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인종차별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인종차별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6년 8월 31일 수요일

★기적의☆ 인류학(?!)


제국주의 시대의 절정기에 있었던 이탈리아-이디오피아 전쟁과 러일전쟁은 백인의 인종적 우월성에 대한 믿음을 뒤흔드는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먼저 있었던 이탈리아-이디오피아 전쟁은 아프리카 전역이 식민지로 전락하던 무렵 유색인종이 처음으로 유럽의 '백인' 군대를 격파했다는 점에서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안겼습니다. 백인 군대가 '검둥이'들에게 박살났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는군요.

 아두와 전투의 소식이 미국 전역을 뒤흔들기 하루 전날, 애틀랜타 컨스티튜션(Atlanta Constitution)이라는 신문은 아프리카로의 귀환 운동을 전개하던 300명의 흑인이 3월 1일 조지아주의 사바나를 출발했다는 소식을 조롱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아프리카는 모두 유럽인에 의해 분할될 것이기에 아프리카인들은 주권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남부 백인들의 입장에서는) 3월 1일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주장을 전개하는게 이치에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3월 1일 이후로는 그러한 신념이 흔들리게 되었다. 
 애틀랜타 컨스티튜션의 논조는 짐 크로우(Jim Crow) 법안과 유럽의 제국주의를 옹호하던 당대의 기류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1896년의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에서 미국 대법원은 짐 크로우 법안의 기저에 깔린 "분리하되 평등하다"는 주장이 미국 헌법에 합치된다는 결정을 내렸다. 애틀란타에서 발행되던 신문들은 이른바 '대서양을 아우르는 지배권'이라는 원대한 구상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즉 아프리카의 미래는 유럽의 통치에 따라 결정될 것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미국 또한 유럽계 미국인의 통치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이라는 논리였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미국에 남건 아프리카로 돌아가건 간에 유럽인에 의해 지배받는 암울한 미래만 있을 뿐이라고 전망했다. 즉 짐 크로우 법안은 제국주의의 절정기에 팽배한 인종적 우월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제국주의는 짐 크로우 법안의 친척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두와 전투는 애틀랜타 컨스티튜션의 기사에서 아프리카인의 열등성을 주장할 수 있도록 했던 신념을 산산조각 내 버렸다. 최소한 전투의 소식이 알려진 직후에는 말이다. 3월 4일의 머릿기사는 이디오피아인들이 3천명의 이탈리아군을 죽였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이탈리아군 지휘관 오레스테 바라티에리(Oreste Baratieri)가 패배의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오보도 실렸다. 이후에 실린 기사들도 아프리카에 대한 엄청난 무지와 심리적인 충격 때문에 오류 투성이었다. "이탈리아의 불운"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는 이디오피아가 아프리카 남부에 있다고 썼으며, 이탈리아가 실패한 것이 이디오피아의 막강한 군사력 때문이라고 암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애틀랜타 컨스티튜션은 이디오피아인들이 검둥이가 맞냐는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아비시니아인에 대한 의문"이라는 기사에서는 아프리카인의 인종적 특성에 대해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독자들에게 이디오피아인들의 특성에 대해 면밀히 관찰하라는 제언을 했다. 이 기사는 이디오피아인에게서는 "호텐토트 인종에게서 나타나는 평발과 펑퍼짐한 코"를 찾아볼 수 없으므로 콩고에 사는 아프리카인들과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실 이디오피아인들은 완벽한 흑인이 아니라 "페니키아인을 조상으로 두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시각은 애틀랜타 컨스티튜션에 실린 삽화들에도 반영됐다. 이 신문에 처음 실린 메넬리크의 초상화는 그를 1895년에 즉위한 러시아의 짜르 니콜라이 2세와 놀라우리 만치 비슷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아도와 전투에서 이디오피아인들이 거둔 승리의 규모가 자세히 알려지면서 미국인들은 더 큰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남부의 언론들만 메넬리크가 백인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뉴욕 월드(New York World)지도 기사에서 비슷한 주장을 했으며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도 다음날 뉴욕 월드의 기사를 전제했다. 미국 남부와 중서부, 그리고 대서양 지역의 주요 언론들은 모두 이디오피아인이 백인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뉴욕 월드는 "아비시니아인의 대부분은 코카서스 인종이다"라고 쓰고 여기에 덧붙여 "이디오피아인들은 외모가 수려하고 멋지다"고 주장했다.
Raymond Jonas, The Battle of Adwa: African Victory in the Age of Empire, (2011, Harvard University Press), pp.268~269.

