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 8일 월요일

한국의 모병제 논의에 대한 짧은 생각

노무현 대통령의 “군대가서 썩는다”는 발언은 지난 연말 최고의 히트작 이었습니다. 현직 대한민국 최고의 강태공 노무현 대통령답게 이 발언을 통해 수많은 월척을 낚았지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구조적으로 한계를 보이기 시작한 한국의 “국민개병제”에 대한 대안으로 “모병제”가 꾸준히 논의되고 있는 와중에서 튀어 나왔다는 점에서 더 흥미 있었습니다.

한국의 “모병제”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모병제에 대해 더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 입니다. 그리고 더 흥미로운 점은 이 “진보적”인 사람들이 내세우는 논의는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의 논의와 유사하다는 점이지요.
닉슨의 참모 중 하나였던 밀튼 프리드먼은 시장경제의 원리를 가지고 징병제를 공격했던 대표적 인사입니다. 프리드먼은 “국민개병제”로 만들어진 군대는 노예의 군대라고 조소하기도 했습니다.(이건 프리드먼이 국민 개병제의 정치적 의미를 모르거나 알면서도 무시했다는 이야기죠)
당시 모병제에 찬성하는 시장주의자들은 모병제를 실시하더라도 육군이 필요로 하는 병력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으며 군대의 효율도 보장될 것이라고 선전했습니다. 그러나 미군은 모병제를 실시한 직후부터 심각한 인건비 상승과 효율 저하에 시달렸습니다. 1968년 미군은 320만명의 병력에 320억달러(국방비의 42%)의 인건비를 지출했지만 징병제 폐지 2년차인 1974년에는 병력 220만에 439억달러(국방비의 56%)의 인건비를 지출했습니다. 직업군인의 증가로 이에 필요한 부대비용(특히 가족 부양에 필요한)이 급증했고 전반적인 급여가 증가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정치적 논의가 활발한 유럽의 경우는 “진보” 또는 “좌파”로 자처하는 인사들이 “국민개병제”를 옹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J. Erickson의 기념비적인 저작, The Soviet High Command는 혁명 초기 소련에서 전개된 국방제도의 골격에 대한 공산당내 좌우파의 논의를 잘 다루고 있습니다. 소련의 공산당 좌파들은 9차 전당대회에서 “전문화된 군대”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트로츠키에 대해 군사력이 민중으로부터 괴리될 경우 그 군사력은 민중을 압제하는 도구가 된다고 주장하며 민병대 체제를 소련 군사력의 근간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습니다.
진보적 지식인들이 모병제나 전문적인 군인 집단에 거부감을 가졌던 이유는 19세기 초 까지도 용병으로 이뤄진 직업군대가 민중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던 유럽의 역사에 기인합니다. V. G. Kiernan이 여러 사례를 들어 잘 지적했듯 절대 왕정시기 주로 외국인으로 만들어진 용병군대는 국민을 억압하는 도구였습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 고용주인 부르봉 왕가에 충성하며 시민들을 상대로 최후까지 항전한 스위스 용병들의 이야기는 슬프기도 하지만 역으로 뒤집어보면 용병군대가 얼마나 절대권력의 이익에 충실히 복무하면서 국민을 짓밟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절대왕정의 성립과정에서 중앙 권력에 의한 무력 장악이 중요한 과정이었다는 것은 정치사가들의 공통적인 견해이죠. 유럽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이런 역사적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국민개병제에 긍정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장 경제 원리에 따라 모병제를 도입한 미국의 군대가 과연 모든 조건에서 잘 돌아가고 있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닉슨은 선거운동 기간에 모병제가 사실상의 용병제라는 국민개병제 옹호자들의 주장에 대해 미국의 모병제는 미국 시민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현재 미국은 모병율 저하로 시민권이 없는 영주권자까지 모병 범위를 확대하고 있으며 날이 갈수록 병사 일인당 소요되는 인건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비용 대 효용은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지요. 미국은 꾸준히 모병에 따른 인건비 증가와 병력 확충의 어려움에 따른 전쟁 수행능력 부족을 겪고 있습니다.
모병제로 움직이는 이라크의 미군은 징병제로 움직였던 40년 전 베트남의 미군과 마찬가지로 비정규전 하에서 어려움에 봉착해 있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교리와 전술의 문제입니다. 모병제로 만들어지는 오늘날의 미군은 분명히 강력하고 매우 우수한 군대입니다. 하지만 이라크에서는 여전히 40년 전 징병제 시절과 마찬가지의 문제에 봉착해 있습니다. 모병제가 만능이 아님을 직접 보여주고 있는 것 입니다. 모병제로 만들어진 군대도 적절한 교리와 전술이 없다면 국민개병제로 이뤄진 군대만도 못 한 것이 현실입니다. 즉 뒤집어 말하면 합리적으로 운영 되고 적절한 교리와 전술이 있다면 국민개병제로 만들어진 군대도 충분히 잘 움직일 수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지금 한국의 국민개병제가 수많은 문제점을 노출 시키고 있고 비능률적이라고 혹평 받는 것은 운영 방식이 잘못된 것이지 국민개병제가 모병제보다 나쁜 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재 한국은 국민개병제로 인한 여러 가지 폐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굳이 제가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많은 분들이 군대를 다녀오셨기 때문에 그 폐해를 경험적으로 잘 아실 것 입니다. 하지만 폐해가 많다고 하더라도 모병제 말고도 현재의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는 대안은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칭 진보들은 모병제냐 징병제냐의 단순한 이분법적 논지만 전개하고 있습니다. 답답할 따름입니다.

