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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6일 일요일

이집트의 ‘헌정’이라는 유령(Egypt's Constitutional Ghosts)

중동의 정세가 급박히 돌아가다 보니 쏟아지는 기사들을 읽는 것도 일이군요. 리비아가 사실상 내전 상태로 들어가 버리니 국내 언론에서 이집트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집트 문제도 현재 진행형이고 제 개인적으로는 이집트쪽이 훨씬 흥미가 당깁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3월 19일에는 헌법 개정을 위한 투표가 실시될 예정입니다. 무바라크가 장기집권을 해 온 배경에는 문제 투성이의 이집트 헌법이 있고 이 헌법은 개혁을 외치는 인사들의 불만 대상이기도 합니다. 헌법 개정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관측이 나왔는데 제가 읽은 것 중에서 재미있었던 글을 조금 소개해 볼까 합니다.

먼저 오늘 소개할 이 글은 지난 2월 15일 포린 어페어즈 인터넷판에 실린 Nathan J. Brown의 ‘이집트의 헌정이라는 유령(Egypt's Constitutional Ghosts)’ 이 라는 글 입니다.(제목은 아주 살짝 의역을 했습니다) 물론 이집트 군부가 지난 2월 26일에 헌법개정안을 내놓고 이번달에 투표를 실시하기로 했기 때문에 약간 늦은 감이 없진 않습니다. 이미 읽어 보신 분들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되고요. 하지만 이집트 헌정 전통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잘 설명한 만큼 현재의 헌법 개정 문제에 대한 배경 설명으로는 적절하리라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이해 당사자가 많은 만큼 이집트의 헌법 개정이 순조롭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은 주목할 만 하다고 생각됩니다.



호스니 무바라크의 통치가 종식된 다음 새로운 미래를 건설해 나가려는 이집트 인들은 당연하게도 이집트의 헌정사(constitutional past)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문제점들을 뽑아내길 희망하고 있다. 군사위원회가 무바라크에게서 권력을 양도받은 이후 이집트의 정치적 반대세력들은 직접적인 법률과 법적 절차에 대해 명확하게 요구하려 하고 있다.

현재의 헌법은 1971년 처음 제정되어 그 후 수년간 여러 번 수정되었지만 이집트의 헌법 자체는 1세기 이전에 만들어 졌다. 이집트는 1882년에 처음으로 헌법을 제정하려 했으며 이때 의회는 행정부와의 관계에 대한 기본법을 통과시켰다. 이집트가 1923년 대영제국으로 부터 독립을 획득했을때 의회체제와 왕정을 통합하려는 두 번째의, 그리고 보다 포괄적인 법안이 어렵게 나마 만들어졌다.

1952년 군사쿠데타로 1923년 헌법이 폐기되는 와중에 이집트의 법학자들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가치에 입각한 공화국 헌법을 제정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1954년 이집트의 새로운 군사 통치자들은 법학자들의 법안을 보류시키고 그 대신 자신들의 사상적, 조직적 요구에 적합한 일련의 법안을 선포했다. 이 새로운 법은 이집트의 국가조직을 1970년 사망할 때 까지 이집트의 대통령직을 차지한 가말 압델 나세르가 모든 권한을 가지는 일당체제에 넘겨버렸다.

이집트는 1971년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는데 이것은 보다 복잡했으며 훨씬 오래 지속되었다. 안와르 알 사다트는 나세르의 뒤를 잇는 과정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정당과 안보 기구등 여러 조직에 자신의 경쟁자가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사다트는 동시에 이집트의 이데올로기를 사회주의에서 종교쪽으로 조심스럽게 전환하는 방식으로 재조정하고자 했다. 사다트는 새 헌법을 제정해서 두 가지 문제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다트는 대규모의,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세력이 참여한 위원회를 소집했다. 페미니스트, 이슬람 율법학자들, 자유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민족주의자들, 그리고 기독교 교회의 대표자들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모두 사다트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정당은 약화시키고 명목상으로 법적 기구들은 강화하는 한편 나세르식의 독재체제에서 가혹했던 점은 멀리 할 것을 약속한 것이다.

