설계도 등을 번역하는 등 기술적 문제가 산적해 있었습니다. 75mm 포탄 생산을 위해 프랑스가 제공한 자료들의 번역이 완료된 것은 1917년 12월 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여전히 자국산 야포의 개발에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75mm포 면허생산을 공식적으로 결정한 것은 1918년 2월이 되어서였습니다.12) 그러나 기술적 문제로 생산이 계속 지연되었기 때문에 1차대전 중 미국 국내에서는 프랑스제 75mm포는 단 1문도 생산되지 못했고 대신 영국제 18파운드포를 기초로한 M1917이 724문 생산되는데 그쳤습니다. 미국이 면허생산한 프랑스제 야포는 146문으로 이중 144문이 155mm유탄포였습니다.13)

미국은 1차대전 중 프랑스제 야포를 매우 유용하게 활용했으며 특히 사단포병의 75mm포는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물론 일부 지휘관들은 75mm의 탄두 위력 부족으로 사단포병에 1개 연대의 105mm 유탄포를 배치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지만 전쟁이 끝날때 까지 75mm포는 사단포병의 주력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미육군이 75mm포에 크게 만족했기 때문에 1940년까지도 사단포병에 75mm 대신 105mm를 배치하자는 제안은 진지하게 검토되지 못할정도였다고 하지요.14) 그리고 155mm 구경은 오늘날에는 서방 국가들의 표준적인 야포 구경이 되었습니다. 만약 미국이 원래 계획대로 인치 구경을 사용하는 자국산 야포의 대량생산에 성공했다면 오늘날 표준적인 야포구경은 6인치가 되어 있겠지요.




1) H. A. De Weerd, "American Adoption of French Artillery 1917-1918", The Journal of the American Military Institute, Vol. 3, No. 2, (Summer, 1939), pp.104~105
2) Vardell E. Nesmith Jr, "Stagnation and Change in Military thoght : The Evolutuion of American Field Artillery Doctrine 1861~1905", U.S.Army Command and General Staff College, 1976, p.284
3) Mark E. Grotelueschen, The AEF Way of War : The American Army and Combat in World War I,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p.11
4) De Weerd, Ibid., p.106
5) De Weerd, Ibid., p.108
6) Robert B. Bruce, A Fraternity of Arms : America and France in the Great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3, pp.100~111
7) Elisabeth Glaser, "Better Late than Never : The American Economic War Effort, 1917~1918", Great War, Total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2006, pp.405~406
8) De Weerd, Ibid., p.110
9) Bruce, Ibid., p.91
10) Bruce, Ibid., p.105
11) Bruce, Ibid., p.106
12) De Weerd, Ibid., pp.111~112
13) De Weerd, Ibid., p.116
14) Janice McKenney, "More Bang for the Buck in the Interwar Army: The 105-mm. Howitzer", Military Affairs, Vol. 42, No. 2, (Apr., 1978), pp.80~81

2006년 8월 9일 수요일

독일 육군의 포병 1871-1914

1.1870-71년 전쟁

보불전쟁에서 크룹(Krupp)의 6파운드 포를 장비한 독일 포병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독일 포병은 불과 4년 전 보오전쟁의 쾨니히스그레츠(Königgrätz)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포병에 압도돼 보병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던 것과는 달리 주요 전투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전술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마-라 투르(Mars-la-Tour) 전투에서 프랑스군 사상자의 60%가 독일 포병에 의한 것 이었고 그 직후의 그라벨로(Gravelotte) 전투에서는 무려 70%였다고 한다.
특히 독일 포병은 그라벨로 전투에서 프랑스 포병보다 세배 많은 포탄을 발사하면서 화력면에서 프랑스군을 압도했으며 프랑스군의 국지적인 역습을 격퇴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프랑스 포병은 청동제 포신에 강선도 없는 포구 장전식 4파운드 포와 위력은 좋지만 기동전에는 부적합한 12파운드 포를 장비하고 있어 독일군 보다 화력면에서 뒤떨어 졌다. 그리고 수 년 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프랑스는 화력의 집중운용을 써먹어 크게 재미를 봤지만 이번 전쟁에서는 독일군이 이 방식을 써먹는 바람에 피박을 보게 됐다.

