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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13일 일요일

"Parliament to the Rescue" by Bruce Ackerman

지난번 글 “이집트의 ‘헌정’이라는 유령(Egypt's Constitutional Ghosts)”에 이어 이집트의 국민투표에 대한 글 한편을 번역해 봤습니다. 이번 글은 지난 3월 1일 포린 폴리시 인터넷판에 올라온 브루스 애커만(Bruce Ackerman)의  Parliament to the Rescue입니다. 군부가 내놓은 개혁안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글인데 대안으로 내놓는 것이 유럽식의 의회중심제라는게 흥미롭습니다.

제목은 적당히 의역했습니다.



이집트 군부가 혁명을 제멋대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군부가 선발한 법학자들로 구성된 위원회는 무바라크 실각 이후의 시대에 적합한 정도로 기존의 헌법을 수정하는 방안을 추천했다.  겨우 10일 남짓한 시간과 광범위한 대중의 참여가 배제된 채 이렇게 위에서 부터 아래로의 개혁이 이루어 진 것이다. 개혁안은 대통령 선거에 개별적인 후보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현직의 임기를 4년 중임으로 제한했다. 하 지만 위원회는 기존 체제에서 가장 심각했던 문제들은 건드리지도 않았으며 근본적인 문제를 피하고 있다. - 이집트가 과거 권위주의를 가능하게 했던 대통령제를 유지해야 하느냐 아니면 새로운 헌법이 유럽식의 의회 민주주의를 모방해야 하느냐?

대통령제는 무슬림 형제단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날 수도 있다. 무슬림 형제단은 단 하나의 잘 조직된 반대 정파여서 후보자는 대통령 선거가 조기에 실시된다면 20에서 25퍼센트의 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집트의 세속 반대세력이 여러 정파로 분열된다면 이들이 결성하는 새 정당은 첫 선거에서 무슬림 형제단에게 크게 뒤쳐질 것이다. 현 시점에서는 오직 이집트의 군부만이 이슬람주의자들의 정권 장악을 막기 위해 개입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군부가 자제하고 선거가  치뤄지도록 허용 한다면 무슬림 형제단의 운명은 세속 정파 후보자들의 선거 경쟁력에 좌우될 것이다.

무슬림 형제단의 지도부는 이러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 차기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내지 않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단 개혁이 실행되면 무슬림 형제단은 이집트의 29개 주 중 15개 주에서 3만명의 유권자로 부터 서명을 받아 후보를 내보낼 수 있게 된다. 설사 무슬림 형제단이 약속을 지킨다 하더라도 형제단은 그들의 목표에 더 부합하는 “독립된” 후보에 힘을 밀어줘 킹메이커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특정 후보가 무슬림 형제단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게 하도록 훼방을 놓는 것은 헌정질서에 위배되는 것 일 뿐 아니라 수많은 이집트 인들을 국가건설과 관련된 모든 문제로 부터 멀어지게 할 것이다.

의회 중심 체제는 이슬람주의자들에게 더 건설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끼칠 것이다. 만일 이슬람주의자들이 투표의 4분의 1을 획득하더라도 의석의 4분의 3은 훨씬 더 세속적인 경쟁자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세속주의자들은 무슬림 형제단의 지원이 없어도 연립정부를 구성하는데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만일 몇몇 이슬람주의자들이 입각하더라도 그들은 세속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목표를 낮추게 될 것이다. 내각의 자리를 둘러싸고 대결하는 것이 정치적인 긴장을 조성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대통령제가 일으키는 심각한 위기와는 비할바가 아니다.

만약 세속주의자들이 대통령제 하에서 경쟁을 하게 된다면 이들은 무슬림 형제단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단일 후보로 결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전략이 성공하더라도 세속주의자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민주주의를 실험할 시간을 잃을 것이다. 무바라크 정권하에서 체계적으로 탄압받았기 때문에 이집트의 세속주의자들은 경쟁력 있는 정당을 결성할 여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만약 세속주의자들이 무슬림 형제단의 대통령 후보를 꺾기 위해 단일 후보로 결집하게 된다면 여기서 논하는 이집트의 미래에 장애가 초래될 것이다.

