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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18일 금요일

2차 대전중 독일 공군 전투기사단의 지휘통제 문제

아래 글에서 윤민혁님이 der grosse Schlag 작전이 계획대로 실행될 경우 심각한 공역통제 문제에 직면할 것이라고 지적해 주셨습니다. 제가 기술적인 부분에 좀 많은 지식이 있다면 여기에 대해서 좀 재미있는 글을 하나 써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쉽네요.
전투기 부대의 통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아돌프 갈란트가 전쟁 후에 지적한 전투기부대의 지휘통제 문제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독일본토 방공전 당시 전투기부대의 전술통제는 전투기사단(Jagddivision)이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전투기사단은 대전 초기의 전투기지휘부(Jagdfliegerführer)를 개칭한 것으로 1943년 무렵에는 각 전투기 사단 별로 5~10개 전투비행대대(Gruppe)를 예하에 두고 있었습니다.

각 전투기사단은 6,000~7,000명 정도의 인력으로 구성되며 사령부에는 전투기 통제와 관련된 인력이 150명 정도 배치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전투기통제장교(J.L.O, Jagerleitoffizier) 들이 포함됩니다. 전투기통제장교는 비행대대, 경우에 따라서 비행단에 대한 통제를 담당하는데 일반적으로 사단장이 선임통제장교를 겸합니다. 선임통제장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데 선임통제장교는 상황을 종합해 적 폭격기 부대의 예상 목표와 진로를 판단하고 그에 맞춰 사단 지휘하에 있는 모든 전투기 부대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즉 방공전투에서 전투기사단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셈 입니다.

그런데 전쟁 중에는 이 전투기 사단의 지휘 통제능력에 문제가 조금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돌프 갈란트는 전쟁이 끝난 뒤에 독일 본토 방공전에서의 전투기 지휘통제 문제, 특히 전투기 사단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고 하네요.(D. Caldwell & R. Muller, The Luftwaffe over Germany : Defense of the Reich, p.148)

1. 전투기사단의 지휘 방식은 명백히 지역적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각 사단은 사단 예하 부대가 다른 사단의 전투 지경선으로 넘어가더라도 계속 통제했지만 무전과 레이더 관제 범위를 벗어나면 지휘를 (인접 사단으로) 넘겼다. 하지만 이것은 원만하지 않았다.
2. 전투기사단 사단장들은 1차대전의 베테랑들이었고 그들의 참모장은 공군 장군참모 출신이었다. 이들은 유능하긴 했으나 전투기 조종사가 아니었다.
3. 전투기사단에는 부사단장이 없었다. 부사단장 보직을 만들어 거기에 전투기 조종사 출신을 임명해야 했지만 문제는 적당한 인물이 드물었다.
4. 전투기들은 전투기통제장교의 통제를 받았으며 각 통제장교는 1개의 비행대대를 통제했다. 전투기통제장교들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전투기 조종사 출신이거나 매우 우수한 통신 장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보드 게임을 하듯 통제했지 (공중전의) 입체적 환경을 이해하지 못해 그들이 통제하는 부대에 전술적 이점을 주지 못했다.
5. 무전감청은 공군 통신감인 마르티니(Wolfgang Martini) 장군의 담당이고 공군 총사령부 단위에서나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 전투기사단의 전투기통제장교들은 무전감청을 이용해서 (영국공군처럼) 속임수를 쓰는게 불가능했다.
6. 전투기군단, 전투기사단, 제국항공군, 괴링, 전투기부대총감(갈란트)는 모두 한 전화회선을 이용하고 있었으며 전투기부대총감을 제외하면 모두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괴링은 종종 멍청한 명령을 내렸다.
7. 1944년 초부터 적 호위전투기 때문에 폭격기 집단과 접촉을 유지하며 정보를 보내는 항공기(Fühlungshalter)를 더 이상 임무에 투입할 수 없었다. 이것 때문에 전투기통제장교들은 기상, 구름상태, 적의 고도, 호위기 여부 등을 전혀 알 수 없었다.
8. 각 편대장들에게 행동의 자유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이 외에도 갈란트는 괴링에 의해서 전투기사단장의 교체가 빈번히 일어난 점도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단장 교체가 잦으니 예하 전투기 부대들에 대한 통제가 어려웠다는 것이죠. 하기사, 괴링은 툭하면 조종사들에게 동부전선에 소총수로 보내겠다는 망발이나 날리던 종자이니 사단장교체가 빈번한 것도 이해가 가긴 합니다. 어쩌면 괴링은 정말 영국공군이 심은 스파이가 아니었을는지.

