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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12일 월요일

미서전쟁과 미국의 전시동원

미서전쟁은 짧은 기간 동안 전개되었고 규모도 유럽의 기준에서 본다면 그리 큰 전쟁이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몇 년 뒤 벌어진 러일전쟁이 1차대전을 예고하는 듯한  산업화된 근대전쟁의 양상을 뚜렷이 보여준 것과 대비가 됩니다. 대규모 함대결전, 그리고 기동전과 근대적 요새에 대한 포위전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전쟁 양상이 나타난 러일전쟁에 비하면 미서전쟁은 소박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서전쟁은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입장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점을 몇가지 보여줍니다. 이미 산업적으로 대국으로 성장해 있던 미국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전쟁 준비는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이 상태로 태평양과 대서양이라는 두개의 대양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은 엄청난 과업이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전쟁 준비는 이런 준비부족을 극복하는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물론 국력이 받쳐 주기 때문에 부실한 전쟁 준비가 어떻게든 극복이 되는 것이긴 합니다만.

이 글에서는 기본적인 병력, 수송, 장비 및 보급 문제만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행정과 인사문제까지 들어가면 정리하는 것도 좀 더 어렵고 글이 더 길어질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전시동원이라고 하면 일단 첫번째로 병력 동원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사람이 있어야 싸우죠. 미국이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할 당시 미육군은 겨우 28,000명 밖에 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미국과 스페인의 관계는 이미 1897년 초 부터 악화되고 있었지만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매킨리William McKinley가 본격적으로 전시동원을 고려하기로 한 것은 선전포고가 이루어지기 한달 전에 불과했습니다.1) 전쟁준비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었습니다. 다행인 점이라면 상대가 스페인이었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육군이 3만명도 되지 않는 상황인데다 선전포고가 전쟁 준비도 갖추기 전에 일어났기 때문에 미국은 각 주의 “주방위군”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시기 미국의 “주방위군”은 오늘날과 같은  “주방위군”으로 체계가 잡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의 병력동원은 엉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실제로 당시의 미국은 물론이고 현재의 역사가들도 미서전쟁 당시 미국의 민병대 동원은 실패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매킨리 대통령은 초기에 원정을 위해 125,000명의 동원을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동원규모가 수정되어 연방정부는 182,687명의 병력을 동원하기로 하고 각 주지사들에게 민병대의 동원할 것을 통보했습니다.2) 대규모의 대외원정이 연방군이 아닌 주의 민병대를 주축으로 실행해야 했던 것 입니다.
주 방위군은 사실상 미군의 주력을 담당할 수 밖에 없었는데 정규 육군이 3만명도 채 안되었던 반면 각 주의 민병대는 1897년 기준으로 총 114,000명이었습니다. 실질적인 전투력은 둘째 치고라도 일단 숫자는 어느 정도 채우고 있었던 셈입니다. 여기에는 기병 4,800명과 포병 5,900명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편제는 제각각이어서 사단급 편제를 갖춘 주는 5개 밖에 되지 않았고 그외에 25개의 여단이 있었습니다.3) 나머지 주방위군 부대들은 연대 이상의 편제가 없었으니 일단 사단 부터 만든 뒤 훈련을 시켜야 쓸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 입니다.
각 주의 병력동원은 상당히 엉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일단 이 당시는 오늘날과 같은 주방위군 체제가 잡혀 있지 않았고 여전히 각 주 민병대의 자율성이 강했습니다. 이 때의 경험으로 미서전쟁 이후 주방위군 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는 했습니다만 이 시점에서는 아직 미래의 일이지요. 몇가지 사례를 들어보지요. 미네소타 주에서는 존스 팜Jones Palm이라는 사람이 친구들과 사설 군사조직을 만든 뒤 주지사와 연방정부 민병대국에 정식 주방위군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가 거부를 당하고 그냥 기존의 주방위군 연대에 입대했습니다. 반면 캔자스 주에서는 주지사 존 리디John Leedy가 기존의 주방위군을 불신하여 새로 지원병을 모집하여 연방정부로 부터 할당받은 4개 연대를 편성했습니다.4) 평시 주방위군의 훈련과 감독을 성실히 했던 주들은 부대편성과 병력 동원이 순조롭게 이루어졌습니다. 매사추세츠, 펜실베니아, 오하이오, 위스콘신 등이 그런 모범적인 사례였습니다. 반면 플로리다, 미주리, 루이지애나, 텍사스와 같은 주들은 상대적으로 주방위군 편성과 동원에서 혼란을 겪었습니다. 평시 훈련과 관리를 소홀히한 주들은 주방위군 대원들의 상당수가 연방군의 체력 검정도 통과 못하는 굴욕을 겪을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5)
게다가 아직 주방위군을 전시에 해외파병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법적, 행정적인 철차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주방위군 대원 중 일부는 소집에 응하지 않았지만 법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어쨌든 병력 동원은 그럭저럭 이루어 졌으며 약 20만명의 주방위군이 미서전쟁 기간 중 동원되었습니다.
실제로 주방위군은 전쟁 기간 중 미군의 중추를 이루었습니다. 비록 유럽의 기준과 비교하면 서투르고 부족한 면이 많았지만 스페인과의 전쟁에 대한 미국인들의 자발적인 참여 열기는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각 사회단체는 물론이고 갑부들 중에서는 자비를 부담하여 1개 연대를 무장시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오하이오주의 한 공무원은 오하이오에서만 10만명의 자원병은 모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을 정도라니 굉장하지요.6) 스페인과의 전쟁을 앞두고 하원의원 헐A. T. Hull이 입안한 이른바 “헐 법안Hull-Bill”은 정규군 만을 원정에 투입하고 주방위군은 국내 방위에만 투입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는데 의회는 물론 각 주의 주지사와 주방위군 단체들의 반발로 폐기되고 주방위군은 대외 원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7)

