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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3일 화요일

게르니카 폭격 - 독일 측의 관점

오래된 떡밥이라 많은 분이 아시는 내용입니다.

게르니카(Guernica)에 대한 콘도르군단의 공습은 민간인을 상대로 한 테러 폭격으로 파시즘의 잔악상을 알리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독일 자료를 활용한 연구들이 나오기 전 까지는 민간인에 대한 테러 폭격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아래에 인용한 ‘타임라이프 2차대전사’의 기술은 그런 시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4월에 접어들자 내셔널리스트군은 북부로 이동하여 독일군의 위력을 빌린 폭격에 의해 이윽고 이목을 끌게 되는 작전을 개시했다. 콘도르병단은 소이탄과 고성능폭탄을 병용하는 새 전술의 연습지로서 바스크지방을 선정했다. 맨 먼저 폭격을 당한 곳은 빌바오와 그에 버금가는 공업중심지 두랑고였다. 그러나 결코 잊을 수 없는 폭격의 표적이 되고 이 내전 전체를 상징하는 도시가 된 것은 그 근처의 게르니카였다.

빌바오의 동쪽 30km에 위치하는 인구 약 7,000명의 게르니카는 가도와 철도의 분기점이었다. 도시에 있든 그 밖의 군사목표는 공화국군이 철퇴할 때 필요한 교량과 두개의 조그만 군수공장 뿐이었다. 1937년 4월 26일 오후 4시, 두 사람의 수녀가 경보의 종을 울리며 “비행기, 비행기”하고 외쳤다. 상공에 날아온 것은 하인켈 폭격기 한 편대였다. 그 가운데 1대가 몇 개인가의 250킬로 폭탄을 역전 광장에 모여있는 군중 속에 투하했다. “여자와 어린이의 일단이 하늘 높이 흩날렸다. 그들의 몸은 분쇄되고 발, 팔, 머리 따위가 산산조각이 난 채 곳곳에 흩어졌다.” 생존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도시를 습격한 8회를 넘는 비행기의 파상공격이 밤까지 계속되었다. 약 1600명이 살해되고 900명이 부상했다. 독일의 폭격기는 군수공장을 폭격하지 못했다. 그들의 폭격장치는 매우 원시적이었으므로 정확히 목표를 포착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외 제국의 공화국 지지자는 비무장 시민 대량살륙의 소식에 충격을 받고 무차별폭격을 비난했다.

로버트 T. 엘슨(Robert T. Elson), 『라이프 2차 세계대전 : 대전의 서곡』,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1981, 172쪽

그러나 폭격을 주도한 콘도르 군단의 보고서 등 독일 사료를 활용한 연구들이 출간 되면서게르니카 폭격은 민간인을 목표로 한 테러폭격이 아니라 통상적인 전술폭격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게르니카에 대한 폭격을 지휘한 리히트호펜(Wolfram von Richthofen)이 게르니카를 폭격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이곳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르니카를 폭격해 이곳의 도로망과 철도를 마비시킨다면 바스크군이 빌바오로 철수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습니다. 게르니카 일대에 전개한 바스크군의 병력은 23개 대대에 달했고 빌바오로 통하는 주요 도로 하나가 게르니카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만약 게르니카에 주둔한 바스크군이 제때 철수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민군이 신속히 진격한다면 바스크군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을 것 입니다. 그리고 당시 국민군 측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게르니카에는 바스크군의 제 18 로얄라(Loyala) 대대와 사세타(Saseta) 대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 두 대대가 게르니카에서 저항을 한다면 국민군의 진격을 저지하면서 주력 부대가 게르니카를 따라 후퇴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도 있을 것이었습니다.

