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국민척탄병사단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국민척탄병사단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2년 7월 15일 일요일

푸펜도르프(Puffendorf) 전투에 대한 개괄

지난번에 쓴 “Rurfront 1944/45 - Hans Kramp”에 서 푸펜도르프 전투 이야기를 꺼낸 김에 이 전투에 대해 간략하게 썰을 풀어보겠습니다. 독일 자료를 보강해서 독일쪽의 시각도 반영한 글을 쓰고 싶은게 욕심이지만 필요한 자료를 언제 구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 일단은 미국의 시각에서 간략하게 소개를 해 보지요. 차후에 만족할 만한 독일측 자료를 구할 수 있으면 새로 한편 더 쓰도록 하겠습니다.

푸펜도르프Puffendorf 전투는 1944년 11월 17일 미군의 공세에 맞서 반격에 나선 독일 제47기갑군단 소속의 제9기갑사단과 제506중전차대대가 미군 제2기갑사단과 격돌한 기갑전이었습니다. 특히 이 전투는 미 제2기갑사단이 처음으로 독일군의 쾨니히스 티거를 전장에서 맞딱드리고 충격을 받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푸펜도르프 전투는 미군의 11월 공세의 일부였으므로 전반적인 상황을 먼저 설명하고 푸펜도르프 전투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공세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은 미육군 공간사 The Siegfried Line Campaign에 잘 되어 있으므로 배경 설명은 이 저작을 기준으로 하겠습니다.

작전명 퀸Queen으로 명명된 11월 공세에서 미 제2기갑사단은 제9군 예하 제19군단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미 제9군의 목표는 윌리히Jülich를 포함하여 뢰어Roer강에 도하점을 확보하는 것 이었습니다. 미 제9군은 윌리히 방면으로의 공세에 제19군단과 제13군단을 투입했는데 맥레인Raymond S. McLain중장이 지휘하는 제19군단은 제2기갑사단, 제29보병사단, 제30보병사단으로 편성되었으며 질렘Alvan Cullom Gillem, Jr.소장이 지휘하는 제13군단은 제84보병사단과 제102보병사단, 제113기병단으로 편성되었으며 제9군의 예비대로 제7기갑사단이 있었습니다. 이중 제19군단은 제9군의 주공으로서 윌리히를 점령하고 뢰어강을 도하하는 확보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제13군단은 제19군단의 좌익에서 공세를 시작해 리니히Linnich를 점령하고 뢰어강을 도하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미 제9군은 윌리히와 리니히를 확보하고 뢰어강을 도하하면 뒤셀도르프 방면으로 공세를 계속할 예정이었습니다.1) 이 지역의 지형은 라인강 유역의 전형적인 평야로 많은 도시와 마을이 산재해 있는게 특징입니다.(독일 서부의 라인강 유역을 가 보신 분들이라면 바로 머리에 떠오르실 겁니다.)

이 공세의 문제라면 공세 초기에 좁은 지구에 병력이 집중적으로 투입되어 공간 확보가 용이하지 않다는 것 이었는데 이때문에 주공인 제19군단이 진격하면서 제13군단이 전개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또한 가을비와 10월 말 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으로 인해 평야지대가 진창으로 돌변했습니다. 아직 10월이어서 지면이 얼어붙을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2)  때문에 전차를 포함한 기동장비의 정비에 많은 노력이 기울여 졌습니다. 특히 공세를 앞두고 전차의 궤도에 장착하는 “덕 빌Duck Bills”을 집중적으로 장착해서 제2기갑사단과 각 보병사단에 배속된 독립전차대대들은 공세 직전까지 셔먼의 4분의 3에 덕빌을 장착했다고 합니다.3)

미 제9군의 정면에는 독일 제15군 소속의 제12SS군단(제176보병사단, 제183국민척탄병사단)과 제81군단(제246국민척탄병사단, 제3기갑척탄병사단)이 배치되어 있었고 예비대로는 뤼트비츠Heinrich Diepold Georg Freiherr von Lüttwitz 기갑대장이 지휘하는 제47기갑군단(제9기갑사단, 제15기갑척탄병사단)이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미군의 의도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윌리히 방면으로 진출하는 주공을 상대하기 위해 예비대인 제47기갑군단을 투입할 계획이었습니다.

