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보급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보급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2년 10월 10일 월요일

[번역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관한 몇가지 생각 제병협동 전쟁수행, 대대전술단, 그리고 어항속의 전쟁

 

지난 929일 미국 육군협회 웹사이트에 재미있는 글이 한편 올라왔습니다.

 

Reflections on Russia's 2022 Invasion of Ukraine: Combined Arms Warfare, the Battalion Tactical Group and Wars in a Fishbowl | AUSA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졸전을 거듭하고 있는 러시아 지상군의 조직구조상의 문제를 지적하는 내용입니다. 비슷한 비판을 하는 연구자들이 많아서 이 글이 아주 특출나지는 않습니다만 글에서 제시하는 비유가 상당히 괜찮습니다. 이 글의 저자인 아모스 C. 폭스(Amos C. Fox)는 미육군의 현역 중령입니다.

 

-------------------------------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관한 몇가지 생각

제병협동 전쟁수행, 대대전술단, 그리고 어항속의 전쟁

 

아모스 C. 폭스

 

들어가며

2014년 봄에 시작되어 2015년 봄에 소강상태에 들어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다시 시작됐다. 2022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재침공한 사건은 공식적으로 국가간의 전쟁을 중앙의 무대로 불러왔다. 지금 전개되는 전쟁의 전면에 국가라는 행위자가 나타났다. 러시아는 이번 침략 전쟁에서 공개적으로 정규군을 동원하고 있다. 2014~2015년 크름과 돈바스 분쟁에서 취했던 모호한 접근 방식을 그만둔 것이다.

러시아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권좌에서 축출하고 키이우에 러시아가 통제하는 괴뢰 정권을 세우기 위해 2022223일 세 방면에서 침공을 개시했다.1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벨라루스 국경과 우크라이나-러시아 국경에 점진적으로 병력을 배치한 뒤 벨라루스의 마지르-고멜 회랑에서 키이우 방면으로, 러시아의 벨고로드에서 하르키우 방면으로 공격을 개시하고, 러시아의 로스토프 방면에서는 도네츠크 공화국과 루한스크 공화국에 병력을 증강했다.2

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의 전략에 문제가 많고 그의 계획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푸틴의 생각했던 러시아 군대와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태도는 완전히 틀렸다. 러시아군은 가장 기세를 올리고 있던 20223월 말 키이우 외곽의 안토노프 공항을 점령하고 하르키우 방면으로 돌파해 들어갔으며 마리우폴을 통해 돈바스와 크름 반도를 연결했다.3 하지만 이런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안토노프 공항을 점령한 러시아군은 며칠도 못 버티고 패주했고 우크라이나군이 공항을 탈환했다.4 러시아군은 키이우를 포위 점령하려 했지만 우크라이나군은 능동적인 기동방어로 이를 격퇴했다.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을 키이우에서 벨라루스의 공격 개시 지점으로 몰아냈다.5 러시아군은 하르키우를 포위하는데 실패했고 이 도시를 우크라이나군의 통제 하에서 빼앗지 못했다. 러시아군은 남부에서는 다소나마 성공을 거두어 헤르손, 멜리토폴, 마리우폴 등의 도시를 점령했다.6 그리고 도네츠크 인민군과 루한스크 인민군의 지원을 받아 여전히 돈바스를 통제하고 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러시아군이 남은 지역들을 지켜낼 능력은 불확실해지고 있다.

게다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제공권을 장악하지 못했다. 제공권 비슷한 것 조차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영어 신문) 키이우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202297일까지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의 항공기 237, 헬리콥터 208, 무인기 880대를 격추시켰다고 한다.7 러시아군이 공중 우세를 달성하지 못해서 우크라이나 지상군은 러시아 지상군이나 러시아 공군의 방해를 거의 받지 않고 작전을 펼치고 있다. 그 결과 키이우 등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우크라이나군과 국제의용군은 러시아군 50,000명 이상을 사살하고 러시아군의 전차 2,097, 야포 1,194, 다연장로켓포 300대를 격파했다. 개전 이후 6개월 동안 러시아군의 총 인명손실은 70,000에서 80,000명 정도로 추정된다.8 아무리 봐도 이런 손실 규모는 충격적이다. 우크라이나군은 훌륭하게 싸웠고 러시아군은 졸렬하게 싸웠다. 게다가 러시아군의 군율은 심각한 수준이고 사기도 바닥을 치고 있다. 러시아군에는 약탈 행위와 탈영, 각종 범죄가 판을 치고 있다.9

2014-2015년의 돈바스 분쟁 당시 러시아군은 무시무시한 존재로 비춰졌다. 그런데 어째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이렇게 엉망진창인가?10 우크라이나군의 강력함이 가장 큰 원인임은 분명하다. 우크라이나군은 매우 실용적이다. 이들은 한가지 전투 방식이 다른 방식들 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군은 상황을 평가해 전술적 승리를 달성할 수 있는 올바른 방법과 수단을 적용한다.11 그리고 우크라이나군의 전술 행동을 보면 제병 협동 작전의 가치를 인정하고 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우크라이나군은 작은 승리를 전술적 성공과 작전적 성공으로 이어가는 능력이 있다. 러시아군이 전쟁 초기에 패배하자 키이우와 하르키우 방면에서 병력을 철수시켜 돈바스 방면에 재배치한 점은 우크라이나군이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고 있다는 지표다.12

반면 러시아군의 작전적 수준과 전술적 수준의 능력은 참담하기 짝이 없다. 러시아군의 수준은 혐오스럽다. 이뿐만이 아니다. 러시아군은 사기가 아주 낮고 군율이 무너졌다. 러시아군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고 여기에 따르는 여러가지 설명이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러시아군의 한심한 성과가 비효율적인 훈련, 잘못된 지휘 및 통제(C2) 방식, 그리고 러시아군이 빠져 있는 작전 환경에 부적합한 조직 구성에 기반하고 있음을 논하고자 한다.

 

훈련, 지휘 및 조직 : 성공적인 전쟁 수행을 떠받치는 기둥

성공적인 군사작전은 위협 요인과 작전 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전력으로 제병협동 작전을 수행해야 달성할 수 있다. 제병협동 작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유능한 지휘관 아래에 모든 종류의 무기를 활용해 전투와 작전을 효과적으로 통합-조율해 수행할 수 있도록 적합하게 편제된 부대가 있어야 한다. 2022223일 이래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양상을 보자. 수많은 정책 결정자와 분석가, 군인들이 러시아군을 치명적인 전쟁 기계라고 두려워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지난 수개월간 일어난 사건들을 보면 러시아군은 제병협동 작전을 수행하기에는 훈련과 자산이 부족하고, 지상군은 작전을 수행하는 전역에 적합하지 않게 조직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점들을 보면 러시아군은 형편없는 지휘를 받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군이 전투 편제의 단위로 만든 임시편제 대대전투단은 적합하게 조직된 제병협동부대가 아니다. 또한 러시아군은 규율이 잘 잡힌 전투 조직도 아니다. 이런 미흡한 점은 러시아군의 사기와 규율의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소규모 교전과 전투에서 패배하는 문제는 말할 나위도 없다.

 

훈련 : 제병협동 전쟁수행

러시아는 매년 순환 형식으로 자파드 연합 연습과 보스토크 연합 연습을 실시한다. 이 두 연습은 러시아군이 전략, 작전술, 전술 단위에서 스트레스 테스트를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연습 기간에는 제병 및 병종간 협동, 전술 및 장거리 작전지속능력, 그리고 분산된 지휘통제(C2) 등 세가지 능력을 시험하고 평가 하는게 중점이다. 그리고 이런 연합 연습에는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회원국들도 참여해 상호 운용간에 발생하는 문제들을 시험하고 공동 지휘통제의 해법을 개발한다.13

이러한 연합 연습에서는 제병협동전술과 제병협동작전이 초점이 될 수 밖에 없다.14 제병협동전쟁수행은 (전차 대 전차 같은) 체계 중심의 전쟁수행과 반대된다. 제병협동전쟁수행은 그 대신 다양한 층위의 전투 수단을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해 한 병과의 취약성을 다른 병과의 힘으로 상쇄한다.15 그리고 적합하게 조직화되고 통합된 제병협동 부대는 또 다른 것을 보완할 수 있다. 적군이 아군의 한 병과에 대응할 때 또 다른 병과로 우위를 점할 수 있다.16

지형도 제병협동 전쟁수행에서 중요한 요소다. 군사이론가 로버트 레온하드(Robert Leonhard)는 적의 위치를 불안정하게 하는 것, 즉 적을 가장 취약한 지형으로 몰아붙이는 게 제병협동작전에서 중요한 요인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야 제병협동 부대의 잠재적 장점을 극대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17 예를 들면 전차 부대는 적 전차 부대와 직접 교전을 피하는게 좋다. 전차 한 대가 개활지에서 산개한 적 경보병과 싸운다면 상대적으로 공평한 대결이 될 것이다. 하지만 대전차 화기를 가진 경보병 부대는 시가지나 울창한 삼림지대 같은 빽빽한 지형에서 전차 부대에 대해 큰 우위를 가진다.18

우크라이나군은 물량 면에서 불리하다고 보이기는 했지만 다양한 병과를 보유하고 있어서 이를 바탕으로 작은 규모의 제병협동 작전은 물론 통합된 제병협동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을 마련했다.19 동시에 우크라이나군은 제병협동 전쟁수행과 제병협동 작전을 가능하게 하는 C2 체계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실제로 지금까지 설명한 역학, 즉 대전차화기를 보유한 경보병이 전차의 기동이 제한되는 지형에서 전차를 상대하는 전투는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보여주는 패러다임이 되었다.20 우크라이나 보병 부대가 러시아 기계화 부대를 시가지, 침수된 도로, 삼림지대로 유인한 뒤 불리한 지형에 빠진 적을 대전차 화기의 사거리 내에서 격멸했다는 보고가 여러건 있었다.21 그 결과 우크라이나군이 전장에서 보여준 강력함이 러시아군의 형편없는 훈련과 전술을 드러냈다.

반면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군과 완전히 정 반대의 군대였다. 개전 초 45일간 러시아가 그나마 우세했던 때 조차 러시아군은 중앙화 되어 예하 부대를 조율할 지휘부나 총사령관이 없었다.22 앤소니 킹(Anthony King) 교수는 지휘는 의사결정의 술(art)이자 과학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지휘의 목적, 즉 의사결정의 목적은 전투력을 조직화하여 군사적 효율성을 증대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23 러시아군은 단일한 작전 지휘관을 두고 정보를 교환할 사령부를 두는 대신 복잡하기 짝이 없는 C2 네트워크에 의존했다. 이렇게 해서는 합동군 차원의 제병협동 작전을 수행하기는커녕 작전 조차 조율할 수 없다. 그 결과 러시아군의 작전은 제병협동의 장점을 끌어내지 못한채 수행됐다.24 이런 사례는 수도 없이 많지만, 러시아군이 키이우 외곽의 안토노프 공항을 점령하고 유지하는데 실패한 사례는 이런 문제를 잘 보여준다.25 그리고 이번 전쟁에서 여러 번 있었던 포위전을 봐도 러시아군의 지휘통제 문제와 훈련 부족 문제를 알 수 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군을 우회해서 포위하려 하면 불리한 지형으로 끌려들어갔다. 이런 점을 봐도 러시아군의 문제를 알 수 있다. 전쟁 초기 러시아군이 키이우와 하르키우를 포위하려 시도한 작전이 정확하게 이런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대대전술단

대대전술단은 2010년대 초 항시 준비태세를 갖춘여단의 병력 충원 문제가 제기되는 와중에 러시아 지상군의 오래된 구조와 인적 자원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등장했다.26 많은 경우 러시아군의 차량화소총병여단의 편제에서 실제로 전투력이 있는 병력은 1개 대대 규모에 불과했다. 러시아군의 사단들은 서류상으로만 존재했기 때문에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대대전술단을 조금 밖에 편성하지 못했다. 레스터 그라우(Lester Grau), 찰스 바틀스(Charles Bartles), 마이클 카우프만(Michael Kaufman)을 비롯한 연구자들은 최근 수개월간 대대전술단의 역사와 편성을 재검토 하고 있다. 최근의 연구들은 대대전술단에 대해서 (기존과는) 다른 설명을 하고 있다.

러시아군의 편제 구성과 러시아군이 실전에 적용하기 위해 적용한 편제간의 괴리는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효율성을 발휘하는데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러시아군은 주요 훈련 연습에서 필요에 따라 편제 부대를 투입하고 임무를 부여했다. 즉 특정한 임무에 맞춰서 부대를 편성했다.27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때도 대대전술단 편제를 사용했는데 대대전술단과 전역 사령부, 그리고 전역 사령관 사이에 제대로 된 지휘통제(C2)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상황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러시아군은 특정한 방식으로 편성과 훈련, 장비를 갖추었는데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가 준비한 것과 다른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 때문에 전장의 러시아군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다. 지휘통제의 문제 때문에 최소한 12명의 러시아군 장성이 전사했고,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심각한 보급 문제가 발생했다.28

지금까지 러시아군의 대대전술단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여준 성과를 보면 이 편제는 이번 전쟁에 부적합한 편제다. 그라우와 바틀스는 최근 RUSI(Royal United Services Institute)를 통해 발표한 글에서 대대전술단은 국지전, 저강도분쟁, 대반란전에 적합한 편제라는 견해를 보였다.29

소규모의 대대급 제병협동 임무부대인 대대전술단은 2014-2015년의 돈바스 전쟁에서는 임무를 잘 수행했다. 왜냐하면 이때는 전장이 상대적으로 좁았기 때문이다. 돈바스 전선은 길이가 대략 420km(260마일) 정도이고 러시아의 괴뢰 정권인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한스크 인민공화국의 근거지였다.30 우크라이나 정부가 통제하는 지역과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루한스크 인민공화국이 통제하는 지역의 경계선에서 러시아와의 국경선까지의 거리는 대개 96km(60마일) 내외이다. 러시아까지의 거리가 짧을 뿐만 아니라 도네츠크 인민군과 루한스크 인민군은 러시아의 남부군관구 및 서부군관구에서 이어지는 안전한 보급선에 가까운 전장에서 작전을 했다. 러시아가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한스크 인민공화국에 제공하는 지원은 이 두 군관구에서 대부분 담당했다.