세속주의자들의 문제는 이집트의 “지도자 없는 혁명” 때문에 복잡해져 있다. 다른 시기와 장소에서 조지 워싱턴이나 레흐 바웬사 같은 영웅들은 혁명적 공화국을 이끌 확실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집트에는 이렇게 핵심적인 역할을 맡을 인물이 아무도 없다. 대통령제 하에서 세속주의자들은 조기에 단일 후보를 선출해야 하는 압력을 받게 될 것이다. 반면 여러 정당이 참여하는 의회 체제는 이집트 인이 정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대안에 대한 논의는 이제 막 시작이며 여러 지도자들 간에 경쟁이 이루어 지는 것은 자유에 대한 건강한 반응이라는 근본적인 신뢰를 줄 것이다.

의회정치는 매우 험난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행기에 이집트에 절실히 필한 안정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집트의 (혁명 이후) 첫 번째 대통령은 선의를 가진 혁명의 영웅은 아닐 것이며  지체하지 않고 일련의 강경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은 대중의 지지를  순식간에 잃을 수 있으며 이집트는 4년의 재임 기간의 대부분을 고립된 채로 지내는 지도자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의회정치 체제는 지도자 숭배가 아니라 지도자들간의 연합을 이끌어 내어 서로 다른 연합 정당들이 이집트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접촉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만약 첫번째 연립정부가 대중의 지지를 잃는다면 이들은 4년이나 5년씩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은 신뢰가 없어 표를 잃을 것이며 다른 연립 정부가 그 자리를 차지하거나 의회 자체가 해산될 수도 있다. 그리고 정당들은 유권자들의 새로운 요구에 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기 선거에 문제가 많다 하더라도 인기 없는 대통령이 적대적인 유권자들을 상대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 보다는 나을 것이다.

헌정정치라는 계획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현명하고 민주적인 지도자와 시민의 참여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잘못된 계획은 좋은 정치가 등장하는 것을 더 어렵게 할 수 있다.

군부는 그들의 “개혁안”을 국민투표에 붙이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잘못된 소통 방식일 뿐이다. 한 차례의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해 이집트의 다음 독재자를 뽑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현재 체제의 위험성은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것이다. 만약 이집트의 현재 지도부가 활기찬 민주주의의 건설을 진심으로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면 다당제 의회정치 체제를 도입하는 방향으로 시급히 움직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저는 여러 정파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내각제가 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집트의 대통령제가 장기독재를 가능하게 했던 제도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현재 이집트 군부가 잔머리를 굴려서 땜질만 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하려는 것은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결과가 어찌 될지 지켜봐야 겠지요.

2011년 3월 6일 일요일

이집트의 ‘헌정’이라는 유령(Egypt's Constitutional Ghosts)

중동의 정세가 급박히 돌아가다 보니 쏟아지는 기사들을 읽는 것도 일이군요. 리비아가 사실상 내전 상태로 들어가 버리니 국내 언론에서 이집트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집트 문제도 현재 진행형이고 제 개인적으로는 이집트쪽이 훨씬 흥미가 당깁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3월 19일에는 헌법 개정을 위한 투표가 실시될 예정입니다. 무바라크가 장기집권을 해 온 배경에는 문제 투성이의 이집트 헌법이 있고 이 헌법은 개혁을 외치는 인사들의 불만 대상이기도 합니다. 헌법 개정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관측이 나왔는데 제가 읽은 것 중에서 재미있었던 글을 조금 소개해 볼까 합니다.

먼저 오늘 소개할 이 글은 지난 2월 15일 포린 어페어즈 인터넷판에 실린 Nathan J. Brown의 ‘이집트의 헌정이라는 유령(Egypt's Constitutional Ghosts)’ 이 라는 글 입니다.(제목은 아주 살짝 의역을 했습니다) 물론 이집트 군부가 지난 2월 26일에 헌법개정안을 내놓고 이번달에 투표를 실시하기로 했기 때문에 약간 늦은 감이 없진 않습니다. 이미 읽어 보신 분들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되고요. 하지만 이집트 헌정 전통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잘 설명한 만큼 현재의 헌법 개정 문제에 대한 배경 설명으로는 적절하리라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이해 당사자가 많은 만큼 이집트의 헌법 개정이 순조롭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은 주목할 만 하다고 생각됩니다.



호스니 무바라크의 통치가 종식된 다음 새로운 미래를 건설해 나가려는 이집트 인들은 당연하게도 이집트의 헌정사(constitutional past)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문제점들을 뽑아내길 희망하고 있다. 군사위원회가 무바라크에게서 권력을 양도받은 이후 이집트의 정치적 반대세력들은 직접적인 법률과 법적 절차에 대해 명확하게 요구하려 하고 있다.

