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7일 목요일

또 하나의 전선 : 2차대전 중 독일과 영국의 안방전선

넵. 많은 분들이 눈치 채셨겠지만 불법날림번역 땜빵포스팅입니다. 그래도 살짝 재미있는 내용입니다. 바로 2차대전의 가장 중요한 전선 중 하나인 '안방전선'의 이야기 이지요.

독일과 영국 여성들의 생활은 두 나라의 전세가 점차 변화해가면서 총력전의 다섯가지 요소로 부터 영향을 받았다. 첫 번째는 대규모의 전시 동원으로 인해 가족구성원의 남성들이 군대나 공장에 징집되면서 수많은 여성들이 잠시 남성들과 떨어져 지내거나, 또는 떨어져 지낼 가능성이 높아지거나, 영원히 이별해야만 했다. 두 번째로 독일과 영국 모두 자국의 군인이나 외국군인, 전쟁포로, (독일의 경우에는) 외국인 노동자 등 외부 남성들과 접촉하는 경우가 늘어났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민간인을 목표로 한 폭격으로 대규모의 구호업무와 소개가 벌어졌다는 점이다. 네 번째는 경제적인 총력전으로 물자의 부족과 배급, 그리고 암시장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다섯번째는 남성들이 징집되었기 때문에 여성들이 전쟁 수행에 필요한 민간 업무나 군대의 보조적인 업무에 투입되거나 군에 지원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요인들이 여성들의 삶에 끼친 영향은 나라마다 달랐으며 또한 개인의 환경별로도 달랐다. 특히 독일의 경우 "가치있는" 사람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에 대한 공식적인 처우는 "인종적인 적"으로 구분되는 사람들과는 천양지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여성들과 독일의 "가치있는" 여성들이 총력전으로 부터 받은 영향은 비슷한 면이 많았으며 또한 다른 점도 많았다. 현지 여성들과 외국인들과의 관계는 다른 점이 많다고 여겨져왔다. 그러나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전쟁 수행을 위해 여성들을 동원한 지역에서는 다른 점 보다는 비슷한 점이 많았을 것이다.

가장 크게 다른 점은 독일의 경우 남성이 전선에 투입되거나 점령지역에 배치되어 가정을 비우는 경우가 영국 보다 많았고 그 기간도 더 길었다는 것이다. 사상자의 숫자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독일 남성 중 300만명이 전사한 반면 영국군의 사망자는 독일의 10분의 1정도에 불과했다. 이때문에 독일은 영국보다 과부, 자식을 잃은 어머니, 아버지를 잃은 딸, 형제를 잃은 여성, 애인을 잃은 여성이 훨씬 많을 수 밖에 없었다. 독일에서는 남성들의 사망으로 인한 여성들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1941년 11월 부터 약혼한 여성이 임신한 상태에서 남자가 전사했을 때 "영혼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해 태어나게 할 아이를 사생아로 만들지 않도록 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독일에서는 전사자의 숫자가 많았던 만큼 전쟁포로와 실종자도 영국에 비해 훨씬 많아서 전쟁 말기와 종전 직후에는 수많은 독일 여성들이 현실적인 이유에서 독신을 택했다. 자신의 남자가 북아프리카나 중동, 극동 전선에 배치된 영국 여성들의 경우 불안감이 심했겠지만 이런 경우는 상대적으로 드물었으며 1944년 중반 이전까지 군대에 징집된 영국 남성의 상당수는 영국 본토에서 훈련을 받으며 지루한 안정을 누리고 있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장기간 가족과 가정으로 부터 떨어지게 되면서 가정에 있어서나 사회생활에 있어서나 익숙하지 않은 책임을 떠맏아야 했다. 여성들은 상점이라던가 독일에서는 작은 농장(여성들은 전쟁전에는 남편의 지도하에 가끔씩 농사를 지었을 것이다)과 같은 가업을 담당해야 했던 것이다. 여성들은 재주껏 아이를 키워야 했으며 어머니가 노동을 하는 경우 아이들이 탈선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포이커트(Deltlev J. K. Peukert)의 연구에 따르면 독일의 반체제 청소년 조직이었던 에델바이스 해적단(Edelweißpiraten)에 참여한 아이들은 대개 아버지가 전사한 집안 출신이었다고 한다.

