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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6일 월요일

2차대전 당시 미국의 전차 무용론

전차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이래 전차의 위치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어왔습니다. 일반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사례로는 제4차 중동전쟁이 가져온 충격이 있겠지요. 제4차 중동전쟁 초기 이스라엘군의 기갑부대가 이집트군의 대전차 전력에 쓴맛을 보자 전차의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방어력과 기동력이 획기적으로 향상된 일련의 제3세대 전차들이 등장하면서 이런 목소리들이 다시 사그러들긴 했지만 말입니다.

2차대전 당시에도 이와 유사한 전차무용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일부 있었던 것 같습니다. Military Affairs 1944년 여름호에 실린 빅맨(Fred K. Vigman)의 "Eclipse of the Tank"라는 글은 대전차화력의 강화로 전장에서 전차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빅맨의 이 글은 미국이 유럽전선에서 본격적인 대규모 지상전을 펼치기 이전의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이 글의 핵심은 2차대전 초반에 전차가 잠시 맹활약하면서 전차의 시대가 오는 듯 했지만 결국 대전차 화력의 증대로 전차라는 무기체계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 입니다. 글에서는 몇몇 실전 사례들을 예시로 들고 있는데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뭔가 좀 이상하게 보입니다.

붉은 군대는 나치의 우세한 기갑전력에 대해 다른 방향에서 대응책을 찾았다. 러시아의 언론들은 전쟁 첫해, 그리고 몇 차례의 작은 승리를 거둔 뒤 여러차례 포병을 “전장의 신”으로 불렀으며 대전차포와 일반 야포를 핵심적인 대전차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포병으로 전차를 상대하여 저지하고, 격퇴할 수 있다는 점이 모스크바 전투에서 드러났다. (독일군은) 1941년 12월, 모스크바에 가장 많은 전차와 기타 기갑장비를 투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붉은 군대는 똑같은 수단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나치가 열등한 수단으로 간주한 포병에 크게 의존했다. 베르너(Max Werner)가 지적한 바와 같이 그 결과 나치의 기갑군은 “무력화 되었으며 글자 그대로 고철더미가 되고 말았다.”

1942년에 들어와 소련군이 독일군을 보다 잘 막아내고 무찌를 수 있게 된 원인은 대전차전을 위해 개발된 많은 수의 향상된 기동력과 향상된 성능을 가진 신형 야포와 같은 포병을 강화하기 위한 큰 노력을 기울인 데 있다.

1942년 11월 19일 시작된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공세에서는 나중에 원수로 진급한 보로노프(Никола́й Н. Во́ронов) 대장의 지휘에 따른 강화된 포병의 대규모 운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1)

물론 전쟁 중이기 때문에 활용 가능한 자료가 극히 제한되기는 했겠지만 저자는 소련이 1942년에 전차군을 편성하는 등 기갑전력의 강화에 주력했다는 점은 무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스탈린그라드 공세에서 소련 기갑부대의 공헌에 관심을 두지 않는 점은 꽤 놀라울 정도 입니다.

이런 태도는 다른 전역을 바라보든 시각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비록 나치의 전차 및 급강하폭격기가 영국의 아프리카 주둔군에 초반의 패배를 안기기는 했지만 영국군이 중근동 전역에서 얻은 전투 경험은 포병을 중시하고 전차의 활용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1942년 6월 13일, 영국군의 1개 여단이 독일군 88mm의 매복에 걸려 난타당한 기갑 부대의 참패 이후 전차를 앞세우는 전술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일어났다. 주포의 양각이 제한적인 전차에 대해 야포의 우세함이 뚜렷하다는 것은 거의 옳은 주장으로 보인다.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을 분쇄한 몽고메리의 대규모 반격은 (1차대전 당시의 전투방식과 같은) 유례 없는 중포의 대량 운용과 전차를 돌파 수단으로 사용하는 대신 지원용도로 사용했다는 것이 특징이다.2)

만약 영국군이나 미군이 1944년 이전에 동부전선과 같은 규모의 독일군 기갑전력과 맞서야 했다면 이런 판단착오를 하지 않았겠지만 북아프리카 전선에 투입된 독일군의 기갑전력은 군단급에 불과했습니다. 1942년 하반기 이후로는 독일군의 소규모 기갑전력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게 되었으니 기갑전투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 일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전차 무용론은 미국에서 상당히 근거 있는 것으로 받아 들여졌던 것 같습니다. 1943년 4월 21일 뉴욕타임즈에는 이런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영국 포병 병과는 이번 전쟁 기간 중 (기존의) 우세를 되찾을 수 있는 만족스러운 신형 전차가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육상의 공격 작전에 있어 포병은 기갑에 비해 이미 압도적인 우위를 갖추었다고 보고 있다.3)

언론 뿐만 아니라 미군 고위층 또한 북아프리카 전역의 경험을 통해  기갑전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됐습니다. 1942년 12월 14일 부터 1943년 1월 25일 까지 전선을 시찰하고 일선 기갑부대의 실태를 조사한 디버스(Jacob L. Devers) 장군이 내린 결론이란게 “M4는 전장에서 가장 우수한 전차다”라는 정도였다니 말입니다.4)  영국군의 전투경험은 미군에게 매우 악영향을 끼쳤는데 맥네어 장군은 북아프리카 전투 이후 대전차대대의 상당수를 견인식 3인치포로 전환하라는 명령을 내리기 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그 결과 노르망디 전역이 시작될 무렵 영국에 배치된 미군의 30개 대전차 대대중 11개 대대가 견인식 대전차포를 장비했다고 하지요.5)

다시 빅맨의 글로 돌아가 보지요. 빅맨은 이 글에서 재미있는 결론을 내립니다.

