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에서는 15세기부터 보병이 군대의 중추를 형성하게 되고 기병의 비중이 크게 축소 됩니다. 예를 들어 이베리아 반도에서 재 정복전쟁(reconquista)을 치루고 있던 카스티야 가 대표적인데 그라나다 전투 초기에 아라곤 군(대부분 카스티야에서 동원되었음)은 기병 6,000~10,000명, 보병 10,000~16,000명 으로 편성됐는데 그라나다 전투 말기에는 기병 10,000명, 보병 50,000명으로 그 비율이 1:1 에서 1:5 로 변화했습니다.
이것은 프랑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494년 프랑스 국왕이 거느린 군대는 13,000명의 기병과 15,000명의 보병으로 편성돼 있었으나 1552년에는 기병 6,000명과 보병 32,000명으로 기병 대 보병의 비율이 1:5로 변화합니다.
17세기로 접어들면서 보병의 중요성은 더더욱 증대됐고 이제 기병은 정찰, 보급 부대 호위 정도의 부차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많은 국가들이 더 많은 보병과 포병을 동원하는데 관심을 가졌고 기병은 부차적인 존재가 됐습니다.
그 결과 17세기 초-중반 프랑스 육군은 기병이 지나치게 축소됐습니다. 1635년 프랑스는 보병 115,000명을 유지할 수 있는 예산을 배정했지만 기병에 배정한 예산은 불과 9,500명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기병 대 보병의 비율이 이제 1:11에 달한 것 입니다.
30년 전쟁 시기에 주요 교전국들은 기병 전력 증강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무엇보다 17세기의 전투는 16세기 보다 기동의 중요성이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황당하지만 보급 문제도 기병의 존재를 부각시켰습니다. 현지 조달에 대한 의존이 높았던 당시의 보급체계는 더 넓은 반경에서 약탈을 수행할 수 있는 기병을 필요로 했던 것 입니다. 독일이 장기간의 전쟁으로 황폐화되자 어처구니 없게도 기병이 좀 더 보급에 유리해 진 것이죠.
그러나 상대적으로 태평했던(?) 프랑스는 이런 움직임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1630년대 내내 주요 야전군에서 기병 대 보병의 비율은 평균 1:10 에서 1:12 사이였다고 하죠.
그러나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30년 전쟁에 개입하자 기병의 부족은 매우 골치아픈 문제가 됐습니다. 1635~36년에 네덜란드와 북부 프랑스에서 전개된 에스파냐와의 전쟁에서 에스파냐군은 보병 12,000과 기병 13,000명으로 구성돼 프랑스군에 비해 기동에서 압도적이었습니다. 특히 에스파냐군에 소속된 크로아티아 기병대는 이해 8월 기습적으로 파리 교외 지역을 휩쓸어 프랑스인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기도 했지요.
프랑스도 이 무렵 기병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기병 증강을 꾀했으나 예산은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스파냐 군대의 기병들이 프랑스 북부를 휘젓고 다니는 동안 이들은 사실상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들을 상대할 프랑스 기병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정부는 황급히 기병연대 편성을 시작하지만 예산도 불충분한데다 숙련된 기병을 짧은 시간안에 긁어 모으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습니다. 결국 궁색한 상황에 몰린 프랑스 정부는 형식상으로 남아있던 봉건 의무를 귀족들에게 부과합니다. 1636년 프랑스는 왕령으로 아직 군에 있지 않은 귀족들에게 40일간 기병으로 복무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이런 궁여지책도 효과가 없었던 것이 이미 봉건적인 군사 의무를 수행할 필요가 없었던 귀족들은 기병으로 거의 쓸모가 없었습니다. 평시에 훈련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아예 국왕의 소집령에 무시로서 대응하는 귀족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프랑스 국왕은 1638년 까지 계속해서 매년 소집령을 내렸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고 결국은 정부 예산으로 기병을 증강하는 것이 힘들기는 하지만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습니다. 이 해에 프랑스는 6개 중대로 편성된 기병연대를 편성하기 시작했고 1641년이 되면 각 야전군 소속의 기병 전력은 5,000~7,000명 수준으로 증강됐다고 합니다. 이탈리아 원정군의 경우 보병 10,855명에 대해 기병은 7,261명 이었다고 하지요. 프랑스 군에서 기병이 차지하는 비중은 1650년대에는 40% 수준에 달했습니다.
비록 전장의 주역은 보병이었지만 기동력이 중요해 지면서 기병도 17세기 초반의 찬밥 대접은 벗어나게 됩니다. 물론 다시는 전장의 주역이 되지는 못 했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