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17일 금요일

현리 전투 경험담 하나...

현리전투는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면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한국군 역사상 최악의 패배입니다. 그만큼 수많은 분석이 이루어져 왔고 많은 경험담이 활자화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쪽으로 매우 극적인 사건인 만큼 관련된 기록을 읽으면 읽을 수록 끌리게 됩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이야기는 이미 읽어보신 분들도 꽤 많으시겠지만 현리전투를 육군 신병으로 경험한 인물의 경험담입니다. 현리 포위망 내에서 겪은 경험을 제법 자세히 서술해 놓아서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는 글 입니다. 특히 아무것도 모르는 이등병이 첫 전투로 맞이한 현리전투에서 겪은 공포와 공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꽤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라서 좀 길게 인용을 해 보겠습니다.

이런 병영생활일망정 그런대로 익숙해 가던 1951년 5월 중순, 그 곳(9사단 보충대)에 배치된 지 스무 날 쯤 되었을 때다. 어느 날 새벽 천막 밖의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깨어 연병장에 뛰쳐나온 우리들 신병 셋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난장판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표현이리라. 사단 앞의 연병장은 말할 것도 없고, 냇가 건너편의 골짜기까지 군인들로 꽉 찬 것이 아닌가.

내가 속했던 사단만의 병력은 분명 아니었다. 당시는 개개인의 부대인식표가 없어서 다른 사단의 병력이 섞인 것을 한눈에 알아 볼 수는 없었으나, 어림짐작해 보건대 1개 사단 병력은 훨씬 넘는 인원이었다. 그것도 어제까지의 활기찼던 군인이 아니고 지칠 대로 지친 참담한 몰골의 패잔병들이었다.

도대체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작대기 하나 없는 이등병 주제에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어 잔뜩 주눅 든 채 취사반에서 밥을 타다가 배식하면서 귀동냥한 결과, 인접부대의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그 틈으로 적군이 몰려들어 포위되었다는 것 이었다.(뒤에 들은 얘기지만 당시의 포위가 유명한 현리전투라고 했다.)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각자 배낭을 챙긴 뒤, 완전무장으로 연병장에 집합하여 중대장의 주의사항을 듣고 보급품을 지급받았다. 한쪽엔 쌀, 한쪽엔 ‘씨레이션’을 산더미같이 쌓아 놓고 포위망 돌파에 며칠이 걸릴지 모르니까 각자 지닐 만큼의 식량을 휴대하라는 것 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들 이등병은 한쪽 얻어먹기가 그렇게도 어려웠던 그 씨레이션을 마음대로 가져가라니 꿈같은 얘기였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큼 사태가 심각한 것 이어서 은근히 겁이 나기도 했지만, 고참들의 분위기로 보아서는 별일이 아닌것 같기도 했다. 실제로 고참들은 이런 포위는 항용 있어온 일이라는 듯 2~3일분 식량만 챙겼는데, 그 이상은 짐스럽기만 할 뿐 실제로는 별 쓸모가 없다는 투였다. 그러나 우리 셋은 마음대로 가져가라는 것이 그저 고맙고 황송해서 배낭속을 몽땅 비우고 7일분 씨레이션을 짊어졌다.

(중략)

그 동안 부대 앞의 냇가를 따라서 남쪽으로 향하는 수많은 트럭들의 질주행렬이 이어졌으나, 출발한 지 1시간도 못 되어 요란한 기총소리가 났고, 이어 피격당한 흔적이 완연한 트럭들이 다시 돌아왔다. 말은 질주행렬이라고 했으나 실제로 차량이 마음 놓고 달릴 수 있는 구간은 사단본부 앞 연병장 정도나 될까, 그 밖에는 소달구지나 겨우 다닐 수 있는 임간(林間) 도로였기 때문에 남쪽 길목만 막으면 우리 사단 뿐만 아니라 같은 골짜기에 있던 다른 사단까지도 옴짝달싹할 수 없는 독안의 쥐가 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남쪽은 사단 본부가 진주하면서 길이 만들어졌지만, 북쪽은 그것조차도 없는 오지였다. 지금은 국도가 아닌 웬만한 지방도로도 포장이 되어 마음 놓고 달릴 수 있지만, 당시 강원도 산간의 도로는 포장은 커녕 간신히 일방통행이나 가능할까, 마음대로 오고 갈 수도 없는 길이었으니 희생이 클 수 밖에 없었다.