러시아는 남부군관구의 제8제병합동군을 통해 도네츠크 인민군과 루한스크 인민군을 통제했다.31 러시아는 괴뢰군을 두개의 야전군으로 편성하고 기본 전투 편제로 대대전술단을 적용했다.32 도네츠크 인민군과 루한스크 인민군에서 편성한 악명높은 대대전술단 중에는 소말리아 대대와 스파르타 대대가 있다. 소말리아 대대는 최근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다. 소말리아 대대를 지휘하는 티무르 쿠릴킨 중령과 다른 장병들이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국방부 장관 데니스 푸실린으로부터 치열했던 마리우폴 전투의 공적으로 수훈을 받았다.33

공개된 자료들을 보면 도네츠크 인민군과 루한스크 인민군 덕분에 러시아군은 돈바스 전쟁에서 우위를 누릴 수 있었다. 도네츠크 인민군과 루한스크 인민군이 불리할 때 러시아군 대대전술단이 투입됐다. 러시아군 대대전술단이 괴뢰군을 지원하기 위해서 러시아 영내의 전방전개기지에서 60-70마일 정도만 이동하면 됐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20148월 루한스크 공항 전투와 일로바이스크 전투, 20152월의 제2차 도네츠크 공항 전투와 데발체베 전투가 이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34 하지만 공개되어 있는 자료 만으로는 2014-2015년의 돈바스 전쟁 당시 러시아군과 도네츠크 인민군, 루한스크 인민군의 대대전술단이 어느 정도의 규모와 비율로 참전했는지 분석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점은 러시아군과 러시아 괴뢰군의 대대전술단들이 좁은 전장, 즉 길이가 420km 정도 밖에 안되는 전장에서 작전을 했다는 사실이다. 러시아군의 대대전술단의 이동과 전술보급, 지휘통제는 도네츠크와 루한스크의 안전한 도로망을 따라 최전방의 전투진지, 보급소, 지휘소까지 이어졌다. 전방까지 이동 거리가 짧고 도로망도 안전한 상황에서 러시아군의 대대전술단이 경험한 상황들이 지금 러시아군의 작전 수행과 사기, 군율에 영향을 끼쳤다.

첫 번째는, 2014-2015년 돈바스 전쟁에 투입된 러시아군 대대전술단은 러시아-우크라이나 국경의 집결지에서 최전방의 전투 지역까지 이동할 때 정찰 계획, 최전방 정찰부대와의 조율 및 통신이 필요 없었다. 현재 시점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2014-2015년 돈바스 전쟁의 상황이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이는가를 감안하면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러시아군 대대전술단은 세심한 정찰을 할 필요도 없이 도로를 따라 고속기동을 해서 일로바이스크나 데발체베의 괴뢰군과 접촉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군은 이동 중 전술정찰 계획이나 정찰에 필요한 자산, 정찰대와의 협력을 아예 준비하지 않았던 듯 하다.

2014-2015년에 러시아군과 돈바스의 괴뢰군은 돈바스 전역에 강력한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우크라이나군은 방어군을 몰아내려면 잘 구축된 방어선을 공격해야 했다. 하지만 2022년 전쟁에서는 작전 상황이 달라졌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 키이우와 하르키우 같은 도시를 방어 거점으로 만들었다. 대도시들은 우크라이나군의 방어 거점과 공격 거점이 되었다. 러시아군 대대전술단은 정찰이 부족하거나 효과적이지 않았고, 때로는 아예 정찰도 하지 않아서 진격 할 때 장님이나 다름 없었고, 주요 도시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 함정으로 들어갔다. 게다가 러시아군 대대전술단은 정찰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진격을 멈추거나 방어로 전환했을 때 훨씬 유연하고 적절한 장비를 갖추고 사기도 왕성한 우크라이나군의 먹잇감이 되었다. 최근 미국 해병대 사령관 데이비드 버거(David Berger) 장군이 언급한 바와 같이 러시아군의 전술 제대는 자신들의 전방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진격할 때는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고, 진격을 멈추었을 때는 누가 오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35 러시아군의 대대전술단은 현지 정찰을 실시할 능력이 없어서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에 막대한 인명 및 장비 손실을 입힐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러시아군 대대전술단이 2014-2015년의 실전경험, 즉 러시아 영내의 집결지에서 최전방의 전투 지역으로 이동할 때 짧고 안전한 도로망을 이용했기 때문에 전투지속능력 면에서 여러 문제를 일으켰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러시아군 지휘관들은 우크라이나군과 접촉했을 때(우크라이나군의 존재를 파악하거나 직접 목격했을 때, 또는 공격을 받았을 때) 전술 이동을 하지 않았다. 즉 러시아군 지휘관들은 적의 영역에서 이동할 때 사상자가 발생할 경우에 대비한 계획이나 조치를 취한 경험이 부족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안전한 지역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좁은 전역에서 사상자가 발생하는 경우 보다 훨씬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마찬가지로 러시아군 대대전술단은 적대적인 영역에서 이동하다가 우크라이나군과 조우했을 때 차량 관리를 엄격하게 하지 못했다. 20222월 말부터 3월 초 사이에 러시아군이 수많은 차량을 버리고 많은 러시아군 사상자가 버려졌다는 뉴스가 쏟아져 나온 점이 이런 문제점을 보여주었다.36

세 번째 문제는 대대전술단의 통신 및 지휘통제가 수준 이하였다는 점이다. 최전선 진지에서 러시아 영내의 집결지까지 연결되는 안전한 통신선이 있는 좁은 작전 지역에서 러시아군 대대전술단은 적과 조우하더라도 지휘통제 문제를 우려하지 않았다. 게다가 러시아군은 전술적으로 보안통신을 하는데 무신경했다. 대신 러시아군은 보안이 보장되지 않거나 보안 수준이 낮은 통신망에 의존했다. 러시아군은 전술상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 집결지나 군관구에서 지휘관을 전방으로 보내 최전방에서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현재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서 겪고 있는 통신과 지휘통제상의 결함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인다. 또한 이 덕분에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 보다 한 발짝 앞서서 행동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군은 대대전술단을 통째로 전멸시키거나 전장에서 러시아군 장군들을 사살하고 있다. 최근 우크라이나군이 세베르스키 도네츠강을 도하하려던 러시아군 대대전술단 1개를 전멸시킨 사건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37 요약하면, 러시아군 대대전술단의 통신 및 지휘통제 문제, 그리고 우크라이나군이 우수한 기량으로 러시아군에게 입힌 피해 같은 것들은 (러시아군 총참모장) 발레리 게라시모프의 리더쉽으로 인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의 형편없는 통신 방식 때문에 러시아군 지휘부의 노드와 중요한 전장 능력을 식별해 목표를 선별한 뒤 제거할 수 있었다. 통신에 기반한 목표 선정으로 적군에게 큰 혼란을 일으키고 피해를 입힌 것이다.

 

어항속의 전쟁과 연못 속의 전쟁

지금까지 언급한 세 가지의 문제점은 러시아군의 장점이 대규모 전역 보다는 소규모 전역에서 극대화 된다는 가설을 뒷받침 한다. 넓고 불안정한 전장 보다는 지리적으로 좁은 지역에서 숫적 우위를 달성하고 유지하는게 훨씬 쉽기 때문이다. 좁은 전역은 여러가지 문제점을 은폐해 주었다. 좁은 전장에서는 넓은 전장 보다 훨씬 더 빨리 문제점에 대응하고 이를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구조적인 문제나 작전적인 문제가 기술적인 문제나 전술적인 문제 보다 부각되는 일은 없었고, 지리적 문제(거리, 지형 및 인공 또는 천연 구조물)와 적군과의 접촉으로 문제가 드러나기 전 까지는 그림자 속에 가려져 있었다.

2020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에 벌어진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은 어항속의 전쟁을 관찰하기에 좋은 출발점이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이 벌어진 지역은 면적 1,700평방마일(4,400제곱킬로미터)에 인구는 145,000명이었다. 텍사스주의 면적은 268,596평방마일(695,660제곱킬로미터)에 인구는 2,900만명이다. 미국에서 가장 작은 주인 로드아일랜드는 1,055평방마일( 2,732제곱킬로미터)이다. 2020년의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은 로드아일랜드 주 보다 조금 넓은 지역에서 일어났다. 전역의 기준에서 보면 나고르노-카라바흐는 매우 좁았다.

이 전쟁에서 아제르바이잔군은 최신예 드론과 정밀 타격 무기, 다연장로켓포, 중포병을 사용해 대치상태에서 6주 만에 아르메니아군을 격파했다.38 제한적인 지형과 구식화된 방공망, 그리고 무방로 노출된 지상군과 형편없는 전술 때문에 아르메니아군은 순식간에 작전적으로 고착되었고 이 덕분에 아제르바이잔군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39

좁은 전역, 지상군에 장애가 되는 지형, 시대에 뒤떨어진 아르메니아군, 현대화되고 제병협동 전쟁수행능력을 갖춘 아제르바이잔군 등의 요인이 전장에서 시너지를 일으켜 아제르바이잔군의 접근 방식은 효율적으로 보였다. 보다 넓은 전장에서는 이 방식이 덜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많은 관찰자들이 이 상황을 보고 아제르바이잔군의 전쟁 방식이 미래의 전쟁 방식이 될 것이며 전차의 시대는 () 끝났고 지상전도 () 종말을 맞았다고 요란하게 예언을 했다.40 이런 평가의 문제는 드론 한 대당 면적 같은 무기 체계의 전장 밀집도를 고려하지 않아 전후관계가 맞지 않다는 점이다. 사실 이런 관찰자들은 좁은 전역의 지상전의 메커니즘을 과대평가해 보다 넓은 전장에 적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기 체계와 병력의 규모가 전장의 면적에 맞춰 늘어나지 못할 경우 나타나는 전장 효율성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좁은 전역에서 적을 상대로 했을 때는 보다 빠르고, 싸고, 쉽게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돌을 물에 던질 때 나타나는 효과는 좋은 비유다. 돌 하나를 어항에 던지면 연못에 던질 때와 같은 파급 효과가 있다. 하지만 돌의 질량이 같다고 할 때 연못에 던질 때 보다는 어항에 던질 때 훨씬 큰 충격을 준다. 어항은 매우 작지만 연못은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돌을 어항에 던졌을 때 나타나는 충격을 똑같이 연못에 주려면 훨씬 더 큰 돌을 던져야 한다. 2014-2015년의 돈바스 전선이나 2020년의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선 같은 전역은 어항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한 전장 효과는 전쟁 수행 방식이 전쟁에 끼친 영향 보다는 환경적 요인이 전쟁에 끼친 영향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좁은 전역에서는 드론, 정밀 탄약, 다연장 로켓포 같은 무기 체계의 효과가 극대화된다. 이런 환경에서는 방어군이 엄폐하거나 위치를 바꿀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공격자의 공격을 온전히 받아내게 된다. 보다 넓은 전장에서는 기동과 목표 식별, 거리 같은 요인이 보통 혁명적이라거나 게임 체인저라고 칭찬을 받는 현대 기술의 효과를 희석시킨다. 그러므로 관찰자들은 어항속의 전쟁”, 즉 아주 작은 전역에서 벌어진 전투의 결과를 전쟁 수행의 혁명이라고 약을 파는 자들에게 현혹돼서는 안된다.

어항에 던진 돌맹이논법으로 보면 러시아군의 대대전술단은 2014-2015년의 돈바스 전쟁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       전장이 매우 좁고 전쟁이 좁은 지역에 국한되었다.

-       대대전술단은 러시아에서 최전선까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고 전력 손실 없이 전투 준비를 갖춘 상태로 도착할 수 있었다.

-       최전선의 대대전술단을 지원하는 보급선이 매우 짧고 적의 방해도 받지 않았다.

-       후방의 문제는 필요시 최전선에 가까운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한스크 인민공화국의 영역에서 해결하거나 러시아 영내로 안전하게 퇴각해서 해결할 수 있었다.

-       통신과 지휘통제 문제는 가까운 후방의 사령부에서 신속하게 극복할 수 있었다.

관찰자들은 전역에 특화된 조직 구성, 또는 임무에 특화된 조직 구성이 특정한 환경에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서 이것을 보다 큰 전장에 적용하거나 좁은 영역의 임무를 넘어가는 범위까지 적용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인력 부족 문제를 극복하고 좁은 전역의 대반란전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러시아군의 대대전술단은 보다 넓은 전역, 적의 공격을 받는 교통선, 단호한 적군을 상대로는 맞지 않았다. 대부분의 러시아 병사들이 보여주고 있는 형편없는 규율과 낮은 사기는 대개 대대전술단의 한계가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대대전술단에 대한 비판을 정리하자면, 이 편제는 좁은 전장에서 장점을 극대화 할 수 있었을 뿐 보다 큰 전역에 걸맞는 규모의 편제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2014-2015년 돈바스 전쟁이나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 도출한 교훈은 그 맥락에 유의하면 그만이고 이를 새로운 전쟁 법칙이나 미래 전쟁의 전조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같은 방식을 반대되는 개념에도 적용할 수 있다. 작은 전장에서 전쟁을 수행할 때 나타나는 부정적인 측면은 쉽게 극복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군 구조, 전쟁 수행 교리와 전략에 잠재적으로 해악을 끼칠 수 있는 요인들이 감춰지게 된다. 이런 문제는 우크라이나의 러시아군이 겪고 있는 문제에서 나타난다. 러시아가 자랑하던 대대전술단은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2014-2015년의 전쟁에서 러시아군이 얻은 틀린 긍정적 교훈과 나쁜 습성이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싸우고 있는 러시아 지상군을 방해하고 있다.

