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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24일 목요일

Mythos und Wirklichkeit 한국어판 출간 예정


반가운 소식이 있습니다.

이미 소식을 전해들은 분도 계실겁니다. 『전격전의 전설』을 번역하신 진중근 소령님께서 19세기 중엽에서 독일연방군 초기에 이르는 독일군의 작전사상의 변천을 다룬 Mythos und Wirklichkeit: Geschichte des operativen Denkens im deutschen Heer von Moltke d.Ä. bis Heusinger를 번역해서 출간하실 예정입니다. 『전격전의 전설』을 이어 독일의 최신 군사사 연구가 또다시 한국어로 소개되는 것 입니다. 출판사는 최근 수년간 군사서적을 활발히 간행하고 있는 '길찾기'출판사 입니다. 이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최초의 학술서적이 되겠네요. 아직 영어판도 나오지 않은 책을 한국어로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 입니다. 2016년 1월 말 출간 예정이라고 하는데 한국어 제목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원서는 대충 이렇게 생겼습니다.

 이 저작은 독일군 장교단에서 작전(Operation)이라는 개념이 발생한 배경과 그 발전과정, 그리고 한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작전 단계를 넘어서는 전략개념의 부재를 지적하는 점은 미국의 로버트 시티노(Robert Citino)와 비슷합니다. 전략적 차원의 고찰을 결여하고 있는 독일의 전쟁 수행 방식에 대한 비판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티노의 최근 저작들이 군사적인 측면에 집중하는 반면 이 책의 저자인 그로스는 독일 군부의 정치적인 입장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점에서 탁월하다 하겠습니다. 독일 군부가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공세적인 작전개념을 유지해 발전시킨 배경에 독일 사회에서 군부가 누리고 있던 정치적인 지위, 그리고 민족주의에 기반한 패권적 세계관이 깔려있었다고 비판하는 점은 경청할 만 합니다. 또한 독일의 민군관계에 대한 고찰도 흥미로운데 특히 제2차세계대전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은 이 책에서 제기하는 제3제국의 민군관계와 히틀러의 군 지휘에 대한 비판을 흥미롭게 읽으실 수 있을 것 입니다. 군사적 측면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독일군부의 전략적 식견의 부족을 맹렬히 비판하고 있습니다. 독일 장교단이 자신들의 작전적 능력을 지나치게 과신한 나머지 전략적인 열세를 무시하고 침략전쟁에 나서면서 몰락해 가는 과정은 여러가지로 생각할 점이 많습니다.

이 책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한국어판이 간행되면 서평으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의 군사사 애호가들에게 즐거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이 글을 읽으시면 주변의 밀덕(!)들에게 광고 부탁드립니다. 길찾기가 전문적인 군사 학술서를 출간하는건 처음이고 이 책 자체도 국내에 소개되기 어려운 책입니다. 이 책이 성공을 거두면 앞으로 길찾기에서 군사학술서적을 추가로 발행할 가능성이 높아질 겁니다.


2009년 5월 18일 월요일

러일전쟁이 슐리펜의 전쟁 구상에 끼친 영향

배군님이 봉천회전에 대한 글을 연재하셔서 매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러시아쪽의 시각에서 러일전쟁을 바라본 서적은 조금 읽었지만 일본의 시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던 차에 많은 점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완수할 수 없었던 육군의 결전에 의한 결착, 봉천회전 vol.1 (B군)

완수할 수 없었던 육군의 결전에 의한 결착, 봉천회전 vol.2 (B군)

완수할 수 없었던 육군의 결전에 의한 결착, 봉천회전 vol.3(完) (B군)

그리고 봉천회전 마지막 편을 읽다 보니 러일전쟁에 대한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의 견해가 나와 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 시피 러일전쟁의 결과는 슐리펜의 군사적 계획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전략적인 면에서 러일전쟁이 슐리펜의 전쟁 계획에 가져온 영향은 결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1904년과 1905년의 사건들은 슐리펜에게 독일이 처한 딜레마에 대한 전략적 해결방법이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1904년 러시아와 일본은 조선에서 전쟁에 돌입했다.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러시아군이 동부로 이동하기만 하면 단기간에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실제 결과는 러시아군의 완패(Fiasco)가 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양군은 서로 엎치락 뒤치락 했지만 점차 러시아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러시아군은 점차 만주 내륙으로 밀려났으며 뤼순이 함락되고 발틱함대가 쓰시마 해전에서 섬멸 당하고 국내에서는 혁명에 직면하면서 러시아는 일본과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군은 봉천회전 에서만 10만의 병력을 상실했다.

