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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25일 일요일

Robert M. Citino著, The Wehrmacht Retreats : Fighting a Lost War, 1943



로버트 시티노Robert M. Citino는 17세기 부터 20세기에 이르는 독일 군사사를 다루는 흥미로운 저작들을 잇따라 발표해 왔습니다. 시티노의 대표작인 The German Way of War : From the Thirty Years’ War to the Third ReichDeath of the Wehrmacht : The German Campaigns of 1942는 기동을 통한 단기 결전을 추구하는 프로이센-독일의 군사사상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어떠한 도전을 받고 한계에 부딛히게 되었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Death of the Wehrmacht에서는 작전 단위의 기동전을 통해 전략적인 열세를 상쇄하려 한 독일군의 시도가 처절하게 실패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시티노의 저작에서는 독일의 군사사상이 상대적으로 면적이 좁고, 잘 발달된 도시가 많은 서유럽과 중부유럽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합니다. 유럽의 한가운데에 있어 수많은 적국에 둘러 쌓여 있기 때문에 최대한 신속히 승리를 거두어야 하고 이때문에 단기간에 승부를 보기 위한 작전적 기동이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군사사상은 산업화의 시대를 맞아 본격적으로 도전을 받게 되었고 1차대전에서 독일은 패배하게 됩니다. 하지만 독일 군부는 1차대전의 경험을 통해 기동전에 대한 신념을 더 굳히게 됩니다. 소모전을 피하기 위해서 더욱 더 기동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독일의 전쟁 방식은 1940년 서부전역의 대승리를 통해 옳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1941년 소련을 침공하게 되면서 문제는 달라집니다. 소련의 광대한 국토와 막대한 인적자원, 산업동원력은 독일이 1941년 부터 1942년 까지 가한 일련의 전략적 공세를 분쇄해 버립니다. 북아프리카에서의 패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티노는 이 모든 것이 독일의 전쟁 방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 이었다고 지적합니다.


