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AEF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AEF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09년 10월 21일 수요일

미 육군의 프랑스제 야포 채용

예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번 했습니다만 이번에는 순수하게 "야포" 이야기만 해 볼까 합니다.

1차대전이 장기화 되면서 서부전선에서는 무시무시한 화력전이 전개되었고 여기에 대해서는 대서양 건너의 미육군에서도 심각하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대륙의 불똥이 언제 바다 건너까지 튈지 모르는 일이었으니 말입니다.

그 러나 비교적 19세기 말 유럽의 육군군비경쟁과는 무관하게 한발 물러서 있던 미육군의 포병전력은 세계대전에 뛰어들기에는 살짝 모자란 수준이었습니다. 1898년에 미서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육군이 보유한 야포는 123문의 3.2인치 야포, 22문의 3.6인치 야포, 22문의 3.6인치 유탄포, 그리고 소수의 공성포(siege gun)가 전부였습니다. 미국 전쟁부는 이때문에 포병 전력의 확충을 위해 영국으로 부터 34문의 암스트롱 4.7인치 야포와 8문의 6인치 포를 급히 구매해서 배치해야 했습니다.1) 미국 전쟁부는 이 전쟁의 경험과 유럽의 군비경쟁에 자극을 받아 포병전력의 확충에 고심했지만 1차대전에 참전하게 될 때 까지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전쟁부는 유럽대륙의 군비증강에 자극받아 1912년에 새로운 보병사단의 포병개편안을 내놓았습니다. 이 개편안은 1개 보병사단에 1개 포병여단을 두고 이 포병여단은 다시 2개 포병연대로, 그리고 각 포병연대는 2개 대대의 3인치 야포(각 대대당 3인치 야포 12문)과 1개 대대의 4.7인치 유탄포(대대 당 4.7인치 유탄포 8문)로 편성하는 것 이었습니다.2) 이 개편안의 목적은 미육군 보병사단의 포병전력을 유럽대륙의 보병사단 포병편제에 준하는 수준으로 증강하는 것 이었습니다.

※ 그리고 4.7인치 유탄포는 6인치 유탄포를 배치하는 방안으로 교체됩니다.

사실 1차대전 직전에는 포병전력 뿐 아니라 미육군 자체가 전반적으로 전력 강화에 부진을 겪고 있었습니다. 예를들어 1916년의 국가방위법(National Defense Act)이 목표로 한 것은 1921년까지 정규군을 165,000명, 주방위군(민병대)을 450,000명으로 증강하는 것에 그치고 있었습니다.3) 포병 증강을 위한 시도는 1차대전 발발 이전부터 꾸준히 행해지고 있었지만 1917년 까지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채 계획만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포병 증강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조직된 트리트 위원회(Treat Board)는 1915년 4월 17일의 보고서에서 육군의 포병전력을 8년에 걸쳐 3인치 야포 1,968문, 3.8인치 유탄포 936문, 4.7인치 유탄포 312문, 4인치 야포 312문, 7.6인치 유탄포 104문, 11인치 유탄포 72문으로 증강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이 방대한 계획에 필요한 예산은 총 4억8천만 달러로 예상되었습니다.4) 이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단포병의 주력장비가 될 3인치 야포의 개량형, M1916을 예정에 따라 충분히 확보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여전히 현대적 야포의 생산에 필요한 기술적 정보가 부족했으며 이때문에 1916년에는 병기국의 힐맨(L. T. Hillman) 소령을 유럽에 파견하기로 결정합니다. 힐맨 소령은 프랑스, 영국 정부와 접촉해 미국이 필요로하는 기술을 획득하려 했습니다. 프랑스는 처음에 미국측에게 기술을 판매하는 것을 기피했으나 힐맨 소령이 영국과 접촉해 빅커스(Vickers)의 9.2인치 유탄포와 12인치 유탄포의 설계도와 기술을 구매하자 태도를 바꿉니다. 힐맨 소령은 프랑스로 부터 생샤몽(St. Chamond)사의 야포용 완충기 생산권 등 중요한 기술을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5)

