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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요일

Panzer Krieg Vol 1. German Armoured Operations at Stalingrad

제이슨 마크(Jason D. Mark)의 신작 Panzer Krieg Vol 1. German Armoured Operations at Stalingrad를 막 받아서 훑어보는 중 입니다. 이 책은 원래 Stalingrad: Graveyard of the Panzers라는 제목으로 기획되었다가 집필 과정에서 훨씬 터프한(!!!) 제목으로 바뀌었습니다.

Panzer Kreig은 103전차대대, 129전차대대, 160전차대대 등 1942년 하계공세 당시 독일군 차량화보병사단에 배속되었던 전차대대들의 작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책의 구성은 제이슨 마크가 기존에 냈던 다른 책들과 동일합니다. 현존하는 1차 사료와 증언 구술자료를 극한으로 활용한 미시적인 서술이 이 저작의 특징입니다. 특히 각 부대의 '최후의 생존자'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것은 마크의 저작에서 일관적으로 다루는 내용이지만 읽는 이들에게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안겨줍니다. 책의 부록으로 실려있는 각 대대별 가동 전차 현황표는 제이슨 마크의 치밀한 연구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NARA에 소장된 독일군 노획문서 사본을 철저하게 분석해서 하루 단위의 전차 보유 변동을 추적하는데서 읽는이를 완전히 압도합니다. 현 시점에서 입수 가능한 야전군, 군단, 사단의 문서를 철저하게 분석했다는 것을 주석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43년 이후 독일군 기갑사단에 대해 비슷한 시도를 했던 Kamen Nevenkin의 Fire Brigades: The Panzer Divisions 1943 - 1945가 기갑총감부 문서철 단 하나만을 활용해서 월별 통계를 정리하는데 그쳤다는 점을 상기하면 비록 시간적 범위는 짧을지언정 제이슨 마크가 연구에 투입한 노력이 얼마나 되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단점이라면 A4판형으로 전작들에 비해 훨씬 커졌다는 것을 꼽겠습니다. Leaping Horseman 출판사에서 내는 책들은 고급종이를 써서 책이 무거운게 사실이지만 이번에는 판형도 그냥 들고 보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커졌습니다. 책장에 꽃아 넣는 것도 일이로군요. 물론 책에 수록된 수많은 기록사진들을 생각하면 판형이 커진 것은 어쩔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우 훌륭한 연구입니다. 앞으로도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인용하게 될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2014년 4월 13일 일요일

러시안 소설

데이빗 글랜츠David Glantz의 역작인 스탈린그라드 3부작의 마지막 3부의 출간 소식을 접한 뒤 제2권을 한번 더 훑어봤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나온 글랜츠의 저작 중에서 러시아와 독일 자료의 교차검증이 가장 잘 이루어진 저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꽤 흥미로운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교차 검증을 통해 소련이 독일군의 전력이나 피해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을 여러 차례 지적하고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실소를 자아낼 정도로 그 정도가 심각합니다. 물론 유동적인 전장 상황에서 적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니 이것만 가지고 소련 자료들을 엉터리라고 폄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쨌든 꽤 흥미로운 지적들이니 몇가지 예를 인용해 보지요.(원서의 주석은 일단 생략합니다.)



대부분의 소련과 러시아 문헌은 제62군의 병력 54,000명과 제64군의 병력 36,000명을 합쳐 총 90,000명의 소련군이 독일군 170,000명을 상대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수치에는 제14기갑군단을 포함해 독일군이 시가전에 투입하지 않은 부대를 포함하고 있다. 스탈린그라드 시가지를 공격한 바익스Maximilian Freiherr von Weichs의 충격 집단의 병력은 80,000명으로 전차와 돌격포 100여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중략)

러시아 문헌들은 대부분 독일 제6군이 소련 제62군에 맞서 스탈린그라드 지구에 500대의 전차를 투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9월 13일 기준으로 스탈린그라드를 공격한 독일군 부대는 제24기갑사단과 제14기갑사단을 합쳐 전차 30~40대, 제29차량화 사단의 전차 20대를 포함해 100대 남짓한 기갑차량을 보유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David M. Glantz, Armageddon in Stalingrad : September-November 1942,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9), pp.1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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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의 추산에 따르면 파울루스의 독일 제6군은 증원병력을 받아 제62군을 공격하는 충격집단의 규모를 병력 90,000명으로 늘리고 여기에 2,300문의 야포와 박격포, 전차와 돌격포 300대, 제4항공군에 소속된 항공기 1,000대의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소련군이 추산한 통계는 신뢰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제29차량화보병사단과 제60차량화보병사단, 제16기갑사단을 집계에 포함하고 있는데 이때 이 부대들의 병력 대부분은 스탈린그라드 시가지가 아니라 스탈린그라드 북쪽과 북서쪽의 돈강과 볼가강 사이의 지역, 그리고 스탈린그라드 남쪽의 호수 지역에서 소련군을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제14기갑사단은 일일 평균 50대 정도의 전차만 가동 가능한 상태였으며 제24기갑사단은 30대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장 지구에서 소련군을 상대한 독일 제6군의 충격집단에 소속된 기갑전력은 제244돌격포 대대와 제245돌격포대대의 돌격포를 합쳐도 100대가 채 안되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소련과 러시아 문헌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시가지에 투입된 독일군에  제76보병사단, 제29차량화보병사단, 제60차량화보병사단, 제16기갑사단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들 사단에 배속된 부대 중에서 스탈린그라드 공장지구에 대한 최후의 공격에 투입된 부대는 사실상 없다. 그리고 독일 제6군의 보병사단과 기갑사단에 소속된 보병과 기갑척탄병은 심각하게 소모되어 제6군의 일선 전투 병력은 80,000명 미만으로 소련 제62군의 55,000명과 비슷하거나 이것 보다 더 적은 수준으로 추산된다. 이것을 뒷받침 하는 근거로, 독일 제6군은 10월 17일 기준으로 총 병력을 334,000명으로 보고하고 있는데 이중에서 일선의 전투 병력은 고작 66,549명으로 이중 상당수는 스탈린그라드 북쪽과 남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Glantz, ibid., pp. 355~356


