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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6일 화요일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보낸 어떤 전문

1990년대 이후 공개된 한국전쟁에 대한 소련 문서들은 그동안 우리가 정황으로만 추정하거나 다소 부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실들을 입증해 주었을 뿐 아니라 전혀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도 알려주었습니다. 그런 문서들 중 하나가 1952년 7월 16일 김일성이 주북 소련대사 라주바예프(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Разуваев)를 통해 스탈린에게 보낸 서한입니다. 이 서한은 미국의 폭격에 견딜수 없게 된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신속한 휴전 체결을 간청하는 내용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편지의 핵심적인 내용 외에도 김일성의 몇가지 요구사항이 눈에 띄는데 남한에 보복 폭격을 할 수 있도록 공군력을 증강시켜 달라는 요구 등이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윌슨센터의 디지털 아카이브에 올라와 있는 영어 번역본을 중역해서 올려 봅니다.


긴급

바실레프스키 동지께.

비신스키 동지께.

1952년 7월 16일 김일성이 스탈린 동지께 보낸 편지에 대해 보고합니다.

라주바예프


배부 : 스탈린(2부), 몰로토프, 말렌코프, 베리야, 미코얀, 카가노비치, 불가닌, 흐루쇼프, 비신스키, 소콜로프스키



“친애하는 대사동지, 이 전문의 내용을 스탈린 동지께서 검토해 주시도록 전달해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친애하는 스탈린 동지

이시오프 비사리오노비치, 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해 드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반도의 전반적인 정세를 고려해 볼 때 휴전협상이 무기한 늘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지난 1년여간의 협상 결과 우리는 사실상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고 수동적인 방어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적은 사실상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막대한 인명과 물자의 손실을 입히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아주 최근에 적은 조선 전역의 발전소에 대한 군사작전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공군의 작전으로는 상황을 호전 시킬 가능성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 경제에 엄청난 피해가 초래되어 누적되고 있습니다.

평양이라는 단 한개 도시에 대해 (7월 11일과 7월 12일 밤의) 단 한번의 24시간 동안의 야만적인 공습으로 6천여명의 비무장 민간인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습니다.

적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협상에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중국 동지들은 당연히 이러한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우리도 이 문제에 대한 마오쩌둥 동지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조선 인민을 고통과 부당하고 무의미한 피해에서 구해내기 위해서는 중요한 지역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능동적인 군사작전으로 전환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치가 필요합니다.

1. 방공망을 강화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 10개의 대공포 연대(3개 연대는 중구경, 7개 연대는 소구경)를 편성할 장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스탈린 동지께서 중국 동지들에게 5개 연대, 우리에게 5개 연대 분의 장비를 제공해 주셨으면 합니다.

2.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 공군이 능동적인 작전을 전개해야 합니다. 조선, 적어도 평양까지는 주간에 전투기로 방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선인민군 공군은 언제라도 능동적인 군사 작전을 개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와 함께 얼마 뒤에는 조선인민군 조종사 40명이 소련에서 Tu-2기 훈련을 마칠 예정입니다. 우리는 이 조종사들이 Tu-2기와 함께 귀국해서 즉시 능동적인 군사작전에 참여하고 중요한 적의 거점에 피해를 주기를 원합니다.

3. 적이 주목할 만한 일련의 지상 작전을 전개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적 공군이 우리 후방을 타격하는 것을 그만두도록 하고 개성에서 진행되는 협상에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이 모든 것과 함께, 조선인민군의 전투력을 증강하기 위해서 1952년 1월 10일과 1952년 7월 9일의 각서에 따라,  그리고 1951년 10월 6일의 각서 내용을 1952년에도 적용하여 동지께서 제공해 주실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까운 시일내에 기술 장비와 물자를 주실 필요가 간절합니다.

4. 동시에 개성에서는 조속한 휴전 체결과 교전 중지, 그리고 제네바 협약에 따른 모든 포로의 송환을 추진해야 합니다. 이러한 요구사항은 평화를 사랑하는 인민들의 지지를 받을 것이며 우리가 수동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해 줄 것 입니다.

