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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15일 목요일

독일의 점령지역 산업시설 활용 1939-1945 - 항공산업의 사례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전시 동원과 관련해 자주 논의되는 이야기 중 하나는 1940년 독일이 장악한 서유럽의 공업기반이 독일의 전쟁 수행능력에 어느 정도의 도움을 줬는가 하는 점 입니다.

가장 먼저…

전후 연합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차 대전 기간 중 독일에 점령된 국가들이 독일 공군에 공급하기 위해 생산한 항공기는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국 가1941194219431944총 계
프랑스626681,2855022,517
체코슬로바키아8195688051,9554,147
네덜란드1675414442947
헝가리0073344417
이탈리아003279111
Richard Overy, The Luftwaffe and the European Economy 1939-1945, Militärgeschichtliche Mitteilungen, 1979/2


통계에도 나타나 있듯 독일이 가장 재미를 본 국가는 체코였습니다. 일단 오스트리아를 제외하면 가장 먼저 독일의 수중에 들어온 산업화된 국가였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제국항공성(RLM) 내에는 체코의 기업들에게는 항공기 완제품 생산대신 부품과 반조립 정도만 맡겨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우데트(Ernst Udet)가 체코의 공업시설 활용을 적극적으로 밀어 붙였기 때문에 이미 1939년 말에 체코의 항공기 제조업체들은 독일공군으로부터 총 1,797대의 항공기 생산을 수주 받습니다. AVIA가 이때의 경험으로 전후에도 Bf 109의 짝퉁(?)을 생산한 것은 유명하지요.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체코의 군수 산업체들은 독일 점령지역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고 기여도가 컸다는 점 입니다. 체코의 기술 좋은 노동자들은 비교적 말도 잘 듣고 사보타지에 취미가 없었다지요. 군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도 경호를 위해 무장 병력을 붙여줘야 했던 유고슬라비아에 비하면 체코는 독일 기업들이 털어먹기 좋은 낙원이었다고 합니다.

슬로바키아는 명색은 독립국이었지만 실제 사정은 옆 동네인 체코와 같아서 거의 일방적으로 독일에 털립니다. 독일의 공군사절단(Luftwaffenmission)은 슬로바키아 정부로부터 국영 항공기 공장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권리를 얻어내는데 사실 이건 반 강제적인 것이었지요. 독일은 슬로바키아 정부에게 슬로바키아의 국영 공장이 생산한 항공기의 75%는 독일 공군이 인수하고 25%만 슬로바키아 공군에 공급한다는 조항을 강요해서 아주 재미를 봅니다.

프랑스의 경우는 꽤 흥미로운 경우입니다.
먼저 독일 점령지역의 공장과 비시 정부 관할 지역의 공장을 다루는 주체가 달랐습니다. 비시 정부 관할 지역은 1943년 점령 이전까지는 스위스, 스웨덴과 함께 중립국으로 분류돼 독일항공산업위원회(DELIKO, Deutsche Luftfahrtindustriekommision)의 담당이었습니다. 반면 독일 점령지역은 제국항공성의 관할하에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특히 항공기 완성품 뿐 아니라 중간 부품의 공급에도 많은 기여를 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유럽 대륙에서는 독일 다음으로 항공 산업이 발달한 나라였기 때문에 많은 독일 기업들이 침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제국항공성이 나서기 전에 기업들이 먼저 작업을 시작했다고 하지요. 많은 수의 항공 기업(특히 융커스)들은 아직 프랑스와의 휴전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즉 이론적인 교전상태)에서 프랑스 기업들과 사업계약을 체결하러 인력을 파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프랑스는 전체적인 항공기 생산에서는 슬로바키아에 뒤지긴 하지만 독일 공군의 중요한 해외 파트너(?) 였습니다. 1942년 까지 독일 공군과 납품 계약을 체결한 프랑스 기업은 192개사였다고 합니다.(같은 기간 독일 육군은 60개사, 해군은 9개사)
프랑스는 휴전 이후에도 자국 정부를 위해서 항공기 생산을 계속했는데 가끔은 독일이 제 3국에 공여할 목적으로 프랑스제 항공기를 주문하는 경우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1943년에 불가리아 정부는 독일측에게 Dewoitine D.520(도데체 왜 이걸 독일에?) 96대를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타전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이건 취소되고 Bf 109 16대가 공여 됩니다.