사실 이시기 소련군의 야전부대는 정보 수집과 판단 능력이 매우 떨어지는 편이었고 전투가 계속되면서 정보 수집과 판단 능력이 조금씩 향상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문제는 추이코프라는 인물의 회고록 입니다. 제2권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시가전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보니 제62군 사령관 추이코프의 회고록이 집중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소련군의 공식 기록 보다도 과장이 심하고 몇몇 부분에서는 노골적인 왜곡으로 보이는 부분까지 있습니다. 전쟁 당시 소련군 야전부대의 정보 분석은 실전 상황에서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잘못된 분석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이해해 줄 수가 있는데 추이코프 회고록은 그런 식으로 변호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9월 말에 있었던 노동자 주택단지를 둘러싼 전투에 대한 추이코프의 회고에 대해 글랜츠는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9월 27일 부터 28일까지) 제24기갑사단의 에델샤임 전투단과 빈터펠트 전투단은 진격하면서 포로 280명을 잡고 전차 5대, 대전차포 9문, 대전차소총 32정, 박격포 7문, 화염방사기 2개, 자폭견 4마리를 격파, 사살하거나 노획했으며 전사자 25명과 부상자 164명의 손실을 입었다. 제24기갑사단이 획득한 전리품이 얼마 되지 않았던 이유는 이 지역을 방어하는 소련 제62군이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제24기갑사단은 9월 28일의 전투에서 총 28명의 전사자와 94명의 부상자를 냈다. 
(중략)

9월 28일의 전투는 매우 격렬했는데, 제100경보병사단은 전사자 70명, 부상자276명, 행방불명 10명이 발생했으며 제295보병사단은 전사자 10명과 부상자 44명이 발생했다. 


(중략) 

추이코프는 9월 28일의 전투에서 독일군이 “최소한 1,500명의 전사자”와 “30대 이상의 전차를 완전손실”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마예프 쿠르간의 비탈에만 독일군의 시체 500구가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추이코프는 제62군의 손실이 심각했음을 인정하고 있는데 포포프의 제23전차군단은 전사자와 부상자를 626명이나 냈으며, 바튜크의 제284소총병사단은 300명의 인명 손실을 당했다. 고리쉬늬의 제95소총병사단은 “한줌의 병력만 남은” 상태에 불과했다. 

Glantz, ibid., pp. 262~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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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7일 오전 늦게 제389보병사단은 제24기갑사단의 1개 전차중대와 제245돌격포 대대의 돌격포 10대의 지원을 받으며 북쪽으로 공격을 시작해 제37근위소총병사단의 방어선 중앙과 우익을 공격했다. 제389보병사단의 2개연대에 소속된 여러개의 대대급 전투단들이 베르후네우딘스카야 거리에서 부터 슈넬헤프터 블록의 북서쪽의 철도 지선을 따라 공격을 감행했고, 3분의 1 정도의 병력은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의 서쪽을 직접 공격했다. 독일군은 이 공격에 전차 20여대의 지원을 받는 2개 연대 병력만 투입했지만 추이코프는 독일군의 전력을 다음과 같이 과장했다. 

“이 공격은 전면적인 것이었다. 적은 베르후네우딘스카야 거리에서 2개 사단과 500대 이상의 전차를 투입해 공격해왔다. 첫번째 공격은 격퇴했다. 졸루데프가 지휘하는 사단은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독일군은 예비대를 동원해 여러차례에 걸쳐 공격을 계속했다. 적은 치열한 전투 끝에 이날 저녁 아군의 방어선을 돌파했고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의 한 블럭을 점령했으며 경기장 근처까지 밀고들어왔다. 스타호노브체프와 스쿨프투르늬 공원은 아군이 아직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제62군의 일지는 추이코프의 회고록 보다는 정확한 편으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디젤나야, 바리카디 마을, 107.5고지 일대에 집결한 적은 대규모의 병력(2개 사단과 전차 80~90대)를 동원하여 오전 11시 30분경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 방향으로 총공격을 해왔다.제37근위소총병사단과 제84전차여단은 전차 45~50대의 지원을 받는 적 2개연대와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적은 베르흐네-우딘스크와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 그리고 베르흐네-우딘스크와 지토미르스크 등 다른 축선에서도 공격해왔다. 적은 첫번째 공격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고 격퇴되었다.” 


(중략) 

붉은 군대 총참모부의 일일작전요약에서는 추이코프가 보고한 10월 7일의 전투 상황을 반영하고 있지만 독일군의 기갑전력에 대해 추이코프가 주장한 내용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62군은 3개 보병사단과 1개 차량화 사단으로 구성된 적을 상대로 격렬한 방어전을 전개했다. 적은 오전 11시 30분경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로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제37근위소총병사단, 제84전차여단, 그리고 제112소총병사단의 잔여 병력은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와 지토미르스크를 공격하는 적에 맞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10월 7일이 끝나갈 무렵 적은 수르코프 거리와 우스튜즈스카야 거리의 끝, 지토미르스크와 스쿨프투르늬 공원 외곽에 도달했다. 이날 4개 대대 규모의 적 병력과 전차 16대를 섬멸했다. 적은 더이상의 진격하지 못했다. 제42소총병여단은 스쿨프투르늬 공원 북쪽의 두개의 건물과 스쿨프투르늬 공원 북부를 잇는 선에 도달했다. 제62군에 소속된 다른 부대의 위치는 동일하다.” 

