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ry Cooper의 The Rise of the National Guard : The Evolution of the American Militia : 1865-1920의 47쪽에는 아주 재미있는 통계 자료가 하나 있다. 1868년부터 1899년까지 주방위군 동원 사유에 대한 통계인데 대략 다음과 같다.
선거 난동 진압 : 20회
행정 기관 지원(대개는 난동 진압) : 80회
죄수 호송 : 106회
인종 관련 사고 : 31회
기타 폭동 진압 : 41회
노동 문제 관련 : 118회
인디언 문제 : 15회
총 계 : 411회
주방위군이 동원된 사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노동 문제와 관련된 경우다.
19세기 중-후반의 주방위군 지휘관들은 대중적인 지지를 끌기 위해 파업 진압에 열심이었다고 한다. 보수적인 미국 중산층들이 노동 운동에 부정적이어서 파업 진압을 통해 후원금과 주방위군 지원률을 높이려 했다고 한다. 얼씨구.
여기다가 지극히 당연하게도 주방위군 동원을 명령할 수 있는 주지사는 99% 자본가들의 편에 있었기 때문에 요청만 들어오면 즉시 출동 명령을 내려줬다고 한다.
당시 미국은 지방 경찰력이 미약했기 때문에 주방위군이 구사대의 역할을 떠맡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오지의 광산파업이나 철도 파업의 경우 말 그대로 한 줌 밖에 안되는 보안관들로는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주방위군이 열심히 뛸 수 밖에 없었다.
카네기 같이 돈이 철철 남아도는 자본가들은 아예 주방위군들을 구사대(!)로 고용하기도 할 정도였다. 카네기의 주방위군 구사대들이 대활약(!)을 펼친 홈스테드(Homestead) 제철소 파업 진압은 미국 노동운동사에서도 꽤 유명한 에피소드가 아니던가!
미국의 노동운동이 1880년대로 접어 들면서 과격한 양상을 띄게 되자 주방위군의 활약도 늘어났다. 1886년 미국 최대의 노동 단체인 Knights of Labor가 일리노이, 캔사스, 텍사스, 미주리에서 철도 파업을 일으키자 주방위군은 이 파업을 순식간에 진압해 버리는 위력을 과시했다.
그리고 1894년에 연달아 터진 대규모 파업은 무려 32,000명의 주방위군이 동원되는 사태를 불러왔다.(이것은 남북전쟁 이후 최대규모였다.) 그리고 이듬해 브루클린의 노동자 소요사태에는 6,000명의 주방위군이 진압을 위해 투입됐다.
당연히 미국의 노동 단체 지도부는 노동자들이 주방위군에 지원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저지했고 주방위군 출신이 취업하는 것을 열심히 방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총질에 관심이 많거나 부족한 임금을 주방위군 수당으로 때우려는 노동자들이 주방위군에 지원하는 사례는 많았다.
물론 많은 주방위군 지휘관은 노동 단체 지도부와 비슷하게 노동자들이 주방위군에 지원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물론 가끔씩 투표를 의식한 주지사들이 주방위군의 중립을 유지하려 노력한 사례가 가끔은 있었다고 한다. 1894년 크리플 크릭(Cripple Creek) 탄광 파업사태에서 콜로라도 주지사였던 웨이트(David Waite)는 선거를 의식해 주방위군을 동원하면서 유혈 충돌을 저지하라는 지시만 내렸다고 한다. 주 방위군은 파업 노동자와 구사대의 무장을 해제 시키고 해산 시켜 크리플 크릭 파업은 이 시기의 파업 치고는 유혈 사태 없이 끝나게 됐다.
어쨌거나 노동자가 주방위군에 들어가서 구사대를 하는 해괴한 사례는 19세기 말의 미국에서는 꽤 흔한 일이었다고 한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가 21세기 대한민국에 사는 것은 그럭 저럭 다행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