이 전쟁을 참관한 각국의 군사 관계자들은 독일군의 후미장전식 철제 강선포가 승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점에 크게 주목했다.
이미 벨기에는 1866년에 크룹의 철제 강선포를 도입했고 보불전쟁 이후 유럽 각국은 철제 강선포 확보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독일 포병은 전술 운용 면에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대표적인 문제는 보병에 대한 직접 화력지원을 위해 적의 소총 사거리 안 까지 무리하게 전진해서 사격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보오전쟁과 보불전쟁 당시 독일군 포병은 공격하는 보병중대의 600m 후방까지 따라붙어 직접화력지원을 했는데 보오전쟁 당시 오스트리아군의 소총은 이 거리에서 위협이 되지 못했던 반면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개틀링과 샤스포 소총은 900m 에서도 타격을 줄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그라벨로 전투에서 18 보병사단을 지원하던 포병들은 프랑스군의 샤스포 소총 사격을 많은 피해를 입었다.
보불전쟁에서 독일군 포병은 총 병력의 6.5%의 인명피해를 입었는데 이것은 기병의 6.3% 보다도 조금 높은 수치였다.

그러나 어쨌든 독일은 승리했다.
독일은 포병 전력의 우위를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신형 장비의 도입을 서둘렀다.

2.러시아-터키 전쟁과 대구경 야포 도입 문제 : 1872-1882

보불전쟁 이후 세계 각국의 군사 관계자들은 현대 전쟁에서 포병의 중요성과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게 됐다.
독일군이 보오전쟁과 보불전쟁에서 보여줬듯이 효과적인 공격준비 사격은 중요한 요소였지만 이를 위해서는 소총의 유효사거리 밖에서 효과적으로 포격을 할 수 있는 야포가 필요했다.

독일은 보불전쟁이 끝난 뒤 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6파운드 포를 대체할 신형 야포의 개발에 착수했다.
그 결과 1874년 채용된 것이 88mm C-73 이었다.
C-73의 최대 사거리는 7,000m로 6파운드 포에 비해 거의 2배 이상 늘어났으며 함께 도입된 신형 포탄의 파편효과도 크게 향상돼 보병에 대해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편효과가 두 배 향상된 C-76 유탄이 도입됐다.

그러나 아직 1870년대의 포병 장교들은 C-73의 향상된 사거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보다는 기존의 전술에 맞춰 사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 무렵의 일반적인 포병 전술은 2,000-2,500m 에서 적 포병을 무력화 시킨 뒤 600-700m 까지 전진해 직접 화력지원을 하는 것 이었다.
1876년 당시 포병 소령이었던 호프바우어(Ernst Hoffbauer)가, 그리고 1878년에는 포병 연대장이었던 쉘(Adolf von Schell)이 이런 내용의 교범을 저술했다. 특히 쉘의 경우 보병에 대한 직접화력 지원을 극단적으로 강조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1880년에 이르러 C-73이 기존의 야포들을 대체하면서 이 우수한 물건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방법이 강구됐고 점차 군사 이론가들은 보병을 뒤따르며 직접화력을 지원하는 것 보다는 보다 늘어난 최대사거리와 유효사거리를 활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인정하게 됐다.
먼저 1880년 몰트케가 직접 화력지원에는 포병 전력의 극히 일부만을 투입하고 대부분의 포병은 적 방어전면으로부터 최소 2,000m 이상 떨어진 위치에서 사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1881년 7월에는 이것이 문서로 공식화 됐다.
그리고 보병에 대한 직접화력 지원에 대한 중요성이 줄어 들면서 신속히 이동시킬 수 있는 소구경, 경량의 화포 보다는 장거리에서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대구경 화포에 대한 필요성이 증대되기 시작했다.
쉘 같이 기존의 포병 운용방식을 고집하는 이론가들은 이에 대해 반박하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러시아-터키 전쟁은 보수적인 이론가들에게도 충격을 안겨 줬다.