그 결과 만들어진 법안은 모두에게 미미한 것을 약속한 반면 대통령에게는 모든 것을 주었다. 헌 법은 개인의 자유, 민주적인 절차, 사법부의 독립을 보장했다. 새 헌법은 사회주의와 이슬람 양쪽을 긍정했다. 하지만 모든 공약에는 동시에 함정이 있었고 모든 자유에는 대통령의 권한이나 이집트의 강력한 안보 기구들을 제어하기 어렵게 하는 궁극적인 허점이 있었다.

지난 40여년간 이집트의 대통령은 헌법을 땜빵으로 고쳐서 이용해 왔다. 사다트는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조치를 더 취하는 한편 이슬람에 대해서는 더 많은 양보를 했다. 사다트는 일당 체제를 폐기하고 대통령의 정당 - 현재 몰락하고 있는 국가민주당 - 이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형식적으로 다원화된 정치 체계로 대체했다. 하나를 양보하면 그 만큼 반대로 얻어내는 것 이었다. 1980년, 언론을 통제하던 하나의 정당이 해체되자 그 권한은 새로운 국가언론위원회로 넘어갔다.

무바라크는 대부분의 대통령 재임 기간 중 헌법을 방치해 뒀는데 그는 이집트가 사상과 국가 기구의 개편을 계속 하는 대신 안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집트는 일부이나마 점진적인 변화를 했으며 간혹 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기도 했다. 무바라크는 사다트가 도입한 제한적인 다당제에서 정당의 참여를 확대했으며 1980년대에는 야당성향의 언론들이,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독립 언론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했다.

이집트의 정치적 행보는 여전히 일직선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1980년대에 들어와 국가 체제가 가혹한 독재기구에 의존하는 경향은 점차적으로 감소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 이러한 억압기구들이 부활했으며 이슬람 과격파는 물론 훨씬 온건한 무슬림 형제단을 상대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1980년대에 들어와 이집트 헌법에 있는 자유주의적인 요소 중 일부가 주로 사법부의 주도하에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984년 제정된 새 사법부법은 이집트의 민사법원과 형사법원에 자율성을 주었으며 정부 조직이 당사자인 재판을 담당하는 법관들로 구성된 국가위원회는 일반 시민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우호적이 되었다.

가장 놀라운 점은 원래 사법부의 다른 조직들을 감독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인  최고헌법재판소였다. 이집트의 사법부는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스스로의 목소리를 높여나갔고 실제로 이집트 헌법에 명시된 권리와 자유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선거법에 대한 일련의 판결들은 보다 개방적인 투표 절차를 취하게 했다. 2005년에 이르자 의회의 5분의 1은 무슬림 형제단이 장악하게 되었다. 그 밖의 다른 군소 정당들은 정권과 연합했지만 느슨한 정당 체계 때문에 이들을 통제하는 것은 더 어려워 졌다.

무바라크 정권은 2007년에 들어와 1971년 헌법에 있는 자유주의적인 요소들을 대부분 폐기하는 일련의 헌법 개정안을 내 놓았다. 여기에는 선거를 사법부의 완전한 관할에서 정권이 관할하는 위원회들의 통제하에 넣는 것, 형식상으로 대통령 후보로 다수의 입후보자를 허용하되 실제로는 유력한 후보자들을 최대한 제한하는 것, 무슬림 형제단이 정당을 결성하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것, 그리고 (유죄판결을 신속하고 확실하게 내리기 위해 사건들을 대통령의 권한으로 군사재판에 넘기는 것과 같이) 이전에는 극도의 긴급 수단이었던 것들을 헌법에 삽입하는 것 등이 있었다.

이랬기 때문에 무바라크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저항 운동이 행동 지침으로 헌법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놀랄일도 아니었다. 수년간 반정부 활동가들과 개혁 운동가들은 1971년 헌법에 있던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요소들이 다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약간의 헌법 조항을 넣는데 초점을 맞춰왔다. 하지만 2007년 개정안은 법안 전체에 교묘한 덫을 깔아놓았다. 땜질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았다. 이집트의 반정부 지도자들이 “혁명”을 말하기 시작했을때 이들은 단지 무바라크를 축출하는 것 뿐 만 아니라 1971년 헌법 자체를 폐기하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타흐리르 광장의 군중들은 2월 11일 헌법적 절차가 방기되고 2월 13일에는 헌법이 효력 정지되자 기세가 오를 수 밖에 없었다. 만약 군부가 이집트를 통치하게 된다면 근본적인 개혁이 가시화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정권이 반대파와 협상하려는 의지에 좌우되며 정치적 재건을 위한 진정으로 포괄적인 절차에 동의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파에게 극도로 위험 부담이 큰 전략이다.