게르니카 일대에 대한 공습은 4월 25일 시작됐습니다. 리히트호펜은 전투기 부대에 빌바오와 게르니카를 잇는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바스크군에 공습을 가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한편 국민군이 게르니카 방면으로 진격하면서 위에서 언급한 대로 게르니카의 교통망에 타격을 가해 바스크군의 퇴각을 방해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1937년 4월 26일에 감행된 게르니카 폭격은 전술적으로 기대했던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콘도르군단의 폭격기들은 주요 목표 중 하나였던 렌타리아(Rentaria) 다리를 파괴하지 못했으며 도로 및 철도에 대한 폭격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 작전에 투입된 폭격기 중 많은 수를 차지한 Ju-52는 기본적으로 수송기 였고 초보적인 조준기를 장비했기 때문에 폭격의 정확도가 매우 떨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하루 정도 게르니카의 도로망은 마비되었으며 리히트호펜은 ‘전반적으로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리히트호펜은 공습이 끝난 뒤 스페인 국민군의 느린 진격속도 때문에 게르니카 공습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바스크군에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고 불쾌해 했습니다.

스페인 내전에 참여한 독일 공군 지휘관들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 폭격이 정치적으로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독일공군 장교들은 빌바오나 바르셀로나에 대한 국민군과 이탈리아 공군의 테러 폭격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특히 국민군의 경우 자국의 국민과 산업기반을 파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문제는 게르니카 폭격의 후폭풍 이었습니다. 바스크 자치정부는 게르니카 폭격으로 1,654명이 사망하고 889명이 부상했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민간인에 대한 폭격이 국제적인 비난을 불러온 것은 당연했습니다. 이상하게도 국민군이나 이탈리아군에 의한 테러 폭격이 아니라 테러 폭격에 관심 없었던 독일 콘도르군단의 전술 폭격이 테러 폭격의 대명사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독일 측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게르니카 폭격으로 영국의 전략폭격 지지자들은 공군의 위력과 민간인에 대한 테러폭격의 효과를 더욱 확신하게 됐습니다.

최근의 연구들은 게르니카 공습으로 250명에서 3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희생된 민간인들은 콘도르군단의 목표는 아니었지만 ‘군사목표’에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물론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리히트호펜과 콘도르군단에게 면죄부가 주어질 수는 없습니다. 리히트호펜의 전기를 쓴 코럼(James S. Corum)에 따르면 리히트호펜은 냉정한 군인으로 군사작전을 감행하면서 발생할 민간인의 피해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게르니카가 함락된 뒤 게르니카를 방문한 리히트호펜은 폭격의 성과에 만족하면서 특히 250kg 폭탄의 위력이 입증된 것에 주목했다고 합니다. 물론 민간인의 피해에 대해서는 별반 언급하지 않았다는 군요.


참고문헌
로버트 T. 엘슨(Robert T. Elson), 『라이프 2차 세계대전 : 대전의 서곡』,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1981)
James S. Corum, The Luftwaffe : Creating the Operational Air War, 1918~1940,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7)
James S. Corum, Wolfram von Richthofen : Master of the German Air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8)

2007년 8월 30일 목요일

이탈리아 공군의 지브롤터 폭격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의 주 전장은 “당연히” 지중해 지역이었습니다. 지중해 전역에서 치열한 공중전이 펼쳐진 곳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지역은 “몰타” 입니다. 몰타는 1943년까지 지중해 지역에서 이탈리아와 독일공군의 주요 공격 목표였지요. 그런데 몰타의 유명세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이탈리아 공군의 공격 목표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지중해의 영국해군 거점 중 하나인 “지브롤터”였습니다.

이탈리아 공군은 1940년부터 1943년까지 지브롤터에 대해 15회의 폭격을 실시했습니다. 그런데 한 두 차례도 아니고 무려 15회에 걸쳐 꾸준한 공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브롤터 같은 중요한 전략 목표에 대한 공격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래의 내용을 보시죠.

지브롤터에 대한 이탈리아 공군의 공격(1940~1943년)

