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21일 금요일

독일군의 군마 동원과 유럽의 농업

2차대전 당시 독일은 점령지역에서 징발이라는 이름의 약탈을 통해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하나 꼽으라면 "군마"를 들 수 있을 것 입니다. 독일군은 전쟁 초기 부터 대량의 마필을 사용했으며 전쟁이 지속될 수록 그 양은 늘어만 갔습니다. 1939년에 독일군은 59만 마리의 군마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1945년 1월에 이르면 1,198,724마리로 늘어납니다. 전쟁이 지속될 수록 병력이 증가했고 동시에 차량의 보충이 손실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전통적인 수단에 의존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이지요. 그런데 독일은 자체적으로 군마의 대량 소모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고 전쟁 초기부터 점령지에서의 군마 징발에 크게 의존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점령지역에서의 마필 감소를 가져왔는데 이것은 아직 기계화가 충분히 되어 있지 않아 축력에 의존했던 유럽의 농업 방식에 큰 피해를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독일군의 마필 징발이 유럽의 농업에 끼친 영향에 관심을 연구자로는 디나도(Richard L. DiNardo)가 있습니다. 디나도는 1988년에 발표한 Horse-Drawn Transport in the German Army라는 논문의 결론 부분에서 독일이 전쟁 기간 중 점령지에서 막대한 마필을 징발한 것이 전쟁 기간 중 유럽의 농업생산을 감소시킨 원인 중 하나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전쟁 초기에 점령된 폴란드는 독일의 주된 군마 공급처가 되었고 1940년 서부전역에 동원된 보충용 군마의 대부분을 충당했습니다. 폴란드의 농업생산량 감소는 매우 놀라운데 1939년에 227만톤이었던 밀 수확량이 1940년에는 177만8천톤으로 급감했고 이것이 1942년에는 133만2천톤 까지 떨어집니다.1) 서부전역이 독일의 대 승리로 끝난 뒤에는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가 독일의 새로운 약탈 대상이 되었습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경우는 폴란드 만큼 약탈이 심하지는 않았으나 농업용 마필의 감소는 뚜렸습니다.(네덜란드의 경우 전쟁 중 마필의 숫자는 증가했는데 농업용 마필만 감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역시 독일에게 가장 혹독하게 당한 것은 소련일 것 입니다.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1941년 6월 22일 부터 1942년 1월 20일까지 335,588마리(169,172마리 폐사+166,416마리 질병)의 말을 상실하는 끔찍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여기에 같은 기간 동안 보충된 마필은 불과 47,801마리에 불과했기 때문에 독일군은 어쩔 수 없이 폴란드나 서유럽산의 말 보다 체구가 작고 힘도 약한 러시아산 말을 보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89,725마리의 러시아 말이 노획되었습니다.2) 1942년 이후 러시아산 말이 대량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러시아산의 약한 말을 지칭하는 Panjepferde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였다고 하지요.3)
사실 소련은 집단화를 추진하면서 대량의 농기계를 생산했기 때문에 축력으로 부터 해방된 것 처럼 보였습니다만 1930년대 부터 군수산업으로 전환이 급격히 이루어지면서 축력에 계속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전쟁이 터지면서 농기계 생산이 사실상 중단되자 기존에 생산된 농기계조차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상황이 됩니다.4) 여기에 마필도 대량으로 동원되거나 독일군에게 빼앗기게 되었으니 사람이 쟁기를 끄는 참담한 상황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쟁 발발직전 소련에는 2100만 마리의 말이 있었는데 이것은 780만 마리로 감소했습니다. 소련측의 추정에 따르면 전쟁 기간 중 700만 마리의 말이 죽거나 독일군에게 약탈당했다고 합니다.5)