나쁜 습성 뿐만 아니라 좁은 전역에서 전쟁을 수행하는데 최적화된 러시아군 대대전술단의 구조와 지원체계는 중간 규모나 대규모의 전장에서 전쟁을 수행하는데 부적합하다. 대대전술단의 작은 규모, 임시적인 구조, 그리고 편제상의 C2와 전투지속을 가능케 하는 네트워크로부터 유리되어 있다는 점은 대대전술단이 중간 규모나 대규모 전장에서 전쟁을 수행하는데 문제를 일으킨다. 지금까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군이 보여준 성과를 놓고 보면 대대전술단을 전쟁에 투입하기에 완전이 부적합한 편제라고 볼 수는 없다.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을 막아내고 러시아 국경으로 몰아 낼수록, 특히 돈바스 지역과 크름 반도에 가까운 지역에서는 대대전술단이 지금까지 보다는 좀 더 잘 싸울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러시아군의 대대전술단은 2014-2015년에 성공을 거두었던 지역에 가까운 좁은 전장에서 작전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군이 졸전을 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하지만 러시아군이 제병협동작전을 펼치지 못하는 점과 러시아 육군이 좁은 전역에서는 유용하지만 넓은 전역에는 부적합한 대대전술단 편제에 의존하는 점 때문에 우크라이나군의 단호함은 전쟁 전 기간에 걸쳐 모든 관찰자들을 놀라게 할 수 있었다. 러시아군의 형편없는 전투력과 졸렬한 지휘는 러시아군의 훈련이 부족하고 사기가 낮다는 점을 드러냈다. 이런 문제점은 우크라이나에 있는 러시아군에서 탈영이 많이 일어나고 있고 수많은 잔혹 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2014-2015년의 돈바스 전역 같이 좁은 전역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은 중간 규모, 혹은 더 매우 넓은 규모의 전장에서 일어나는 문제 보다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 또한 좁은 전역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은 중간 규모나 대규모의 전장에서 나타나는 문제 보다 신속하게 파악해서 대응할 수 있다. 그리고 좁은 전역에서 극대화된 긍정적인 유용성과 긍정적인 결과들을 보다 큰 전역의 작전에서 거두려면 훨씬 많은 기획과 시간, 자원, 투자가 필요하다.

대대전술단 편제는 돈바스 전쟁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전투지속능력, 지휘통제, 지휘 체계의 통일성 문제 등을 극복하지 못했다. 사실 대대전술단의 임시적인 성격은 통상적인 군사작전에 내재된 엔트로피적 측면을 가속화 했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고 6개월 동안 나타난 국제인권법 및 제네바조약 위반 사례들은 러시아군의 관습적인 지휘 및 지원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듯 하다.41 그러하다면 대대전술단은 러시아의 군사작전에 도움이 되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해로운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책 입안자와 군사 연구자, 그리고 군인들은 소규모 분쟁이나 전쟁에서 도출된 교훈과 이러한분쟁에서 작용한 메커니즘이 전쟁의 양상을 바꾼다는 요란한 주장에 주의해야 한다. 대대전술단을 포함한 모든 편제 구조, 그리고 아제르바이잔군이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 사용한 것을 포함한 모든 전쟁 방식을 보다 규모가 큰 전장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고, 더 큰 성과를 거둘 수도 없다.

 

주석

  1. Mason Clark, Karolina Hird and George Barros, “Russian Offensive Campaign Assessment, February 23,” Institute for the Study of War, 2022.
  2. Mykhailo Minakov, “The War on Ukraine: the Beginning of the End of Putin’s Russia,” Wilson Center, 28 February 2022.
  3. Mason Clark, Karolina Hird and George Barros, “Russian Offensive Campaign Assessment, March 30,” Institute for the Study of War, 2022.
  4. Katherine Tangalakis-Lippert, “Satellite Images Show Russian Troops Have Withdrawn from Antonov Airport outside of Kyiv,” Business Insider, 2 April 2022.
  5. Jim Garamone, “Russians Retreating from Around Kyiv, Refitting in Belarus,” DoD News, 4 April 2022.
  6. Mason Clark, Karolina Hird and George Barros, “Russian Offensive Campaign Assessment, May 6,” Institute for the Study of War, 2022.
  7. Kyiv Independent, “These are the indicative estimates of Russia’s combat losses as of Sept. 7, according to the Armed Forces of Ukraine,” Twitter post, 7 September 2022.
  8. Colin Kahl, “Pentagon Estimates Casualties Between 70-80K in Ukraine War,” C-SPAN, 8 August 2022, video, 1:04. 
  9. “Ukraine: Russian Forces’ Trail of Death in Bucha,” Human Rights Watch, 21 April 2022.
  10. David Shlapak and Michael Johnson, Reinforcing Defense on NATO’s Eastern Flank: Wargaming the Defense of the Baltics (Santa Monica, CA: RAND, 2019). 
  11. Jack Watling and Arthur Snell, “Ukraine War Update: Dr. Jack Watling,” Doomsday Watch podcast, 20 July 2022.
  12. Elissa Nadworny, “Russian Forces Appear to be Withdrawing from Kyiv, Moving to Cities in South and East,” National Public Radio, 2 April 2022. 
  13. Dave Johnson, “Vostok 2018: Ten Years of Russian Strategic Exercises and Warfare Preparation,” NATO Review, 20 December 2018. 
  14. Joint operations and jointness—the integration and unified action of multiple services—is captured under the phrase “combined arms” within this paper. 
  15. Robert Leonhard, The Art of Maneuver: Maneuver-Warfare Theory and AirLand Battle (New York: Ballantine Books, 1991): 92.
  16. Leonhard, The Art of Maneuver, 98.
  17. Leonhard, The Art of Maneuver, 97.
  18. Leonhard, The Art of Maneuver, 99–103.
  19. Watling and Snell, “Ukraine War Update.”
  20. John Ismay, “Ukraine is Wrecking Russian Tanks with a Gift from Britain,” New York Times, 18 March 2022.
  21. Mark Cancian, “Will the United States Run Out of Javelins Before Russia Runs out of Tanks,” Center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 12 April 2022.
  22. Helene Cooper and Eric Schmitt, “Russia’s War Lacks a Battlefield Commander, U.S. Official Says,” New York Times, 31 March 2022. 
  23. Anthony King, Command: The Twenty-First Century General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9): 56–57.
  24. Cooper and Schmitt, “Russia’s War Lacks a Battlefield Commander.” 
  25. Katherine Tangalakis-Lippert, “Satellite Images Show Russian Troops Have Withdrawn from Antonov Airport outside of Kyiv,” Business Insider, 2 April 2022.
  26. Roger McDermott, “Moscow Resurrects Battalion Tactical Groups,” Eurasia Daily Monitor 9, no. 203 (2012).
  27. Michael Kofman, “Zapad-2021: What to Expect from Russia’s Strategic Military Exercise,” War on the Rocks, 8 September 2021.
  28. Julian Barnes, Helene Cooper and Eric Schmitt, “U.S. Intelligence is Helping Ukraine Kill Russian Generals, Officials Say,” New York Times, 4 May 2022. 
  29. Lester Grau and Charles Bartles, “Getting to Know the Battalion Tactical Group,” Royal United Services Institute, 14 April 2022.
  30. 420 kilometers is the distance between London and Middlesbrough, England. In American terms, 420 kilometers is 261 miles, just slightly less than the distance between Dallas and San Antonio in Texas.
  31. Andrew Bowen, Russian Military Buildup Along the Ukrainian Border (Washington, DC: 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 2022), 2. 
  32. Franklin Holcomb, “The Kremlin’s Irregular Army: Ukrainian Separatists Order of Battle,” Institute for the Study of War, 2017, 18–23. 
  33. Brendan Cole, “Pro-Russian Fighters with Nazi Patches Gets Medal for Killing ‘Nazis,’” Newsweek, 4 April 2022.
  34. Amos Fox, “Russian Hybrid Warfare: A Framework,” Journal of Military Studies 10, no. 1 (2021): 8–11. 
  35. Caitlin Kenny, “Ukraine ‘Doing a Fantastic Job’ of Blocking Russian Reconnaissance, Top Marine Says,” Defense One, 16 March 2022.
  36. Robyn Dixon, Sudarsan Raghavan, Isabelle Khurshudyan and David Stern, “Russia’s War Dead Belie its Slogan That No One is Left Behind,” Washington Post, 8 April 2022.
  37. Charlie Parker, “Russian Battalion Wiped Out Trying to Cross River of Death,” The Times, 12 May 2022.
  38. The Nagorno-Karabakh Conflict: A Visual Explainer,” International Crisis Group, 28 August 2022.
  39. Robert Bateman, “No, Drones Haven’t Made Tanks Obsolete,” Foreign Policy, 15 October 2020.
  40. John Antal, “Top Attack: Lessons Learned from the 2nd Nagorno-Karabakh War,” Army Mad Scientist Podcast, podcast, 1 April 2021; Peter Suciu, “Does the Nagorno-Karabakh Conflict Prove the Tank is Toast,” National Interest, 5 October 2020. 
  41. Antony Blinken, “Promoting Accountability for Human Rights Abuses Perpetrated by the Governments of Russia and Belarus,” U.S. Department of State, 15 March 2022.

 

2022년 7월 30일 토요일

라스푸티차는 독일군의 타이푼 작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Jack Radey와 Charles Sharp의 공동연구인 "Was It the Mud?"를 읽었습니다.  이 논문은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8-4(2015)에 실린 연구입니다. 최근 연구 답게 독일 참전자들의 회고록을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독일군의 타이푼 작전이 초기에 어려움을 겪은 주된 요인은 '라스푸티차'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라스푸티차는 부차적인 요인에 불과했으며, 다른 요인들이 더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겁니다.

저자들은 독일군 사단급 이상 부대들의 일지(Kriegstagebuch)에 기록된 기상 데이터를 종합해 분석했습니다. 분석 대상은 중부집단군, 제3기갑집단, 제4기갑집단, 제40차량화군단, 제41차량화군단, 제46군단, 제57군단, 제1, 6 , 10기갑사단과 제36차량화보병사단의 일지입니다. 독일군의 부대 일지들은 표준화된 양식으로 작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상 데이터를 정리하는데 곤란했다고 지적합니다. 

이 연구는 분석 대상을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중부집단군 전선 북쪽의 제9군과 제3기갑집단, 두 번째 그룹은 중부집단군 전선 중앙의 제4군과 제4기갑집단, 세 번째 그룹은 중부집단군 전선 남쪽의 제2군과 제2기갑군입니다. 이 분석에 따르면 1941년 10월 1일 부터 11월 15일까지 도로 통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진탕이 심했던 지역은 제2군과 제2기갑군 작전구역으로 총 6일은 차량 이동이 불가능했고 나머지 21일도 도로 상태가 불량했습니다. 도로가 양호했던 날은 10일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부대들의 작전 지역은 제2군과 제2기갑군 작전 지역보다 도로 상태가 양호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제4군과 제4기갑집단 작전구역은 도로 상태가 좋은 날이 14일이었고 도로 사용이 불가능한 날은 없었습니다. 북쪽의 제9군과 제3기갑집단 작전 구역은 도로 상태가 좋은 날이 28일이었고 도로 사용이 불가능한 날이 없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라스푸티차의 영향 보다는 소련의 도로망이 서유럽 보다 부족했다는 점에 더 주목을 합니다. 기상 상태가 양호했던 10월 7일 이전에도 도로 부족으로 도로 정체가 심각했음을 지적합니다. 예를들어 타이푼 작전 당시 독일군 제3기갑집단은 제9군과 주보급로를 공유했습니다. 이때문에 보병과 마차는 18시 부터 05시까지 도로를 이용하고 기갑 및 차량화 부대는 05시 부터 18시까지 도로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교통 체증을 완화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치로는 도로 정체를 해소할 수 없어 제3기갑집단이 제9군에 다른 도로를 이용하라는 요구를 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얼마 되지 않는 도로에 대량의 차량이 몰리다 보니 도로의 상태가 금방 악화됐습니다. 소련에서 상태가 가장 좋은 도로였던 바르샤바-모스크바 대로의 경우 제4기갑집단, 제4군, 제9군이 함께 사용했기 때문에 금방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퇴각하는 소련군이 조직적으로 도로와 교량을 파괴한 점도 마찬가지로 악영향을 끼쳤다고 지적합니다.

저자들은 여기다가 보급 문제도 부담을 가중시켰다고 지적합니다. 타이푼 작전이 시작되기 전 부터 이미 중부집단군은 보급 부족으로 연료 및 탄약 사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는 겁니다. 타이푼 작전이 시작되면서 보급 문제는 더 악화됩니다. 제3기갑집단은 10월 4일에 연료가 다 떨어져 10월 5일 오후 까지 연료 추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제3기갑집단 예하의 제6기갑사단과 제14차량화사단은 칼리닌 방면으로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연료가 부족해서 10월 12일 부터 10월 24일까지 사단 예하의 오토바이 대대만을 공격에 투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구데리안이 지휘한 제2기갑집단도 마찬가지로 연료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비행장을 확보할 경우 독일 공군이 연료와 탄약을 공수할 수 있었지만 항공 수송만으로는 기갑부대의 연료 소모를 감당할 수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마지막으로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도 독일군의 진격을 늦추는데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합니다. 저자들은 독일군 참전자들의 회고록에서 라스푸티차의 영향을 서술한 내용은 크게 과장되어 있다고 봅니다. 타이푼 작전 초기 단계의 작전에 라스푸티차의 영향은 부차적이었으며 도로망 부족, 보급 부족,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합니다.