1940년 7월 17/18일 : SM.82 3대 출격 : 민간인 3명 포함 4명 사망
1940년 7월 25/26일 : SM.82 3대 출격 : SM.82 1대 파손(대공포)
1940년 8월 20/21일 : SM.82 2대 출격 : SM.82 1대 격추(대공포)
1941년 6월 6일 : SM.82 2대 출격 : 1대는 이륙 후 다시 귀환, 1대는 지브롤터를 찾지 못하고 돌아옴
1941년 6월 13일 : SM.82 1대 출격 : 스페인의 La Linea 폭격, 스페인 민간인 4명 사망
1941년 7월 11일 : SM.82 1대 출격
1941년 7월 13일 : SM.82 1대 출격
1941년 7월 14일 : SM.82 1대 출격
1942년 4월 1일 : SM.82 3대 출격
1942년 6월 28/29일 : P.108B 5대 출격 : 4대가 지브롤터 도착, 3대는 연료 부족으로 스페인에 불시착
1942년 7월 3일 : P.108B 1대 출격 : 중간에 추락
1942년 9월 24일 : P.108B 2대 출격 : 아무 전과 없음
1942년 10월 20일 : P.108B 4대 출격 : P.108B 1대 비상착륙 중 대파
1942년 10월 21일 : P.108B 3대 출격 : P.108B 1대 비상착륙 중 대파
1943년 6월 19일 : SM.79 9대 출격 : SM.79 5대 엔진고장으로 귀환

Hans Werner Neulen, Am Himmel Europas : Luftstreitkräfte an deutscher Seiter 1939~1945, Universitas Verlag, 1998, s.31

최대 출격 기수는 9대이고 전과는 민간인 7명(이 중 4명은 중립국 민간인)을 포함해 8명 사망에 불과합니다. 손실은 완전손실 2기, 대파 3기로 전과에 비해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탈리아인들에겐 미안하지만 관심을 가져달라 하기가 난감한 수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즉 후대에 알려지는 것 자체가 민망한 일이었습니다.

2006년 9월 24일 일요일

동부전선의 이탈리아군(재탕 + 약간 수정)

배군님 블로그이탈리아군과 관련된 재미있는 글이 올라와서 나도 한번 부화뇌동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전에 썼던 글을 아주 약간 고쳐서 재탕!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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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솔리니와 이탈리아 군부는 1941년 5월 30일에 구체적으로 소련에 대한 파병 규모를 결정했다. Gerhard Schreiber의 Italiens Teilnahme am Krieg gegen die Sowjetunion에 따르면무솔리니가 처음에 계획한 파병 규모는 1개 군단급으로 군단 사령부는 편성 당시 “Corpo d’Armata Autotrasportabile”라는 명칭을 달았고 예하에 제 9 차량화 사단“Pasubio”, 제 52 차량화 사단 ”Torino”와 제 3 쾌속사단(Divisione celere) “Principe Amedeo duca d’Aosta”을 배속 받았은 상태였다. 이중 제 9 차량화 사단과 제 52 차량화 사단은 포병연대와 사단 직할대만 차량화 되었고 보병 연대들은 도보 부대였다.
쾌속사단은 전차가 배속된 기병사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2개 기병대대로 구성된 2개 기병연대, 그리고 2개 대대로 구성된 1개 Bersaglieri 연대가 기간 전력이다. 이와 함깨 전차 1개 대대를 가지고 있었다.

1941년 7월 9일에 이탈리아 원정군은 공식적으로 “이탈리아 러시아 원정군단(Corpo di Spedizione Italiano in Russia)” - 약자로 CSIR - 로 명명됐다. 여기에 군단 직할로 제 63 “검은 셔츠” 여단과 트럭 대대 9개 등이 배속되었으며 총 병력 62,000명에 차량 5,500대, 말과 노새 4,600마리, 야포 220문과 대전차포 94문, L3/33 경전차 60대등으로 편성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육군에 덤으로 추가된 공군 병력에 대해서는 Hans W. Neulen의 Am Himmel Europas 64쪽에 잘 나와 있다. 이 책은 영어판도 있는데 영어판은 아직 못 읽어 봤다.

