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13일 일요일

무바라크 없는 무바라크 주의(Mubarakism without Mubarak)

이집트 사태가 전개되는 동안 저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습니다. 대의민주주의의 신봉자로서 독재자 하나가 물러난 것은 축하할 일인데 이집트의 전망이 썩 밝아보이지 않는다는게 문제라면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 꽤 재미있는 전망이 많이 나왔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 해 볼까 합니다. 2월 11일 포린 어페어즈 인터넷 판에 실린 워싱턴 대학과 카이로의 아메리칸 대학 교수 엘리스 골드버그(Ellis Goldberg)의 글 무바라크 없는 무바라크 주의(Mubarakism without Mubarak)인데 현재 이집트 군부의 강력한 영향력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현재 이집트 군부는 이집트에서 가장 강력한, 그리고 통합된 존재이므로 향후 사태의 전개에 가장 핵심적인 플레이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 문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씌여진 글 입니다. 읽어보고 꽤 재미있어서 번역을 해 봤는데 다소 심한 날림번역이니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Hosni Mubarak)가 시위대의 요구에 굴복하고 카이로를 떠나면서 권좌에서 물러났다. 무바라크는 어제 전 세계에 방송된 연설에서 퇴진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로부터 몇 시간 되지도 않아 물러나게 됐다. 그날 오전 최고군사위원회는 ‘첫 번째 공식발표’인 성명에서 군부가 무바라크의 평화적인 퇴진을 이끌어 낼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권력은 군대의 손으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행동은 이집트의 2월 항쟁에서 군부가 (시민의) 지지를 받는 방관자로 부터 (사태를) 좌우하는 세력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해 나간 마지막 단계였다. 항쟁이 처음 일어나기 시작한 1월 25일 부터 군부는 무한한 자제력을 발휘하여 (항쟁의 중심지였던) 타흐리르 광장 주변을 콘크리트 장애물, 커다란 철판, 그리고 철조망으로 둘러싸고 물리적인 통제를 확대하고 심화시켰다. 군부의 늘어나는 행동범위는 그 자체적으로 점진적인 쿠데타(slow-motion coup)의 다음 단계가 되었다. 군부가 간접적인 통치에서 직접적인 통치로 돌아가는 것 이었고 그 기초는 이미 1952년에 마련된 것 이었다.

서방 세계는 이 위기로 인해 이집트에 민주주의가 지나치게 빨리 도입되면서 무슬림 형제단이 권력을 잡게 될까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집트의 정권에서 부패한 민간 정치인들만 탈락하고 군부만이 유일한 행위자로 남게 되었다는 데 있다. 실제로 지난밤 무바라크에게서 대통령의 권한을 위임받은 신임 부통령 오마르 슐레이만(Omar Suleiman) 장군은 2월 9일에 이집트 국민들에게 현재의 정권과 군부의 쿠데타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라고 위협했으며 그는 이집트가 인질로 잡혀있다는 분위기만 심화시켰을 뿐이다.

무바라크 통치 하의 이집트의 정치 체제는 가말 압델 나세르와 자유 장교단에게 권력을 부여한 1952년 군사 쿠데타를 통해 성립된 공화체제를 직접적으로 계승한 것 이었다. 나세르와 장교단은 이집트의 입헌 군주정을 철폐하고 사실상 한 세대 전체의 민간 정치인과 법조인들을 공직에서 몰아냈다. 나세르와 장교단은 충성적인 군부 인맥으로 그들만의 공화체제를 만들었다. 군부가 기술관료적 통치를 하면서 이집트의 법률가들에게 새 헌법을 만들게 한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법률가들이 작성한 안은 강력한 의회와 제한적인 대통령의 권한을 명시하고 있었고 장교단은 이것이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이라고 여겼다. 군부는 이것을 폐기해 버리고 대통령에게 막항한 권한을 부여하는 헌법을 작성했다.