2012년 3월 6일 화요일

스타하노프 운동의 성과?

스타하노프 운동의 결과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평가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러시아 인들을 훌륭한 노동자로 만들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러시아 노동자들의 근면함을 자본주의자들도 인정했으니 말입니다.

인력문제는 우리의 큰 걱정거리이고 매우 심각한 문제요. 독일인은 군인으로서 최고이며, 창조적인 일과 조직적인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최고라고 할 수 있소. 이탈리아인들은 좋은 노동자이지만 러시아인들이 이탈리아인들 보다 두 배에서 세 배는 더 일을 잘 하고 있소. 러시아인들은 우리의 손아귀에 있는 최고의 노동력이라 할 수 있소. 러시아인 노동자들을 독일로 데려올수록 우리에게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오.

1943년 3월 11일, 아돌프 히틀러가 자포로제에 위치한 남부집단군 사령부에서 열린 작전회의에서 주요 지휘관들에게. Eberhard Schwarz, Die Stabilisierung der Ostfront nach Stalingrad, (Munster-Schmodt Verlag, 1985) pp.259~260

그래서 러시아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국가에 가서도 마구 착취당했습니다. 음?

2010년 10월 14일 목요일

뭔가 이상한 인종차별;;;;

1945 년 4월 2일, 뷔딩엔 인근에서 미군에게 포위된  6SS 산악사단은 부대를 소규모로 나누어 돌파를 시도했습니다. 포위망을 형성한 미군 부대 중에는 흑인으로 편성된 제761전차대대도 있었는데 이 대대의 한 장교에 따르면 이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전투 임무에서 우리는 독일군을 숲에서 몰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우리는 낮게 사격을 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부하들에게 말했다. 제군들, 사격을 좀 높이 해서 나무들을 날려 버려라. 이렇게 해서 파편이 좀 더 많이 튀었고 많은 나무들이 쓰러졌으며 독일군들을 숲에서 나오게 할 수 있었다. 독일군들은 백기를 흔들면서 외쳤다.

“Kameraden!(전우들!) ”

나는 부하들에게 해치를 잠그고 전차 안에 있다가 적들이 전차 가까이 오거든 그대로 보병들에게 넘기라고 했다. 그런데 몇몇 친구가 해치를 약간 일찍 열었다. 독일놈들이 이걸 보더니 말했다.

“Schwarze Soldaten!(흑인 군인이다!)”

독일놈들 사이에 이 소리가 퍼지더니 녀석들은 다시 그 좆같은 숲으로 기어 들어가 버렸다.

-제761대대 C중대장 찰스 게이츠(Charles Gates) 대위의 회고

Joe W. Wilson, Jr, The 761st Black Panther Tank Battalion in World War II(McFarland, 1999), p.168

물론 다시 숲으로 들어갔던 독일군들은 생각을 고쳐 먹고 항복 했다지만 미군들은 기분이 별로 였을듯;;;;

2009년 5월 29일 금요일

Q&A - 북한을 핵폭격 하면 어떻게 되나요?

Q : 저는 원자폭탄을 조금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북한에 핵 공격을 하면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A : 욕 먹습니다.


**********



한국전쟁 당시 원자폭탄을 사용하는 문제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논의 되었습니다. 물론 원자폭탄 사용을 심각하게 고려한 것은 아니고 여러 가지 방안 중 하나로 타당성을 검토한 수준이었습니다.