2018년 10월 18일 목요일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1-4호에 실린 H. G. W. Davie의 논문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최신호인 31-4호에 흥미로운 제2차대전 논문이 한 편 실렸습니다. H. G. W. Davie라는 연구자의 'Logistics of the Combined-Arms Army- Motor Transport'라는 글 입니다. H. G. W. Davie는 이미 같은 저널에 독소전쟁시기 철도망의 역할에 관한 연구를 기고한 바 있습니다. 이 연구는 제2차대전기 소련군의 차량화 수준과 군수보급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필자가 가장 먼저 주목하는 문제는 소련군의 낮은 차량화 수준입니다. 소련군의 차량 보유량은 전쟁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늘어났습니다. 1942년 1월 1일 소련군이 보유한 차량은 31만 8,500대였습니다. 1942년 동안 차량 증가분은 소련 국내 신규생산분이 2만 5천대, 민간차량 징발분이 9만대, 렌드리스 차량이 3만 900대였습니다. 1943년 1월 1일에 소련군이 보유한 차량은 40만 4,500대로 증가합니다. 그리고 같은해 증가분은 신규생산 4만 600대, 민간차량 징발분 1만 2,400대, 렌드리스 차량 8만 3,700대 였습니다. 1944년 1월 1일 차량 보유량은 49만 6,000대로 늘어납니다. 그리고 같은해 신규생산 3만 6,700대, 렌드리스 차량 12만 8,800대 등의 증가에 힘입어 1945년 1월 1일 소련군의 차량 보유량은 62만 1,200대가 됩니다. 매우 인상적인 규모입니다.

하지만 소련군의 병력 규모를 고려하면 사정이 조금 달라집니다. 전쟁이 발발할 당시 소련군의 차량 1대당 병력비율은 1:28이었습니다. 그러나 막대한 차량 손실과 병력 증가로 인해 전쟁 기간 중 차량 1대당 병력비율은 정체된 상태였습니다. 렌드리스 차량이 대량으로 보급된 1944년 1월 무렵에야 차량 1대당 병력비율이 1:24가 됩니다. 차량 규모의 증가로 1945년에는 차량 1대당 병력 비율이 1:21까지 낮아지기는 하지만 미군이나 영국군과 비교하면 차량화 수준이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영국군은 1945년 6월 기준으로 차량 1대당 병력 비율이 1:7.7이었습니다. 야전부대로 한정하면 차량화 수준이 더욱 떨어지게 됩니다. 소련군도 독일군 처럼 기계화부대와 독립지원부대(특히 포병) 중심으로 차량을 집중 배치했기 때문입니다. 소련군의 일반 보병부대는 같은 시기 독일군 보다 특별히 나을게 없는 차량화 수준을 보였습니다. 소련군의 소총병사단에서 차량화된 부대는 사단 직할 대전차포 대대, 122mm 곡사포 대대, 중박격포 대대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필자는 제7근위군의 사례 분석을 통해 소련군의 1개 야전군의 차량 보유량이 영국군 1개 보병사단 보다 못한 수준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때문에 소련군도 독일군 처럼 마필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1945년 1월 기준으로 소련군은 105만 4,200마리의 마필을 보유했고 이 중 야전군이 보유한 마필이 79만 1,600마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련군은 1944~45년 사이에 매우 높은 수준의 작전 템포를 달성했습니다. 비수아-오더 작전에서 소련군의 전차군은 1일 평균 45~75km를 진격했고 보병과 마필 중심의 제병협동 야전군은 1일 평균 30km를 진격했습니다. 저자는 소련군이 부족한 보급 능력에 맞춰 보급 소요를 책정하고 부족한 물자를 현지조달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고 봅니다. 예를들어 1943년 8월 루먄체프 작전에서 스텝전선군은 주공축선의 주력부대에 전선군 직할 수송부대의 역량을 집중하고 부차적인 지역은 야전군 및 사단의 자체적인 수송역량으로 보급소요를 해결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제한된 수송역량도 탄약과 유류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8월 3일 부터 23일까지의 작전 기간 중 스텝 전선군의 보급부대는 총 42,972톤의 물자를 수송했는데 이 중 탄약이 2만 7,887톤, 연료가 7,906톤, 기타 보급품이 7,949톤이었다고 합니다. 단순히 중량으로 따지면 탄약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걸 알 수 있습니다. 비슷한 양상이 비수아-오더 작전 당시 제8근위군의 사례에서도 나타납니다. 제8근위군은 식량 조달을 노획하거나 현지 징발에 의존하면서 탄약 및 유류 보급에 수송역량을 집중해 높은 진격속도를 유지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주장은 소련군의 낮은 보급능력과 과도한 약탈을 일리있게 설명해 준다고 봅니다. 발레리 자물린 등의 연구자는 소련군이 낮은 보급능력으로 인해 전쟁 중후반까지도 영양실조와 질병에 시달리는 경우가 잦았다는 사실을 밝혀낸 바 있습니다. 전투에 필수적인 탄약과 연료에 수송역량을 집중하고 병사의 생활에 필요한 보급소요를 최소화 하는 경향이 일반적이었다면 이런 문제들을 충분히 설명 가능합니다. 굉장히 재미있는 논문이라 시간이 되면 한번 번역해 보고 싶네요^^

2015년 1월 1일 목요일

[번역글] 노르망디 전투에서 독일군의 패배에 군수보급이 끼친 역할

불법 날림 번역 한편 나갑니다. 이 글은 1996년 War in History 3권 4호에 실린 러셀 하트Russell A. Hart의  “Feeding Mars: The Role of Logistics in the German Defeat in Normandy”를 번역한 것 입니다. 노르망디 전역에 관련된 글은 많아도 보급 문제를 집중적으로 고찰한 글은 매우 드문데 이 글은 바로 그 드문 경우에 속합니다. 20년 가까이 된 오래된 글이긴 해도 오늘날까지 제대로 된 후속연구가 없는 만큼 충분히 유효한 글이라 하겠습니다.



군신(Mars)을 먹여살리기: 노르망디 전투에서 독일군의 패배에 군수보급이 끼친 역할


러셀 하트

역사가들은 오래 전 부터 독일군이 1944년의 노르망디 전역에서 패배한 주된 원인이 군수보급의 어려움에 있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1944년 3월 부터 시작된 연합군 공군의 차단작전이 루아르강과 세느강에서 노르망디에 이르는 독일군의 보급을 심각하게 방해했다는 것이다. 독일군은 보급의 부족으로 인해 연합군의 교두보를 위협하기는 커녕 효율적인 방어를 취하는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이렇게 일반적인 내용을 넘어서 보급의 부족이 독일의 노르망디 방어작전에 어떻게, 그리고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는지는 잘 모르고 있다. 이 연구는 1944년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군의 군수보급에 대해 설명하고 보급의 부족이 독일군의 패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미군이 7월 말의 코브라 작전에서 성공적으로 돌파를 해 나가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음을 논하고자 한다.1)

1943년 무렵 서유럽에 주둔한 독일군, 즉 서부군Westheer은  독일의 전쟁 수행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다.  서부군의 각 부대는 편제 미달에 장비도 부족했고 대부분의 경우 기동력도 매우 떨어져서 방어 능력이 극히 제한적이었다. 또한 서부군은 연료, 탄약, 수송 수단을 비롯한 군수 조직에 필요한 기반이 부족해 연합군의 상륙을 격퇴하기는 커녕 대규모 작전을 펼칠 능력 조차 없었다. 히틀러는 1943년 11월 3일에야 1944년에 있을 연합군의 상륙을 격퇴하기 위해서 서부군을 강화하라는 총통지령 51호를 내렸다. 1943년 11월 부터 1944년 6월까지 대규모로 증원된 부대와 신무기 덕분에 서부군의 전투력은 크게 증강되었다. 하지만 총통지령 51호는 서부군에 보급 우선순위를 두지는 않고 있었다. 그래서 서부군은 병력 증강에 수반되야 하는 군수 지원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독일군은 전투 지원 보다 전투 부대에 중점을 두고 증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부군은 장기간의 방어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에 문제가 있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보급부대와 수송부대, 전투지원부대는 전투 부대를 증강하기 위해 병력을 차출당했다. 서부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까지 보급 능력을 증강하지 못한 이유에는 부분적으로 전쟁이 6년차에 접어들면서 독일의 자원이 고갈되었다는 점이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독일군이 전통적으로 보급지원을 경시해 왔던데 있었다.2)

전쟁 5년차에 독일군을 괴롭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독일군의 차량화 수준이 갈수록 악화된 점이었다. 독일은 1939년 시점에서 유럽에서도 차량화가 가장 덜 진전된 국가에 속했다. 독일군에서 엘리트 부대와 기계화 부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부대는 우마에 의존하는 보병부대였다. 1941년 이후로는 동부전선에서 발생한 손실로 독일군의 차량 수송능력은 걷잡을 수 없이 감소했고 이와 함께 공세와 방어에 필요한 기동력도 감소되어갔다. 1943년까지 독일은 점령지에서 징발한 차량으로 손실을 보충했다. 점령지에서 징발한 차량은 1942년에만 60만대에 달했다. 그러나 쿠르스크 전투 이후 독일군의 차량화 수준은 손실로 인해 꾸준히 하락해갔다. 독일군의 트럭과 견인차량 부족은 1944년 2월에서 4월 사이에만 각각 127%와 46%에 달했다.3)

독일군의 차량 부족은 특히 서부전선이 심각했다. 서부전선에 배치된 기동력이 거의 없는 점령부대들은 수송기능을 프랑스의 우수한 철도망에 의존하고 있었다. 서부전선에 배치된 몇대 안되는 트럭들은 전략단위의 수송예비로 돌려졌다. 게다가 예비 부품이 부족해 차량의 가동률도 낮았다. 이렇게 기동력이 낮았기 때문에 독일 서부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까지 전투 준비에 어려움을 겪었다. 1944년 6월 6일 시점에서도 대부분의 독일군 부대는 심각할 정도로 차량이 부족했고 이 때문에 기동력이 제한적이었다. 독일 서부군은 이렇게 낮은 기동력 때문에 연합군의 상륙 지점에 부대를 전개하고 보급품을 수송하기 위해 철도에 의존해야 했다. 독일군은 1944년 1월에 실시한 워게임에서 프랑스의 철도망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 연합군의 침공을 격퇴하기 위해서는 하루에 4만톤을 수송할 수 있는 규모의 트럭을 갖춰야 한다고 추산했다. 이것은 당시 독일 서부군이 확보하고 있던 전략 수송예비의 능력을 여덟배나 초과하는 것 이었다. 하지만 독일군은 프랑스의 철도 수송능력이 충분하고 운하를 통한 수송로가 존재하기 때문에 연합군이 항공차단을 시도하더라도 철도를 통해 충분히 보급을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서부전구사령부 군수참모처Oberquartiermeister West의 오토 엑슈타인Otto Eckstein 소령은 1944년 3월 연합군이 항공차단작전을 시작했을 때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4)

하지만 독일군은 연합군의 항공차단작전의 영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3월 부터 디데이 당일까지 연합군의 공군력은 파리 서쪽에 있는 세느강의 교량을 모두 파괴하여 노르망디를 동쪽과 완전히 차단하고 기차역, 철도조차장, 기관차고, 급탄소, 철도교차점, 정비공장, 기관차를 파괴하여 노르망디 방면으로의 철도교통을 마비시켰다. 공습은 4월 부터 독일군의 부대 이동과 물자 수송에 장애를 초래했다. 이로인해 서부전구 전체에 철도 교통 정체가 발생했으며 대량의 신무기, 건설자재, 보급품의 수송이 지연되었다. 디데이 바로 전날에는 무려 1,700대의 열차가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연합군 공군이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연료 수송이었다. 6월 초에는 프랑스 전체를 통틀어 독일이 서부전구에 비축한 연료양의 15%에 달하는 323만3천 갤런의 연료를 실은 열차들이 목적지로 가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었다.5)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전에 독일군은 연합군 공군의 차단작전으로 인한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세가지의 대응책을 내놓았다. 교량, 교통 중심지, 철도망을 방어하기 위해 대공포대를 배치했다.  노르망디 지역과 연결되는 교통망을 복구하기 위하여 철도공병과 교량공병 부대들을 증강하여 세느강 일대로 재배치하였다. 마지막으로, 서부전구사령부 군수참모처는 전략수송예비를 증강하기 위해서 군대는 물론 민간 부문의 차량까지 최대한 징발하였다.6) 이와 같은 대응책은 큰 효과가 없었다. 대공포대를 증강하는 것은 독일군의 교통망이 급속히 붕괴되는 것을 조금 늦추는 정도 밖에 되지 못했다. 게다가 대공포 탄약의 소모가 높아지면서 독일군의 보급 사정만 악화시켰다. 독일군의 철도공병과 교량공병 부대는 꾸준히 증강됐지만 급속도로 파괴되는 교통망을 감당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교통망을 복구하려는 시도는 제대로 통제되지 못했다. 전략수송예비대의 트럭을 증강하려는 독일군의 노력은 세가지 요인과 연동되어 있었다. 독일군은 전반적으로 차량이 부족했으며, 전투부대의 기동력을 증강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었고, 마지막으로 히틀러가 서부군을 대대적으로 증강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트럭 생산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1944년 봄 서부전선에 보급된 트럭은 얼마 되지 않았다. 새로 보급된 트럭들은 히틀러의 지시로 서부 전선에서 새로 편성된 사단과 기존의 사단들의 기동력을 증강하는데 사용되었다. 트럭의 신규 생산이 부족했기 때문에 1944년 5월 전략수송예비대는 보유하고 있던 트럭의 10%를 새로 편성하는 사단에 양도해야 했다. 그래서 히틀러가 대대적인 증강을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부군은 전략수송예비대를 증강할 수 없었다.(표1을 참고)7) 

표1. 독일군의 전략수송예비대 증강과 운용 가능 규모의 감소(1944년, 미터톤)
날자
수송능력(톤)
운용가능(톤)
운용가능비율(%)
1944.1.1
9,137
7,073
71.5
1944.2.1
8,856
7,225
80.5
1944.3.1
9,309
8,005
86
1944.4.1
10,185
8,379
82
1944.6.1
9,000
5,850
65
1944.7.1
12,500
6,900
55
출처: Sources: ’Transportraum in der Hand der OB West’, Ob. West Qu.1 Br.B.Nr. 01800/44 g.Kdos, v. 8.4.1944, Ob. West Qu.1 Br.B.Nr. 02250/44 G.Kdos, v. 8.5.1944, NARA T-314, 11, 7014858 and 7015007.

