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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6일 수요일

어떤 희망사항


이 블로그가 늘 그래왔듯 썰렁한 이야기나 해볼까 합니다.

미군이 서부유럽에서 본격적으로 독일군과 대규모 기갑전을 벌이면서 미제 전차가 독일군의 전차에 비해 여러모로 열세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물론 이런 현실을 억지로 외면하려 한 패튼과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사실은 사실이지요. 미육군은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부랴부랴 신형전차의 배치를 서두르게 됩니다. 나중에 M-26으로 불리게 될 이 물건은 상당한 기대를 받았던 모양입니다.

아이젠하워도 M-26에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그는 육군참모총장 마샬(George C. Marshall)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육군의 장비 중 지프와 M-1 소총 말고는 독일군의 무기보다 나은게 없다는 비판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가 신형 T-26을 대량으로 확보하기만 한다면, 특히 강화된 90mm 포를 탑재한 더 최신형의 전차를 가지게 된다면 우리 기갑부대는 기동성과 숫자는 물론 화력 면에서도 우위에 서게 될 것 같소.”

Forrest C. Pogue, George C. Marchall : Organizer of Victory 1943-1945(Viking Press, 1973), p.553

그런데 아이젠하워가 이 편지를 마샬에게 보낸 것은 1945년 3월 12일 이었습니다. 아이젠하워의 희망사항과 달리 미군 기갑부대가 독일 기갑부대를 질적으로 압도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높은 분들은 잘 몰라요
이게 다 셔먼 때문이다

2009년 2월 10일 화요일

이박사는 밀리터리매니아?

1949년 초의 어느 날, 국무회의에 참석한 이박사께서 갑자기 이런 이야길 하셨습니다.

찦車에 鐵板을 加工하야 鐵匣車를 우리의 손으로 優良品을 생산할 수 있다하니 五十臺 可量 製作하여 보는 것도 좋겠다.

第十二回 國務會議錄, 檀紀四二八二年 一月二十一日

이박사 말씀인즉, 이런 물건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죠.


아무래도 건국 초의 대한민국은 안보적으로 불안한 나라이다 보니 대통령인 이박사가 군대에 관심이 많은건 당연하겠습니다만 이렇게 시시콜콜한데 까지 신경쓰는걸 보면 좀 묘합니다. 물론 다른 기록을 보더라도 이승만은 군사 무기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건 알 수 있습니다만 이런 잡다한 물건까지 관심을 가질 줄이야. 어쩌면 우리의 초대 대통령은 밀리터리매니아 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대한민국이 충분한 돈과 기술이 있었다면 이박사의 국방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었을까요 아니면 더 매니악한 기질을 발휘해 히총통 처럼 됐을까요? 하여튼 여러모로 재미있는 양반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박사에게 지프를 개조해 장갑차를 만들자는 이야기는 누가 처음 꺼냈을까요? 이게 정말 궁금합니다.

2006년 11월 30일 목요일

미국 육군의 차량화 -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오늘날의 미육군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이곳 저곳 들쑤시며 뉴스거리를 만드는 존재였지만 불과 100년전의 미 육군은 주요 열강의 육군 치고는 비리비리한 군대였습니다. 유럽과 같은 국가 총동원체제가 자리잡힌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상비군이 강력한 것도 아니고. 사실 미국은 육군이 약해도 별 문제가 없는 것이 국경을 마주한 것이 캐나다와 멕시코같이 적대적이지도 않고 군사력도 그저 그런 나라들이었죠.

그래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미육군의 차량화 수준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주요 교전국들에 비해서 크게 뒤떨어 졌습니다. 유럽에 참전하면서 미국이 기여한 것이란 총알받이가 될 청년들 뿐이었다는 빈정거림도 있었다고 할 정도로 미국은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중요한 군사 장비를 원조 받습니다. 좀 절대적인 비중이죠.

그나마 트럭의 경우는 미 육군이 자체적으로 표준화 해서 생산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워낙 전쟁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전쟁에 뛰어들었는지라 엉망이었습니다. 1916년에 스탠다드 B, 또는 리버티 트럭이라 불리는 3톤 트럭이 채용 되었지만 생산량이 부족해서 프랑스에 투입된 미육군이 사용한 274,000대의 트럭은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219개 모델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었습니다. 불과 20년 뒤에 가공할 차량화 수준을 달성하게 되는 것에 비교하자면 지독할 정도로 한심한 수준이었습니다. 당연히 일선 부대는 잡다한 트럭의 부품을 제대로 구하지 못해서 트럭의 가동율이 매우 형편없었습니다. 1919년 휴전직후 미육군 제 1 야전군 전체에 가동 가능한 리버티 트럭은 고작 40대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휴전이 체결된 뒤 전쟁성이 나머지 주문을 취소해 버리자 예비부품도 덩달아 취소돼 버렸습니다. 육군의 관점에서 보면 이건 고역이었겠죠.

20년대는 평화롭게, 그리고 궁핍하게 지나갔습니다. 잠시의 호황 뒤에 찿아온 대공황으로 미육군의 예산은 마구 깎여 버렸습니다. 당연히 새로운 트럭을 대량으로 도입 하는것은 꿈에나 가능한 일 이었죠. 미육군은 신형 트럭을 발주하기 보다는 이미 민간 시장에 대량으로 풀려 있는 모델을 구입해서 사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새로 트럭을 개발하는 것 보다야 후자가 예비 부품을 조달하는데 유리하고 결정적으로 비용도 적게 들었다고 하죠.
그러다 보니 각 병과 마다 서로 다른 종류의 트럭을 구매하는 경향을 보이게 됐습니다. 포병이 사용하는 트럭의 요구 조건과 수송 부대가 사용하는 트럭의 요구 조건이 같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각 병과별로 차량을 구매하다 보니 1936년에 미육군이 보유한 차량은 총 360개 종류에 달했고 각기 다른 예비부품이 100만개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건 불과 5년 뒤에 소련을 침공한 독일 육군과 비슷한 수준의 난장판 이었습니다.

미 전쟁성은 이 난장판을 정리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차량의 표준화에 한층 더 박차가 가해 집니다. 이렇게 해서 1940년에 미 육군은 ½톤, 1½톤, 2½톤, 4톤, 7½톤의 다섯 종류로 차량을 표준화 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나중에 ½톤 차량은 ¼톤 차량,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지프와 ¾톤 "Weapon Carrier"로 분화 됩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다들 아시다시피 미국의 표준화, 대량생산의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미국은 방대한 공업생산력으로 역사상 그 어느 나라도 이룩하지 못한 위업(?)을 달성한 것 입니다! 농담을 조금 보태서 미국이 찍어낸 엄청난 숫자의 트럭이 승리의 원동력 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해서 미육군의 차량화는 그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한 수준을 훨씬 넘어서게 됩니다. 정말 이거야 말로 해피엔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