“대타격(der grosse Schlag)” 작전은 얼마나 현실성이 있었을까?

아래의 글, "대공포는 의외로 효율적이다"에 라피에사쥬님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아주셨습니다.

종종 갈란트가 제안한 연합군 폭격비행대에 대한 '대규모 요격작전' 역시 44년 후반기부터는 효율성이 크게 의심되는 것 같습니다. 분명 소수의 요격부대만을 내보내 지속적으로 소모시키는 것보단 나았겠지만 당시의 상황은 '독일공군이 게릴라전을 펼쳐야' 할 정도로 압도적인 열세였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씁니다.

아돌프 갈란트가 구상했다는 “대타격(der grosse Schlag)” 작전은 만약 실행 됐더라면 단일 공중전으로는 역사상 최대 규모가 됐을 작전입니다. 갈란트는 1943년 10월의 제 2차 슈바인푸르트(Schweinfurt) 공습 이후 이 작전을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많은 분들이 아시다 시피 이 작전은 영국본토 방공전의 경험이 바탕이 된 것 입니다. 즉 가용 가능한 전투기 부대를 총 출격시켜 단 한번에 미 육군항공대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힌다는 것이죠. 갈란트가 구상한 계획은 대략 이랬다고 합니다. 먼저 제 1파로 2,000대의 전투기를 출격시켜 폭격기 부대를 공격합니다. 2,000대는 미군의 호위전투기 부대를 수적으로 압도할 수 있으니 나머지가 폭격기를 집중공격하면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100대 정도의 야간 전투기들이 대기하다가 스웨덴이나 스위스로 도주하는 손상을 입은 폭격기들을 처리하는 임무를 맡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비대인 400~500대의 전투기를 발진시켜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는 구상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400~500대 정도의 폭격기를 한번에 격추시킨다면 미군은 슈바인푸르트에서 그랬던 것 처럼 뭔가 뾰족한 수가 있을 때 까지 폭격을 연기할 테고 이 정도 규모의 손실이라면 독일측이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갈란트의 구상대로 이 작전이 실행되어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면 지금쯤 영화 두 세편은 나왔다에 천원 을 걸겠습니다.

그런데 당시 독일의 현실을 고려했을 때 이 작전은 실행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2,500대가 넘는 전투기를 단 한번의 작전에 투입하기 위해서 전투기와 조종사를 모은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 이었을 것 입니다. 갈란트가 처음 대타격 작전을 구상하던 무렵인 1943년 12월, 독일 공군이 보유한 전투기를 모두 긁어 모아야 1,500대를 조금 상회하는 규모에 실제 가동 기수로만 따지면 1,000대를 조금 넘는 수준이었으니 제국항공군(Luftflotte Reich) 예하에만 가동가능 한 전투기 2,500대를 모은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 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미 1944년 여름이면 독일공군의 전투기 부대들은 서부전선 동부전선 할 것 없이 이곳 저곳 구멍을 막으러 다니는 실정이니 조종사와 전투기가 꾸준히 소모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독일의 항공기 생산량은 기록적으로 증가하고는 있었는데 피해도 기록적으로 증가하는 실정이었으니 별 뾰족한 수가 없었던 것이죠. 예를 들어 1944년 6월 1일에 제국항공군은 총 788대의 단발전투기(이 중 472대 가동 가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전투기 부대들을 차출당해 1944년 7월 1일에는 388대의 단발전투기(이 중 242대 가동가능)만을 보유하는데 그쳤습니다. 여기에 본토 방공전으로 인한 손실도 계속해서 누적되고 있었으니 반격을 위해 2,500대의 전투기를 집결시킨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육군항공대가 1944년에 영국 본토에 대규모의 전력을 집결시키고 있었던 점도 문제입니다. 1944년 1월 영국에 주둔한 미 제8공군은 폭격기 1,082대, 전투기 909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6월에는 폭격기 2,547대, 전투기 1,112대로 늘어납니다. 당장 미 제8공군이 보유한 전투기 숫자만 가지고도 독일제국항공군이 보유한 전투기 숫자를 가볍게 뛰어 넘고 있지요. 게다가 더 무시무시한 것은 미군도 손실이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였다는 점 입니다. 미 제8공군은 1944년 1월에 211대, 2월에 299대, 3월에 349대, 4월에 409대의 폭격기를 잃습니다. 그렇지만 전체 폭격기 대수는 계속 늘어나지요.;;;;; 정말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습니다. 당장 1944년 하반기로 접어들면 대규모 작전이 있을 때 미 제8공군은 한번에 중폭격기만 1,300~1,400대씩 출동시킵니다. 여기에 호위 전투기가 600~700대씩 딸려오지요. 이건 뭐 답이 없는 상황입니다.;;;;;;

