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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18일 토요일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2-4호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2-4호에 실려있는 글들을 대략 훑어보았습니다. 이번호에는 개인적으로는 다행히도 2 세계대전과 관련된 논문이 2 실려있습니다.

번째 글은 레스터 그라우(Lester Grau) “River Flotillas in Support of Offensive Ground Operations: The Soviet Dnieper River Flotilla Experience”입니다. 글은 2차세계대전 당시 소련 해군이 강과 호수에서 운용한 분함대의 작전이 소련 지상군의 작전을 어떻게 지원했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분석 대상으로 삼은 분함대는 드네프르강 분함대 입니다. 글은 드네프르강 분함대가 지상군에 대한 화력지원, 도하작전 지원, 군수지원, 해군육전대 작전 등을 어떻게 수행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바그라티온 작전 시기에 대한 분석이 좋습니다. 하천이 많고 도로망이 빈약한 벨로루시 지역에서 소련 지상군의 신속한 기동전이 가능했던 원인 하나로 드네프르강 분함대의 역할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번째 글은 미하일 수프룬(Mikhail N. Suprun) “Lend-Lease and the Northern Convoys in the Allied Strategy During the Second World War”입니다. 연합국이 수행한 렌드리스 북극해 방면으로 수행된 부분을 다루는 짤막한 입니다. 저자는 미영 연합의 유럽 우선 전략에있어서 북극해 방면의 렌드리스 수송선단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번째는 노르웨이에 주둔한 독일 해군을 끌어내는 미끼로서의 역할입니다. 이러한 역할은 영국이 1943년까지 채택한간접행동(indirect action)’ 전략의 일부로서 두드러졌다고 봅니다. 간접행동 전략은 해상봉쇄 전략폭격, 제한적인 특수부대 공격 등으로 연합국 인명희생을 최소화 하면서 독일에 타격을 입히는 것을 핵심으로 합니다. 북극해 방면의 수송선단은 간접행동 전략의 일부로서 기능을 수행했다는 입니다. 또한 반히틀러 동맹을 공고하게 하는 정치적인 역할도 수행했다고 평가합니다. 수프룬은 렌드리스가 전쟁 수행에 기여한 역할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접근할 것을 주장합니다. 단순히 물자의 총량이나 달러 환산 가치 등으로 단순하게 접근하는 방식에 비판적입니다

밖에도 연합국의 러시아 내전 개입 100주년을 맞아 특집 논문들이 다수 실려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흥미로운 특집이네요.

그리고 1877-78년의 러시아-오스만 투르크 전쟁 당시 발칸 전역을 다룬 Alexander Staiev 논문도 주목할 합니다. 러시아군이 겨울철의 불리한 산악 지형에서 어떻게 기동을 하여 오스만 투르크군의 허를 찔렀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이 오스만 투르크군에 비해 우수한 전술적 기량을 보여주었고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작전을 전개했다고 높게 평가합니다.

Taras Kuzio “Old Wine in a New Bottle: Russia’s Modernization of Traditional Soviet Information Warfare and Active Policies Against Ukraine and Ukrainians” 최근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서 러시아의 정보전 수행을 다루고 있습니다. 소련 시절 형성된 정보전 수행 방식을 현재의 러시아군이 최신 기술을 도입하여 활용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같습니다. 러시아 군부가 미디어를 활용해 대여론전을 전개하는 양상이 흥미롭습니다.


2019년 2월 9일 토요일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2-1호에 실린 논문 몇 편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2-1호를 훑어보았습니다. 이번호는 흥미로운 제2차대전 논문이 3편이나 실려있어 매우 즐겁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글은 데이비드 서튼(David Sutton)의 "1941 and the National-Patriotic Revival in Russia"입니다. 이 글은 제목 그대로 푸틴 치하에서 강화되고 있는 국수주의적 환경이 제2차세계대전사, 특히 1941년 전역에 대한 서술에 끼치는 영향을 다루고 있습니다. 필자는 고르바초프-옐친 이래 기세가 꺾여 있던 러시아의 우익-국수주의적 역사관이 푸틴 치하에서 부활했으며 본질적으로는 소련 시기의 역사관과 동일한 맥락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런 국수주의적 논자들은 고르바초프-옐친 시기에 활발하게 일어난 '수정주의적' 역사관을 배격하고 영웅적인 과거사를 구축하고자 합니다. 대표적인 저작은 2011년에 간행된 12권짜리 '대조국전쟁사'입니다. 대조국전쟁사의 간행 책임자였던 졸로타레프는 '수정주의적' 역사가들은 러시아의 국제적인 입지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주장한 인물입니다. 그는 '판필로프 사단의 28용사' 등 소련 시절의 날조된 프로파간다에 대한 공격을 되려 '수정주의자'들의 날조라고 주장합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소련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비판도 거부한다는 점 입니다. 서튼의 글은 이렇게 퇴행적인 푸틴 집권기의 역사서술을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꽤 재미있는 글이라 번역을 해보고 싶군요.

