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 23일 화요일

주코프의 굴욕 : 1941년 6월 29일의 일화

주코프는 스탈린에게 직언을 하고도 스탈린 보다 오래 산 매우 드문 사람 중 한명입니다. 그러나 주코프가 스탈린에게 직언을 잘 했다고는 해도 최소한의 대가는 치뤄야 했습니다. 다음은 독소전 개전 초기에 두 사람간에 있었다는 일화입니다.

모스크바에서 민스크에 포위된 부대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확실하게 확인한 것은 6월 29일 아침이었다. 스탈린은 이 소식을 듣자 격노했다. 민스크는 전략적으로는 별로 가치가 없었지만 연방의 슬라브 민족 공화국, 벨로루시아의 수도라는 점 때문에 국제적 대도시로 육성할 도시였다.(스탈린은 그루지야인 이었지만 짜르들이 그러했듯 슬라브 민족을 제국의 중핵으로 삼았다.) 스탈린은 시니컬한 인물이었지만 그 자신이 만들어낸 선전구호들을 그대로 믿어버리는 독재자적인 위험한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스탈린은 민스크의 함락 소식에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Kaunas)나 우크라이나의 리보프(L’vov)가 함락당했을 때 처럼 슬퍼하지도 않았고 드네프르 강의 방어준비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스탈린은 그 대신 민스크의 함락이 매우 중대한 전략적 패배라고 간주하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티모센코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스크에 도데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스탈린이 질문했다.

“아직 충분한 답변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스탈린 동지.”

티모센코는 불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티모센코가 대답을 주저한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아직 파블로프가 항복했는지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동지는….”

스탈린은 무엇인가를 말하려다 그만뒀다. 그 자리에 동석한 몰로토프, 말렌코프, 미코얀, 베리야는 뭔가 말할 것을 찾느라 고민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스탈린이 말꼬를 텄다.

“나는 이 애매모호한 보고가 마음에 들지 않소. 즉시 참모부에 가서 각 전선군 사령부의 보고를 확인해 봐야 겠소.”

몇 분 뒤 소련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다섯 사람이 총참모부의 황동으로 된 문을 열고 들어섰다. 경비를 서던 병사는 너무 놀라 말도 못한 채 얼어 붙었다. 다섯 사람은 아무말 없이 경비병을 지나쳐서 티모센코의 집무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그들이 방에 들어섰을 때 티모센코는 주코프와 다른 여러명의 장군들과 함께 테이블 위에 상황도를 펴 놓고 토의를 하고 있었다.
스탈린이 나타나자 방안에 있던 모든 장군들이 부동자세를 취했다. 티모센코는 하얗게 질렸지만 어쨌건 스탈린에게 다가가 보고했다.

“스탈린동지. 국방인민위원회와 총참모부는 현재 전선의 상황을 분석 중이며 지시를 따르고 있습니다.”

스탈린은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테이블로 가서 서부전선군 지구의 상황도를 찾았다. 스탈린은 서부전선군의 상황도를 찾은 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동안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침내 스탈린이 장군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좋소. 보고하시오. 우리는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듣고 싶소.”

“스탈린동지. 시간이 부족해 아직 전선의 상황을 충분히 분석하지 못 했습니다. 많은 정보들이 아직 확인 못 한 상태입니다. 현재까지 종합된 것들은 매우 모호합니다. 보고를 드리기엔 정보가 부족합니다.”

스탈린은 격분했다.

“동지는 지금 내게 사실을 말하는 게 무서운 거 아니오! 동지는 벨로루시아를 잃었소. 이제 또 뭘 가지고 날 실망시킬 작정이오? 우크라이나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소? 발트 3국은! 동지는 지금 지휘를 하는거요 아니면 그냥 몇 명 죽었나 숫자만 세고 있는거요?”

주코프가 끼어들었다.

“우리가 상황 분석을 마치도록 내버려 두시지요.”

베리야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물어봤다.

“우리가 방해가 됩니까?”

“각 전선군의 상황은 매우 심각하고 우리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코프가 맞받아쳤다.

“베리야 동지. 명령을 내릴게 있다면 좀 도와주시지요?”

베리야는 불쾌한 어투로 대답했다.

“당의 지시가 있다면 그렇게 하겠소.”

주코프는 다시 대답했다.

“네. 그렇다면 당의 지시가 내려올 때 까지는 참모부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코프는 그의 “보스”에게 말을 꺼냈다.

“스탈린 동지. 총참모부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임무는 전선군 지휘관들을 돕는 것 입니다. 보고는 그 뒤에 하겠습니다.”

스탈린은 다시 분노를 터트렸다.

“먼저! 동지가 지금 우리를 대하는 태도는 큰 실수라는 걸 아시오! 두 번째로, 전선군 지휘관들을 어떻게 도울 건지는 지금부터 우리가 생각하겠소!”

스탈린은 독설을 쏟아 낸 뒤 다시 조용해 졌다. 장군들에게 발언할 것이 있으면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잠시 뒤, 주코프가 벨로루시아의 야전군 지휘관들과 통신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고 대답하자 스탈린은 또다시 격분했다. 스탈린은 주코프가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고 패배자라고 소리쳤다.
주코프는 눈물을 글썽이며 티모센코의 집무실에서 나갔다. 몰로토프가 주코프를 따라 나갔다. 잠시 뒤 주코프가 다시 티모센코의 집무실로 들어왔을 때 그의 눈가는 새빨갛게 돼 있었다.

스탈린은 그를 따라온 사람들에게 말했다.

“동지들, 돌아갑시다. 좋지 않은 상황에 여길 온 것 같소.”

스탈린은 총참모부 건물을 나서면서 침울하게 말했다.

“레닌은 우리에게 위대한 유산을 남겨줬소. 그런데 우리가 이걸 다 말아먹어 버렸구만.”

Constantine Pleshakov, Stalin’s Folly : The Tragic First Ten Days of World War II on the Eastern Front, (Houghton Mifflin), p.212-214

스탈린 동지의 일갈에 눈물을 글썽이는 우리의 불패의 장군. 정말 안구에 습기가 찹니다.

댓글 10개:

  1. 강철의 대원수께옵서도 7월쯤 다챠에 틀어박혀 '내가 망쳤어~~'를 읊으셨다 하니 당대의 어려움이 눈에 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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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스탈린이 다챠에 틀어박혀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몇가지 설이 있습니다. 나중에 따로 올려 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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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스탈린의 유명한 "레닌의 유산을 우리가 말아먹었어 ㅜㅜ"라는 발언이 저 때였군요. 강철의 대원수와 불패의 대장군을 히키코모리와 초딩으로 만들어 버린 걸 보면 독소전 초기의 참화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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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레닌의 유산" 어쩌고 하는 한탄은 키예프 포위전 이후에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쟁 초기에 몇 번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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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아아, 주코프 장군님도 저렇게 굴욕의 시기가 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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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스께 함부로 대들면 흉한꼴을 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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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순간 주코프를 다독거리는 몰로토프가 생각나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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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주제 모르는 국가원수가 강철 장군님을 농락.......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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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중요한 순간 주제파악을 못하는 것은 주코프의 특성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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