퀸 작전은 악천후로 인해 연기된 끝에 1944년 11월 16일 개시되었습니다. 기상 문제로 인해 항공지원이 약간 축소된 규모로 실행됐고 이어서 공격준비포격이 실행되었습니다. 포격이 끝나자 주공인 미 제19군단의 제29보병사단과 제2기갑사단이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공격정면이 매우 좁았기 때문에 제2기갑사단은 B전투단CCB, Combat Command B만을 투입했습니다. B전투단은 공격 첫날 독일 제183국민척탄병사단 제330척탄병연대의 방어를 격파하고 푸펜도르프와 플로버리히Floverich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푸펜도르프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제2기갑사단 B전투단이 입은 손실은 4대의 전차가 진창에 기동불능이 되고 6대의 전차가 지뢰로 파손된 것 이었습니다. B전투단은 푸펜도르프와 플로버리히를 점령한 뒤 푸펜도르프 북쪽의 압바일러Apweiler 방 향으로 공격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매복한 독일군의 대전차포에 전차 7대(3대 완파, 4대 기동불능)와 다수의 보병을 상실했습니다.4) 첫날의 공격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미 제2기갑사단은 독일 제183국민척탄병사단 제330척탄병연대에 괴멸적인 타격을 가했습니다. 미국측 기록에 따르면 B전투단이 독일 제330척탄병연대로 부터 잡은 포로만 570명에 달했습니다. 미 제2기갑사단은 첫날 공격에서 전사 21명, 실종 18명을 포함해 196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전차 35대를 잃었습니다.5)
반면 미 제2기갑사단의 우익, 즉 남쪽에서 공격을 개시한 제29보병사단은 상당한 손실을 입으면서 진격도 부진했습니다. 평야지대였기 때문에 보병들은 포격에 노출될 경우 공격을 제대로 할 수 가 없었으며 배속된 제747독립전차대대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보병을 지원하는 전차들은 보병 때문에 신속하게 돌진하지 못했고 전차에 포격이 집중하면서 전차의 엄호를 바라던 보병의 피해만 속출한 것 입니다. 제29보병사단이 공격에 투입한 제115보병연대와 제175보병연대는 1km도 전진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제115보병연대 C중대는 심각한 타격을 입어서 공격 첫날 중대원이 20명으로 줄어들었을 정도였습니다.6)

이렇게 미 제19군단의 공세 첫번째 날이 지나갔습니다. 독일군은 이 공격에 매우 신속히 반응했는데 11월 16일 오후 예비대인 제47기갑군단에 출동명령이 내려진 것 이었습니다. 특히 가장 강력한 부대인 엘버스펠트Harald Freiherr von Elverfeldt 소장이 지휘하는 제9기갑사단에게는 미 제2기갑사단의 돌파를 저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미 제2기갑사단은 독일군이 기동예비를 투입한 사실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11월 17일 다음 목표인 게레온스바일러Gereonsweiler를 공격하기로 했고 양측의 기갑부대는 이렇게 격돌하게 됩니다.

