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나세르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나세르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1년 3월 6일 일요일

이집트의 ‘헌정’이라는 유령(Egypt's Constitutional Ghosts)

중동의 정세가 급박히 돌아가다 보니 쏟아지는 기사들을 읽는 것도 일이군요. 리비아가 사실상 내전 상태로 들어가 버리니 국내 언론에서 이집트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집트 문제도 현재 진행형이고 제 개인적으로는 이집트쪽이 훨씬 흥미가 당깁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3월 19일에는 헌법 개정을 위한 투표가 실시될 예정입니다. 무바라크가 장기집권을 해 온 배경에는 문제 투성이의 이집트 헌법이 있고 이 헌법은 개혁을 외치는 인사들의 불만 대상이기도 합니다. 헌법 개정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관측이 나왔는데 제가 읽은 것 중에서 재미있었던 글을 조금 소개해 볼까 합니다.

먼저 오늘 소개할 이 글은 지난 2월 15일 포린 어페어즈 인터넷판에 실린 Nathan J. Brown의 ‘이집트의 헌정이라는 유령(Egypt's Constitutional Ghosts)’ 이 라는 글 입니다.(제목은 아주 살짝 의역을 했습니다) 물론 이집트 군부가 지난 2월 26일에 헌법개정안을 내놓고 이번달에 투표를 실시하기로 했기 때문에 약간 늦은 감이 없진 않습니다. 이미 읽어 보신 분들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되고요. 하지만 이집트 헌정 전통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잘 설명한 만큼 현재의 헌법 개정 문제에 대한 배경 설명으로는 적절하리라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이해 당사자가 많은 만큼 이집트의 헌법 개정이 순조롭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은 주목할 만 하다고 생각됩니다.



호스니 무바라크의 통치가 종식된 다음 새로운 미래를 건설해 나가려는 이집트 인들은 당연하게도 이집트의 헌정사(constitutional past)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문제점들을 뽑아내길 희망하고 있다. 군사위원회가 무바라크에게서 권력을 양도받은 이후 이집트의 정치적 반대세력들은 직접적인 법률과 법적 절차에 대해 명확하게 요구하려 하고 있다.

현재의 헌법은 1971년 처음 제정되어 그 후 수년간 여러 번 수정되었지만 이집트의 헌법 자체는 1세기 이전에 만들어 졌다. 이집트는 1882년에 처음으로 헌법을 제정하려 했으며 이때 의회는 행정부와의 관계에 대한 기본법을 통과시켰다. 이집트가 1923년 대영제국으로 부터 독립을 획득했을때 의회체제와 왕정을 통합하려는 두 번째의, 그리고 보다 포괄적인 법안이 어렵게 나마 만들어졌다.

1952년 군사쿠데타로 1923년 헌법이 폐기되는 와중에 이집트의 법학자들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가치에 입각한 공화국 헌법을 제정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1954년 이집트의 새로운 군사 통치자들은 법학자들의 법안을 보류시키고 그 대신 자신들의 사상적, 조직적 요구에 적합한 일련의 법안을 선포했다. 이 새로운 법은 이집트의 국가조직을 1970년 사망할 때 까지 이집트의 대통령직을 차지한 가말 압델 나세르가 모든 권한을 가지는 일당체제에 넘겨버렸다.

이집트는 1971년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는데 이것은 보다 복잡했으며 훨씬 오래 지속되었다. 안와르 알 사다트는 나세르의 뒤를 잇는 과정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정당과 안보 기구등 여러 조직에 자신의 경쟁자가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사다트는 동시에 이집트의 이데올로기를 사회주의에서 종교쪽으로 조심스럽게 전환하는 방식으로 재조정하고자 했다. 사다트는 새 헌법을 제정해서 두 가지 문제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다트는 대규모의,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세력이 참여한 위원회를 소집했다. 페미니스트, 이슬람 율법학자들, 자유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민족주의자들, 그리고 기독교 교회의 대표자들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모두 사다트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정당은 약화시키고 명목상으로 법적 기구들은 강화하는 한편 나세르식의 독재체제에서 가혹했던 점은 멀리 할 것을 약속한 것이다.