미국이 전쟁경험의 부족 때문에 준비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은 그 외에도 여러 부문에서 나타납니다. 국내 자원의 동원에서 그런 점이 잘 드러나는데 막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은 다소 부족한 점이 엿보입니다.
철도이동에 관한 규정들은 선전포고가 있고 거의 2주가 지난 5월 8일이 되어서아 육군 군수국장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전까지 군부대의 철도를 이용한 이동은 아무런 규정도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 지고 있었습니다. 육군 군수국은 민간철도회사와의 계약을 통해 철도를 활용했는데 철도부대를 운용하던 독일과는 달리 대규모 군병력의 철도 이동 경험이 없었던 미군은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군수국이 필요한 시기에 민간 철도회사의 차량을 투입하지 못해 부대이동에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미숙한 운용은 침공군의 주요 집결지였던 플로리다 탬파Tampa에는 1천여대의 열차편이 몰려 극심한 정체를 이루었으며 심한 경우에는 탬파행 열차가 직선거리로 대략 700km 떨어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컬럼비아에 묶여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8) 그야말로 대륙적인 규모의 교통정체였습니다.

컬럼비아에서 탬파까지는 직선거리만 해도 어마어마하지요;;;;대륙 규모의 교통정체란;;;

철도와 달리 해상교통은 훨씬 준비가 잘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군수국은 3월 24일 전쟁을 대비해 선박 확보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4월 1일부터 8월 31일 까지 대서양 방면의 작전을 위해서 44척의 선박을 임대했고 추가로 14척을 구입했으며 태평양 방면의 작전에는 17척을 임대하고 2척을 구입했습니다. 이와 별도로 병원선으로 사용하기 위해 존 잉글리스John Englis라는 기선이 구입되어 개조된 뒤 릴리프Relief로 개칭되었습니다.9)
그 다음으로 중요한, 특히 작전 단위의 이동에서 중요한 이동수단은 말과 노새와 같은 축력이었습니다. 당시 편제상 미육군의 기병중대는 말 126마리, 보병중대는 12마리, 경포병 포대는 126마리의 말을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10) 그렇기 때문에 수송용 동물의 조달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미국의 방대한 생산력 덕분에 마필의 조달은 쉽게 이루어졌습니다. 미국은 미서전쟁 기간 중 기병용 말 10,000마리, 포병용 말 2,500마리, 견인용 노새 17,000마리, 등짐용 노새 2,600마리를 조달했습니다. 반면 견인용 수레는 약간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노새 6마리가 끄는 미육군의 표준형 수레는 민간시장에서 생산하지 않는 것이라 결국 육군의 기준에는 미달하는 민수용인 4마리가 끄는 수레를 3,600대 구입해야 했다고 합니다.11) 미육군의 표준형 노새 6마리 수레는 4천파운드의 수송량을 가졌는데 민수용인 노새 4마리 수레는 3천파운드 이하로 적재하도록 권장되었다고 합니다.12)

장비와 물자의 조달은 매킨리 대통령이 병력동원을 결심한 3월 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미육군은 위에서 언급한 헐 법안에 따라 주방위군은 본토 방위에 투입하고 원정군은 정규군을 중심으로 한 7만5천명에서 많아봐야 10만명 정도면 충분하다는 계획하에 물자 조달을 시작했기 때문에 헐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고, 또한 전쟁의 규모가 커져 수십만명의 주방위군을 무장시켜 원정군에 합류시켜야 하는 상황이 되자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없었습니다.13) 당장 쿠바 침공 부터 미육군이 당초 예상한 규모를 훨씬 넘어서는 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주방위군 및 지원병을 동원해야 했으며 이것은 장비와 물자조달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게 됩니다.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면 켄터키 주방위군 소속의 한 연대는 집결지로 지정된 치카마우가에 도착했을때 위스키는 잔뜩 챙겨왔지만 소총은 단 한정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1개사단의 절반에 해당되는 2개연대가 무장이라곤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당장 연방군이 가진 물자를 모조리 털어서 지원병들을 장비시켜야 했고 이것은 정부가 계약한 업체들이 쉽게 공급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14) 군수국Quartermaster Department과 병기국Ordnance Department은 4월 20일이 넘어서야 본격적으로 군수물자를 발주하였습니다. 병기국은 4월 30일까지 5만3천정의 크랙-요르겐슨Krag-Jörgensen소총과 1만5천정의 카빈을 구할 수 있었는데 20만에 육박하는 주방위군이 소집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이게 턱없이 모자란 수준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15) 이런 상황에서 급하게 장비를 조달하다 보니 문제가 속출했습니다. 병기국이 윈체스터사에 1만정의 소총을 먼저 주문했다가 이것들이 육군이 요구한 성능기준에 미달해 20만달러를 허공에 날린 일도 있었습니다.16) 스프링필드 조병창은 근로자를 6백명에서 10시간 2교대 1,800명으로 늘렸고 소총 생산은 3월 중순 하루 120정에서 8월 중순에는 하루 363정으로 늘어납니다.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총은 부족했기 때문에 주방위군과 지원병으로 구성된 부대는 초기에 흑색화약을 사용하는 구식 스프링필드 소총을 장비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전쟁 발발 당시 26만정 가까운 재고가 있었다고 하는군요.18)
다 른 모든 병과와 마찬가지로 포병도 준비가 매우 부실했습니다. 1896년 당시 미육군은 야전포병의 표준장비인 3.2인치 야포를 150문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1898년 전쟁이 발발하자 14개의 정규군 포병 포대는 포대당 6문의 편제를 갖출 수 있었으나 지원병으로 새로 편성된 포대는 포대당 4문의 편제를 갖춰야 했습니다.19)
또한 무연화약의 생산도 문제였습니다. 이것 또한 평시 상비군의 규모가 적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습니다. 민간기업들은 민수용으로 주로 흑색화약을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닥치고서 군대의 발주에 의해 황급히 시설을 전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시동원이 시작될 당시 민간 기업중 무연화약 생산능력을 갖춘 곳은 세곳 뿐이었습니다. 이때문에 무연화약의 배분은 해군의 함포와 육군의 크랙-요르겐슨 소총 탄환에 최우선적으로 할당되었고 해안포와 야전포병에는 임시변통으로 흑색화약이 보급되었습니다. 야전포병에 대한 무연화약 구입은 5월이 되어서야 시작되었고 전쟁 내내 무연화약 보급은 부족했습니다.20)
그 밖의 군장류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부족한 재고량을 민간기업의 생산능력으로 보충하려 했으나 위에서 언급한 무연화약과 마찬가지로 민간기업들은 생산해 본 경험이 없는 군수물자를 생산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실제 생산된 것들도 조악한 품질이 많았던 모양입니다.21) 탄입대 같은 것은 지금 우리의 기준으로 본다면 꽤 단순한 물건인데 이런 것 조차도 당시 미육군의 품질 기준을 통과하는데 꽤 어려움을 겪었던 모양이더군요.