1877년의 플레브나(Plevna) 전투는 대구경 야포의 도입을 주장하던 이론가들에게는 복음과도 같았고 경량의 소구경 야포와 보병에 대한 직접지원을 강조하던 이론가들에게는 그들의 이론이 미래의 전쟁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 줬다.
러시아군은 플레브나의 터키군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매번 막대한 손실만 내고 실패했다. 러시아 포병은 주요 공세 때 마다 300-400문의 야포를 동원해 3-6시간의 공격 준비사격을 퍼부었으나 러시아군의 소구경 야포들은 참호로 강화된 터키군의 방어진을 분쇄하는데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독일 군사이론가들은 “현대전”에서 야전 축성의 중요성과 이를 분쇄하기 위한 대구경 화포의 필요성을 이미 남북전쟁 시기부터 제기하고 있었다.
남북전쟁 당시 중령의 계급으로 북군의 여러 요새 공격을 참관한 프로이센군의 쉘리아(von Scheliha)는 소구경 화포의 포격이 남군의 야전 축성에 거의 효과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어 보불전쟁에서도 4파운드 포와 6파운드 포는 참호에 들어앉은 프랑스군을 때려잡는데 효과가 적다는 것이 입증됐다.

보불전쟁 직후인 1872년, 젊은 포병 장교들은 보다 대구경인 120mm 유탄포의 도입을 요구했으나 군 상층부는 당시 개발 중이던 C-73으로 야전포병의 장비를 통일하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에 120mm 유탄포는 결국 도입되지 않았다.

그러나 플레브나 전투의 결과 독일의 보수적인 이론가들 조차 적의 야전 축성을 분쇄하기 위한 대구경 화포의 도입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C-73은 기존의 포병 교리에 맞춰 개발됐고 특히 탄도가 직사인데다가 사용하는 포탄도 파편효과를 노리고 개발된 것 들이어서 야전 축성에 대한 공격에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플레브나 전투 이후 몰트케는 총참모부에 현대 야전 축성과 이를 공략하기 위한 대구경 야포 문제를 적극적으로 연구하도록 명령했다.
독일군은 1882년 새로 도입한 150mm 구포(Mörser)와 1872년 도입된 210mm 구포로 적 참호에 대한 공격을 시험해 봤으나 두 종류 모두 매우 형편없는 결과를 보였다.
게다가 프랑스가 1885년과 1886년에 걸쳐 베르덩(Verdun), 벨포르(Belfort) 요새를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강화한 것은 독일군에게 또 다른 문제를 안겨줬다.
당시 독일 포병은 철근과 콘크리트로 구성된 야전 축성을 분쇄할 효과적인 수단이 사실상 전무했던 것이다.

3.프랑스의 도전과 러일전쟁의 영향 : 1883-1904

독일의 군사 이론가들이 새로운 전쟁 환경에 대해 전전긍긍하는 동안 프랑스는 복수의 칼을 열심히 갈고 있었다.
혁신적인 포병 장교단은 1886년부터 대구경 유탄포의 도입을 강력히 주장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1887년이 돼서야 뒤늦게 120mm 유탄포가 독일군에 도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20mm 유탄포의 초기 야전 실험은 포병들이 직사탄도를 가진 C-73에 익숙했기 때문에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여전히 보수적인 군 상층부에서는 C-73과 기존의 포병 운용방식을 고집하고 있었다.
1897년에 도입된 77mm C-96은 포신에 니켈 합금강을 사용해 C-73의 단점이었던 짧은 포신 수명을 극복했지만 기본적으로 20년이나 뒤떨어진 교리를 바탕으로 만들어 졌으며 프랑스가 1898년에 도입한 75mm 포에 비해 여러 면에서 뒤떨어지는 물건이었다.
프랑스군의 75mm 포는 유압식 제퇴기 등 최신 기술을 적용해 분당 발사속도가 최대 20발(!)에 달했는데 이것은 보병에 대한 직접지원사격을 중시하는 교리에서 보면 엄청난 장점이었다. 반면 C-96은 분당 발사속도가 5발 정도에 불과했다.