다음으로는 니콜라이 로스토프, 이고르 예레민, 세르게이 쿠즈네초프의 공동연구인 "The Particularities of Military Mobilization Campaigns in Siberia in the Summers of 1914 and 1941"가 있습니다. 이 논문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초반 시베리아 지역의 전쟁 동원에 관한 글 입니다. 1941년의 경우 공산당이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바르게 적용하지 못해 한계가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인력 및 마필 동원과 달리 차량 및 트랙터 등의 장비 동원에 문제가 많았다고 평가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쿠르스크 전투를 주로 연구하는 발레리 자물린의 "Soviet Troop Losses in the Battle of Prokhorovka, 10~16 July 1943"이 있습니다. 제목 그대로 프로호로브카 전투에서 소련군이 입은 인명 및 장비 손실을 정리한 글 입니다. 흥미롭기는 합니다만 그의 기존 연구와 비교했을때 특별히 주목할 만한 내용은 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논문은 아니지만 흥미로운 글도 있습니다. 리브 파르네모(Liv Karin Parnemo)의 "Russia's Naval Development - Grand Ambitions and Tactical Pragmatism"는 최근 러시아의 해군력 건설은 러시아의 경제적 역량을 고려해 연근해 작전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아직까지는 소련 시절에 건설한 대형 함정과 잠수함 전력으로 제한적인 원양 작전을 전개하고 있으나 신규 함정 건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역량이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2018년 10월 18일 목요일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1-4호에 실린 H. G. W. Davie의 논문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최신호인 31-4호에 흥미로운 제2차대전 논문이 한 편 실렸습니다. H. G. W. Davie라는 연구자의 'Logistics of the Combined-Arms Army- Motor Transport'라는 글 입니다. H. G. W. Davie는 이미 같은 저널에 독소전쟁시기 철도망의 역할에 관한 연구를 기고한 바 있습니다. 이 연구는 제2차대전기 소련군의 차량화 수준과 군수보급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필자가 가장 먼저 주목하는 문제는 소련군의 낮은 차량화 수준입니다. 소련군의 차량 보유량은 전쟁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늘어났습니다. 1942년 1월 1일 소련군이 보유한 차량은 31만 8,500대였습니다. 1942년 동안 차량 증가분은 소련 국내 신규생산분이 2만 5천대, 민간차량 징발분이 9만대, 렌드리스 차량이 3만 900대였습니다. 1943년 1월 1일에 소련군이 보유한 차량은 40만 4,500대로 증가합니다. 그리고 같은해 증가분은 신규생산 4만 600대, 민간차량 징발분 1만 2,400대, 렌드리스 차량 8만 3,700대 였습니다. 1944년 1월 1일 차량 보유량은 49만 6,000대로 늘어납니다. 그리고 같은해 신규생산 3만 6,700대, 렌드리스 차량 12만 8,800대 등의 증가에 힘입어 1945년 1월 1일 소련군의 차량 보유량은 62만 1,200대가 됩니다. 매우 인상적인 규모입니다.

하지만 소련군의 병력 규모를 고려하면 사정이 조금 달라집니다. 전쟁이 발발할 당시 소련군의 차량 1대당 병력비율은 1:28이었습니다. 그러나 막대한 차량 손실과 병력 증가로 인해 전쟁 기간 중 차량 1대당 병력비율은 정체된 상태였습니다. 렌드리스 차량이 대량으로 보급된 1944년 1월 무렵에야 차량 1대당 병력비율이 1:24가 됩니다. 차량 규모의 증가로 1945년에는 차량 1대당 병력 비율이 1:21까지 낮아지기는 하지만 미군이나 영국군과 비교하면 차량화 수준이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영국군은 1945년 6월 기준으로 차량 1대당 병력 비율이 1:7.7이었습니다. 야전부대로 한정하면 차량화 수준이 더욱 떨어지게 됩니다. 소련군도 독일군 처럼 기계화부대와 독립지원부대(특히 포병) 중심으로 차량을 집중 배치했기 때문입니다. 소련군의 일반 보병부대는 같은 시기 독일군 보다 특별히 나을게 없는 차량화 수준을 보였습니다. 소련군의 소총병사단에서 차량화된 부대는 사단 직할 대전차포 대대, 122mm 곡사포 대대, 중박격포 대대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필자는 제7근위군의 사례 분석을 통해 소련군의 1개 야전군의 차량 보유량이 영국군 1개 보병사단 보다 못한 수준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때문에 소련군도 독일군 처럼 마필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1945년 1월 기준으로 소련군은 105만 4,200마리의 마필을 보유했고 이 중 야전군이 보유한 마필이 79만 1,600마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련군은 1944~45년 사이에 매우 높은 수준의 작전 템포를 달성했습니다. 비수아-오더 작전에서 소련군의 전차군은 1일 평균 45~75km를 진격했고 보병과 마필 중심의 제병협동 야전군은 1일 평균 30km를 진격했습니다. 저자는 소련군이 부족한 보급 능력에 맞춰 보급 소요를 책정하고 부족한 물자를 현지조달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고 봅니다. 예를들어 1943년 8월 루먄체프 작전에서 스텝전선군은 주공축선의 주력부대에 전선군 직할 수송부대의 역량을 집중하고 부차적인 지역은 야전군 및 사단의 자체적인 수송역량으로 보급소요를 해결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제한된 수송역량도 탄약과 유류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8월 3일 부터 23일까지의 작전 기간 중 스텝 전선군의 보급부대는 총 42,972톤의 물자를 수송했는데 이 중 탄약이 2만 7,887톤, 연료가 7,906톤, 기타 보급품이 7,949톤이었다고 합니다. 단순히 중량으로 따지면 탄약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걸 알 수 있습니다. 비슷한 양상이 비수아-오더 작전 당시 제8근위군의 사례에서도 나타납니다. 제8근위군은 식량 조달을 노획하거나 현지 징발에 의존하면서 탄약 및 유류 보급에 수송역량을 집중해 높은 진격속도를 유지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주장은 소련군의 낮은 보급능력과 과도한 약탈을 일리있게 설명해 준다고 봅니다. 발레리 자물린 등의 연구자는 소련군이 낮은 보급능력으로 인해 전쟁 중후반까지도 영양실조와 질병에 시달리는 경우가 잦았다는 사실을 밝혀낸 바 있습니다. 전투에 필수적인 탄약과 연료에 수송역량을 집중하고 병사의 생활에 필요한 보급소요를 최소화 하는 경향이 일반적이었다면 이런 문제들을 충분히 설명 가능합니다. 굉장히 재미있는 논문이라 시간이 되면 한번 번역해 보고 싶네요^^

2018년 7월 23일 월요일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1-3호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1-3호를 훑어봤습니다. 지난호는 제2차대전 관련 논문이 전무해 아주 실망스러웠는데 이번호는 재미있는 글이 두 편이나 있습니다.