미서전쟁 기간 중 미국의 전시동원을 보면 아무리 방대한 산업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이 바로 군수물자 생산능력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차대전 당시 미국은 방대한 동원력을 보여주었지만 거기에는 미서전쟁과 1차대전을 거치면서 축적된 경험과 전간기 동원을 위한 많은 연구가 바탕에 깔려있었습니다. 남북전쟁 이후 30년이 지난뒤 갑자기 전쟁에 뛰어든 미서전쟁기의 미국은 그와는 동떨어진 존재였습니다. 군대를 어떻게 유지하고 조직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개념도 부족했고 민간부문의 경제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하는 능력도 부족했습니다. 위에서 열거한 몇가지 극단적인 사례처럼 경험부족으로 인한 심각한 비효율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저런 시행착오를 극복하면서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고 이런 경험이 조금씩 쌓여가면서 마침내 2차대전 시기에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방대한 전시동원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1) Jerry Cooper, The Rise of the National Guard : The Evolution of the American Militia, 1865-1920,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97), p.97
2) Michael D. Doubler, Civilian in Peace, Soldier in War : The Army National Guard, 1636-2000,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3), p.129
3) Graham A. Cosmas, An Army for Empire : The United States Army in the Spanish-American War, (Texas A&M University Press, 1998), pp.6~7
4) Jerry Cooper, Ibid., pp.99~100
5) Jerry Cooper, Ibid., pp.102~103
6) Graham A. Cosmas, Ibid., p.86
7) Jerry Cooper, Ibid., pp.97~98; Graham A. Cosmas, Ibid.,  pp.82~89
8) “The Dodge Commission Assesses the Work of the Quartermaster Department in the War with Spain”, United States Army Logistics 1775~1992. Vol.2, (CMH, US Army, 1997), p.336
9) “The Dodge Commission Assesses the Work of the Quartermaster Department in the War with Spain”, United States Army Logistics 1775~1992. Vol.2, (CMH, US Army, 1997), pp.337~338
10) “Official Allowances for Supplies, Equipment, and Transprot, 1898”,  United States Army Logistics 1775~1992. Vol.2, (CMH, US Army, 1997), p.346
11) Graham A. Cosmas, Ibid.,  p.151
12) “Official Allowances for Supplies, Equipment, and Transprot, 1898”,  United States Army Logistics 1775~1992. Vol.2, (CMH, US Army, 1997), p.346
13) Graham A. Cosmas, Ibid.,  pp.82~84
14) Graham A. Cosmas, Ibid.,  p.124
15) Graham A. Cosmas, Ibid.,  p.148
16) Graham A. Cosmas, Ibid.,  p.137
17) Graham A. Cosmas, Ibid.,  p.149
18) Graham A. Cosmas, Ibid.,  p.154
19) Janice E. McKenny, The Organizational History of Field Artillery, 1775~2003, (CMH, US Army, 2007), pp.85~88;  Graham A. Cosmas, Ibid.,  p.152
20) Graham A. Cosmas, Ibid.,  pp.152~153
21) Graham A. Cosmas, Ibid.,  pp.156~157

2010년 3월 29일 월요일

미육군 제7군에 대한 1950년대의 전시 증원계획

넵. 땜빵 포스팅입니다.

1950년대 미육군의 전시동원계획 중 독일 방어를 담당한 제7군에 대한 증원계획을 표로 만들어 봤습니다.


1953년 12월계획
1954년 12월계획
D-Day
350RCT(오스트리아)
351RCT(오스트리아)
350RCT(오스트리아)
D+30
44보병사단(미국)
1기갑사단(미국)
82공수사단(미국)
2보병사단(미국)
1기갑사단(미국)
82공수사단(미국)
D+31
보병사단×3(미국)
보병사단×(극동)
공수사단×1(미국)
보병연대전투단×1(카리브해)
공수연대전투단×1(미국)
기갑기병연대×2(미국)
D+60
3기갑기병연대(미국)
D+91
보병사단×3(미국)
보병사단×1(태평양)
기갑사단×1(미국)
공수사단×1(미국)
기갑집단×1(미국)
기갑기병연대×1(미국)
D+120
D+150
D+180