기동력 자체는 타격력이라고 할 수 없다. 기동력의 가치는 필요한 때와 장소에 화력을 기동력 있게 제공해 줄 수 있는데 있다. 그러나 사용되는 것은 기동력이 아닌 화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차의 기동력과 장갑에 중점을 둔다면 화력이 애매해 지게 된다. 전차의 화력이란 전차가 본질적으로 기관총에 대한 대응병기라는 전제조건에 입각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차의 장갑, 기동력 그리고 화력은 1차대전 당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나타난 밀집된 소총과 기관총 화력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차의 문제점은 대전차 무기를 동원해 전차에 맞서기 전 까지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전차는 기동력을 갖추고 있지만 대전차 병기의 발전에 따라 점차 전장에서 가장 크고 눈에 띄는 표적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차와 야포의 대결에서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야포가 우세하다.6)

이 글이 쓰여질 무렵 미군은 아직 프랑스에 발을 딛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글이 발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전차포의 우세를 점쳤던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1) Fred K. Vigman, “Eclipse of the Tank”, Military Affairs, Vol. 8, No. 2 (Summer, 1944), p.103
2) Fred K. Vigman, ibid, p.103
3) “Germany's Gamble on Tank And Dive-Bomber Held Lost” New York Times(1943. 4. 21)
4) David E. Johnson, Fast Tanks and Heavy Bombers : Innovation in the U. S. Army 1917-1945(Cornell University, 1998), p.190
5) Steve Zaloga, Armored Thunderbolt : The U.S. Army Sherman in World War II, (Stackpole, 2008), pp.72~75
6) Fred K. Vigman, ibid, p.107

2010년 5월 2일 일요일

노르망디 전역의 연합군 공군과 독일 지상군

 노르망디 전역에서 연합군의 항공부대가 독일 지상군을 상대로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에는 실패했다는 점은 이제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한국 내에서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아마 채승병님이 세테를링(Niklas Zetterling)의 Normandy 1944의 제5장, The Effects of Allied Air Power를 번역해서 소개한 이후일 것 입니다. 체터링의 이 글은 독일군과 연합군의 기록을 비교 분석해 연합군 항공전력의 효과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시도했는데 이런 유형의 글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을 것 입니다.




 사실 연합군의 항공전력이 독일 지상군을 상대로 신통치 못한 성과를 거뒀다는 것은 비교적 오래전 부터 알려져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예를들어 1952년에 출간된 윌모트(Chester Wilmot)의 The Struggle for Europe에서는 다소 모호하기는 하지만 연합군 항공전력이 지상전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던 사례를 여러차례 언급하고 있습니다.1) 하지만 연구자들에 의해 통계적인 분석이 시도된 것은 1990년대 이후였고 그 이전의 연구들은 엄밀성이 결여된데다 서술도 모호한 편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2차대전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독일군 고위 지휘관들은 대부분 연합군 공군의 위력에 대해 높게 평가했는데 이것은 연합군 공군력의 위력에 대한 과장된 평가가 널리 퍼지는데 일조했을 것 입니다. 이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중폭격기를 동원해 독일 지상군을 폭격한 사례일 것 입니다. 그러나 연합군 공군력의 성과를 높게 평가하는 연구자들 중에도 전략폭격기 부대의 중폭격기들을 전술폭격에 투입해 거둔 성과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하는 사례도 종종 있어왔습니다.2)

노르망디 전역에서 연합군 공군이 실제로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통계적인 분석을 처음 시도한 것은 구더슨(Ian Gooderson) 이었습니다. 구더슨은 Journal of Strategic Studies에 기고한 두 편의 논문, "Allied Fighter-Bombers versus German Armour in North-West Europe 1944~1945 : Myth and Realities"와 "Heavy and Medium Bombers : How Successful Were They in Tactical Close Air Support During World War II"를 통해 기존에 모호하게 서술되거나 잘못 알려진 사실들에 대한 반박을 시도했습니다. 구더슨의 연구는 미군과 영국군의 자료를 활용해 통계적인 분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매우 신선한 시도였습니다.

 구더슨의 논문 중 전투폭격기 부대가 거둔 전과에 대한 연구는 연합군의 작전조사반(ORS, Operational Research Section)의 기록을 분석해 연합군의 전투폭격기들이 독일군의 기갑차량을 격파하는데는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체터링의 글을 읽어 보신 분들이라면 그 원인을 잘 아실 것 입니다. 노르망디에 투입된 연합군 전투폭격기의 주력은 미육군항공대의 경우 P-47이었고 영국 공군의 경우 타이푼이었습니다. P-47의 경우 8정의 12.7mm기관총이 주무장이고 타이푼은 4문의 20mm기관포가 주무장이었고 이외에 500파운드나 1000파운드 폭탄, 타이푼의 경우는 8발의 3인치 로켓이 있었습니다.
 3인치 로켓의 경우 상당한 위력을 가지고 있어서 1944년 초에 있었던 사격 시험에서 목표물인 판터의 엔진실 상부를 관통해 격파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라면 시험에서 발사한 64발의 로켓탄 중 겨우 세발이 명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시험에 사용된 판터가 고정 목표였는데 말이지요. 3인치 로켓은 빗나갈 경우 전차와 같은 중장갑 목표물에 거의 효과가 없었습니다. 타이푼 조종사들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 3주간에 걸쳐 3인치 로켓 사격 훈련을 받았는데 이정도 훈련으로는 이 까다로운 무기를 제대로 활용하기가 어려웠습니다.3)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로켓을 장비한 타이푼은 대규모로 투입되었습니다. 영국공군은 실전을 통해 획득한 자료를 토대로 1945년에 로켓을 장비한 타이푼에 대한 평가를 내렸습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실전상황에서 5야드 크기의 포진지에 50%의 명중율을 내기 위해서는 350발의 로켓(44소티)이 필요했으며 10야드 크기의 포진지에 대해서는 88발(11소티), 그리고 판터 정도의 전차에 대해서는 140발의 로켓(18소티)이 필요했습니다.4)