Alan Donohue의 "Adolf Hitler and German Military Intelligence on the Eastern Front"는 독일 국방군의 정보실패가 1942년 전역에 끼친 영향을 고찰하는 논문입니다. 독일군은 이미 1941년 부터 소련과 소련군에 대한 정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이런 문제점이 계속되면서 1942년 전역 전 과정에 영향을 끼쳤다는 내용입니다. 특히 소련의 공업생산력과 인적자원을 과소평가한 것이 히틀러로 하여금 1942년 하계공세를 결심하게 한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지적합니다. 소련의 공업력과 인적자원이 한계에 달했다는 잘못된 상황판단에 근거해 남부전선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한차례 더 가하는 것으로 전략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오판을 하게 됐다는 겁니다. 블라우 작전이 시작되면서 독일군이 파악하지 못한 소련군의 새로운 부대가 잇따라 투입됐음에도 소련의 동원 역량을 끝까지 과소평가한 실책이 1942년 전역의 참패로 이어졌다는 지적은 타당합니다. 필자는 독일군이 전략 단위는 물론 작전 단위 정보에서도 실패했다고 평가합니다.

David Stahel의 에세이 "The Battle for Wikipedia: The New Age of ‘Lost Victories’?"는 위키피디아의 친독일 성향 필자들의 악영향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접근성이 높은 위키피디아에 친독일적인 성향을 가진 필자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제2차세계대전과 관련해 역사적으로 부정확한 내용을 쓰는 사례가 있다고 비판합니다. 필자는 위키피디아가 특히 청소년층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점을 지적하면서 우려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아주 흥미롭고 시사점이 있는 글 입니다.

2018년 4월 17일 화요일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1-2호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1-2호를 막 훑어봤습니다. 제2차세계대전 논문이 단 한편도 없는 실망스러운 호로군요.

그래도 개인적으로 눈에 띄는 논문이라면 시리아내전에 투입된 러시아 공군의 작전을 성공적으로 평가하는 랄프 실드(Ralph Shield)의 논문 Russian Airpower’s Success in Syria: Assessing Evolution in Kinetic Counterinsurgency와 18~19세기 러시아의 알래스카 개척에서 러시아 해군이 수행한 역할을 다룬 안드레이 그리뇨프(Andrei V. Grinëv)의 The Russian Navy and the Development of Alaska: The Military Dimension 정도가 있습니다.

이 저널의 최신호를 목빠지게 기다리던 입장에서 2차대전사 논문이 한편도 없다는건 굉장히 아쉬운 일입니다.

2017년 5월 7일 일요일

렌드리스에 대한 흥미로운 논문 한편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최신호(40-2)에 렌드리스에 관한 흥미로운 논문이 한 편 실렸습니다. 저자는 빈대학의 데니스 하블라트(Denis Havlat)이고 논문 제목은 Western Aid for the Soviet Union During World War II: Part I입니다. 논문의 분량이 많아 나뉘어 실렸는데 완결되면 번역해서 이 블로그에 올려보려 합니다.

하블라트의 핵심 주장은 소련과 러시아가 렌드리스의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했으며 실제로는 렌드리스가 독소전쟁의 주요 국면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러시아 정부의 공식 통계인 크리보셰프의 보고서가 소련군의 손실을 축소 왜곡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소련과 러시아가 렌드리스의 기여도를 깎아내리기 위해 통계를 조작하는 등 여러가지 날조를 했다는 것 입니다.

꽤 재미있는 논문입니다. 아마 올해안에는 완결이 날 듯 싶은데 시간이 되는대로 번역하도록 하겠습니다.

2010년 4월 11일 일요일

기묘한 인생역정

슬라브 군사연구(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0권 4호에 실린 Timothy P. Mulligan의 Escape from Stalingrad 라는 소논문을 읽었는데 이 글은 2차대전 중 독일군과 소련군 양 진영을 오락가락한 독일계 소련인들의 이야기도 다루고 있었습니다.

꽤 흥미로운 사례가 있는데 첫 번째 사례는 프리드리히 지몬(Friedrich Simon) 이라는 사람입니다. 지몬은 1942년 4월 소련군에 징집되어 제118소총병사단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리고 7월의 전투에서 독일 제14기갑사단에 포로가 되었는데 독일군에 보조원(Hilfswillige)으로 자원해서 사단본부의 취사병으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들 잘 아시다 시피 제14기갑사단은 스탈린그라드의 포위망 안에 갇혀 버립니다. 지몬은 1943년 1월 27일에 부상을 당해 야전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소련군의 포로가 됩니다. 그런데 이때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이 많은 보조원들이 그랬던 것 처럼 소련군 군복을 그대로 입고 있어서 전투에서 포로가 된 것이라고 둘러댈 수 있었던 것 입니다. 지몬은 다행히 목숨은 건졌는데 그 대신 독일군에 항복한 '죄'로 고생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669소총병연대에 배속되어 오룔 지구에 투입됩니다. 669소총병연대는 1943년 8월의 전투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지몬은 다시 한번 독일군에 항복합니다. 지몬은 두 번째로 항복한 다음 독일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고 독일군에서 통역병으로 복무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사례인 에듀아르트 쉘(Eduard Schell)은 1940년 1월 소련군에 징집됐습니다. 그리고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인 1941년 7월에 독일군 제29차량화보병사단에 포로가 되어 지몬과 마찬가지로 보조원이 되었습니다. 쉘은 15보병연대 2대대에서 통역으로 복무했으며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이 항복했을 때 포로가 되었습니다. 쉘은 보조원으로 꽤 오래 근무했기 때문에 독일군 군복을 입고 있어서 지몬과 같이 적당히 둘러대고 위기를 모면할 수 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쉘의 운명이 이쯤에서 끝장났다면 역사가들의 눈에 띄일 수가 없었겠지요. 쉘은 스탈린그라드 시내에서 잘 아는 소련인을 만나 소련 군복과 가짜 증명서를 발급받고 다시 소련군으로 돌아갑니다(;;;;) 쉘 또한 1943년 8월에 다시 독일군에 항복합니다. 그런데 이때도 운이 좋았던 것이 스탈린그라드 포위망에서 탈출한 쉘을 알고 있는 독일군 장교 한명이 쉘의 신원보증을 해 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운이 좋은 사례는 그야말로 극소수였습니다. 제6군에 소속된 5만명 가량의 보조원 대부분은 포위망 안에서 사망하거나 포로수용소로 끌려가 반역자로서 처벌받았으니 말입니다.