그리고 연합군의 공습은 디데이 이전 부터 서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의 보급 상황을 서서히 악화시키고 있었다. 공습으로 인한 지연은 보급품의 이동을 늦추어 독일군의 물자 비축량을 감소 시켰다. 공습으로 인해 독일군은 철도대신 도로를 통해 물자 보급을 해야 했고 이로 인해 연료 소비량이 증가했다. 독일 서부군은 연료 비축량이 감소하는 것을 막아보기 위해서 6월 3일 부터 엄격한 연료 배급을 실시해 보유하고 있는 차량의 30%를 운행 중단 시키고 훈련에 사용할 연료도 삭감했다. 전략수송예비대는 도로를 통해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 전략수송예비대의 트럭 가동율은 4월 이후 감소하기 시작해 1943년 11월 부터 꾸준히 상승하던 경향이 완전히 반전되었다.(표1을 참고) 이렇게 해서 연합군의 공습은 디데이 이전에 독일 서부군이 상륙 지점에 병력을 전개하고 재배치된 부대에 보급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감소시켰다. 만약 독일군이 상륙 지점에서 연합군을 격퇴할 수 없다면 서부전선에서 장기전을 펼 수 밖에 없으며 이렇게 되면 독일 본토에서 상륙 지점 까지 막대한 양의 보급을 할 수 있어야 했다.8)

결국 1944년 6월 6일 시점에서 프랑스에 배치된 독일군의 보급 능력은 장기간의 방어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탄약 비축량은 제한적이었다. 독일 서부군은 해안방어 사단의 경우 3주 분량의 탄약을, 항만요새에 배치된 사단의 경우 4주 분량의 확보하고 있었지만 기동예비 사단의 경우는 2주치 탄약을 보유하는데 그치고 있었다. 독일군의 연료 사정은 더욱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독일 서부군의 전략 예비대는 불과 일주일에서 10일 분량의 연료만 확보하고 있었다. 일선에 배치된 사단들에 대한 보급은 연합군의 상륙 초기 단계까지는 충분한 수준이었지만 연합군의 상륙을 신속하게 격퇴하지 못한다면 비축 물자를 상륙 지점까지 신속히 보급할 수 있어야 했다. 프랑스의 철도망에 대한 타격으로 상륙 지점까지 물자를 수송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9)

독일군의 일지를 통해 연합군의 상륙 직전 프랑스 북서부에 배치된 독일군의 보급 체계의 실상을 재구성 할 수 있다.(표2와 표3을 참고) 방어군인 독일 제7군은 18,748톤의 탄약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3주간 사용할 수 있는 분량이었다. 하지만 이 중에서 불과 38%(7,172톤)만이 노르망디 지역에 비축되어 있었다. 나머지 탄약은 멀리 떨어져 있는 브르타뉴의 보급창에 비축되어 있었다.(도판1을 참고) 제7군의 유류 보유량은 더욱 더 심각했다. 6월 1일 기준으로 제7군은 103만5천 갤론의 예비 비축 연료를 확보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2주 정도의 기동 작전을 펼칠수 있는 수준이었다.

표2. 제7군의  탄약 비축량(1944년 6월 1일 기준, 단위 미터톤)
노르망디

브르타뉴

총계
보급창
비축량
보급창
비축량

Margot
1,638
Maria
2,650

Michel
2,109
Martin
1,925

Martha
2,008
Manfred
2,516

Max
1,417
Mathilde
2,135



Moritz
2,340

합계
7,172
합계
11,576
18783
출처: ’Versorgungslage A.O.K 7 Stand: 1 Juni 1944’, NARA T-312, 1571, 000607.

표3. 독일군의 연료 비축량(1944년 6월 1일 기준, 단위 1000갤런)
제7군 관할

전략 예비


장소
비축량
장소
암호명
비축량
St. Bertharix
17
Chateaubriant
Bruno
258
Le Mans
38
Domfront
Bertha
255
Rennes
40
Pontivy
Brigitte
132
Lamballe
11



Landemeau
78



Quimper
8



Pluvigner
34



Flain
67



Henneville
23



St. Sauveur
18



Noyers
6



Domfront
5



합 계
355


645
출처: ’Versorgungslage AOK 7 Stand: 1 Juni 1944’, NARA T-312, 1571, 000607.



독일 제7군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물자의 보급에 있었다. 제7군 예하의 보급부대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날 기준으로 248대의 트럭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 수송능력은 불과 994톤에 불과했다. 이것은 최하 기준의 보급량도 맞추지 못하는 것이었다. 제7군은 연합군의 공습으로 보급을 파리 일대에 위치한 전략 예비 비축창에 의존하게 되었다. 하지만 연합군의 상륙 초기에 연합군 공군은 루아르강을 통해 남쪽에서 노르망디로 연결되는 주요 철도망을 차단해 버렸고 이로 인해 노르망디 지역은 완전히 고립되어 버렸다.10)

독일 제7군은 6월 6일에서 7일 사이에 작전 기동 예비대들을 노르망디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동 예비대들을 이동시키는데 필요한 수송 능력은 제7군이 보유한 트럭의 20배에 달했다. 그래서 이미 6월 7일 부터 계획된 부대 이동의 규모는 가용 가능한 트럭의 숫자를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고 예비대가 전투에 투입된 이후 보급을 할 수 있는 제7군의 보급 역량도 마찬가지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독일군은 연합군이 교두보를 확고히 구축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잠정적인 조치를 취했다. 전투부대를 노르망디로 수송하는 것에 우선순위가 주어졌다. 일단 부대를 이동 시킨 뒤에야 보급 문제에 신경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연합군의 철도망에 대한 차단 작전이 효과적이었고 전략수송예비대는 트럭이 부족했기 때문에 노르망디에 배치된 부대에 보급을 하는 것은 독일군이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안겨주었다.11)

부대 이동에 우선순위가 주어지면서 독일군의 보급 사정은 악화되어갔다. 그 결과 열악한 보급 상황이 계속되면서 독일군의 노르망디 방어에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의 철도망이 마비된데다 트럭 수송 능력은 크게 부족했으며 부대 이동에 우선 순위가 주어지면서 서부전구사령부 군수참모처는 일선의 부대가 소모하는 만큼의 물자를 보급해 줄 수가 없게 되었다. 연합군의 작전(공습 및 파괴공작)도 독일군의 보급 작전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연합군은 6월 동안 전선으로 가는 독일군의 보급물자 중 20%를 파괴했다. 게다가 연합군 공군의 위협으로 전투 지역으로 가는 보급품의 수송은 지연되었다. 보급 작전은 대부분 야간으로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파리 인근에서 노르망디까지 왕복하는 보급 작전은 평균 4~5일이 소요되었다. 그 결과 전선에서 소모하는 물자 중에서 극히 일부만 보충되었다. 6월 15일까지 전선에 보급된 탄약의 양은 하루 평균 소모량에서 15%가 부족했다. 6월 28일 기준으로 제7군에 보급된 탄약 중에서 37%만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독일군의 보급은 전구 차원에서 봤을때 연합군의 공습에 더욱 취약했다. 독일군의 주요 탄약창은 6월에 실시된 공습으로 파괴되었다. 그 결과 독일 제7군의 탄약 재고량은 급속히 줄어들었다. 노르망디 전역 전 기간을 통틀어 독일군은 공세 작전을 실시할 수 있을 만한 탄약을 보급받지 못했다.12)

독일군의 연료 사정은 더욱 더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서부전구사령부 군수참모처는 6월 9일 부터 13일 사이에 예비로 보유하고 있던 유류를 모두 노르망디로 보냈다. 유류수송차량이 부족한데다 이런 종류의 차량은 특히 공습에 더 취약했기 때문에 연료 수송은 더욱 골치아픈 문제였다. 게다가 독일군의 유류집적소는 연합군의 주요 공습 목표였다. 동프롱Domfront에 위치한 연료집적소, 암호명 ‘베르타’는 6월 13일 공습으로 파괴되었다. 6월 22일에는 더 심각한 피해가 있었다. 파리 외곽의 젠빌리에Gennevilliers에 위치한 서부전선에서 가장 큰 독일군의 연료집적소가 파괴되어 607,000갤런의 연료가 파괴된 것이었다. 결국 연료 재고량이 곤두박질쳤다. 6월 14일에는 독일 제7군은 노르망디 지역에 비축해 놓은 연료가 다 떨어졌고 브르타뉴 지역에 고작 하루치에도 못 미치는 63,000갤런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쳤다. 심지어 전선에 배치된 부대들은 고작 2~3일치(100~150km 정도를 이동할 수 있는)의 연료만 확보하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연합군의 상륙 2주차가 되자 독일 제7군은 노르망디 밖에서 철도와 도로로 매일 보급해주는 연료에 의존하게 되었다. 결국 노르망디에 배치된 독일군은 엄격한 연료 배급과 국방군의 다른 병종, 인접한 부대로 부터 획득한 연료로 기동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13)

연합군 지상부대는 상륙 첫 주에 항공작전의 결과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독일군은 세느강과 루아르강을 넘어 노르망디로 단 한대의 열차도 들여보내지 못했다. 6월 14일에 독일군은 공식적으로 보급 상황을 ‘재앙적’이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이 무렵 독일군은 노르망디로 이어지는 철도망을 복구해야만 장기적인 방어 작전이 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후 독일군은 기존의 조율되지 않고 중구난방이었던 철도 복구작전을 중단하고 노르망디로 이어지는 두개의 주요 철도노선을 개통하여 유지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하나는 파리-베르사이유-드뢰Dreux-쉬르동Surdon으로 이어지는 동쪽에서 오는 노선이었고 다른 하나는 투르Tours-르망Le Mans-알랑송Alencon-세Sees-쉬르동으로 이어지는 남쪽에서 오는 노선이었다. 필사적인 복구 작업으로 연합군의 상륙 2주차에는 이 두개의 노선이 재개통 되었다. 6월 18일~19일 밤 사이에 파리에서 드뢰, 베르뇌유Verneuil, 그리고 루아르 강을 건너 투르와 르망까지 열차 운행이 재개되었다. 하지만 투르 생 시르Tours St Cyr 다리는 복구가 완료되지 못한 상태여서 화물을 만재한 열차가 통과할 수 없었다.  기관차는 다리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분리되었고 화차는 별도로 끌어서 다리를 건너게 한 뒤 강 건너편에서 열차를 다시 연결했다. 6월 25일에는 큰 손상을 입은 투르 생 마르Tours Cinq Mars 다리도 비슷한 조건하에 재개통 되었다. 이 두개의 교량은 상태가 불안정했고 인근 지역의 철도 인프라는 공습으로 심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남쪽에서 노르망디로 이어지는 철도망은 부분적으로만 운용 가능했다. 이 때문에 7월 말 까지도 대부분의 열차들은 루아르강 남쪽에서 화물을 하역했다.14)

독일군은 철도를 복구하려고 노력하면서 그 동안 도로망을 통해 보급을 했다. 서부전구사령부 군수참모처는 차량을 최대한 모으는 등의 노력을 했지만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지속적인 소모로 인해 차량 수송능력을 충분히 증강할 수 없었다.(표1을 참고) 사실 노르망디 전역을 치르면서 독일군의 차량 손실이 차량 보급을 상회했기 때문에 독일군의 차량화 수준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연합군의 전술 공군은 철도 종점에서 전선으로 보급품을 실어나르는 독일군의 수송수단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게다가 보급 수송 작전을 야간에 실시하게 되면서 차량 사고율이 증가했다. 상륙작전이 시작된 첫 10일 동안에만 독일군이 보유한 전략수송예비대의 차량 20%가 공습, 차량고장, 차량사고로 가동 불능이 되었다. 6월 말에 이르자 독일군은 하루 평균 30대의 수송 차량을 상실하고 있었다. 통계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독일군은 6월에 보급 작전을 수행하면서 수송능력 2,225톤에 달하는 트럭을 상실했다. 여기에 전선의 부대가 상실한 트럭도 추가될 것이다. B집단군은 6월 한달에만 4,200대의 차량을 잃었는데 이 중에서 1,866대가 트럭이었다. 독일군은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노르망디 전역 동안에 전략수송예비대의 규모를 확대할 수 없었다.15)

독일군이 보급 수송을 도로에 의존하게 되면서 연료 소모도 증가했고 이것은 가뜩이나 부족한 연료 사정을 악화시켰다. 전략수송예비대는 6월 한달에만 80만 갤런의 연료를 소비했다. 연합군의 공격 또한 독일이 서부전선에 보급한 연료의 상당량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을 방해했다. 6월에는 990만 갤런의 연료가 보급됐는데 이 중에서 195만 갤런이 노르망디로 수송중에 파괴되었고, 100만 갤런은 연료창에서 파괴되었으며, 최소 17만2천 갤런은 전투 지역에서 상실했다. 그래서 보급된 연료의 60%만이 전선에 도착할 수 있었다. B집단군 사령부는 보급 상황이 호전되지 않는다면 7월 20일에서 25일 사이에 연료가 바닥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었다.16)