1955년 12월계획
1956년 12월계획
D-Day
D+30
1보병사단(미국)
3보병사단(미국)
1기갑사단(미국)
1보병사단(미국)
4보병사단(미국)
1기갑사단(미국)
D+31
D+60
2기갑기병연대(미국)
25보병사단(태평양)
기갑기병연대×2(미국)
D+91
기갑집단×1(미국)
기갑기병연대×1(미국)
D+120
82공수사단(미국)
82공수사단(미국)
4기갑사단(미국)
D+150
4기갑사단(미국)
25보병사단(태평양)
3보병사단(미국)
D+180
보병사단×5(미국)
기갑사단×1(미국)
주방위군 보병사단×4(미국)
주방위군 기갑사단×1(미국)

1957년 12월계획
1959년 1월계획
D-Day
D+30
1보병사단(미국)
4보병사단(미국)
101공수사단(미국)
4보병사단(미국)
82공수사단(미국)
101공수사단(미국)
3기갑기병연대(미국)
D+31
D+60
2기갑기병연대(미국)
D+90
82공수사단(미국)
D+120
2기갑사단(미국)
1보병사단(미국)
D+150
3보병사단(미국)
2보병사단(미국)
2기갑사단(미국)
주방위군 보병사단×2(미국)
D+180
주방위군 보병사단×5(미국)
주방위군 기갑사단×1(미국)
주방위군 보병사단×3(미국)
주방위군 기갑사단×1(미국)

이 표는 Ingo Trauschweizer, The Cold War U.S. Army : Building Deterrence for Limited War(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8), pp.245~248의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 입니다.

표 에서 재미있는 점은 미군의 증원 속도가 갈수록 늦어진 다는 것 입니다. 1953년 계획만 하더라도 D+30~31일에 대부분의 증원병력이 도착하도록 되어 있는데 1954년 부터는 D+30일에 3개 사단이 증원된 뒤 한참 뒤에 증원병력이 도착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물론 독일을 미 제7군 혼자서 방어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다른 NATO군이 존재하고 있었고 독일의 재무장으로 독일군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늘어날 예정이긴 했으니 말입니다.

2009년 10월 21일 수요일

미 육군의 프랑스제 야포 채용

예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번 했습니다만 이번에는 순수하게 "야포" 이야기만 해 볼까 합니다.

1차대전이 장기화 되면서 서부전선에서는 무시무시한 화력전이 전개되었고 여기에 대해서는 대서양 건너의 미육군에서도 심각하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대륙의 불똥이 언제 바다 건너까지 튈지 모르는 일이었으니 말입니다.

그 러나 비교적 19세기 말 유럽의 육군군비경쟁과는 무관하게 한발 물러서 있던 미육군의 포병전력은 세계대전에 뛰어들기에는 살짝 모자란 수준이었습니다. 1898년에 미서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육군이 보유한 야포는 123문의 3.2인치 야포, 22문의 3.6인치 야포, 22문의 3.6인치 유탄포, 그리고 소수의 공성포(siege gun)가 전부였습니다. 미국 전쟁부는 이때문에 포병 전력의 확충을 위해 영국으로 부터 34문의 암스트롱 4.7인치 야포와 8문의 6인치 포를 급히 구매해서 배치해야 했습니다.1) 미국 전쟁부는 이 전쟁의 경험과 유럽의 군비경쟁에 자극을 받아 포병전력의 확충에 고심했지만 1차대전에 참전하게 될 때 까지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전쟁부는 유럽대륙의 군비증강에 자극받아 1912년에 새로운 보병사단의 포병개편안을 내놓았습니다. 이 개편안은 1개 보병사단에 1개 포병여단을 두고 이 포병여단은 다시 2개 포병연대로, 그리고 각 포병연대는 2개 대대의 3인치 야포(각 대대당 3인치 야포 12문)과 1개 대대의 4.7인치 유탄포(대대 당 4.7인치 유탄포 8문)로 편성하는 것 이었습니다.2) 이 개편안의 목적은 미육군 보병사단의 포병전력을 유럽대륙의 보병사단 포병편제에 준하는 수준으로 증강하는 것 이었습니다.

※ 그리고 4.7인치 유탄포는 6인치 유탄포를 배치하는 방안으로 교체됩니다.

사실 1차대전 직전에는 포병전력 뿐 아니라 미육군 자체가 전반적으로 전력 강화에 부진을 겪고 있었습니다. 예를들어 1916년의 국가방위법(National Defense Act)이 목표로 한 것은 1921년까지 정규군을 165,000명, 주방위군(민병대)을 450,000명으로 증강하는 것에 그치고 있었습니다.3) 포병 증강을 위한 시도는 1차대전 발발 이전부터 꾸준히 행해지고 있었지만 1917년 까지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채 계획만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포병 증강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조직된 트리트 위원회(Treat Board)는 1915년 4월 17일의 보고서에서 육군의 포병전력을 8년에 걸쳐 3인치 야포 1,968문, 3.8인치 유탄포 936문, 4.7인치 유탄포 312문, 4인치 야포 312문, 7.6인치 유탄포 104문, 11인치 유탄포 72문으로 증강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이 방대한 계획에 필요한 예산은 총 4억8천만 달러로 예상되었습니다.4) 이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단포병의 주력장비가 될 3인치 야포의 개량형, M1916을 예정에 따라 충분히 확보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여전히 현대적 야포의 생산에 필요한 기술적 정보가 부족했으며 이때문에 1916년에는 병기국의 힐맨(L. T. Hillman) 소령을 유럽에 파견하기로 결정합니다. 힐맨 소령은 프랑스, 영국 정부와 접촉해 미국이 필요로하는 기술을 획득하려 했습니다. 프랑스는 처음에 미국측에게 기술을 판매하는 것을 기피했으나 힐맨 소령이 영국과 접촉해 빅커스(Vickers)의 9.2인치 유탄포와 12인치 유탄포의 설계도와 기술을 구매하자 태도를 바꿉니다. 힐맨 소령은 프랑스로 부터 생샤몽(St. Chamond)사의 야포용 완충기 생산권 등 중요한 기술을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5)