지상과 공중에서 군사 작전의 성격이 변화한다면 적에게 이에 상응하는, 우리에게 유리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 입니다.

이 전문과 비슷한 내용을 마오쩌둥 동지에게도 보냈습니다.

조선 인민은 동지께서 조선인민공화국에 베풀어 주신 헌신적인 막대한 원조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문제에 대한 동지의 지시와 조언을 기다리겠습니다.

진보적인 인민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동지의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

존경의 마음을 담아.

김일성.


평양, 1952년 7월 16일.”



이 전문에서는 북한이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기 때문에 신속히 휴전을 체결해야 할 필요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현 상태에서의 휴전이 북한에게 불리해 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유리한 조건에서 휴전을 체결할 수 있도록 공세작전을 펼칠 수 있는 군사원조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김일성 스스로가 언급한 무의미한 희생의 원인이 김일성 자신이라는 점에 아주 입맛이 씁니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김일성 같이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놀라울 정도로 많습니다. 이런 멍청한 일은 잊을만 하면 되풀이 되지요.

2009년 5월 24일 일요일

대박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종결된 직후, 내무인민위원장 베리야는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소비에트연방 내무인민위원회의 전쟁포로국에는 전쟁 발발 이후부터 2월 3일 현재까지 관할 수용소와 전선의 임시수용소에 19만6515명의 포로가 등록되어 있습니다.

포로수용소 내 : 86,894명
전선임시수용소 내 : 78,951명
보건인민위원회 소속 병원 내 : 11,995명
수용소, 전선임시수용소로 이송 중 : 8,477명
수용소, 이송 중 탈진 또는 질병의 결과로 사망한 자 : 10,198명

이 밖에 각 전선군 및 야전군사령부의 집계중인 보고에 따르면 1만6천명의 포로가 내무인민위원회 관할의 전선임시수용소로 이송 중 입니다.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포로 중 16,059명의 포로는 노동에 투입하고 있습니다.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포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장교 2,448명
부사관 18,243명
사병 66,203명

장교 : 장군 4명, 대령 23명, 중령 31명, 소령 68명, 대위 330명, 중위 141명, 소위 625명, 사관후보생 1,078명, 상선단 장교 6명, 기타 간부 141명

이 밖에 돈 전선군 사령부의 보고에 따르면 전선군 관할지역의 포로 중 장교가 2,500명이고 이 중 장군이 24명 입니다.

Leonid Reschin, Feldmarschall Friedrich Paulus im Kreuzveröhr 1943-1953, Bechtermünze Verlag, 1996/2000, s.38

스탈린그라드 전투 한 번으로 포로로 잡은 독일군 장교의 숫자가 전쟁이 시작된 뒤 1년 반 동안 잡은 독일군 장교의 숫자보다 많습니다. 게다가 장군은 여섯배!

그야말로 대박 입니다. 보고서를 읽는 스탈린 동지도 꽤나 흐뭇하셨을 듯.

2007년 1월 23일 화요일

주코프의 굴욕 : 1941년 6월 29일의 일화

주코프는 스탈린에게 직언을 하고도 스탈린 보다 오래 산 매우 드문 사람 중 한명입니다. 그러나 주코프가 스탈린에게 직언을 잘 했다고는 해도 최소한의 대가는 치뤄야 했습니다. 다음은 독소전 개전 초기에 두 사람간에 있었다는 일화입니다.

모스크바에서 민스크에 포위된 부대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확실하게 확인한 것은 6월 29일 아침이었다. 스탈린은 이 소식을 듣자 격노했다. 민스크는 전략적으로는 별로 가치가 없었지만 연방의 슬라브 민족 공화국, 벨로루시아의 수도라는 점 때문에 국제적 대도시로 육성할 도시였다.(스탈린은 그루지야인 이었지만 짜르들이 그러했듯 슬라브 민족을 제국의 중핵으로 삼았다.) 스탈린은 시니컬한 인물이었지만 그 자신이 만들어낸 선전구호들을 그대로 믿어버리는 독재자적인 위험한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스탈린은 민스크의 함락 소식에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Kaunas)나 우크라이나의 리보프(L’vov)가 함락당했을 때 처럼 슬퍼하지도 않았고 드네프르 강의 방어준비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스탈린은 그 대신 민스크의 함락이 매우 중대한 전략적 패배라고 간주하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티모센코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스크에 도데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스탈린이 질문했다.