1944년 11월 17일, 독일 제9기갑사단은 푸펜도르프와 이멘스도르프Imensdorf 방면으로 반격을 개시했습니다. 푸펜도르프 방면은 제11기갑척탄병연대가, 이멘스도르프 방면으로는 제10기갑척탄병연대가 공격을 담당했으며 여기에 제33전차연대와 제506중전차대대가 배속되었습니다.
이멘스도르프 방면으로 공격한 제10기갑척탄병연대는 이곳을 방어하던 미 제406보병연대와 제771대전차대대에 의해 비교적 간단히 격퇴되었습니다.7) 그러나 푸펜도르프 방면의 전투는 좀 격렬하게 전개됐습니다.
독일군 제33전차연대와 제11기갑척탄병연대의 푸펜도르프 공격은 이곳에서 공격을 위해 전개중이던 미 제2기갑사단 B전투단 제1임무부대에게는 기습이었습니다. 독일군이 먼저 미군을 향해 포격을 시작했고 이어 미군도 대응포격을 시작했기 때문에 양측의 보병들은 기동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8) 결국 전투는 글자 그대로 순수한 기갑전투로 진행되었습니다. 미군 전차들은 공격을 위해 전개하던 중에 기습을 받은데다 진창으로 인해 기동력이 저하되어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미국측의 표현에 따르면 독일 전차(판터)의 폭 넓은 궤도는 “얕은 자국만을 남기는데 미군의 전차 궤도는 참호를 만들지경”이었던 것 입니다. 게다가 독일군 전차의 강력한 방어력은 미군을 경악시켰습니다. 특히 제2기갑사단은 처음으로 쾨니히스티거와 교전을 했기 때문에 그 충격은 엄청났습니다. 한 전차장은 자신의 전차가 쾨니히스티거에 14발을 명중시켰음에도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한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B전투단은 18대의 셔먼과 7대의 스튜어트 경전차가 완파되었고 16대의 셔먼과 12대의 스튜어트 경전차가 격파되었습니다. 여기에 A전투단이 4대의 셔먼을 잃었습니다.9)  B전투단은 11대의 독일 전차를 격파했다고 추산했는데 미 제2기갑사단이 공세기간 중 격파한 판터가 5대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과장된 보고라고 생각이 됩니다. Tiger in Combat에 따르면 쾨니히스티거는 이날 전투에서 네대가 격파되었는데 3대는 제67포병연대의 야포 사격으로 파괴된 것 입니다.

푸펜도르프 전투는 미 제2기갑사단의 전차병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1945년 3월 20일 미 제2기갑사단장이 아이젠하워에게 제출한 “독일군과 미군의 기갑장비 비교평가에 관한 제2기갑사단의 장교 및 사병들의 의견(Personal Convictions of Individual Officers and Enlisted Men of 2nd Amrored Division as to Comparison of German and Aerican Armor and Equipment)”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 실린 많은 증언들이 푸펜도르프 전투의 경험을 이야기 하고 있을 정도이기 때문입니다.10) 그리고 이 전투의 충격이 엄청났기 때문인지 미국 공간사에서도 이 전투를 다루는 저작이 두권이나 있을 정도입니다.



1) Charles B. MacDonald, The Siegfried Line Campaign, (USGPO, 1993), pp.516~517.
2) Donald E. Houston, Hell on Wheels : The 2nd Armored Divison, (Presidio, 1977), p.302.
3) Charles B. MacDonald, ibid., p.518.
4) Donald E. Houston, ibid., pp.307~309; Charles B. MacDonald, ibid., pp.526~527.
5) Charles B. MacDonald, ibid., p.530.
6) Harry Yeide, Steel Victory : The Heroic Story of America’s Independent Tank Battalions at War in Europe, (Presidio, 2003), p.161; Charles B. MacDonald, ibid., p.528.
7) Charles B. MacDonald, ibid., p.531.
8) Hans Kramp, Rurfront 1944/45 : Zweite Schlacht am Hubertuskreuz zwischen Wurm, Rur und inde, (Verlag Fred Gatzen Geilenkirchen, 1981), p.247; Charles B. MacDonald, ibid., pp.531~532.
9) Lida Mayo, The Ordnance Department : On Beachhead and Battlefront, (USGPO, 1991), pp.325~326; Donald E. Houston, ibid., pp.310~313.
10) Thomas L. Jentz의 Germany’s Panther Tank : The Quest for Combat Supremacy, pp.154~156에는 이 보고서에서 인용한 증언들이 많이 실려있습니다.

2011년 8월 30일 화요일

전쟁 말기 일본육군의 차량 부족에 대한 잡담

아래의 글에서 일본군의 궁색한 대전차 전투 사례를 하나 다루긴 했습니다만 2차대전기 일본 육군의 장비상태를 보면 이게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열강이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물론 태평양 전쟁이 해전 위주였고 일본해군이라면 세계 일류급 해군이긴 합니다만 육군과 육해군 항공대의 질적 수준은 삼류라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니 말입니다. 게다가 질적수준은 물론이고 양적 수준도 형편없지요.