미 전쟁부는 1917년 부터 유럽으로 부터 구매한 신기술을 대거 활용해 대규모 포병증강계획에 돌입합니다. 역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사단포병의 주력 장비인 3인치 야포와 6인치 유탄포의 대량생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게 되면서 자체적인 포병증강계획은 차질을 빚게 됩니다. 미국이 이제 막 유럽에서 도입한 신기술을 적용해 개량한 3인치 포는 시험 결과 수많은 문제를 일으켜 예정된 시간까지 유럽에 파견할 육군을 무장시키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M1916은 물론 영국제 18파운드을 바탕으로 한 M1917의 시험 결과도 신통찮았기 때문에 미육군 포병감 스노우(William J. Snow)소장은 "우리는 이번 전쟁에 우리 군대를 야포로 무장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한탄을 했다고 합니다.6) 미국정부는 미국 원정군이 독립적인 지위를 가질 수 있도록 가능한 "미국제" 장비로 무장하길 원하고 있었습니다.7) 하지만 현실은 미국의 "야무진 꿈"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 국 병기국장 크로지어(William Crozier) 소장과 프랑스 병기국장 갸네(M. J. M. Ganne)간에 1917년 5월 25일 진행된 회의에서는 프랑스제 야포를 도입해 미국원정군(AEF)을 무장시키고 미국제 야포는 국내에서 훈련용으로만 사용하는 결정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회의의 결과 프랑스 정부는 1917년 8월 1일 부터 75mm포를, 1917년 10월 1일 부터는 155mm포를 공급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에따라 7월 9일에는 공식적으로 보병사단의 포병편제에서 3인치 포를 프랑스의 75mm포로 교체하고 6인치 포는 155mm유탄포로 교체한다는 명령이 내려집니다.8) 이미 미국원정군의 제 1진 14,000명은 1917년 6월 28일에 프랑스의 생나제르(St. Nazaire)에 도착했으며9) 다음날인 1917년 7월 10일에는 퍼싱 장군이 1919년 6월 까지 총 95개 사단을 편성하고 이 중 80개 사단을 유럽전선에 투입한다는 계획을 제출했습니다. 이것은 유럽에 투입할 80개 사단을 무장시키는데만 총 3,840문의 75mm급 야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당시의' 미국으로써는 단시일내에 그정도의 국산 야포를 배치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는 1918년 11월 11일까지 미육군에 총 3,352문의 각종 야포를 원조하게 됩니다.10)

※ 물론 국제관계가 다 그렇듯 미국도 날로 먹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프랑스 정부에 75mm포 1문당 6톤의 강철을, 155mm유탄포 1문당 40톤의 강철을 제공하기로 했습니다.11)

하 지만 그동안 진행되고 있던 3인치포 등 국산 무기의 개발을 취소하고 새로이 프랑스의 기준에 맞춰 야포와 탄약을 생산하는 문제는 쉽지않은 것이었습니다. 특히 프랑스가 제공하는 설계도 등을 번역하는 등 기술적 문제가 산적해 있었습니다. 75mm 포탄 생산을 위해 프랑스가 제공한 자료들의 번역이 완료된 것은 1917년 12월 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여전히 자국산 야포의 개발에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75mm포 면허생산을 공식적으로 결정한 것은 1918년 2월이 되어서였습니다.12) 그러나 기술적 문제로 생산이 계속 지연되었기 때문에 1차대전 중 미국 국내에서는 프랑스제 75mm포는 단 1문도 생산되지 못했고 대신 영국제 18파운드포를 기초로한 M1917이 724문 생산되는데 그쳤습니다. 미국이 면허생산한 프랑스제 야포는 146문으로 이중 144문이 155mm유탄포였습니다.13)

미국은 1차대전 중 프랑스제 야포를 매우 유용하게 활용했으며 특히 사단포병의 75mm포는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물론 일부 지휘관들은 75mm의 탄두 위력 부족으로 사단포병에 1개 연대의 105mm 유탄포를 배치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지만 전쟁이 끝날때 까지 75mm포는 사단포병의 주력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미육군이 75mm포에 크게 만족했기 때문에 1940년까지도 사단포병에 75mm 대신 105mm를 배치하자는 제안은 진지하게 검토되지 못할정도였다고 하지요.14) 그리고 155mm 구경은 오늘날에는 서방 국가들의 표준적인 야포 구경이 되었습니다. 만약 미국이 원래 계획대로 인치 구경을 사용하는 자국산 야포의 대량생산에 성공했다면 오늘날 표준적인 야포구경은 6인치가 되어 있겠지요.




1) H. A. De Weerd, "American Adoption of French Artillery 1917-1918", The Journal of the American Military Institute, Vol. 3, No. 2, (Summer, 1939), pp.104~105
2) Vardell E. Nesmith Jr, "Stagnation and Change in Military thoght : The Evolutuion of American Field Artillery Doctrine 1861~1905", U.S.Army Command and General Staff College, 1976, p.284
3) Mark E. Grotelueschen, The AEF Way of War : The American Army and Combat in World War I,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p.11
4) De Weerd, Ibid., p.106
5) De Weerd, Ibid., p.108
6) Robert B. Bruce, A Fraternity of Arms : America and France in the Great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3, pp.100~111
7) Elisabeth Glaser, "Better Late than Never : The American Economic War Effort, 1917~1918", Great War, Total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2006, pp.405~406
8) De Weerd, Ibid., p.110
9) Bruce, Ibid., p.91
10) Bruce, Ibid., p.105
11) Bruce, Ibid., p.106
12) De Weerd, Ibid., pp.111~112
13) De Weerd, Ibid., p.116
14) Janice McKenney, "More Bang for the Buck in the Interwar Army: The 105-mm. Howitzer", Military Affairs, Vol. 42, No. 2, (Apr., 1978), pp.80~81

2008년 3월 2일 일요일

국가에 의한 무장력의 독점 - 미국의 방식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지방 영주들이 중앙 정부와의 경쟁에서 도태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바로 ‘화약무기’입니다. J. Hale이 War and Society in Renaissance Europe에서 지적한 대로 화약무기의 도입은 막대한 재정 소모를 불러왔고 이것을 견디지 못하는 체제는 근대의 가혹한 경쟁에서 도태될 수 밖에 없었지요. 결국 근대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돈’이었던 셈 입니다.