미 전쟁부는 1917년 부터 유럽으로 부터 구매한 신기술을 대거 활용해 대규모 포병증강계획에 돌입합니다. 역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사단포병의 주력 장비인 3인치 야포와 6인치 유탄포의 대량생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게 되면서 자체적인 포병증강계획은 차질을 빚게 됩니다. 미국이 이제 막 유럽에서 도입한 신기술을 적용해 개량한 3인치 포는 시험 결과 수많은 문제를 일으켜 예정된 시간까지 유럽에 파견할 육군을 무장시키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M1916은 물론 영국제 18파운드을 바탕으로 한 M1917의 시험 결과도 신통찮았기 때문에 미육군 포병감 스노우(William J. Snow)소장은 "우리는 이번 전쟁에 우리 군대를 야포로 무장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한탄을 했다고 합니다.6) 미국정부는 미국 원정군이 독립적인 지위를 가질 수 있도록 가능한 "미국제" 장비로 무장하길 원하고 있었습니다.7) 하지만 현실은 미국의 "야무진 꿈"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 국 병기국장 크로지어(William Crozier) 소장과 프랑스 병기국장 갸네(M. J. M. Ganne)간에 1917년 5월 25일 진행된 회의에서는 프랑스제 야포를 도입해 미국원정군(AEF)을 무장시키고 미국제 야포는 국내에서 훈련용으로만 사용하는 결정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회의의 결과 프랑스 정부는 1917년 8월 1일 부터 75mm포를, 1917년 10월 1일 부터는 155mm포를 공급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에따라 7월 9일에는 공식적으로 보병사단의 포병편제에서 3인치 포를 프랑스의 75mm포로 교체하고 6인치 포는 155mm유탄포로 교체한다는 명령이 내려집니다.8) 이미 미국원정군의 제 1진 14,000명은 1917년 6월 28일에 프랑스의 생나제르(St. Nazaire)에 도착했으며9) 다음날인 1917년 7월 10일에는 퍼싱 장군이 1919년 6월 까지 총 95개 사단을 편성하고 이 중 80개 사단을 유럽전선에 투입한다는 계획을 제출했습니다. 이것은 유럽에 투입할 80개 사단을 무장시키는데만 총 3,840문의 75mm급 야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당시의' 미국으로써는 단시일내에 그정도의 국산 야포를 배치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는 1918년 11월 11일까지 미육군에 총 3,352문의 각종 야포를 원조하게 됩니다.10)

※ 물론 국제관계가 다 그렇듯 미국도 날로 먹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프랑스 정부에 75mm포 1문당 6톤의 강철을, 155mm유탄포 1문당 40톤의 강철을 제공하기로 했습니다.11)

하 지만 그동안 진행되고 있던 3인치포 등 국산 무기의 개발을 취소하고 새로이 프랑스의 기준에 맞춰 야포와 탄약을 생산하는 문제는 쉽지않은 것이었습니다. 특히 프랑스가 제공하는 설계도 등을 번역하는 등 기술적 문제가 산적해 있었습니다. 75mm 포탄 생산을 위해 프랑스가 제공한 자료들의 번역이 완료된 것은 1917년 12월 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여전히 자국산 야포의 개발에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75mm포 면허생산을 공식적으로 결정한 것은 1918년 2월이 되어서였습니다.12) 그러나 기술적 문제로 생산이 계속 지연되었기 때문에 1차대전 중 미국 국내에서는 프랑스제 75mm포는 단 1문도 생산되지 못했고 대신 영국제 18파운드포를 기초로한 M1917이 724문 생산되는데 그쳤습니다. 미국이 면허생산한 프랑스제 야포는 146문으로 이중 144문이 155mm유탄포였습니다.13)

미국은 1차대전 중 프랑스제 야포를 매우 유용하게 활용했으며 특히 사단포병의 75mm포는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물론 일부 지휘관들은 75mm의 탄두 위력 부족으로 사단포병에 1개 연대의 105mm 유탄포를 배치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지만 전쟁이 끝날때 까지 75mm포는 사단포병의 주력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미육군이 75mm포에 크게 만족했기 때문에 1940년까지도 사단포병에 75mm 대신 105mm를 배치하자는 제안은 진지하게 검토되지 못할정도였다고 하지요.14) 그리고 155mm 구경은 오늘날에는 서방 국가들의 표준적인 야포 구경이 되었습니다. 만약 미국이 원래 계획대로 인치 구경을 사용하는 자국산 야포의 대량생산에 성공했다면 오늘날 표준적인 야포구경은 6인치가 되어 있겠지요.