“아직 충분한 답변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스탈린 동지.”

티모센코는 불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티모센코가 대답을 주저한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아직 파블로프가 항복했는지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동지는….”

스탈린은 무엇인가를 말하려다 그만뒀다. 그 자리에 동석한 몰로토프, 말렌코프, 미코얀, 베리야는 뭔가 말할 것을 찾느라 고민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스탈린이 말꼬를 텄다.

“나는 이 애매모호한 보고가 마음에 들지 않소. 즉시 참모부에 가서 각 전선군 사령부의 보고를 확인해 봐야 겠소.”

몇 분 뒤 소련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다섯 사람이 총참모부의 황동으로 된 문을 열고 들어섰다. 경비를 서던 병사는 너무 놀라 말도 못한 채 얼어 붙었다. 다섯 사람은 아무말 없이 경비병을 지나쳐서 티모센코의 집무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그들이 방에 들어섰을 때 티모센코는 주코프와 다른 여러명의 장군들과 함께 테이블 위에 상황도를 펴 놓고 토의를 하고 있었다.
스탈린이 나타나자 방안에 있던 모든 장군들이 부동자세를 취했다. 티모센코는 하얗게 질렸지만 어쨌건 스탈린에게 다가가 보고했다.

“스탈린동지. 국방인민위원회와 총참모부는 현재 전선의 상황을 분석 중이며 지시를 따르고 있습니다.”

스탈린은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테이블로 가서 서부전선군 지구의 상황도를 찾았다. 스탈린은 서부전선군의 상황도를 찾은 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동안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침내 스탈린이 장군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좋소. 보고하시오. 우리는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듣고 싶소.”

“스탈린동지. 시간이 부족해 아직 전선의 상황을 충분히 분석하지 못 했습니다. 많은 정보들이 아직 확인 못 한 상태입니다. 현재까지 종합된 것들은 매우 모호합니다. 보고를 드리기엔 정보가 부족합니다.”

스탈린은 격분했다.

“동지는 지금 내게 사실을 말하는 게 무서운 거 아니오! 동지는 벨로루시아를 잃었소. 이제 또 뭘 가지고 날 실망시킬 작정이오? 우크라이나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소? 발트 3국은! 동지는 지금 지휘를 하는거요 아니면 그냥 몇 명 죽었나 숫자만 세고 있는거요?”

주코프가 끼어들었다.

“우리가 상황 분석을 마치도록 내버려 두시지요.”

베리야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물어봤다.

“우리가 방해가 됩니까?”

“각 전선군의 상황은 매우 심각하고 우리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코프가 맞받아쳤다.

“베리야 동지. 명령을 내릴게 있다면 좀 도와주시지요?”

베리야는 불쾌한 어투로 대답했다.

“당의 지시가 있다면 그렇게 하겠소.”

주코프는 다시 대답했다.

“네. 그렇다면 당의 지시가 내려올 때 까지는 참모부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코프는 그의 “보스”에게 말을 꺼냈다.

“스탈린 동지. 총참모부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임무는 전선군 지휘관들을 돕는 것 입니다. 보고는 그 뒤에 하겠습니다.”

스탈린은 다시 분노를 터트렸다.

“먼저! 동지가 지금 우리를 대하는 태도는 큰 실수라는 걸 아시오! 두 번째로, 전선군 지휘관들을 어떻게 도울 건지는 지금부터 우리가 생각하겠소!”