사족이 길었습니다.;;;;

미국은 유럽의 근대국가와 달리 건국 이전부터 민병대라는 다소 괴이한 무장조직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민병대는 미국이 독립국가가 된 이후에도 헌법에 의거해 계속해서 존재했습니다. 즉 미국은 중앙정부가 무장력을 독점하지 못한 괴이한 근대국가였던 셈 입니다. 유사시가 아니면 국가가 통제할 수 없고 또 유사시에도 그 통제가 완전하지 못한 무장력이 합법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1908년의 민병대법 Militia Act 개정 이전까지 민병대, 즉 주 방위군의 해외파병은 불법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숫자에서 연방 정규군을 압도하고 있었다는 더 난감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1895년에 미국의 주방위군 병력은 총 115,699명이었는데 이건 당시 연방 정규군의 네 배에 달하는 규모였습니다.

그렇지만 민병대, 즉 주 방위군은 결국 1903년의 민병대법(Militia Act)과 1908년의 민병대법을 통해 연방정부의 강력한 통제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어떻게? 천하의 미리견이라고 별 다를게 있겠습니까? 바로 ‘돈’ 입니다.

19세기 미국의 군인들은 유럽식의 징병제를 미국이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군사제도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현역 장교들은 유럽, 특히 독일의 징병제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들이 보기에 민병대는 자원의 낭비에 불과했습니다.(프로이센의 징병제에 대한 미국의 시각 참조) 현역장교들은 1890년대부터 열심히 민병대 해체, 또는 축소와 강력한 연방 예비군 창설을 주장하고 있었고 각 주정부와 민병대 당국자들은 연방 정부의 간섭에 공개적으로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미국 전쟁부(Department of War)는 1880년부터 모든 주의 민병대 훈련에 연방군 장교의 참석과 검열을 의무화 했는데 이것은 주방위군 간부들의 반발을 사고 있었습니다. 많은 주 들이 전쟁부의 요구대로 연방군 편제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편제로 연대를 편성했습니다.

그렇지만 1890년대 이후로는 주방위군 간부들도 기존의 민병대 체제로는 미래의 전쟁에 대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기관총과 신형 대포가 등장하고 있었는데 이런 신무기들은 점차 민병대나 주 정부 차원에서는 대량으로 장비하기가 어려워 졌던 것 입니다. 또한 미서전쟁에서 드러났듯 미국은 더 이상 고립된 지역강국이 아니라 세계패권국으로 나가고 있었고 주방위군이 변화를 거부한다면 미래의 전쟁에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것이 자명해졌습니다.

결국 주방위군은 자신의 역할을 연방군이 지향하는 연방 정부의 예비군과 헌법이 보장한 자유로운 인민의 민병대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했습니다. 다행히 미국 연방정부는 군대와 달리 예산상의 제약 문제로 대규모 연방군을 유지하는 것 보다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주방위군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쪽을 선호했습니다.(1890년대에 연방 정규군의 병사 1명을 1년간 유지하는데 1,000달러가 든 반면 주방위군은 1인당 24달러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연방정부와 주정부는 주방위군의 역할에 대해 절충점을 찾게 됩니다. 즉 주방위군을 현대화하는 대신 연방정부의 통제를 강화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 결과 제정된 1903년의 민병대법은 주방위군에 대한 연방정부의 통제 강화를 법적으로 보장하게 됩니다. 새로 개정된 민병대법은 과거의 민병대법이 18세 이상 45세의 모든 남성을 대상으로 한 것을 고쳐 민병대를 상설민병대(Organized Militia, 주방위군)과 18세 이상 45세의 모든 남성을 포괄하는 예비민병대(Reserve Militia)로 나누었습니다. 이 중 상설민병대인 주방위군은 연방정부의 예비군으로 기능하는 대신 연방정부로부터 장비와 예산, 각종 훈련에 대한 지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상설민병대에 대한 장비 및 물자, 예산 지원을 보장한 것은 바로 1903년 민병대법의 수정조항 1661조 였습니다. 단, 1903년의 민병대법은 대통령에 의한 민병대 동원 기간을 9개월로 한정하고 여전히 민병대의 동원을 국내로 한정하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법은 이전까지 연방정부의 지원을 무기에만 한정하던 것에서 지원대상을 수송수단, 기타 장비와 여름 훈련기간 동안 주방위군 대원의 월급을 지급하는 것 까지 확대시켜 연방정부의 영향력을 강화했습니다. 즉 돈으로 코를 꿴 셈입니다. 1903년의 민병대법에 의해 주방위군 대원은 대통령의 소집에 무조건적으로 응해야 했으며 또 연방군 군법의 적용을 받게 되었습니다.

민병대법 통과 이후 연방정부의 지원은 폭증해서 1903년~1910년의 기간 동안 한해 평균 430만 달러에 달했으며 1911~1915년 사이에는 한해 평균 500만 달러가 되었습니다. 1803년부터 1899년까지 연방 정부가 민병대에 지원한 예산이 모두 합쳐 2200만 달러에 불과했으니 물가의 상승을 감안하더라도 1903년 민병대법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왔는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이었던 것은 수정조항 1661조에 따른 예산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연방군’ 장교였습니다. 연방군의 검열관은 민병대법에 의해 주방위군의 훈련을 참관, 감독하고 예산 지원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이제는 주방위군이 연방의 간섭을 운운하며 저항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진 것 입니다.