항공대 사령관 – Carlo Drago 대령

22 독립 전투 항공단 – Giovanni Borzoni 소령
- 359 전투 항공대
- 362 전투 항공대
- 369 전투 항공대
- 371 전투 항공대
- MC 200 51대, CA 133 3대, SM 81 2대

61 독립 정찰 항공단 – Bruno G. Ghierini 중령
- 34 정찰 항공대
- 119 정찰 항공대
- 128 정찰 항공대
- Ca 311 32대, Sm 81 1대

245 수송 비행대 – Ernesto Caprioglio 대위, SM 81 10대
246 수송 항공대 – Nicola Fattibene 대위, SM 81 10대, 1941년 11월 25일에 러시아로 이동

무솔리니의 사위이고 외무상 이었던 치아노는 독일이 최정예 부대들을 투입한 소련 전선에 겨우 반 차량화된 이탈리아군을 파병해 봐야 “가난한 이웃”정도로 취급 받을 것이 분명하다고 파병에 부정적 이었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러시아 원정군은 7월 10일부터 8월 5일까지 주둔하고 있던 Verona 일대를 출발해 러시아로 향했다. 이탈리아군 중 최초로 전투에 투입된 것은 Pasubio 사단으로 8월 11일에 전투에 투입 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원정군은 남부 전선에서 소련군의 동계 공세를 비교적 잘 막아 냈다.

추가 파병에 대한 논의는 1941년 가을에 시작되는데 10월 25일에 러시아 원정군을 15개 사단으로 증강하는 안이 검토되기 시작했다. 최종적으로 2개군단을 추가로 파병하기로 결정이 나고 1942년 4월 2일에는 제 8군 사령부가 러시아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와 함께 알피니 군단(Corpo d'Armata Alpino), 제 2 군단이 러시아로 투입됐다. 파병군의 증강과 함께 명칭은 “이탈리아 러시아 원정군(Armata Itaiana in Russia)”으로 변경 됐다. 1941년에 파병된 CSIR은 1942년 7월 9일 자로 제 35 군단으로 개칭되고 이탈리아에서 도착한 제 8 군 사령부 예하로 배속 됐다.

1941년에 파병된 사단들은 이탈리아군에서는 비교적 장비가 충실한 편 이었으나 1942년에 투입된 보병사단들은 사단 포병연대가 75mm 2개 대대와 100mm 1개 대대로 화력이 독일군 보병사단에 비해 한참 떨어졌고 사단의 대전차 전력도 1개 중대 수준이었다. 한마디로 동부전선에서 굴리기에는 확실히 모자란 전력이었다.

G. Schreiber의 글 269쪽에 따르면 이탈리아 제 8 군은 9월 말에 총 병력 229,000명에 차량 16,700대, 말과 노새 25,000마리, 오토바이 4,470대와 트랙터 1,130대, 야포 946문, 대전차포 297문, 대공포 52문, 박격포 1,297문과 L6 경전차 31대, 돌격포 15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P. Gosztony의 Hitlers Fremde Heere 217쪽에는 1942년 가을의 전력이라고 하면서 이탈리아 제 8군이 병력 227,000명에 경기관총 2,850정, 중기관총 1,800정, 박격포 860문, 20mm 대공포 225문, 야포 960문, 47mm 대전차포 380문, 76/47mm 대전차포 52문, L6 경전차 55대, 돌격포 19대, 차량 16,700대, 트랙터 1130대, 오토바이 4,470대, 말과 노새 25,000마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고 있는데 별 차이가 없는 걸로 봐서는 후자가 조금 더 뒤의 전력을 나타내는 게 아닌가 싶다. 두 자료에서 차이가 크게 나는 수치도 있는데 이건 아마 통계를 낼 때 장비 구분을 다르게 해서 그런 것 같다.

소련군의 동계 대공세 직전의 이탈리아 제 8군의 전력은 Peter Gosztony의 Hitlers Fremde Heere의 권말 부록 B에 비교적 잘 나와 있다. 여기에 따르면 1942년 12월 14일에 이탈리아 제 8군의 전력은 다음과 같았다.
아래의 부대 중 제 2 사단과 제 3 사단은 산악 사단으로 불리는데 알피니 사단과는 구별 된다. 알피니 사단은 전문적인 고산 지대 전투를 훈련 받은 부대로 독일의 “Gebirgsjager”에 해당하며 산악사단은 경보병에 가까운, 굳이 비교하면 독일의 “Jager” 사단 정도에 해당된다. 고지대에서의 작전을 위해 편성되었지만 전문적인 산악 전투 훈련은 받지 않았다.