1944년 12월 말이면 제국항공군과 제3항공군을 합쳐서 대략 1,000대 정도의 가동 가능한 전투기가 있었는데 이것들을 한번에 출격시키더라도 폭격기들을 공격할 수 있는 전투기는 300~400대 수준이니 좀 후하게 쳐서 미군 전투기들과 1대 1 비율로 교전하더라도 나머지 전투기들은 네 배가 넘는 중폭격기(강력한 방어화력을 갖춘) 들을 상대로 고전할 수 밖에 없었을 것 입니다. 특히 1944년에 급격히 저하된 독일공군 조종사들의 실력을 본다면.;;;;; 1944년 하반기에 들어가면 독일공군도 한달에 3,000대 가까운 Bf 109와 Fw 190을 보충받는데 그래 봐야 전체 전투기 전력이 크게 늘어나지 않는걸 보면 이 시기에 얼마나 손실이 격심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형편이니 2,500대의 전투기를 모아 일격을 먹여주겠다는 갈란트의 구상이 현실화 되기는 정말 어려웠을 겁니다.

2006년 9월 11일 월요일

영국 본토 방공전 기간 중 영국 공군에 격추된 독일 공군의 구조용 수상기

영국 본토 방공전 기간 중 독일공군은 영국측이 구조용 수상기도 공격한다고 비난한 바 있다. 이것 때문에 그 유명한 괴링 아저씨의 낙하산으로 탈출하는 영국군 조종사를 쏘라는 명령과 여기에 갈란트가 대놓고 대든 일화도 발생했다.

독일측 기록에 따르면 영국 공군이 독일군의 구조용 수상기를 처음 격추시킨 것은 1940년 7월 1일이라고 한다. 영국측은 일단 비행기가 군용 위장무늬를 했고 독일군 마크를 달았기 때문에 군용기로 보고 격추했다고 하는데 뭐, 사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영국 본토 방공전이 절정에 달했던 1940년 7월부터 9월까지 영국 공군에 격추된 독일 공군의 인명구조용 수상기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van Ishoven, The Luftwaffe in the Battle of Britain, 32쪽에서 발췌)

격추일시 / 소속부대 / 기종 / 피해 원인

7월 1일 / SK 3 / He59 / 스핏파이어에 격추
7월 9일 / SK 1 / He59 / 스핏파이어에 격추
7월 11일 / SK 1 / He 59 / 기종 불명의 전투기에 격추
7월 20일 / SK 1 / He59 / 허리케인에 격추
7월 20일 / SK 4 / He59 / 허리케인에 격추
7월 25일 / SK 3 / He59 / 허리케인에 격추
7월 28일 / SK 1 / He59 / 허리케인에 격추
7월 28일 / SK 3 / He59 / 허리케인에 격추
8월 8일 / SZ Cherbourg / He59 / 허리케인에 격추
8월 11일 / SZ Cherbourg / He59 / 허리케인에 격추
8월 11일 / SZ Cherbourg / He59 / 블렌하임에 격추
8월 15일 / SK 4 / He59 / 스핏파이어에 격추
8월 23일 / SZ Boulogne / He59 / 영국군에 격추(상세 사항 불명)
8월 23일 / SZ Boulogne / He59 / 영국군에 격추(상세 사항 불명)
8월 26일 / SK 2 / He59 / 스핏파이어에 격추
8월 28일 / SK 3 / He59 / 허리케인에 격추
8월 28일 / SK 3 / He59 / 허리케인에 격추
9월 13일 / SK 3 / He59 / 영국군에 격추(상세 사항 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