그 결과 만들어진 법안은 모두에게 미미한 것을 약속한 반면 대통령에게는 모든 것을 주었다. 헌 법은 개인의 자유, 민주적인 절차, 사법부의 독립을 보장했다. 새 헌법은 사회주의와 이슬람 양쪽을 긍정했다. 하지만 모든 공약에는 동시에 함정이 있었고 모든 자유에는 대통령의 권한이나 이집트의 강력한 안보 기구들을 제어하기 어렵게 하는 궁극적인 허점이 있었다.

지난 40여년간 이집트의 대통령은 헌법을 땜빵으로 고쳐서 이용해 왔다. 사다트는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조치를 더 취하는 한편 이슬람에 대해서는 더 많은 양보를 했다. 사다트는 일당 체제를 폐기하고 대통령의 정당 - 현재 몰락하고 있는 국가민주당 - 이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형식적으로 다원화된 정치 체계로 대체했다. 하나를 양보하면 그 만큼 반대로 얻어내는 것 이었다. 1980년, 언론을 통제하던 하나의 정당이 해체되자 그 권한은 새로운 국가언론위원회로 넘어갔다.

무바라크는 대부분의 대통령 재임 기간 중 헌법을 방치해 뒀는데 그는 이집트가 사상과 국가 기구의 개편을 계속 하는 대신 안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집트는 일부이나마 점진적인 변화를 했으며 간혹 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기도 했다. 무바라크는 사다트가 도입한 제한적인 다당제에서 정당의 참여를 확대했으며 1980년대에는 야당성향의 언론들이,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독립 언론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했다.

이집트의 정치적 행보는 여전히 일직선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1980년대에 들어와 국가 체제가 가혹한 독재기구에 의존하는 경향은 점차적으로 감소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 이러한 억압기구들이 부활했으며 이슬람 과격파는 물론 훨씬 온건한 무슬림 형제단을 상대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1980년대에 들어와 이집트 헌법에 있는 자유주의적인 요소 중 일부가 주로 사법부의 주도하에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984년 제정된 새 사법부법은 이집트의 민사법원과 형사법원에 자율성을 주었으며 정부 조직이 당사자인 재판을 담당하는 법관들로 구성된 국가위원회는 일반 시민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우호적이 되었다.

가장 놀라운 점은 원래 사법부의 다른 조직들을 감독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인  최고헌법재판소였다. 이집트의 사법부는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스스로의 목소리를 높여나갔고 실제로 이집트 헌법에 명시된 권리와 자유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선거법에 대한 일련의 판결들은 보다 개방적인 투표 절차를 취하게 했다. 2005년에 이르자 의회의 5분의 1은 무슬림 형제단이 장악하게 되었다. 그 밖의 다른 군소 정당들은 정권과 연합했지만 느슨한 정당 체계 때문에 이들을 통제하는 것은 더 어려워 졌다.

무바라크 정권은 2007년에 들어와 1971년 헌법에 있는 자유주의적인 요소들을 대부분 폐기하는 일련의 헌법 개정안을 내 놓았다. 여기에는 선거를 사법부의 완전한 관할에서 정권이 관할하는 위원회들의 통제하에 넣는 것, 형식상으로 대통령 후보로 다수의 입후보자를 허용하되 실제로는 유력한 후보자들을 최대한 제한하는 것, 무슬림 형제단이 정당을 결성하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것, 그리고 (유죄판결을 신속하고 확실하게 내리기 위해 사건들을 대통령의 권한으로 군사재판에 넘기는 것과 같이) 이전에는 극도의 긴급 수단이었던 것들을 헌법에 삽입하는 것 등이 있었다.

이랬기 때문에 무바라크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저항 운동이 행동 지침으로 헌법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놀랄일도 아니었다. 수년간 반정부 활동가들과 개혁 운동가들은 1971년 헌법에 있던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요소들이 다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약간의 헌법 조항을 넣는데 초점을 맞춰왔다. 하지만 2007년 개정안은 법안 전체에 교묘한 덫을 깔아놓았다. 땜질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았다. 이집트의 반정부 지도자들이 “혁명”을 말하기 시작했을때 이들은 단지 무바라크를 축출하는 것 뿐 만 아니라 1971년 헌법 자체를 폐기하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타흐리르 광장의 군중들은 2월 11일 헌법적 절차가 방기되고 2월 13일에는 헌법이 효력 정지되자 기세가 오를 수 밖에 없었다. 만약 군부가 이집트를 통치하게 된다면 근본적인 개혁이 가시화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정권이 반대파와 협상하려는 의지에 좌우되며 정치적 재건을 위한 진정으로 포괄적인 절차에 동의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파에게 극도로 위험 부담이 큰 전략이다.

