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7일 월요일

1차대전 당시 독일육군의 포병 지휘 구조

불법 날림 번역으로 땜빵하는 것은 계속 됩니다.
전쟁 발발 당시 독일군은 야전포병(Feldartillerie)과 중포병(Fußartillerie)을 엄격히 분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야전포병 내에서도 중야전포대대는 기동전에 적합하지 않다는 견해가 많았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전쟁 초기의 경험을 통해 잘못됐다는 것이 입증됐다. 전투의 주역인 보병지휘관들의 견해가 가장 존중됐는데 이들은 중포가 매우 효과적이라는 점 때문에 이 무기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급 포병지휘관들도 점차 보병 전투의 양상에 대해 잘 이해하게 됐다. 포병지휘관들은 중포와 경야포의 화력 통제를 담당할 책임을 지게 됐다. 이 때문에 각 포병부대를 통합해서 지휘할 수 있는 통일된 고급포병지휘부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런 대대적인 개편을 담당하는 것은 힌덴부르크 체제하에서 시작되었다.

전쟁 발발 당시 야전포병의 경우 가장 높은 지휘부는 보병사단의 야전포병여단지휘부(Kommandeur der Feldartillerie-brigade)였다. 전쟁 발발 당시 독일 육군에는 총 52개의 야전포병여단지휘부가 있었다. 1914~1916년 사이에 신규 부대가 편성되었는데 이중 야전포병여단지휘부가 18개, 예비포병지휘부가 14개, 향토야전포병지휘부가 1개, 보충야전포병여단지휘부가 4개 였다.1)

중포병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달랐는데 군단의 경우 동원 개시 당시 단 한 개의 중야전포병대대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군단포병의 경우 고급포병지휘부가 없었다. 대신 야전군 사령부나 육군총사령부 직속 예비대로 1~3 중포병사령부(General der Fußartillerie)2)와 1~9 중포병여단지휘부(Fußartillerie Brigade-kommando)3)가 있었다. 야전군급 부대는 강력한 공성포병부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고급중포병지휘부도 있었다. 이 때문에 제 2군의 경우 제 3중포병사령부를, 제 4군과 제 6군은 각각 제 1중포병여단지휘부와 제 2바이에른중포병여단지휘부(Königlich Bayerisches Fußartillerie Brigade-kommando 2)를, 제 5군은 제 1중포병사령부와 제 6중포병여단지휘부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참호전이 장기화 되자 전 전선에 걸쳐 중포병의 수요가 증가했고 육군총사령부는 각 야전군 사령부 직할로 중포병부대를 총괄 지휘할 사령부를 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게 됐다. 또한 필요에 따라 투입할 수 있도록 동급의 사령부를 예비로 확보할 필요도 있었다.

마침내 1915년 가을, 독일군은 모든 야전군급 포병 사령부의 명칭을 “중포병사령부”로 통일함과 동시에 20개의 사령부를 신설했다.4) 이후 야전군 예하 포병부대의 화력분배 및 사격통제는 중포병사령부과 총괄하게 됐다. 베르됭 전투에서 중포병 부대를 집중운용 한 결과 중요한 전역에 추가로 투입할 수 있도록 고급포병지휘부를 추가로 편성할 필요성이 생겼다. 그 결과 중포병사령부는 37개로 늘어났다.

그 결과 힌덴부르크 체제에서 고급포병지휘부는 총 89개의 야전포병여단지휘부와 37개의 중포병사령부로 증가했다. 포병이 전투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라는 점과 중포병과 야전포병의 효과적인 협동을 위해서는 효과적인 조직이 필요조건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육군총사령부는 이것을 위해서 통합된 포병 지휘부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1917년 2월 독일 전쟁성(Kriegsministerium) 명령에 따라 야전포병여단지휘부와 중포병사령부를 통합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사항이 결정되었다. (1) 제 1~13 포병사령부(General der artillerie)를 창설하고 (2) 각 사단에 배속된 경포병대대와 중포병대대를 통합 지휘하기 위해 포병지휘부(ArKo, Artillerie Kommandeur)를 둔다.

13개의 포병사령부 사령관 중 단 한명을 제외하면 모두 중포병사령부 출신이었다. 이 중 제 9포병사령부는 1917년 3월 해체됐다. 그리고 다시 1917년 7월 6일 이것을 대신해 제 14포병사령부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18년 7월 14일에 제 15, 16포병사령부가 편성되었다. 육군총사령부는 각 포병사령부를 상황에 따라 강력한 포병 전력을 필요로 하는 야전군 사령부에 배속시켰다. 그리고 당연히 포병사령부가 주로 투입된 곳은 서부전선이었다.

포병사령부의 지휘관은 보통 여단장이나 연대장급이었으며 두 명의 부관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포병사령부는 야전군 사령부에 배속되면 두 명의 참모 장교와 함께 야전군 소속의 통신반을 배속 받았다. 제 1포병참모장교(StOArt, Stabsoffizier der Artillerie)는 모든 전술, 조직문제와 가스탄, 고폭탄 사격 훈련과 매일 발생하는 문제의 교정 등을 담당했다. 제 2포병참모장교는 포병에 대한 보급 및 정비반에 대한 보급을 담당했다. 마지막으로 통신반은 포병관측기구반, 사진반, 포병조사반과 연계해 적 부대의 배치에 대한 최대한 정확한 정보를 파악했다. 또한 정보반은 포병용 지도의 작성을 책임졌다.