 실제로 조종사들은 매우 높은 전과를 기록했다고 믿었지만 전투 뒤의 조사결과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7월 29일 영국공군은 미군의 요청에 따라 가브레(Gavray) 북동쪽 라 발랭(La Baleine)을 지나가는 독일군을 공격했습니다. 영국공군은 이 공격으로 17대의 전차를 격파하고 27대의 전차를 파손시켰다고 보았는데 작전조사반의 조사결과 항공기에 의해 격파된 것이 확실한 것은 타이푼의 로켓에 의해 격파된 판터 1대와 4호전차 1대였고 이밖에 3대의 판터가 자폭, 3대의 판터가 그냥 유기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5) 전투폭격기들이 대 활약을 했다고 알려진 모르탱(Mortain) 전투에서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영국공군 제2전술항공군은 독일 전차 84대를 확실히 격파하고 35대를 미확인 격파했으며 21대에 손상을 입혔다고 보고했습니다. 미 육군항공대 제9항공군은 69대의 격파, 8대의 미확인 격파, 35대에 손상을 입혔다고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전투 뒤 영국육군의 작전조사반과 영국공군의 작전조사반이 모르탱 지구를 조사한 결과 33대의 판터와 10대의 4호전차, 3대의 돌격포가 전장에 남겨졌으며 이 중 항공기에 의해 격파된 것은 판터 6대(로켓에 의해 5대, 폭탄에 의해 1대)와 4호전차 3대(로켓에 의해 2대, 폭탄에 의해 1대)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6) 이 전투에서도 항공기에 의해 격파된 것 보다는 승무원들이 버리고 도망친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항공기에 의해 판터 6대가 격파된 반면 승무원들이 유기하거나 자폭시킨 판터는 10대였다고 하니 말입니다.7) 전투폭격기가 중포보다는 훨씬 신속하고 정확한 대응을 할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만8) 실전에서 거둔 성과는 다소 실망럽게 보입니다.

 이 점은 중폭격기들도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중폭격기들의 효용에 대해서는 전후에도 상당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굿우드(Goodwood) 작전과 코브라(Cobra) 작전 당시의 유명한 사례가 보여주듯 중폭격기에 의한 폭격은 폭격 초기에는 어느 정도 혼란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독일군은 대개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끈질긴 저항을 했습니다. 찬우드(Charnwood) 작전 당시인 1944년 7월 7일 독일군 방어선에 467대의 랭카스터와 핼리팩스 중폭격기가 동원되어 2,560톤의 폭탄을 투하했습니다만9) 그 효과는 매우 미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영국군의 주공을 상대한 12SS 기갑사단의 경우 이러한 대규모 폭격에도 불구하고 사기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격렬하게 저항했으며 오히려 연합군의 폭격으로 캉에 남아있던 민간인 300~400명이 부상을 당하는 등 '부수적 피해'가 발생했습니다.10) 실제로 영국 제21집단군의 작전조사반은 중폭격기를 동원한 폭격의 효율성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있었습니다.11) 이당시 전투에 참여한 영국 육군 장교들도 캉에 대해 폭격을 해야 했는지 회의감을 나타냈을 정도라고 합니다.12) 유사한 사례는 꽤 많이 있는데 잘 알려진 체터링의 저작에 따르면 6월 29일 100대의 중폭격기가 9SS기갑사단의 20기갑척탄병연대 3대대를 폭격했을 때 사망자는 20여명에 그쳤으며 80% 가까운 차량이 그날 저녁까지 가동가능한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앞서 언급한 12SS사단의 경우 어느정도 방어선을 구축한 상태였지만 9SS기갑사단의 경우 공격을 위해 집결하고 있어 매우 취약한 상태였음에도 말입니다.13)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연합군의 근접항공지원은 상당한 오폭을 일으켰습니다. 가장 유명한 코브라 작전 당시의 오폭은 111명의 미군을 사망하게 했으며 서유럽전선에서 가장 높은 계급의 미군 사망자를 발생시키기도 했지요. 미국측의 조사에 따르면 이날 35대에서 60대 정도의 중폭격기와 42대의 중형폭격기가 미군을 폭격했다고 합니다.14) 사실 아군에 의한 오폭은 꽤 흔한 일이었습니다. 노르망디 전역 초기인 6월 8일에서 18일까지 미 육군항공대의 제9전술항공사령부(Tactical Air Command)는 13건의 오폭이 발생했다고 기록했습니다.15) 이런 오폭은 노르망디 전역 내내 계속되었고 심한 경우에는 한 부대가 계속해서 오폭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모르탱 전투당시 미육군 제30보병사단 120보병연대 본부는 단 하룻동안 아군 항공기에 의해 10번이나 공격받았고 이 공격으로 연대 군수참모가 전사했다고 하지요.16)