20세기의 이집트 인들은 올바른 정치 질서를 만드는 법률의 힘에 대해 시니컬한 태도를 보여왔다. 하지만 이제 그에 반대되는 상황으로 보인다. 이집트 인들은 훌륭한 법안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배웠다. 현재 새로운 헌정 질서의 요소에 대해 다양한 여론이 존재하고 있다. 무슬림 형제단에서 노동 운동에서 시작한 활동가들에 이르기까지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거의 대부분의 정치 집단은 포괄적인 개혁 방안에 합의할 것이다.

반대파들은 대통령의 권한 축소, 주로 더 독립적이고 강력한 사법기구의 형식을 골자로 하는 사법부의 독립에 대한 확고한 제도적 보장, 사법부의 선거 관리, 특수 법정의 폐지와 (1939년 이래로 거의 끊임없이 계속된) 이집트의 국가 긴급사태 중지,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보다  확고한 수단, 그리고 제대로 된 다당제 체계 등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앞서 언급된 변화들은 세가지 효과를 일으킬 것이다. 첫 번째는 이집트 국민들이 기존의 제도를 훨씬 더 신뢰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는 이러한 변화가 개인의 자유를 진정으로 보호하고 다당제 정치 체제를 보장할 것이라는 점이다. 세 번째는 이를 통해 수평적인 신뢰의 메커니즘을 활성화 하여 이집트의 여러 헌법 조직들이 서로를 견제할 수 있게 할 것이라는 점이다.

세 번째 요소를 보면,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헌정사에 대해 심도깊은 이해를 하고 있다. 이집트는 제도적 절차를 갖춘 국가이지만 이러한 제도들은 모두 대통령에게만 책임을 지는 것 들이었다. 이러한 제도들에 진정한 독립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헌법 조문에 명시된 모호한 약속들이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미국식의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s)을 제안할 필요는 없지만 이집트의 헌법을 제정할 담당자들은 제도적 기구들이 명확하게 구분된 범주에서 통제되는 “분권”을 고려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허무맹랑한 일일까? 긍정적인 전망을 할 수 있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이집트가 깊은 전통과 전문적인 기준을 가진 오래된 헌정적 제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현재 무엇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여론이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모든 헌법적 절차가 정체성과 이슬람에 대한 상징적인 논쟁을 촉발하겠지만 이렇게 이론이 분분한 문제들에 있어서도 현재 이집트의 헌법에 있는 일부 조항들은 대부분의 진영이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집트의 헌정 혁명에 대한 진정한 장애물은 사방에 널려있다. 우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필요한 실질적인 절차가 진행되지 않고 있다. 만약 이집트가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면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가? 기존의 헌법들은 비공식적인 위원회에 의해 작성되었다. 이집트에는 제헌의회와 같이 많은 시간이 걸리고 포괄적인 방식으로 법안을 만들어본 전통이 없다. 이러한 절차를 밟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모든 정당들이 협상에 참여해 진행과정에 동의하는 것이다. 하지만 각 정파는 실질적인 이익에 따라 합의를 도출하려 할 것이며 반대세력들은 본질적으로 통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전술적으로 합의에 임할 것이며 그 과정은 느리고 고될 것이다.

만약 군부 통치자들이 덜 급진적인 해결책을 밀어붙인다면 합의는 더 어려워 질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시점에서 가장 중요하다. 이집트 정부는 현재 (개혁에 대해) 매우 온건한 발언을 하는 한편 아주 미약한 의지만 있는 것으로 보이는 군 지휘관들로 이루어진 위원회의 통제를 받고 있다. 실제로 군부 지도자들은 그저 현재의 헌법을 수정하는데 그치고 싶다는 뜻을 강하게 내비치고 있으며 민주적이거나 포괄적인 절차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의욕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절차는 과거 헌법을 고치거나 대통령을 선출할 때의 방식과 의심스러울 정도로 비슷하게 보인다. 지도자들이 먼저 결정을 내린 다음에야 국민들이 투표를 할 수 있었던.

