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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 4일 화요일

슈페어가 1945년 3월 18일 히틀러에게 보낸 비망록

알베르트 슈페어, 베를린 W 8, 1945년 3월 18일

경제의 붕괴가 기정 사실화 된데다 국토가 적에게 함락되는 속도도 빨라지고 있기 때문에 라인강과 오데르강 선을 사수하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처가 필요합니다.
라인강과 오데르강 양 쪽이 돌파된 상황에서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중무장한 적군이 두 강을 도하하기 시작한다면 강력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기동전을 수행할 것이기 때문에 장비와 연료가 부족한 아군은 속수무책이 될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8주간의 전투에는 동원 가능한 전 병력을 투입해야 할 것이며 여기에는 어떤 예외도 없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의 각 집단군 사령관들은 자신들의 관할 구역에 있는 모든 병력 자원을 투입하는데 전권을 가져야 할 것 입니다.
만약 병력 동원이 제때 이뤄지지 못하고 많은 수의 아군 병력이 여전히 편성 지역에서 훈련중인 상태에서 적군이 두 강을 도하해 공세로 나올 경우에는 1940년에 프랑스군이 아군에게 당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재앙이 벌어질 것 입니다.
또한 현재의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동원 가능한 각 지역의 국민돌격대도 모두 투입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제국의 모든 병력을 라인강과 오데르강 선을 사수하는데 투입해야 합니다.

각 집단군 사령관들은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자신의 관할구역에 있는 모든 군 병력에 대해서 절대적인 통제권을 가져야 하며 이렇게 해서 자신들의 의도대로 작전을 펼쳐야 합니다.
전선에 배치된 대공포 부대들은 반드시 단일한 지휘관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휘 범위가 너무 넓어져 신속한 판단이 필요할 경우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노르웨이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 북부의 산업기반은 현 상황에서는 교통망의 문제로 전혀 활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역의 경제적 중요성은 없는 것으로 보고 이 지역에 있는 부대들을 차출해 독일로 이동시켜야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조치를 취한 후에야 라인강과 오데르강의 상황을 어느정도 안정시킬 수 있을 것 입니다.
한 걸음의 후퇴만으로도 패배는 가속화 될 것 입니다. 몇주만이라도 현재의 전선을 사수하는데 총력을 다 한다면 적은 우리의 단호한 의지를 알게 될 것이고 이렇게 해서 우리는 조금 더 유리한 조건에서 전쟁을 종결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슈페어

Heinrich Schwendemann, ‘Drastic Measures to Defend the Reich at the Oder and the Rhine…’ A Forgotten Memorandum of Albert Speer of 18 March 1945,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Vol 38, 2003, pp.605~606

슈페어가 1945년 3월 18일에 히틀러에게 보낸 이 글은 상당히 흥미로운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슈페어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전쟁말기에 히틀러의 초토화 명령에 반대했다는 점을 강조해 전쟁의 책임을 회피하려 했습니다. 슈페어는 광기에 휩싸인 히틀러가 패배에 직면해 독일 전체를 초토화시키려 했지만 자신은 전후 독일의 재건을 위해 히틀러에게 반대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종류의 문건들을 놓고 보면 1945년의 어느 시점까지는 슈페어 자신도 연합국과 유리한 조건에서 휴전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을 조금이라고 가지고 있었다는 것 으로 보입니다. 즉 이 글에서 나타나듯 슈페어 자신도 총통 만큼이나 유리한 조건에서의 종전 가능성을 믿고 필사적으로 저항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연합군이 라인강을 도하해 파죽지세로 밀고들어올 무렵에는 슈페어의 생각도 상당히 바뀐것 같긴 합니다만.

각 지역의 군지휘관들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한다던가 아직 훈련도 마치지 못 한 병력이나 국민돌격대까지도 모두 전선에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목에서는 완전한 패배라는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한 슈페어의 정신적 공황이 느껴집니다.

2007년 7월 2일 월요일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이야기

어디에선가 많이 본 듯한 이야기 입니다.

