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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21일 토요일

제2차세계대전 시기 항공모함의 전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

 


밀리터리 오타쿠의 관점에서 읽은 연구논문 중 지난 1년간 가장 재미있었던 걸 꼽으라면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84에 실린 미국 해군대학 교수 피츠시몬즈(James R. FitzSimonds)의 "Aircraft Carriers versus Battleships in War and Myth: Demythologizing Carrier Air Dominance at Sea"를 들겠습니다. 과연 제2차세계대전 당시 항공모함이 전함에 대해 압도적인 우세를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밀리터리 오타쿠 입장에서 환장할만한 주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피츠시몬즈는 레이테만 해전의 예를 들면서 항공모함의 위력이 과대평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레이테만 해전에서 미국 해군은 에섹스급 7척을 포함한 35척의 항공모함과 항공모함 항공대 소속의 항공기 1,500여대를 동원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작전상 미끼로 던진 항공모함을 제외한 일본군 주력을 상대로는 전함 1척과 중순양함 1척만이 미군 항공모함 탑재기에 격침되거나 대파되었습니다. 저자는 이상적인 조건에서 미국 항공모함 항공부대가 전투력을 최대한 집중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함 중심의 일본군 주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지 못한 점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 기간 중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항공기가 기동중인 주력함을 격침한 것은 야마토와 무사시 외에 없다는 점을 지적합니다.(히에이는 미국 수상함대와의 전투로 전투불능이 된 상태에서 항공기 공격을 받았으므로 제외합니다.) 진주만 공습 같이 정박해 있는 주력함을 공격한 경우에도 완전히 전열에 복귀하지 못하게 타격을 입힌 사례는 4척 밖에 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프랑스 해군의 덩케르크, 이탈리아 해군의 로마, 미해군의 애리조나와 오클라호마) 전함보다 작고 약한 순양함이나 구축함의 경우도 항공모함 탑재기 보다는 수상함이나 잠수함과의 교전에서 더 많은 숫자가 격침되었습니다. 

저자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 항공모함 탑재기들은 전함과 같이 빠르고 강력한 방어력을 갖춘 군함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능력이 부족했다고 지적합니다. 해군 항공기용의 폭탄은 1,000파운드 정도로 전함의 갑판에 유효한 타격을 주기 어려웠고, 어뢰는 위력이 충분했으나 명중율이 부족했다는 겁니다. 게다가 뇌격기들은 대부분 저고도에서 느린 속도로 움직여 전함의 대공화력에 대해 생존성이 떨어졌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저자는 제2차세계대전 시기 수상함의 대공화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대전 초기인 1942년 초의 산호해 해전에서도 미국 함대는 대공화력 만으로 일본군 항공대를 격퇴할 수 있었습니다. 미군 보다 뒤떨어지는 일본 해군 함정의 대공화력도 미국항공모함 탑재기들을 상대로 충분히 유효했다고 지적합니다. 레이테만 전투 당시 일본해군의 이세가 100대 가까운 미군 함재기의 공격을 대공화력 만으로 격퇴한 점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또한 제2차세계대전 시기의 항공모함들의 작전 지속능력이 떨어졌던 점도 지적합니다. 항공모함은 육상기지에 비해 비축할 수 있는 물자에 한도가 있어 장기간 작전을 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여기에 항공모함 탑재기의 소모율이 높았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이때문에 미 해군이 항공모함 전력에서 일본군을 완전히 압도한 1944년이 되어서도 미해군의 항공모함 항공부대는 충분한 전과를 거둘 수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예를들어 필리핀해 해전에서는 미해군 항공부대가 전력 우세에도 불구하고 항공모함 한척과 유조선 2척을 격침시키는데 그쳤고 그 댓가로 출격시킨 항공기 200대 중 80대를 여러가지 이유로 상실했습니다. 게다가 장거리 출격 때문에 미군 함재기의 무장 탑재에도 지장이 있어 타격력이 더 감소했다고 지적합니다.(뇌격기들도 항속거리 문제로 폭탄을 탑재했음) 미국 항공모함의 지상 타격도 예상외로 결정적이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피츠시몬즈는 레이더도 부실하고 대공화력도 약하며 조종사의 수준도 뒤떨어지는 일본군을 상대로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미국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유럽으로 가서 독일 공군 기지를 타격했다면 어떤 성과가 나왔겠냐고 반문합니다.