이러한 조치는 군부에게 유리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1953년 이래로 이집트의 대통령은 모두 군대의 장교 출신들이 독점했다. 두 세대에 걸쳐 군부는 대통령을 통해 이집트의 자원 대부분을 국가 안보와 궁극적으로 재앙이 된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필요한 군비 조달에 쏟아넣을 수 있었다.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은 정부가 경제를 무시한 것과 합쳐저 이집트를 파산 상태로 몰아넣었다. 1975년과 1977년 사이에 이집트 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한 시민 봉기가 일어났다. 군부는 통치권을 회복하기 위해 관심사를 전쟁에서 경제발전으로 돌렸다. 군부는 점진적으로 정치에 대한 직접 통제를 완화했으며 권력을 경찰과 이집트 집권당의 다른 강력한 지지세력- 정부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을 통해 부를 축적하면서 이익을 얻은 소규모의 민간 경제인 집단 등에게 양도했다.

무바라크는 1990년대에 이슬람주의자들에 대한 내전을 전개했고 군대의 역할은 더 변화했다. 정부가 국내의 경찰력에 더 의존하게 되면서 군대의 규모와 중요성이 감소했다. 그 동안 경찰과 내무부는 군대와 국방부를 대신해 정권의 초석으로 들어 앉았다. 한편, 최근 굴욕을 겪고 있는 철강부호이자 전 집권당 당수 아흐메드 에즈(Ahmed Ezz)와 같이 이집트를 먹여살려온 엘리트 사업가 집단은 더욱 더 강력해 졌다. 무바라크는 이들에게 집권당인 국가민주당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고 이들은 자신들에게 더 큰 부를 안겨줄 수 있도록  이집트 경제를 국제 무역에 개방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장교단도 경제적인 이익을 통해 일정 수준의 보상을 받았다. 1990년대 동안 군대는 경제에 대한 개입을 확대했다. 이 시기에 군부가 소유한 기업체는 이집트 전체 경제의 5~20퍼센트를 차지했으며 마찬가지로 군 장교들은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특권과 같이 다양한 이익을 얻었다.

현재 군대는 질서를 유지하는 세력이자 경쟁하는 적대 세력들 간의 중립적인 중재자로 행세하고 있지만 군부 스스로도 지켜야 할 많은 이권이 있으며 사실은 중립적이지도 않다. 현재 존속하고 있는 이집트 국가의 기본적인 구조는 군부에 이득을 주고 있다. 시위대의 실질적인 요구는 아주 간단한 것이다. 긴급 사태를 종료하고 새로운 선거를 실시하며 국가의 개입 없이 정당을 결성할 수 있는 자유를 허가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모두에게 이집트의 사회 정치 체제에 참여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것은 이집트를 대통령제에서 자유 선거를 통해 선출한 다수파가 (지금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총리를 선출하는 내각제로 개편하는 것 처럼 헌법과 기타 법률의 개정을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군부가 1952년 만들어 지금까지 유지해온 권력 구조를 무너뜨릴 수 있다.

자유롭게 선출된 의회와 새로 구성된 정부는 군부가 자신들의 영역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시킬 수 있다. 게다가 공개된 선거는 새로운 기업 엘리트들이 의회에서 권력을 잡고 군부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제한하게 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된다면 이집트의 거의 모든 가정에 취사용 가스를 공급하는 가스관에서 부터 의류, 식품, 그리고 호텔에 이르는 군부의 방대한 경제적 자산들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게다가 군부는 언제나 이집트가 질서정연하고 위계질서에 따라 통치되는 것을 선호해 왔다. 군부는 거리에서 펼쳐지고 있는 시민이 참여하는 축제를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설사 장교단이 1950년대의 선배들 보다는 논쟁에 대해 보다 관용적이라 할 지라도 대통령이 내각의 장관들을 임명하는 체제를 유지함으로써 정치 참여의 대상을 군대에서 생애를 보낸 사람들로 제한하는 것을 원하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군부의 지도자들은 체제의 변화를 추구하는 대신 상징적인 제스처를 통해 대중들을 만족시키고 싶어하는 것 같다. 군부 엘리트들이 대부분의 부패 기업가와 이들의 정부내 협력자들을 공금 및 공공재산 남용의 혐의로 조사할 것이 확실하다. 동시에 군부 엘리트들은 전직 내무장관을 위기 기간 중 시위대를 고의적으로 살해한 혐의로 수사할 수도 있다.

