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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22일 목요일

문화대혁명 시기 학살의 유형

문화대혁명하면 떠오르는 것은 혼란과 광기일 것입니다. 문화대혁명은 초기 단계 부터 대규모의 유혈사태를 가져왔는데 그 중에서도 이른바 '사류분자(四類分子 :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악질분자)'에 대한 학살은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류분자에 대한 학살은 1966년 8월 하순 부터 시작되었는데 초기에 학살이 시작된 다싱(大興)현의 경우 8월 27일 부터 9월 1일 까지 325명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1) 문혁이 종결 된 뒤 정부차원에서 문혁 당시의 인명피해에 대한 공식 조사를 하긴 했습니다만 문혁 시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지를 정확히 알기란 앞으로도 불가능 할 것 입니다.

문혁당시 학살에 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몇몇 연구자들은 학살 피해를 집계하기 위해서 당시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집계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제가 지난번에 언급했던 Roderick MacFarquhar와 Michael Schoenhals의 저작에 인용된 Andrew Walder와 Yang Su의 공동연구는 1,500여종의 지역 신문에 실린 학살 관련 기사들을 집계해서 이 시기에 약 75만명에서 150만명 사이가 학살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2) Yang Su는 문혁당시의 학살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계속하고 있는데 2006년에 발표한 논문에서는 세곳의 성(省)을 사례로 학살의 유형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Yang Su가 2006년의 논문에서 사례로 든 지역은 광시(廣西), 광동(廣東), 후베이(湖北) 등 세 곳인데 광시성의 경우 1966년 행정구역 기준으로 83개 현 중 65개 현이, 광동성은 80개 현 중 57개 현이, 후베이성은 72개 현 중 65개 현이 조사 대상이었습니다. Yang Su는 살해당한 인원이 10명 이상인 경우만 학살로 분류해서 집계하고 있습니다. 조사 대상이었던 세 지역 중 학살이 가장 지독했던 곳은 광시성으로 조사 대상 65개 현 중 43개 현에서 학살이 발생했으며 이 중에서도 15개 현은 1천명 이상이 학살되었습니다. 특히 우밍(武鳴)현의 학살이 가장 심해서 문화대혁명 중 2,463명이 학살되었고 학살이 절정에 달했던 1968년 6월 중순 부터 같은해 7월사이의 두달도 안되는 기간 동안 1,546명이 살해되었습니다. 광동성에서는 28개 현에서 학살이 일어났으며 6개 현에서 1천명 이상이 살해되었습니다. 후베이성은 특이하게도 학살이 드물게 일어났으며 조사대상 중 4개 현에서만 학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3)

이 연구에서 흥미로운 점은 학살이 일어난 현은 많은 경우 성도에서 조금 더 멀리 떨어지고 인구도 적은 편이었다는 겁니다.4) 다음으로 특징적인 것은 일가족을 몰살시키는 방식이 많았다는 것 입니다. 광시성의 림구이(臨桂)현에서는 1,991명이 학살되었는데 절반에 달하는 918명이 이른바 '사류분자'와 그 자녀였습니다. 더 골때리는 것은 농민도 547명이나 포함되는 등 학살대상이 사류분자에 한정되지 않았다는 점 입니다. 이 지역에서는 당간부도 무려 326명이나 살해되었습니다. 심한 경우 사류분자의 자녀가 희생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고 빈농이 대량으로 학살당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5)

마지막으로, 지방에서 학살이 심화된 시기는 1968년 여름 이후로 이 시기는 바로 문혁 초기 난립하던 수많은 분파들이 정리되고 지방에서 혁명위원회의 형태로 사태가 일단 정리되는 시점이었습니다. 잘 아시다 시피 혁명위원회의 수립 과정에서도 이에 반발하는 분파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혁명위원회들은 지역 안정 차원에서 수많은 계급의 적들을 만들어 소탕했는데 그 대상이 누가 될지는 뻔한 것 이었습니다. 위에서 이야기 했듯 학살 대상은 주로 '사류분자와 그 가족'이었지만 이밖에도 다양한 계층이 피해자였습니다. 저자의 표현 대로 현대판 마녀사냥이라고 할 수 밖에요.