1908년에는 전쟁부 장관 라이트(Luke E. Wright)에 의해 오늘날의 주방위군국(Bureau of National Guard)의 전신인 민병대과(Division of Militia Affairs)가 창설되었고 초대 국장으로는 해안포병단(Coprs of Coastal Atillery)의 위버(Erasmus M. Weaver) 중령이 임명됩니다. 민병대과는 주방위군에 대한 전쟁부의 통제를 더욱 더 강화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특히 민병대과는 주방위군의 예산과 조직, 편성, 훈련 뿐 아니라 유사시 동원까지 총괄하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민병대과는 1910년에는 장성급 직위로 격상되고 참모총장 직할 부서가 됩니다.

한편, 1908년의 민병대법 개정은 주방위군 대원의 동원 기간을 9개월에서 대통령의 직권에 따라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도록 했으며 추가로 대통령의 명에 따라 해외파병도 가능하도록 개정했습니다. 이로서 미국 헌법에 기초한 자율적 민병대는 사실상 사라지게 됩니다.

결국 국가에 의한 무장력 독점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었고 미국도 그 점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시기와 방식은 다소 달랐지만 지방의 무장력이 중앙과의 경쟁에서 굴복한 결정적인 원인이 돈이라는 점은 미국이나 유럽이나 마찬가지였던 셈 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프랑스로 망명해 루이 12세에게 이탈리아 원정을 부추긴 밀라노 사람 트리불치오(Gian Giacomo Trivulzio)가 남긴 명언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전쟁에는) 다음의 세가지가 필수적이다. 돈, 더 많은 돈, 그리고 더 더욱 많은 돈 이다.”

참고서적

Jerry Cooper, The Rise of the National Guard : The Evolution of the American Militia 1865-1920, University Press of Nevraska, 1997
Michael D. Doubler, Civilian in Peace, Soldier in War - The Army National Guard : 1636-2000,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3

2006년 8월 22일 화요일

미국의 주방위군 혹은 구사대의 활약에 대해 : 1865-1899

Jerry Cooper의 The Rise of the National Guard : The Evolution of the American Militia : 1865-1920의 47쪽에는 아주 재미있는 통계 자료가 하나 있다. 1868년부터 1899년까지 주방위군 동원 사유에 대한 통계인데 대략 다음과 같다.

선거 난동 진압 : 20회
행정 기관 지원(대개는 난동 진압) : 80회
죄수 호송 : 106회
인종 관련 사고 : 31회
기타 폭동 진압 : 41회
노동 문제 관련 : 118회
인디언 문제 : 15회
총 계 : 411회

주방위군이 동원된 사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노동 문제와 관련된 경우다.

19세기 중-후반의 주방위군 지휘관들은 대중적인 지지를 끌기 위해 파업 진압에 열심이었다고 한다. 보수적인 미국 중산층들이 노동 운동에 부정적이어서 파업 진압을 통해 후원금과 주방위군 지원률을 높이려 했다고 한다. 얼씨구.
여기다가 지극히 당연하게도 주방위군 동원을 명령할 수 있는 주지사는 99% 자본가들의 편에 있었기 때문에 요청만 들어오면 즉시 출동 명령을 내려줬다고 한다.
당시 미국은 지방 경찰력이 미약했기 때문에 주방위군이 구사대의 역할을 떠맡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오지의 광산파업이나 철도 파업의 경우 말 그대로 한 줌 밖에 안되는 보안관들로는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주방위군이 열심히 뛸 수 밖에 없었다.
카네기 같이 돈이 철철 남아도는 자본가들은 아예 주방위군들을 구사대(!)로 고용하기도 할 정도였다. 카네기의 주방위군 구사대들이 대활약(!)을 펼친 홈스테드(Homestead) 제철소 파업 진압은 미국 노동운동사에서도 꽤 유명한 에피소드가 아니던가!

미국의 노동운동이 1880년대로 접어 들면서 과격한 양상을 띄게 되자 주방위군의 활약도 늘어났다. 1886년 미국 최대의 노동 단체인 Knights of Labor가 일리노이, 캔사스, 텍사스, 미주리에서 철도 파업을 일으키자 주방위군은 이 파업을 순식간에 진압해 버리는 위력을 과시했다.
그리고 1894년에 연달아 터진 대규모 파업은 무려 32,000명의 주방위군이 동원되는 사태를 불러왔다.(이것은 남북전쟁 이후 최대규모였다.) 그리고 이듬해 브루클린의 노동자 소요사태에는 6,000명의 주방위군이 진압을 위해 투입됐다.

당연히 미국의 노동 단체 지도부는 노동자들이 주방위군에 지원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저지했고 주방위군 출신이 취업하는 것을 열심히 방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총질에 관심이 많거나 부족한 임금을 주방위군 수당으로 때우려는 노동자들이 주방위군에 지원하는 사례는 많았다.
물론 많은 주방위군 지휘관은 노동 단체 지도부와 비슷하게 노동자들이 주방위군에 지원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물론 가끔씩 투표를 의식한 주지사들이 주방위군의 중립을 유지하려 노력한 사례가 가끔은 있었다고 한다. 1894년 크리플 크릭(Cripple Creek) 탄광 파업사태에서 콜로라도 주지사였던 웨이트(David Waite)는 선거를 의식해 주방위군을 동원하면서 유혈 충돌을 저지하라는 지시만 내렸다고 한다. 주 방위군은 파업 노동자와 구사대의 무장을 해제 시키고 해산 시켜 크리플 크릭 파업은 이 시기의 파업 치고는 유혈 사태 없이 끝나게 됐다.