현재의 헌법은 1971년 처음 제정되어 그 후 수년간 여러 번 수정되었지만 이집트의 헌법 자체는 1세기 이전에 만들어 졌다. 이집트는 1882년에 처음으로 헌법을 제정하려 했으며 이때 의회는 행정부와의 관계에 대한 기본법을 통과시켰다. 이집트가 1923년 대영제국으로 부터 독립을 획득했을때 의회체제와 왕정을 통합하려는 두 번째의, 그리고 보다 포괄적인 법안이 어렵게 나마 만들어졌다.

1952년 군사쿠데타로 1923년 헌법이 폐기되는 와중에 이집트의 법학자들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가치에 입각한 공화국 헌법을 제정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1954년 이집트의 새로운 군사 통치자들은 법학자들의 법안을 보류시키고 그 대신 자신들의 사상적, 조직적 요구에 적합한 일련의 법안을 선포했다. 이 새로운 법은 이집트의 국가조직을 1970년 사망할 때 까지 이집트의 대통령직을 차지한 가말 압델 나세르가 모든 권한을 가지는 일당체제에 넘겨버렸다.

이집트는 1971년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는데 이것은 보다 복잡했으며 훨씬 오래 지속되었다. 안와르 알 사다트는 나세르의 뒤를 잇는 과정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정당과 안보 기구등 여러 조직에 자신의 경쟁자가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사다트는 동시에 이집트의 이데올로기를 사회주의에서 종교쪽으로 조심스럽게 전환하는 방식으로 재조정하고자 했다. 사다트는 새 헌법을 제정해서 두 가지 문제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다트는 대규모의,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세력이 참여한 위원회를 소집했다. 페미니스트, 이슬람 율법학자들, 자유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민족주의자들, 그리고 기독교 교회의 대표자들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모두 사다트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정당은 약화시키고 명목상으로 법적 기구들은 강화하는 한편 나세르식의 독재체제에서 가혹했던 점은 멀리 할 것을 약속한 것이다.

그 결과 만들어진 법안은 모두에게 미미한 것을 약속한 반면 대통령에게는 모든 것을 주었다. 헌 법은 개인의 자유, 민주적인 절차, 사법부의 독립을 보장했다. 새 헌법은 사회주의와 이슬람 양쪽을 긍정했다. 하지만 모든 공약에는 동시에 함정이 있었고 모든 자유에는 대통령의 권한이나 이집트의 강력한 안보 기구들을 제어하기 어렵게 하는 궁극적인 허점이 있었다.

지난 40여년간 이집트의 대통령은 헌법을 땜빵으로 고쳐서 이용해 왔다. 사다트는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조치를 더 취하는 한편 이슬람에 대해서는 더 많은 양보를 했다. 사다트는 일당 체제를 폐기하고 대통령의 정당 - 현재 몰락하고 있는 국가민주당 - 이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형식적으로 다원화된 정치 체계로 대체했다. 하나를 양보하면 그 만큼 반대로 얻어내는 것 이었다. 1980년, 언론을 통제하던 하나의 정당이 해체되자 그 권한은 새로운 국가언론위원회로 넘어갔다.

무바라크는 대부분의 대통령 재임 기간 중 헌법을 방치해 뒀는데 그는 이집트가 사상과 국가 기구의 개편을 계속 하는 대신 안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집트는 일부이나마 점진적인 변화를 했으며 간혹 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기도 했다. 무바라크는 사다트가 도입한 제한적인 다당제에서 정당의 참여를 확대했으며 1980년대에는 야당성향의 언론들이,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독립 언론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했다.

이집트의 정치적 행보는 여전히 일직선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1980년대에 들어와 국가 체제가 가혹한 독재기구에 의존하는 경향은 점차적으로 감소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 이러한 억압기구들이 부활했으며 이슬람 과격파는 물론 훨씬 온건한 무슬림 형제단을 상대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1980년대에 들어와 이집트 헌법에 있는 자유주의적인 요소 중 일부가 주로 사법부의 주도하에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984년 제정된 새 사법부법은 이집트의 민사법원과 형사법원에 자율성을 주었으며 정부 조직이 당사자인 재판을 담당하는 법관들로 구성된 국가위원회는 일반 시민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우호적이 되었다.