2010년 3월 23일 화요일

발상의 전환? : 모스크바 전투당시 소련군의 영국제 전차 운용

미국과 영국의 렌드-리스(Lend-Lease)가 소련의 승리에 어떤 공헌을 했는지는 매우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렌드-리스로 원조된 물품 중에서 전차와 항공기 같은 전투장비는 상대적으로 기여도가 적다는 것이 일반적인데 전쟁 중 소련이 생산한 전차의 대수와 렌드-리스로 제공된 전차의 대수를 비교해 본다면 그런 결론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울 것 입니다. 소련이 생산한 기갑차량을 모두 합치면 11만대에 달하는데 영국이 원조한 전차는 4,542대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게 그렇게 당연하다면 세상은 정말 심심하겠지요.

캘거리 대학 교수인 알렉산더 힐(Alexander Hill)은 관점을 살짝 바꿔 볼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전쟁 전 기간 동안 원조된 전차의 대수만 볼 것이 아니라 어떤 시점에 어느 정도의 전차가 원조되었는지 살펴보자는 것 입니다. 그리고 기준을 그렇게 바꿔본다면 의외의 결론도 나올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힐은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19호 2권(2006)에 British “Lend-Lease” Tanks and the Battle for Moscow, November-December 1941—A Research Note라는 제목의 짤막한 논문을 기고 했고 이어서 22호 4권(2009)에 이것을 수정 보완한 British Lend-Lease Tanks and the Battle of Moscow, November-December 1941 — Revisited라는 논문을 기고합니다. 힐이 이 두 논문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모스크바 전투 당시 영국이 원조한 영국제 전차는 소련군 기갑전력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으며 이를 통해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 입니다.

다들 잘 아시다 시피 소련은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 말 그대로 재앙과 같은 패배를 겪었습니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독일군을 피해 주요 공업지대에서는 생산설비의 소개를 시작했고 이것은 일시적으로 군수품 생산에 차질을 가져오게 됩니다. 영국은 새로운 동맹을 위해 아르항겔스크를 통해 각종 군사장비를 원조했고 여기에는 전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750대의 전차를 보내기로 약속했고 이 중 466대가 12월까지 소련에 인도되었다고 합니다. 1941년에 원조된 영국제 전차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것은 발렌타인으로 총 259대가 보내졌고 마틸다(A12)는 187대, 그리고 나머지는 테트라크(Tetrarch, A17) 경전차 였습니다. 이중 소련군 부대에서 인수한 것은 발렌타인이 216대, 마틸다가 145대 였습니다. 영국제 전차가 처음 소련군에 인도된 것은 10월 28일로 이날 20대 가량의 발렌타인이 카잔 전차학교에 도착해 승무원 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목표로 한 대규모 공세를 시작하면서 영국제 전차를 인도받은 부대들은 황급히 전선으로 투입됩니다.

독일군이 모스크바의 목전으로 쇄도하고 있던 11월 20일에 영국제 전차를 장비한 소련군 부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부대
마틸다
발렌타인
146전차여단 137전차대대
21
146전차여단 139전차대대
21
131독립전차대대
21
132독립전차대대
2
19
136독립전차대대
3
9
138독립전차대대
15
6

이 중 132독립전차대대를 제외한 모든 부대가 모스크바 방어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총 96대가 투입된 셈인데 이것을 당시 소련군이 모스크바 축선에 투입하고 있던 기갑전력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힐은 러시아측의 자료를 인용해 11월 말에 모스크바 방면에 배치된 소련군의 기갑전력은 영국제 전차를 포함하여 670대, 그리고 이중 실질적인 전투력을 가진 중형 이상의 전차는 205대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모스크바 방면 소련군의 중형전차가 205대로 집계되었던 것이 정확하게 11월 20일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추산은 어렵지만 모스크바 방어전의 결정적이었던 시점에서 영국제 전차는 결정적이진 않더라도 꽤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 셈입니다.

물론 영국제 전차들은 신통치 않은 성능으로 낮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발렌타인이나 마틸다는 최고 35~40cm의 눈이 덮인 야지에서 기동할 수 있었는데 이건 고작 T-60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T-34는 70cm 정도의 눈이 덮힌 야지에서도 거뜬히 움직였으니 비교하기가 좀 그렇죠. 게다가 2파운드 포는 전차포로서 범용성이 떨어지는 고약한 물건이었고;;;; 하지만 당시 소련측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못 됐습니다. 독일군이 모스크바의 문전에 다다른 시점에서 소련은 투입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전선으로 투입하고 있었고 실전에서는 거의 쓸모없는 T-30이나 T-40 같은 경전차도 12월까지 생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영국제 전차들이 T-34나 KV 계열에는 못 미치지만 최소한 소련이 생산하고 있던 경전차들 보다는 좀 더 유용한 물건이었을 겁니다. 소련측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영국제 전차를 받은 부대는 15일 정도의 훈련을 마치고 곧바로 전선으로 직행했다고 합니다. 성능 고약한 영국 전차에 훈련 부족한 전차병들이 탔으니 뒷 이야기는 대략 상상이 가능할 것 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모스크바 전투 당시 소련의 전차 운용 방식은 영국제 전차들의 운용방식과도 어느정도 맞아 떨어졌다는 것 입니다. 소련군 기갑부대는 독소전 초기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이때문에 대규모 전차군단은 대부분 전멸하거나 해체되게 됩니다. 그리고 모스크바 전투 당시에는 전차여단이나 독립전차대대 단위로 분산 운용되면서 보병부대의 지원을 주임무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틸다와 발렌타인은 바로 '보병전차'가 아니겠습니까;;;;

다시 힐의 결론을 이야기 하자면 영국이 제공한 전차들은 모스크바 전투에서 중요한 '머릿수'를 채우는데 일정한 기여를 했습니다. 비록 동부전선에서 운용하기에는 성능도 부족하고 기계적 신뢰도가 낮은데다 승무원들의 훈련 수준도 낮았지만 있어줘야 할 시점과 장소에 존재했다는 것 입니다.