20세기의 이집트 인들은 올바른 정치 질서를 만드는 법률의 힘에 대해 시니컬한 태도를 보여왔다. 하지만 이제 그에 반대되는 상황으로 보인다. 이집트 인들은 훌륭한 법안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배웠다. 현재 새로운 헌정 질서의 요소에 대해 다양한 여론이 존재하고 있다. 무슬림 형제단에서 노동 운동에서 시작한 활동가들에 이르기까지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거의 대부분의 정치 집단은 포괄적인 개혁 방안에 합의할 것이다.

반대파들은 대통령의 권한 축소, 주로 더 독립적이고 강력한 사법기구의 형식을 골자로 하는 사법부의 독립에 대한 확고한 제도적 보장, 사법부의 선거 관리, 특수 법정의 폐지와 (1939년 이래로 거의 끊임없이 계속된) 이집트의 국가 긴급사태 중지,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보다  확고한 수단, 그리고 제대로 된 다당제 체계 등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앞서 언급된 변화들은 세가지 효과를 일으킬 것이다. 첫 번째는 이집트 국민들이 기존의 제도를 훨씬 더 신뢰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는 이러한 변화가 개인의 자유를 진정으로 보호하고 다당제 정치 체제를 보장할 것이라는 점이다. 세 번째는 이를 통해 수평적인 신뢰의 메커니즘을 활성화 하여 이집트의 여러 헌법 조직들이 서로를 견제할 수 있게 할 것이라는 점이다.

세 번째 요소를 보면,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헌정사에 대해 심도깊은 이해를 하고 있다. 이집트는 제도적 절차를 갖춘 국가이지만 이러한 제도들은 모두 대통령에게만 책임을 지는 것 들이었다. 이러한 제도들에 진정한 독립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헌법 조문에 명시된 모호한 약속들이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미국식의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s)을 제안할 필요는 없지만 이집트의 헌법을 제정할 담당자들은 제도적 기구들이 명확하게 구분된 범주에서 통제되는 “분권”을 고려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허무맹랑한 일일까? 긍정적인 전망을 할 수 있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이집트가 깊은 전통과 전문적인 기준을 가진 오래된 헌정적 제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현재 무엇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여론이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모든 헌법적 절차가 정체성과 이슬람에 대한 상징적인 논쟁을 촉발하겠지만 이렇게 이론이 분분한 문제들에 있어서도 현재 이집트의 헌법에 있는 일부 조항들은 대부분의 진영이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집트의 헌정 혁명에 대한 진정한 장애물은 사방에 널려있다. 우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필요한 실질적인 절차가 진행되지 않고 있다. 만약 이집트가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면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가? 기존의 헌법들은 비공식적인 위원회에 의해 작성되었다. 이집트에는 제헌의회와 같이 많은 시간이 걸리고 포괄적인 방식으로 법안을 만들어본 전통이 없다. 이러한 절차를 밟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모든 정당들이 협상에 참여해 진행과정에 동의하는 것이다. 하지만 각 정파는 실질적인 이익에 따라 합의를 도출하려 할 것이며 반대세력들은 본질적으로 통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전술적으로 합의에 임할 것이며 그 과정은 느리고 고될 것이다.

만약 군부 통치자들이 덜 급진적인 해결책을 밀어붙인다면 합의는 더 어려워 질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시점에서 가장 중요하다. 이집트 정부는 현재 (개혁에 대해) 매우 온건한 발언을 하는 한편 아주 미약한 의지만 있는 것으로 보이는 군 지휘관들로 이루어진 위원회의 통제를 받고 있다. 실제로 군부 지도자들은 그저 현재의 헌법을 수정하는데 그치고 싶다는 뜻을 강하게 내비치고 있으며 민주적이거나 포괄적인 절차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의욕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절차는 과거 헌법을 고치거나 대통령을 선출할 때의 방식과 의심스러울 정도로 비슷하게 보인다. 지도자들이 먼저 결정을 내린 다음에야 국민들이 투표를 할 수 있었던.