추이코프가 과장한 독일군의 규모가 어떻던 간에, 예네케가 지휘하는 제389보병사단은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 남쪽의 소련군 방어선을 뒤로 밀어냈다. 하지만 제51군단의 전선을 균일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10월 7일에 전개된 짧지만 격렬한 전투로 제24기갑사단은 장교와 병사 51명이 부상당했고, 제389보병사단은 전사 20명, 부상 45명의 피해를 냈다. 

Glantz, ibid., pp. 338~340


추이코프는 10월 중순의 트랙터 공장 전투의 결과에 관해서도 비슷하게 과장을 하고 있습니다.



추이코프는 독일 제51군단이 3,000명 이상의 전사자를 냈다고 추산했지만 실제로 독일군이 10월 14일에 입은 손실은 전사자와 부상자, 실종자를 합쳐 538명이었다.  

Glantz, ibid.,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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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은 10월 17일의 전투 결과를 평가했는데 독일군이 우세했던 것이 확실하다. 독일군은 바리카디 공장의 서쪽과 북쪽에서 소련 제62군의 방어선을 돌파했으며, 구르티예프의 제308소총병사단을 섬멸하고 류드니코프의 제138소총병사단이 지리멸렬하여 바리카디 공장으로 패주하게 만들었다. 제51군단의 보고에 따르면 투항자 103명을 포함해 860명의 소련군이 포로로 잡혔으며 막대한 양의 무기와 장비가 노획되었다. 추이코프는 제51군단의 전차 40대를 격파하고 독일군 2,000명을 사살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독일군의 손실은 576명에 불과했다. 손실 내역은 전사 91명, 부상 469명, 행방불명 16명이었다. 하지만 추이코프가 주장한 독일군의 전차 손실은 실제와 비슷하다. 10월 17일이 끝날 무렵 제24기갑사단은 전투 시작 당시 가동가능했던  전차 33대 중 4대만 남아 있었으며, 제14기갑사단은 33대 중 19대만 남아 있었다. 

Glantz, ibid., pp. 418~419.


인용한 것 이외에도 추이코프가 전과를 과장하고 전황을 왜곡하는 사례가 몇건 더 실려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책을 직접 읽어 보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러시아 역사가인 발레리 자물린은 “프로호로브카 : 신화의 기원과 전개과정”이라는 글에서 소련군 지휘관들이 자신들의 졸렬한 지휘를 변명하기 위해서 독일군의 전력을 과장하고 승리하는 경우에는 전과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독일군의 피해를 과장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비판하는데 추이코프도 예외는 아닌 것 입니다.

2010년 4월 11일 일요일

기묘한 인생역정

슬라브 군사연구(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0권 4호에 실린 Timothy P. Mulligan의 Escape from Stalingrad 라는 소논문을 읽었는데 이 글은 2차대전 중 독일군과 소련군 양 진영을 오락가락한 독일계 소련인들의 이야기도 다루고 있었습니다.

꽤 흥미로운 사례가 있는데 첫 번째 사례는 프리드리히 지몬(Friedrich Simon) 이라는 사람입니다. 지몬은 1942년 4월 소련군에 징집되어 제118소총병사단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리고 7월의 전투에서 독일 제14기갑사단에 포로가 되었는데 독일군에 보조원(Hilfswillige)으로 자원해서 사단본부의 취사병으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들 잘 아시다 시피 제14기갑사단은 스탈린그라드의 포위망 안에 갇혀 버립니다. 지몬은 1943년 1월 27일에 부상을 당해 야전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소련군의 포로가 됩니다. 그런데 이때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이 많은 보조원들이 그랬던 것 처럼 소련군 군복을 그대로 입고 있어서 전투에서 포로가 된 것이라고 둘러댈 수 있었던 것 입니다. 지몬은 다행히 목숨은 건졌는데 그 대신 독일군에 항복한 '죄'로 고생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669소총병연대에 배속되어 오룔 지구에 투입됩니다. 669소총병연대는 1943년 8월의 전투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지몬은 다시 한번 독일군에 항복합니다. 지몬은 두 번째로 항복한 다음 독일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고 독일군에서 통역병으로 복무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사례인 에듀아르트 쉘(Eduard Schell)은 1940년 1월 소련군에 징집됐습니다. 그리고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인 1941년 7월에 독일군 제29차량화보병사단에 포로가 되어 지몬과 마찬가지로 보조원이 되었습니다. 쉘은 15보병연대 2대대에서 통역으로 복무했으며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이 항복했을 때 포로가 되었습니다. 쉘은 보조원으로 꽤 오래 근무했기 때문에 독일군 군복을 입고 있어서 지몬과 같이 적당히 둘러대고 위기를 모면할 수 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쉘의 운명이 이쯤에서 끝장났다면 역사가들의 눈에 띄일 수가 없었겠지요. 쉘은 스탈린그라드 시내에서 잘 아는 소련인을 만나 소련 군복과 가짜 증명서를 발급받고 다시 소련군으로 돌아갑니다(;;;;) 쉘 또한 1943년 8월에 다시 독일군에 항복합니다. 그런데 이때도 운이 좋았던 것이 스탈린그라드 포위망에서 탈출한 쉘을 알고 있는 독일군 장교 한명이 쉘의 신원보증을 해 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운이 좋은 사례는 그야말로 극소수였습니다. 제6군에 소속된 5만명 가량의 보조원 대부분은 포위망 안에서 사망하거나 포로수용소로 끌려가 반역자로서 처벌받았으니 말입니다.