현시점에서는 이집트의 군부 지도자들의 뜻에 많은 것이 달려 있다. 군부 지도자들은 아직 그들의 선배들이 행했던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가지고 있다. 1952년에 정권을 전복시켰던 장교단은 민정 이양을 약속했던 모하메드 나귀브(Mohammed Naguib) 장군이 이끌고 있었다. 자유주의적인 헌법안은 대부분 나귀브가 통치하던 시기에 작성되었다.

하지만 1954년 나세르가 나귀브를 쫒아내고 현재 이집트 혁명세력이 무릎을 꿇린 바로 그 체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집트 혁명이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데 성공하려면 지금 이집트를 통치하고 있는 장군들에게 나귀브의 영혼이 마법을 부려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3월 2일 포린 폴리시 인터넷판에 실린 Bruce Ackerman의 Parliament to the Rescue를 번역해서 올려 보겠습니다. 이집트 군부가 내놓은 헌법 개정안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글입니다.

2011년 2월 13일 일요일

무바라크 없는 무바라크 주의(Mubarakism without Mubarak)

이집트 사태가 전개되는 동안 저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습니다. 대의민주주의의 신봉자로서 독재자 하나가 물러난 것은 축하할 일인데 이집트의 전망이 썩 밝아보이지 않는다는게 문제라면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 꽤 재미있는 전망이 많이 나왔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 해 볼까 합니다. 2월 11일 포린 어페어즈 인터넷 판에 실린 워싱턴 대학과 카이로의 아메리칸 대학 교수 엘리스 골드버그(Ellis Goldberg)의 글 무바라크 없는 무바라크 주의(Mubarakism without Mubarak)인데 현재 이집트 군부의 강력한 영향력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현재 이집트 군부는 이집트에서 가장 강력한, 그리고 통합된 존재이므로 향후 사태의 전개에 가장 핵심적인 플레이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 문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씌여진 글 입니다. 읽어보고 꽤 재미있어서 번역을 해 봤는데 다소 심한 날림번역이니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Hosni Mubarak)가 시위대의 요구에 굴복하고 카이로를 떠나면서 권좌에서 물러났다. 무바라크는 어제 전 세계에 방송된 연설에서 퇴진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로부터 몇 시간 되지도 않아 물러나게 됐다. 그날 오전 최고군사위원회는 ‘첫 번째 공식발표’인 성명에서 군부가 무바라크의 평화적인 퇴진을 이끌어 낼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권력은 군대의 손으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행동은 이집트의 2월 항쟁에서 군부가 (시민의) 지지를 받는 방관자로 부터 (사태를) 좌우하는 세력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해 나간 마지막 단계였다. 항쟁이 처음 일어나기 시작한 1월 25일 부터 군부는 무한한 자제력을 발휘하여 (항쟁의 중심지였던) 타흐리르 광장 주변을 콘크리트 장애물, 커다란 철판, 그리고 철조망으로 둘러싸고 물리적인 통제를 확대하고 심화시켰다. 군부의 늘어나는 행동범위는 그 자체적으로 점진적인 쿠데타(slow-motion coup)의 다음 단계가 되었다. 군부가 간접적인 통치에서 직접적인 통치로 돌아가는 것 이었고 그 기초는 이미 1952년에 마련된 것 이었다.

서방 세계는 이 위기로 인해 이집트에 민주주의가 지나치게 빨리 도입되면서 무슬림 형제단이 권력을 잡게 될까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집트의 정권에서 부패한 민간 정치인들만 탈락하고 군부만이 유일한 행위자로 남게 되었다는 데 있다. 실제로 지난밤 무바라크에게서 대통령의 권한을 위임받은 신임 부통령 오마르 슐레이만(Omar Suleiman) 장군은 2월 9일에 이집트 국민들에게 현재의 정권과 군부의 쿠데타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라고 위협했으며 그는 이집트가 인질로 잡혀있다는 분위기만 심화시켰을 뿐이다.

무바라크 통치 하의 이집트의 정치 체제는 가말 압델 나세르와 자유 장교단에게 권력을 부여한 1952년 군사 쿠데타를 통해 성립된 공화체제를 직접적으로 계승한 것 이었다. 나세르와 장교단은 이집트의 입헌 군주정을 철폐하고 사실상 한 세대 전체의 민간 정치인과 법조인들을 공직에서 몰아냈다. 나세르와 장교단은 충성적인 군부 인맥으로 그들만의 공화체제를 만들었다. 군부가 기술관료적 통치를 하면서 이집트의 법률가들에게 새 헌법을 만들게 한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법률가들이 작성한 안은 강력한 의회와 제한적인 대통령의 권한을 명시하고 있었고 장교단은 이것이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이라고 여겼다. 군부는 이것을 폐기해 버리고 대통령에게 막항한 권한을 부여하는 헌법을 작성했다.