부대 앞의 연병장엔 동서남북 사방을 향해서 105밀리 곡사포를 비롯한 박격포 등을 배치하여 사격을 개시하였고, 사격이 끝나자 포들을 분해하여 땅속에 묻었다. 동서남북 사방이 적군이라는 말없는 설명인 셈이었다. 그 많은 씨레이션과 쌀더미, 퇴로가 막힌 트럭들엔 휘발유가 뿌려졌고, 우리들은 불길을 뒤로 하고 방향도 모른 채 고참병의 뒤를 따라 산을 타기 시작했다.

정양섭, 『어이없는 참전기 : 어느 북파공작원의 회상』(지식산업사, 2004), 76~79쪽

그야말로 “자다가 일어나 보니 현리”라는 황당한 상황입니다. 아직 패주의 초반이기 때문에 그냥 고참병들의 분위기에 따라 별로 심각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지만 전투가 계속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됩니다.

이 포위망 속의 1주일은 방향은 둘째로 치고 어떻게 할 바를 몰라서 앞사람만 따라다녀야 했던 1주일 이었다. 지휘계통이 무너진 후퇴, 그것도 포위망 속의 후퇴는 후퇴가 아니라 차라리 방황이라고 해야 옳았다.

웬놈의 피리소리는 그렇게도 처량하던지, 다른 군인들은 그 피리소리가 공격 시에도 울렸다고 했으나 내가 듣기엔 밤중, 그것도 유독 달밤에만 울린 것 같았다. 처음엔 처량하기만 했으나 날이 가면서 피리소리만 나면 소름이 끼쳤다.

(중략)

어차피 지리멸렬되어 전의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포위망 속이라면, 그럴수록 분산되어 3~4명 정도로 행동하는 것이 습격받을 기회도 적어서 더 안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심정은 흩어지면 꼭 일을 당할 것만 같아서 자꾸 무리를 이루게 되었다. 무리가 커질수록 공격받을 가능성은 늘어나는데도 그런 것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공황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사단장 이하 연대장, 대대장, 참모 등 서슬 퍼렇던 그 많은 고급 장교들은 모두 어디 갔는지 포위 첫날 부터 볼 수 없었지만, 처음 며칠 동안은 그나마 눈에 띄던 위관급 장교들도 점차 볼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대오를 이룬 후퇴로 지휘관이 있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앞서가는 사람은 앞선 대로, 뒤쳐지는 사람은 뒤쳐진 대로 뒤섞이다 보니 완전한 오합지졸이 되었다.

저 멀리 가뭇가뭇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무리가 적군인지 아군인지조차도 모른 채 각자 알아서 앞사람의 뒤만 따라갔다. 살 길을 찾아서가 아니고 그 밖에는 달리 어쩔 방도가 없어서, 막연하게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아서 따라갔을 뿐이다.

그리고 기습을 받을수록 우리들의 몰골은 점점 이상하게 변해 갔다. 배낭은 말할 것도 없고 철모는 불편해서 벗어버렸다 해도 작업모조차 쓰지 못한 맨대가리가 있는가 하면, 기관총 같은 공용화기는 그만두고 개인화기조차 제대로 갖춘 군인보다 갖추지 못한 군인이 점차 늘어났다. 나 자신도 세 번째로 당한 밤중의 기습에서 M1 소총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깜깜한 밤중이어서 한치 앞을 볼 수 없는데다가, 넝쿨 때문에 총을 지닌 채로는 도저히 숲 속을 해쳐 나갈 수 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들은 말이 있어서 방아틀뭉치만은 빼내어 작업복 주머니에 넣었다. 총기를 그대로 버리는 것과는 달리 방아틀뭉치를 뽑으면 그 총은 사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부득이 버릴 때는 총기 대신 방아틀뭉치만은 지니고 돌아와야 처벌을 면한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기 때문이었다. 며칠 뒤 그 방아틀뭉치 때문에 큰일을 당할 뻔하기는 했지만 당시로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정양섭, 위의 책 79~82쪽

포위된 상태가 길어지면서 점차 부대가 와해되는 상황이 일어납니다. 특히 훈련과 전투경험, 유능한 지휘관이 부족한 한국군이었던 만큼 공황상태가 지속되면서 모든 지휘계통이 무너지는 상황이 오게 되는 것 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전투경험이 풍부한 몇몇 부대는 상당한 군기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정양섭의 회고에 따르면 현리 포위전 와중에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나는 석 달 가까이 방위군에서 고생한 끝에 입대한 것 이었고 나이도 어렸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무척 버거웠다. 때문에 늘 뒤쳐질 수 밖에 없어서 행렬의 뒤끝에서 빨리 오라는 고참들의 재촉을 받으며 따라가던 어느 날 이었다.