스탈린은 독설을 쏟아 낸 뒤 다시 조용해 졌다. 장군들에게 발언할 것이 있으면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잠시 뒤, 주코프가 벨로루시아의 야전군 지휘관들과 통신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고 대답하자 스탈린은 또다시 격분했다. 스탈린은 주코프가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고 패배자라고 소리쳤다.
주코프는 눈물을 글썽이며 티모센코의 집무실에서 나갔다. 몰로토프가 주코프를 따라 나갔다. 잠시 뒤 주코프가 다시 티모센코의 집무실로 들어왔을 때 그의 눈가는 새빨갛게 돼 있었다.

스탈린은 그를 따라온 사람들에게 말했다.

“동지들, 돌아갑시다. 좋지 않은 상황에 여길 온 것 같소.”

스탈린은 총참모부 건물을 나서면서 침울하게 말했다.

“레닌은 우리에게 위대한 유산을 남겨줬소. 그런데 우리가 이걸 다 말아먹어 버렸구만.”

Constantine Pleshakov, Stalin’s Folly : The Tragic First Ten Days of World War II on the Eastern Front, (Houghton Mifflin), p.212-214

스탈린 동지의 일갈에 눈물을 글썽이는 우리의 불패의 장군. 정말 안구에 습기가 찹니다.

2007년 1월 12일 금요일

뭔가 구린 보고서 - "히틀러 보고서"의 쿠르스크 전투 부분

스탈린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스탈린에게 올라가는 보고서는 베리야, 또는 그 아래 단계에서 상당히 손을 많이 본다는 것 입니다. 왜냐? 다 아시겠지만 우리의 강철의 지도자 동무의 심보가 뒤틀리면 피보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1949년에 작성돼 스탈린에게 제출된 “히틀러 보고서”의 영어판을 읽어 보게 됐습니다. 이것 역시 스탈린 동무에게 올라 가는 것이라 그런지 뭔가 구린 냄새가 곳곳에서 나더군요.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부분입니다.

1943년 6월, 히틀러는 쿠르스크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서 오버살츠베르크에서 동 프로이센의 “늑대굴”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무렵 터키군 총참모부의 사절단이 방문했다. 터키 사절단은 독일 국방군 총사령부의 초청을 받아 독일을 방문했다. 독일측은 동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터키 사절단에게 쿠르스크 공세를 위해 하리코프-벨고로드 지구에 집결한 독일 기갑부대의 기동훈련을 참관하도록 했다. 터키 사절단은 이 기동훈련을 참관한 뒤 늑대굴로 돌아와 히틀러를 접견했다. 터키 사절단은 히틀러와 다과를 하기에 앞서 카이텔, 요들과 함께 많은 대화를 나눴다. 터키 사절단은 히틀러를 접견한 뒤 독일 국방군 총사령부의 초대를 받아 프랑스를 방문했다. 히틀러는 터키 사절단과 대화를 나눈 뒤 매우 즐거워했다.

“터키인들은 믿을 수 있을 거야. 하리코프에서 우리 기갑사단의 기동을 참관한게 저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 같아.”

터키 사절단은 프랑스에 도착해 서부전구 총사령관 룬트슈테트 원수의 환대를 받았다. 히틀러는 룬트슈테트에게 터키 사절단이 동부 전선의 기갑사단들로부터 받은 깊은 인상을 활용할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대서양 방벽에서 가장 방어 준비가 잘 갖춰진 지역만 보여주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터키 사절단은 Cap Gris Nez에 있는 해안포대 “프리츠 토트”를 방문했다. 터키 사절단은 노획한 야포로 만든 해안 포대는 볼 수 없었다.

1943년 7월 5일, 벨고로드-쿠르스크-오룔 지구에서 공세가 개시됐다. 공세 첫날 히틀러는 그의 부관들에게 자이츨러로부터 전황 보고가 안 들어왔는지 확인하도록 닥달했다. 그날 오후 12시 30분, 자이츨러는 직접 보고를 하기 위해 히틀러를 찿았다. 히틀러는 자이츨러에게 흥분된 어조로 물었다.

“자이츨러. 쿠르스크의 전황은 어떤가?”