The Wehrmacht Retreats : Fighting a Lost War, 1943Death of the Wehrmacht의 후속편으로 1942년 전역에서 그 한계를 드러낸 독일군이 서서히 무너져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시티노는 이 시기의 독일군이 한계에 봉착한 전통적인 작전적 기동전으로 연합군의 반격에 맞서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 책에서는 튀니지, 1943년 초의 동부전선, 시칠리아, 쿠르스크 전투, 1943년의 이탈리아 전선, 1943년 하반기의 동부전선의 작전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각각의 전역을 분석하면서 독일의 전통적인 기동전 사상이 어떠한 한계를 드러냈는가를 지적합니다. 이를 통해 전통적인 프로이센-독일 장교단의 몰락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수백년에 걸쳐 발전해온 독일의 군사 사상이 한계에 봉착했을 때, 군사사상과 함께 유지된 프로이센-독일 장교단이라는 사회 계층도 함께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입니다. 이러한 틀에서 만슈타인, 클루게, 케셀링, 롬멜과 같은 독일 고급 장교단에 대해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1943년의 지중해 전역에 대한 서술에서는 막강한 보급 역량, 압도적인 항공력과 해군전력을 보유한 미영연합군 앞에서 독일군이 감행한 일련의 반격이 잇따라 분쇄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독일군은 우수한 군대였고 뛰어난 작전 수행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수많은 작전-전술 단위의 반격에서 그것을 입증했습니다. 또한 저자는 1942년~1943년에 걸친 롬멜의 퇴각 과정과 1943년 이탈리아군의 무장해제와 같은 군사적인 업적을 높게 평가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독일군은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그리고 살레르노에서 항상 신속하게 기동 전력을 집중하여 연합군의 취약한 지점을 타격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의 작전-전술적인 역량은 초기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미영 연합군의 막강한 항공력과 해군력, 그리고 방대한 보급에 의해 분쇄됩니다. 시티노는 연합군, 특히 미군이 독일군 보다 덜 공격적이고 작전 수행능력이 떨어졌을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방대한 보급에 의해 뒷받침 되는 화력으로 충분히 상쇄할 수 있는 것 이었다고 지적합니다. 확실히, 저자가 지적하는 대로 압도적인 포병화력과 항공력을 가지고 있는데 굳이 보병의 희생을 무릅쓸 필요는 없는 것 입니다. 시티노는 독일군 장성들이 회고록 같은 사료를 활용해 시칠리아와 살레르노의 해안에서 독일군의 기갑전력이 연합군의 함포사격과 포병화력에 소모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독일군은 뛰어난 전투력으로 연합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강요할 수 있었지만 결국 소모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1943년의 동부전선에 대한 평가도 유사합니다. 소련은 방대한 전장이었고 소련군은 막대한 규모였습니다. 1943년 하계 전역에서 나타난 것 처럼 독일군이 한 지역에서 공세를 위해 역량을 집중할 때 소련군은 독일의 공격을 막아내면서도 동시에 여러 축선에 걸쳐 공세를 감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일 장교단은 우수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지만 1943년 시점에서는 소련 장교단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우수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또한 소련군은 1943년에 와서도 일련의 전술적 패배를 겪으며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있었지만 동시에 독일군을 소모시키며 서서히 붕괴시켜갔습니다. 그리고 쿠르스크에서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반격을 시작했을 때 독일군은 더 이상 이것을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오룔 돌출부 방어전 처럼 독일군 특유의 기동을 통해 소련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힐 수 있었지만 독일군 또한 함께 소모되었고 독일의 전통적인 전쟁 수행방식은 기울어진 추를 돌리는데 어떠한 역할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저자는 독일의 전통적인 전쟁 수행방식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독일 장교단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독일군 지휘관 중에서 최고로 꼽히는 만슈타인 조차도 단기전, 기동전의 전통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인물이었으며 산업화된 시대의 전쟁을 이해하고 해결책을 내놓을 수는 없는 인물이었다고 지적하는 것 입니다. 만슈타인이 거둔 최대의 승리인 1943년 초 우크라이나 전역 또한 이러한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건이었다고 평합니다. 소련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히고 전선을 안정시켰지만 결코 전략적인 균형을 되돌린 것은 아니었다고 그 한계를 지적합니다. 다른 독일 장군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평가를 합니다. 특히 범 지구적 단위의 전략적인 견해를 갖춘 인물이 거의 전무했다는 점을 혹독하게 비판합니다. 만슈타인 조차도 작전 이상의 범주를 바라보는 통찰력은 없었다고 보는 것 입니다. 저자가 독일 장성중에서 가장 크게 비판하는 것은 알베르트 케셀링입니다. 시티노는 알베르트 케셀링에 대한 전통적인 평가는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것이라고 봅니다. 케셀링의 이탈리아 방어전은 방어하기에 유리한 지형에서 점진적으로 철수하면서 소모전을 전개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만약 케셀링이 이탈리아에서 했던 것과 같은 방어전을 소련과 같은 환경에서 전개했다면 어떤 결과가 왔겠느냐며 반문합니다. 오히려 롬멜에 대한 평가가 좋은 편 입니다. 시티노는 롬멜이 엘알라메인 전투 이후 전개한 퇴각전에서 보여준 역량과 이탈리아 방어전략에서 보여준 통찰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독일군 지휘관들이 산업화된 시대의 전쟁에서 보여준 한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헤르만 발크의 회고록에서 인용한 다음의 구절은 20세기의 산업화된 총력전에서 독일의 전쟁 수행방식이 직면한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dem wir nichts entgegensetzen konnten.)


2011년 5월 5일 목요일

7년전쟁기 프로이센군 포병의 화력과 기동력 문제에 대한 잡담

오전에 민방위 교육 보충을 다녀온 뒤 책을 읽었습니다. 전에 읽다가 못 읽은 것들을 중심으로 읽었는데 중간에 읽다가 말아 흐름이 끊어지니 잘 안읽히더군요.