이탈리아 제 8 군

독일 제 29 군단

제 2 보병 사단 Sforzesca
보병 6개 대대 – 전투력 “강”
포병 – 9개 포대(75mm×6, 105mm×3), 3개 포대(149mm, 군 직할대, 11월 5일 자로 사단에 배속), 3개 포대(75mm, 군 직할대, 11월 1일 자로 사단에 배속)
대전차포 – 47mm 32문, 기타 4문

제 3 쾌속 사단 Principe Amedeo duca d’Aosta
12월 14일자 기록 없음, 이 사단은 예하 전투부대들을 모두 군 직할대로 빼앗기고 소련군의 동계 대공세 당시에는 1개 자전거 연대와 사단 포병 일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 52 차량화 보병사단 Torino
보병 6개 대대 – 전투력 “강”
포병 – 9개 포대(75mm×6, 105mm×3), 3개 포대(149mm, 군 직할대, 9월 21일에 사단에 배속), 2개 포대(149mm, 제 2 군단 직할대, 8월 9일에 사단에 배속)
대전차포 – 47mm 32문, 기타 6문

제 35 군단

제 9 차량화 보병 사단 Pasubio
보병 4개 대대 – 전투력 “강”, 1개 대대 “중”, 1개 대대 “보통”
포병 – 9 개 포대(75mm×6, 105mm×3, 전투력 80%), 2개 포대(149mm, 군 직할대 11월 12일에 사단에 배속, 전투력 80%), 2개 포대(149mm, 전투력 76%), 1개 포대(210mm, 군 직할대, 11월 25일에 배속)
대전차포 – 47mm 19문, 기타 6문

검은 셔츠 여단 “1월 3일”
보병 4개 대대 – 전투력 “강”
대전차포 – 47mm 11문

이 군단에는 독일 제 298 보병사단이 배속 되어 있었습니다.


제 2 군단

제 3 보병사단 Ravenna
보병 6개 대대 – 전투력 “강”
포병 – 9개 포대(75mm×6, 105mm×3), 5개 포대(105mm, 18문, 군단 포병, 10월 13일 에 사단 배속)
대전차포 – 47mm 36문, 기타 13문

제 5 보병사단 Cosseria
보병 6개 대대 – 전투력 강, 독일군 제 318 연대 – 3개 대대 전투력 “강”
포병 – 9개 포대(75mm×6, 105mm×3), 3개 포대(75mm 10문, 10월 22일에 군으로부터 배속)
대전차포 – 47mm 40문, 기타 15문

검은 셔츠 여단 “3월 23일”
보병 4개 대대 – 전투력 “강”
47mm 대전차포 16문

이 군단에는 독일 제 385 보병사단이 배속되어 있었다.

알피니 군단

제 4 알피니 사단 Cuneense
보병 6개 대대 – 전투력 “강”
포병 - 8개 포대(75mm×6, 105mm×2), 2개 포대(75mm, 12월 1일자로 군으로부터 배속), 3개 포대(149mm, 11월 11일 자로 군단으로부터 배속)
대전차포 – 47mm 45문, 기타 36문

제 3 알피니 사단 Julia
보병 6개 대대 – 전투력 “강”
포병 – 9개 포대(75mm×6, 105mm×3)
대전차포 – 47mm 44문, 기타 6문

제 2 알피니 사단 Tridentina
보병 6개 대대 – 전투력 “강”, 기병 1개 대대 전투력 “강” → 이 기병 대대는 12월 2일에 군 직할대로 있던 기병 여단에서 배속됐다.
포병 – 8개 포대(75mm×6, 105mm×2), 4개 포대(75mm, 기병여단 소속, 12월 1일 자로 사단에 배속)
대전차포 – 47mm 40문, 기타 15문

기병여단
-제 3 기병연대 Savoia, 제 3 쾌속 사단 Principe Amedeo duca d’Aosta 로 부터 차출 → 기록 없음
-제 5 기병연대 Novara, 제 3 쾌속 사단 Principe Amedeo duca d’Aosta 로 부터 차출 → 기록 없음

Rossi 집단
-오토바이 대대 (제 3 쾌속 사단 Principe Amedeo duca d’Aosta 로 부터 차출)
-제 67 기갑 대대 (제 3 쾌속 사단 Principe Amedeo duca d’Aosta로 부터 차출, L6/40경전차 40대)
-제 13 (자주)대전차 포 집단 (제 3 쾌속 사단 Principe Amedeo duca d’Aosta 로 부터 차출, L40 da 47/32 돌격포 11대)

제 156 보병사단 Vincenza – 기록 없음, 이 사단은 예하에 포병 연대가 없는 것으로 나온다.

