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민방위 교육 보충을 다녀온 뒤 책을 읽었습니다. 전에 읽다가 못 읽은 것들을 중심으로 읽었는데 중간에 읽다가 말아 흐름이 끊어지니 잘 안읽히더군요.
오늘 읽은 글 중에서는 쇼왈터(Dennis Showalter)의 “Weapons and Ideas in the Prussian Army from Frederick the Great to Moltke the Elder”가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모든 군대의 문제인 화력과 기동력의 균형에 대한 이야기가 괜찮았습니다. 쇼왈터는 7년 전쟁 시기 프로이센군의 포병의 문제를 재미있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7년 전쟁 초기 프로이센 육군 야전포병의 화포 중 가장 강력한 것은 12파운드포(12-pfünder Geschütz)였습니다. 이것은 야전 기동력을 위해 화력을 다소 희생한 것 이었는데 그 결과 화력은 물론 기동력도 어정쩡한 물건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각 보병연대에 소속된 대대포병의 3파운드 포 또한 기동력을 강조한 물건이었는데 그 결과 화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사정거리도 형편없고 탄도도 불량한 졸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3파운드 포는 일선 보병들의 외면을 받아서 실전에서 보병들이 3파운드 포의 지원을 거부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12파운드 포의 경우는 요새에 설치된 12파운드포를 야전용 포가에 얹은 것으로 대체되었고 보병대대의 3파운드 포는 조금 더 나은 6파운드포로 교체되었습니다. 그리고 7년 전쟁 후기로 가면서 화력에 대한 의존, 특히 중포병에 대한 의존이 높아졌기 때문에 포병의 규모가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되면서 프리드리히 2세가 중요시한 야전 기동력이 감소했다는 것 입니다. 18세기의 비포장 도로는 기상 상태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고약한 날씨라도 만나게 된다면 많은 포병을 동반한 프로이센군의 기동력은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포병화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수록 이에 대한 보급도 늘어났는데 많은 화약과 포탄이 함께 이동하면서 포병의 대열은 더 길어졌습니다. 그렇다고 기동성을 위해 포병을 축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프리드리히 2세는 7년전쟁의 경험으로 새로운 야포를 개발하는 등 포병의 발전에 신경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말이라는 견인수단에 의존하는 한 기동력과 화력의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1차대전 이전 까지도 독일군에게 있어 기동력과 화력의 절충점을 찾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으니 말입니다.
잡담 하나. 오늘 쇼왈터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을 해 봤는데 보불전쟁 이후 독일군 포병의 발전에 대한 글을 다시 한번 고쳐서 써보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썼던 글은 좀 두서가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