오늘 읽은 글 중에서는 쇼왈터(Dennis Showalter)의 “Weapons and Ideas in the Prussian Army from Frederick the Great to Moltke the Elder”가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모든 군대의 문제인 화력과 기동력의 균형에 대한 이야기가 괜찮았습니다. 쇼왈터는 7년 전쟁 시기 프로이센군의 포병의 문제를 재미있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7년 전쟁 초기 프로이센 육군 야전포병의 화포 중 가장 강력한 것은 12파운드포(12-pfünder Geschütz)였습니다. 이것은 야전 기동력을 위해 화력을 다소 희생한 것 이었는데 그 결과 화력은 물론 기동력도 어정쩡한 물건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각 보병연대에 소속된 대대포병의 3파운드 포 또한 기동력을 강조한 물건이었는데 그 결과 화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사정거리도 형편없고 탄도도 불량한 졸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3파운드 포는 일선 보병들의 외면을 받아서 실전에서 보병들이 3파운드 포의 지원을 거부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12파운드 포의 경우는 요새에 설치된 12파운드포를 야전용 포가에 얹은 것으로 대체되었고 보병대대의 3파운드 포는 조금 더 나은 6파운드포로 교체되었습니다. 그리고 7년 전쟁 후기로 가면서 화력에 대한 의존, 특히 중포병에 대한 의존이 높아졌기 때문에 포병의 규모가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되면서 프리드리히 2세가 중요시한 야전 기동력이 감소했다는 것 입니다. 18세기의 비포장 도로는 기상 상태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고약한 날씨라도 만나게 된다면 많은 포병을 동반한 프로이센군의 기동력은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포병화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수록 이에 대한 보급도 늘어났는데 많은 화약과 포탄이 함께 이동하면서 포병의 대열은 더 길어졌습니다. 그렇다고 기동성을 위해 포병을 축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프리드리히 2세는 7년전쟁의 경험으로 새로운 야포를 개발하는 등 포병의 발전에 신경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말이라는 견인수단에 의존하는 한 기동력과 화력의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1차대전 이전 까지도 독일군에게 있어 기동력과 화력의 절충점을 찾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으니 말입니다.


잡담 하나. 오늘 쇼왈터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을 해 봤는데 보불전쟁 이후 독일군 포병의 발전에 대한 글을 다시 한번 고쳐서 써보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썼던 글은 좀 두서가 없어서^^;;;;

2009년 9월 1일 화요일

흥미로운 가정

오늘은 쉬는 시간에 결론 부분을 남겨두고 거의 2년 가까이 방치해 둔 The Military Legacy of the Civil War를 마저 다 읽었습니다.


저자인 Jay Luvaas는 남북전쟁이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의 주요 열강의 군사교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고찰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남북전쟁 발발부터 1차대전 발발직전 까지의 시기를 서술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전반부는 미국에 파견된 각국 무관단의 활동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고 후반부는 유럽에서는 미국의 내전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남북전쟁은 새로운 군사기술이 대규모로 활용되어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유럽에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군사교리에 있어서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남북전쟁이 군사교리 면에서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이유는 유럽의 군인들은 연방과 남부연합 모두를 아마추어 군인들로 한수 낮춰보는 경향이 있었고 거의 동시기에 유럽에서도 보불전쟁과 같은 대규모 전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굳이 '수준낮은' 미국으로 부터 교훈을 얻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 입니다. 그나마 미국의 경험이 유럽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북독일연방과 프랑스의 기병 전술정도였다고 합니다.


유럽의 군사사상가들이 남북전쟁을 재평가하게 된 것은 1차대전이라는 전례없는 소모전을 경험한 이후였습니다. 1차대전에서 유럽국가들이 경험한 전략적 문제는 바로 50년전의 전쟁에서 미국인들이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1차대전 이후 유럽, 특히 영국의 군사사상가들이 남북전쟁의 교훈을 재평가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고찰하고 있습니다. 주로 언급되는 것은 풀러와 리델하트의 남북전쟁 연구인데 특히 리델하트가 기동전 이론을 연구하면서 남북전쟁 당시의 대규모 기병운용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Luvaas는 이 부분에서 꽤 재미있는 추론을 하나 하고 있습니다. Luvaas는 짤막하게 리델하트와 독일 장군들간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리델하트의 많은 저작들이 2차대전 이전에 독일어로 번역되었고 그가 만난 독일 장군들도 번역된 것 중 일부를 읽었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비록 직설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북전쟁 당시의 기병전술이 독일 장군들의 기동전 사상에 '미미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하는 흥미로운 떡밥을 던지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이 책은 1959년에 초판이 나왔고 제가 읽은 개정판도 1988년에 나온 것이라 리델하트가 독일의 군사사상에 끼친 영향이 과대평가되었다는 근래의 연구들을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저자가 90년대 이후에 이 책을 썼다면 이런 재미있는 추론을 하지는 못했겠지요. 이제 이런 추론을 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발상 자체는 꽤 참신하다는 느낌입니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2009년 5월 18일 월요일