2007년 7월 4일 수요일

[번역글][재탕] 기술적 충격과 전쟁 초기의 상황 : 1941년 T-34 전차의 사례

이 글은 예전에 페리스코프 포럼에 올렸던 불법 날림번역물입니다. 하드를 정리하다가 발견한김에 다시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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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6-4(1993년 12월)에 실린 러시아 군사 전문가 "스티븐 잘로가"가 쓴 Technological Surprise and the Initial Period of War : The Case of the T-34 Tank in 1941을 우리말로 옮긴 것 입니다. 12년이나 된 오래된 글 이긴 한데 짧고 재미도 있습니다. 각주도 생략한 불법 번역이라서 읽으시는 분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기술적 충격과 전쟁 초기의 상황 : 1941년 T-34 전차의 사례 
현대 무기는 전쟁 초반의 기습적인 투입으로 전투에서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그 존재를 비밀에 부치는 경우가 많다. 기술적으로 최신일수록 그 존재를 은폐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최근의 사례를 들자면 1991년 페르시아만 전쟁에서 미 공군의F-117 스텔스 전투기의 사용이 있다. 그렇지만 첨단무기를 기습적으로 투입한다고 해서 항상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과거의 사례를 들자면 T-34전차의 사례가 있다. T-34는 흔히 전차 기술에 있어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하지만 1941년 바바로사 작전 기간동안에는 별다른 신통한 성과를 거두지 못 했다. 기술적 요소는 실전에서 중요한 다른 두가지 요소의 뒷 받침이 없이 성과를 발휘할 수 없다. 그것은 운용할 전술과 승무원의 훈련도이다. 
T-34의 개발은 1937년에 BT기병전차를 대체하기 위한 계획으로 시작되었다. 붉은군대 기갑국은 A-20의 혁신적인 디자인에 대해 높이 평가했지만 이것은 BT기병전차에 비해 방어력이 아주 약간 향상된 것에 불과했다. A-20의 주 무장과 엔진은 BT-7M과 동일한 것 이었다. A-20의 설계팀은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부대로 부터 올라온 BT전차의 보고서를 검토한 뒤 붉은 군대 기갑국이 요구하는 사양 이상으로 장갑과 무장을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한편, 설계국에서 대안으로 내놓은 A-32는 기갑국에서 승인하지 않았지만 스딸린의 승인을 받아서 개발을 계속 진행할 수 있었다. A-20과 A-32의 시제품은 1939년 여름에 모스끄바 근교의 꾸빈까 시험장에서 시험 평가를 받았다. 그 결과 A-32가 A-20을 누르고 선정되었다. 1939년 12월 19일에 A-32는 T-34라는 명칭을 부여 받고 붉은군대의 신형 기병 전차로 채택되었다. 한가지 특기할 만한 사항은 오늘날 T-34의 혁신적인 장점으로 평가 되는 76mm 주포와 강력한 장갑은 당시 붉은 군대 기갑국에서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 붉은 군대는 세 종류의 신형 전차를 개발하고 있었다. T-50은 T-26보병전차를 대체할 것 이었고 T-34는BT계열의 기병전차를, KV 중전차는 T-28 중형전차와 T-35중전차를 대체할 예정이었다. 이중 T-50은 기술적 결함과 기타 지연 요인으로 1941년 8월에야 비로서 부대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결국 1941년 여름에 독일군을 충격에 빠뜨린 것은 KV와T-34 두 종류의 전차가 되었다. 
비교적 최근까지는 독일군이 1941년에 전투에서 마주치기 전 까지는 T-34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 들여졌다. 그러나 최근 발굴된 사료에 따르면 비록 일선 부대는 몰랐다 하더라도 독일 국방군의 정보기관은 T-34의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9년에서 1941년 사이에 독일과 소련간에 있었던 군사 기술 교류는 현재까지 그 실체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독일은 소련측에 기술 교류의 일환으로 3호 전차를 수 대 제공했는데 여기에 대해 소련은 무엇을 답례로 보냈는지 알 수 없다. 미국의 기자인 마가렛 버크-화이트(Margaret Bourke-White)가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부대에 배치된 T-34의 사진을 촬영했다는 소문이 있긴 하지만 본 필자는 아직 확인해 보지 못 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T-34를 설계한 기술자들이 독일에서 제공받은 전차를 우습게 봤다는 것인데 3호전차를 예쁜 장난감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T-34의 출현에 대한 정보는 독일측에서 특별히 경계할 만한 사실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1940년 5월~6월간의 프랑스 전역에서 독일 기갑부대는 Char-1bis 와 S-35를 상대했다. 독일측은 프랑스 전역에서 우수한 기량으로 기술적 열세를 만회했으며 소련의 전차 기술에 대해서는 그저 그런 수준으로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소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자기 만족에 빠져 무사안일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비록 50mm Pak 38의 채용등 대전차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독일 국방군은 프랑스 전역당시 보병들이 프랑스군의 Char-1bis전차와 마주친 뒤 전차 공황에 빠졌던 경험을 무시했다. 독일 국방군은 전차의 주무장을 강화하거나 보병 중대의 대전차 화력을 증대 시키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 프랑스군의 강력한 전차와 교전한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소전 개전당시 독일 육군이 보유한 전차들은 프랑스 전역에 투입된 것들에 비해 기술적 진보가 별로 없었다. 
사실 독일측이 소련의 전차 기술에 대해 보인 태도는 그다지 놀랄만한 것은 아니다. 독일은 소련이 초기의 전차 개발 과정에서 서방측의 기술에 과도하게 의존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T-26은 영국의 경전차 기술을 바탕으로 개발됐으며 BT-7은 미국의 크리스티 전차의 개량형에 불과했다. 독일은 스페인 내전당시 소련 전차와 교전한 사례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비록 소련전차들이 영국과 미국의 기술에 의존한 복제품 수준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이것들은 명백히 독일의 콘도르 군단이 사용한 1호 전차 보다 우수했다. 1939년 폴란드 전역에서 소련 기계화 부대와 접촉한 경험은 소련의 수준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만 더 키웠으며 핀란드 전역에서 소련군 기계화 부대가 보인 전과는 그런 시각을 더 굳게 만들었다. 