그날도 뒤쳐졌던 나를 뒤에서 쫓아온 1개 소대의 군인들이 앞지르면서 당장 내 눈앞에서 전투태세로 산개하고는 빨리 가라고 호통쳤다. 장교고 사병이고 모두가 쥐구멍만 찾는 판국에 자신들의 반격에 동참하라는 것도 아니고 빨리 가라고 소리치다니 도데체 그들이 무엇을 시도하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마치 너희들같이 도망이나 다니는 패잔병들도 군인이냐는 투였다.

기관총이나 박격포 같은 공용화기는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었고 개인화기조차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군인이 적지 않은 판에 그들은 개인장비는 물론 60밀리 박격포까지 갖춘 완전한 전투부대였다. 마치 하늘에서 방금 공수된 특전사 병력 같은 모습으로, 모두가 도망가기 바쁜 상황에 추격해 오는 적군과 일전을 준비하는 그들이 내 눈에는 신기하기 조차 했다.

당시의 상황으로 짐작해볼 때, 그들도 연대나 대대 같은 상급 부대와는 연락이 두절되었거나 설사 연락이 가능하다고 해도 이미 작전체계가 무너진 상태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반격은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기 보다는 소대 자체의 자의에 따른 반격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당시 내가 속했던 사단의 경우 신설 사단이어서 그랬겠지만 하사(지금의 상병)면 분대장, 중사(하사)면 선임하사 급인데 견주어, 그들은 중사가 분대장 급으로 나 같은 이등병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었고 최하가 하사 급이었다.

그들은 18연대라고 했다. 18연대면 사변 전 옹진전투에서부터 용명을 날렸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같은 한국군이라도 ○○연대는 아무리 공격해 보아야 고지점령은 커녕 당하기만 한다고 해서 ‘○○연대 공격하나마나’. ××연대의 경우 아무리 보급품을 줘 보아야 모두 적군의 손에 빼앗기기 때문에 ‘××연대 보급 주나마나’였는데 반해, 18연대는 아무리 포위당해도 모두 빠져나온다고 해서 ‘18연대 포위당하나마나’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다분히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나 ○○연대나 ××연대에 견주면 18연대야 말로 전투부대였다.

정양섭, 위의 책 86~88쪽
하지만 이런 양호한 사례는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포위가 계속되면서 포위망 내의 부대들은 그야말로 지리멸렬해 버립니다. 정양섭이 포로로 잡히기 직전의 이야기는 부대 단위를 유지하는 것은 고사하고 바로 옆의 동료 조차 챙길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용감한 고참병이 몇몇 사병과 함께 기습하는 적군을 반격하여 물리치고 보니, 불과 10여명도 안 되는 분대 단위의 기습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기습을 당할 때마다 희생자는 늘어났고 앞뒤로 흩어졌던 병사들은 다시 무리를 이루게 되어 또 습격을 받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내 경우는 그나마 7일분 비상식량을 휴대하여 아쉬운대로 기아를 면할 수 있었으나, 그마저 지니지 못했던 군인들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포위된 지 사흘만에 만난 여군의 몰골은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목불인견 그것이었다. 말은 여군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군인인지조차 의심스러운 여자였다. 부대인식표는 아예 없던 시절이니까 말할 것도 없지만, 계급장은 커녕 군인다운 징표가 전혀 없는 달랑 군복뿐인 여자였다. 당시의 전투사단 편제에 여군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신분이 수상한 여자였다.

남자들은 각자 배낭 속에 적으나마 비상식량을 지녔고 또 작업복 위에 ‘판초’를 갖추어 웬만한 안개비쯤은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여군은 먹을 것은 둘째로, 우의조차 갖추지 않은 입은 옷 그대로의 단벌인 채로 추위에 떨고 기아에 시달려 지나가는 길섶에 누워서 먹을 것을 구걸하고 있어서, 그 모습을 눈 뜨고는 차마 볼 수 없었다.