하지만 6월 말에 이르러 독일군의 보급 사정은 호전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네가지 요인이 작용한 결과였다. 노르망디로 이어지는 철도망을 복구한 것은 앞서 언급했다. 노르망디 전선의 양익에 배치된 부대에 페리선을 통한 보급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전선에 배치된 부대들이 보유하고 있는 차량을 투입해 후방의 보급창으로 부터 보급품을 실어 날랐다. 또한 노르망디 전선에 배치된 독일군에 대한 보급 임무가 분리되었다.17)
노르망디와 연결되는 철도망이 제한적이나마 복구되자 독일군은 마침내 제한적인 보급 열차를 전투 지역까지 운행할 수 있었다. 독일군은 6월 하순에 하룻 밤에 평균 두편의 보급 열차를 철도 종점까지 운행하였다. 철도망이 복구되면서 6월 하순에는 전선으로 가는 보급물자의 양이 25%정도 증가했다. 7월 8일 부터 14일 사이에는 탄약의 17%와 연료의 35%가 철도를 통해 보급되었다.18)

독일군은 6월 중순부터 세느강을 통한 페리선 운항을 늘렸다. 1944년 봄 기준으로 세느강에는 17척의 페리선이 운항중이었는데 화물 수송능력은 420톤이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되자 독일군은 세느강에 페리선을 추가로 투입하고 현지에서 새로 건조하기도 하였다. 독일 해군은 파리에서 보급품을 수송하는 바지선이 이용할 수 있도록 엘뵈프Elbeuf에 전력을 기울여 새로운 접안시설을 건설했다. 6월 18일 파리에서 첫번째 바지선이 출발해 3일 뒤 엘뵈프에 보급품을 하역했다. 이후 세느강을 통한 보급은 크게 확대되었다. 7월에 이르면 노르망디로 보내는 보급품의 5분의 1이 세느강을 통해 도착했다.19)

세느강과 함께 보르도와 후와양Royan과 같은 대서양에 접한 항구에서 노르망디에 있는 브레스트Brest, 생 나제르St Nazaire, 생 말로St Malo, 셰르부르로Cherbourg도 페리 운항이 추진되었다. 하지만 선박 부족과 연합군의 공습, 그리고 운항 거리가 길다는 점, 프랑스 서부에 만연한 보급 부족 때문에 대서양을 통한 페리 운항은 세느강의 페리 운항 만큼 독일군의 보급 수행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대서양 연안의 페리 운항은 최대치를 기록한 7월 8일에서 14일 사이에 노르망디에 보급된 탄약의 16%를 보급하였다.
철도 운행이 재개되고 페리선을 통한 보급이 시작되면서 노르망디로 보급되는 보급품의 양은 크게 증대되었다. 7월 중순에는 노르망디로 보내지는 보급품의 절반이 철도와 페리를 통해 보급되었다. 하지만 독일군이 직면한 큰 어려움은 후방의 보급창, 항구, 철도 종점에서 보급품을 환적하여 전선으로 보내는데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은 전선의 부대들이 직접 보급품을 수령함으로써 완화되었다. 6월 중순에는 각 사단의 수송부대가 육군의 보급창이나 철도 종점으로 보급 임무를 나서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다. 이러한 보급 임무에 투입된 트럭의 손실이 폭증하면서 전선 부대의 기동력은 격감하였다.(표4를 참고)

표4. 독일 기계화 사단의 트럭과 견인차량 가동율의 감소치(1944년 6~8월, 단위%)
부대
6월1일

7월1일

8월1일

21기갑
93
185
67
134
65
133
12SS기갑
65
33
54
24
-
-
교도기갑
77
73
77
80
59
55
2기갑
81
73
35
23
-
-
1SS기갑
-
-
84
69
70
26
월평균
-
-
25
25
15
31
출처: ’Zustandberichte, Panzer Divisionen, Stand 1.6-1.8.1944’, General Inspektor derPanzertruppen, NARA T-78, rolls 616, 623-4, 718-19.

독일 서부군은 7월 초에 노르망디 전선의 보급 책임을 분할하였다. 이때까지 노르망디 전선에 대한 보급은 제7군 사령부가 담당하고 있었다. 7월 초 부터는 서부기갑집단Panzergruppe West이 캉 일대에서 영국-캐나다군과 교전하고 있던 전선 우익의 보급 책임을 인수하였다. 제7군의 책임 범위는 생-로 방면으로 진격해 오는 미군과 맞서는 전선 좌익으로 국한되었다. 이러한 분리 조치로 제7군 사령부 군수참모의 업무 부담은 경감되었다.

7월 동안 독일군 우익의 보급 사정은 비록 느리기는 해도 개선되고 있었다. 독일군은 야간에 드뢰와 베르뇌유 방면으로 수송대를 운행하는 한편 엘뵈프에 수척의 바지선이 싣고 온 화물을 하역했다. 독일군은 두개의 철도 노선에 가용한 수단을 집중했기 때문에 독일 철도공병대는 연합군의 끊임없는 공습에도 불구하고 베르사이유-드뢰 노선을 운행 가능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연합군의 공군력은 세느강을 운항하는 페리 노선을 무력화 할 수도 없었다. 선박은 교량이나 철도 시설 보다 명중 시키기 어려운 데다가 대개 야간에만 운항을 했다. 이때문에 서부기갑집단은 남동쪽으로 진격하면서 팔레즈 점령하려 한 영국-캐나다군을 막아내는데 충분한 보급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일 제7군이 생-로 방면으로 진격하는 미군에 맞서고 있던 좌익의 보급 상황은 7월에 들어와서도 우익 만큼 개선되지 못했다. 오히려 좌익에 배치된 독일군의 보급 상황은 더욱 더 악화되고 있었다. 선박 운행은 우익 만큼 많지 않았고 보급선이 너무 긴데다 동쪽 방면으로의 교통망이 부실했다. 게다가 독일군은 세느강 방면과는 달리 루아르강 방면으로는 많은 보급 열차를 운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결과 생 로의 함락으로 마무리된 7월 3일에서 21일까지의  미군의 대공세가 끝나자 제7군의 보급품 재고량은 거의 바닥이 나고 말았다. 하지만 루아르강을 넘는 철도선을 유지하지 못해 7월 말 생 로 방면의 전선이 붕괴된 것은 독일측이 철도망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르망디의 미군 전선을 담당한 독일 제7군의 보급 상황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킨 기폭제는 7월 15일에 생 시르의 철교와 교통 중심지인 투르의 철도 조차장이 또다시 파괴된 것이었다. 6월 중순 철도 교통이 재개된 이래 투르는 독일 제7군의 사활이 달린 보급선이었다. 6월 9일 부터 7월 7일 사이에 총 10,400톤, 하루 평균 360톤의 보급품이 투르를 통과하는 철도 노선을 통해 운반되었다. 투르를 통과하는 보급선은 노르망디 서부에 배치된 독일군의 보급품 중 3분의 1을 담당했으며 독일 제7군이 사용하는 연료의 40%가 여기를 통해 보급되었다. 독일군이 즉시 임시 교각을 세워 교량을 복구하려 한 것을 보면 투르를 통과하는 보급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알 수 있다.22)

투르를 통과하는 보급선이 다시 끊어지는 동시에 서부전구사령부 군수참모처가 도로를 통해 제7군에 보급을 해 줄 수 있는 능력도 트럭의 숫자가 줄어들면서 감소하고 있었다. 노르망디 서부 지역에는 동쪽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많지 않았고, 거리도 멀었기 때문에 제7군에 보급품을 수송하는 것은 우익의 서부기갑집단에 보급을 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게다가 제7군에 보내진 보급품 중에서 전선에 도착하는 것은 일부에 불과했다. 제7군은 이미 투르가 파괴되기 이전 부터 자체적으로 보유한 트럭으로 보급품을 수송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있었다.23)

투르를 통과하는 보급망이 붕괴되면서 제7군의 보급 상황은 급속히 악화되어갔다. 유류를 철도로 수송하는 것이 중단됐지만 서부전군사령부 군수참모처에서는 이것을 도로 수송을 통해 보충할 능력이 없었다. 그결과 투르가 파괴되고 일주일이 지나자 제7군에 대한 유류보급은 22%나 감소했다. 게다가 7월 16일 샤토브리앙에 있던 제7군의 유류창 ‘브루노’가 연합군의 공습으로 파괴되자 독일군의 연료난은 더욱 심화되었다. 생 로를 방어하고 있던 독일 제84군단에 대한 유류 보급을 살펴보면 미군이 돌파를 위해 ‘코브라’ 작전을 개시하기 바로 직전 독일군이 만성적인 유류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표5를 참고)24)

표5. 생 로와 캉 지구에 배치된 독일군의 연료 가용량(1944년 6~7월, 단위 V.S., Verbrauchssatz*)

6.6
6.14
6.18
7.3
7.7
7.8
7.10
7.24
캉 방면
3.0
1.5
1.6
1.3
1.3
1.8
1.3
?
생 로 방면
3.0
1.0
1.3
0.9
0.9
0.9
0.9
0.7
출처: Versorgungslage u. Tagesmeldungen, I SS Pz. Korps, LXXXIV Korps, Pz.Gr.West, 7th Army, Army Group B, OB West, O.Qu. West, NARA T-311, rolls 1-5, 27-8; T-312, 1569-70 ; T-313, 420-2, T-314, 1568.
*1V.S.는 해당 부대의 전 차량이 100km 이동할 수 있는 연료량을 뜻함.

독일측은 7월 23일에 투르 철교를 다시 개통했다. 하지만 이때는 7월 25일에 개시될 코브라 작전에 맞설 제7군에 보급을 해주기에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한편 영국-캐나다군은 우익의 독일군 예비대를 붙잡아두기 위해서 ‘굿우드(7월 18~20일)’ 작전을 개시했다. 굿우드 작전이 코브라 작전의 성공에 기여한 것에 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역사가들이 놓치고 있는 사실 하나는 굿우드 작전이 독일군의 군수 역량에 끼친 영향이다. 독일군의 군수 역량에 끼친 영향에서 본다면 굿우드 작전은 결정적이었다. 서부전구사령부 군수참모처는 굿우드 작전과 코브라 작전 사이에 일주일에 하루씩만 도로를 통해 연료를 보급할 수 있었고 소속된 유조차들은 굿우드작전으로 심각하게 소모된 연료를 보충하기 위해 대부분 우익에 투입되었다. 제7군은 보유한 트럭들을 르망, 알랑송, 드뢰의 철도 종점에 보내 연료를 보급한 결과 겨우 굿우드 작전이전에 받던 연료량의 73%를 보충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브라 작전 직전에 생 로 방면의 전선을 방어하고 있던 독일 제84군단은 고작 74km를 행군할 수 있는 수준의 연료만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이틀 정도의 격렬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사실 미군이 코브라 작전을 개시하던 7월 25일에 연료를 실은 첫 번째의 열차가 투르를 거쳐 르망에 도착했지만 이때는 독일군의 전선이 붕괴되던 첫 48시간 동안 전선의 독일군 부대에 연료를 보급해 주기에 너무 늦었다.25)

자료들을 살펴보면 투르 방면의 보급로가 막힌 것은 독일 제7군의 탄약 보급에 연료 만큼 악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르 방면의 보급망이 무너진 것은 전선의 탄약 보유량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서부전구사령부 군수참모처는 투르가 파괴되자 예하 수송부대의 왕복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서 운행 거리를 감축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독일군은 7월 17일에 그랑빌로 부터 동쪽으로 40km 떨어져 있는 세베르Sever에 위치한 제7군 예하의 가장 규모가 크고 최전선에 위치해 있었던 탄약창 ‘미헬Michel’을 폐쇄했다. 이어서 7월 21일에는 탄약창 ‘미나Mina’와 유류창 ‘브렘제Brehmse’도 폐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대신 보급품을 수송하는 종착지는 동포르 동쪽에 위치한 탄약창 ‘마르타’와 같이 훨씬 후방에 위치한 보급창으로 변경되었다. 이렇게 되자 생 로 방면에 배치된 사단 예하의 수송대들은 탄약을 보급받기 위해 더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고 연료 소비도 증가했다. 그 결과 생로 지구를 방어하는 독일군의 탄약 보유량은 7월 내내 꾸준히 감소했다. 6월 말에서 7월 24일 사이에 켄트너 전투단Kampfgruppe Kentner의 기관총탄과 박격포탄 보유량은 각각 64%와 75%로 감소했다. 코브라 작전이 개시될 당시 생 로 지구를 방어하고 있던 17SS 기갑척탄병사단 괴츠 폰 베를리힝엔 소속의 쿠스케 전투단Kampfgruppe Kuske의 남아있는 희귀한 탄약재고량 보고서는 독일군의 탄약 부족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준다. 이 전투단은 기관총 1정당 1,000발, 소총 1정당 30발의 탄약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격렬한 전투를 하루 수행할 수 있는 양이었다.26)

코브라 작전의 성공에 대한 분석은 거의 대부분 신속하고 효율적인 미군의 연합 작전 실행과 독일군의 전력이 심각하게 약화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코브라 작전 직전 생 로와 캉 일대의 독일군 방어선의 밀집도를 자세히 분석해 보면 두 지역간의 차이는 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표6을 참고) 게다가 8월 동안 독일군은 코브라 작전 보다 병력차가 훨씬 큰 열세한 상황에서도 영국-캐나다군의 공세를 세 차례나 막아냈다.27)

표6. 1944년 7월 25일 생 로와 캉 지구의 독일군 방어 밀도(단위 km)
사령부(지구)
보병 대대
포대
기갑차량
1SS기갑군단(캉)
2
2
19
84군단(생 로)
2
3
16
출처: Tagesmeldungen, Kriegsgliederungen, u. Zustandberichte I SS Pz. Korps, LXXXIV Korps, Pz.Gr. West, u. Seventh Army, NARA T-312, 1568-70; T-313, 420-2; T-314, 1568.