1) H. A. De Weerd, "American Adoption of French Artillery 1917-1918", The Journal of the American Military Institute, Vol. 3, No. 2, (Summer, 1939), pp.104~105
2) Vardell E. Nesmith Jr, "Stagnation and Change in Military thoght : The Evolutuion of American Field Artillery Doctrine 1861~1905", U.S.Army Command and General Staff College, 1976, p.284
3) Mark E. Grotelueschen, The AEF Way of War : The American Army and Combat in World War I,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p.11
4) De Weerd, Ibid., p.106
5) De Weerd, Ibid., p.108
6) Robert B. Bruce, A Fraternity of Arms : America and France in the Great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3, pp.100~111
7) Elisabeth Glaser, "Better Late than Never : The American Economic War Effort, 1917~1918", Great War, Total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2006, pp.405~406
8) De Weerd, Ibid., p.110
9) Bruce, Ibid., p.91
10) Bruce, Ibid., p.105
11) Bruce, Ibid., p.106
12) De Weerd, Ibid., pp.111~112
13) De Weerd, Ibid., p.116
14) Janice McKenney, "More Bang for the Buck in the Interwar Army: The 105-mm. Howitzer", Military Affairs, Vol. 42, No. 2, (Apr., 1978), pp.80~81

2007년 1월 29일 월요일

프랑스의 대미 군사원조 : 1917~1918

1917년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할 당시 미국의 전쟁 준비는 해군을 빼면 전혀 돼 있지 않았습니다. 국가 전체가 고립주의에 빠져 19세기 후반기 내내 전쟁에 대한 특별한 생각 없이 살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결과였습니다. E. Glaser는 1차 대전 당시 미국의 전시 동원체제에 대한 짧은 논문에서 미국의 군수공업위원회가 1918년 초까지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E. Glaser의 논문 제목도 아예 Better late than Never입니다. ‘아예 안하느니 늦는게 낫다’ 정도…)

1917년, 퍼싱이 유럽 원정군을 1918년 6월까지 1백만 수준으로 증강시키고 최종적으로 2백만으로 증강시킨다는 계획을 전쟁부(Department of War)에 제출했을 때 미국 유럽 전선에 보낸 장비 중 현대적인 야포는 120문의 M1903 3인치 유탄포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미국에 제대로 된 군수공장이 드물다 보니 새로 개발하는 M1916 3인치 유탄포는 프랑스군의 75mm 포탄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발 도중에 설계를 변경해야 했습니다. 결국 미국의 공장들은 프랑스로부터 75mm 유탄포의 생산면허를 도입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M1916을 양산할 수 있을 때 까지 기다리다간 전쟁이 끝날 판이었으니…

1차 대전이 끝난 뒤 미 육군 포병감 스노우(William J. Snow) 소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전쟁 기간에 우리는 우리 군대에 대포를 보급할 능력도 없었고 보급하지도 못했다고 말해도 틀리진 않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 이겠지만, 프랑스 정부가 미국의 딱한 사정을 보고 나서게 됩니다. 1917년 5월 22일, 조프레는 미국 전쟁성에 미육군의 병력 동원을 앞당기기 위해 미국이 필요로 하는 자동화기와 야포를 모두 프랑스 정부가 원조한다는 안을 제안했습니다.
또 같은 달 25일에 프랑스 정부는 미국 측에 1백만발의 75mm 포탄과 10만발의 155mm 포탄을 먼저 원조하고 그 다음으로 매일 3만발의 75mm 포탄과 6천발의 155mm 포탄을 원조하겠다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마침내 미국 정부는 1917년 6월 9일에 프랑스 측에 미국제 3인치, 6인치 유탄포 생산을 취소하고 그 대신 프랑스로부터 75mm, 155mm 유탄포를 원조 받겠다고 통보합니다. 당장 포탄부터 얻어 써야 할 판이니 대안이 없었던 것이죠.