독일 제 27 기갑사단과 385 보병사단이 12월 16일에, 독일 제 387 보병사단이 12월 20일에 추가로 증원됐다.

여기서 “기타”로 표기한 이탈리아군 대전차포는 대부분 PaK 97/38 으로 보통 독일쪽 문헌에서 이탈리아군의 “s.Pak” 이라고 표기한 것들은 대부분 이놈이라고 한다.

David Glantz의 From the Don to the Dnepr의 부록에 딸린 이탈리아 제 8 군의 전투 서열은 이것과는 조금 다른데 기갑 대대가 Sforzesca 사단에 배속되어 있는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위의 자료는 독일측의 1차 문헌을 참고로 한 것이어서 아마도 Glantz 의 저서에 있는 전투서열이 잘못 된 것으로 생각된다. Glantz의 저서에는 이탈리아 제 2 군단에 야포 132문, 35 군단에 156문, 29 군단에 170문, 알피니 군단에 216문의 야포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소련군의 공계 공세 시점에 이탈리아 원정군 항공대의 전력은 대략 다음과 같이 편성 되어 있었다.(H. Neulen 61쪽)

21 독립 전투 항공단
- 356 전투 항공대
- 382 전투 항공대
- 361 전투 항공대
- 386 전투 항공대
- MC.200 32대, MC.202 11대

71 독립 정찰 항공단
- 38 정찰 항공대
- 116 정찰 항공대
- BR 20 17대, Ca 311 14대

246 수송 항공대 – SM.81 ?

2006년 7월 10일 월요일

무늬만 1류 공군 - Regia Aeronautica

2차 대전에 참전한 주요 교전국 중 이탈리아처럼 어정쩡한 국가는 찿아보기 힘들다. 이탈리아는 마치 체중 미달인 주제에 수퍼헤비급 경기에 나간 권투선수 같다고 해야 할까… 하여튼 2차 대전 같은 괴수들의 격전에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국가다.

그나마 지중해에서 그럭저럭 밥값은 하던 해군과는 달리 시작부터 끝까지 졸전을 거듭하며 호사가들의 안주거리가 된 육군과 그 육군의 뒤치닥 거리만 하다가 종전을 맞은 공군, Regia Aeronautica는 그야말로 비참함 그 자체다.

이탈리아 공군은 육군과 마찬가지로 적들에 비해 뒤떨어진 장비, 그리고 불충분한 항공기 생산량으로 대표되는 결정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질과 양 모두 뒤떨어지는 비참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다.

이탈리아 공군이 193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세계적인 수준이었다는 점을 보면 불과 10년도 안된 사이에 이렇게 몰락했다는 것은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먼저 항공기 생산을 살펴 보면 이탈리아는 전쟁 이전부터 싹수가 글러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탈리아 공군의 2차 대전 이전 항공기 생산 계획과 실제 생산량은 다음과 같았다.


연 도
생산계획
생산량
1933
424
386
1934
455
328
1935
1,236
895
1936
2,031
1,768
1937
1,900
1,749
1938
1,700
1,610
1939
1,930
1,750



위의 수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탈리아는 전쟁 이전에도 계획된 생산량을 달성하지 못 했고 이 때문에 1937년부터 생산계획량을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목표에 도달하지 못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큰 원인은 이탈리아는 전쟁 발발 이전부터 골머리 아픈 경제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단 국방예산을 보자.

이탈리아는 동원체제에 들어간 나라도 아닌 주제에 전쟁 이전부터 국방비가 국가 예산의 30%를 돌파하고 있었다!

아래의 수치를 보자.