폴란드의 경우는 말 그대로 안습 입니다. 국가사회주의 강도단의 두목인 괴링 부터가 폴란드는 산업적으로 가치가 없으며 약탈할 건덕지가 없다고 공언할 정도였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인켈은 크라쿠프에, 융커스는 포즈난에 부품 생산 공장을 확보합니다. 물론 폴란드의 경우 서유럽과 달리 항공기 완성품을 조립할 수 있는 공장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폴란드와 유사한 국가로는 유고슬라비아도 있습니다. 유고슬라비아의 항공 기업들은 독일 점령과 동시에 독일 항공기업들의 자회사로 강제 흡수됩니다. 전쟁 이전 유고슬라비아의 대표적인 항공기업이었던 Aeroput은 루프트한자의 정비공장으로 바뀌고 Rakovica는 융커스의 엔진 부품 공장으로 전환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독일이 가장 재미를 보지 못한 곳은 이탈리아였습니다.
독일은 이탈리아를 점령한 뒤 이탈리아의 항공기업들을 독일의 항공기 생산에 활용하려 했으나 성과가 매우 시원치 않았다고 하지요. 항공기 생산이 1943년에 32대, 1944년에 79대로 독일의 한달 치 생산도 안 되는 규모였습니다.

독일이 해외의 산업 기반을 활용한 것은 이렇게 외형적으로나마 합법의 탈을 쓴 것도 많았지만 아예 노골적인 약탈로 나가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많았습니다.
먼저 체코슬로바키아가 점령된 다음 접수된 장비와 시설은 불가리아로 매각됐고 폴란드 점령 후 압수된 항공기와 기자재는 루마니아, 불가리아, 스웨덴 등지로 매각, 또는 공여 됐습니다.
독일 공군은 점령지로부터 산업 시설을 인수하는데 필사적이었기 때문에 소련 침공을 앞두고는 제국항공성 내에 산업시설 노획을 위한 조직(Beute-Sonderkommando)를 만들었습니다. 이 조직은 1941년 한 해 동안 소련의 점령 지역내에서 8,400여대의 대형 공작기계를 약탈해서 독일로 보냈다고 합니다.
뭐, 어쨌건 소련도 전쟁이 끝난 뒤 실레지엔과 동프로이센의 기계들을 잔뜩 뜯어 갔으니 피장 파장이려나요?

전체적으로 봤을 때 항공산업 부문만 놓고 보면 독일인들은 2차 대전기간 동안 충분히 재미를 봤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쟁으로 거덜직전까지 가긴 했지만 그것 조차 미국의 경제원조로 피해가니 말 다했지요.

2007년 2월 24일 토요일

1차 대전 동부전선의 전쟁포로

2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선은 서부전선에 비해 그 영향력이 과소 평가되는 경향이 강하다고 이야기 돼 왔습다만 탄넨베르크 전투나 브루실로프 공세 같은 몇몇 전투를 제외하면 그다지 언급되지 않는 1차 대전의 동부전선에 비하면 양반인 셈입니다. 오죽하면 독일애들이 1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역을 Die vergessene Front라고 하겠습니까.

2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선도 엄청난 인력과 물량이 동원된 전장이었지만 1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선도 규모가 크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1차 대전 동안 포로가 된 교전국들의 군인이 약 900만 명인데 이 중 대략 500만 명이 동부전선에서 발생한 포로라고 하니까요.
무엇보다 2차 대전당시에는 주로 소련측의 포로가 압도적으로 많이 잡힌데 비해 1차 대전당시에는 대규모 육군을 보유했으나 전투력은 부실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있었기 때문에 양측이 모두 사이 좋게 많은 포로를 잡았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차 대전 당시 동부전선의 전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전체적으로 독일-오스트리아군이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면서 우세를 보이지만 간간히 러시아군의 강력한 반격도 이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서로 승리와 패배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난타전의 양상을 보이고 있고 독일은 거의 일방적으로 승리만을 거두는 형국입니다.