1941년 소련군의 전차 배치

전쟁 직전 붉은군대는 1861대의 KV와 T-34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막 공장에서 출고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때문에 508대의 KV와 967대의 T-34만이 전쟁 개시당시 서부 지역의 군관구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엄청난 전력이었다. 당시 독일 육군은 불과 1449대의 3호 전차와 517대의 4호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것이 그나마 T-34와 비교할 수 있을 만한 것 이었다. 
최근(1993년)까지 실제 소련군이 어떻게 전차를 배치하고 있었는지는 세부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비교적 근래의 연구에서도 T-34는 독일의 공격이 있을 경우 반격을 위해서 후방의 예비 부대 위주로 배치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많은 러시아 사료의 공개로 전쟁 발발 당시 소련군이 어떻게 전차를 배치하고 있었는지, 특히 T-34와 KV의 배치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여태까지는 신형전차들이 29개의 기계화군단에 골고루 배치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신형전차들은 전방에 배치된 군단에 중점적으로 배치 되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신형전차를 일정 수량 이상 보유한 군단은 5개 군단에 불과했다. 끼예프 특별 군관구 예하 제 4 기계화 군단과 서부 특별 군관구 예하 제 6 기계화 군단이 신형 전차의 거의 절반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 3, 8, 15 기계화 군단이 각각 100대 이상의 신형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 부대는 기존의 통념과는 달리 대량의 신형 전차를 보유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들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가장 잘 장비된 부대는 제 4 기계화 군단 예하 32 전차 사단으로 리보프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다.
제 32 전차 사단은 1941년 4월에 30 경전차 여단을 개편하여 편성되었으며 사단장은 42세의 예핌 뿌쉬낀 대령, 사단 정치위원은 체삐가였다. 뿌쉬낀 대령은 적백 내전에도 참전한 고참군인으로 1932년부터 기갑병과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30 경전차 여단은 사단급 부대에 못 미치는 규모여서 32 전차사단으로 개편될 당시 고급 지휘관(영관급)은 편제의 50%, 초급지휘관(위관급)은 편제의 43%를 채우고 있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사병의 대다수가 1941년 봄에 징집되어 4월과 5월에 걸쳐 사단에 배속된 신병들 이었다. 사단의 최초의 임무는 이들 신병에게 전차를 어떻게 조종하는지 가르치는 것 이었고 이런 기초적인 훈련조차 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 마치지 못 한 상황이었다. 사단이 최초로 T-34를 지급 받은 것은 4월 25일이었고 마지막 차량이 5월 25일에 수령 되었다. 사단은 총 173대의 T-34와 49대의 KV를 보유해서 전쟁 발발 당시 사단급 부대로는 가장 잘 장비된 부대였다. 편제상 1941년의 소련 전차 사단은 210대의 T-34 와 63대의 KV를 장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사단은 다른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전차용 무전기는 편제수량의 30%에 불과했으며 사단 공병과 교량 부설 장비는 28%, 사단의 차량은 22%, 전차 수리용 장비는 13%, 전차의 예비 부품은 2%에 불과했다. 사단의 전차병들 중 많은 숫자가 5시간 미만의 조종 시간을 가지고 있었으며 포수들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 까지 실탄 사격을 해 보지도 못 했다. 전차병들은 신형 전차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 했으며 사단의 정비병들도 어떻게 신형 전차를 정비해야 할지 제대로 알지 못 했다. 
32 전차사단만 이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라 다른 부대들도 비슷하거나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은 1940년에 불과 115대의 T-34를 생산해서 부대로 보냈으며 1941년 1월 까지 T-34를 일정 수량 이상 보유한 부대는 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붉은 군대에서 가장 잘 준비가 된 부대도 겨우 6개월 정도의 훈련 기간을 가졌다는 것 이다. 1941년 5월 1일까지 생산된 T-34는 655대에 불과했으며 아무리 높게 추정치를 잡더라도 부대에 배치되어 훈련과정에 들어간 것은 500대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즉 전쟁 발발 당시 T-34 승무원의 절반 가량은 기껏해야 한 달에서 두 달 정도의 훈련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점은 KV 전차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T-34와 KV 전차포에서 사용할 대전차 철갑탄의 생산이 크게 지연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전차용 탄약은 규정량의 12%정도만 겨우 채우고 있는 상황이었고 게다가 이중 대다수가 고폭탄이어서 대전차 능력이 거의 없었다. 예비 부품은 크게 부족했다. 신형 전차들은 특히 클러치와 기어박스등 동력 계통에서 심각한 기계적 결함이 있었는데 이것은 경험이 부족한 전차병들과 맞물려 도로 행군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KV전차를 위해 새로 생산된 신형 보로쉴로베츠 전차 회수차는 배치량이 크게 부족했다. 만약 전차가 도로 행군 중 고장이 나 버리면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이렇게 소련군대의 내부적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1941년의 대 재앙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것 이었다. 부대단위 훈련은커녕 전차병의 기초 훈련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으니 소련 군대의 기갑전술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소련 기계화 군단의 실전 사례