결국 이런 어수선한 상황을 해결한 것은 발더제의 뒤를 이어 육군 총참모장이 된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이었다.
슐리펜은 1896년 참모본부에 대구경 유탄포의 잠재성을 연구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 결과 105mm l.FH 98의 개발이 시작됐다. C-96을 선호한 보수적인 포병 장교들은 l.FH 98이 일곱 종류의 탄약을 사용해 신속한 이동과 운용이 어렵다는 점을 들어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특히 1891년에 포병감에 임명된 호프바우어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FH 98은 1900년부터 양산돼 대량으로 장비되기 시작했다. 결국 호프바우어를 중심으로 한 보수적인 포병장교단과 슐리펜을 중심으로 한 총참모부 및 개혁적인 포병장교단의 대결은 후자에게 유리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한편, 1900대 초 까지 88mm C-73과 77mm C-96이 주력 야포였던 독일군은 프랑스군의 유압식 제퇴기를 갖춘 75mm포의 등장으로 크게 한방 먹게 됐다.
무엇보다 프랑스군의 75mm포의 압도적인 발사 속도는 독일 총참모부에 큰 충격이었다.
1901년에 전쟁상 이었던 고슬러(Heinrich von Gossler)는 육군에 프랑스군의 75mm포에 대응할 야포의 개발을 명령했다.
특히 보어전쟁에서 영국군은 압도적인 포병 전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보어군이 사용한 막심 75mm 포의 속사에 큰 피해를 입었고 이것은 독일군에게도 속사가 가능한 야포의 개발을 서두르게 했다.
그 결과 1907년에 C-96을 개량한 C-96 n/A(neue Art)이 채용됐는데 이것은 한참 뒤의 이야기다.

한편, 러일전쟁은 독일군에게 현대적인 요새를 효과적으로 때려잡을 수 있는 대구경 화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해 줬다.
일본군은 려순 요새 공격에 총 443문의 야포를 투입했지만 18문의 280mm 포와 72문이 투입된 150mm 구포를 제외하면 러시아군의 방어망을 분쇄하는데 효과적인 물건은 별로 없었다. 특히 120문이 투입된 75mm 포는 잘 구축된 야전축성에 대해 거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 했다.

4.중포의 도입과 대구경 공성포의 개발 : 1905-1914

독일은 1903년 까지 총 23개 군단 중 105mm 이상의 중포를 장비한 군단이 단 하나도 없었으나 1904년 150mm s.FH 02가 채용되면서 조금씩 프랑스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1904년 10개 포대가 150mm s.FH 02를 장비한 이후 배치가 확대됐다.

그리고 위에서도 언급 했듯 프랑스군의 75mm 포에 대한 소극적인 대응으로 C-96의 개량형인 C-96 n/A가 1907년부터 육군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C-96 n/A는 유압식 제퇴기를 갖춰 프랑스군의 75mm와 거의 비슷한 발사 속도를 가지게 됐고 포 방패를 장비해 포병에 대한 보호도 강구 됐으나 신형 포신을 장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정거리는 프랑스의 75mm 보다 1,000m가 짧았다.
이와 함께 105mm l.FH 98를 개량한 l.FH 98/09가 1910년부터 생산에 들어갔다.
독일군은 신형 105mm 포의 생산과 함께 23개 군단에 각 3개 포대로 구성되는 105mm 포병 대대를 배속시키는 한편 1913년 까지 105mm 포의 배치를 664문으로 늘려 프랑스를 완전히 압도했다.
그리고 사단 포병의 1개 대대는 105mm l.FH 98/09를 장비해 프랑스군 사단을 화력면에서 완전히 압도할 수 있게 됐다.
또 150mm 유탄포는 1913년 까지 400문이 배치돼 각 군단은 4개 포대의 150mm를 보유할 수 있게 됐다.