이렇다 보니 포로의 비율을 보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가 서로 비슷한 규모로 엄청난 포로를 내고 있고 독일은 상대적으로 극히 적은 포로만을 내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러시아군은 1918년 초까지 독일에 240만 명, 오스트리아-헝가리에 186만 명, 그리고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에 3만~4만명이 포로로 잡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은 17만 명, 오스트리아-헝가리가 185만 명,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 두 나라가 합쳐서 8만 명 가량이 러시아군의 포로가 됐습니다. 오스트리아는 근소한 차로 적자를 면했고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는 적자를 낸 셈이군요.
이 중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목할 만한 점은 전쟁 초-중반에 엄청나게 많은 포로를 발생시켰다는 것 입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전체 포로 중 73만 명은 개전 첫 1년에 잡힌 것이고 1915년 12월까지 포로 숫자는 97만 명으로 늘어납니다. 즉 1년 만에 전체 포로의 50%가 발생한 것 입니다. 1916년 6월의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38만의 포로가 발생한 것을 제외하면 전쟁 후기에는 포로가 되는 숫자는 크게 감소합니다. 하긴, 초반에 원체 많이 잡히다 보니 1916년 이후가 되면 더 잡힐 만큼의 병력도 없었다지요.

※ 브루실로프 공세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것은 당시 러시아측의 보고서에는 포로가 19만으로 돼 있다는 것 입니다. 1차 대전 연구자들은 이렇게 된 원인이 러시아측의 포로 집계가 잘못된 것 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위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독일-러시아간의 대결에서는 독일이 꾸준하게 승리를 거두면서 적당히(?) 많은 숫자의 포로를 잡고 있습니다. 간단히 1914-1915년 전역, 즉 1914년 탄넨베르크 전투부터 1915년의 제 2차 마주리아 호수 전투까지 여러 차례의 전투가 적당한 사례가 되겠습니다. 독일군은 탄넨베르크에서 10만, 1차 마주리아 호수 전투에서 3만, 2차 마주리아 호수 전투에서 9만2천명의 포로를 잡았습니다. 상당한 성과이긴 하지만 결정타를 먹이지는 못해서 러시아군은 계속 밀려나면서도 붕괴되지 않고 저항을 하지요.

반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의 대결은 그야말로 난타전의 표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전쟁 초기인 1914년 9월의 갈리치아 전역에서 10만에 달하는 포로를 냈다고 하지요. 그리고 1915년 1월~2월에 걸쳐 프세미우(Przemysl) 구원을 위해 감행한 공격에서는 러시아군 6만을 생포했지만 오스트리아군도 4만(!)의 포로를 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3월 23일 프세미우가 함락되면서 11만9천명의 포로가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독일군이 증원된 뒤 갈리치아에서 벌어진 5월 전역에서는 러시아가 포로만 14만에 달하는 패배를 당합니다. 이건 뭐 난장판이 따로 없군요.

이렇게 난타전이 벌어지면 인구가 부족한 쪽이 결정적으로 부족한데 1차 대전 당시에는 오스트리아가 바로 그런 꼴이었습니다. 특히 1914-1915년 전역에서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을 대규모로 잃어 버렸다는 점은 오스트리아의 전쟁 역량을 결정적으로 약화 시켰습니다. 1915년 중반부터 대규모로 투입된 속성으로 양성한 장교단은 대학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전쟁 이전의 직업군인들에 비해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한 편이었다지요.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다민족 국가라는 점 때문에 특히 포로가 더 많이 발생했습니다. 브루실로프 공세 당시 체코인으로 편성된 제 8보병사단은 사단전체가 항복해 버려 마치 2차 대전당시 소련군 소속의 에스토니아인 부대의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특히 체코계 부대는 “슬라브 형제”들과 싸우는 것을 별로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헝가리나 크로아티아계 국민을 제외하면 전쟁에 별다른 열의가 없었다고 하지요. 슬라브계 국민들은 오히려 러시아에 더 친근감을 느낄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 입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러시아인을 증오하는 폴란드인 역시 강대국의 전쟁에 목숨을 내던지는 것은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는 점 입니다. 독일이 1916년에 “해방(?)” 시킨 폴란드 지역에서 러시아와 싸울 의용병을 모집했을 때 당초 목표는 1917년 상반기 까지 폴란드 인으로 15개 보병사단을 편성하는 것 이었는데 지원자는 동부 폴란드 전역에서 4천명을 약간 넘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폴란드인의 입장에서는 독일인이나 러시아인이나 그놈이 그놈 이었겠지요.