어쨌거나 노동자가 주방위군에 들어가서 구사대를 하는 해괴한 사례는 19세기 말의 미국에서는 꽤 흔한 일이었다고 한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가 21세기 대한민국에 사는 것은 그럭 저럭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2006년 5월 8일 월요일

1차 세계대전과 미국의 흑인 부대(재탕)

미국사와 관련된 책을 조금 읽다 보면 흑인에 대한 차별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장기간 존속되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당장 1960년대에 흑인 대학생들을 백인 학교에 입교 시키기 위해서 주 방위군을 동원해야 될 정도였으니. 흑인에 대한 인종적 차별이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없어 지지 않은 이유를 들자면 돌팔이 인류학자들의 인종 비교 연구가 과학이라는 탈을 쓰고 이른바 “식자층”에게 까지 널리 퍼졌다는 것이 있습니다. 흑인에 대한 차별이 과학의 탈을 쓰고 자행 되었으니 참 과학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흑인은 인종적으로 열등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보니 미국 정부는 흑인을 무장시키는 것을 별로 달가워 하지 않았습니다. 남북전쟁 때야 노예해방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 흑인 부대를 대규모로 조직했지만 남북전쟁이 끝난 뒤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1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 미국 전쟁성(War Department)는 흑인 부대를 대규모로 편성하는데 대해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물론 뉴욕 15 보병연대와 일리노이 8 보병연대같이 흑인 장교와 흑인 사병으로 편성된 주방위군 부대가 있긴 했습니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드문 예에 해당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의 참전이 결정되면서 흑인의 전쟁 동원이 필요해 지자 흑인 부대를 증편하는 방안이 전쟁성의 민병대 국(Militia Bureau)에서 나왔습니다. 민병대 국은 흑인 연대 세개를 편성해서 이것으로 독립 흑인 보병여단을 만들자는 안을 내 놓았습니다. 이에 대해서 당시 전쟁성 장관이었던 베이커는 흑인 주방위군 3개 연대와 징집한 흑인 연대 한 개로 임시 흑인 사단을 편성하자는 안을 내놓습니다.

이렇게해서 뉴욕 15 보병연대는 369 보병연대로, 일리노이 8 보병연대는 370 보병연대로, 그리고 기타 독립 흑인 보병부대들은 372 보병연대로 통합 되었고 새로 징집한 흑인 병사들로 371 보병연대가 편성 되었습니다. 이렇게 편성된 4개 흑인연대로 1918년 1월 5일에 93 보병사단이 편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단 직할대의 편성이 완료 되지 못 했기 때문에 93 보병사단은 보병연대 네개만 가진 연대들의 집합체가 되었습니다.

유럽전선에 투입된 93 보병사단은 프랑스군에 분산 배치되게 되었습니다. 1918년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장기간의 전쟁으로 병력 부족을 심하게 겪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미군 부대를 예하에 두려고 미국 정부에 요청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미국 원정군 사령관 퍼싱은 프랑스군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93 보병사단 예하의 4개 연대를 각각 프랑스군 사단에 배속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이렇게 해서 가장 먼저 프랑스에 도착한 제 369보병연대가 프랑스군 16 보병사단에 배속되어 전투를 치루게 됐습니다.
흥미롭게도 퍼싱은 당시 다른 미국 장군들과 달리 흑인 부대가 훌륭한 전투 부대이기 때문에 비전투 임무에 돌리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일각에서는 퍼싱이 흑인 사단을 해체해서 프랑스군에 배속시킨 것이 퍼싱의 인종 차별적 행동이라고 비판하는데 전쟁중의 퍼싱의 행동이나 언사를 보면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1918년 6월에 프랑스 정부가 퍼싱에게 흑인연대 8개를 프랑스군에 증원해 줄 수 없느냐고 했을 때 퍼싱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하는 군요.

“유색인종연대들(Colored regiments)은 미국 시민들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관은 이들 부대들을 다른 백인 부대들과 같은 방식으로 운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퍼싱이 최초로 편성된 흑인 연대 네개를 프랑스군에 배속 시킨 것은 프랑스와의 동맹을 고려한 정치적 행동이라는게 지배적인 의견입니다. 사실 1918년에는 미군의 전투경험과 대부대 운용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에 흑인 부대뿐 아니라 백인 부대들도 대대급으로 해체해서 영국군에 배속시키자는 주장도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사단 편제가 93사단은 사단 편제를 제대로 가지지 못해서 사단급 작전이 불가능 했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퍼싱도 어쩔 수 없는 백인인지라 흑인은 훌륭한 병사지만 장교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퍼싱 자신도 젊은 시절 잠시 흑인 부대를 지휘했었다고 하죠. 퍼싱은 백인 장교가 흑인 병사와 부사관을 지휘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운용 방식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프랑스군에 분산 배치된 흑인 병사들은 1918년 7월의 반격 작전에서 큰 활약을 했다고 합니다. 흑인 병사들의 용맹 때문에 이들을 지휘한 백인 장교들은 큰 감명을 받고 인종 차별적 태도를 버리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Halem’s Hell Fighters라는 명칭을 얻게 된 뉴욕 369 보병연대는 이때 보인 공적으로 1918년 12월 18일에 프랑스 정부의 부대 표창을 받게 됩니다.

그렇지만 흑인들에 대한 차별은 계속 이어져서 2차 대전때도 흑인들은 소규모 독립 부대로 참전하는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결국 인종별 부대를 편성하는 차별이 시정 된 것은 베트남전 부터였습니다.

미국 흑인들의 평등을 위한 투쟁은 지극히 당연한 인간적 평등을 얻기 위한 대가치고는 너무 비싼 대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