자이츨러는 전황에 대해서 모호한 어투로 얼버무렸다. 자이츨러는 현재 전황이 단편적으로 들어와 있다고 대답했다. 러시아군이 매우 완강히 저항하고 있다는 것 이었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덧 붙였다.

“기습의 효과는 전혀 없었습니다.”

히틀러는 자제력을 잃었다.

“페르디난트! 페르디난트 부대를 당장 투입하란 말이다!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전선을 돌파해야 한다!”

7월 6일, 자이츨러는 보병과 공병들이 러시아군의 방어선을 여전히 돌파하지 못했으며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그 뒤 기갑부대가 투입됐다. 히틀러는 격분했다. 히틀러는 기갑사단들을 예비대로 두고 피해가 어떻든 간에 보병과 공병 부대가 소련군의 방어선을 완전히 뚫기 전 까지는 투입하지 말 것을 명령했었다. 예비대 투입은 돌파구가 열린 다음에 할 계획이었다. 히틀러는 거듭해서 집중적인 타격을 입혀야 한다고 말했다. 이때 히틀러는 마치 열병을 앓는 사람 처럼 보였다. 히틀러는 매 시간 마다 자이츨러에게 러시아군의 방어선이 얼마나 뚫렸는지, 그리고 그의 히틀러 사단이 얼마나 진격했는지 등을 물어봤다.

그리고 며칠 되지 않아 자이츨러는 공세가 완전히 돈좌됐다고 보고했다. 독일군은 방어로 돌아섰고 일부 지구에서는 소련군이 공세를 시작했다. 페르디난트와 티거 전차는 방어진지에 배치된 대전차포와 T-34에 연달아 격파됐다. 히틀러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을 거부했다. 히틀러는 주먹으로 탁자를 치며 소리쳤다.

“이건 다 내 명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야!”

귄세는 히틀러의 명령을 받고 아돌프 히틀러 사단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출발했다. 귄세는 벨고로드에서 히틀러 사단 지휘관인 제프 디트리히를 만났다. 귄세는 착륙하기 전에 하늘에서 소련군의 강력한 방어선과 곳곳에 널려있는 독일 전차와 자주포의 잔해를 볼 수 있었다. 디트리히는 귄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진격 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10km였네. 하지만 피해가 너무 엄청났어. 작전을 시작할 때 내 사단은 150대의 전차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전투에 투입 가능한 게 20대도 되지 않네. 보병의 손실도 매우 큰 상태야. 다른 사단들의 상황도 이보다 나을게 없어. 러시아군의 방어선이 얼마나 종심 깊게 구축됐는지 아는가? 동 프로이센에 돌아가서 말로 보고하는건 쉽겠지. 그러나 여기서는 다르다네. 우리는 돌파를 하지 못했어.”

다음날 저녁 귄세는 동 프로이센으로 돌아갔다. 귄세가 보고를 위해 히틀러를 방문하자 히틀러는 피곤하다는 제스쳐를 취하며 말했다.

“잊어 버리게. 나도 알아. 디트리히 조차 실패했군. 나는 이번 공세로 전세를 완전히 뒤집으려고 했어. 러시아군이 이렇게 강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군.”

Ed. Henrik Eberle and Matthias Uhl, The Hitler Book, p.117~119

이미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연구를 많이 접하신 분들은 어떤 부분이 문제인지 잘 아실 것 입니다.

먼저 디트리히의 이야기를 보시죠.

“내가 진격 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10km였네. 하지만 피해가 너무 엄청났어. 작전을 시작할 때 내 사단은 150대의 전차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전투에 투입 가능한 게 20대도 되지 않네. 보병의 손실도 매우 큰 상태야. 다른 사단들의 상황도 이보다 나을게 없어. 러시아군의 방어선이 얼마나 종심 깊게 구축됐는지 아는가? 동 프로이센에 돌아가서 말로 보고하는건 쉽겠지. 그러나 여기서는 다르다네. 우리는 돌파를 하지 못했어.”


이제는 잘 알려져 있지만 SS 2기갑군단은 그다지 큰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쿠르스크 전투 기간 중이나 그 이후에도 전투 투입 가능한 전차가 20대 이하로 떨어진 사단은 없었지요.

