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흑인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흑인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07년 11월 11일 일요일

베트남 전쟁과 미군 내 흑인의 비율 증가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처음으로 징병을 실시했는데 이것은 전쟁이 끝난 뒤 군대의 감축과 함께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실시된 징병제는 전후에 잠시 폐지되는 듯 하다가 한국전쟁의 발발과 냉전의 심화로 계속해서 유지됩니다. 미국인들로서는 생각도 하지 못한 평시 징병이 시작된 것 입니다.

세계대전 당시 징병제도는 상당한 명분이 있었고 미국인들도 대개는 여기에 호응하고 있었습니다. 히틀러나 도조는 분명히 때려잡을 명분이 넘쳐나는 악당들이었지요.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에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물론 강철의 대원수 이후에도 흐루쇼프나 마오 주석 같은 대인배들이 계속해서 출현했지만 이들은 히틀러처럼 전쟁을 하고 싶어 안달난 양반들은 아니었지요. 가끔 크레믈린이 스푸트닉 발사 같은 요상한 짓을 하긴 했지만 어쨌건 평화는 유지되었습니다.

세상이 비교적 잘 돌아가니 군대에 가고 싶은 사람이 있을 턱이 없지요. 미국의 징병제는 지방의 징병위원회의 자율성이 강한 편이어서 현역 판정 기준이 약간 고무줄자였고 여러가지 이유로 징병 연기나 면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있거나 대학생일 경우 연기가 되거나 면제를 쉽게 받을 수 있었다지요. 이런 저런 이유로 병역을 회피하거나 미룰 수 있었으니 결국 미군이 가용한 병역자원의 수는 점차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베트남에 본격적으로 개입할 무렵부터는 징병제 폐지 운동까지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사정이 곤궁하니 미군으로서는 머리 숫자를 채우기 위해서 이전에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던 인력자원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네. 바로 흑인이었습니다.

미국이 처음 징병제를 실시하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흑인은 가치있는 병력자원으로 취급받지 못했습니다. 흑인은 지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병역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 이었는데 이때는 전쟁에 나가는 것이 어느 정도 영광이라는 정서가 남아있던 무렵이니 흑인에게 군대에 갈 영광을 주는게 이상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한국전쟁 무렵부터 슬슬 병력자원의 부족 문제가 시작되자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미국 국방부는 1966년에 징병 기준을 낮춰 연간 10만명을 더 입대시킨다는 Project 100,000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의 영향으로 50%를 넘던 흑인의 현역 부적격 판정은 1966년 이후 30%대로 낮아졌습니다. 1966년부터 1968년까지 새로 바뀐 기준에 의해 현역으로 입대한 인원은 240,000명에 달했는데 이 중에서 41%가 흑인이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군대내의 흑인 비율은 점차 높아졌습니다. 1965년에 흑인은 육군 병력의 9%에 달했는데 1968년에는 13%로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지원병과 달리 징집병들은 전투 병과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고 교육수준이 낮은 흑인의 경우 대개 보병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에 병력 비율에 비해 사상자의 비중이 높았습니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전체 미군 중 흑인은 11%에 불과하지만 전사자의 비율에서는 22.4%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지요.

이런 궁색한 상황에 대해서 국방부 장관 맥나마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빈곤층들은 마침내 조국의 방위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기술과 생활 방식등을 배워 사회생활로 복귀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으며 …. (중략) 이렇게 해서 인생의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악순환에서 벗어날 것 입니다.”

George Q. Flynn, The Draft 1940~1973,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3, p.207

놀랍게도 어느 순간 미국의 병역은 시민의 자랑스러운 권리에서 빈민구제사업으로 전환된 것 입니다! 우와 세상에!

결국 병역 자체가 권리에서 귀찮은 부담으로 전락하면서 사회의 최하층이 이것을 부담하게 된 셈입니다. 맥나마라의 발언과는 달리 전쟁에 참여한 빈곤층들은 사회에서 쓸만한 기술은 배우지 못하고 사회로 돌아와 인생의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지요.

2006년 5월 8일 월요일

1차 세계대전과 미국의 흑인 부대(재탕)