전쟁으로 부부나 연인들이 생이별하게 되면서 평화시에는 안정적이었던 관계들이 심한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지역의 남성들이 군대나 산업계에 동원된 상태에서 다른 지역이나 다른 나라의 남성들이 쏟아져 들어온 곳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영국은 전쟁 전 기간에 걸쳐 외국 군대의 점령을 받지 않았고 독일도 1944년 말 까지는 마찬가지였지만 두 나라 모두 전쟁 기간 중 군부대의 이동이 빈번했으며 전선으로 파병되기 전 징집된 신병들이 자국 내의 군부대로 입소했다. 영국은 전쟁 대부분의 기간 동안 프랑스군, 네덜란드군, 폴란드 군 등 약 50만명 정도의 외국군대가 주둔했으며 1944년 6월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에는 그 숫자가 거의 150만명에 달했다. 많은 여성들이 군인들을 호기심과 일상생활의 즐거움의 대상으로 여겼으며 종종 이들로 부터 성병을 옮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성행위를 매개로 한 질병이 1941년 부터 1942년 사이에 급증했으며 독일의 함부르크에서는 1942년에 질병에 걸린 여성의 3분의 2가 군인들로 부터 성병에 감염된 것으로 나타났다. 독일에서는 도시에서 시골로 피난한 여성들이 근처에 군부대가 있을 경우 이곳의 군인들과 접촉했으며 정부는 10대 소녀들이 군인들의 왕래가 빈번한 기차역이나 그 밖의 지역에 출몰하는 것에 대해 자주 우려를 포명했다. 군인을 남편으로 둔 많은 독일 여성들은 특히 전쟁 후반기로 갈수록 생과부로 지내는 기간이 늘어났으며 군인들이 독일 본토나 외국에서 부정한 짓을 저지른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자신들도 비슷한 쾌락을 즐기려 했다. 독일 정부는 여성들의 문란한 행위에 대해 점점 우려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1942년에는 "전선의 병사들에 대한 모욕죄"를 도입한 데 이어 다시 간통한 여성은 가족수당의 지급 대상에서 제외했고 1943년 3월에는 전사한 군인의 아내가 부정을 저질렀을 경우 연금 지금대상에서 제외하기 위해서 "사후 이혼"을 합법화 했다.

한편 영국과 독일은 시간상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미군이 대규모로 주둔했다. 크리스타벨 빌렌베르크(Christabel Bielenberg)는 독일에서 만난 미군 조종사의 "건강하면서도 행복해 보이며 또한 풍요로운" 모습에 대해 기록하기도 했으며 영국 여성들은 미군의 "멋진 군복과 .... 많은 돈, 그리고 자잘한 사치품을 무한정 가지고 있는 듯한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전쟁 말기에 독일 여성들의 곤경은 심각했으며 독일의 공공시설들은 파손되거나 완전히 파괴되었고 식량 조차 얻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많은 여성들이 점령군인 연합군, 특히 미군과 관계를 가지면서 초콜렛이나 나일론 스타킹과 같은 물건을 불법적으로 구했으며 이것들을 직접 쓰거나 식량을 얻기 위한 물물교환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뷔르템베르크의 하일브론(Heilbronn)에 진주한 미군들은 "얼마 안가 뒤스부르크(Duisburg)에서 피난온 문란한 여자나 초콜렛으로 유혹한 슈바벤(Schwaben) 여자들을 자신의 여자친구로 삼았다." 영국에서도 물자 부족은 심각했다. "우리는 자크마(Jacqmar) 스카프나 나일론 스타킹을 가지고 싶어 하는 여자들을 항상 의심했다. 그 여자들이 (미군들과) 자유롭게 어울린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외국 군인들을 사귀고 싶어하는 젊은 여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반감에도 불구하고 화장품과 나일론 스타킹, 그리고 초콜렛을 무한정 가지고 있는 외국 군인들에게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실정, 그리고 실제보다 부풀려진 소문들은 병사들의 사기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 크랭(J. A. Crang)은 "멋진데다 돈 많은 캐나다군과 미군이 (영국 본토에) 주둔하게 되면서 영국군 병사들 사이에서 불안감이 조성되었다"는 점을 잘 서술했다. 영국군은 이 문제에 크게 신경썼으며 공무원들을 동원해 떨어져 지내는 부부가 결혼생활이 파탄에 이르지 않도록 중재하도록 했다. 외국군대가 떠나면서 "안도하는 분위기가 퍼졌으며 ... 아이를 가진 채 남겨진 많은 독신여성들은 외국 군인들이 오지 않았으면 하고 원망했다."