러일전쟁이 슐리펜의 전쟁 구상에 끼친 영향

배군님이 봉천회전에 대한 글을 연재하셔서 매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러시아쪽의 시각에서 러일전쟁을 바라본 서적은 조금 읽었지만 일본의 시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던 차에 많은 점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완수할 수 없었던 육군의 결전에 의한 결착, 봉천회전 vol.1 (B군)

완수할 수 없었던 육군의 결전에 의한 결착, 봉천회전 vol.2 (B군)

완수할 수 없었던 육군의 결전에 의한 결착, 봉천회전 vol.3(完) (B군)

그리고 봉천회전 마지막 편을 읽다 보니 러일전쟁에 대한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의 견해가 나와 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 시피 러일전쟁의 결과는 슐리펜의 군사적 계획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전략적인 면에서 러일전쟁이 슐리펜의 전쟁 계획에 가져온 영향은 결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1904년과 1905년의 사건들은 슐리펜에게 독일이 처한 딜레마에 대한 전략적 해결방법이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1904년 러시아와 일본은 조선에서 전쟁에 돌입했다.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러시아군이 동부로 이동하기만 하면 단기간에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실제 결과는 러시아군의 완패(Fiasco)가 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양군은 서로 엎치락 뒤치락 했지만 점차 러시아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러시아군은 점차 만주 내륙으로 밀려났으며 뤼순이 함락되고 발틱함대가 쓰시마 해전에서 섬멸 당하고 국내에서는 혁명에 직면하면서 러시아는 일본과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군은 봉천회전 에서만 10만의 병력을 상실했다.

전쟁의 진행과정은 슐리펜이 러시아군의 능력과 독일의 전략적 상황을 판단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1905년 6월, 슐리펜은 독일 수상에게 러시아군의 한심한 상황을 묘사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오랫동안 러시아군에는 유능한 지휘관이 없으며 러시아 장교단의 대다수는 극도로 부족한 능력만을 가지고 있고 부대는 부족한 훈련을 받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슐리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결점은 러시아군의 끈기와 충성심에 의해 어느 정도 상쇄되는 것으로 믿는다고 적었다. 아시아에서의 전쟁은 이러한 믿음이 잘못 되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소식에 따르면 러시아군 병사들은 장교에 예우를 갖추지도 않았으며 명령에 따르지도 않았다. 더욱이 전쟁의 결과 러시아군의 훈련 수준은 기존에 생각하고 있던 것 보다 더 형편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슐리펜은 러시아군의 가치는 극히 미미하며 가까운 미래에 러시아군이 효율적인 전투 부대가 될 전망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동아시아의 전쟁은 러시아군이 알려진 정보에 따라 기존에 추정되었던 것 보다 우수하지 못하며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군은 효율적으로 바뀌기는커녕 더 악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러시아군은 모든 결연함(Freudigkeit), 모든 신뢰감(Vertrauen), 모든 복종심을 잃었습니다.
러시아군이 개선될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는 무척 의문스럽습니다. 러시아군은 개혁을 실행할 정도의 자각(Selbsterkenntnis)이 없습니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패배의 원인을 군대 자체의 부족함(Unvollkommenheiten)에서 찾지 않고 적의 숫적인 우세나 특정한 지휘관들의 무능함에서 찾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에는 필요한 개혁을 실행하고 사기를 굳건하게 할 만한 능력을 갖춘 인재가 없습니다.”

