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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 22일 토요일

화력과 충격력 : 16-17세기 서유럽의 기병

에스파냐 사람들이 북이탈리아의 여러 전쟁에서 프랑스군에 피박을 먹인 이후 강력한 화력을 가지게 된 보병은 서유럽 전장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미 15세기부터 슬금 슬금 한물 가기 시작한 기병은 이제 완전히 전쟁터에서 보조적인 역할로 물러나게 됐다.
그렇지만 기병은 보병이 결코 가질 수 없는 한가지 강점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기동력’이었다.

이 때문에 서유럽에서는 기병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방책이 강구 됐는데 갑옷의 두께를 늘려 방어력을 향상시켜 전통적인 기병의 역할을 계속하는 것이 그 중 하나였고 나머지 하나는 기병의 기동성에 “화력”을 결합시키는 것 이었다.

기병의 화력 증대는 초보적인 형태의 용기병이라고 할 수 있는 ‘기마 화승총병’과 “Reiter”로 통칭하는 독일의 경기병으로 나타났다.
두 가지 모두 1540년대를 전후하여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두 가지 모두 화기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가능했다. 기마 화승총병의 경우 이미 14세기부터 영국의 기마 궁수, 유럽 본토의 기마 석궁수가 성공적으로 운용됐기 때문에 특별히 혁신적일 것은 없었다.
그러나 독일의 튀링엔 지역에서 처음 등장한 “Reiter”는 확실히 기병전술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지고 왔다.

바로 기마전투에서도 화기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 이다.

16세기 초반 독일에서는 바퀴식 격발장치가 발명됐고 이것은 바로 “Pistole”의 등장을 가져왔다. 바퀴식 격발장치가 처음 문헌에 언급된 것은 1505년이라고 하니 실제로 등장한 것은 15세기 말 일 가능성도 있다.
바퀴식 격발장치는 화기의 소형화를 가져와서 이미 1510년대에는 “범죄”에 악용되기 시작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1517년에 칙령을 내려 “제국 영내”에서 민간인이 바퀴식 격발장치를 사용하는 화기의 사용을 금지할 것을 명하기도 했고 이와 유사한 사례는 1540년대 까지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동물인가.

이렇게 좋은 물건이 당연히 범죄에만 사용될 리는 없고 독일의 기병을 중심으로 급속히 사용이 확산 됐다.
15세기 중반에 독일 기병들이 주로 사용하던 화기는 faustrohre라고 불리는 길이 50cm 정도의 물건이었는데 당시 기준으로는 획기적인 물건이었던 모양이다.
이 물건은 사람을 제대로 맞출 만한 명중률이 나오는 유효 사거리는 기껏해야 5m에 불과했지만 기본적으로 Reiter 1개 중대(Schwadron)가 400명 정도로 구성됐기 때문에 명중률의 부족은 머리 숫자로 때우는게 가능했다.
1540년대에 이르면 피스톨은 기병의 주요 장비로 자리 매김했고 슈말칼덴 전쟁 당시 황제군과 반란군 모두 기병대의 상당수가 피스톨을 장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슈말칼덴 전쟁 당시 황제군 진영에서 옵저버로 활동했던 베네치아인 Mocenigo는 당시의 Reiter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황제군의 기병대는 반란군의 기병대를 두려워 한다. 반란군의 기병은 숫자도 많고 그들이 타는 말도 품종이 좋은데다가 세 자루의 바퀴격발식 총을 휴대하기 때문이다. 한 자루는 안장에, 한 자루는 안장 뒤에, 나머지 한 자루는 장화 안에 넣고 다닌다.”

1557년의 생-캉탱 전투에서 기병창을 주 무장으로 한 프랑스 기병들이 신성로마제국군의 Reiter 들에게 엄청난 피박을 보면서 유럽각국도 앞다퉈 Reiter와 같은 병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이때의 영향으로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에 각각 reitre, raitri라는 단어가 생기게 됐다고 한다.
프랑스군은 생-캉탱 전투의 피박 이후 Reiter를 대폭 증강시켜 1558년에는 8,000명을 확보했다고 한다.(불과 1년 전에는 1,000명 미만이었다.)

이렇게 16세기 중반에 이르자 서유럽의 많은 군사이론가들은 기병 전술도 화력을 극대화 하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일부 군사이론가들, 특히 프랑스의 De la Noue로 대표되는 보수적인 이론가들은 근접전에서는 창기병이 Reiter를 압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프랑스의 종교전쟁을 제외하면 보수적인 이론가들의 주장이 입증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서유럽 군대는 기병 편제를 충격력보다는 화력에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개편했고 전술적으로도 충격은 화력의 우위를 뒤집지 못 했다.

이것이 구체화 된 것이 네덜란드 독립전쟁이었다.

네덜란드는 1597년에 11개 창기병 중대 중 7개를 피스톨을 주 무장으로한 Cuirassier로, 4개를 기마 화승총병으로 개편했고 그해에 벌어진 튀른하우트(Turnhout) 전투에서 기병창을 주무장으로한 에스파냐 기병대를 크게 격파한다.
튀른하우트 전투 결과 신성로마제국도 네덜란드를 모방해 그때 까지 남아있던 창기병을 거의 대부분 Cuirassier로 개편하게 됐다.
16세기 중반부터 적극적으로 군제를 개혁하던 스웨덴은 1611년에 독일의 “기마 화승총병”의 영향을 받아 최초의 “용기병” 부대를 편성했고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소규모의 기병을 피스톨을 주 무장으로 하는 체제로 개편했다. 스웨덴의 기병전술의 특징은 기존의 Reiter 부대와는 달리 적과 근접해서 사격을 하도록 해 화력의 효율적인 운용을 꾀했다는 점 이다.
Dodge 같은 군사사가들이 지적했듯 스웨덴의 기병은 소규모고 제국군의 기병 보다 종합적인 무장은 뒤떨어졌지만 효율적인 화력 운용으로 전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렇게 17세기 초-중반으로 접어 들면서 전통적인 중기병은 거의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됐고 기병은 더 이상 특수한 계층의 상징이 아니게 됐다. 화기는 기병을 전장의 주역에서 밀어냄과 동시에 그 계급적 특수성도 없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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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낀 책들.

Thomas Arnold, The Renaissance at War
Hans Delbruck, Geschicte der Kriegskust im Rahmen der politischen Geschichte
Theodore Dodge, Gustavus Adolphus
Bert S. Hale, Weapons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
B. Hughes, Firepoewr, Weapon Effectiveness on the Battlefield, 1630-1850
V. Vuksic , Caval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