잡담 하나. 저자는 집계 과정에서 분파간의 상호 투쟁으로 사망한 경우는 제외했습니다. 각 파벌간의 투쟁으로 인한 사망자도 집계해 본다면 꽤 재미있는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1) 산케이 신문 특별취재반/임홍빈 옮김, 『모택동 비록』上(문학사상사, 2001), 187쪽
2) Roderick MacFarquhar and Michael Schoenhals, Mao's Last Revolution(Harvard University Press, 2006), p.262
3) Yang Su, "Mass Killing in the Cultural Revolution : A Study of Three Provinces", Joseph W. Esherick(ed.), The Chinese Cultural Revolution as History(Standford University Press, 2006), pp.98~103
4) Yang Su, ibid., p.106
5) Yang Su, ibid., pp.107~109

2009년 2월 19일 목요일

대인배가 갖춰야 할 기본 소양

동방의 대인배 마오주석TM께서 중소우호조약 체결을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셨을 무렵의 일화라는군요.

모택동이 장개석을 화제에 올렸는데 스탈린이 갑자기 진백달(陳伯達)을 상대로 말을 꺼냈다.

“아, 그렇지. 진백달 동지가 쓴 『인민공적 장개석』이라는 책을 나도 읽어 보았소.”

진백달은 원래 한켠에 앉아서 조용히 듣고만 있었는데, 스탈린이 자기의 저작을 언급하자 기뻐서 어쩔 줄 몰랐고 한결 활기를 띠게 되었다. 통역의 말을 기다릴 것 없이, 노어를 아는 진백달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스탈린의 관심은 모택동한테서 진백달에게로 옮겨졌다.

(중략)

이렇게 되다보니 비서인 진백달이 한동안 대화의 중심이 되고 모택동이 도리어 한편에서 듣기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이야기에 열을 올린 스탈린은 술잔을 들더니 진백달의 앞으로 걸어왔다.

“중국의 역사학자이고 철학가인 진백달 동지를 위하여 건배!”

라고 하였다.

진백달은 자기도 잔을 들고 답례를 하였다.

“세계에서 제일 걸출하신 역사학자이시며 철학가이신 스탈린 동지를 위하여 건배합시다!”

실로 진백달로서는 당시 분위기에 맞지 않는 거동이었다. 모택동의 존재를 전혀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진백달은 최고위급 회담에서 자기가 각광을 받았노라고 무척 기뻐하였다.
회담 중에 생긴 이런 비정상적인 현상에 대하여 모택동은 심히 불쾌해 하였으며 특히 진백달의 분수를 모르는 경거망동에 대하여 더욱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심야에 회담은 끝났고 스탈린도 돌아갔다. 진백달이 여전히 흥분을 가라 앉히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모택동의 연락을 접하게 된다. 다음 부터는 회담에 참가하지 말라는 것 이었다.

그 후에 있는 몇 차례의 회담에 진백달은 한 번도 참가하지 못 하였다.

섭영렬/최재우 역, 『모택동과 그의 비서들』, (화산문화, 1995), 212~213쪽

넵. 전에 소개한 스탈린 동지의 이야기 처럼 ‘쪼잔함TM은 대인배의 기본 소양이라 하겠습니다.


잡담 1. 진백달은 이후 모택동의 신임을 크게 잃긴 했지만 계속해서 모택동의 비서직을 수행했습니다.

잡담 2. 진백달은 문화혁명 기간 중에 숙청되어 1971년에 투옥되지요.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닌게 4인방이 타도된 뒤에는 임표∙강청 반혁명집단의 일원으로 지목되어 징역 18년을 선고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