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냐 사람들이 북이탈리아의 여러 전쟁에서 프랑스군에 피박을 먹인 이후 강력한 화력을 가지게 된 보병은 서유럽 전장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미 15세기부터 슬금 슬금 한물 가기 시작한 기병은 이제 완전히 전쟁터에서 보조적인 역할로 물러나게 됐다.
그렇지만 기병은 보병이 결코 가질 수 없는 한가지 강점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기동력’이었다.
이 때문에 서유럽에서는 기병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방책이 강구 됐는데 갑옷의 두께를 늘려 방어력을 향상시켜 전통적인 기병의 역할을 계속하는 것이 그 중 하나였고 나머지 하나는 기병의 기동성에 “화력”을 결합시키는 것 이었다.
기병의 화력 증대는 초보적인 형태의 용기병이라고 할 수 있는 ‘기마 화승총병’과 “Reiter”로 통칭하는 독일의 경기병으로 나타났다.
두 가지 모두 1540년대를 전후하여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두 가지 모두 화기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가능했다. 기마 화승총병의 경우 이미 14세기부터 영국의 기마 궁수, 유럽 본토의 기마 석궁수가 성공적으로 운용됐기 때문에 특별히 혁신적일 것은 없었다.
그러나 독일의 튀링엔 지역에서 처음 등장한 “Reiter”는 확실히 기병전술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지고 왔다.
바로 기마전투에서도 화기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 이다.
16세기 초반 독일에서는 바퀴식 격발장치가 발명됐고 이것은 바로 “Pistole”의 등장을 가져왔다. 바퀴식 격발장치가 처음 문헌에 언급된 것은 1505년이라고 하니 실제로 등장한 것은 15세기 말 일 가능성도 있다.
바퀴식 격발장치는 화기의 소형화를 가져와서 이미 1510년대에는 “범죄”에 악용되기 시작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1517년에 칙령을 내려 “제국 영내”에서 민간인이 바퀴식 격발장치를 사용하는 화기의 사용을 금지할 것을 명하기도 했고 이와 유사한 사례는 1540년대 까지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동물인가.
이렇게 좋은 물건이 당연히 범죄에만 사용될 리는 없고 독일의 기병을 중심으로 급속히 사용이 확산 됐다.
15세기 중반에 독일 기병들이 주로 사용하던 화기는 faustrohre라고 불리는 길이 50cm 정도의 물건이었는데 당시 기준으로는 획기적인 물건이었던 모양이다.
이 물건은 사람을 제대로 맞출 만한 명중률이 나오는 유효 사거리는 기껏해야 5m에 불과했지만 기본적으로 Reiter 1개 중대(Schwadron)가 400명 정도로 구성됐기 때문에 명중률의 부족은 머리 숫자로 때우는게 가능했다.
1540년대에 이르면 피스톨은 기병의 주요 장비로 자리 매김했고 슈말칼덴 전쟁 당시 황제군과 반란군 모두 기병대의 상당수가 피스톨을 장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슈말칼덴 전쟁 당시 황제군 진영에서 옵저버로 활동했던 베네치아인 Mocenigo는 당시의 Reiter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황제군의 기병대는 반란군의 기병대를 두려워 한다. 반란군의 기병은 숫자도 많고 그들이 타는 말도 품종이 좋은데다가 세 자루의 바퀴격발식 총을 휴대하기 때문이다. 한 자루는 안장에, 한 자루는 안장 뒤에, 나머지 한 자루는 장화 안에 넣고 다닌다.”
1557년의 생-캉탱 전투에서 기병창을 주 무장으로 한 프랑스 기병들이 신성로마제국군의 Reiter 들에게 엄청난 피박을 보면서 유럽각국도 앞다퉈 Reiter와 같은 병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이때의 영향으로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에 각각 reitre, raitri라는 단어가 생기게 됐다고 한다.
프랑스군은 생-캉탱 전투의 피박 이후 Reiter를 대폭 증강시켜 1558년에는 8,000명을 확보했다고 한다.(불과 1년 전에는 1,000명 미만이었다.)
이렇게 16세기 중반에 이르자 서유럽의 많은 군사이론가들은 기병 전술도 화력을 극대화 하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일부 군사이론가들, 특히 프랑스의 De la Noue로 대표되는 보수적인 이론가들은 근접전에서는 창기병이 Reiter를 압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프랑스의 종교전쟁을 제외하면 보수적인 이론가들의 주장이 입증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서유럽 군대는 기병 편제를 충격력보다는 화력에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개편했고 전술적으로도 충격은 화력의 우위를 뒤집지 못 했다.
이것이 구체화 된 것이 네덜란드 독립전쟁이었다.
네덜란드는 1597년에 11개 창기병 중대 중 7개를 피스톨을 주 무장으로한 Cuirassier로, 4개를 기마 화승총병으로 개편했고 그해에 벌어진 튀른하우트(Turnhout) 전투에서 기병창을 주무장으로한 에스파냐 기병대를 크게 격파한다.
튀른하우트 전투 결과 신성로마제국도 네덜란드를 모방해 그때 까지 남아있던 창기병을 거의 대부분 Cuirassier로 개편하게 됐다.
16세기 중반부터 적극적으로 군제를 개혁하던 스웨덴은 1611년에 독일의 “기마 화승총병”의 영향을 받아 최초의 “용기병” 부대를 편성했고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소규모의 기병을 피스톨을 주 무장으로 하는 체제로 개편했다. 스웨덴의 기병전술의 특징은 기존의 Reiter 부대와는 달리 적과 근접해서 사격을 하도록 해 화력의 효율적인 운용을 꾀했다는 점 이다.