이쯤에서 1916년 4월 29일 동부전선의 나로치(Нароч) 호수 전투에서 강력한 포병부대를 통합 운용해 큰 성과를 거둔 포병 지휘관 한명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브루흐뮐러(Georg Bruchmüller) 중령은 전쟁 이전에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포병 지휘체계의 대대적인 개편 이후 제 86포병지휘부(ArKo 86)의 지휘관이 됐다. 이동탄막사격, 즉 포격을 보병의 전진에 맞춰 수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모든 포병 지휘관 보직에 충분히 경험 있는 장교들을 충원할 수는 없었다.

브루흐뮐러는 초기부터 야전군 사령부의 중앙 통제하에 실시되는 포격의 장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7년의 서부전선에서는 이동탄막사격을 할 만한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브루흐뮐러는 동부전선에서 이동탄막사격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지휘체계를 만들었고 이 때문에 독일 육군총사령부는 브루흐뮐러를 서부전선으로 배속시켜 1918년 춘계대공세 준비를 담당하게 했다. 브루흐뮐러의 방식은 매우 뛰어난 것으로 입증됐다. 부르크 호에넥(Burg Hoheneck)에 있는 브루흐뮐러의 조각상 밑에는 기념비가 있다. 그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자랑스럽게 적혀있다.

“ [돌파 브루흐뮐러 Durchbruchmüller라는 별명을 가진 브루흐뮐러 대령은 1918년 3월 21일 제 18군의 포병을 지휘해 성공적으로 이동탄막사격을 실시해 아미앵 방면으로 대규모 돌파를 성공시켰다.]

1918년의 대공세에서 독일군의 강력한 포병사격은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실시됐다. 이 사격은 이른바 풀코프스키(Pulkovski) 방식에 의한 훈련을 통해 가능했다. 이 방식은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오차를 없앴으며 신속한 수정 사격을 가능하게 했다.

포병지휘부(ArKo)는 포병사령부와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 졌으며 기존에 있던 야전포병여단을 대체했다. 이 중 27개는 기존의 야전포병여단지휘부를 개편해 만들어 졌다. 그리고 나머지는 신규편성 되거나 다른 야전포병이나 중포병 부대를 개편해서 만들어졌다. 새로운 사단포병지휘부의 단대호는 제 1~8근위, 제 1~23바이에른, 제 1~255(중간에 65개가 빠진)였다. 새로 개편된 단대호에서는 예비 또는 향토 부대의 구분이 사라졌다. 그러므로 이에 따라 총 221개의 Arko가 편성되었다. 포병지휘부의 지휘관은 계급상 연대장 이하였다. 포병지휘부의 참모진은 한명의 부관, 두 명의 연락장교, 한 명의 통신 장교로 구성됐다.

ArKo의 지휘관은 실제 전투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포병 지휘관이었다. 포병지휘부의 명령하에 사단 편제 포병과 상급 부대에서 배속된 수많은 야전포병 및 중포병 부대가 움직였다. Arko는 부여된 임무 내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인접 사단의 포병과 배속된 독립 포병부대간의 조율도 책밈 져야 했다.
원거리의 목표에 대한 포격은 뒤에 설명하겠지만 야전군 사령부의 몫이었다.

Hermann Cron, Imperial German Army 1914-18 : Organisation, Structure, Orders-of-Battle, Helion & Company, 2002, pp.131~134

각주

1) 새로 편성된 지휘부는 제 5근위야전포병여단지휘부, 제 10바이에른야전포병여단지휘부, 제 50, 52, 54, 56, 58~67, 123, 220야전포병여단지휘부(이 중에서 61, 65, 66포병여단지휘부는 육군총사령부 직할이었다.), 제 23, 24, 26, 28, 75~82예비야전포병여단지휘부, 제 1, 8 바이에른예비야전포병여단지휘부, 제 1바이에른향토야전포병여단지휘부, 그리고 제 4, 8, 10, 19보충야전포병여단지휘부가 있었다.
2) 이와 함께 세 개의 중포병총감부(Fußartillerieinspektion)가 있었다.
3) 전쟁 이전에는 8개의 중포병여단지휘부가 있었으며 1914년 8월 새로 제 2바이에른중포병여단지휘부가 편성됐다.
4) 1917년 9월 17일자 전쟁성 명령에 따라 제 1~6중포병사령부와 제 1~3바이에른중포병사령부, 바르샤바 총독부 소속의 중포병사령부, 벨기에 총독부 소속의 중포병사령부, 마지막으로 해안방어사령부 소속의 중포병사령부가 편성되었다.

이번에 베낀 책은 1937년에 독일에서 출간된 책을 번역한 것인데 그다지 번역이 매끄럽지 않다는 느낌이 듭니다.

흥미로운 점 하나는 1차 세계대전 당시 ArKo는 사단급 포병을 지휘하기 위해서 만들어 졌다는 점 입니다. 2차 세계대전의 ArKo는 군단급 포병 지휘부였지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포병부대의 구조에 대해서는 채승병님의 글, 2차 세바스토폴 전투에 투입된 독일군 독립 포병부대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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