이러한 조치는 군부에게 유리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1953년 이래로 이집트의 대통령은 모두 군대의 장교 출신들이 독점했다. 두 세대에 걸쳐 군부는 대통령을 통해 이집트의 자원 대부분을 국가 안보와 궁극적으로 재앙이 된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필요한 군비 조달에 쏟아넣을 수 있었다.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은 정부가 경제를 무시한 것과 합쳐저 이집트를 파산 상태로 몰아넣었다. 1975년과 1977년 사이에 이집트 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한 시민 봉기가 일어났다. 군부는 통치권을 회복하기 위해 관심사를 전쟁에서 경제발전으로 돌렸다. 군부는 점진적으로 정치에 대한 직접 통제를 완화했으며 권력을 경찰과 이집트 집권당의 다른 강력한 지지세력- 정부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을 통해 부를 축적하면서 이익을 얻은 소규모의 민간 경제인 집단 등에게 양도했다.

무바라크는 1990년대에 이슬람주의자들에 대한 내전을 전개했고 군대의 역할은 더 변화했다. 정부가 국내의 경찰력에 더 의존하게 되면서 군대의 규모와 중요성이 감소했다. 그 동안 경찰과 내무부는 군대와 국방부를 대신해 정권의 초석으로 들어 앉았다. 한편, 최근 굴욕을 겪고 있는 철강부호이자 전 집권당 당수 아흐메드 에즈(Ahmed Ezz)와 같이 이집트를 먹여살려온 엘리트 사업가 집단은 더욱 더 강력해 졌다. 무바라크는 이들에게 집권당인 국가민주당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고 이들은 자신들에게 더 큰 부를 안겨줄 수 있도록  이집트 경제를 국제 무역에 개방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장교단도 경제적인 이익을 통해 일정 수준의 보상을 받았다. 1990년대 동안 군대는 경제에 대한 개입을 확대했다. 이 시기에 군부가 소유한 기업체는 이집트 전체 경제의 5~20퍼센트를 차지했으며 마찬가지로 군 장교들은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특권과 같이 다양한 이익을 얻었다.

현재 군대는 질서를 유지하는 세력이자 경쟁하는 적대 세력들 간의 중립적인 중재자로 행세하고 있지만 군부 스스로도 지켜야 할 많은 이권이 있으며 사실은 중립적이지도 않다. 현재 존속하고 있는 이집트 국가의 기본적인 구조는 군부에 이득을 주고 있다. 시위대의 실질적인 요구는 아주 간단한 것이다. 긴급 사태를 종료하고 새로운 선거를 실시하며 국가의 개입 없이 정당을 결성할 수 있는 자유를 허가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모두에게 이집트의 사회 정치 체제에 참여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것은 이집트를 대통령제에서 자유 선거를 통해 선출한 다수파가 (지금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총리를 선출하는 내각제로 개편하는 것 처럼 헌법과 기타 법률의 개정을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군부가 1952년 만들어 지금까지 유지해온 권력 구조를 무너뜨릴 수 있다.

자유롭게 선출된 의회와 새로 구성된 정부는 군부가 자신들의 영역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시킬 수 있다. 게다가 공개된 선거는 새로운 기업 엘리트들이 의회에서 권력을 잡고 군부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제한하게 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된다면 이집트의 거의 모든 가정에 취사용 가스를 공급하는 가스관에서 부터 의류, 식품, 그리고 호텔에 이르는 군부의 방대한 경제적 자산들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게다가 군부는 언제나 이집트가 질서정연하고 위계질서에 따라 통치되는 것을 선호해 왔다. 군부는 거리에서 펼쳐지고 있는 시민이 참여하는 축제를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설사 장교단이 1950년대의 선배들 보다는 논쟁에 대해 보다 관용적이라 할 지라도 대통령이 내각의 장관들을 임명하는 체제를 유지함으로써 정치 참여의 대상을 군대에서 생애를 보낸 사람들로 제한하는 것을 원하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군부의 지도자들은 체제의 변화를 추구하는 대신 상징적인 제스처를 통해 대중들을 만족시키고 싶어하는 것 같다. 군부 엘리트들이 대부분의 부패 기업가와 이들의 정부내 협력자들을 공금 및 공공재산 남용의 혐의로 조사할 것이 확실하다. 동시에 군부 엘리트들은 전직 내무장관을 위기 기간 중 시위대를 고의적으로 살해한 혐의로 수사할 수도 있다.