당당하고 상대적으로 풍족한 외국군인들이 외롭고 불행한 여자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동안 다른 한편에는 사회적, 성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었다. 영국에 수용된 독일과 이탈리아군 전쟁포로들은 공식적인 방침에도 불구하고 영국 여성들과 접촉했으며 음식이나 다른 물품들을 얻기도 했다. 또한 영국 여자와 전쟁 포로간에 성적인 접촉도 있었지만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었다. 1943년 부터 영국으로 이송된 전쟁 포로가 급증했으며 이중 일부는 농가에 배치되어 일을 거들었지만 대부분은 포로수용소에 갇혀 엄격하게 격리되었다. 게다가 연합군, 특히 미군이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에 전쟁포로들은 인기가 없을 수 밖에 없었다. 영국과 달리 독일은 1939년 부터 외국인 노동자와 전쟁포로가 많았으며 이 숫자는 1944년에 7백만명으로 최고에 이르렀다. 많은 포로들이, 특히 폴란드인,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포로들이 독일의 농업 노동력으로 활용되었으며 이들은 가족 농장에 함께 살았는데 전쟁 후반기에는 가정의 유일한 남성 노동력인 경우도 있었다. 독일에서는 영국에 비해 여성들이 노동력을 의존하고 있는 외국인들과 성적인 관계를 가질 동기(성적으로 매력을 느끼거나 도는 농장일을 돕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이거나)와 기회가 훨씬 많았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치욕적이게도 이탈리아 포로의 유혹에 넘어간 유부녀들은 매우 심한 도덕적인 경멸의 대상"이 되는데 그쳤으나 독일에서는 외국인과 사랑에 빠진 "아리아인" 여성은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거나 때로는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다. 독일에서는 지역의 나치당 간부들이 여자들을 수용소로 보내기 전에 공개적으로 삭발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1941년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영국에서는 전쟁포로와 친밀하게 지내는 것은 단지 국가에 대한 충성과 전통적인 성적 도덕의 문제였으나 독일에서는 정권의 과도한 인종적 정책으로 "혈통을 더럽히는 행위"는 가혹한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Jill Stephenson, "The Home Front in "Total War" : Women in Germany and Britain in the Second World War", A World at Total War : Global Conflict and the Politics of Destruction, 1937~1945,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pp.213~217

인용한 글에서 설명하고 있듯 총력전 체제하에서 전통적인 가정과 여성의 역할은 완전히 산산조각 나게 됩니다. 물론 유럽에서 전쟁과 외국군대의 주둔같은 것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지만 2차대전은 그 규모면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사회에 미친 충격이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독일은 총력전 체제로 장기간 전쟁을 치르면서 여성의 역할이 확대된데다 패전으로 인해 수백만의 외국군대가 쏟아져들어오는 사상초유의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적인 가족과 여성의 역할이 유지될 수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요. 인용한 글에서 나타난 것 처럼 독일이 정부적인 차원에서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 특히나 성적으로 정숙한 여성성을 지키기 위한 제도를 강구한 이유는 아마도 전통적인 여성역할의 붕괴가 사회적으로 감당하기 힘겨울 정도로 걷잡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 입니다. 효과가 신통치 않았던 모양입니다만.