1950년 7월 7일, 미 육군 작전참모부는 정보참모부에 북한에 핵 공격을 할 경우 세계 각국의 여론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에 대한 평가를 요청했습니다. 작전참모부가 상정한 원자폭탄의 사용 목적은 다음의 세 가지 였습니다.

a. 공산군에게 38선 이북으로의 철퇴를 강요하는 것
b. 위의 목표를 달성할 경우 공산군을 38선 이북에 계속 남아있도록 보장하는 것*
c. 유엔군의 북한 침공과 점령을 지원하는 것

a. Forcing the withdrawal of Communist Forces north of the 38th Parallel.
b. Having been successful in the above, insuring that communist Forces remain north of the 38th parallel.*
c. Supporting UN invasion and occupation of North Korea

Utilization of Atomic Bombardment to Assist in Accomplishment of the U. S. Objective in South Korea(1950. 7. 7), RG 319 Army Operations General Decimal File 1950-1951, 091. Korea, E97 Box 34

* 즉, 다시는 남침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것.

작전참모부의 요청에 대해 정보참모부는 7월 13일 다음과 같은 답변을 했습니다.

a. 한반도에서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서유럽과 남아메리카, 중동과 극동의 친미 국가들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b. 한반도에서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정치적, 선전적 측면에서 소련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c.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소련의 군사적 대응은 현재 가능한 정보로는 명확하게 판단할 수 없다.

d. “궁극적 병기”에 가장 근접한 존재인 원자 폭탄은 그 사용에 대해 명백히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경우에만 사용하도록 아껴야 한다. 한반도의 미군 잔류 병력을 구출하기 위해 사용할 필요가 생기지 않는 이상 한국에서는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지 않을 것이다.

a. The use of atom bombs in Korea would probably result in alienating pro-U.S. nations in Western Europe, Latin America, the Near and Middle East, and the Far East.

b. The use of atom bombs in Korea would serve to favor the Soviet from political and propaganda standpoint.

c. Soviet military reaction to U.S. atomic bombing cannot be definitely determined from intelligence available.

d. The atom bomb, being the nearest approach to “the absolute weapon”, should be reserved for use in such circumstances where its employment is clearly incontrovertible; which circumstances cannot be envisaged in Korea, except should the necessity for its use arise to permit the extrication of a remnant of U.S. Forces from Korea.

Intelligence Estimate of World-Wide and Soviet Reaction to the Use of Atomic Bombardment in the Korean Conflict(1950. 7. 13), p.1, RG 319 Army Operations General Decimal File 1950-1951, 091. Korea, E97 Box 34

서유럽은 미국이 주도하는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한 국가가 많았기 때문에 미국은 이곳의 여론에 가장 민감했습니다.

(d) 서유럽은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미국이 재래식 군사전략과 전술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에 무력하며 미국이 약하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으로 받아 들일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대서양 조약(Atlantic Pact)과 리오 협약(Rio Treaty)에서 약속한 공약을 이행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서유럽의 신뢰를 깎아 내릴 것이며 소련의 유화정책이 통하도록 만들어 미국은 고립될 것이다.

(d) Western Europeans would regard use of the atom bomb as an admission of weakness and of U.S. inability to cope with the situation by traditional military strategy and tactics. This would undermine Western Europeans faith in U.S. ability to meet its commitments under the Atlantic Pact and Rio Treaty, and thus pave the way for appeasement of the U.S.S.R., leaving the U.S. isolated.

Intelligence Estimate of World-Wide and Soviet Reaction to the Use of Atomic Bombardment in the Korean Conflict(1950. 7. 13), p.2, RG 319 Army Operations General Decimal File 1950-1951, 091. Korea, E97 Box 34

아시아의 경우는 도덕적 비난의 우려도 제기되었습니다.

(a) 아시아인들은 남한과 북한에 있는 북한군의 목표에 대해 원자 폭탄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을 것이다. 특히 남한 지역에 사용할 경우 민간인을 포함한 아군측의 피해 문제는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가져올 것이며 이것은 공산세력에 의해 “백인 대 황인”이라는 선전에 이용될 것이다. 새로운 아시아의 민족주의와 의식은 서방측이 진정한 협력을 얻기 위해서 활용해야 할 강력한 힘이다. 그러나 원자폭탄을 사용할 경우 서구에 대한 아시아의 오래된 의심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을 통해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확대될 것이다.