2009년 10월 11일 일요일

동부전선의 이탈리아군 장비 상태에 대한 독일군의 평가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1942년 하계공세를 준비하고 있던 1942년 6월, 이탈리아군에 배속된 독일군 연락본부(Verbindungskommandos)는 이탈리아군의 장비현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2. 장비상태(Ausrüstung)

a) 화기 및 장비
: 보병용 소화기 - 기관총과 박격포는 쓸만하다. (이탈리아군의) 기관단총은 각 부대에 보급된 수량이 적다.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부족한 수량은 보충되었다.
: 포병 - 사단포병의 75mm와 100mm포는 사정거리와 위력이 부족하다. 군단포병의 105mm포(사정거리 13km)는 훌륭한 포이다. 단점은 탄도가 곧은 편이라는 것이다. 현재 포신은 과도하게 사격한 상태이다. 교체할 포신이 수송중에 있다. 대전차용 탄약이 전혀 없다. 75mm와 20mm 대공포는 훌륭한 장비이나 마찬가지로 대전차용 탄약이 전혀 없다.
: 대전차포 - 보병연대와 군단 직할, 사단 직할의 대전차 부대는 공통으로 47mm를 장비하고 있다. 포의 위력에 있어 독일군의 구형 37mm포에 상응한다. 포구초속은 360m/sec이며 유효사거리는 700m라고 말해지고 있지만 실제로는200m에 불과하다. 소련군의 중형 전차 및 중전차에 대항할 장비가 부족하다. 75mm 대공포는...(후략)
: 공병장비 - 목재부교는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에서 성능을 입증했다. 독자적인 건설 방법으로 통과중량(Tragfähigkeit)을 5-10톤에서 7-13톤으로 증가시켰다.
: 통신장비 - 수량과 성능 모두 불충분하며 유선전화기의 경우 구식이고 습기에 민감한데다 케이블도 부족하다. 무선통신장비는 부분적으로 현대화되어있고 성능도 좋은 편 이지만 야전에서의 유용성이 떨어진다.

b) 차량현황
: 현재 기동성이 심각하게 감소된 상태이다. 이탈리아군의 차량 가동 현황은 다음과 같다. 쾌속(Celere)사단 75%, 파수비오(Pasubio)사단과 토리노(Torino)사단은 35~40%. 모든 정비부대를 통합하고 현재 보충용 차량을 배치하는 방법으로 (군수참모의 견해에 따르면) 2개 사단의 차량가동율을 3주 이내에 15~20% 정도 상승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밖에 현재 이탈리아군은 차량화된 수송부대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새로 배치된 차량 : 매우 좋은 인상을 주고 있다. 더 많은 수송부대가 (이탈리아) 8군의 차량수송에 투입되고 있다. 보병부대의 차량인 1톤 트럭(LKW)을 수송용차량으로써 평가하면 강력한 엔진을 가지고 있으나 야지주행능력은 굴곡이 없는 지형에 한정되어 있다. 2륜 오토바이와 3륜 오토바이는 훌륭한 장비이다. 화물차의 대부분은 디젤을 사용하고 있으며 가솔린을 사용하는 차량은 일반적으로 반궤도차량, 고기동 트럭(화학대대에 배치된), 트레일러(Karette), 병력수송차량 및 오토바이 등 [으로 제한되어 있다] 평상시의 소모는 2/3이 디젤이고 1/3이 가솔린이며 모든 차량의 운용에는 V.S*가 1/2에서 1/2이다.

c) 마필현황

각 기병연대와 마필화 포병연대의 마필 현황은 (편제의) 50% 수준이다. 보충용 마필이 도착하는 중이다. 보병연대의 노새는 마찬가지로 (편제의) 50%이다.

d) 피복

정상적이다. 동계 피복은 대부분 항공수송을 통해 적시에 도착하였다. 매우 훌륭하다.(Sehr Zweckmäßig) 하계피복은 상의만이 확보된 상태이다.1)
*1V.S.(Verbrauchssatz)는 해당 부대의 전 차량이 100km 이동할 수 있는 연료량을 뜻함.

독일군의 평가는 이탈리아군의 고질적인 약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화기의 부족, 통신수단의 부족, 수송수단의 부족.

이 세가지 모두 현대 전쟁에서 있어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고 특히 기동전이 중심이었던 동부전선에서는 그야말로 중요한 요소였지요. 불행하게도 이탈리아군은 이 모든 것을 결여하고 있었습니다. 피복상태는 양호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옷이 좋다고 싸움을 잘 하는건 아니죠;;;;

동부전선에 파견된 이탈리아군은 이 시점에서는 제8군으로 개편되어 있었습니다. 인용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단들은 1941년 파견된 이탈리아 러시아원정군단, CSIR(Corpo di Spedizione Italiano in Russia)에 소속되어 있던 부대들로 고참사단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CSIR에 배속된 사단들은 제가 예전에 쓴 '동부전선의 이탈리아군'에서 언급했듯 명칭상으로는 모두 그럴싸한 차량화사단(Divisioni autotrasportabile), 쾌속사단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명목상으로는 차량화 사단이었던 파수비오 사단과 토리노 사단은 소련으로 출동할 당시 부터 말로만 차량화였고 보병연대는 도보 부대였다고 하지요.2) 어쨌든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될 당시에는 소련군이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군의 이런 약점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이탈리아군은 키예프 포위전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했으며 스탈리노를 점령하는데도 꽤 기여를 해서 클라이스트 장군도 호평을 했다고 하지요.3)