코브라 작전의 성공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잃어버린 고리는 바로 독일군의 보급 부족이었다. 코브라 작전에서는 노르망디 전역에서 처음으로 독일군이 보급 부족 때문에 효과적인 방어를 펼치지 못했다. 독일군이 이전에 있었던 연합군의 공세와 달리 7월 25~26일에 있었던 코브라 작전의 돌파 단계를 저지하지 못한 이유는 독일군 부대가 소모되어 있었던 것에 더해 보급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브라 작전의 첫째날 저녁에 방어를 하고 있던 제84군단은 대전차 방어의 중핵을 담당하고 있던 88mm 대공포의 포탄을 모두 소모해 버렸다. 제7군의 예비대로 있었던, 엘리트 부대이며 여전히 강력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던 무장친위대 2기갑사단 다스 라이히가 코브라 작전에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한 원인도 보급 부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제7군 사령부는 7월 26일에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제84군단이 휘발유 부족으로 대응을 하는데 ‘심각한 제약’이 있었다고 보고했다. 이날 다스 라이히 사단은 연료 부족으로 2개 중대에 달하는 판터 전차를 유기해야 했다. 7월 28일에 이르러 제84군단의 탄약 사정은 ‘심각하게 낮아졌다.’ 독일군은 숫적인 열세에 더하여 탄약과 연료가 부족해 코브라 작전을 저지할 수 없었다.28)

미군이 돌파에 성공하자 그동안 누적되었던 보급 문제와 저하되고 있던 기동력으로 독일군의 노르망디 방어는 와해되기 시작했다. 전선의 상황이 위급해지자 독일군은 7월 말 부터 다시 주간에 보급 작전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고 독일군의 차량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8월 첫째주에 최전방에 있던 독일군 보급창은 탈취당했고 이후 독일군은 전선을 유지할 도리가 없었다. 노르망디에서 독일군의 패배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서부기갑집단을 개칭한) 제5기갑군은 이후 노르망디 전선의 보급 임무를 전담하게 되었고 세느강 일대에 위치한 멀리 떨어진 보급창에서 보급품을 수송해야 했다. 그 결과 퇴각하는 독일군은 전 전선에 걸쳐 급속히 연료가 바닥나기 시작했다. 8월 15일 부터 연료 부족은 제7군 예하부대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고 독일군은 처음으로 전차들을 대량으로 유기하기 시작했다. 8월의 마지막 2주간 독일군은 퇴각하면서 수천대의 차량을 버렸다. 세느강을 건너 퇴각할 수 있었던 독일군의 규모는 노르망디에 투입된 병력의 3분의 1, 차량의 4분의 1, 중화기의 10% 남짓에 불과했다.29)