(a) The question in Asiatic minds as to the suitability of atom bomb against existing North Korean targets in both parts of Korea would be raised. Particularly in connection with their use in South Korea, the question of losses to friendly forces, including the civilian population, might cause a significant unfavorable reaction, which would be exploited by the communists in terms of “White versus Yellow” propaganda. The new Asiatic nationalism and consciousness is a powerful force which the west has been attempting to use to encourage genuine cooperation; Nevertheless, inherent Asiatic suspicion for West could easily be expanded by communist propaganda to unmanageable proportion in case of the use of atom bombs.

Intelligence Estimate of World-Wide and Soviet Reaction to the Use of Atomic Bombardment in the Korean Conflict(1950. 7. 13), p.3, RG 319 Army Operations General Decimal File 1950-1951, 091. Korea, E97 Box 34

비록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긴 했으나 여전히 미국은 핵 전력에 있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핵무기는 말 그대로 “궁극의 병기” 였기 때문에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사용하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정치적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물건이었으니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마음대로 쓸 수가 없었습니다.

미국에 비판적인 쪽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의 도덕적 문제를 비난하기 위해서 원자폭탄 투하문제를 자주 거론합니다. 하지만 이런 비난들은 당시 원자폭탄이라는 무기가 가지고 있던 정치적 상징성을 지나치게 간과한다는 생각입니다.

2009년 5월 10일 일요일

제정 러시아의 병역과 유태인 문제

Reforming the Tsar’s Army를 조금씩 읽는 중 입니다.

중간에 Mark von Hagen이 쓴 19세기말~20세기 초 제정 러시아 군대의 민족문제에 대한 글이 한 편 있는데 유태인과 관련된 부분이 꽤 재미있습니다. 해당 부분을 발췌해 봅니다.

유태인은 군 복무에 있어 다른 민족들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면서도 더 많은 제약을 받았다. 일반적인 징병에 있어서도 다른 민족 집단이 누리던 보다 자유주의적인 병역 면제의 대상이 되지 못 했다. 러시아는 제국 내의 유태인 집단에 별도의 징병 할당 인원을 배정했다. 만약 유태인의 징병 인원이 할당 인원에 미치지 못할 경우 “무조건 면제”로 분류될 젊은이들이 병역의 책임을 짊어 져야 했다. 이 정책은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종종 징병을 회피하려 한다는 이유로 옹호되었다. 개종하지 않은 유태인은 장교가 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군사 의학 대학’에 입학할 수 도 없었다. 러시아 군인들은 유태인이 전사로서 형편없다고 믿었다. 유태인들이 군 입대를 꺼려했다는 점 때문에 이러한 편견은 더욱 강화되었다. 1911년에 전쟁성은 두마에 유태인에게 군 복무 의무를 부과하는 대신 방위세를 내도록 하자는 법안을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Mark von Hagen, ‘The Limit of Reform : The Multiethnic Imperial Army Confronts Nationalism, 1874~1917’, Reforming the Tsar’s Army : Military Innovation in Imperial Russia from Peter the Great to the Revolu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p.46

유태인이 겁쟁이라는 인식은 유럽 국가들에 꽤 널리 퍼진 편견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군 장군들이 중동전쟁을 봤다면 생각이 달라졌겠지요.

2007년 11월 11일 일요일

베트남 전쟁과 미군 내 흑인의 비율 증가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처음으로 징병을 실시했는데 이것은 전쟁이 끝난 뒤 군대의 감축과 함께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실시된 징병제는 전후에 잠시 폐지되는 듯 하다가 한국전쟁의 발발과 냉전의 심화로 계속해서 유지됩니다. 미국인들로서는 생각도 하지 못한 평시 징병이 시작된 것 입니다.