하지만 1942년으로 접어들면서 이런 약점은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이탈리아군은 1941/42년의 겨울 방어전에서도 꽤 괜찮은 성과를 냈지만 상당한 장비를 손실했고 이 때문에 원래부터 좋지 않던 사단들의 장비상태도 더 나빠졌다는 점 입니다. 독일군은 이탈리아군이 동부전선의 작전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1941년에 무솔리니가 이탈리아군을 추가로 파병하겠다고 제안했을 때 수송능력의 부족등을 이유로 거부한 바 있었습니다.4) 그러나 잘 아시다 시피 독일은 1941/42년 겨울에 큰 타격을 받아 어쩔 수 없이 하계공세 준비를 위해 이탈리아 등 동맹국들에게 추가 파병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탈리아가 추가로 파병한 사단들은 1941년에 파병한 사단들에 비해 장비면에서 나을것이 없는 부대들이었고 이러한 부대들은 1942/43년 겨울에는 소련군의 반격에 그야말로 철저하게 박살이 나게 됩니다.

※소련군의 동계공세 당시 이탈리아군의 장비 현황에 대해서는 '동부전선의 이탈리아군'에 간략하게 정리해 놓았습니다.

특히 위에서 언급했듯 차량을 포함한 기동수단의 부족은 공격 보다 방어전에서 결정적인 약점이 됩니다. 알피니 군단과 같은 정예부대는 전력의 열세에도 분전했지만 장비의 열세를 만회할 수는 없었습니다. 일반 보병사단이었던 라벤나(Ravenna) 사단은 1942/43년의 동계전투에서 야포를 포함한 각종 장비를 90%이상 상실했습니다.5) 만약 충분한 수송/견인수단이 확보되어 있었다면 피해를 조금 더 줄일 수 있었을 것 입니다. 수송수단의 부족은 장비 뿐 아니라 병력손실을 크게 만든 요인이기도 했습니다. 소련군이 12월 25일에 알렉세예보-로소브스코예를 차단하자 후퇴하던 이탈리아군은 와해되어 1만5천명 이상이 생포되었습니다.6) 독일군도 차량 등 수송수단의 약화가 심각해진 1943년 이후로는 비슷한 경우가 많아집니다.

이탈리아 제8군이 동계전투에서 괴멸된 뒤에도 이탈리아 측은 최소한 이탈리아군 1개 군단은 동부전선에 잔류시키고자 했다고 합니다.7) 그러나 결국 이탈리아군은 동부전선에서 발을 빼게 됩니다. 이 무렵이 되면 이탈리아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었으니 말입니다. 1943년으로 접어들면 미영연합군이 이탈리아 본토로 침공해 오기 시작하지요. 하지만 이탈리아의 빈약한 공업능력을 고려해 본다면 이탈리아가 항복하지 않은 상태에서 1개 군단을 동부전선에 잔류시켰다 하더라도 그 전력은 1941년의 CSIR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1) 'Bericht des Deutschen Verbindungskommandos über das italienische Expeditionskorps vom 9. Juni 1942', Thomas Schlemmer(Hrsg), Die Italiener an der Ostfront 1942/43 : Dokumente zu Mussolinis Krieg gegen die Sowjetunion, Oldenbourg, 2005, ss.95~96에서 재인용.
2) Gerhard Schreiber, 'Italiens Teilnahme am Krieg gegen die Sowjetunion', Stalingrad, Piper, 1992, s.259.
3) Richard L. DiNardo, Germany and the Axis Powers : From coalition to Collaps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p.127.
4) DiNardo, ibid. p.129.
5) 'Gefechtsbericht des Deutschen Verbindungskommandos bei der Division "Ravenna" vom 20.März 1943', Thomas Schlemmer(Hrsg), Die Italiener an der Ostfront 1942/43 : Dokumente zu Mussolinis Krieg gegen die Sowjetunion, s.123에서 재인용.
6) Peter Gosztony, Hitlers Fremde Heere : Das Schicksal der nichtdeutschen Armeen im Ostfeldzug, Econ Verlag, 1976, s.319.
7) DiNardo, ibid. p.155.

2008년 10월 11일 토요일

김홍일 장군의 원대한 "建軍" 구상

‘이청천 장군의 원대한 "建軍" 구상’에 이어지는 속편 되겠습니다.

1949년에 출간된 『국방개론(國防槪論)』을 읽다 보니 책의 후반부에 통일 이후의 군사력 증강에 대한 김홍일 소장의 구상이 나와 있었습니다. 기갑사단과 차량화사단의 편성 등 흥미로운 내용이 있어서 해당 부분을 한번 발췌해 봅니다.

오래된 책이다 보니 맞춤법을 요즘 사용하는 언어에 가깝게 고쳤습니다.

먼저 우리나라는 육군국 일까, 해군국 일까, 아니라면 육해군병진국 일까.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나라는 해안선이 면적에 비하여 과장(過長)함으로 해군국이 될 소질을 가졌다. 그러나 우리는 해외식민지를 가지지 못하였을 뿐더러 장래에도 가질 희망이 박약하다. 인국(隣國)인 소련, 중국이 모두 육군국 이요, 강대한 해군국 이던 일본도 패전으로 다시 해군재건이 불능케 되었다. 이것으로 보면 우리에게 가장 위협이 많은 것은 육군이매 우리는 육군을 주로, 해군은 보조로 국방군을 건설해야 할 것이다.