결국 이 덕분에 오늘날 수많은 제 3세계 국가가 155mm를 주력 야포로 쓰고 있지요. 만약 미국이 원래 계획대로 3인치와 6인치 유탄포를 양산할 수 있었다면 오늘날 야포의 표준 구경은 6인치가 됐을 텐데 말입니다.

부족한 것은 대포 말고도 많았습니다.

1차 대전의 필수품, 기관총도 매우 적었던 것 입니다. 퍼싱은 기관총 부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프랑스에 처음 도착한 사단들은 미국 본토에서 기관총 사용을 충분히 훈련 받지 못했고 많은 사단들은 프랑스에 도착하기 전 까지 기관총을 지급받지 못한 상태였다. 전쟁에 참전할 당시 각 사단은 기관총 92정만 보유했는데 실제 편제상으로는 기관총 260정과 자동소총 768정이 필요했다. 기관총이 부족해서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됐는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결국 퍼싱은 1917년 6월 21일, 프랑스에 기관총도 원조해 줄 것을 요청하도록 전쟁부에 문서를 보냈고 프랑스 정부는 즉시 미국에 기관총과 탄약 일체를 원조하겠다는 답신을 보냅니다.

항공기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J. H. Morrow. Jr의 The Great War in the Air에는 전쟁 발발당시 말 그대로 안습이었던 미 육군항공대의 비참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미 미국은 1909년 이후 군사 항공에서 독일과 프랑스에 큰 차이로 뒤진데다가 전쟁이 발발한 이후 유럽의 항공기술이 급속히 발전해 미국으로서는 이 격차를 쉽게 줄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결과 당연하게도(?) 미국 육군항공대는 프랑스가 만든 비행기로 도배를 하고 맙니다.

그러나 미국은 프랑스에 철강, 화약 등을 지원했기 때문에 프랑스에 대해 저자세를 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미국은 1917년에 영국과 프랑스를 합친 것 보다 더 많은 무연화약을 생산했습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1918년에는 더 벌어지지요. 프랑스 역시 자원이 부족한데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자본이 거덜날 지경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미국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내려고 혈안이 돼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측에 파격적인 선심공세를 퍼붓게 됩니다.

1차 대전기간 중 미육군이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원조받은 장비는 다음과 같습니다.

(프랑스 / 영국)

야포 : 3,532 / 160
열차포 : 140 / 0
탄약차(Caisson) : 2,658 / 0
박격포 : 237 / 1,427
자동화기 : 40,884 / 0
전차 : 227 / 26
항공기 : 4,874 / 258

R. Bruce, A Fraternity of Arms : America & France in the Great War, p.105

거의 대부분의 군 장비를 원조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나마 차량은 생산기반이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중화기 보다는 조금 나은 편이었다지요.

저런 일들이 불과 90년 전 일 이라는게 믿어지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저 때로부터 불과 30년 만에 경쟁자가 없는 절대 강국으로 떠오른 것을 보면 미국은 좋건 나쁘건 간에 역사상 유례가 없는 괴물 국가임에 틀림 없습니다.

2006년 5월 8일 월요일

1차 세계대전과 미국의 흑인 부대(재탕)

미국사와 관련된 책을 조금 읽다 보면 흑인에 대한 차별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장기간 존속되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당장 1960년대에 흑인 대학생들을 백인 학교에 입교 시키기 위해서 주 방위군을 동원해야 될 정도였으니. 흑인에 대한 인종적 차별이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없어 지지 않은 이유를 들자면 돌팔이 인류학자들의 인종 비교 연구가 과학이라는 탈을 쓰고 이른바 “식자층”에게 까지 널리 퍼졌다는 것이 있습니다. 흑인에 대한 차별이 과학의 탈을 쓰고 자행 되었으니 참 과학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흑인은 인종적으로 열등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보니 미국 정부는 흑인을 무장시키는 것을 별로 달가워 하지 않았습니다. 남북전쟁 때야 노예해방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 흑인 부대를 대규모로 조직했지만 남북전쟁이 끝난 뒤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1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 미국 전쟁성(War Department)는 흑인 부대를 대규모로 편성하는데 대해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물론 뉴욕 15 보병연대와 일리노이 8 보병연대같이 흑인 장교와 흑인 사병으로 편성된 주방위군 부대가 있긴 했습니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드문 예에 해당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의 참전이 결정되면서 흑인의 전쟁 동원이 필요해 지자 흑인 부대를 증편하는 방안이 전쟁성의 민병대 국(Militia Bureau)에서 나왔습니다. 민병대 국은 흑인 연대 세개를 편성해서 이것으로 독립 흑인 보병여단을 만들자는 안을 내 놓았습니다. 이에 대해서 당시 전쟁성 장관이었던 베이커는 흑인 주방위군 3개 연대와 징집한 흑인 연대 한 개로 임시 흑인 사단을 편성하자는 안을 내놓습니다.