세계대전 당시 징병제도는 상당한 명분이 있었고 미국인들도 대개는 여기에 호응하고 있었습니다. 히틀러나 도조는 분명히 때려잡을 명분이 넘쳐나는 악당들이었지요.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에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물론 강철의 대원수 이후에도 흐루쇼프나 마오 주석 같은 대인배들이 계속해서 출현했지만 이들은 히틀러처럼 전쟁을 하고 싶어 안달난 양반들은 아니었지요. 가끔 크레믈린이 스푸트닉 발사 같은 요상한 짓을 하긴 했지만 어쨌건 평화는 유지되었습니다.

세상이 비교적 잘 돌아가니 군대에 가고 싶은 사람이 있을 턱이 없지요. 미국의 징병제는 지방의 징병위원회의 자율성이 강한 편이어서 현역 판정 기준이 약간 고무줄자였고 여러가지 이유로 징병 연기나 면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있거나 대학생일 경우 연기가 되거나 면제를 쉽게 받을 수 있었다지요. 이런 저런 이유로 병역을 회피하거나 미룰 수 있었으니 결국 미군이 가용한 병역자원의 수는 점차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베트남에 본격적으로 개입할 무렵부터는 징병제 폐지 운동까지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사정이 곤궁하니 미군으로서는 머리 숫자를 채우기 위해서 이전에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던 인력자원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네. 바로 흑인이었습니다.

미국이 처음 징병제를 실시하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흑인은 가치있는 병력자원으로 취급받지 못했습니다. 흑인은 지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병역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 이었는데 이때는 전쟁에 나가는 것이 어느 정도 영광이라는 정서가 남아있던 무렵이니 흑인에게 군대에 갈 영광을 주는게 이상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한국전쟁 무렵부터 슬슬 병력자원의 부족 문제가 시작되자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미국 국방부는 1966년에 징병 기준을 낮춰 연간 10만명을 더 입대시킨다는 Project 100,000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의 영향으로 50%를 넘던 흑인의 현역 부적격 판정은 1966년 이후 30%대로 낮아졌습니다. 1966년부터 1968년까지 새로 바뀐 기준에 의해 현역으로 입대한 인원은 240,000명에 달했는데 이 중에서 41%가 흑인이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군대내의 흑인 비율은 점차 높아졌습니다. 1965년에 흑인은 육군 병력의 9%에 달했는데 1968년에는 13%로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지원병과 달리 징집병들은 전투 병과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고 교육수준이 낮은 흑인의 경우 대개 보병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에 병력 비율에 비해 사상자의 비중이 높았습니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전체 미군 중 흑인은 11%에 불과하지만 전사자의 비율에서는 22.4%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지요.

이런 궁색한 상황에 대해서 국방부 장관 맥나마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빈곤층들은 마침내 조국의 방위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기술과 생활 방식등을 배워 사회생활로 복귀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으며 …. (중략) 이렇게 해서 인생의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악순환에서 벗어날 것 입니다.”

George Q. Flynn, The Draft 1940~1973,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3, p.207

놀랍게도 어느 순간 미국의 병역은 시민의 자랑스러운 권리에서 빈민구제사업으로 전환된 것 입니다! 우와 세상에!

결국 병역 자체가 권리에서 귀찮은 부담으로 전락하면서 사회의 최하층이 이것을 부담하게 된 셈입니다. 맥나마라의 발언과는 달리 전쟁에 참여한 빈곤층들은 사회에서 쓸만한 기술은 배우지 못하고 사회로 돌아와 인생의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지요.