슐리펜은 러시아군의 허약함에 대한 믿음으로 그때 까지 실행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전략적 대안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기회의 창이 열렸다. 슐리펜은 이제 독일육군의 대부분을 서부전선으로 돌리고 크게 약화되고 문제점 투성이인 러시아군으로부터 동부를 방어하는 데는 소수의 부대만을 남겨도 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Robert T. Foley,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 Erich von Falkenhayn and the Development of Attrition, 1870-1916,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pp.67~68

이렇게 러일전쟁의 결과는 독일의 양면전쟁 계획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러일전쟁의 결과는 전술적인 차원에서는 슐리펜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견해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슐리펜은 1905년 11월과 12월에 실시한 대규모 워게임(Kriegsspiel) 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슐리펜은 그 다음(훈련이 끝난 뒤)에 훈련에 참가한 장교들에게 미래 전쟁의 성격에 대한 자신의 마지막 생각을 이야기 했다. 그는 미래에는 작전을 전개할 때 진지전의 수렁에 더 쉽게 빠져들 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만주에서 벌어진 전쟁은 그 점을 잘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기동 전투를 통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도록 노력해야 하며 전쟁을 ‘1년 혹은 2년’간의 결정적이지 못한 소모전으로 끌고 가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장기전은 전쟁 당사국 모두의 소모와 경제적 혼란만을 가져오게 될 뿐이다. 그러나 설사 진지전의 상황이 오더라도 긴 방어선의 어느 한 곳에는 공격자가 돌파를 달성할 수 있는 취약점이 존재할 것이다. 독일군은 전체적으로 기동 작전을 통해 적의 측면을 포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슐리펜은 단순한 우회 기동을 실시해서는 안되며 한편으로는 적의 정면을 공격해 방어선에 고착시키는 동시에 강력한 부대로 적의 측면으로 포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Terence Zuber,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 : German War Planning 1871-1914,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p.210

슐리펜으로 대표되는 독일의 전통적 군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동을 통한 승리를 추구했으며 전장의 상황이 급변하더라도 반드시 기동전으로 끌고 나가야 한다는 점을 굳게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군사사가들이 지적 하듯 기동전은 작전 단위의 문제점까지는 해결 해 줄 수는 있어도 결코 전략적 차원의 문제에 대한 대안은 아니라는 점 입니다. 슐리펜은 러일전쟁 이전 까지 양면전쟁 상황에서 소모전을 피할 방안을 강구했습니다. 슐리펜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전하자 사실상 서부전선만의 전쟁을 할 수 있게 됐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슐리펜이 기대한 상황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고 독일은 새로운 전쟁에서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소모전으로 말려들게 됩니다. 독일은 특히 동부전선을 중심으로 몇 차례의 기동작전을 통해 많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이러한 승리들이 독일의 전략적 승리를 가져다 주지는 못 했습니다.

2009년 4월 29일 수요일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군사사에 관심 없는 일반인이라도 ‘전격전’이라는 단어는 들어 봤을 정도로 독일의 군사사상에서 ‘기동전(Bewegungskrieg)’과 ‘섬멸전(Vernichtungskrieg)’ 개념은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짧은 시기에 독일의 일부 군사사상가들은 미래에는 ‘기동전’과 ‘섬멸전’을 통한 전쟁의 승리가 어려워 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1차대전을 경험한 독일 군인들은 ‘기동전’만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으며 1차대전에서 패배한 것은 ‘위대한’ 슐리펜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수행하지 못한 결과라고 믿었습니다.