○○○○년 11월 14일, ○○ 장군이 ○○에서 쓴 편지에는 ○○군단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내 군단의 ○○연대는 ○○소총을 장비하고 있었다. ○○연대는 ○○○○년형 ○○총을 장비하고 있었는데 이 총 중 대부분은 ○○에 ○○을 ○○ 개량을 했지만 일부는 ○○이 없었다. ... 내 군단에 소속된 ○○ 중대 중 일부는 ○○ 카빈, ○○ 소총이나 ○○ 소총을 장비했고 혹은 ○○를 가진 경우도 있었다."

○○○의 군단은 병사들이 장비한 소화기가 제각각 이어서 보급을 하기가 어려웠고 대부분의 병사가 10발에서 15발 정도의 실탄을 지급받았으며 총기 소제도구는 거의 없었다. ○○에서 예비군을 동원하던 한 장교는 절망감에 이렇게 빈정거렸다.

"정부에서 이런 속도로 장비를 보내주면 전쟁이 끝날때 까지도 싸울 준비가 안 돼 있을 것이다."

이 장교의 부대는 ○○를 사용하는 소총을 장비하고 ○○로 만든 ○○를 지급받았는데 이 ○○는 가을비가 내리자 곤죽처럼 돼 버렸다. 의료지원도 엉망이어서 ○○○의 ○○연대는 병사 2,460명에 군의관은 단 한명이었다. 상황이 이랬기 때문에 ○○군 보병대대들은 전투에 나가면 전투 개시 몇 분 만에 탄약을 모두 써 버리고 아군 부상자들을 전장에 남겨둔채 도망가는 수 밖에 없었다.

이건 도데체 어느나라 군대일까요? 1945년의 독일군을 연상케 하는 내용입니다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1870년의 프랑스군이라는군요.

원래 인용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1870년 11월 14일, 뒤리외(Louis Durrieu) 장군이 방돔에서 쓴 편지에는 18군단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내 군단의 45연대는 샤스포 소총을 장비하고 있었다. 70연대는 1822년형 수발총을 장비하고 있었는데 이 총 중 대부분은 총열에 강선을 파는 개량을 했지만 일부는 강선이 없었다. ... 내 군단에 소속된 프랑-티뢰르(franc-tireur) 중대 중 일부는 레밍턴 카빈, 샤프 소총이나 스파이서 소총을 장비했고 혹은 12구경 리볼버를 가진 경우도 있었다."

뒤리외의 군단은 병사들이 장비한 소화기가 제각각 이어서 보급을 하기가 어려웠고 대부분의 병사가 10발에서 15발 정도의 실탄을 지급받았으며 총기 소제도구는 거의 없었다. 노르망디에서 예비군을 동원하던 한 장교는 절망감에 이렇게 빈정거렸다.

"정부에서 이런 속도로 장비를 보내주면 전쟁이 끝날때 까지도 싸울 준비가 안돼 있을 것이다."

이 장교의 부대는 종이탄포를 사용하는 소총(Percussion Rifle)을 장비하고 마분지로 만든 군모를 지급받았는데 이 모자는 가을비가 내리자 곤죽처럼 돼 버렸다. 의료지원도 엉망이어서 뒤리외의 45연대는 병사 2,460명에 군의관은 단 한명이었다. 상황이 이랬기 때문에 프랑스군 보병대대들은 전투에 나가면 전투 개시 몇 분 만에 탄약을 모두 써 버린뒤 아군 부상자들을 전장에 남겨두고 도망가는 수 밖에 없었다.

Geoffrey Wawro, The Franco-Prussian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p.268~269

스당에서 나폴레옹 3세가 지휘하는 주력군이 섬멸되자 프랑스는 황급히 예비군을 긁어 모으고 해군 병사들도 보병으로 전환했는데 전쟁 초기의 막대한 장비 손실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이 때문에 기본 장비인 소총조차 제대로 지급을 못 했다고 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야포 부족으로 해군에서 차출한 120mm 해안포는 상당히 효과가 좋아서 프로이센군 조차 전쟁 초반보다는 프랑스군 포병이 나아졌다고 평을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절망적인 와중에도 쓸만한 물건이 하나씩 나오는 걸 보면 신기합니다. 120mm포의 이야기를 읽을땐 마치 독일 국민돌격대의 판저파우스트가 연상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