2007년 3월 23일 금요일

국제여단에 대한 우울한 이야기

(전략) 국제여단 소속의 외국인 지원병들은 스페인 병사들과 유리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공식적인 방문을 제외하면 국제여단 병사들은 스페인 병사들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영국이나 미국인 병사들은 “럭키 스트라이크”를 피우지만 담배가 없어 피우지 못하는 스페인 병사들에게 자신들이 피우는 담배를 나눠줄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국제여단 병사들은 고국에서 보내오는 물품으로 풍족한 생활을 하지만 이것을 스페인 전우들과 나누지 않습니다. 외국인 지원병들에게는 출신 국가의 식품이 제공되지만 국제여단에 소속된 스페인 병사들에게 스페인 전통 음식을 제공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알바세테(Albacete)의 의무부대는 최근까지 외국인 지원병들만 치료했으며 스페인 병사들은 해당 부대에서 알아서 하라고 방관했습니다. 알바세테, 무르시아(Murcia), 알리칸테(Alicante), 베니카심(Benicassim)의 군병원은 매우 좋은 시설을 가지고 있지만 국제여단본부의 의무감 Telge 소령과 그의 부관 Franek 대위는 국제여단에서 외국인 전우들과 함께 싸운 스페인 병사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사단이 처음으로 스페인 전우들에게 외국인 지원병들과 동등한 처우를 한 것이 대단한 성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1여단장 Richard는 브루네테와 사라고사 전투에서 입은 피해를 보고하면서 외국인 지원병의 경우는 매우 자세하게 집계하고 때로는 이름까지 일일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정작 자신이 지휘하는 스페인 병사들의 피해는 얼마나 되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었습니다.

(후 략)

1938년 1월 14일, 스베르쳅스키 대령의 보고서 중에서

Spain Betrayed : The Soviet Union in the Spanish Civil War, Yale University Press, 2001, pp453-454에서 재인용

부대 재편성 도중에 매우 유감스럽고 극도로 심각한 사고들이 발생했습니다. 본부의 요청에 따라 장교 한명과 정치위원 한명이 Trembleque로 파견됐습니다. 이 두 명이 도시에 도착하자 (Trembleque) 요새사령관과 인민전선위원회에서는 이들이 도착하기 전날에 발생한 (국제여단 병사들이 일으킨) 사고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국제여단소속의) 많은 병사들이 술에 취해서 밤새도록 도시에서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술에 취한 (국제여단) 병사들은 경비병을 강제로 무장해제 한 뒤 위협했으며 도시의 건물들을 마구 파손해 주민들이 밤새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부대 이동 과정에서 60명이 탈주했습니다.

(후 략)

1938년 2월 13일, 14혼성여단장 뒤몽 중령이 국제여단 본부에 보낸 보고서.

Spain Betrayed : The Soviet Union in the Spanish Civil War, Yale University Press, 2001, pp462-463에서 재인용

정치적 올바름을 외치는 자들의 이중성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 모양입니다. 프랑코에 맞서 싸운 이들의 용기까지 폄하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렇게 깽판을 칠 요량이라면 스페인에는 뭐하러 간 것일까요?

이와 비슷하게 1820년대에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가한 서유럽 지원병들 상당수가 그리스인들을 극도로 혐오했다고 하지요.

2006년 5월 8일 월요일

1차 세계대전과 미국의 흑인 부대(재탕)

미국사와 관련된 책을 조금 읽다 보면 흑인에 대한 차별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장기간 존속되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당장 1960년대에 흑인 대학생들을 백인 학교에 입교 시키기 위해서 주 방위군을 동원해야 될 정도였으니. 흑인에 대한 인종적 차별이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없어 지지 않은 이유를 들자면 돌팔이 인류학자들의 인종 비교 연구가 과학이라는 탈을 쓰고 이른바 “식자층”에게 까지 널리 퍼졌다는 것이 있습니다. 흑인에 대한 차별이 과학의 탈을 쓰고 자행 되었으니 참 과학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흑인은 인종적으로 열등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보니 미국 정부는 흑인을 무장시키는 것을 별로 달가워 하지 않았습니다. 남북전쟁 때야 노예해방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 흑인 부대를 대규모로 조직했지만 남북전쟁이 끝난 뒤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1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 미국 전쟁성(War Department)는 흑인 부대를 대규모로 편성하는데 대해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물론 뉴욕 15 보병연대와 일리노이 8 보병연대같이 흑인 장교와 흑인 사병으로 편성된 주방위군 부대가 있긴 했습니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드문 예에 해당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의 참전이 결정되면서 흑인의 전쟁 동원이 필요해 지자 흑인 부대를 증편하는 방안이 전쟁성의 민병대 국(Militia Bureau)에서 나왔습니다. 민병대 국은 흑인 연대 세개를 편성해서 이것으로 독립 흑인 보병여단을 만들자는 안을 내 놓았습니다. 이에 대해서 당시 전쟁성 장관이었던 베이커는 흑인 주방위군 3개 연대와 징집한 흑인 연대 한 개로 임시 흑인 사단을 편성하자는 안을 내놓습니다.