태평양 전쟁 종전 직후 미군이 일본군을 무장 해제한 기록을 보면 본토결전을 위해 일본 육군이 준비한 전력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장기간의 소모전을 겪은 이후라 하더라도 1944년 말 부터 본토결전 준비를 한 것 치고는 준비가 영 부실한게 눈에 띄입니다. 조금 극단적인 사례일 수 있는데 규슈에 배치된 제16방면군 예하 40군의 경우 군 전체에 트럭 186대, 기타 차량 64대, 장갑차 46대 등 총 296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장갑차를 제외한다면 250대의 차량이 있는 셈이지요.1) 일본 제40군은 1945년 1월 8일 편성에 들어갔고 여기에 총 4개 사단과 1개 혼성여단이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제303, 206, 146, 77사단과 독립혼성 125여단이지요. 그냥 단순하게 계산해서 제40군에 배속된 각종 지원부대를 제외하면 총 15연대(303사단 3개연대, 206사단 3개연대, 146사단 4개연대, 77사단 3개연대, 제125여단은 5개대대 편성이니 대략 2개연대로 계산)에 차량 250대, 1개 연대에 차량 16~17대 정도가 돌아가는 셈입니다;;;; 여기에 군 직할대를 포함시켜서 나눈다면 그 숫자가 더 줄어들겠지요. 사실상 미군이 직접 공격해 왔다면 신속한 기동은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40군은 303, 206, 146사단과 독립혼성125여단 등 총 3개사단과 1개 여단을 해안 방어에 투입하고 있었습니다.2) 제40군의 유일한 예비대로는 77사단만이 남는 셈인데 뭐 신속한 기동이 어려우니 미군이 상륙해 왔을 경우 어떻게 되었을지는 상상만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다른 곳과 비교해 본다면 어떨까요? 제 개인적으로 일본군의 본토 결전준비와 비교할 만한 대상으로는 독일군의 북부 프랑스 방어준비가 적합할 듯 싶습니다. 동부전선에서 장기간의 소모전을 거친 뒤 방어를 위해 수개월간 전력을 급히 축적한 사례이니 비교대상으로 적절하지 않을까 싶군요. 먼저, 위에서 언급한 일본군 보병사단들과 비슷하게 차량화 우선순위에서 뒤떨어지는 제6강하엽병연대의 경우 연합군의 상륙 직전 70대의 트럭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3) 장비 상태가 나쁜 축에 속했던 272보병사단의 경우는 오토바이를 제외하고 105대의 자동차, 136대의 트럭, 71대의 견인용 트랙터를 보유하고 있었고 비교적 양호한 수준으로 볼 수 있는 353보병사단은 오토바이를 제외하고 573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4) 매우 거친 비교이긴 합니다만 일본군에 비교하면 차량화 수준이 상당히 양호한 편입니다.

물론 1945년 봄 본토방어를 위해 준비한 독일군과 비교하는게 타당하다고 보시는 분들도 계실 것 입니다. 1945년 봄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는 독일군 보병사단도 상당히 엉망입니다. 약간의 예를들면 제167국민척탄병 사단은 1945년 3월 중순 편제의 13%의 차량만 갖추고 있었고 제326국민척탄병 사단의 경우는 아예 말과 마차만 갖추고 있었습니다.5) 하지만 그 당시의 독일군은 껍데기만 남긴 했어도 어느 정도의 기동부대들을 유지하고는 있었지요. 그 점에서 1945년 봄의 독일육군 조차도 일본 육군 보다는 조금 나은 수준이라고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사실 국민돌격대에 판쩌파우스트라도 쥐어준 것을 보면 아무래도 독일이 일본 보다는 좀 낫지 않습니까.




1) John Ray Skates, The Invasion of Japan : Alternative to the Bomb,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Press), p.190
2) John Ray Skates, ibid., p.120
3) Hans-Martin Stimpel, Die deutsche Fallschirmtruppe 1942~1945 : Einsätze auf Kriegsschauplätzen im Osten und Westen, (Mittler&Sohn, 2001), p.156
4) Niklas Zetterling, Normandy 1944 : German Military Organization, Combat Power and Organizational Effectiveness, (J.J.Fedorowicz, 2000) p.252, 282
5) John Zimmermann, Pflicht zum Untergang :  Die deutsche Kriegführung im Westen des Reiches 1944/45, (Schöningh, 2009), p.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