전쟁의 진행과정은 슐리펜이 러시아군의 능력과 독일의 전략적 상황을 판단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1905년 6월, 슐리펜은 독일 수상에게 러시아군의 한심한 상황을 묘사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오랫동안 러시아군에는 유능한 지휘관이 없으며 러시아 장교단의 대다수는 극도로 부족한 능력만을 가지고 있고 부대는 부족한 훈련을 받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슐리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결점은 러시아군의 끈기와 충성심에 의해 어느 정도 상쇄되는 것으로 믿는다고 적었다. 아시아에서의 전쟁은 이러한 믿음이 잘못 되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소식에 따르면 러시아군 병사들은 장교에 예우를 갖추지도 않았으며 명령에 따르지도 않았다. 더욱이 전쟁의 결과 러시아군의 훈련 수준은 기존에 생각하고 있던 것 보다 더 형편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슐리펜은 러시아군의 가치는 극히 미미하며 가까운 미래에 러시아군이 효율적인 전투 부대가 될 전망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동아시아의 전쟁은 러시아군이 알려진 정보에 따라 기존에 추정되었던 것 보다 우수하지 못하며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군은 효율적으로 바뀌기는커녕 더 악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러시아군은 모든 결연함(Freudigkeit), 모든 신뢰감(Vertrauen), 모든 복종심을 잃었습니다.
러시아군이 개선될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는 무척 의문스럽습니다. 러시아군은 개혁을 실행할 정도의 자각(Selbsterkenntnis)이 없습니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패배의 원인을 군대 자체의 부족함(Unvollkommenheiten)에서 찾지 않고 적의 숫적인 우세나 특정한 지휘관들의 무능함에서 찾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에는 필요한 개혁을 실행하고 사기를 굳건하게 할 만한 능력을 갖춘 인재가 없습니다.”

슐리펜은 러시아군의 허약함에 대한 믿음으로 그때 까지 실행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전략적 대안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기회의 창이 열렸다. 슐리펜은 이제 독일육군의 대부분을 서부전선으로 돌리고 크게 약화되고 문제점 투성이인 러시아군으로부터 동부를 방어하는 데는 소수의 부대만을 남겨도 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Robert T. Foley,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 Erich von Falkenhayn and the Development of Attrition, 1870-1916,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pp.67~68

이렇게 러일전쟁의 결과는 독일의 양면전쟁 계획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러일전쟁의 결과는 전술적인 차원에서는 슐리펜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견해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슐리펜은 1905년 11월과 12월에 실시한 대규모 워게임(Kriegsspiel) 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슐리펜은 그 다음(훈련이 끝난 뒤)에 훈련에 참가한 장교들에게 미래 전쟁의 성격에 대한 자신의 마지막 생각을 이야기 했다. 그는 미래에는 작전을 전개할 때 진지전의 수렁에 더 쉽게 빠져들 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만주에서 벌어진 전쟁은 그 점을 잘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기동 전투를 통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도록 노력해야 하며 전쟁을 ‘1년 혹은 2년’간의 결정적이지 못한 소모전으로 끌고 가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장기전은 전쟁 당사국 모두의 소모와 경제적 혼란만을 가져오게 될 뿐이다. 그러나 설사 진지전의 상황이 오더라도 긴 방어선의 어느 한 곳에는 공격자가 돌파를 달성할 수 있는 취약점이 존재할 것이다. 독일군은 전체적으로 기동 작전을 통해 적의 측면을 포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슐리펜은 단순한 우회 기동을 실시해서는 안되며 한편으로는 적의 정면을 공격해 방어선에 고착시키는 동시에 강력한 부대로 적의 측면으로 포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Terence Zuber,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 : German War Planning 1871-1914,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p.210