현시점에서는 이집트의 군부 지도자들의 뜻에 많은 것이 달려 있다. 군부 지도자들은 아직 그들의 선배들이 행했던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가지고 있다. 1952년에 정권을 전복시켰던 장교단은 민정 이양을 약속했던 모하메드 나귀브(Mohammed Naguib) 장군이 이끌고 있었다. 자유주의적인 헌법안은 대부분 나귀브가 통치하던 시기에 작성되었다.

하지만 1954년 나세르가 나귀브를 쫒아내고 현재 이집트 혁명세력이 무릎을 꿇린 바로 그 체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집트 혁명이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데 성공하려면 지금 이집트를 통치하고 있는 장군들에게 나귀브의 영혼이 마법을 부려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3월 2일 포린 폴리시 인터넷판에 실린 Bruce Ackerman의 Parliament to the Rescue를 번역해서 올려 보겠습니다. 이집트 군부가 내놓은 헌법 개정안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글입니다.

2008년 3월 2일 일요일

국가에 의한 무장력의 독점 - 미국의 방식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지방 영주들이 중앙 정부와의 경쟁에서 도태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바로 ‘화약무기’입니다. J. Hale이 War and Society in Renaissance Europe에서 지적한 대로 화약무기의 도입은 막대한 재정 소모를 불러왔고 이것을 견디지 못하는 체제는 근대의 가혹한 경쟁에서 도태될 수 밖에 없었지요. 결국 근대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돈’이었던 셈 입니다.

사족이 길었습니다.;;;;

미국은 유럽의 근대국가와 달리 건국 이전부터 민병대라는 다소 괴이한 무장조직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민병대는 미국이 독립국가가 된 이후에도 헌법에 의거해 계속해서 존재했습니다. 즉 미국은 중앙정부가 무장력을 독점하지 못한 괴이한 근대국가였던 셈 입니다. 유사시가 아니면 국가가 통제할 수 없고 또 유사시에도 그 통제가 완전하지 못한 무장력이 합법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1908년의 민병대법 Militia Act 개정 이전까지 민병대, 즉 주 방위군의 해외파병은 불법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숫자에서 연방 정규군을 압도하고 있었다는 더 난감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1895년에 미국의 주방위군 병력은 총 115,699명이었는데 이건 당시 연방 정규군의 네 배에 달하는 규모였습니다.

그렇지만 민병대, 즉 주 방위군은 결국 1903년의 민병대법(Militia Act)과 1908년의 민병대법을 통해 연방정부의 강력한 통제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어떻게? 천하의 미리견이라고 별 다를게 있겠습니까? 바로 ‘돈’ 입니다.

19세기 미국의 군인들은 유럽식의 징병제를 미국이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군사제도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현역 장교들은 유럽, 특히 독일의 징병제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들이 보기에 민병대는 자원의 낭비에 불과했습니다.(프로이센의 징병제에 대한 미국의 시각 참조) 현역장교들은 1890년대부터 열심히 민병대 해체, 또는 축소와 강력한 연방 예비군 창설을 주장하고 있었고 각 주정부와 민병대 당국자들은 연방 정부의 간섭에 공개적으로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미국 전쟁부(Department of War)는 1880년부터 모든 주의 민병대 훈련에 연방군 장교의 참석과 검열을 의무화 했는데 이것은 주방위군 간부들의 반발을 사고 있었습니다. 많은 주 들이 전쟁부의 요구대로 연방군 편제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편제로 연대를 편성했습니다.

그렇지만 1890년대 이후로는 주방위군 간부들도 기존의 민병대 체제로는 미래의 전쟁에 대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기관총과 신형 대포가 등장하고 있었는데 이런 신무기들은 점차 민병대나 주 정부 차원에서는 대량으로 장비하기가 어려워 졌던 것 입니다. 또한 미서전쟁에서 드러났듯 미국은 더 이상 고립된 지역강국이 아니라 세계패권국으로 나가고 있었고 주방위군이 변화를 거부한다면 미래의 전쟁에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것이 자명해졌습니다.