만약 군부가 통치권을 계속 행사하게 된다면 두 명의 인물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첫 번째는 군부에 강력한 연계를 가지고 있는 슐레이만으로 그는 모든 반대 세력과의 협상에서 중심에 서 있으며 거의 끊임없이 텔레비전에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연하게도 슐레이만은 대통령제를 개혁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밝혔다. 슐레이만은 시간을 벌기 위해서 협상이 선거를 다루고 있는 헌법의 세 개 조항만을 바꾸는 것으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다.

두 번째는 이집트의 국방부장관 후세인 탄타위(Hussein Tantawi) 원수로 모습을 자주 드러내지는 않고 있지만 결코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 아니다. 탄타위는 지탄 받고 있는 경찰과 달리 군대는 이집트 시민들에게 발포하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을 낸 배후였다. 사실 군대는 시위대와 그들을 공격한 폭력배 양쪽 모두에게 발포하지 않았고 심지어 시위대는 정당한 요구를 하는 것이라고 천명하기까지 했다. 나는 이집트 군이 시위대 일부와 인권 단체 회원들을 체포한 사례를 들었다.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사람들에 따르면 일부 군 장교들은 무바라크가 자신은 수행해야 할 임무가 있다고 했을 때 이를 지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비록 슐레이만은 개혁을 제한적으로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탄타위가 있는 한 군대는 나머지 반대 세력과 체제 이행에 대해 협상하는 동안 최소한 중립을 지키려 할 것이다.

지난 10년간 존속해온, 막대한 경제적 이권을 정치권과 결탁한 한줌에 불과한 경제인들에게 넘겨 주는 등 부패는 심화되고 무능했던 무바라크 정권은 무너졌다. 군부의 권한과 특권을  축소하여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보다 열린 정체 체제와 책임감을 가진 정부가 등장할 가능성은 남아있다. 그리고 군부도 과도기의 권력으로서 군부가 통치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을 수도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집트 군부는 1950년대와 달리 훨씬 전문적이고 잘 교육 받았으며 많은 장교들이 민주주의의 이익을 인정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점진적인 쿠데타가 최고조에 달해 과거의 엄격한 군부 권위주의가 복구되는 것이 보다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댓글 5개:

  1. 저도 혁명을 지지하면서도, 왠지 이게 6월 항쟁이 아닌 419에 가까운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있었는데, 실상은 보이는 것보다 군부의 영향력이 훨씬 크군요...
    최악의 경우 이번 혁명이 이집트판 박통을 올려놓는데서 끝난다 하더라도, 지도자를 물러나게 한 경험을 얻은 데서 가치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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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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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예. 저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한국 사회의 일각에서 기대하는 것 같은 '민주화'와는 좀 다른 방향으로 나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비관하기에는 이르지만 마냥 낙관하기에도 이른 시점이지요. 그래도 말씀하신 것 처럼 무바라크가 하야를 했으니 어쨌든 "파라오 이래로 통치자를 선택하지 못하던" 것에 비하면 큰 진보인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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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BigTrain7:29 오후

    한국의 사례에서도 그렇고.. 갑자기 이집트가 선진 민주주의 국가로 변신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의 형태에 가깝게 다가선다면 그것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밖에서 보기엔 겨우 저걸 바꾸려고 그리 노력했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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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 점진적이라 하더라도 변화해 나가는게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것 처럼 우리도 수십년간 시행착오를 겪으며 민주주의를 이룩했고 아직 현재진행형이기도 하군요. 이상한 방향으로나 나가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현재 이집트의 사회경제적 상황이 썩 좋지 않다보니 외부세계가 이집트의 개혁에 필요한 도움을 제대로 줄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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