이렇게해서 뉴욕 15 보병연대는 369 보병연대로, 일리노이 8 보병연대는 370 보병연대로, 그리고 기타 독립 흑인 보병부대들은 372 보병연대로 통합 되었고 새로 징집한 흑인 병사들로 371 보병연대가 편성 되었습니다. 이렇게 편성된 4개 흑인연대로 1918년 1월 5일에 93 보병사단이 편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단 직할대의 편성이 완료 되지 못 했기 때문에 93 보병사단은 보병연대 네개만 가진 연대들의 집합체가 되었습니다.

유럽전선에 투입된 93 보병사단은 프랑스군에 분산 배치되게 되었습니다. 1918년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장기간의 전쟁으로 병력 부족을 심하게 겪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미군 부대를 예하에 두려고 미국 정부에 요청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미국 원정군 사령관 퍼싱은 프랑스군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93 보병사단 예하의 4개 연대를 각각 프랑스군 사단에 배속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이렇게 해서 가장 먼저 프랑스에 도착한 제 369보병연대가 프랑스군 16 보병사단에 배속되어 전투를 치루게 됐습니다.
흥미롭게도 퍼싱은 당시 다른 미국 장군들과 달리 흑인 부대가 훌륭한 전투 부대이기 때문에 비전투 임무에 돌리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일각에서는 퍼싱이 흑인 사단을 해체해서 프랑스군에 배속시킨 것이 퍼싱의 인종 차별적 행동이라고 비판하는데 전쟁중의 퍼싱의 행동이나 언사를 보면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1918년 6월에 프랑스 정부가 퍼싱에게 흑인연대 8개를 프랑스군에 증원해 줄 수 없느냐고 했을 때 퍼싱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하는 군요.

“유색인종연대들(Colored regiments)은 미국 시민들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관은 이들 부대들을 다른 백인 부대들과 같은 방식으로 운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퍼싱이 최초로 편성된 흑인 연대 네개를 프랑스군에 배속 시킨 것은 프랑스와의 동맹을 고려한 정치적 행동이라는게 지배적인 의견입니다. 사실 1918년에는 미군의 전투경험과 대부대 운용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에 흑인 부대뿐 아니라 백인 부대들도 대대급으로 해체해서 영국군에 배속시키자는 주장도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사단 편제가 93사단은 사단 편제를 제대로 가지지 못해서 사단급 작전이 불가능 했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퍼싱도 어쩔 수 없는 백인인지라 흑인은 훌륭한 병사지만 장교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퍼싱 자신도 젊은 시절 잠시 흑인 부대를 지휘했었다고 하죠. 퍼싱은 백인 장교가 흑인 병사와 부사관을 지휘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운용 방식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프랑스군에 분산 배치된 흑인 병사들은 1918년 7월의 반격 작전에서 큰 활약을 했다고 합니다. 흑인 병사들의 용맹 때문에 이들을 지휘한 백인 장교들은 큰 감명을 받고 인종 차별적 태도를 버리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Halem’s Hell Fighters라는 명칭을 얻게 된 뉴욕 369 보병연대는 이때 보인 공적으로 1918년 12월 18일에 프랑스 정부의 부대 표창을 받게 됩니다.

그렇지만 흑인들에 대한 차별은 계속 이어져서 2차 대전때도 흑인들은 소규모 독립 부대로 참전하는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결국 인종별 부대를 편성하는 차별이 시정 된 것은 베트남전 부터였습니다.

미국 흑인들의 평등을 위한 투쟁은 지극히 당연한 인간적 평등을 얻기 위한 대가치고는 너무 비싼 대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