당장 배낭 속의 씨레이션을 꺼내서 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나 자신도 끝장이었다. 모두가 굶주린 판국이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씨레이션은 바닥이 날 것이 뻔해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때문에 배가 고프면 숲 속에 혼자 쳐져서 배낭 속의 씨레이션을 꺼내서 작업복 주머니에 나누어 넣고, 그것마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뒤쳐져 우물우물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또 아무리 목이 말라도 내 수통속의 물조차 마음대로 마실 수가 없었다. 조금만 마시고 나면 허리에 찬 수통에선 출렁출렁 물소리가 났고, 그렇게 되면 한 모금 달라는 전우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을 것 이어서, 위급할 때를 생각해서 아예 물통이 빈 것 처럼 행세해야 했다.

그 래서 운 좋게 물통을 채울 수 있는 샘물을 만날때 까지는 마음대로 마실 수도 없었다. 골짜기로 내려가면 냇물이 있어 물통을 채울 수는 있었으나 당장 어디서 뛰쳐나올지 모를 적군이 무서웠다. 사실 그보다는 무리에서 떨어졌다가 낙오될지도 모르는 것이 더 겁이 났다.

정양섭, 위의 책 90~91쪽

이 책의 저자인 정양섭은 원래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되었다가 현역으로 빠진 경우인데 하필 처음으로 경험한 전투가 현리전투이다 보니 당시의 한국군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을 많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18연대와 같이 긍정적인 사례도 있긴 합니다만 현리전투 자체가 작은 미담으로 덮기엔 너무나 큰 참사지요. 정양섭은 장교들의 부정부패, 고참들의 폭력, 형편 없는 군기문제 등 삼류군대가 가진 폐해를 지적하고 있는데 읽을 때 마다 씁슬하기 짝이 없습니다.

댓글 28개:

  1. 거기에 책 제목대로 북파공작원까지 하셨다면... 그야말로 한국군의 나쁜짓은 거의 다 경험하신 샘이군요. ... 참;;; 드릴 말씀이 없는 기구한 인생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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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공작 등푸른 돼지10:31 오전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전쟁에 대비하지만 적극적으로 추구하지는 않는 나라가 돼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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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네비아찌2:55 오후

    과연 50년 후의 국군은 그 삼류군대의 폐해로부터 벗어났는가? 하면 또 참 답답해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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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아무리봐도 제대로 된 군대의 철수는 고사하고 그냥 피난민 무리를 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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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드레드노트11:42 오후

    전 현리 전투에서 그나마 18연대 같은 미담이 있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네요. 물론 이걸로 군단 하나가 날아간 참사를 덮을 수야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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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길 잃은 어린양12:35 오전

    그래도 살아남아 글을 쓸 수 있었으니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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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길 잃은 어린양12:35 오전

    예. 어쨌든 평화보다 좋은 건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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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길 잃은 어린양12:35 오전

    요즘은 많이 나아진 것 같은데 여전히 악습이 조금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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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길 잃은 어린양12:36 오전

    그렇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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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길 잃은 어린양12:36 오전

    예. 군단 전체가 무너지는데 소규모 부대들이 분전해 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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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이준님6:41 오전

    한국전쟁 자료에 가끔 등장하는 출처가 불분명한 여군들...의 경우는 우리가 흔히 아는 일반적인 여군내지는 현지에서 자발입대한 반공여청년.. 그리고 저 책의 저자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안 좋은 부류등으로 나뉘어지지요. 김귀옥이 한국전쟁 당시의 위안부 문제(사실 이건 주제 자체는 괜찮지만 최종적인 결론은 지나치게 정치적인 이야기이고 거꾸로 일본 극우쪽에게 두고 두고 놀림감이 되는 이야기)에서 지적한 "말씀드리기 대단히 곤란한 섬뜩한" 케이스도 있지만요.(일명 육공양...)