Dodge 같은 군사사가들이 지적했듯 스웨덴의 기병은 소규모고 제국군의 기병 보다 종합적인 무장은 뒤떨어졌지만 효율적인 화력 운용으로 전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렇게 17세기 초-중반으로 접어 들면서 전통적인 중기병은 거의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됐고 기병은 더 이상 특수한 계층의 상징이 아니게 됐다. 화기는 기병을 전장의 주역에서 밀어냄과 동시에 그 계급적 특수성도 없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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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낀 책들.
Thomas Arnold, The Renaissance at War
Hans Delbruck, Geschicte der Kriegskust im Rahmen der politischen Geschichte
Theodore Dodge, Gustavus Adolphus
Bert S. Hale, Weapons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
B. Hughes, Firepoewr, Weapon Effectiveness on the Battlefield, 1630-1850
V. Vuksic , Cavalry
바야흐르 대세는 화기 만능의 시대로...
답글삭제전통적인 중기병이 완전히 사라지는 바로 그 시점에서 대히트를 친 책이 바로 그 유명한 돈키호테였죠^^
답글삭제슈타인호프님 // 돈키호테는 저같은 불평 불만 분자의 로망이기도 하죠.
답글삭제기병이 용기병으로 진화(?)한 이야기군요. 일부 용기병은 단순히 말을 이동 수단만으로 삼고 실제 전투가 벌어질 때는 말에서 내려서 보병처럼 싸웠다고 하더군요. 마상에서는 명중률이 떨어지는 데다가 기마 사격술은 고난도 기술이니 이게 합리적인 선택이었던 거 같습니다.
답글삭제91 Luftlande Division의 기간 부대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실제 공수 훈련을 했는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글삭제얼마 전까지 공군 소속 지상전투사단으로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조사해 보니 육군 소속 공수사단이더군요. 노르망디 전투 당시 대서양 방벽을 수비하다 괴멸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본 서적에서는 1944년 6월 초 병력 상황이 대략 8,000명 정도였습니다. 제대로 편성조차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투에 나갔다가 초장부터 사단장 팔라이 중장이 전사하고 이후는 표현 그대로 미군에게 난타당하고 결국 해체.
이 사단이 실제로 공수 임무를 목적으로 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추가로 제 22 육군 공수사단도 있던데 이 사단도 실제 공수 임무를 목적으로 했는지 가르쳐 주시면 좋겠습니다.
장갑냐옹이 // 질문하신 내용은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시면 다 나오는 것 들인데요. 혹시 아시는데 일부러 물어보시는 건 아닌가요?
답글삭제제가 알기론 91 Luftlande-Infanterie Division 편성에 사용된 기간 병력은 Grenadier-Regiments 1025와 Grenadier-Regiments 1032의 본부, 2 대대로 알고 있습니다.
사단 편성 당시 공수부대로 편성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1944년 3월 6일에 사단 포병연대의 장비로 105mm GH 40을 지급받았습니다. GH 40은 산악부대용 장비로 개발돼 leFH 18 과는 포탄이 호환 되지 않습니다.
이 사단의 문제는 공수훈련은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점 입니다.
이 사단의 병력이 7,000-8,000명이라는 것은 Zettering의 추산인데 이 사람은 사단의 이동에 사용된 기차가 I-Zug 32대에 불과하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장갑냐옹이님도 이 책을 참고하셨겠지요.
22 Luftlande-Infanterie Division은 1940년 서부 전역 초기에 소규모 공수 작전을 시행한 바 있습니다.
불안해서 일종의 확인을 받고 싶었습니다. 지금까지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게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이죠. 혹시 또 실수할까봐 도장을 찍고 싶었습니다. 초보의 불안감으로 봐주십시오.
답글삭제답변에 감사드립니다. /ㅇㅅㅇ
중기병이 피스톨 기병으로 대체되었지만, 30년 전쟁 시대를 거치면서 검기병의 시대로 바뀝니다. 화력에서 기동력의 시대가 된 겁니다.
답글삭제본문 끝자락에 [스웨덴의 기병전술의 특징은 기존의 Reiter 부대와는 달리 적과 근접해서 사격을 하도록 해 화력의 효율적인 운용을 꾀했다는 점 이다.]라 하셨는데 제가 아는 바와는 다르군요. 스웨덴은 기병 부대를 기존의 속보로 움직이는 피스톨 기병 대신 동유럽의 영향을 받은 검기병 중심으로 개편했고 이런 검기병 체제가 30년 전쟁 이후 전 유럽에 퍼져나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功名 // 제가 본문에 적은 내용은 16-17세기 기병의 전술이 돌격에 의한 충격력 보다 화력 위주로 발전했다는 것이지 기동력을 무시했다는 내용은 아닙니다만.
답글삭제그리고 18세기 이후의 내용은 다루지 않았습니다.
Reiter, Cuirassier 모두 검기병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검기병의 주요 장비가 피스톨 이었다는 점 입니다. 검 돌격 이전에 피스톨 일제사격이 전술에서 가장 중요했고 스웨덴은 특히 근접사격을 강조했지요. 특히 스웨덴 기병은 적의 경기병과의 전투에서 검으로 교전하기 전에 피스톨 일제사격으로도 많은 피해를 입혔습니다.
독일의 Reiter 같은 경우 피스톨을 주로 적 기병에 대한 교란 사격에 사용하거나 아예 검 돌격을 회피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功名 // 그리고 저는 30년 전쟁 이전과 그 시기의 스웨덴 기병 전술이 동유럽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피스톨의 사용이 미미했다는 것을 처음 듣는 군요.
답글삭제스웨덴 기병의 전술은 17세기 중-후반 까지도 돌격시 피스톨 사격을 중요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