노르망디 전역에서 연합군 공군의 전술항공지원은 직접적인 타격 보다는 간접적으로 피해를 입혔다는 견해가 많습니다. 특히 연합군 항공력의 전과에 대해 낮게 평가하는 연구자들도 심리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고 있지요. 실제로 영국군이 독일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저공비행하는 전투폭격기의 기총소사나 로켓 사격은 지상부대의 사기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17) 체터링도 그의 저작에서 연합군 공군이 독일 지상군에게 심리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서술하고 있지요.18) 부대의 이동과 집결에 지장을 끼친 것도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독일측 기록을 활용한 체터링의 경우는 연합군 공군이 부대의 이동과 집결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보다 회의적인 입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교도기갑사단 사단장 바이어라인은 6월 8일 전선으로 이동하던 중 공습으로 5대의 전차와 84대의 보병수송장갑차 및 견인용 하프트랙, 자주포와 130대의 자동차를 상실했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19) 이에 대해 체터링은 6월 10일의 보고서에는 교도기갑사단이 노르망디로의 행군 중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들어 바이어라인의 회고는 오류일 가능성을 제기합니다.20)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 이긴 합니다만 2차대전 당시 전투폭격기나 폭격기에 의한 근접항공지원은 적군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기에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장갑화 되지 않은 차량이나 포병에 대해서는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고 심리적인 위력이 크긴 했지만 공군력 단독으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1) Chester Wilmot, The Struggle for Europe(London, Collins, 1952)
2) Alan Wilt, "The Air Campaign", Theodore A. Wilson(ed.) D-Day 1944(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71/1994), pp.150~151
3) Ian Gooderson, "Allied Fighter-Bombers versus German Armour in North-West Europe 1944~1945 : Myth and Realities",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14-2(1991), pp.211~212
4) Ian Gooderson, 1991, p.213
5) Ian Gooderson, 1991, pp.217~218
6) Ian Gooderson, 1991, pp.221~222
7) Ian Gooderson, 1991, p.222; Mark J. Reardon, Victory at Mortain : Stopping Hitler's Panzer Counteroffensive(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2), p.137
8) Alan Wilt, ibid., p.149
9) Chester Wilmot, ibid., p.351
10) Hubert Meyer, Kriegsgeschichte der 12.SS-Panzerdivision Hitlerjugend, band I(Coburg, Nation Europa, 1999), ss.253~254
11) Ian Gooderson, "Heavy and Medium Bombers : How Successful Were They in Tactical Close Air Support During World War II",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15-3(1992)
12) Carlo D'Este, Decision in Normandy(Old Saybrook, Konecky&Konecky, 1983/1994), p.315
13) Niklas Zetterling, Normandy 1944 : German Military Organization, Cobat Power and Organizational Effectiveness(Winnipeg, Fedorowicz, 2000), p.44
14) Richard G. Davis, Carl A. Spaatz and the Air War in Europe(Washington, Center for Air Force History, 1993), p.474
15) Alan Wilt, ibid., p.151
16) Mark J. Reardon, ibid., p.113
17) Ian Gooderson, 1991, p.216
18) Niklas Zetterling, ibid., p.37
19) Ian Gooderson, 1991, p.216
20) Niklas Zetterling, ibid., p.46

노르망디 전역의 연합군 공군과 독일 지상군

 노르망디 전역에서 연합군의 항공부대가 독일 지상군을 상대로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에는 실패했다는 점은 이제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한국 내에서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아마 채승병님이 체터링(Niklas Zetterling)의 Normandy 1944의 제5장, The Effects of Allied Air Power를 번역해서 소개한 이후일 것 입니다. 체터링의 이 글은 독일군과 연합군의 기록을 비교 분석해 연합군 항공전력의 효과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시도했는데 이런 유형의 글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을 것 입니다.




 사실 연합군의 항공전력이 독일 지상군을 상대로 신통치 못한 성과를 거뒀다는 것은 비교적 오래전 부터 알려져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예를들어 1952년에 출간된 윌모트(Chester Wilmot)의 The Struggle for Europe에서는 다소 모호하기는 하지만 연합군 항공전력이 지상전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던 사례를 여러차례 언급하고 있습니다.1) 하지만 연구자들에 의해 통계적인 분석이 시도된 것은 1990년대 이후였고 그 이전의 연구들은 엄밀성이 결여된데다 서술도 모호한 편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2차대전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독일군 고위 지휘관들은 대부분 연합군 공군의 위력에 대해 높게 평가했는데 이것은 연합군 공군력의 위력에 대한 과장된 평가가 널리 퍼지는데 일조했을 것 입니다. 이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중폭격기를 동원해 독일 지상군을 폭격한 사례일 것 입니다. 그러나 연합군 공군력의 성과를 높게 평가하는 연구자들 중에도 전략폭격기 부대의 중폭격기들을 전술폭격에 투입해 거둔 성과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하는 사례도 종종 있어왔습니다.2)

노르망디 전역에서 연합군 공군이 실제로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통계적인 분석을 처음 시도한 것은 구더슨(Ian Gooderson) 이었습니다. 구더슨은 Journal of Strategic Studies에 기고한 두 편의 논문, "Allied Fighter-Bombers versus German Armour in North-West Europe 1944~1945 : Myth and Realities"와 "Heavy and Medium Bombers : How Successful Were They in Tactical Close Air Support During World War II"를 통해 기존에 모호하게 서술되거나 잘못 알려진 사실들에 대한 반박을 시도했습니다. 구더슨의 연구는 미군과 영국군의 자료를 활용해 통계적인 분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매우 신선한 시도였습니다.