그리고 그 다음. 히틀러의 이야기를 보시죠.

“잊어 버리게. 나도 알아. 디트리히 조차 실패했군. 나는 이번 공세로 전세를 완전히 뒤집으려고 했어. 러시아군이 이렇게 강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군.”


독일측이 쿠르스크 전투를 통해 일거에 전세의 역전을 노렸다는 것은 전형적인 소련의 해석입니다. 소련은 1970년대 까지도 독일군은 쿠르스크의 돌출부를 분쇄한 뒤 모스크바로 총 공세를 가할 계획이었다고 제멋대로 역사를 서술했습니다. 독일측의 의도는 쿠르스크 돌출부를 분쇄해 소련군의 주력 기동부대를 섬멸하고 전선을 단축해 방어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 이었지 더 큰 도박판에 올인 하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보고서는 주로 귄세 등 히틀러의 측근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 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증언 자체의 신뢰도는 둘째 치고 내용 자체에 구린 구석이 많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스탈린의 입맛에 맞춰 주기 위해 많은 부분에 손을 댄 것 같습니다. 신뢰도가 매우 떨어지는 구술 자료집이라고 판단되는군요.

2006년 8월 31일 목요일

[美利堅史] - 露西亞國王 스탈린 世家

노서아 국왕 스탈린은 성은 쥬가시빌리, 이름은 요시프다. 그의 어머니 예카테리나는 노비 출신이라 전한다. 스탈린이 자라자 예카테리나는 아들을 사찰에 집어 넣었다. 이때 노서아에는 마르크스 귀신을 섬기는 사교가 성행했다. 마르크스를 섬기는 무리들은 붉은색을 숭상했기 때문에 홍건적이라고도 한다. 많은 무뢰배들이 마르크스를 섬겼는데 스탈린도 여기에 현혹돼 홍건적이 됐다.

테오도어 루즈벨트 5년, 스탈린이 무리들과 함께 노략질을 시작했는데 이로서 홍건적들 사이에 이름을 떨치게 됐다.
태프트 4년, 마침내 스탈린이 여러 도적들의 추대를 받아 장군이 됐다. 이때 홍건적의 수괴 레닌은 대장군을 칭하며 무리를 모았는데 그 수효가 수만이었다.

윌슨 5년, 노서아 국왕 니콜라이 2세가 부덕해 왕위에서 물러나니 케렌스키가 섭정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이때 노서아는 덕국과 전쟁을 치르며 연전 연패 하니 민심이 자못 흉흉하였다.
괴수 레닌이 때를 틈타 도적의 무리를 모아 난을 일으키니 섭정 케렌스키는 크게 낭패하여 도주하였다. 레닌이 스스로 노서아 왕을 칭하고 국호를 소련이라 하였다.

이때 뜻있는 노서아의 장수들이 앞다투어 홍건적을 토벌하는 군사를 일으켰다.
이 중 대장군 데니킨과 수군 제독 콜착의 군세가 가장 왕성했다. 처음에 관군의 기세가 등등하여 곳곳에서 도적들이 대패했으나 레닌이 트로츠키를 대원수에 임명해 기세를 올리니 이때부터 관군의 예기가 꺾였다.
이때 스탈린도 장군이 되어 관군과 싸웠다. 스탈린이 거느린 군사가 가는 곳 마다 승리하니 그 명성이 거듭 높아졌다.

이때 파란(波蘭)이 군사를 일으키니 순식간에 노서아의 서쪽 변경 수천리가 파란 군사의 말발굽에 짓밟혔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대장군 투하체프스키와 스탈린에게 군사 수십만을 주어 파란을 치게하니 파란 군대가 일패도지하였다. 이때 영길리와 불란서는 홍건적의 기세가 왕성함을 우려해 군사를 일으키려 하니 레닌은 이를 우려해 파란을 치는 군대를 거두었다.