반면 전함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평가를 상향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피츠시몬즈는 대평양 전쟁의 분기점은 미드웨이 해전이 아니라 미국의 고속전함부대가 전장에 등장하기 시작한 1942년 말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전함 전력없이는 태평양에서 전략적인 공세가 가능하지 않았다고 보는 겁니다. 저자는 과달카날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주 요인이 미해군의 신형고속전함들의 활약이라고 평가합니다. 또한 1943년 이후 미해군의 반격작전에서도 전함의 역할을 더 높게 평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자는 제2차세계대전 직후 전함 전력이 급속하게 감축된 주된 요인은 항공모함의 우위 보다는 미해군에 대항할 수상함 전력을 가진 가상적이 소멸하고 대함미사일이 등장한데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 직후 미국 해군항공대가 해군 내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항공모함 항공대의 위력을 강조하는 여론을 조성한 점도 항공모함의 '신화'를 부풀리는데 일조했다고 주장합니다.

꽤 재미있는 주장을 하는 글 입니다. 

2010년 6월 27일 일요일

두 편의 한국전쟁 드라마...

KBS와 MBC에서 제작한 두 편의 한국전쟁 드라마를 조금 뒤늦게 봤습니다. 아직 시작단계입니다만 살짝 난감하더군요.

"고증" 문제는 여기저기서 비판 받은 것이고 사실 저는 "고증"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는 않는 입장이라 이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다소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MBC의 '로드넘버원'이 약간 더 난감한데 한국전쟁 직전 빨치산 토벌전에서 중상을 입은 주인공이 행방불명 된 것 때문에 약혼자가 다른 남자와 사귀게 된다는 설정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2년뒤라는 자막이 뜨는걸 보니 시간상으로 볼 때 주인공이 1948년 말 쯤 부상을 당한 듯 싶은데 도데체 1950년이 될 때 까지 어디에 있었길래 약혼자와 연락이 두절된 것 입니까?

이건 거의' 진주만'의 이야기구조를 모방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 같습니다. '진주만'의 이야기도 난감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진주만에서는 주인공이 격추되어 프랑스를 통해 탈출하느라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개연성이라도 있습니다. 하지만 '로드넘버원'은 그것도 아닙니다. 어차피 주인공이 빨치산과의 전투직후에 구조되었으니 살아남았을 텐데 뭐하느라고 약혼자에게 연락도 안하고 있다가 1950년에 나타난 건지 모르겠습니다;;;;

도데체 한국에서, 탈영한 것도 아닌 군인이 2년 동안 연락이 두절된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전투장면의 엉성함 같은거야 참고 볼 수 있지만 논리적이지 못한 이야기전개는 정말 실망스럽습니다. 물론 앞으로의 전개에 따라 좀 더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수도 있겠습니다만.

KBS의 '전우'는 그점에서 약간 나은 것 같습니다. 물론 주인공의 애인이었던 북한군 장교의 존재가 조금 꺼림칙하긴 합니다만.

잡담하나. 사실 얼마전에 본 노스페이스(Nordwand)의 감상문을 쓸까 했는데 이 멋진 영화를 어떻게 이야기 해야 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서 쓰지 못하고 있는 중 입니다. 그러던 차에 로드넘버원을 보고 엉성한 서사구조에 감명(?) 받았습니다.

2007년 12월 5일 수요일

트루먼도 인정한 일본인의 근성

매우 유명한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배군님의 글을 읽고 나니 이 부분이 떠올라서 올려 봅니다. 트루먼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태평양 전쟁 말기 미군이 겪었던 끔찍한 인명손실과 일본군들의 결사적인 항전에 대해서 언급하고 이 때문에 소련의 참전을 필요로 했다고 언급했습니다. 특히 오키나와와 이오지마의 경험은 일선 부대 뿐 아니라 대통령인 트루먼 조차도 경악하게 할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트루먼 회고록의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1941년 12월 7일에 시작된 태평양에서의 전쟁은 매우 고되고 희생이 컸다. 우리는 진주만과 바탄반도의 패전 이후 긴 여정을 거쳤다. 우리의 군대는 남쪽으로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 칼레도니아와 동부 태평양으로는 하와이 제도로부터 필리핀과 일본 본토를 방어하는 마지막 도서 방어선들을 향해 싸워나갔다. 오키나와와 이오지마의 적은 결사적으로 항전했으며 아군의 인명손실은 극도로 높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해서 일본 본토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기지를 얻게 되었다. 우리는 일본 본토에 가까워 질수록 적의 저항은 더욱 단호하고 필사적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 본토와 조선, 만주, 그리고 중국의 화북지방에는 아직도 4백만에 달하는 일본군이 남아 있었다. 또한 일본은 본토의 최종방어를 위해 향토방위대를 편성하고 있었다.
합동참모본부는 일본 본토를 침공할 경우 발생할 손실에 대해서 매우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었다.
태평양의 아군은 일본 본토에 다가갈수록 더 많은 손실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를 전쟁에 끌어들이는 것이 시급해졌다. 러시아가 전쟁에 개입한다면 미국인 수십만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Harry Truman, Memoirs - Year of Decisions(Doubleday&Company 1955), p.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