결국 주방위군은 자신의 역할을 연방군이 지향하는 연방 정부의 예비군과 헌법이 보장한 자유로운 인민의 민병대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했습니다. 다행히 미국 연방정부는 군대와 달리 예산상의 제약 문제로 대규모 연방군을 유지하는 것 보다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주방위군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쪽을 선호했습니다.(1890년대에 연방 정규군의 병사 1명을 1년간 유지하는데 1,000달러가 든 반면 주방위군은 1인당 24달러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연방정부와 주정부는 주방위군의 역할에 대해 절충점을 찾게 됩니다. 즉 주방위군을 현대화하는 대신 연방정부의 통제를 강화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 결과 제정된 1903년의 민병대법은 주방위군에 대한 연방정부의 통제 강화를 법적으로 보장하게 됩니다. 새로 개정된 민병대법은 과거의 민병대법이 18세 이상 45세의 모든 남성을 대상으로 한 것을 고쳐 민병대를 상설민병대(Organized Militia, 주방위군)과 18세 이상 45세의 모든 남성을 포괄하는 예비민병대(Reserve Militia)로 나누었습니다. 이 중 상설민병대인 주방위군은 연방정부의 예비군으로 기능하는 대신 연방정부로부터 장비와 예산, 각종 훈련에 대한 지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상설민병대에 대한 장비 및 물자, 예산 지원을 보장한 것은 바로 1903년 민병대법의 수정조항 1661조 였습니다. 단, 1903년의 민병대법은 대통령에 의한 민병대 동원 기간을 9개월로 한정하고 여전히 민병대의 동원을 국내로 한정하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법은 이전까지 연방정부의 지원을 무기에만 한정하던 것에서 지원대상을 수송수단, 기타 장비와 여름 훈련기간 동안 주방위군 대원의 월급을 지급하는 것 까지 확대시켜 연방정부의 영향력을 강화했습니다. 즉 돈으로 코를 꿴 셈입니다. 1903년의 민병대법에 의해 주방위군 대원은 대통령의 소집에 무조건적으로 응해야 했으며 또 연방군 군법의 적용을 받게 되었습니다.

민병대법 통과 이후 연방정부의 지원은 폭증해서 1903년~1910년의 기간 동안 한해 평균 430만 달러에 달했으며 1911~1915년 사이에는 한해 평균 500만 달러가 되었습니다. 1803년부터 1899년까지 연방 정부가 민병대에 지원한 예산이 모두 합쳐 2200만 달러에 불과했으니 물가의 상승을 감안하더라도 1903년 민병대법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왔는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이었던 것은 수정조항 1661조에 따른 예산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연방군’ 장교였습니다. 연방군의 검열관은 민병대법에 의해 주방위군의 훈련을 참관, 감독하고 예산 지원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이제는 주방위군이 연방의 간섭을 운운하며 저항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진 것 입니다.

1908년에는 전쟁부 장관 라이트(Luke E. Wright)에 의해 오늘날의 주방위군국(Bureau of National Guard)의 전신인 민병대과(Division of Militia Affairs)가 창설되었고 초대 국장으로는 해안포병단(Coprs of Coastal Atillery)의 위버(Erasmus M. Weaver) 중령이 임명됩니다. 민병대과는 주방위군에 대한 전쟁부의 통제를 더욱 더 강화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특히 민병대과는 주방위군의 예산과 조직, 편성, 훈련 뿐 아니라 유사시 동원까지 총괄하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민병대과는 1910년에는 장성급 직위로 격상되고 참모총장 직할 부서가 됩니다.

한편, 1908년의 민병대법 개정은 주방위군 대원의 동원 기간을 9개월에서 대통령의 직권에 따라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도록 했으며 추가로 대통령의 명에 따라 해외파병도 가능하도록 개정했습니다. 이로서 미국 헌법에 기초한 자율적 민병대는 사실상 사라지게 됩니다.

결국 국가에 의한 무장력 독점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었고 미국도 그 점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시기와 방식은 다소 달랐지만 지방의 무장력이 중앙과의 경쟁에서 굴복한 결정적인 원인이 돈이라는 점은 미국이나 유럽이나 마찬가지였던 셈 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프랑스로 망명해 루이 12세에게 이탈리아 원정을 부추긴 밀라노 사람 트리불치오(Gian Giacomo Trivulzio)가 남긴 명언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전쟁에는) 다음의 세가지가 필수적이다. 돈, 더 많은 돈, 그리고 더 더욱 많은 돈 이다.”

참고서적

Jerry Cooper, The Rise of the National Guard : The Evolution of the American Militia 1865-1920, University Press of Nevraska, 1997
Michael D. Doubler, Civilian in Peace, Soldier in War - The Army National Guard : 1636-2000,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