미국사와 관련된 책을 조금 읽다 보면 흑인에 대한 차별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장기간 존속되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당장 1960년대에 흑인 대학생들을 백인 학교에 입교 시키기 위해서 주 방위군을 동원해야 될 정도였으니. 흑인에 대한 인종적 차별이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없어 지지 않은 이유를 들자면 돌팔이 인류학자들의 인종 비교 연구가 과학이라는 탈을 쓰고 이른바 “식자층”에게 까지 널리 퍼졌다는 것이 있습니다. 흑인에 대한 차별이 과학의 탈을 쓰고 자행 되었으니 참 과학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흑인은 인종적으로 열등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보니 미국 정부는 흑인을 무장시키는 것을 별로 달가워 하지 않았습니다. 남북전쟁 때야 노예해방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 흑인 부대를 대규모로 조직했지만 남북전쟁이 끝난 뒤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1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 미국 전쟁성(War Department)는 흑인 부대를 대규모로 편성하는데 대해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물론 뉴욕 15 보병연대와 일리노이 8 보병연대같이 흑인 장교와 흑인 사병으로 편성된 주방위군 부대가 있긴 했습니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드문 예에 해당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의 참전이 결정되면서 흑인의 전쟁 동원이 필요해 지자 흑인 부대를 증편하는 방안이 전쟁성의 민병대 국(Militia Bureau)에서 나왔습니다. 민병대 국은 흑인 연대 세개를 편성해서 이것으로 독립 흑인 보병여단을 만들자는 안을 내 놓았습니다. 이에 대해서 당시 전쟁성 장관이었던 베이커는 흑인 주방위군 3개 연대와 징집한 흑인 연대 한 개로 임시 흑인 사단을 편성하자는 안을 내놓습니다.

이렇게해서 뉴욕 15 보병연대는 369 보병연대로, 일리노이 8 보병연대는 370 보병연대로, 그리고 기타 독립 흑인 보병부대들은 372 보병연대로 통합 되었고 새로 징집한 흑인 병사들로 371 보병연대가 편성 되었습니다. 이렇게 편성된 4개 흑인연대로 1918년 1월 5일에 93 보병사단이 편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단 직할대의 편성이 완료 되지 못 했기 때문에 93 보병사단은 보병연대 네개만 가진 연대들의 집합체가 되었습니다.

유럽전선에 투입된 93 보병사단은 프랑스군에 분산 배치되게 되었습니다. 1918년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장기간의 전쟁으로 병력 부족을 심하게 겪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미군 부대를 예하에 두려고 미국 정부에 요청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미국 원정군 사령관 퍼싱은 프랑스군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93 보병사단 예하의 4개 연대를 각각 프랑스군 사단에 배속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이렇게 해서 가장 먼저 프랑스에 도착한 제 369보병연대가 프랑스군 16 보병사단에 배속되어 전투를 치루게 됐습니다.
흥미롭게도 퍼싱은 당시 다른 미국 장군들과 달리 흑인 부대가 훌륭한 전투 부대이기 때문에 비전투 임무에 돌리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일각에서는 퍼싱이 흑인 사단을 해체해서 프랑스군에 배속시킨 것이 퍼싱의 인종 차별적 행동이라고 비판하는데 전쟁중의 퍼싱의 행동이나 언사를 보면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1918년 6월에 프랑스 정부가 퍼싱에게 흑인연대 8개를 프랑스군에 증원해 줄 수 없느냐고 했을 때 퍼싱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하는 군요.

“유색인종연대들(Colored regiments)은 미국 시민들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관은 이들 부대들을 다른 백인 부대들과 같은 방식으로 운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퍼싱이 최초로 편성된 흑인 연대 네개를 프랑스군에 배속 시킨 것은 프랑스와의 동맹을 고려한 정치적 행동이라는게 지배적인 의견입니다. 사실 1918년에는 미군의 전투경험과 대부대 운용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에 흑인 부대뿐 아니라 백인 부대들도 대대급으로 해체해서 영국군에 배속시키자는 주장도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사단 편제가 93사단은 사단 편제를 제대로 가지지 못해서 사단급 작전이 불가능 했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퍼싱도 어쩔 수 없는 백인인지라 흑인은 훌륭한 병사지만 장교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퍼싱 자신도 젊은 시절 잠시 흑인 부대를 지휘했었다고 하죠. 퍼싱은 백인 장교가 흑인 병사와 부사관을 지휘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운용 방식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프랑스군에 분산 배치된 흑인 병사들은 1918년 7월의 반격 작전에서 큰 활약을 했다고 합니다. 흑인 병사들의 용맹 때문에 이들을 지휘한 백인 장교들은 큰 감명을 받고 인종 차별적 태도를 버리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Halem’s Hell Fighters라는 명칭을 얻게 된 뉴욕 369 보병연대는 이때 보인 공적으로 1918년 12월 18일에 프랑스 정부의 부대 표창을 받게 됩니다.

그렇지만 흑인들에 대한 차별은 계속 이어져서 2차 대전때도 흑인들은 소규모 독립 부대로 참전하는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결국 인종별 부대를 편성하는 차별이 시정 된 것은 베트남전 부터였습니다.

미국 흑인들의 평등을 위한 투쟁은 지극히 당연한 인간적 평등을 얻기 위한 대가치고는 너무 비싼 대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