쿨리지 2년, 레닌이 붕어(崩御)하였다. 이에 트로츠키와 부하린 등 여러 괴수들이 서로 앞다퉈 왕위를 노렸다.
홍건적들이 왕을 추대하는 법도는 자못 괴이하다. 먼저 막사과(莫斯科)의 크렘린 궁에 각지의 두령들을 모으고 왕 되기를 원하는 자들이 서로 언변을 겨루는데 이 중 가장 달변인 자를 왕으로 추대한다고 한다.
이때 트로츠키는 자신의 학식을 뽐내며 스탈린이 무뢰배 출신이라 하여 심히 업신여겼다.
그러나 스탈린과 여러 차례 언쟁을 겨루매 매번 논파 당하였다.

이에 여러 무리가 스탈린을 국왕으로 추대했다.

스탈린은 국왕이 되자 흉포한 본색을 드러냈다. 스스로 마르크스, 레닌에 이은 미륵의 현신이라 칭하고 여러 경전을 저술해 두령들 앞에서 강론했는데 그 말이 요망하여 모두 옳은 말이 아니었다.
묵서가에서 숨어살던 트로츠키가 스탈린이 지은 경전을 두고 평하여 “모두 사특하고 괴이한 설이다”라고 하니 스탈린이 이를 듣고 노하여 곡괭이로 쳐 죽였다.

그리고 산업을 일으킨다 하여 농민들을 핍박하니 굶어죽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또 사나운 개 키우기를 좋아하여 그 수가 수천이었는데 그 중 가장 아끼는 개를 “예조프”라 하였다. 예조프의 성질이 사나워 사람을 여럿 물어 죽였으나 오히려 스탈린은 이를 보고 즐거워 하였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5년, 스탈린이 대원수 투하체프스키와 여러 장군들을 참살하였다.
투하체프스키는 일찍이 명장으로 이름이 높아 각국의 무인들이 그 이름을 사모하였다. 하루는 스탈린이 투하체프스키를 잡아들여 죄를 추궁했다.

“네가 덕국과 내통하고 있다니 어찌된 일인가?”

투하체프스키가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어찌 소장이 덕국과 내통하겠사옵니까?”

“짐이 관심법으로 보았노라”

이리하여 투하체프스키와 여러 장수들이 예조프에게 물려 죽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7년, 스탈린이 예조프를 솥에 삶고 더 사나운 개를 들였다. 그 이름을 베리야라고 지으니 사람들이 예조프 보다 더 두려워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9년, 덕국왕 히틀러가 대군을 일으켜 노서아를 쳤다. 노서아의 이름 높은 장수들이 이미 예조프에 물려 죽은지라 군대를 제대로 지휘할 자가 없었다. 덕국 군대가 노서아의 강역 수천리를 휩쓸고 노서아 군사 수백만을 무찌르니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11년, 대장군 바실레프스키가 스탈린그라드에서 덕국 군사를 크게 무찌르니 비로서 덕국의 예기가 꺾였다.

트루먼 1년, 대원수 주코프가 덕국의 왕성 백림을 함락하니 덕국왕 히틀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때 천자가 친히 포츠담 성에서 스탈린의 노고를 치하하고 동구라파를 식읍으로 하사했다. 천자가 일본국을 토벌할 것을 명하니 스탈린이 명을 받들어 일본국을 토벌했다. 다시 천자가 스탈린에게 작위를 거듭 내리고 한국의 절반을 봉읍으로 하사했다.

스탈린이 덕국을 정벌하고 동구라파를 식읍으로 받으니 교만한 마음이 더하여 역심을 품었다.
소련의 군사가 수백만이요 전차가 수만대에 달하니 서구라파의 여러 왕들이 두려워 하니 천자가 나토라는 관청을 두고 구라파에 천병을 보내어 국경을 순찰하게 하였다.
스탈린이 이때부터 번번히 천명을 거스르며 천자의 예를 행하니 화성돈의 뜻 있는 신료들은 이를 불안하게 여겼다.

아이젠하워 1년, 스탈린이 붕어하였다. 이에 베리야가 달을 바라보며 슬피 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