이렇게 이미 장기간의 전쟁으로 전통적인 도덕이 위태위태해진 독일 사회에 미국이라는 재미있는 존재가 등장하면서 사태는 콩가루로 변해갑니다. 윌러비(John Willoughby)는 'The Sexual Behavior of American GIs during the Early Years of the Occupation of Germany'라 는 제목의 소논문에서 점령 초기 미군 당국이 독일 민간인들과의 사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지만 현실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는 점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점령군인 미군이 인기가 많다보니 점령초기 부터 여기에 반감을 가진 독일 남자들이 미군을 공격하는 사례가 간혹 발생했다고 하지요. 그리고 마치 한국의 인터넷 게시판에서 보수적 성향의 남자들이 여성들의 허영심이나 성적인 방종을 비난하는 것 처럼 점령초기의 독일에서도 미군과 사귀는 여자들을 비난하는 벽보가 붙기도 했다고 합니다. 약간 더 골때리는 것은 미국쪽에서도 일부 인사들은 독일 여자들이 순진한 미군 병사들을 사냥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는 것 입니다. 이런 점은 한국전쟁기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매춘여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도덕적인 비난이 꽤 심했다고 하지요.(한국전쟁기 매춘과 이에 대한 반응에 대해서는 이임하의 『여성, 전쟁을 넘어 일어서다』를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다음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는 전쟁포로가 현지 여성들을 유혹하는 경우입니다. 연합군에 사로잡힌 독일군 포로보다 독일군에 사로잡힌 소련군 포로가 이 점에서 유리했다는 점이 흥미롭지요. 물론 전쟁초기 소련군 포로의 경우는 독일의 농장에 배치받기 전에 요단강을 건너갈 확률이 더 높긴 했습니다만. 토마스 크레취만이 주연으로 나온 독일영화 스탈린그라드에서도 영화 중간에 한 병사가 마누라가 외국인과 바람이 났다며 분통을 터뜨리는 장면이 있기도 합니다. 물론 영국이나 미국으로 이송된 독일군 포로 중에서도 현지 여성을 꼬셔서 눌러 앉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이런 사례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귀도 크놉(Guido Knopp)의 다큐멘터리에도 나온 게오르그 게르트너(George Gärtner)가 있을 겁니다. 이 양반은 포로수용소를 탈출한 뒤 미국 여자와 결혼해서 미국 시민권까지 취득했다죠;;;; 하지만 인용한 글에도 나와 있듯 여자들에게 훨씬 매력적인 풍족한 양키들이 있었던 까닭에 독일군 포로들은 여자 문제에서는 독일 본토의 러시아인이나 폴란드인보다 더 못했던 모양입니다.


역시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

댓글 30개:

  1. 독일이 외국에서 징발한 노동력이나 소련군 포로하면 BBC제작다큐 아우슈비츠 초반에 나오는 장면이나 그런게 생각나지만.... 농장에 노동력으로 제공된다는 부분을 보니 이런것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당연한거지만 제가 생각을 못한...

    근데 독일 농장에 노동력으로 팔려간(?) 외국인노동자들이나 소련군포로의 경우 대우는 수용소보다 좋았을까요?
    인용하신 부분을 보면 수용소에 팔려간(?) 동지들보다 훨씬 나은, 꿩먹고 알먹는 생활을 했을것 같지만 말이죠.

    답글삭제
  2. '너네들이 여기서 싸우는 동안에 너네 마누라와 애인들은 딴 남자랑 바람을 피우고 있을거다!'란 삐라가 뿌려진 이유가 있었군요. 덜덜덜덜

    답글삭제
  3. 참, 양성 간의 전쟁이란... ^^;;

    한쪽 성이 치고받는 도중에 그 이면에서는 또다른 제2전선이.

    답글삭제
  4. 이런저런 자료들을 보면 (미국쪽 자료를 포함해서) 미군들이 여자나 꼬시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좀 받긴 했던 거 같더군요. 그래서 독일에서 연합군 진영에 뿌린 삐라를 보면 미군 진영에 뿌려진 것은 "당신의 마누라, 애인이 면제들이랑 놀아나고 있다."는 내용이고 영국이나 영연방 진영에 뿌린 삐라를 보면 "당신의 마누라, 애인이 후방의 미군들이랑 놀아나고 있다."는 내용이 보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런 거 만드는 놈들도 독일 후방의 놈들...;

    후방 아가씨들이 미군 병사나 독일군 포로에 끌린 이유 중에는 엄격한 가정환경에 대한 반발심도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 당시 미국도 딸자식을 상당히 엄하게 조지던 시기라... 부모님 몰래 친구랑 독일군 구경하러 갔다오고 그걸 언니나 동생이 고자질해서 침대에 엎드려 울고... 참 전형적인 풍경이라 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답글삭제
  5. 지옥이라 할 지라도 짱박혀 농땡이 칠 장소는 있다잖습니까.

    답글삭제
  6. 남자들의 속성을 감안하면 그게 꽤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답글삭제
  7. 사실 가장 중요한 전선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답글삭제
  8. 하하하. 시트콤의 한장면 같군요^^

    답글삭제
  9. 뭐...예전 다이제스트 글을 읽으면 시베리아에서도 작업을 건 이탈리아 포로 이야기도 나오니....