회계연도
국가예산
국방비
1934/35
22.5
5.3
1935/36
35.2
12.1
1936/37
39.2
13.1
1937/38
39.6
12.3
1938/39
40.9
13.4
1939/40
54.4
24.7


국방비가 이렇게 많은데 왜 공군은 저 모양이었는가?

가장 먼저 예산 우선순위가 해군과 육군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1933년부터 1940년 까지 이탈리아 공군에 배정된 예산은 평균 전체 국방비의 24.5%였는데 독일 공군은 재무장 직전인 1934년에도 36%, 영국 공군도 전시 동원 이전인 1938년에 국방예산의 38%를 배정 받고 있었다.
그리고 공군에 들어오는 예산도 신장비 도입보다는 기존에 있는 장비를 관리하는데 더 많이 배정이 됐다.
결정적으로 오지랖만 넓은 두체가 사방에 허세를 부리는 통에 그나마 배정 받은 예산도 괴상한 곳으로 많이 흘러 들어갔다.

먼저 1938년까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공군을 지원하기 위해서 이탈리아 공군의 예산(!)이 지원됐고 뒤이어 이디오피아와 스페인 내전 개입으로 더 많은 예산이 새 나갔다.
내실을 다져야 할 시기에 삽질만 한 셈이다.

1938년 12월 이탈리아 공군의 항공기 보유대수는 1년 전보다 500대 이상 줄어들었고 생각이 조금 있는 이탈리아 장군들은 미래의 전쟁을 점점 더 암담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특히 스페인 내전 개입은 1938년까지 공군 전력을 170개 비행대로 증강시킨다는 공군 증강계획을 말아먹는데 일조했다.

물론 이탈리아 공군도 1936년 스페인 내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미래 전쟁을 대비한 ‘R 계획’을 만들어 항공 전력을 확충하긴 했지만 영국 같은 강대국과 한판 벌이기에는 상당히 부실했다.
무 엇보다 이탈리아 공군은 매우 부실한 장비만 두루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탈리아 공군이 그나마 최신형이라고 내놓은 MC.200 전투기는 성능은 Bf-109 E나 스핏파이어 Mk.I 같은 동시기의 전투기보다 성능은 뒤떨어지는 주제에 생산성도 무려 다섯배나 떨어졌다.
Bf-109E의 생산에 소요되는 시간이 평균 4,500 시간이었는데 MC.200은 21,000시간(!)이나 잡아 먹고 있었다.

이탈리아 공군 전력은 1939년 10월 말 ‘서류상’으로는 총 5,200대에 달했으나 이 중 2,700대는 너무 구식이어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900대는 정비 상태가 매우 불량해 즉시 폐기 처분해야 했다.

이결과 삽질의 제왕인 두체께서 영국과 프랑스에 호기롭게 선전포고를 했을 때 이탈리아 공군이 보유한 항공기 3,296대 중 가동 가능한 물건은 2,000대를 겨우 채우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 중 폭격기가 995대, 전투기가 574대 였는데 전투기 중 그나마 현대적인 물건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MC.200 77대와 Fiat G.50 89대에 불과했다!
이탈리아는 전쟁에 돌입하고 나서도 주력 전투기가 CR.42라는 당시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확실히 구식화 된 물건이었다.

반면 독일 공군은 이미 1939년 8월에 세계 최고수준의 전투기인 Bf-109 D 112대와 Bf-109 E 631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선전포고를 한 이탈리아는 먼저 가장 만만한 코르시카 등 지중해 일대의 프랑스 군을 공격했는데 6월 11일부터 24일까지의 짧은 교전 기간 중 지상에 주기된 70대의 프랑스 항공기를 격파하고 40대의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 프랑스가 곧바로 백기를 들고 이탈리아는 어쨌든 승전국 행세를 할 수 있게 됐다.

여기서 끝났다면 정말 행복했겠으나…

영국과의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되면서 이런 재미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돼 버렸다.

두체는 동업자(실은 상전) 히틀러가 프랑스에서 대박을 터트리자 곧 영국도 나자빠질 것으로 보고 Corpo Aereo Italiano라고 간판을 달고 CR.42, G.50 등 구닥다리 비행기 178대로 구성된 부대를 파견했다.
이 부대는 영국에 27톤의 폭탄을 투하한 것 외에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빈둥대다가 리비아의 이탈리아군이 박살나자 땜빵을 위해 아프리카로 보내졌다.