육군은 공세적 작전을 취하야 적을 국내로 들이지 않고 전장을 국외로 정해야 하겠음으로 중급장비사단의 1만2천명을 1개 사단으로 하고 최소 상비군 15개 사단은 있어야 한다. 그 중에서 만주와 시베리아의 대평원작전에 최소로써 3개 장갑사단과 3개 모터화사단이 필요하고 국경 산악지대작전에 2개 산악사단이 요구된다.
국력에 비하여 강대한 육군은 짧은 시일 안에 편성키 곤란함으로 통일 전에 남한에서 우선 강고한 기초를 세우고 통일 후에는 3, 4년 예산으로 수보(遂步) 건설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얼마만한 물자와 경제가 필요한가, 그 개념으로 보통 1개 장갑사단의 장비를 열거해 본다.

차량
輕탱크 287량
中탱크 110량
정찰차 276량
運兵트럭 28량
이륜 모터싸이클 408량
삼륜 모터싸이클 201량
화물트럭 1000량

무기
0.30 重기관총 44정
0.30 경기관총 412정
0.50 기관포 113정
37mm 대전차포 36문
60mm 박격포 21문
75mm 평사포 8문
75mm 유탄포 24문
81mm 박격포 16문
105mm 유탄포 12문
※탱크 車上의 기관총과 화포는 計入치 않았다.

이 외에도 병원차, 수리차, 보급차 등 다수 차량이 있다.

金弘一, 『國防槪論』, 高麗書籍株式會社, 1949, 82~85쪽

이 글을 읽은 느낌은 지난번에 썼던 ‘이청천 장군의 원대한 "建軍" 구상’과도 비슷합니다. 김홍일 소장도 이청천과 비슷하게 한국의 주적은 ‘북괴’가 아니라 소련과 중국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래에 건설될 통일 한국군 15개 사단 중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6개 사단을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작전할 기계화 부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김홍일 소장이 이 글을 쓰던 1948년~1949년 초만 하더라도 남한에서는 북한 인민군은 별볼일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괴뢰들은 제껴 두고 이들의 상전인 중국과 소련을 상대할 구상을 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이것은 이청천의 구상과도 동일한 배경에서 나온 것 입니다.

다음으로 흥미로운 점은 기갑사단의 장비 문제입니다. 먼저 과도하게 기계화장비에 대한 의존이 높고 보병의 비율은 기형적일 정도로 작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2차대전 당시의 기동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나온 구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비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경전차와 중전차의 비율이 2:1라는 것 입니다. ‘이청천 장군의 원대한 "建軍" 구상’에서 이청천은 ‘차량화연대’의 경전차와 중전차 비율을 5:1로 잡고 있었는데 이것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여전히 경전차의 비중이 극도로 높습니다. 그리고 정찰용 장갑차까지 경전차에 포함시킬 경우에는 이 비율이 5:1 정도가 되는데 왜 이렇게 남한의 군사지도자들은 경전차에 집착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가 없습니다. 보병의 비중이 기형적으로 작다 보니 보병 수송용 차량은 28대에 불과한 반면 기갑장비가 많다 보니 보급용 트럭은 무려 1,000대에 달합니다. 보급에 대한 개념은 가지고 있으니 그나마 낫다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사단의 편제는 둘째치고 소련을 가상적으로 시베리아 작전까지 상정하고 있는데 고작 6개의 기갑사단과 차량화사단으로 공세작전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 구상하고 있다는 것이 좀 난감합니다. 아무래도 현대전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나온 구상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런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해방이후~대한민국 초기 한국의 군사지도자들은 거의 대부분 이런 비현실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신생국가의 군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희망찬 구상이란 점에서는 좋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군의 최고 수뇌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점은 유감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2006년 9월 24일 일요일

동부전선의 이탈리아군(재탕 + 약간 수정)

배군님 블로그이탈리아군과 관련된 재미있는 글이 올라와서 나도 한번 부화뇌동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전에 썼던 글을 아주 약간 고쳐서 재탕!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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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솔리니와 이탈리아 군부는 1941년 5월 30일에 구체적으로 소련에 대한 파병 규모를 결정했다. Gerhard Schreiber의 Italiens Teilnahme am Krieg gegen die Sowjetunion에 따르면무솔리니가 처음에 계획한 파병 규모는 1개 군단급으로 군단 사령부는 편성 당시 “Corpo d’Armata Autotrasportabile”라는 명칭을 달았고 예하에 제 9 차량화 사단“Pasubio”, 제 52 차량화 사단 ”Torino”와 제 3 쾌속사단(Divisione celere) “Principe Amedeo duca d’Aosta”을 배속 받았은 상태였다. 이중 제 9 차량화 사단과 제 52 차량화 사단은 포병연대와 사단 직할대만 차량화 되었고 보병 연대들은 도보 부대였다.
쾌속사단은 전차가 배속된 기병사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2개 기병대대로 구성된 2개 기병연대, 그리고 2개 대대로 구성된 1개 Bersaglieri 연대가 기간 전력이다. 이와 함깨 전차 1개 대대를 가지고 있었다.