 구더슨의 논문 중 전투폭격기 부대가 거둔 전과에 대한 연구는 연합군의 작전조사반(ORS, Operational Research Section)의 기록을 분석해 연합군의 전투폭격기들이 독일군의 기갑차량을 격파하는데는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체터링의 글을 읽어 보신 분들이라면 그 원인을 잘 아실 것 입니다. 노르망디에 투입된 연합군 전투폭격기의 주력은 미육군항공대의 경우 P-47이었고 영국 공군의 경우 타이푼이었습니다. P-47의 경우 8정의 12.7mm기관총이 주무장이고 타이푼은 4문의 20mm기관포가 주무장이었고 이외에 500파운드나 1000파운드 폭탄, 타이푼의 경우는 8발의 3인치 로켓이 있었습니다.
 3인치 로켓의 경우 상당한 위력을 가지고 있어서 1944년 초에 있었던 사격 시험에서 목표물인 판터의 엔진실 상부를 관통해 격파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라면 시험에서 발사한 64발의 로켓탄 중 겨우 세발이 명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시험에 사용된 판터가 고정 목표였는데 말이지요. 3인치 로켓은 빗나갈 경우 전차와 같은 중장갑 목표물에 거의 효과가 없었습니다. 타이푼 조종사들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 3주간에 걸쳐 3인치 로켓 사격 훈련을 받았는데 이정도 훈련으로는 이 까다로운 무기를 제대로 활용하기가 어려웠습니다.3)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로켓을 장비한 타이푼은 대규모로 투입되었습니다. 영국공군은 실전을 통해 획득한 자료를 토대로 1945년에 로켓을 장비한 타이푼에 대한 평가를 내렸습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실전상황에서 5야드 크기의 포진지에 50%의 명중율을 내기 위해서는 350발의 로켓(44소티)이 필요했으며 10야드 크기의 포진지에 대해서는 88발(11소티), 그리고 판터 정도의 전차에 대해서는 140발의 로켓(18소티)이 필요했습니다.4)

 실제로 조종사들은 매우 높은 전과를 기록했다고 믿었지만 전투 뒤의 조사결과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7월 29일 영국공군은 미군의 요청에 따라 가브레(Gavray) 북동쪽 라 발랭(La Baleine)을 지나가는 독일군을 공격했습니다. 영국공군은 이 공격으로 17대의 전차를 격파하고 27대의 전차를 파손시켰다고 보았는데 작전조사반의 조사결과 항공기에 의해 격파된 것이 확실한 것은 타이푼의 로켓에 의해 격파된 판터 1대와 4호전차 1대였고 이밖에 3대의 판터가 자폭, 3대의 판터가 그냥 유기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5) 전투폭격기들이 대 활약을 했다고 알려진 모르탱(Mortain) 전투에서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영국공군 제2전술항공군은 독일 전차 84대를 확실히 격파하고 35대를 미확인 격파했으며 21대에 손상을 입혔다고 보고했습니다. 미 육군항공대 제9항공군은 69대의 격파, 8대의 미확인 격파, 35대에 손상을 입혔다고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전투 뒤 영국육군의 작전조사반과 영국공군의 작전조사반이 모르탱 지구를 조사한 결과 33대의 판터와 10대의 4호전차, 3대의 돌격포가 전장에 남겨졌으며 이 중 항공기에 의해 격파된 것은 판터 6대(로켓에 의해 5대, 폭탄에 의해 1대)와 4호전차 3대(로켓에 의해 2대, 폭탄에 의해 1대)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6) 이 전투에서도 항공기에 의해 격파된 것 보다는 승무원들이 버리고 도망친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항공기에 의해 판터 6대가 격파된 반면 승무원들이 유기하거나 자폭시킨 판터는 10대였다고 하니 말입니다.7) 전투폭격기가 중포보다는 훨씬 신속하고 정확한 대응을 할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만8) 실전에서 거둔 성과는 다소 실망럽게 보입니다.

 이 점은 중폭격기들도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중폭격기들의 효용에 대해서는 전후에도 상당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굿우드(Goodwood) 작전과 코브라(Cobra) 작전 당시의 유명한 사례가 보여주듯 중폭격기에 의한 폭격은 폭격 초기에는 어느 정도 혼란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독일군은 대개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끈질긴 저항을 했습니다. 찬우드(Charnwood) 작전 당시인 1944년 7월 7일 독일군 방어선에 467대의 랭카스터와 핼리팩스 중폭격기가 동원되어 2,560톤의 폭탄을 투하했습니다만9) 그 효과는 매우 미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영국군의 주공을 상대한 12SS 기갑사단의 경우 이러한 대규모 폭격에도 불구하고 사기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격렬하게 저항했으며 오히려 연합군의 폭격으로 캉에 남아있던 민간인 300~400명이 부상을 당하는 등 '부수적 피해'가 발생했습니다.10) 실제로 영국 제21집단군의 작전조사반은 중폭격기를 동원한 폭격의 효율성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있었습니다.11) 이당시 전투에 참여한 영국 육군 장교들도 캉에 대해 폭격을 해야 했는지 회의감을 나타냈을 정도라고 합니다.12) 유사한 사례는 꽤 많이 있는데 잘 알려진 체터링의 저작에 따르면 6월 29일 100대의 중폭격기가 9SS기갑사단의 20기갑척탄병연대 3대대를 폭격했을 때 사망자는 20여명에 그쳤으며 80% 가까운 차량이 그날 저녁까지 가동가능한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앞서 언급한 12SS사단의 경우 어느정도 방어선을 구축한 상태였지만 9SS기갑사단의 경우 공격을 위해 집결하고 있어 매우 취약한 상태였음에도 말입니다.13)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연합군의 근접항공지원은 상당한 오폭을 일으켰습니다. 가장 유명한 코브라 작전 당시의 오폭은 111명의 미군을 사망하게 했으며 서유럽전선에서 가장 높은 계급의 미군 사망자를 발생시키기도 했지요. 미국측의 조사에 따르면 이날 35대에서 60대 정도의 중폭격기와 42대의 중형폭격기가 미군을 폭격했다고 합니다.14) 사실 아군에 의한 오폭은 꽤 흔한 일이었습니다. 노르망디 전역 초기인 6월 8일에서 18일까지 미 육군항공대의 제9전술항공사령부(Tactical Air Command)는 13건의 오폭이 발생했다고 기록했습니다.15) 이런 오폭은 노르망디 전역 내내 계속되었고 심한 경우에는 한 부대가 계속해서 오폭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모르탱 전투당시 미육군 제30보병사단 120보병연대 본부는 단 하룻동안 아군 항공기에 의해 10번이나 공격받았고 이 공격으로 연대 군수참모가 전사했다고 하지요.16)