만약 군부가 통치권을 계속 행사하게 된다면 두 명의 인물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첫 번째는 군부에 강력한 연계를 가지고 있는 슐레이만으로 그는 모든 반대 세력과의 협상에서 중심에 서 있으며 거의 끊임없이 텔레비전에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연하게도 슐레이만은 대통령제를 개혁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밝혔다. 슐레이만은 시간을 벌기 위해서 협상이 선거를 다루고 있는 헌법의 세 개 조항만을 바꾸는 것으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다.

두 번째는 이집트의 국방부장관 후세인 탄타위(Hussein Tantawi) 원수로 모습을 자주 드러내지는 않고 있지만 결코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 아니다. 탄타위는 지탄 받고 있는 경찰과 달리 군대는 이집트 시민들에게 발포하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을 낸 배후였다. 사실 군대는 시위대와 그들을 공격한 폭력배 양쪽 모두에게 발포하지 않았고 심지어 시위대는 정당한 요구를 하는 것이라고 천명하기까지 했다. 나는 이집트 군이 시위대 일부와 인권 단체 회원들을 체포한 사례를 들었다.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사람들에 따르면 일부 군 장교들은 무바라크가 자신은 수행해야 할 임무가 있다고 했을 때 이를 지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비록 슐레이만은 개혁을 제한적으로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탄타위가 있는 한 군대는 나머지 반대 세력과 체제 이행에 대해 협상하는 동안 최소한 중립을 지키려 할 것이다.

지난 10년간 존속해온, 막대한 경제적 이권을 정치권과 결탁한 한줌에 불과한 경제인들에게 넘겨 주는 등 부패는 심화되고 무능했던 무바라크 정권은 무너졌다. 군부의 권한과 특권을  축소하여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보다 열린 정체 체제와 책임감을 가진 정부가 등장할 가능성은 남아있다. 그리고 군부도 과도기의 권력으로서 군부가 통치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을 수도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집트 군부는 1950년대와 달리 훨씬 전문적이고 잘 교육 받았으며 많은 장교들이 민주주의의 이익을 인정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점진적인 쿠데타가 최고조에 달해 과거의 엄격한 군부 권위주의가 복구되는 것이 보다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2009년 7월 26일 일요일

셔먼

일요일에 앉아서 일을 하자니 손에 잘 안잡히더군요. 답답해서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다 보니 슈피겔에 1952년의 이집트 혁명 기록사진이 아홉장 올라와 있었습니다. 재미있게도 아홉장의 사진 중 두 장에 쿠데타를 일으킨 이집트군의 셔먼이 나와있더군요.

사진=AP

사진=Corbis

얼빵하게 생긴 셔먼의 엉덩이를 보니 뭔가 좀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타미야 M4A1셔먼의 포장을 뜯어서 대충 포탑만 맞춰 봤습니다.


타미야 M4A1에서 마음에 드는 점은 포방패가 두가지로 초기형의 M34도 들어있다는 점 입니다. 셔먼 계열은 대부분 얼빵하게 생겼지만 특히 포방패가 M34인 것은 더 얼빵해 보여서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포탑을 대충 맞춰놓고 보니 전에 만들다 만 하비보스의 M4가 생각나더군요. 이것도 포방패를 M34로 했는데 동축기관총 부품이 생긴게 마음에 안들어 잠시 방치해 두고 있었습니다.


하비보스의 셔먼에는 기관총이 두 종류가 들어 있는데 조립하고 남는 cal.30을 동축기관총으로 붙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하비보스 M4의 M34 포방패는 구멍이 좁아서 기관총이 잘 안들어가더군요. 사포질을 해서 구멍을 조금 넓혔습니다.


주포와 동축기관총이 같이 움직이도록 대충 붙여놨습니다. 하비보스의 M4는 사놓은 것이 더 있는데 다음에 만들때는 좀 더 그럴싸하게 해 봐야 겠습니다.


대략 비슷한 모양이 나오는 것 같군요. 얼빵한 분위기를 잘 풍기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