    얼마전 나온 최은희씨의 회고록도 이런 이야기를 꽤 암암리에 고백한 이야기이고 70년대 "반공문학상"까지 받았던 홍성원의 "남과 북(초판 제목 육이오)"에서는 최전선 붕괴시 사병들보다 자신이 데리고 다니는 "얼굴이 잘 알려진 예쁜 여자(배우?)가 적탄에 맞았으니 먼저 치료해달라고" 압력 넣으신 고위장교 이야기가 나오는 걸 봐서는 당시에도 말이 많았던 문제 같습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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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길 잃은 어린양8:48 오후

    예.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의 부패상을 말할 때 거의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이야기 같습니다. 미국쪽에서도 매우 한심하게 봤던지 그쪽 기록도 조금 있는 것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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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스카이호크7:06 오전

    사단이 무너지고 군단이 무너지고(...) 저런 식으로 군단 병력이 슬금슬금 와해되는 얘기를 보니 참... 추태도 저만한 추태가 없네요. 1개 군단이 싸워보지도 않고 소멸이라니.

    정예병과 잡졸의 구분 기준은 저런 순간인 것 같습니다. 전열이 깨졌을 때 어느 정도 스스로 추스르고 조직적인 저항을 유지하느냐, 아니면 각자도생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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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BigTrain7:40 오전

    고참들이 레이션을 2, 3일치만 챙겼다는 데에서 블랙호크다운의 기억이.. 아니, 그 전에 쌍령전투나 칠천량해전이 연상되는건 왠지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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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박종민11:02 오전

    군단이면 병력수가 얼마나 되나요? 당시 편제를 잘 몰라서....
    그나저나 우리가 일본의 위안부문제를 제기할 때, 그네들또한 6.25때의 위안부문제를 들고나와
    봐라 너네들도 우리랑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는가? 라고 질문해온다면 뭐라고 답할 지 참으로 남감해 지겠군요.

    남을 탓하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성경말씀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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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길 잃은 어린양12:42 오후

    예. 2차대전 후반기의 독일군 처럼 포위를 당하더라도 상당기간 부대 편제를 유지하면서 퇴각이 가능한 군대는 매우 드물지요.

    1950~1951년의 한국군을 보면 홈그라운드에서 싸워도 형편없이 박살이 나는데 정말 패전 사례를 읽을 때마다 멍해질 지경입니다. 그때의 교훈을 잘 살려 앞으로는 이런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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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길 잃은 어린양12:43 오후

    흑흑흑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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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길 잃은 어린양12:49 오후

    현리전투 당시 유재흥의 제3군단은 대략 22,000명 정도였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한국군 보병사단의 편제가 미육군의 1943년형 보병사단 편제에서 포병연대와 기타 전투지원부대를 생략한 간이형이기 때문에 사단당 병력수도 미군에 비하면 적습니다.

    그리고 지적하신 것 같은 인권침해 문제는 특히 1990년대 이후 중요하게 대두되고 있는데 이것 때문에 국가간, 국가내부의 과거사 정리문제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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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박종민9:04 오후

    생각보다 많은 병력은 아니었군요.

    아무리 그래도 하나의 군단이 사라졌으니.. 충격이 크긴 컸겠습니다.

    죄송한데 후속 처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군단장이하 여러명의 장교가 책임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을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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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박종민9:30 오후

    검색해보니 군단장이던 유재흥씨는 후에 국방장관까지 지내고 지금도 살아계시는 모양이군요.

    일제의 사관학교를 나와, 제주 4.3사태에서 토벌대로 활약하셨고,

    블로그의 모분의 평가를 보면 조선시대 원균보다 더 못하다고 평가를 하던데..
    당시에는 명나라군대도 개판이어었지만, 6.25때는 미군이라는 막강한 지원군이 있는 상태에서도,군단장이란 인물이 정찰기를 타고 도주... 사단일때는 사단을 해체하고, 군단장일때는 군단을 해체(더군다나 2번이나...) 그래서 결국은 작전권이 미국에게 넘어가게된 계기를 만든...

    박정희 전 대통령에 연줄을 데어,, 국방장관이라는 중책을 맡다가,,
    뉴스검색에 보니 지금까지 살아계서서 작전권환수에 반대하는 목소리까지...

    이 양반은 정말 고루 고루 하시는 군요. 스스로 작전권을 넘기시고 작전권환수에 반대하시고......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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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박종민9:33 오후

    군단하나가 사라지는데,,,책임은 어떻게되나  당시의 사정이 궁금해서 좀 찾아봤는데요.
    <span>검색해보니 군단장이던 유재흥씨는 후에 국방장관까지 지내고 지금도 살아계시는 모양이군요.  
     