폴리(Robert T. Foley)의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 Erich von Falkenhayn and the Development of Attrition 1870-1916은 독일의 군사사상에서 이질적 존재였던 소모전략(Ermattungsstrategie)가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과정을 1980년대에 새로 공개된 독일 사료를 바탕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새로운 자료를 통해 흥미로운 논의를 끌어내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살펴보고 있는 것은 소모전략이 등장하는 과정입니다.
독일 통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大) 몰트케(Helmuth von Moltke der Ältere)나 유명한 군사사가이자 군사평론가였던 델브뤽(Hans Delbrück)은 보불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의 전쟁에서는 더 이상 몇 차례의 결정적인 전술적 승리를 통해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러일전쟁의 결과 델브뤽은 자신의 견해를 더욱 확신하게 됐습니다. 수백만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유럽국가들이 전쟁을 할 경우 한 번의 전투로 수십만의 적을 섬멸하더라도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수 없다는 점은 너무나도 명백했습니다. 유럽국가들간의 전쟁에 비해 작은 규모였던 러일전쟁에서 조차 러시아와 일본 양 측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 했습니다. 델브뤽은 보불전쟁과 러일전쟁 등을 관찰한 결과 미래의 전쟁은 소모전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군부에서는 기동전 사상이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 외부의 이질적인 사상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 했습니다.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은 현대전의 변화된 환경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우수한 전술로서 충분히 단기간의 결정적 섬멸전을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슐리펜은 델브뤽과 달리 러일전쟁을 통해 신속한 승리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슐리펜은 러시아군이 전술적으로 무능하고 전쟁의 패배로 타격을 받았기 때문에 양면전쟁이 발발하더라도 프랑스를 신속히 격파한 다음에 상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쉽게 붕괴하지 않았고 러시아군의 동원속도는 슐리펜이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결국 전쟁 전에 예상했던 신속한 승리는 오지 않았고 독일군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저자는 다음으로 마른 전투의 패배 이후 새로이 총참모장이 된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이 소모전 전략을 구상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팔켄하인은 독일군 장교단의 주류와는 달리 ‘기동전’과 ‘섬멸전’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총참모장에 임명될 당시 빌헬름 2세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지만 팔켄하인은 근본적으로 독일군 고위장교단 내에서 비주류였으며 결국은 기동전 지지자들과 적대적인 관계가 됩니다.
팔켄하인의 전략구상은 서부전선에서의 소모전을 통해 프랑스와 유리한 조건에서 휴전을 맺은 뒤 동부전선의 러시아를 정리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저자는 1915년의 경험을 통해 팔켄하인이 소모전으로 프랑스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고 주장합니다. 프랑스군이 1915년 9월에 야심차게 실시한 대공세 당시 독일군은 서부전선에 충분한 예비대를 확보하지 못했지만 공세 초기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에 큰 타격을 주면서 전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동부전선에서는 1915년의 대공세를 통해 러시아군에게 포로 1백만을 포함한 막대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팔켄하인은 이를 통해 1916년에는 서부전선에서 대규모의 소모전을 벌여 프랑스를 전열에서 이탈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저자는 1916년 전역에 대한 설명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몇 가지 더 하고 있습니다. 가장 재미있는 주장은 영국군의 솜 공세는 팔켄하인이 미리 예측하고 자신의 소모전략의 일부로 포함시켰다는 것 입니다. 팔켄하인의 원래 계획은 베르덩 공세를 통해 프랑스군을 소모시키며 동시에 프랑스가 영국에 구원 공격을 요청하도록 하는 것 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국군이 구원공격에 나서면 1915년 가을과 마찬가지로 방어를 통해 영국군을 소모시킨 뒤 그동안 확보해 둔 전략예비를 통해 반격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팔켄하인의 구상은 독일군의 전투력은 과대평가하고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한 상태에서 이루어 진 것이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가 없었습니다. 베르덩 공세는 예상보다 완강한 프랑스군의 저항으로 독일군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으며 영국군의 공세는 팔켄하인의 예측보다 늦게 이루어 진데다 결정적으로 예상 이상으로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원래 팔켄하인이 반격에 투입하기 위해 확보한 예비대들은 영국군의 솜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소모되었습니다. 결국 원래부터 비주류였던 팔켄하인은 1916년의 실패를 계기로 반대파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고 총참모장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자는 전후 독일의 역사서술에서 팔켄하인이 정치적 반대파, 특히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 등 ‘섬멸전’ 지지자들에 의해 폄하되었다고 지적합니다. 비주류였던 팔켄하인은 총참모장 해임과 함께 전후 독일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지만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탄넨베르크’의 영웅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섬멸전’ 옹호자들은 독일이 1차대전에서 패배한 원인이 ‘위대한’ 슐리펜의 가르침을 살리지 못하고 어리석은 ‘소모전’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섬멸전’에 입각해 미래의 전쟁을 준비한 독일군은 2차대전에서 또 다시 ‘소모전’에 의해 패배했습니다. 많은 군사사가들이 지적하듯 ‘기동전’과 ‘섬멸전’은 작전단위의 방법론으로 적당한 것이지 ‘전략’ 단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수단은 아니었습니다. 1차대전 이후의 독일 군사사상가들은 현대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작전’의 수단을 ‘전략’에 까지 확대 적용한 결과 철저한 패배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폴리의 연구는 풍부한 자료에 근거해 새롭고 흥미로운 주장들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20세기를 전후한 시기 독일의 군사사상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기동전’과 ‘섬멸전’에만 주목한 나머지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던 ‘소모전’에 대해서는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1차대전 당시 팔켄하인의 전략이 단순히 팔켄하인 개인의 돌출적인 산물이 아니라 19세기 말 이후의 군사사상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팔켄하인의 군사 사상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고찰이 부족하지만 충분히 흥미로운 설명입니다.