    답글삭제
  10. 제가 늘상 이야기하듯이 진화적으로는 '그 제 2전선'이 제 1전선보다 훨씬 더 중요하지요 ^^;;

    답글삭제
  11.    기억납니다.  수용소장 말꼬리로 가발을 만들고... 이탈리아인의 유쾌한 점이었지요.

    답글삭제
  12. 소련도 독일 못지 않게 남자가 부족해 졌으니 말입니다. 예전에 KBS의 광복 60주년 다큐멘터리에도 나온 이야기이지만 소련군 포로가 됐던 어떤 분은 현지에서 음악하는 여자를 만나 쉬는 시간마다 함께 노래를 부르곤 했다더군요.

    답글삭제
  13. 하하핫. 알고보니 제2전선이 본 게임이었군요.

    답글삭제
  14. 크리스타벨 빌렌베르크 여사의 글은 여러면에서 중요한 자료군요. 영국출신으로 독일인 변호사와 결혼해서 독일 후방에 사는 평범한 시민으로서 그 난리통을 목격하고 자서전을 썼으니 그만한 자료가 어디있겠습니까.

    라이프 2차 세계 대전에서 자주 본 문구를  버크만 여사 책이나 슈피어,되니츠 자서전에서 그대로 보고서 깜짝깜짝 놀라곤 했는데 기회되면 빌렌베르크 여사 자서전도 구해봐야겠습니다^^.

    답글삭제
  15. 저도 기회가 생기면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답글삭제
  16. 독일이 '영혼 결혼'에 '사후 이혼'을 동원해 가정울 수호(?)하려 했다니 참 흥미진진 합니다.(단 보는 입장에서만)

    답글삭제
  17. ....


    풍족하지 못하면 루저.....

    ....OTL....

    답글삭제
  18. 음..... 영국애들 눈에 미군 군복이 멋져 보인다라.....
    어째 WWII 미군복은 벙찐게 영 아닌것같은데;;

    답글삭제
  19. 예전 "에이브" 문고 시리즈 중에 있던 "목화마을 소녀와 병사"라는 소설이 생각나네요.
    미국 시골에 사는 유태인 가문의 문학소녀가, 이웃에 들어선 포로수용소에 들어온 젊은 독일 병사,
    그것도 나치에 반대하던 대학생 출신 병사와 사랑에 빠지는데 어른들은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고,
    결국 독일 병사는 수용소를 탈출했다가 사살당하고, 소녀는 부모에 의해 소녀 감화원으로 보내지지만
    인격적으로 한 단계 성숙하게 된다는 성장소설이었죠.

    답글삭제
  20. 옛날 저 고딩시절(중딩이던가?) 신동아에서 2차대전 직후 소련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분(전쟁포로였나? 아마 그럴겁니다. 당연히 한국인)의 수기가 연재된 적이 있었는데 2차대전 직후라 소련 남자 씨가 말라서인지 소련 아가씨 or 과부들이 수용소 남자들에게 결혼하자고 대쉬하는 대목이 기억나네요.

    심지어 그 수기에는 수용소 안에서 수감자(남자)랑 여자(소련아가씨)가 ㅂㄱㅂㄱ하는 대목도 있어서 참 재미있게 봤었던 기억이 납니다.

    답글삭제
  21. 크리스타 빌렌베르크 얘기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도 떴다고 기억하는데 맞는지요?

    답글삭제
  22. 심지어 북한에 진주한 소련 여군부대가 조선인 남자사냥(!!!)을 다녔다는 야사도 떠도니 말입니다;;;;

    답글삭제
  23. 혹시 그게 영화로도 나와 있지 않습니까? 비슷한 내용의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답글삭제
  24. 사회적 가치들이 갑자기 붕괴하는 것은 어느 사회나 두려운 일 이니까요.

    답글삭제
  25. 오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도 소개된 일이 있었군요.<span style="color: #808080;">
    </span>

    답글삭제
  26. 소련군 여군부대가 동양인 남자사냥을 다녔다는 건 고바야시 모토후미 선생의 동아총통특무대에도 나오는 내용이네요.

    웬지 몇몇 사람의 상상력의 발로인지, 아니면 소련군 여군들이 실제로 그런 활극을 즐겼기에 그런 이야기가 도는 건지 흥미로워집니다.

    답글삭제
  27. 영화로도 나와 있습니다. 영화는 그닥....

    답글삭제
  28. 핫핫핫;;; 관련된 포스팅을 하나 하겠습니다.

    답글삭제
  29. 영화가 있긴 있었군요.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