군수 보급의 어려움 때문에 노르망디의 독일군 방어가 붕괴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독일군은 보급 부족 때문에 연합군의 교두보에 심각한 위협을 가할 수 없었고 방어도 약화되었다. 철도노선의 두절과 차량을 통해 전선으로 보급되는 부족한 보급품, 그리고 비축해 놓은 물자가 급속히 소모되면서 독일군은 보급 수준에 맞춰 방어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세느강과 루아르 강을 건너는 핵심 철도노선의 복구와 페리선 운항의 확대로 6월 말에 이르러서야 노르망디의 독일군에 대한 보급 상황은 호전되기 시작했다. 7월 동안 보급사정이 호전된 것은 서부기갑집단이 영국-캐나다군을 상대하고 있던 노르망디 전선의 우익이었다. 노르망디 전선의 우익에 대한 보급 사정이 호전된 것에는 세느강을 통한 선박 운항과 파리에서 드뢰, 베르뇌유로 연결되는 철도노선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노선의 철도 종점에서 도로로 전선까지 가는 거리는 상대적으로 짧았고 이 때문에 전선에 보내는 보급물자의 대부분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독일 제7군이 미군을 상대하고 있던 노르망디 전선 서부에서는 7월 내내 보급 상황이 크게 개선되지 못했다. 독일군은 동쪽과 달리 투르-알랑송-르망으로 이어지는 철도 노선을 통해 보급 열차를 많이 운행할 수 없었다. 대서양을 통한 선박 수송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고 전선까지의 거리도 멀었다. 그리고 알랑송에서 르망까지, 브레타뉴 반도의 항구에서 전선까지 이어지는 도로의 길이도 상대적으로 길었다. 그래서 제7군에 보내는 보급품 중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적었고 운반에 걸리는 시간도 길었다. 그 결과 노르망디 전선 서쪽에 배치된 독일군의 보급 사정은 7월 내내 악화되었다. 7월 15일에 투르가 또 한번 파괴되면서 독일 제7군에 대한 보급은 치명타를 맞았다. 제7군에게 노르망디 동부의 철도 종점에서 부터 도로를 통해 보급하는 것을 늘리려는 노력은  그 긴 거리와 7월 18일에 개시된 영국-캐나다군의 굿우드 작전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독일군은 7월 23일에 투르 노선을 다시 복구했지만 이것은 이틀 뒤에 시작될 코브라 작전에 대응해 제7군에 대한 보급을 재개하기에 너무 늦은 시기였다. 제7군은 연료와 탄약이 극도로 부족해 7월 말에 개시된 미군의 돌파를 저지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노르망디의 독일군은 패배했다. 돌이켜 보면 코브라 작전이 개시되기 10일 전에 운 좋게도 투르가 파괴된 것은 미군의 돌파가 성공하는데 있어 최적의 시기였음이 입증되었다. 만약 투르가 그보다 일찍 파괴되었다면 독일군은 제때 보급을 재개할 수 있도록 다리를 복구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독일군의 보급 상황은 미군의 돌파를 확실하게 할 정도로 충분히 악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주석 
1) 필자는 Jason Coy, Allison Gough, Mark Grimsley가 이 논문의 초고를 검토해 준 데 대해 감사드린다. 독일군의 군수 체계에 대한 유일한 선행 연구는 US Army Historical Division, European Theater of Operations, Foreign Military Studies Manuscript B-827, Maj. Otto Eckstein, ’Activities of the Oberquartiermeister West During the Time of Preparation for Warding Off an Invasion and During the Initial Combats’, Germany, 1947, published in Donald Detweiler, ed., WWII German Military Studies (New York, Garland, 1979), XII. 
2) 독일 서부군이 1943년 여름에 처해 있었던 열악한 상황에 대한 포괄적인 분석은 National Archives Record Administration, Captured German Documents (이하 NARA) microfilm series T-311, roll 27, frame 7032324ff. Concerning Normandy specifically, see ’Personelle Zusammensetzung’, Beilage zu Anlage zu Gen. Kdo. LXXXIV A. K. Ia. Nr. 1808/43 g.Kdos., v. 4/10/1943, NARA T-314, 1604, 001032; and ’Hebung der Kampfkraft der Infanterie’, 709 Inf. Div. Abt. Ia Nr. 745/43 g.Kdos., d. 12/7/1943, NARA T-314, 1604, 000731를 참고하라. 
3) 독일군의 낮은 차량화 수준에 대해서는 Richard DiNardo, MechanizedJuggernaut (New York, Greenwood Press, 1991) and W. Victor Madej (ed.) GermanWar Economy: The Motorization Myth (Allentown, PA, Game Publishing, 1984)를 참고하라. 트럭과 견인 차량의 부족은 1944년 2월 1일 36,093대와 5,772대에서 1944년 5월 1일에는 82,096대와 8,423대로 늘어났다. Werner Stang, ’Zahlenmaterial zur Materiellen Lage der faschistischen Wehrmacht im Zweiten Weltkrieg’, Militärgeschichte IV (Apr. 1973), pp. 61-80. 또한 ’Waffe: Stand 1 Juni 1944’, OKH O. Qu., NARA T-78, 168, 000401-403도 참고하라. 
4) 1944년 6월 1일 기준으로 서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의 기계화사단들은 평균적으로 트럭은 편제의 39%, 견인차량은 편제의 22%정도만 보유하고 있었다. ’ZustandberichtePanzer-Divisionen Stand: 1 Juni 1944’, General Inspektor der Panzertruppen, NARAT-78, 623-4. 같은 날자 기준으로 독일 서부군은 트럭 11,447대와 견인차량 1,760대가 부족했다.; ’Kraftfahrzeuge (ungepanzert) Heer: Western’. OKH Gen. Qu., d. 5/8/1944, NARA T-78, 726, 6076170. For discussion of the spring 1944 war games, see Eckstein, ’Activities’, p. 24를 참고하라. 
5) 노르망디 전역에서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는데 있어 항공차단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Public Record Office, Kew (hereafter PRO, Kew) AIR 40/1669, RAF Bombing Analysis Unit, ’The Effect of the OVERLORD Air Plan to Disrupt Enemy Rail Communications’; PRO W[ar] O[ffice] 205/172, ’Pre-invasion Bombing Campaign’; Wesley Frank Craven and James Lea Cate, The Army Air Forces in World War II I: II Europe: Argument to V-E Day, january 1944 to May 1945 (Chicago, Univ. of Chicago Press, 1951); Sir Charles Webster and Noble Frankland, The Strategic Air Offensive Against Germany, 1939-1945 III: Victory pt.5 (London, HMSO, 1961); Walt W. Rostow, Pre-invasion Bombing Strategy: General Eisenhower’s Decision of 25 March, 1944 (Austin, Univ. of Texas Press, 1981); Maj. O. Jaggi, ’Normandie 1944: Auswirkung der allierten Luftüberlegenheit auf die deutsche Abwehr’, Allegemeine schweizerische Militärzeitschrift, CXXIV (H5) (1958), pp. 333-61를 참고하라. 1944년 봄에 독일군은 제6 철도공병연대 단 하나만을 서부전선에 배치해 놓고 있었다. 기차 운행의 지연에 관해서는 ’Vortragnotiz’, Anl. zum Ktb. Ob. Kdo. Hg. B Vers. Abt. Ib, d. 3/6/1944, NARA T-311, 1, 7000664를 참고하라. 이 글에서 제시한 수치는 미국 갤런으로 표기하였다. 
6) 1944년 4월 독일군은 서부전선으로 3개의 중교량부설단schwere BrückenKolonne(60-ton)과 6개의 경교량부설단leichte BrückenKolonne(8-ton)을 재배치하였다. 5월 17일에는 각각 4개와 11개로 증강됐다. 철도 보수 작업에 투입된 인력은 3월 11일에는 1,300명이었는데 6월 3일에는 12,200명으로 증가했다.PRO, Kew, WO233/30, ’Report by SHAEF on the Effects of the OVERLORD Air Plan to Disrupt Enemy Rail Communications’, Nov. 1944, p. 33. 
7) 독일 서부군은 1944년 4월부터 8월 사이에 11,254대의 트럭을 보급받았다. 이렇게 증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서부군을 대폭 증강하도록 했기 때문에 1943년 8월 1일에는 7,281대의 트럭이 부족했으나 1944년 6월 1일에는 11,447대가 부족했다. ’Kraftfahrzeuge (ungepanzert) Heer: (Western)’, 15 Aug. 1943; 5 Sept. 1943, OKH Gen. Qu., NARA T-78, 614, 000552, 000601; ’Kraftfahrzeuge (ungepanzert) Heer: Western’, 5 Aug. 1944;  5 Oct. 1944, OKH Gen. Qu., NARA T-78, 726, 6076089, 6076170. 1944년 4월 1일에서 7월 31일 사이에 제6철도공병연대는 교량 136개, 총연장 16.824km를 복구했는데 이것은 하루에 다리 한개를 복구하는 꼴이었다. Tkb. Juni 1944 Ia/Stopi Hg. B, NARA T-311, 28, 7034030; Pz.Gr.Kdo. West Ia/Stopi Meldung Ia Nr. 2809/44 geh., NARA T-311, 28, 7034003. 세느강 하류에 있던 10개의 철교 중에서 단 한개만이 6월애 재개통 됐지만 이것 마저 7월 초에 다시 파괴되었고 또 다른 한개는 7월에 재개통 되었지만 역시 7월 말에 다시 파괴되었다. 그리고 다른 두개의 철교는 7월 말에 재개통 되었다. 
8) 5월 한달동안 독일군의 연료 소모는 하루 평균 45만 리터로 증가했다. Anl 581 zu Ktb. Ob. West Ia Nr. 3898/44 geh. Kdos., v. 16/5/44, NARA T-311, 24, 7028565-7. 연료 절약을 위한 대책으로 6월 3일 부터는 2리터 엔진 이상을 탑재한 승용차의 운행을 금지 시켰고 훈련용 연료는 15%를 감축하였다. ’Betreibstoff Einschränkung’, Ob. West Ia/O.Qu. West/Qu. 1 Nr. 027921/44 g.Kdos., v. 3/6/1944, NARA T-311, 29, 7183272. 독일군이 서부에 비축한 연료량은 아주 조금 증가하는데 그쳐서 1944년 1월 1일 7415만7천리터에서 1944년 5월 1일 8110만 리터로 늘어났다. Anlage 6 zu Ob. West/O.Qu. West/Qu.1 Nr. 0700/44 g.Kdos., v. 12/2/44, NARA T-311, 14, 7014621-4; Anlage 6 zu Ob. West/O.Qu. West/Qu.1/Betr. Stoff Nr. 02290/44 g.Kdos. v. 8/4/44, NARA T-311, 014, 7015022-3. 
9) 디데이 직전 독일의 군수보급 상황에 대해서는 Eckstein, ’Activities’, pp. 14-20, and ’Mun. Bevorratung im Westen’, GenStdH/Gen. U./Gr. Mun. I Az. 2359 Nr. I/011 901/44 geh. Kdos., vom 25/5/44, NARA T-311, 24, 7028940를 참고하라.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 독일군의 기동예비대는 3.5에서 5V.S.(Verbrauchsatz)의 연료를 보유하고 있었다. 1V.S.는 100km를 이동할 수 있는 분량으로 전투상황에서 이틀치 연료에 해당한다. 
10) 제7군사령부의 보급상황 보고서 1944년 6월 1일자.NARA T-312, 1571, 000607. 독일 제7군은 1944년 1월 1일 기준으로 745만리터의 가솔린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6월 18일에 466만3천 리터로 감소했다. ’Auszüge aus Versorgungs-Tagesmeldungen’, Hg. B Ib Nr. 0355/44 geh. d. 18/6/44, NARA T-311, 1, 7000704-5. 연합군과 독일군이 사용한 트럭의 수송능력을 일대일로 비교하는것은 두가지 요인 때문에 어렵다. 첫 번째는 무게톤(imperial ton)이 미터톤 보다 1.6% 무겁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연합군에서는 트럭을 수송능력에 따라 구분한데 비해 독일군은 짐을 실은 트럭의 무게에 따라 구분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차량이 자체 중량과 비슷한 수준을 실어나른 다는 점을 감안하면 독일군의 등급 체계는 실제 수송 능력의 두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연합군의 1.5톤 트럭이 독일군의 3톤 트럭과 같은 수송능력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제7군이 보유한 수송능력은 대략 500톤 정도였을 것이다. ’Stärke des Transportraumes für Verlastungszwecke’, AOK 7 Ia Nr. 2702/44 g.Kdos., NARA T-311, 1, 7000677-8. 연합군은 디데이 이전에는 루아르강에 있는 교량들을 심각하게 공격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노르망디 지역이 고립되면서 루아르강은 작전 지역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11) ’Stärke des Transportraumes für Verlastungszwecke’, AOK 7 Ia Nr. 2708/44 g.Kdos., NARA 311, 1, 1000677-8. 부대 이동에 우선순위가 두어졌다는 점은 6월에 도착한 보급품 수송열차와 부대 수송열차의 숫자가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보급품 열차는 겨우 41대 도착한 반면 부대 수송열차는 최소한 157대가 도착했다. 
12) 6월 15일까지 제7군은 5,000톤의 탄약을 소모했지만 재보급 받은것은 3,000톤에 불과했다. ’Auszüge aus Versorgungs Tagesmeldungen’, Hg. B Ib Nr. 0355/44 geh., d. 18/6/1944, NARA T-311, 1, 7000704-5을 참고하라. 보급창의 파괴에 관해서는 O. Qu. West, ’Besonders der Ereignisse’, 30 June 1944, NARA T-311, 14, 7014553을 참고하라. 제7군의 불완전한 보고서에 따르면 6월 동안 654,000리터의 연료와 2,308톤의 탄약, 그리고 수송능력 2,225톤에 달하는 트럭을 잃었다고 한다. ’Ausfallmeldungen’, O. Qu. AOK 7 Nr. 9654/44 geh., d. 30/6/44, NARA T-312, 1571, 000841. On the effectiveness of Allied interdiction efforts, see Ktb. O. Qu. West, d. 28/6/1944, NARA T-311, 14, 000550. 
13) 서부전구사령부 군수참모처는 6월 9일 부터 10일 사이에 924,000갤런의 연료를 보급했다.  6월 13일에 이르자 서부전구사령부의 연료 예비 비축량은 겨우 7,150갤런에 불과했다. Tkb. Ib Hg. B, v. 10/6/1944, NARA T-311, 1, 000710, NARA T-311, 14, 7014537, 그리고 Ultra Intercept, KV 8122, 15/6/1944, PRO, Kew, DEFE 3/172. 제7군의 보급 통계는NARA T-311, 15, 7015185에 기록되어 있다. 서부전구사령부 군수참모처는 예하에 겨우 2개 종대의 유조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연료창에 대한 공습은 NARA T-311, 14, 7014539, and Ob. West Ia Nr. 5676/44 geh., v. 23/6/44, NARA T-311, 14, 7029783를 참고하라. 
14) 6월 25일과 27일에 소뮈르와 샬론느(La Posoniere)의 다리도 재개통 되었다. 그리고 6월 말에는 다음의 노선들이 임시로 재개통 되었다. Le Mans-Sable-Segre-Redon-Quimper;  Nantes-Rennes-Dol (6월 23일); Saumur-Chateau du Loir-Le Mans; Nantes-Angers-Le Mans (6월 28일). 6월 동안 노르망디 방면으로 부대를 수송한 열차의 3분의 2는 루아르강 남쪽에서 부대를 하차시킬 수 밖에 없었다. ’Seit Beginn der Invasion wurde folgende Wehrmacht-Transporte in Frankreich-Belgien-Holland gefahren’, General des Transportwesens West Abt. Ib, n.d., ’Zusammenstellung der Ausladungen der Reichs- u. Basis-züge im Juni 1944’, n.d., ’Ausladungen der Einzelnachschubsendungen innerhalb der besetzten Westgebiete’,n.d., NARA T-78, 611, 000088, 000089, 000092; Chef Trspw./vorgesch. Staffel, untitled bridge report, 23/6/1944, General des Eisenbahntruppen, NARA T-78, 613, 000340-1; Zusammenstellung der in der Zeit vom 1/4-30/6/44 im Armeebereich durchgeführten bewegungen’, AOK 7 BVTO, NARA T-312, 1571, 000983; ’Eisenbahn-Nachschubtransporte’, O. Qu. West/Qu.1/NTBr.B.Nr. 03039/44, g.Kdos., v. 22/6, 23/6., 27/6/1944, NARA T-312, 1571, 000766, 000787, 000834.  
15) ’Auszüge aus Versorgungs-Tagesmeldungen’, Ib Hg. B Nr. 0355/44 geh., NARA T-311, 1, 7000704. 독일 B집단군은 6월 동안 1,866대의 트럭, 33대의 버스, 103대의 견인차량, 2,198대의 기타 차량을 상실했다고 보고했는데 이것은 하루 평균 75대의 트럭을 잃어버린 것이다. ’Zusammenstellung der Totalausfälle an Kfz. in der Zeit vom 6/6-30/6/44’, Obkdo. d. Heeresgr. B, Anlage 1 zu Tgb. Nr. 11287/44 geh., d.29/7/1944, NARA T-311, 1, 7000828. 
16) 연료 손실 통계는 Tagesmeldung O. Qu. West v. 1/7/1944, NARA T-311, 15, 7015271를 참고하라. 
17) 제7군은 두개의 철도노선이 복구되면서 6월 18일의 보급 상황에 대해 처음에는 ‘다소 개선되었다.(’Geringe verbesserung’)’고 기록했다., KTB O. Qu.West, 18/6/1944, NARA T-311, 14, 000543. 
18) 연합군은 독일군의 보급열차 한대는 트럭 180대분의 수송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PRO, Kew, CAB44/243, Lt-Col. A.E. Warhurst, ’OVERLORD: D-Day, 6 June 1944’, p. 26. 노르망디에 첫 번째 보급열차가 도착한 것은 6월 14일 이었으며 독일군은 이후 6월 내내 하루 평균 2.4대, 7월에는 하루 평균 2.7대의 열차를 보낼 수 있었다. General des Transportwesens West lb, ’seit Beginn der Invasion wurde folgende Wehrmacht-Transporte in Frankreich-Belgien-Holland gefahren’, n.d., NARA T-78, 611, 000088. 
19) 제846, 850중가교종대는 세느강으로 이동해 선박을 건조하고 운용했으며 조금 지난 6월 13일에는 제86도하공병대대의 선박 중대가 증원되었다. 7월 23일까지 운항하는 페리는 26척, 수송능력은 603톤으로증가했다. 7월 1일에서 10일 사이에는 하루 평균 433톤이 페리로 보급되었다. 7월 8일에서 14일 사이에 세느강 페리는 노르망디로 보내지는 탄약의 16%, 연료의 19%를 보급하였다. 8월 1일에 연합군은 항공정찰을 통해 세느강 하구에서 운항중인 선박 104척을 발견했다. ’Fähren übersetzmittel Lagekarte’, A.Pi.Füh. 15 Br.B.Nr. 16/44 geh., v. 28/2/44, NARA T-312, 519, 8118913; Ktb. des Ia/Stopi, Ob. West, Mai-Juni 1944, NARA T-311, 28, 7033993 ff.; ’Flüßübergänge u. d. Seine: Stand 23/7/1944’, Anl. zu A.Pi.Füh. 15 Br.B.Nr. 2950/44 g. vom 24/7/1944, NARA T-313, 421, 8714680; ’Seineschifffahrt Stand: 10/7/44’, Tkb. d. Ktb. Qu. Abt. Ib, Anl. zu KTB O.Qu.West, Juli 44, NARA T-311, 15. 
20) 6월에는 운하를 통해 1,445,900갤런의 연로가 서부전선에 보급되었다. ’Wehrmachttransporte auf Binnenwasserstrassen’, Tätigkeitsbericht des General des Transportwesens West, T-78, 611, 000092를 참고하라. 
21) 7월 8일 부터 14일 까지의 한주동안 총 26%의 연료와 탄약이 기차로 보급되었고 28%는 수운으로, 그리고 46%가 차량으로 보급되었다. Ob. West, ’Versorgungsberichten Stand: 10/6-27/7/1944’, AOK 7 O. Qu., NARA T-311, 15, 7015166-472.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서부전구사령부 군수참모처의 일일보급보고서는 노르망디로 보내진 모든 차량수송대와 거의 대부분의 보급열차편의 출발지, 도착지, 그리고 도착 예정 일자를 기록하고 있다. 이 자료는 독일군의 재보급 시도에 대해 정확한 모습을 보여준다. 
22) 소뮈르와 투르 생 마스의 철교는 7월 초에 또다시 파괴되었으며 7월 20일에는 낭트의 철교도 파괴되었다. 그리고 같은 날 샬롱느의 철교도 또다시 파괴되었다. 이렇게 해서 코브라 작전이 실행되기 전날에는 루아르강 전체를 통틀어 포르 불레Port Boulet의 철교 만이 남아있었다.연합군은 이 철교가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통과 하중도 낮은 곳이어서 공습하지 않았다. PRO, Kew, DEFE 3/62, Ultra Intercept XL 3649, 27/7/1944. 투르의 파괴와 이곳이 군수 보급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는지는 Hg. B Ib Br.B.Nr. 0908/44 geh., d. 15/7/1944, NARA T-311, 1,0000804를 참고하라. 루아르강의 철교들, 특히 투르 생 시르 다리가 또다시 파괴된 것은 이 공습이 후방차단 작전의 일환으로 당시 준비 단계였던 코브라 작전 계획과는 무관했다는 점에서 행운이었다. 
23) 7월 8일에서 14일 사이에 제7군에 보급된 탄약의 48와 연료의 43%가 철도와 바지선을 통해 도착했다. 투르가 파괴된 뒤에는 모든 보급품이 차량으로 운반되었다. 제7군이 보유한 차량을 가지고 자체적으로 연료를 보급한 비율은 7월 17일에서 21일 사이에는 51%에서 22일에서 26일 사이에는 86%로 늘어났다.Ob. West, ‘’Versorgungsberichten Stand: 10/6-27/7/1944’, AOK 7 O. Qu., NARA T-311, 15, 7015166-472. 24) Ob. West, ’Versorgungsberichten Stand: 10/6-27/7/1944’, AOK 7 O. Qu., NARA T-311, 15, 7015166-472. 
25) 7월 17일에서 21일 사이에는 하루 평균 85,260갤런의 연료가 제7군에 보내졌다. 7월 22일에서 26일 사이에는 62,500갤런으로 줄어들었다. Ob. West, ’Versorgungsberichten Stand: 10/6-27/7/1944’, AOK 7 O. Qu., NARA T-311, 15, 7015166-472. 
26) 미나와 브렘제의 폐쇄에 관해서는 PRO, Kew, DEFE 3/62, Ultra Intercept XL 3573, 26/7/1944. Kampfgruppe Kentner, munitions return, G2 Periodic Reports, First U.S. Army, No. 51, 31/7/1944, Annex 1, Washington National Record Center, Suitland, MD, (hereafter WRNC), Record Group 401, 101-20를 참고하라. 88mm 대전차포탄 보유량은 7월 10일에 포1문당 146발에서 7월 25일에는 1문당 54발로 줄어들었다. LXXXIV Army Corps Weapons Returns, 10/7, 25/7/1944, PRO, Kew, DEFE 3/55, Ultra Intercept XL 1897, 13.7.1944,; DEFE 3/62, Ultra Intercept XL 3709, 27/7/1944. Kampfgruppe Kuske, ’Tagesmeldung’, 23/3/1944, NARA T-354, 156, 3800792. 쿠스케 전투단이 보유한 탄약의 양은 독일군의 일반적인 탄약 지급량의 30%에 불과한 것이었다. 독일군의 평균 탄약 보급량은 노르망디 전선에서 보통 5~6일 정도면 소모되었다. Grosse Munitions Ausstatung (Heer)’, Anl. 2 zu Ob. West/O.Qu. West/Qu.1 Nr. 0700/44 G.Kdos., v. 12/2/1944, NARA T-311, 14, 70104599. 
27) 코브라 작전에서 미군은 독일군에 대해 2대1의 수적 우세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영국-캐나다군은 7월 30일의 블루코트 작전, 8월 8일의 토탈라이즈 작전, 8월 14일의 트랙터블 작전에서 3대 1의 수적 우세를 가졌다. 
28) 독일군의 88mm 대공포탄 고갈은 PRO, Kew, DEFE 3/62, Ultra Intercept, XL 3568, 26/7/1944에 나타나 있다. 독일군의 탄약 상황은 USAHD FMS A-968, Genltnt. Otto Elfeldt, ’LXXXIV Corps, 28 July-20 August, 1944’ (Germany, 1946), p. 11에서 다루고 있다.29) 영국 제30군단은 7월 29일 독일군이 주간 수송작전을 재개한 것을 확인했다. PRO WO 171/310, XII Corps, G. Branch (Ops.), ’Intel. Notes, 29/7/1944’, War Diary, July 1944, Appendix H를 참고하라. 독일 제5기갑군이 노르망디에 배치된 전 독일군의 보급 임무를 인수한 것에 대해서는 Tätigkeitsbericht, Qu. LVIII Pz. Korps, 13/8/44, NARA T-311, 497, 000271. 8월 15일 이후 많은 독일군 부대가 연료 부족으로 기동력을 상실했다.. ’Abend-meldung’, Abt. IIa Ob. West, v. 15/8/1944, NARA T-311, 29, 70355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