1941년 7월 9일에 이탈리아 원정군은 공식적으로 “이탈리아 러시아 원정군단(Corpo di Spedizione Italiano in Russia)” - 약자로 CSIR - 로 명명됐다. 여기에 군단 직할로 제 63 “검은 셔츠” 여단과 트럭 대대 9개 등이 배속되었으며 총 병력 62,000명에 차량 5,500대, 말과 노새 4,600마리, 야포 220문과 대전차포 94문, L3/33 경전차 60대등으로 편성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육군에 덤으로 추가된 공군 병력에 대해서는 Hans W. Neulen의 Am Himmel Europas 64쪽에 잘 나와 있다. 이 책은 영어판도 있는데 영어판은 아직 못 읽어 봤다.

항공대 사령관 – Carlo Drago 대령

22 독립 전투 항공단 – Giovanni Borzoni 소령
- 359 전투 항공대
- 362 전투 항공대
- 369 전투 항공대
- 371 전투 항공대
- MC 200 51대, CA 133 3대, SM 81 2대

61 독립 정찰 항공단 – Bruno G. Ghierini 중령
- 34 정찰 항공대
- 119 정찰 항공대
- 128 정찰 항공대
- Ca 311 32대, Sm 81 1대

245 수송 비행대 – Ernesto Caprioglio 대위, SM 81 10대
246 수송 항공대 – Nicola Fattibene 대위, SM 81 10대, 1941년 11월 25일에 러시아로 이동

무솔리니의 사위이고 외무상 이었던 치아노는 독일이 최정예 부대들을 투입한 소련 전선에 겨우 반 차량화된 이탈리아군을 파병해 봐야 “가난한 이웃”정도로 취급 받을 것이 분명하다고 파병에 부정적 이었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러시아 원정군은 7월 10일부터 8월 5일까지 주둔하고 있던 Verona 일대를 출발해 러시아로 향했다. 이탈리아군 중 최초로 전투에 투입된 것은 Pasubio 사단으로 8월 11일에 전투에 투입 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원정군은 남부 전선에서 소련군의 동계 공세를 비교적 잘 막아 냈다.

추가 파병에 대한 논의는 1941년 가을에 시작되는데 10월 25일에 러시아 원정군을 15개 사단으로 증강하는 안이 검토되기 시작했다. 최종적으로 2개군단을 추가로 파병하기로 결정이 나고 1942년 4월 2일에는 제 8군 사령부가 러시아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와 함께 알피니 군단(Corpo d'Armata Alpino), 제 2 군단이 러시아로 투입됐다. 파병군의 증강과 함께 명칭은 “이탈리아 러시아 원정군(Armata Itaiana in Russia)”으로 변경 됐다. 1941년에 파병된 CSIR은 1942년 7월 9일 자로 제 35 군단으로 개칭되고 이탈리아에서 도착한 제 8 군 사령부 예하로 배속 됐다.

1941년에 파병된 사단들은 이탈리아군에서는 비교적 장비가 충실한 편 이었으나 1942년에 투입된 보병사단들은 사단 포병연대가 75mm 2개 대대와 100mm 1개 대대로 화력이 독일군 보병사단에 비해 한참 떨어졌고 사단의 대전차 전력도 1개 중대 수준이었다. 한마디로 동부전선에서 굴리기에는 확실히 모자란 전력이었다.

G. Schreiber의 글 269쪽에 따르면 이탈리아 제 8 군은 9월 말에 총 병력 229,000명에 차량 16,700대, 말과 노새 25,000마리, 오토바이 4,470대와 트랙터 1,130대, 야포 946문, 대전차포 297문, 대공포 52문, 박격포 1,297문과 L6 경전차 31대, 돌격포 15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P. Gosztony의 Hitlers Fremde Heere 217쪽에는 1942년 가을의 전력이라고 하면서 이탈리아 제 8군이 병력 227,000명에 경기관총 2,850정, 중기관총 1,800정, 박격포 860문, 20mm 대공포 225문, 야포 960문, 47mm 대전차포 380문, 76/47mm 대전차포 52문, L6 경전차 55대, 돌격포 19대, 차량 16,700대, 트랙터 1130대, 오토바이 4,470대, 말과 노새 25,000마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고 있는데 별 차이가 없는 걸로 봐서는 후자가 조금 더 뒤의 전력을 나타내는 게 아닌가 싶다. 두 자료에서 차이가 크게 나는 수치도 있는데 이건 아마 통계를 낼 때 장비 구분을 다르게 해서 그런 것 같다.

소련군의 동계 대공세 직전의 이탈리아 제 8군의 전력은 Peter Gosztony의 Hitlers Fremde Heere의 권말 부록 B에 비교적 잘 나와 있다. 여기에 따르면 1942년 12월 14일에 이탈리아 제 8군의 전력은 다음과 같았다.
아래의 부대 중 제 2 사단과 제 3 사단은 산악 사단으로 불리는데 알피니 사단과는 구별 된다. 알피니 사단은 전문적인 고산 지대 전투를 훈련 받은 부대로 독일의 “Gebirgsjager”에 해당하며 산악사단은 경보병에 가까운, 굳이 비교하면 독일의 “Jager” 사단 정도에 해당된다. 고지대에서의 작전을 위해 편성되었지만 전문적인 산악 전투 훈련은 받지 않았다.