북부전선에서 꾸르낀 장군이 지휘하는 제 3 기계화군단은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 인근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모두 109대의 T-34와 KV를 보유하고 있었다. 군단 예하 제 5 전차 사단은 6월 22일에 니멘강의 일리투스 다리를 건너려는 독일 제 7 기갑사단을 요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T-34는 확실히 체코에서 개발한 38(t)보다 압도적으로 우수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독일 공군의 지원으로 제 5 전차 사단은 격퇴되었다. 사단의 T-34 일부는 니멘강 동안에 참호를 파고 들어앉아 토치카로 이용되었다. 1941년 6월에 상실된 38(t)는 총 33대였으니 독일측은 매우 적은 손실을 입은 셈 이었다. 다음날 라쎄냐이에서 개시하기로한 소련측의 반격은 독일군의 신속한 진격으로 시도되지도 못 했다. 6월 24일에 제 2 전차사단 의 잔존 병력은 제 6 기갑사단의 100 차량화 소총연대를 공격해서 독일측의 진격에 약간의 차질을 입혔다. 그러나 연료와 탄약이 부족해서 그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 했다. 그뒤 이틀간 전차전이 계속됐지만 제 3 기계화군단 소속의 T-34는 소수만이 남게 되었다. 
한편, 벨로루시아에 배치된 소련군 기계화 부대중 가장 강력한 부대인 하츠낄례비치 장군의 제 6 기계화 군단은 총 238대의 T-34와 114대의 KV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군단은 6월 24일까지 전선에 투입되지 못 했다. 24일에 투입된 제 6 군단은 그로드노 서부에서 기갑집단을 후속하던 제 20 군단의 보병 사단들과 격돌했다. 독일측은 순식간에 탄약을 소모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6월 25일에 급강하 폭격기의 지원을 받아서 소련군의 반격을 격퇴했으며 하츠낄례비치 자신도 전사했다. 헤르만 호트의 제 3 기갑집단은 6월 26일에 벨로루시아의 수도인 민스끄에 도착했으며 그동안 소련 제 6 기계화 군단의 저항은 미미했다. 제 6 기계화군단은 제 10군 예하의 부대들과 함께 그로드노 남서쪽에 포위되어 섬멸되었고 군단소속의 전차 중 소수만이 포위망이 좁혀지기 전에 간신히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서부 전선군에서 가장 강력한 기갑 전력이었으며 전선에 배치된 T-34의 4분의 1을 보유하고 있던 제 6 기계화 군단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 한채 전멸 당했다. 
T-34가 가장 집중적으로 배치된 부대는 우끄라이나에 배치된 3개 기계화 군단이었다. 리보프에 배치된 블라소프 장군의 4 기계화 군단, 두브노에 배치된 랴비체프 장군의 8 기계화 군단, 지토미르 근교에 배치된 까르뻬조 장군의 15 기계화 군단이 바로 그 것이었다. 이중에서 블라소프가 지휘하는 제 4 기계화 군단이 가장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군단은 총 414대의 T-34와 KV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군단 예하 제 8 전차 사단은 가장 잘 훈련된 부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속히 전진하는 독일군은 블라소프의 군단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고 전진을 계속했다. 까르페조의 제 15 기계화군단은 135대의 T-34와 KV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전차가 기동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지형에 투입되었고 군단이 보유한 많은 전차를 도하점과 습지대에서 사고로 상실했다. 
독일군은 6월 22일에 우끄라이나 전선에서 최초로 T-34와 격돌했다. 독일 제 11 기갑사단 예하 제 11 기갑연대는 이날 리보프 전차 훈련 연대 소속의 T-34 30대의 공격을 받았다. 이 교전에서 세대의 4호 전차와 두대의 3호 전차가 격파 당했다. 이보다 좀 더 큰 규모의 교전은 라제쿠프 근교에서 6월 23일에 벌어졌다. 3호 전차를 장비한 11 기갑사단의 2개 기갑 대대는 제 10 전차 사단의 공격을 받았다. 독일측은 46대의 BT-7 전차를 격파했지만 소련 32 전차사단 소속의 T-34들의 공격을 받아 많은 전차를 잃었다. 6월 26일에 소련군은 끼예프로 진격하는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서 기갑부대를 대규모로 집결시켜 반격을 시도했다. 1941년에 벌어진 최대규모의 기갑전에서 랴비셰프의 제 8 기계화 군단과 까르페조의 15 기계화 군단의 잔존 전력, 블라소프의 제 4기계화 군단의 일부 전력, 그리고 꼰드루셰프의 22 기계화군단은 브로디와 두브노일대에서 독일 11 기갑사단과 16 기갑사단의 측면을 공격했다. 한편 전력이 약한 로꼬소프스끼의 제 9 기계화 군단과 페끌렌꼬의 19 기계화군단, 치스챠꼬프의 24 기계화 군단은 대부분 주무장으로 “새총”을 달고 있는 구식 T-26과 BT를 장비하고 있었으며 독일 기갑부대의 측방을 엄호하는 독일 보병사단들을 상대했다. 이 전투에 참가한 독일군 부대의 사단사는 이날의 전투가 매우 치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력한 소련군의 전차는 독일군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T-34와KV는 특히 37mm 대전차포로 무장한 독일 보병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독일군의 37mm 포는 표준 교전 거리에서 소련군의 신형 전차에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 했으며 신통치 못한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 전차 부대의 공격에 대해 독일군은 사단 포병의 대구경 유탄포와 88mm 고사포로 대응했다. 독일 기갑부대역시 보병부대와 유사한 곤란을 겪었다. 이때문에 독일 전차병들은 최대한 근접하여 공격했다. 3호전차의 주포는 T-34를 측면에서 300~400m정도 거리에서 격파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소련군은 우수한 전차를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반격에 실패했다. 독일측은 16 기갑사단만 단독으로 293대의 소련 전차를 격파했다. 전투가 끝난뒤 소련군 기계화 군단은 전투 시작당시의 20% 정도의 전력만 남아 있었다. 우끄라이나의 붉은 군대 기갑국 감독관인 모르구노프 소장은 이 브로디 전투가 끝난지 얼마 뒤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전차 회수차량과 예비부품의 부족에 T-34와 KV의 기계적 결함, 승무원의 훈련 부족이 결합합해서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적의 대전차 방어선에 대한 정찰은 효과적이지 않았습니다. 각 부대는 행군중에도, 전투중에도 끊임 없이 적 공군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전선을 향해 800~900km 씩 이동하면서 우리 공군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포병과의 합동 작전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 했습니다. 게다가 작전 지역이 숲과 습지로 전차의 기동에 불리했습니다. 적의 공격은 매우 강력했습니다. T-34와 KV전차는 대전차 철갑탄이 부족했습니다. 이때문에 기계화군단의 손실이 매우 높았으며 막대한 장비 손실을 입게 됐습니다.” 
1941년 당시의 기술 수준은 오늘날과 비교해서 낮은 수준이었다. 소련의 신형 전차들의 부품 수명은 매우 낮았다. 소련의 전차 엔진은 평균 100시간 정도 사용하면 교체해야 했다. T-34전차는 800km정도 도로주행을 하면 기계적 한계에 도달했다. 1941년 당시 대부분의 기계화군단은 이 이상의 거리를 주행해야 했다. 이런 기계적 결함은 정비 인력의 부족으로 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신형 전차를 제대로 다루는 인원은 대대장 정도에 불과했다. 소련측 기록에 따르면 1941년 6월의 전투에서는 경험 많은 장교가 많이 전사했다. 소련 전차 승무원들은 전차가 고장나면 그냥 버리고 달아났다. 그때문에 장교들이 전차를 회수하기 위해 전투 지역으로 들어가야 했으며 많은 수가 전사했다.
다시 제 32 전차 사단의 사례를 보면 그들이 전투 중에 겪은 문제는 새로 편성된 부대들이 흔히 겪는 어려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이 사단은 두브노-브로디 전투 이전에는 이렇다 할 전투를 거의 겪지 않았지만 매우 빨리 진격하는 독일군 기갑 사단을 요격하기 위해서 강행군을 해야 했다. 전쟁 첫번째 달에 32 전차 사단은 49대의 KV전차중 32대를 잃었고 173대의 T-34 전차중 146대를 잃었으며 전차병중 103명이 전사하고 259명이 부상당했다. 전차 손실중 거의 절반이 기계적 결함이나 부품 부족, 전차 회수 차량의 부족으로 인한 것 이었으며 손실된 전차중 10% 미만이 회수되어 수리를 위해 보내졌다. 전체 손실중 불과 30% 만이 전투로 인한 손실이었으며 10%는 수렁에 처박혀서 상실되었다. 사단은 총 113대의 독일 전차와 96문의 대전차포를 격파했다고 보고했지만 독일군의 전투 보고와 대조해 볼때 이건 터무니 없는 과장이다. 이 사단의 전력과 이 사단이 거둔 성과를 비교해 보면 당황스럽다. 이사단은 매우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전에서 거둔 성과는 형편 없었다. 소련 기갑부대의 전반적인 문제점은 바바로사 작전 기간중 T-34를 날이 무딘 칼로 만들어 버렸다. 