노르망디 전역에서 연합군 공군의 전술항공지원은 직접적인 타격 보다는 간접적으로 피해를 입혔다는 견해가 많습니다. 특히 연합군 항공력의 전과에 대해 낮게 평가하는 연구자들도 심리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고 있지요. 실제로 영국군이 독일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저공비행하는 전투폭격기의 기총소사나 로켓 사격은 지상부대의 사기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17) 체터링도 그의 저작에서 연합군 공군이 독일 지상군에게 심리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서술하고 있지요.18) 부대의 이동과 집결에 지장을 끼친 것도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독일측 기록을 활용한 체터링의 경우는 연합군 공군이 부대의 이동과 집결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보다 회의적인 입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교도기갑사단 사단장 바이어라인은 6월 8일 전선으로 이동하던 중 공습으로 5대의 전차와 84대의 보병수송장갑차 및 견인용 하프트랙, 자주포와 130대의 자동차를 상실했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19) 이에 대해 체터링은 6월 10일의 보고서에는 교도기갑사단이 노르망디로의 행군 중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들어 바이어라인의 회고는 오류일 가능성을 제기합니다.20)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 이긴 합니다만 2차대전 당시 전투폭격기나 폭격기에 의한 근접항공지원은 적군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기에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장갑화 되지 않은 차량이나 포병에 대해서는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고 심리적인 위력이 크긴 했지만 공군력 단독으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1) Chester Wilmot, The Struggle for Europe(London, Collins, 1952)
2) Alan Wilt, "The Air Campaign", Theodore A. Wilson(ed.) D-Day 1944(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71/1994), pp.150~151
3) Ian Gooderson, "Allied Fighter-Bombers versus German Armour in North-West Europe 1944~1945 : Myth and Realities",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14-2(1991), pp.211~212
4) Ian Gooderson, 1991, p.213
5) Ian Gooderson, 1991, pp.217~218
6) Ian Gooderson, 1991, pp.221~222
7) Ian Gooderson, 1991, p.222; Mark J. Reardon, Victory at Mortain : Stopping Hitler's Panzer Counteroffensive(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2), p.137
8) Alan Wilt, ibid., p.149
9) Chester Wilmot, ibid., p.351
10) Hubert Meyer, Kriegsgeschichte der 12.SS-Panzerdivision Hitlerjugend, band I(Coburg, Nation Europa, 1999), ss.253~254
11) Ian Gooderson, "Heavy and Medium Bombers : How Successful Were They in Tactical Close Air Support During World War II",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15-3(1992)
12) Carlo D'Este, Decision in Normandy(Old Saybrook, Konecky&Konecky, 1983/1994), p.315
13) Niklas Zetterling, Normandy 1944 : German Military Organization, Cobat Power and Organizational Effectiveness(Winnipeg, Fedorowicz, 2000), p.44
14) Richard G. Davis, Carl A. Spaatz and the Air War in Europe(Washington, Center for Air Force History, 1993), p.474
15) Alan Wilt, ibid., p.151
16) Mark J. Reardon, ibid., p.113
17) Ian Gooderson, 1991, p.216
18) Niklas Zetterling, ibid., p.37
19) Ian Gooderson, 1991, p.216
20) Niklas Zetterling, ibid., p.46

노르망디 전역의 연합군 공군과 독일 지상군

 노르망디 전역에서 연합군의 항공부대가 독일 지상군을 상대로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에는 실패했다는 점은 이제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한국 내에서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아마 채승병님이 체터링(Niklas Zetterling)의 Normandy 1944의 제5장, The Effects of Allied Air Power를 번역해서 소개한 이후일 것 입니다. 체터링의 이 글은 독일군과 연합군의 기록을 비교 분석해 연합군 항공전력의 효과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시도했는데 이런 유형의 글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을 것 입니다.