신형 장비의 도입과 함께 포병 교리도 완전히 바뀌게 됐다.
1907년의 포병 교범은 이미 사실상 폐지된 것이나 다름 없던 보병에 대한 직접화력 지원을 폐기했다.
러일전쟁에서 드러 났듯 참호에 들어 앉은 보병을 1,000m 이내의 근거리에서 직접 사격으로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다.
그리고 1907년 포병감으로 임명된 슈베르트(Schubert) 장군은 프랑스 군과 마찬가지로 포 진지를 위장하고 관측장교의 통제에 따른 사격을 강조했다.
유선 전화의 도입은 전방의 관측 장교와 후방의 포대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효율적인 운용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1910년 독일군의 야전 기동을 참관한 프랑스 장교단은 자신들이 먼저 사용한 방식을 독일군이 능숙하게 사용하는 점에 주목했다.
물론 대개 보병 병과인 군단장급 장성들은 5,000m 이상의 거리에서 관측장교의 통제에 따라 사격하는 것을 포탄 낭비라고 생각했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갈수록 강화되는 벨기에와 프랑스의 요새들은 대구경 공성포의 개발을 가속시켰고 1903년에는 신형 210mm 구포가 배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일 총참모부는 여러 실험을 거친 결과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구축된 요새에 효과적인 물건은 1906년 당시 겨우 6문이 생산된 305mm 베타(Beta Gerät)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보다 더 강력한 공성포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마침내 1909년에는 420mm 유탄포인 감마(Gamma Gerät)가 개발됐다. 감마는 2년에 걸친 테스트를 받은 뒤 1911년 육군에 인도 됐다.
그러나 감마는 무려 175톤에 달하는 괴물이었기 때문에 육군에서는 크룹에 좀더 이동과 운용이 용이한 420mm 포를 개발할 것을 요청했고 이 결과 44톤에 불과한 420mm M Gerät가 개발됐다.
감마의 최대 사거리가 17km에 달한 반면 M Gerät는 그 절반에 불과한 9km에 불과했고 포탄의 위력도 약했다.
독일군은 전쟁 초기 벨기에와 프랑스의 요새들을 격파하기 서는 8문의 420mm와 16문의 305mm, 그리고 이를 지원할 100문 이상의 210mm급 구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305mm의 경우 배치된 수량이 부족해 1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는 오스트리아로부터 스코다제 305mm포를 빌려와야 했다.
독일군은 1911년 까지 예산 문제로 305mm 포를 10 문 확보하는데 그쳤는데 이것은 1년 평균 1 문도 생산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1914년 까지 추가로 2문이 더 생산되는 데 그쳤다.

독일군의 중포 및 공성포 배치는 원래 계획에는 조금 못 미치는 것 이었으나 다른 경쟁국들에 비하면 압도적인 것 이었다.
특히 개전초기의 전투에서 독일군의 강력한 화력은 벨기에의 요새들을 분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베낀 책 들
Eric D. Brose, The Kaiser’s Army –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Antulio J. Echevarraia Jr, After Clausewitz – German Military Thinkers before the Great War
David G. Herrmann, The Arming of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First World War
Jonathan M. House, Combined Arms Warfare in the Twentieth Century
Jay Luvaas, The Military Legacy of the Civil War – The European Inheritance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Geoffrey Wawro, The Franco-Prusian War – The German Conquest of France in 1870-18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