이렇게해서 뉴욕 15 보병연대는 369 보병연대로, 일리노이 8 보병연대는 370 보병연대로, 그리고 기타 독립 흑인 보병부대들은 372 보병연대로 통합 되었고 새로 징집한 흑인 병사들로 371 보병연대가 편성 되었습니다. 이렇게 편성된 4개 흑인연대로 1918년 1월 5일에 93 보병사단이 편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단 직할대의 편성이 완료 되지 못 했기 때문에 93 보병사단은 보병연대 네개만 가진 연대들의 집합체가 되었습니다.

유럽전선에 투입된 93 보병사단은 프랑스군에 분산 배치되게 되었습니다. 1918년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장기간의 전쟁으로 병력 부족을 심하게 겪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미군 부대를 예하에 두려고 미국 정부에 요청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미국 원정군 사령관 퍼싱은 프랑스군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93 보병사단 예하의 4개 연대를 각각 프랑스군 사단에 배속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이렇게 해서 가장 먼저 프랑스에 도착한 제 369보병연대가 프랑스군 16 보병사단에 배속되어 전투를 치루게 됐습니다.
흥미롭게도 퍼싱은 당시 다른 미국 장군들과 달리 흑인 부대가 훌륭한 전투 부대이기 때문에 비전투 임무에 돌리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일각에서는 퍼싱이 흑인 사단을 해체해서 프랑스군에 배속시킨 것이 퍼싱의 인종 차별적 행동이라고 비판하는데 전쟁중의 퍼싱의 행동이나 언사를 보면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1918년 6월에 프랑스 정부가 퍼싱에게 흑인연대 8개를 프랑스군에 증원해 줄 수 없느냐고 했을 때 퍼싱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하는 군요.

“유색인종연대들(Colored regiments)은 미국 시민들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관은 이들 부대들을 다른 백인 부대들과 같은 방식으로 운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퍼싱이 최초로 편성된 흑인 연대 네개를 프랑스군에 배속 시킨 것은 프랑스와의 동맹을 고려한 정치적 행동이라는게 지배적인 의견입니다. 사실 1918년에는 미군의 전투경험과 대부대 운용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에 흑인 부대뿐 아니라 백인 부대들도 대대급으로 해체해서 영국군에 배속시키자는 주장도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사단 편제가 93사단은 사단 편제를 제대로 가지지 못해서 사단급 작전이 불가능 했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퍼싱도 어쩔 수 없는 백인인지라 흑인은 훌륭한 병사지만 장교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퍼싱 자신도 젊은 시절 잠시 흑인 부대를 지휘했었다고 하죠. 퍼싱은 백인 장교가 흑인 병사와 부사관을 지휘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운용 방식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프랑스군에 분산 배치된 흑인 병사들은 1918년 7월의 반격 작전에서 큰 활약을 했다고 합니다. 흑인 병사들의 용맹 때문에 이들을 지휘한 백인 장교들은 큰 감명을 받고 인종 차별적 태도를 버리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Halem’s Hell Fighters라는 명칭을 얻게 된 뉴욕 369 보병연대는 이때 보인 공적으로 1918년 12월 18일에 프랑스 정부의 부대 표창을 받게 됩니다.

그렇지만 흑인들에 대한 차별은 계속 이어져서 2차 대전때도 흑인들은 소규모 독립 부대로 참전하는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결국 인종별 부대를 편성하는 차별이 시정 된 것은 베트남전 부터였습니다.

미국 흑인들의 평등을 위한 투쟁은 지극히 당연한 인간적 평등을 얻기 위한 대가치고는 너무 비싼 대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