미숙한 기술

1941년에 T-34가 보인 많은 문제점은 확실히 이 시기 소련군의 전차 사단과 기계화 군단 전체어 만연해 있던 문제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술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T-34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비해 문제가 많았다. 독일측이 Char B-1과 T-34, KV에 대해 우세했던 이유는 독일 전차의 포탑 배치였다. 3호나 4호 전차 같은 독일 전차는 3인용 포탑이었다. 각 전차는 전차장과 포수, 장전수가 타고 있었다. 프랑스군의 Char B-1은 1인용 포탑이어서 전차장이 1인 3역을 해야 했다. 소련군의 전차는 둘다 2인용 포탑이어서 전차장이 포수를 겸해야 했다. T-34의 2인용 포탑은 실전에서, 특히 전차끼리의 격돌에서 많은 문제점을 일으켰다. 프랑스나 소련은 소형 포탑이 무게를 줄이면서도 방어력을 높일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포탑이 크다면 방어해야할 면적이 많이지기는 한다. 이런 소형 포탑은 순전히 기술자들의 관점에서 만들어 진 것이었으며 일선 부대의 현실을 무시한 것 이었다. 그렇지만 2차 대전 이전에는 사실상 대규모 전차전이 없었으므로 그다지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소련 전차의 전차장들은 포탑내의 전투 배치와 형편없는 시야, 포수의 역할을 겸해야 하는 것때문에 상황 판단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실전에서 전차장들은 사격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모했으며 이때문에 전차장이 해야할 목표 탐색, 다른 전차와의 합동등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이것이 소대, 나가서 중대급 작전이 된다면 해당 지휘관 전차의 전차장에게는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 졌다. T-34의 광학 장비는 독일군의 그것에 비해 형편없이 뒤떨어 졌다. T-34의 전차장은 독일 전차에 있는 우수한 큐폴라가 없어서 차내에서 좋은 시야를 확보할 수 가 없었다. 그리고 독일 전차와 달리 포탑 해치가 너무 커서 관측을 위해 차체 밖으로 머리를 내미는 것도 위험했다. T-34의 해치는 앞으로 열게 되어 있어서 전차장은 몸 전체를 차 밖으로 내밀고 포탑에 걸쳐 앉아야 했다. 
그리고 1941년 여름에는 소수의 소련 전차만이 무전기를 장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은 모든 중형 전차가 무전기를 장비하고 있었다. 1941년 여름에 소련군은 중대장 전차 까지만 무전기를 지급했는데 그 이유는 소련은 신뢰성 높은 무전기를 대량으로 생산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소련군 전차 중대장은 전투가 벌어질 경우 사실상 그의 중대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규정상으론느 깃발을 이용해서 신호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이건 거의 공상적인 생각이었다. T-34는 시야가 불량한데다가 전차장들은 포를 사격하는데 정신을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중대장이 깃발을 흔드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포탑이 2인용이었기 때문에 무전기는 차체에 탑재해야 했으며 전차장이 무전기를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독일 전차병들은 실전에서 소련 전차와 교전해 본 뒤 이 문제점을 지적했다. 독일 전차병들이 보기에 소련 전차 부대는 무질서하게 흩어져서 전투를 하거나 엄마닭과 병아리 처럼 옹기 종기 몰려 다녔다. 소련 전차 소대는 소대장의 지휘하에 단일 목표를 집중 공격할 수가 없었다. 그결과 소련 전차 소대는 화력의 집중을 달성할 수 없었다. 독일 전차병들은 T-34가 전투시 반응이 매우 느리다는 것을 종종 지적했다. 1941년 여름의 전차전에서 독일 전차병들은 T-34가 한발 발사할때 세발 이상을 쏠 수 있었다. 소련이 이때의 문제점을 수정하는데는 거의 2년이 넘게 걸렸다. 
바바로사 작전 기간 동안 T-34가 보인 실망스러운 전과는 2차 대전당시 다른 신무기들과 비교해 특별히 구별 되는 것은 아니다. 충분한 훈련과 우수한 지휘관, 뛰어난 전술이 없다면 신기술을 충분히 활용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