이런 강대국들간의 난타전 말고도 루마니아와 같은 어중간한 나라의 흥미로운 사례도 있습니다. 루마니아는 1916년 9월 헝가리를 침공했다가 바로 독일-오스트리아 연합군의 반격으로 박살이 나는데 독일군의 11월 공세에서 루마니아군은 14만명의 포로 외에도 그냥 집으로 돌아간 병사가 9만명에 달해 말 그대로 군대가 분해돼 버렸다고 전해집니다.(한편, 같은 기간 루마니아군의 전사자는 14,000명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루마니아군은 사실상 증발해 버리고 러시아군이 루마니아에 들어와 독일군과 싸우는 양상으로 전개가 됩니다.

전쟁포로의 처우는 아주 개판이었습니다. “서부전선 이상없다”에는 독일에 포로가 된 러시아 포로들의 비참한 모습이 짧지만 인상적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그렇지만 러시아에 포로가 된 독일, 오스트리아 포로에 비하면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 잡힌 러시아 포로는 “아주 약간” 나은 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1914/15년 겨울과 1915/16년 겨울에 유행한 티푸스로 러시아군에 포로가 된 인원 중 30만 명이 사망했고 이 외에도 강제노동으로 인한 사망자도 엄청났습니다. 무르만스크 철도 공사에서는 2만5천명이 중노동과 영양실조로 사망했습니다.

동부전선에서 이렇게 대규모의 포로가 발생한 것은 양측 모두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먼저 오스트리아는 1916년 여름이 되자 전쟁 수행능력을 거의 상실해 더 이상 대규모 공세작전을 펼칠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독일에 의존하는 경향이 더욱 강해지지요. 러시아는 다들 잘 아시다시피 짜르 체제가 붕괴돼 버리죠.

이런 것을 볼 때 2차 대전당시 소련이 1차 대전당시의 러시아보다 더 짧은 기간동안 더 많은 손실을 입고도 전쟁에 승리한 것을 보면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2차 대전 때도 짜르 체제였다면 러시아는 1941년에 전쟁에 졌을지도 모릅니다.

참고서적

Holger Herwig, The first world war : Germany and Austria-Hungary 1914-1918, Arnold, 1997
Reinhard Nachtigal, Die Kriegsgefangenen-verluste an der Ostfront, Die vergessene Front – Der Osten 1914/1915, Schoningh, 2006
Dennis E. Showalter, Tannenberg : Clash of Empires, Brassey’s, 2004
Norman Stone, The Eastern Front 1914-1917, Penguin Books, 1998

2007년 1월 29일 월요일

1차대전 이전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민족문제

Sonnet님이 쓰신 최근 레바논 현황에 대한 글을 보니 다음의 구절이 눈에 쏙 들어왔습니다.

레바논 정부군의 병사들은 각각 소속 종파를 찾아 탈영했다. 슈프 산악지대에서는 드루즈파가 팔랑헤당을 무참히 부수었다. 이스라엘군과 레바논 정부군이 지원하지 않으면 팔랑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미 해병대가 재건한 레바논 정부와 정부군은 와해되고 있었다.