이탈리아 제 8 군

독일 제 29 군단

제 2 보병 사단 Sforzesca
보병 6개 대대 – 전투력 “강”
포병 – 9개 포대(75mm×6, 105mm×3), 3개 포대(149mm, 군 직할대, 11월 5일 자로 사단에 배속), 3개 포대(75mm, 군 직할대, 11월 1일 자로 사단에 배속)
대전차포 – 47mm 32문, 기타 4문

제 3 쾌속 사단 Principe Amedeo duca d’Aosta
12월 14일자 기록 없음, 이 사단은 예하 전투부대들을 모두 군 직할대로 빼앗기고 소련군의 동계 대공세 당시에는 1개 자전거 연대와 사단 포병 일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 52 차량화 보병사단 Torino
보병 6개 대대 – 전투력 “강”
포병 – 9개 포대(75mm×6, 105mm×3), 3개 포대(149mm, 군 직할대, 9월 21일에 사단에 배속), 2개 포대(149mm, 제 2 군단 직할대, 8월 9일에 사단에 배속)
대전차포 – 47mm 32문, 기타 6문

제 35 군단

제 9 차량화 보병 사단 Pasubio
보병 4개 대대 – 전투력 “강”, 1개 대대 “중”, 1개 대대 “보통”
포병 – 9 개 포대(75mm×6, 105mm×3, 전투력 80%), 2개 포대(149mm, 군 직할대 11월 12일에 사단에 배속, 전투력 80%), 2개 포대(149mm, 전투력 76%), 1개 포대(210mm, 군 직할대, 11월 25일에 배속)
대전차포 – 47mm 19문, 기타 6문

검은 셔츠 여단 “1월 3일”
보병 4개 대대 – 전투력 “강”
대전차포 – 47mm 11문

이 군단에는 독일 제 298 보병사단이 배속 되어 있었습니다.


제 2 군단

제 3 보병사단 Ravenna
보병 6개 대대 – 전투력 “강”
포병 – 9개 포대(75mm×6, 105mm×3), 5개 포대(105mm, 18문, 군단 포병, 10월 13일 에 사단 배속)
대전차포 – 47mm 36문, 기타 13문

제 5 보병사단 Cosseria
보병 6개 대대 – 전투력 강, 독일군 제 318 연대 – 3개 대대 전투력 “강”
포병 – 9개 포대(75mm×6, 105mm×3), 3개 포대(75mm 10문, 10월 22일에 군으로부터 배속)
대전차포 – 47mm 40문, 기타 15문

검은 셔츠 여단 “3월 23일”
보병 4개 대대 – 전투력 “강”
47mm 대전차포 16문

이 군단에는 독일 제 385 보병사단이 배속되어 있었다.

알피니 군단

제 4 알피니 사단 Cuneense
보병 6개 대대 – 전투력 “강”
포병 - 8개 포대(75mm×6, 105mm×2), 2개 포대(75mm, 12월 1일자로 군으로부터 배속), 3개 포대(149mm, 11월 11일 자로 군단으로부터 배속)
대전차포 – 47mm 45문, 기타 36문

제 3 알피니 사단 Julia
보병 6개 대대 – 전투력 “강”
포병 – 9개 포대(75mm×6, 105mm×3)
대전차포 – 47mm 44문, 기타 6문

제 2 알피니 사단 Tridentina
보병 6개 대대 – 전투력 “강”, 기병 1개 대대 전투력 “강” → 이 기병 대대는 12월 2일에 군 직할대로 있던 기병 여단에서 배속됐다.
포병 – 8개 포대(75mm×6, 105mm×2), 4개 포대(75mm, 기병여단 소속, 12월 1일 자로 사단에 배속)
대전차포 – 47mm 40문, 기타 15문

기병여단
-제 3 기병연대 Savoia, 제 3 쾌속 사단 Principe Amedeo duca d’Aosta 로 부터 차출 → 기록 없음
-제 5 기병연대 Novara, 제 3 쾌속 사단 Principe Amedeo duca d’Aosta 로 부터 차출 → 기록 없음

Rossi 집단
-오토바이 대대 (제 3 쾌속 사단 Principe Amedeo duca d’Aosta 로 부터 차출)
-제 67 기갑 대대 (제 3 쾌속 사단 Principe Amedeo duca d’Aosta로 부터 차출, L6/40경전차 40대)
-제 13 (자주)대전차 포 집단 (제 3 쾌속 사단 Principe Amedeo duca d’Aosta 로 부터 차출, L40 da 47/32 돌격포 11대)

제 156 보병사단 Vincenza – 기록 없음, 이 사단은 예하에 포병 연대가 없는 것으로 나온다.

독일 제 27 기갑사단과 385 보병사단이 12월 16일에, 독일 제 387 보병사단이 12월 20일에 추가로 증원됐다.

여기서 “기타”로 표기한 이탈리아군 대전차포는 대부분 PaK 97/38 으로 보통 독일쪽 문헌에서 이탈리아군의 “s.Pak” 이라고 표기한 것들은 대부분 이놈이라고 한다.

David Glantz의 From the Don to the Dnepr의 부록에 딸린 이탈리아 제 8 군의 전투 서열은 이것과는 조금 다른데 기갑 대대가 Sforzesca 사단에 배속되어 있는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위의 자료는 독일측의 1차 문헌을 참고로 한 것이어서 아마도 Glantz 의 저서에 있는 전투서열이 잘못 된 것으로 생각된다. Glantz의 저서에는 이탈리아 제 2 군단에 야포 132문, 35 군단에 156문, 29 군단에 170문, 알피니 군단에 216문의 야포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소련군의 공계 공세 시점에 이탈리아 원정군 항공대의 전력은 대략 다음과 같이 편성 되어 있었다.(H. Neulen 61쪽)

21 독립 전투 항공단
- 356 전투 항공대
- 382 전투 항공대
- 361 전투 항공대
- 386 전투 항공대
- MC.200 32대, MC.202 11대

71 독립 정찰 항공단
- 38 정찰 항공대
- 116 정찰 항공대
- BR 20 17대, Ca 311 14대

246 수송 항공대 – SM.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