    일제의 사관학교를 나와, 제주 4.3사태에서 토벌대로 활약하셨고,  
     
    블로그의 모분의 평가를 보면 조선시대 원균보다 더 못하다고 평가를 하던데..  
    당시에는 명나라군대도 개판이어었지만, 6.25때는 미군이라는 막강한 지원군이 있는 상태에서도,군단장이란 인물이 정찰기를 타고 도주... 사단일때는 사단을 해체하고, 군단장일때는 군단을 해체(더군다나 2번이나...) 그래서 결국은 작전권이 미국에게 넘어가게된 계기를 만든...  
     
    박정희 전 대통령에 연줄을 데어,, 국방장관이라는 중책을 맡다가,,  
    뉴스검색에 보니 지금까지 살아계서서 작전권환수에 반대하는 목소리까지...  
     
    이 양반은 정말 고루 고루 하시는 군요. 스스로 작전권을 넘기시고 작전권환수에 반대하시고......참...</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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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길 잃은 어린양11:38 오후

    유재흥에게 현리전투의 책임을 과도하게 떠넘기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유재흥의 과오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한국군 장교단의 전반적인 자질 부족이 심각했다는 점 등의 근본적인 문제는 누구 한사람에게 책임을 떠 넘길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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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박종민10:49 오후

    물론 주인장님의 말씀이 맏습니다. 저도 물론 당시의 장교들의 자질부족이 가장 큰 문제였다는데 100%동의합니다.

    그런데 최소한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 군단장이라는 책임장교가 다시 임용되어 비슷한실패가 여러번 반복된다는 점에서는 문제가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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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박종민10:51 오후

       물론 저도 주인장님의 의견에 100%동의 합니다. 당시의 장교들의 자질 부족이 물론 가장큰 문제였겠지요.

      유재흥 장군의 혼자 책임이었다고는 저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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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박종민10:52 오후

    <span>   물론 저도 주인장님의 의견에 100%동의 합니다. 당시의 장교들의 자질 부족이 물론 가장큰 문제였겠지요.  
     
      유재흥 장군의 혼자 책임이었다고는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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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박종민10:53 오후

    <span>   물론 저도 주인장님의 의견에 100%동의 합니다. 당시의 장교들의 자질 부족이 물론 가장큰 문제였겠지요.  
     
      유재흥 장군의 혼자 책임이었다고는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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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이준님6:00 오전

    유지흥 자체도 문제가 없었다는 건 아니지만은... 최근에 인터넷에서 도는 이야기들은 상당수 과장이 심한 건 사실입니다.  운이 없었던 것도 있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윗사람이라서 받은 것도 있고 분명히 욕먹어야 할 자기 잘못도 있지요. 정찰기 탈출 부분은 사실 인격모독 수준이라고 보면 됩니다.

    실제로 "인터넷"류의 이야기는 심지어 "그때 일등병이었던 분의 증언"류나 심지어는 "북한의 선전기록"까지도 도용하는 경우가 무척 많습니다. 더군다나 전작권 문제때문에 정치적으로 "찍힌"것때문에 더 그런게 심합니다. 우리나라가 그런게 무척 심하죠. 흠(일례로 분명히 거창사건이나 견벽청야에 대한 책임이 있는 최덕신이 민족적 장교로 포장되고 엄하게 백선엽이 학살을 뒤집어쓰는 거나 같은 논리이지요)

    논란이 심하지만 낙동강 전선때 유재흥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찾아보시면 일부 인터넷의 기록에서 빠진것을 알수 있을겁니다. 물론 현리전투는 그 모든것을 말아먹었지만요.

    덧 : 인터넷에서 도는 이야기와는 별도로 아주 짜증나는건 얼마전 방영한 KBS판 한국전쟁에서 나온 한강교 폭파에 대한 유재흥의 증언입니다. 이게 그 방송국에서 편집을 했는지 모르지만 유재흥은 여기서 한강교 폭파의 책임은 최창식 공병감 X신이라는 쪽으로 이야기하더군요. 최장식은 당시에는 처형되었지만 60년대 복권되었는데 50년대 웟분들의 한강교 사건에 대한 사고방식을 대변하는 건지....짜증이 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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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이준님6:02 오전

    오타가 많군요. 크.

    아. 그리고 작전권 넘어가게 된건 대전협정때문입니다. 유재흥때문이 아니라 그 전에 이미 벌어진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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