디나도의 연구는 개괄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지만 매우 흥미로운 점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독일의 마필 징발은 유럽의 농업 생산구조에서 매우 취약한 부분을 타격했습니다. 독일은 전쟁 중 자체적인 자원의 부족으로 지속적으로 점령지역의 자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점령지역의 경제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주된 원인이 되었고 오랫동안 상처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1) Richard L. DiNardo, 'Horse-Drawn Transport in the German Army',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Vol. 23, No. 1. (Jan., 1988), p.139
2) Hartmut Schustereit, Vabanque : Hitlers Angriff auf die Sowjetunion 1941 als Versuch, durch den Sieg im Osten den Westen zu bezwingen(Herford, Mittler und Sohn, 1988), s.97
3) Katherina Filips, 'Typical Russian Words in German War-Memoir Literature', The Slavic and East European Journal, Vol. 8, No. 4. (Winter, 1964), p.409
4) John Barber and Mark Harrison, The Soviet Home Front 1941~1945 : A Social and Economic History of the USSR in World War II(London, Longman, 1991), p.187
5) DiNardo, ibid., p.136

댓글 10개:

  1. 2차대전때 독일군 하면 간지나는 기갑사단들의 티이거/판터 전차들만 연상하던 때도 있었는데 그런 독일군이 말을 수백만필이나 사용했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충격이었죠.

    근데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대전사에 별 관심없는 일반인들은 2차대전 독일군 하면 프랑스를 개발살내는 무적 기갑사단부터 떠올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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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전쟁이 지속될 수록 더 늘어났으니 안습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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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천조국이 뿜어대는 물량 공세는 모든 연합군을 먹여 살렸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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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전부터 막연하게나마 농사 지을 장정이랑 마필이 전쟁에 징발되면 농업생산에 상당한 타격이 오지 않을까 했는데 정말 그랬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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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이 논문은 개괄적인 문제제기만 하고 있어서 구체적인 분석까지는 하고 있지 않지만 꽤 시사점은 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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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개전 초에야 그렇다 쳐도 바르바로사-블라우 작전기 마필 손실량을 보면 정말 후덜덜인데 그 이후에는 도대체 어디서 말들을 보충한 거야?...했는데 역시나 남의 물건 빼앗기 신공을 제대로 발휘했군요.

    어릴 적에 본 그리스 영화(맞나?) "나타샤"의 초반부에서 그리스에 진군한 독일군-무장친위대-이 정전후 귀향하는 그리스군의 군마-그것도 장교들이 타고 있는 것도 아니라 부상병들 가득 태운 마차를 끄는 놈-들을 빼앗는 장면을 보면서 "아니, 기계화된 천하의 독일군이 패배했다지만 말을 빼앗냐? 역시 치사빤스 악의 근원 독일넘들!"하고 욕했었는데, 독일 입장에서는 그거라도 빼앗지 않으면 지네 군대를 굴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걸 공부하면서 알게 됐습니다.

    P.S. 제가 제목을 제대로 적었나 모르겠는데 하여간 대전당시 활약한 그리스 레지스탕스 관련 영화였습니다. 주인공이 여자인데...고문받으면 빨리 불 것이라 생각하고 그리스 망명정부군이 본토로 파견-목적은 시실리 상륙작전 위장. "우리 그리스로 가염, 뿌우~~~"-했는데 오히려 같이 간 남자 대원이 먼저 토설하고 우리의 여주인공(초반부 말 뺏는 무장친위대 장교는 독일인 아버지에 그리스인 어머니...여주인공과는 친구사이)은 끝내 발설안했...(뭐냐 이거.)
    그리스 레지스탕스 대원들 처형하는데 독일군으로 위장한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사격!"명령과 동시에 주변 경비병들을 쓸어버리는 클라이막스 장면이라든가 초반부 남녀 주인공의 결혼식장에서 역시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둘의 결혼을 축하한다고 기관단총으로 그리스 정교 사원의 종을 쏴서 축하의 종을 울리는 장면등등 비쥬얼적으로도 괜찮은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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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폴란드가 정말 안습입니다. 1940~41년에 독일군의 마필 보충이 1주일에 4천마리였는데 이 대부분이 폴란드산 말이었다고 하더군요. 그 이후의 통계는 아직 모르겠는데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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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전선에서 하프트랙이랑 범용트럭을 개떼(?)처럼 몰고다닌 미군은 진짜....-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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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보병사단들까지 차량화를 시켜 버렸으니 말입니다. 기갑사단들은 거의 모두 기계화를 시켜버리고. 독일군 에서 미군 기갑사단의 수준으로 기계화가 된 건 교도기갑사단 말고는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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