 사실 연합군의 항공전력이 독일 지상군을 상대로 신통치 못한 성과를 거뒀다는 것은 비교적 오래전 부터 알려져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예를들어 1952년에 출간된 윌모트(Chester Wilmot)의 The Struggle for Europe에서는 다소 모호하기는 하지만 연합군 항공전력이 지상전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던 사례를 여러차례 언급하고 있습니다.1) 하지만 연구자들에 의해 통계적인 분석이 시도된 것은 1990년대 이후였고 그 이전의 연구들은 엄밀성이 결여된데다 서술도 모호한 편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2차대전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독일군 고위 지휘관들은 대부분 연합군 공군의 위력에 대해 높게 평가했는데 이것은 연합군 공군력의 위력에 대한 과장된 평가가 널리 퍼지는데 일조했을 것 입니다. 이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중폭격기를 동원해 독일 지상군을 폭격한 사례일 것 입니다. 그러나 연합군 공군력의 성과를 높게 평가하는 연구자들 중에도 전략폭격기 부대의 중폭격기들을 전술폭격에 투입해 거둔 성과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하는 사례도 종종 있어왔습니다.2)

노르망디 전역에서 연합군 공군이 실제로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통계적인 분석을 처음 시도한 것은 구더슨(Ian Gooderson) 이었습니다. 구더슨은 Journal of Strategic Studies에 기고한 두 편의 논문, "Allied Fighter-Bombers versus German Armour in North-West Europe 1944~1945 : Myth and Realities"와 "Heavy and Medium Bombers : How Successful Were They in Tactical Close Air Support During World War II"를 통해 기존에 모호하게 서술되거나 잘못 알려진 사실들에 대한 반박을 시도했습니다. 구더슨의 연구는 미군과 영국군의 자료를 활용해 통계적인 분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매우 신선한 시도였습니다.

 구더슨의 논문 중 전투폭격기 부대가 거둔 전과에 대한 연구는 연합군의 작전조사반(ORS, Operational Research Section)의 기록을 분석해 연합군의 전투폭격기들이 독일군의 기갑차량을 격파하는데는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체터링의 글을 읽어 보신 분들이라면 그 원인을 잘 아실 것 입니다. 노르망디에 투입된 연합군 전투폭격기의 주력은 미육군항공대의 경우 P-47이었고 영국 공군의 경우 타이푼이었습니다. P-47의 경우 8정의 12.7mm기관총이 주무장이고 타이푼은 4문의 20mm기관포가 주무장이었고 이외에 500파운드나 1000파운드 폭탄, 타이푼의 경우는 8발의 3인치 로켓이 있었습니다.
 3인치 로켓의 경우 상당한 위력을 가지고 있어서 1944년 초에 있었던 사격 시험에서 목표물인 판터의 엔진실 상부를 관통해 격파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라면 시험에서 발사한 64발의 로켓탄 중 겨우 세발이 명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시험에 사용된 판터가 고정 목표였는데 말이지요. 3인치 로켓은 빗나갈 경우 전차와 같은 중장갑 목표물에 거의 효과가 없었습니다. 타이푼 조종사들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 3주간에 걸쳐 3인치 로켓 사격 훈련을 받았는데 이정도 훈련으로는 이 까다로운 무기를 제대로 활용하기가 어려웠습니다.3)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로켓을 장비한 타이푼은 대규모로 투입되었습니다. 영국공군은 실전을 통해 획득한 자료를 토대로 1945년에 로켓을 장비한 타이푼에 대한 평가를 내렸습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실전상황에서 5야드 크기의 포진지에 50%의 명중율을 내기 위해서는 350발의 로켓(44소티)이 필요했으며 10야드 크기의 포진지에 대해서는 88발(11소티), 그리고 판터 정도의 전차에 대해서는 140발의 로켓(18소티)이 필요했습니다.4)

 실제로 조종사들은 매우 높은 전과를 기록했다고 믿었지만 전투 뒤의 조사결과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7월 29일 영국공군은 미군의 요청에 따라 가브레(Gavray) 북동쪽 라 발랭(La Baleine)을 지나가는 독일군을 공격했습니다. 영국공군은 이 공격으로 17대의 전차를 격파하고 27대의 전차를 파손시켰다고 보았는데 작전조사반의 조사결과 항공기에 의해 격파된 것이 확실한 것은 타이푼의 로켓에 의해 격파된 판터 1대와 4호전차 1대였고 이밖에 3대의 판터가 자폭, 3대의 판터가 그냥 유기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5) 전투폭격기들이 대 활약을 했다고 알려진 모르탱(Mortain) 전투에서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영국공군 제2전술항공군은 독일 전차 84대를 확실히 격파하고 35대를 미확인 격파했으며 21대에 손상을 입혔다고 보고했습니다. 미 육군항공대 제9항공군은 69대의 격파, 8대의 미확인 격파, 35대에 손상을 입혔다고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전투 뒤 영국육군의 작전조사반과 영국공군의 작전조사반이 모르탱 지구를 조사한 결과 33대의 판터와 10대의 4호전차, 3대의 돌격포가 전장에 남겨졌으며 이 중 항공기에 의해 격파된 것은 판터 6대(로켓에 의해 5대, 폭탄에 의해 1대)와 4호전차 3대(로켓에 의해 2대, 폭탄에 의해 1대)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6) 이 전투에서도 항공기에 의해 격파된 것 보다는 승무원들이 버리고 도망친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항공기에 의해 판터 6대가 격파된 반면 승무원들이 유기하거나 자폭시킨 판터는 10대였다고 하니 말입니다.7) 전투폭격기가 중포보다는 훨씬 신속하고 정확한 대응을 할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만8) 실전에서 거둔 성과는 다소 실망럽게 보입니다.