확실히 민족, 정파 구성이 복잡한 국가에서 멀쩡한 단일 통치체제를 확립하는 것은 어려운 과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런 문제는 19세기 민족주의의 창궐 이후 여러 국가들을 엿 먹였지요.
근대 민족주의의 최대 피해자라면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제국과 오스만 제국을 꼽을 수 있을 것 입니다. 두 국가 모두 민족주의가 제국이 붕괴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지요.

그래서 다인종으로 구성된 국가의 문제점을 언급할 때 많이 언급되는 사례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제국이 항상 끼는 것도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제국은 당장 큼지막한 덩어리로 쪼개더라도 독일인, 헝가리인, 폴란드인,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크로아티아인, 루테니아인 등으로 나뉘고 발칸 반도의 그저 그런(?) 민족들 까지 넣으면 더욱 더 골치가 아파집니다.
민족 구성이 복잡했던 덕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제국의 군대에서는 사용 언어가 명령어(Kommandosprache)와 직무어(Dienstsprache), 그리고 지휘 및 통신용 언어로 나뉘고 있었습니다. 제국의 신민들 중 상당수가 황제폐하가 사용하시는 Deutsch를 한마디도 할 줄 몰랐으니 당연한 결과였을 것 입니다.
명령어, 그리고 지휘 및 부대간 통신 언어는 독일어였지만 직무어는 민족별로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빈이나 짤즈부르크 등에서 편성되는 독일인 부대의 경우 명령어와 직무어가 모두 독일어 였지만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인 부대는 명령어는 독일어, 직무어는 헝가리어, 크로아티아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Erwin A. Schmidl의 짧은 에세이, Die k.u.k Armee : intergrierendes Element eines zerfallenden Staates? 에는 1차대전 발발 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 참모부에서 각 부대별 사용 언어를 조사한 결과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때의 조사에 따르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의 각 연대 및 독립대대 중 단일 언어를 사용하는 부대는 142개 였고 2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부대는 163개, 그리고 3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부대가 24개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런 경향은 국경지대, 혹은 민족별 접경지역에서 심했는데 예를 들어 프세미시우(Przemysl) 10보병연대는 연대 병력 중 47%가 루테니아어, 43%가 폴란드어, 10%가 기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66보병연대는 46%가 슬로바키아어, 25%가 헝가리어(magyarische), 22%가 루테니아어, 7%가 기타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경우 부사관의 임무에는 병사들 간의 ‘통역’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하며 또 전쟁이전 임관한 장교들은 배치된 연대의 공식어를 배워야 했다고 합니다.

언어에 따른 지휘계통상의 문제가 기술적인 것 이었다면 민족주의는 그 자체로 아주 골치 아픈 물건이었습니다. 평화시에 입대한 직업군인 장교나 부사관들은 민족에 상관없이 황제에 충성하는 편 이었지만 전쟁이 발발하고 소집된 장교나 부사관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전쟁 기간 중 대학생이나 아비투어 합격자는 장교로 소집됐는데 이들 중 많은 수는 대학에서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은 채 들어왔다는 점 입니다. 당연히 많은 수가 말도 안통하는 황제에게 충성할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대학생이나 아비투어 합격자의 20%가 유대인이었다는 점 도 문제였습니다. 유대인은 민족을 불문하고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었죠. 유대인들이 장교로 충원되니 반유대정서를 가지고 있는 병사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 지는 뻔 했습니다.

결국 이런 사회적인 문제는 군대의 편제, 교리, 장비 만큼이나 전쟁 초-중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연달아 참패를 당하는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러시아군의 공세가 개시되면 폴란드나 체코인 부대는 대규모로 항복해 버렸다고 하지요.

그러나 sonnet님의 중동문제에 대한 글들을 계속 보다 보니 21세기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신 레바논같은 나라의 이야기를 하는 쪽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어쨌든, 대한민국 군대에 민족문제가 없다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지역 문제가 있다고는 해도 최소한 경상도 말이나 전라도 말이 서로 못 알아먹을 수준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럭저럭 균질적인 사회구성을 가진 덕에 이런 저런 문제가 많아도 국가가 유지되는게 아닐까 가끔씩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