가장 놀라운 점은 원래 사법부의 다른 조직들을 감독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인  최고헌법재판소였다. 이집트의 사법부는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스스로의 목소리를 높여나갔고 실제로 이집트 헌법에 명시된 권리와 자유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선거법에 대한 일련의 판결들은 보다 개방적인 투표 절차를 취하게 했다. 2005년에 이르자 의회의 5분의 1은 무슬림 형제단이 장악하게 되었다. 그 밖의 다른 군소 정당들은 정권과 연합했지만 느슨한 정당 체계 때문에 이들을 통제하는 것은 더 어려워 졌다.

무바라크 정권은 2007년에 들어와 1971년 헌법에 있는 자유주의적인 요소들을 대부분 폐기하는 일련의 헌법 개정안을 내 놓았다. 여기에는 선거를 사법부의 완전한 관할에서 정권이 관할하는 위원회들의 통제하에 넣는 것, 형식상으로 대통령 후보로 다수의 입후보자를 허용하되 실제로는 유력한 후보자들을 최대한 제한하는 것, 무슬림 형제단이 정당을 결성하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것, 그리고 (유죄판결을 신속하고 확실하게 내리기 위해 사건들을 대통령의 권한으로 군사재판에 넘기는 것과 같이) 이전에는 극도의 긴급 수단이었던 것들을 헌법에 삽입하는 것 등이 있었다.

이랬기 때문에 무바라크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저항 운동이 행동 지침으로 헌법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놀랄일도 아니었다. 수년간 반정부 활동가들과 개혁 운동가들은 1971년 헌법에 있던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요소들이 다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약간의 헌법 조항을 넣는데 초점을 맞춰왔다. 하지만 2007년 개정안은 법안 전체에 교묘한 덫을 깔아놓았다. 땜질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았다. 이집트의 반정부 지도자들이 “혁명”을 말하기 시작했을때 이들은 단지 무바라크를 축출하는 것 뿐 만 아니라 1971년 헌법 자체를 폐기하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타흐리르 광장의 군중들은 2월 11일 헌법적 절차가 방기되고 2월 13일에는 헌법이 효력 정지되자 기세가 오를 수 밖에 없었다. 만약 군부가 이집트를 통치하게 된다면 근본적인 개혁이 가시화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정권이 반대파와 협상하려는 의지에 좌우되며 정치적 재건을 위한 진정으로 포괄적인 절차에 동의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파에게 극도로 위험 부담이 큰 전략이다.

20세기의 이집트 인들은 올바른 정치 질서를 만드는 법률의 힘에 대해 시니컬한 태도를 보여왔다. 하지만 이제 그에 반대되는 상황으로 보인다. 이집트 인들은 훌륭한 법안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배웠다. 현재 새로운 헌정 질서의 요소에 대해 다양한 여론이 존재하고 있다. 무슬림 형제단에서 노동 운동에서 시작한 활동가들에 이르기까지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거의 대부분의 정치 집단은 포괄적인 개혁 방안에 합의할 것이다.

반대파들은 대통령의 권한 축소, 주로 더 독립적이고 강력한 사법기구의 형식을 골자로 하는 사법부의 독립에 대한 확고한 제도적 보장, 사법부의 선거 관리, 특수 법정의 폐지와 (1939년 이래로 거의 끊임없이 계속된) 이집트의 국가 긴급사태 중지,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보다  확고한 수단, 그리고 제대로 된 다당제 체계 등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앞서 언급된 변화들은 세가지 효과를 일으킬 것이다. 첫 번째는 이집트 국민들이 기존의 제도를 훨씬 더 신뢰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는 이러한 변화가 개인의 자유를 진정으로 보호하고 다당제 정치 체제를 보장할 것이라는 점이다. 세 번째는 이를 통해 수평적인 신뢰의 메커니즘을 활성화 하여 이집트의 여러 헌법 조직들이 서로를 견제할 수 있게 할 것이라는 점이다.