 이 점은 중폭격기들도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중폭격기들의 효용에 대해서는 전후에도 상당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굿우드(Goodwood) 작전과 코브라(Cobra) 작전 당시의 유명한 사례가 보여주듯 중폭격기에 의한 폭격은 폭격 초기에는 어느 정도 혼란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독일군은 대개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끈질긴 저항을 했습니다. 찬우드(Charnwood) 작전 당시인 1944년 7월 7일 독일군 방어선에 467대의 랭카스터와 핼리팩스 중폭격기가 동원되어 2,560톤의 폭탄을 투하했습니다만9) 그 효과는 매우 미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영국군의 주공을 상대한 12SS 기갑사단의 경우 이러한 대규모 폭격에도 불구하고 사기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격렬하게 저항했으며 오히려 연합군의 폭격으로 캉에 남아있던 민간인 300~400명이 부상을 당하는 등 '부수적 피해'가 발생했습니다.10) 실제로 영국 제21집단군의 작전조사반은 중폭격기를 동원한 폭격의 효율성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있었습니다.11) 이당시 전투에 참여한 영국 육군 장교들도 캉에 대해 폭격을 해야 했는지 회의감을 나타냈을 정도라고 합니다.12) 유사한 사례는 꽤 많이 있는데 잘 알려진 체터링의 저작에 따르면 6월 29일 100대의 중폭격기가 9SS기갑사단의 20기갑척탄병연대 3대대를 폭격했을 때 사망자는 20여명에 그쳤으며 80% 가까운 차량이 그날 저녁까지 가동가능한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앞서 언급한 12SS사단의 경우 어느정도 방어선을 구축한 상태였지만 9SS기갑사단의 경우 공격을 위해 집결하고 있어 매우 취약한 상태였음에도 말입니다.13)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연합군의 근접항공지원은 상당한 오폭을 일으켰습니다. 가장 유명한 코브라 작전 당시의 오폭은 111명의 미군을 사망하게 했으며 서유럽전선에서 가장 높은 계급의 미군 사망자를 발생시키기도 했지요. 미국측의 조사에 따르면 이날 35대에서 60대 정도의 중폭격기와 42대의 중형폭격기가 미군을 폭격했다고 합니다.14) 사실 아군에 의한 오폭은 꽤 흔한 일이었습니다. 노르망디 전역 초기인 6월 8일에서 18일까지 미 육군항공대의 제9전술항공사령부(Tactical Air Command)는 13건의 오폭이 발생했다고 기록했습니다.15) 이런 오폭은 노르망디 전역 내내 계속되었고 심한 경우에는 한 부대가 계속해서 오폭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모르탱 전투당시 미육군 제30보병사단 120보병연대 본부는 단 하룻동안 아군 항공기에 의해 10번이나 공격받았고 이 공격으로 연대 군수참모가 전사했다고 하지요.16)

노르망디 전역에서 연합군 공군의 전술항공지원은 직접적인 타격 보다는 간접적으로 피해를 입혔다는 견해가 많습니다. 특히 연합군 항공력의 전과에 대해 낮게 평가하는 연구자들도 심리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고 있지요. 실제로 영국군이 독일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저공비행하는 전투폭격기의 기총소사나 로켓 사격은 지상부대의 사기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17) 체터링도 그의 저작에서 연합군 공군이 독일 지상군에게 심리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서술하고 있지요.18) 부대의 이동과 집결에 지장을 끼친 것도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독일측 기록을 활용한 체터링의 경우는 연합군 공군이 부대의 이동과 집결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보다 회의적인 입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교도기갑사단 사단장 바이어라인은 6월 8일 전선으로 이동하던 중 공습으로 5대의 전차와 84대의 보병수송장갑차 및 견인용 하프트랙, 자주포와 130대의 자동차를 상실했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19) 이에 대해 체터링은 6월 10일의 보고서에는 교도기갑사단이 노르망디로의 행군 중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들어 바이어라인의 회고는 오류일 가능성을 제기합니다.20)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 이긴 합니다만 2차대전 당시 전투폭격기나 폭격기에 의한 근접항공지원은 적군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기에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장갑화 되지 않은 차량이나 포병에 대해서는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고 심리적인 위력이 크긴 했지만 공군력 단독으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1) Chester Wilmot, The Struggle for Europe(London, Collins, 1952)
2) Alan Wilt, "The Air Campaign", Theodore A. Wilson(ed.) D-Day 1944(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71/1994), pp.150~151
3) Ian Gooderson, "Allied Fighter-Bombers versus German Armour in North-West Europe 1944~1945 : Myth and Realities",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14-2(1991), pp.211~212
4) Ian Gooderson, 1991, p.213
5) Ian Gooderson, 1991, pp.217~218
6) Ian Gooderson, 1991, pp.221~222
7) Ian Gooderson, 1991, p.222; Mark J. Reardon, Victory at Mortain : Stopping Hitler's Panzer Counteroffensive(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2), p.137
8) Alan Wilt, ibid., p.149
9) Chester Wilmot, ibid., p.351
10) Hubert Meyer, Kriegsgeschichte der 12.SS-Panzerdivision Hitlerjugend, band I(Coburg, Nation Europa, 1999), ss.253~254
11) Ian Gooderson, "Heavy and Medium Bombers : How Successful Were They in Tactical Close Air Support During World War II",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15-3(1992)
12) Carlo D'Este, Decision in Normandy(Old Saybrook, Konecky&Konecky, 1983/1994), p.315
13) Niklas Zetterling, Normandy 1944 : German Military Organization, Cobat Power and Organizational Effectiveness(Winnipeg, Fedorowicz, 2000), p.44
14) Richard G. Davis, Carl A. Spaatz and the Air War in Europe(Washington, Center for Air Force History, 1993), p.474
15) Alan Wilt, ibid., p.151
16) Mark J. Reardon, ibid., p.113
17) Ian Gooderson, 1991, p.216
18) Niklas Zetterling, ibid., p.37
19) Ian Gooderson, 1991, p.216
20) Niklas Zetterling, ibid., p.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