잡담 하나. 독일 군사사상의 발전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싶으신 분은 시티노(Robert M. Citino)의 The German Way of War: From the Thirty Years' War to the Third Reich를 추천합니다.
시티노의 저작들에 대해서는 채승병님이 쓰신 ‘전격전의 실체는 무엇인가’라는 글의 마지막 부분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2007년 2월 15일 목요일

데자뷰?

볼스키 소장은 낮은 직급의 장교들에게 비판적이었다. 그는 기계화군단장, 전차사단장, 전차연대장, 그리고 각 제대의 참모장교들이 “기동전”을 수행할 만한 “작전적-전술적 식견”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소련군 기계화부대의) 장교들은 전투에서 주도권을 쥐려고 하지도 않았고 부대가 보유한 기동수단을 제대로 동원하지 못했으며, 전투에서는 부대의 기동력을 잘 살리지 못했다. 게다가 많은 장교들은 정면공격만 거듭했으며 모든 제대에 걸쳐 정찰이라고는 할 줄 몰랐다. 위로는 군단장부터 아래로는 중대장에 이르기 까지 소련 장교들의 지휘 통제 능력은 한심한 수준이었다. 많은 장교들이 지도를 가지고 있지 않아 전투가 한창인 와중에 부대 전체가 길을 잃는 것이 다반사였다. 볼스키 소장은 기계화군단의 장교들이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 하고 있으며 부대를 어떻게 지휘할 것인가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다”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1941년 8월 1일, 전선시찰을 나간 붉은군대 총참모부 볼스키 소장의 이야기
Roger. R. Reese, Stalin’s Reluctant Soldiers : A Social History of the Red Army, 1925-1941,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6, p.201

그리고 4년 후.

“젊은 장교들은 실전 경험이 부족한데다 자신의 부대를 어떻게 통솔해야 할 지 전혀 모르는 상태다. 사단급 부대들은 전반적으로 훈련이 부족해 통합된 부대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야전 부대들의 경우 연대급의 제병협동 전투나 보전협동 전투를 제대로 수행할 능력이 없다. 운전병들은 야지 주행이나 야간 주행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전차병들도 마찬가지 수준이다. (중략) 전차, 보병수송장갑차, 차량은 거의 대부분 신품이어서 이것을 조종하는 병사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상태이다.

1945년 3월 7일, 독일 제 9군 사령관의 보고서 중에서.
Andreas Kunz, Wehrmacht und Niederlage : Die bewaffnete Macht in der Endphase der nationalalsozialistischen Herrschaft 1944 bis 1945, Oldenbourg, 2005, s.213에서 재인용.

흔히 싸우면서 닮아 간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가 봅니다. 그나마 독일쪽은 전쟁 전에 준비한게 있다보니 전쟁 말기까지도 쓸만한 지휘관들이 꽤 많긴 했습니다만 하위 전술제대로 내려가면 내려갈 수록 난감한 상황이었다고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