슐리펜으로 대표되는 독일의 전통적 군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동을 통한 승리를 추구했으며 전장의 상황이 급변하더라도 반드시 기동전으로 끌고 나가야 한다는 점을 굳게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군사사가들이 지적 하듯 기동전은 작전 단위의 문제점까지는 해결 해 줄 수는 있어도 결코 전략적 차원의 문제에 대한 대안은 아니라는 점 입니다. 슐리펜은 러일전쟁 이전 까지 양면전쟁 상황에서 소모전을 피할 방안을 강구했습니다. 슐리펜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전하자 사실상 서부전선만의 전쟁을 할 수 있게 됐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슐리펜이 기대한 상황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고 독일은 새로운 전쟁에서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소모전으로 말려들게 됩니다. 독일은 특히 동부전선을 중심으로 몇 차례의 기동작전을 통해 많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이러한 승리들이 독일의 전략적 승리를 가져다 주지는 못 했습니다.

2007년 5월 22일 화요일

The People in Arms : Military Myth and National Mobilization since the French Revolution

군사사에서 제가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동원” 입니다. 이렇게 말하기는 아직 공부가 부족하고 읽은 것도 부족하긴 하지만 확실히 전쟁과 “동원”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징병제가 꾸준히 유지되고 있는 국가에서 살고 있으니 “동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어찌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에는 주로 경제적 동원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은 정도였고 “인적 동원”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언급된 서적을 일부 읽은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석달 전에 The People in Arms라는 서적을 구매했습니다. 이 책은 2003년에 출간됐는데 IAS(Institute for Advanced Study)에서 열린 “역사에서의 무장력(Force in History)”라는 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엮은 것 입니다.

이 책에 실린 논문의 저자는 John Whiteclay Chambers II, Owen Connelly, Alan Forrest, Michael Geyer, John Horne, Greg Lockhart, Daniel Moran, Douglas Porch, Mark von Hagen, Arthur Waldron 등인데 이 중 Alan Forrest, John Horne, Mark von Hagen 등 세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 이 책에서 처음 접한 사람들입니다.
Chambers는 서문과 19세기 후반 독일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징병제 논의에 대한 글을 썼으며 Forrest와 Connelly는 1793년 혁명당시 프랑스의 국민 동원에 대해서, Moran은 18세기 중반 독일의 국민 동원 논의에 대해서, Horne은 보불전쟁부터 세계대전기 사이의 국민 동원 논의에 대해서, Geyer는 1차 대전 말기 패전에 직면한 독일 사회 내부의 국민 총동원 논의에 대해서, Hagen은 19세기 후반에서 스탈린에 이르는 시기 러시아와 소련의 사례를, Waldron은 신해혁명부터 중일전쟁 시기까지 중국 군사사상가들(주로 국민당 계열)의 동원에 대한 논의와 결론부를, Lockhart는 베트남 사회주의자들의 사례를, Porch는 알제리 전쟁시기 FLN과 OAS에 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Mark von Hagen과 Arthur Waldron의 글 인데 Hagen의 글은 러시아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약간은 익숙한 내용도 있었던 반면 Waldron의 글은 거의 아는게 없는 중국 현대사인지라 매우 생소하고 한편으로는 재미있었습니다.
Waldron은 신해혁명 이후 근대교육을 받은 중국의 군사사상가들이 새로 습득한 근대 군사사상, 특히 “동원”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실천에 옮기려 했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글은 청나라 말기 양무운동 같이 외형만 유럽을 모방한 개혁의 실패를 경험한 중국의 사상가들이 근대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 유럽식의 국민 동원에 주목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유럽, 특히 프랑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중국의 군사사상가들이 중국의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국민을 동원하는 체제를 만들고자 노력했으나 중국의 사회체제는 유럽식의 국민 동원을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중국의 사례는 근대화를 타율적으로 경험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