사족 하나 더. 모병제로 이뤄진 군대가 국민개병제로 이뤄진 군대보다 더 우수하다면 극도로 우수한 전투력을 보여줬던 2차대전기의 독일 국방군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핸슨 볼드윈 같은 초기의 미국 모병제 지지자들은 국민개병제의 비효율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독일의 “전격전”을 그 예로 들었습니다. “전격전”을 수행한 독일의 군대는 국민개병제로 만들어진 군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말 웃기는 일 이지요.

국내에서 진보로 자처하는 인사들의 모병제 논의가 단순히 겉멋만 잔뜩 든 언어유희에 불과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비단 저 혼자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칭 진보들이 시장논리를 만병통치약인 양 전면에 내세우고 시민의 정치적 권리와 군사력이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무관심 한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물론 시장의 논리도 중요하며 많은 경우 사회에 유익한 작용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코 만병통치약은 아닙니다.

댓글 9개:

  1. 뭔가 모병제를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는 게 아닐까합니다. 군사적 효율성뿐만 아니라 국민의 내적통합 등에 있어서 징병제의 효과는 분명 크다고 생각되구요. 특히나, 최근 서서히 이주여성 2세들이 늘어나는 추세이니 후자의 기능이 점차 주목받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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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고대 로마처럼 국제결혼으로 태어난 아이들이(당시는 이민족간 결혼) 병역으로 국가에 대한 일체감... (퍽! ^^ 제가 생각해도 허황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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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징병제를 계속할 생각이라면 사병들 월급이나 좀 적절한 수준으로 인상했으면 합니다...(지그은 무슨 무보수 노동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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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개인적인 경험(아직 군대를 안 갔으니 간접적인 것이지만)면에선 한국군이라는 존재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시스템에 덧붙여 일종의 '악재가 겹친' 그 자체로서 상당히 후진적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태클환영]

    그런데 그런 존재가 단순히 직업군인만으로 편성된다고 해서 뭔가 획기적으로 바뀐다는 것은 말이 안되지요. 한마디로 노대통령의 발언은 낚시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국민의 내적통합에 있어서 징병제의 효과는 '한국에선' 크지 않을겁니다 분명. 좀 더 과격하게 이야기하자면 오히려 분열을 촉구하는 시스템의 일종이라고까지 생각합니다.)(이건 국가적인 면과도 관련이 있으니 딱히 군대에만 죄를 씌울순 없는 요소이긴 합니다만, 죄가 없는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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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그거야... 대한민국의 국방에 어느 쪽이 더 효율적인지 관심을 가지고 생각해 본 사람이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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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bigtrain님 // 국민의 내적 통합기능 보다는 사회적 불평등을 덮는 '최소한'의 기능을 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생색은 내야지요.

    어부님 // 제가 생각해도...

    행인님 // 미국은 징병제를 하던 시절에도 월급은 잘 줬지요.

    라피에사쥬님 // 좋은 지적이십니다. 특히 한국의 시스템에서는 문화적 요소도 강한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유럽의 시민사회 형성은 국민개병제 실시와 투표권 문제가 결부돼 있지만 한국은 그런 역사, 문화적 배경이 없지요.
    한국의 경우는 되려 너무 일찍 중앙집권화된 국가가 만들어져 "백성"을 국가의 임의대로 동원하는 형식이었고 지금도 이런 문화적 잔재가 남아있는게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스카이호크님 // 진보와 보수 모두 머리는 공허한데 가슴만 뜨거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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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모병이건 징병이건 문제는 그 제도 자체가 아니라 뭐가 더 국방에 효율적이며 장기적으로 좀 더 나은가....요게 아닌가 싶습니다.

    (...) 요컨데 요즘 저 논의는 이슈를 만들어 우민들을 솔깃하게 만드는 포퓰리즘이라는데 한 표(...)주고싶네요. 왜? 무엇을 위한지에 대한 설명은 교묘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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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배군님 // 저는 전형적인 청와대 강태공의 낚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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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작성자가 댓글을 삭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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