세 번째 요소를 보면,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헌정사에 대해 심도깊은 이해를 하고 있다. 이집트는 제도적 절차를 갖춘 국가이지만 이러한 제도들은 모두 대통령에게만 책임을 지는 것 들이었다. 이러한 제도들에 진정한 독립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헌법 조문에 명시된 모호한 약속들이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미국식의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s)을 제안할 필요는 없지만 이집트의 헌법을 제정할 담당자들은 제도적 기구들이 명확하게 구분된 범주에서 통제되는 “분권”을 고려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허무맹랑한 일일까? 긍정적인 전망을 할 수 있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이집트가 깊은 전통과 전문적인 기준을 가진 오래된 헌정적 제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현재 무엇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여론이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모든 헌법적 절차가 정체성과 이슬람에 대한 상징적인 논쟁을 촉발하겠지만 이렇게 이론이 분분한 문제들에 있어서도 현재 이집트의 헌법에 있는 일부 조항들은 대부분의 진영이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집트의 헌정 혁명에 대한 진정한 장애물은 사방에 널려있다. 우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필요한 실질적인 절차가 진행되지 않고 있다. 만약 이집트가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면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가? 기존의 헌법들은 비공식적인 위원회에 의해 작성되었다. 이집트에는 제헌의회와 같이 많은 시간이 걸리고 포괄적인 방식으로 법안을 만들어본 전통이 없다. 이러한 절차를 밟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모든 정당들이 협상에 참여해 진행과정에 동의하는 것이다. 하지만 각 정파는 실질적인 이익에 따라 합의를 도출하려 할 것이며 반대세력들은 본질적으로 통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전술적으로 합의에 임할 것이며 그 과정은 느리고 고될 것이다.

만약 군부 통치자들이 덜 급진적인 해결책을 밀어붙인다면 합의는 더 어려워 질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시점에서 가장 중요하다. 이집트 정부는 현재 (개혁에 대해) 매우 온건한 발언을 하는 한편 아주 미약한 의지만 있는 것으로 보이는 군 지휘관들로 이루어진 위원회의 통제를 받고 있다. 실제로 군부 지도자들은 그저 현재의 헌법을 수정하는데 그치고 싶다는 뜻을 강하게 내비치고 있으며 민주적이거나 포괄적인 절차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의욕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절차는 과거 헌법을 고치거나 대통령을 선출할 때의 방식과 의심스러울 정도로 비슷하게 보인다. 지도자들이 먼저 결정을 내린 다음에야 국민들이 투표를 할 수 있었던.

현시점에서는 이집트의 군부 지도자들의 뜻에 많은 것이 달려 있다. 군부 지도자들은 아직 그들의 선배들이 행했던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가지고 있다. 1952년에 정권을 전복시켰던 장교단은 민정 이양을 약속했던 모하메드 나귀브(Mohammed Naguib) 장군이 이끌고 있었다. 자유주의적인 헌법안은 대부분 나귀브가 통치하던 시기에 작성되었다.

하지만 1954년 나세르가 나귀브를 쫒아내고 현재 이집트 혁명세력이 무릎을 꿇린 바로 그 체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집트 혁명이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데 성공하려면 지금 이집트를 통치하고 있는 장군들에게 나귀브의 영혼이 마법을 부려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3월 2일 포린 폴리시 인터넷판에 실린 Bruce Ackerman의 Parliament to the Rescue를 번역해서 올려 보겠습니다. 이집트 군부가 내놓은 헌법 개정안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글입니다.

2009년 7월 26일 일요일

셔먼

일요일에 앉아서 일을 하자니 손에 잘 안잡히더군요. 답답해서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다 보니 슈피겔에 1952년의 이집트 혁명 기록사진이 아홉장 올라와 있었습니다. 재미있게도 아홉장의 사진 중 두 장에 쿠데타를 일으킨 이집트군의 셔먼이 나와있더군요.

사진=AP

사진=Corbis

얼빵하게 생긴 셔먼의 엉덩이를 보니 뭔가 좀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타미야 M4A1셔먼의 포장을 뜯어서 대충 포탑만 맞춰 봤습니다.


타미야 M4A1에서 마음에 드는 점은 포방패가 두가지로 초기형의 M34도 들어있다는 점 입니다. 셔먼 계열은 대부분 얼빵하게 생겼지만 특히 포방패가 M34인 것은 더 얼빵해 보여서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포탑을 대충 맞춰놓고 보니 전에 만들다 만 하비보스의 M4가 생각나더군요. 이것도 포방패를 M34로 했는데 동축기관총 부품이 생긴게 마음에 안들어 잠시 방치해 두고 있었습니다.


하비보스의 셔먼에는 기관총이 두 종류가 들어 있는데 조립하고 남는 cal.30을 동축기관총으로 붙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하비보스 M4의 M34 포방패는 구멍이 좁아서 기관총이 잘 안들어가더군요. 사포질을 해서 구멍을 조금 넓혔습니다.


주포와 동축기관총이 같이 움직이도록 대충 붙여놨습니다. 하비보스의 M4는 사놓은 것이 더 있는데 다음에 만들때는 좀 더 그럴싸하게 해 봐야 겠습니다.


대략 비슷한 모양이 나오는 것 같군요. 얼빵한 분위기를 잘 풍기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