1940년 말, 영국군이 이집트에서 공세를 개시하자 구식 항공기로 머리 숫자만 채운 이탈리아 공군은 2개월도 되지않아 풍비박산 나 버렸다. 단 2개월의 전투로 이탈리아 공군은 700대가 넘는 항공기를 잃어 버린 것이다!
이 중 100대가 공중전에서 격추됐고 140대는 영국공군의 공습으로 지상에서 격파 됐다. 그리고 약 400대는 이탈리아군이 패주하면서 자폭시키거나 소각시켰다고 한다.
2월 말 리비아에 남은 이탈리아 공군 전력은 채 70기가 되지 않았고 그나마 트리폴리의 제공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독일 공군이 파견한 ZG26의 20대 남짓한 Bf-110 장거리 전투기 덕분이었다.

이렇게 부실한 상태에서 전쟁에 뛰어든 허약한 공군은 지속적인 소모전으로 재미한번 보지 못한 채 역사의 뒷길로 초라하게 사라져갔다.

이탈리아 공군은 1940년 6월부터 1941년 3월까지 3,500대의 항공기를 상실했는데 같은 기간 보충된 항공기는 3,100대에 불과했다.
적자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결과 이탈리아 공군의 전력은 계속해서 감소했다!!!
이탈리아 공군은 1940년 6월 전쟁 발발 당시 2,000대의 작전 가능한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1941년 12월에는 1,493대, 1942년 11월에는 860대로 그 숫자가 계속 줄어들었다.

이탈리아 공군이 이렇게 전쟁 중반도 지나지 않아 나자빠진 원인은 이탈리아의 부실한 공업력과 전시동원 능력이었다.

먼저 이탈리아의 항공기 생산이 가장 큰 문제였다. 전쟁 기간 중 이탈리아의 항공기 생산은 다음과 같았다.


연도
생산계획
생산량
1940
3,785
3,257
1941
4,200
3,503
1942
4,800
2,821
1943
3,822
2,024

이탈리아의 항공기 생산은 1942년에 이미 엄청난 감소세로 돌아서는데 독일과 달리 산업시설에 대한 대규모 공격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탈리아의 항공산업 노동자는 1934년 9,700명에서 1938년 45,700명으로 증가했지만 같은 기간 동안 생산성은 불과 50% 증가하는데 그쳤다.
결정적으로 노동력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노동 숙련도가 낮은 수준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항공산업 노동자는 1943년 초 까지 115,000명으로 증가했지만 월 평균 항공기 생산량은 266대로 1940년의 308대 보다도 오히려 더 감소한 비참한 수준이었다.

여기다가 신형 항공기 생산 부족과 생산 라인의 전환이 매우 더뎌 1943년까지도 CR.42같은 구식 기종의 생산을 계속해야만 했다. 어차피 아예 없는 것에 비하면 낫지 않은가.

어쨌거나 1943년 휴전이 성립된 뒤 이탈리아 공군은 정부와 마찬가지로 독일, 또는 연합군에 합류해 전쟁을 계속했다.
독일측은 무솔리니에 충성하는 병력을 근간으로 항공기 100대로 편성된 소규모 공군을 재건했다.
독일은 이탈리아군의 무장 해제시 약 1,200대의 이탈리아 항공기를 압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의 항공기가 성능 미달이었고 쓸만한 조종사의 충원도 어려운 문제였다.

이후 이탈리아 공군은 독일, 또는 연합군의 지원을 받아 생계를 유지해 나가다가 역시 궁색한 최후를 맞았다.


참고한 자료들...
F. D’Amico & G. Valentini, Regia Aeronautica
Olaf Groehler, Geschichte des Luftkriegs
Hans W. Neulen, Am Himmel Europas : Luftstreitkrafte an deutscher Seite 1939-1945
Brian R. Sullivan, “The Impatient Cat : Assessments of Military Power in Fascist Italy, 1936-1940”
Brian R. Sullivan, “Downfall of the Regia Aeronautica 1933-1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