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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1일 토요일

차베스의 키보드 워리어들

그동안 정신이 없다보니 RSS 리더에 읽지 않은 기사들이 가득 찼습니다.

밀린 글들을 대략 훑어보다 보니 골때리는 기사가 하나 눈에 들어오더군요. 4월 20일자로 된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의 기사는 바로 차베스가 진짜 "키보드 워리어"들을 세금으로 양성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Eine Kinderarmee für Hugo Chávez -Operation Kommunikationsdonner

이 기사에 따르면 차베스는 자신의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 중상모략을 일삼는 민영 언론에 반격하기 위하여 13세에서 17세의 청소년들을 동원하기로 결정했으며 그 결과 지난 2월 부터 수도 카라카스에서 시범적으로 선발된 79명의 청소년들에게 언론 교육을 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의 임무는 핸드폰, 인터넷,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이용해 민영 언론에 반격을 가하는 것 이라고 합니다. 세금으로 키보드 워리어를 양성하겠다는 것이니 정말 차베스도 막장이로군요.

차베스는 이미 이라크전에 큰 감명을 받아 대규모 민병대를 조직해 놓았는데 이제는 선전 선동을 위해 키보드 민병대를 조직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차베스를 찬양하던 사람들은 이 정신나간 짓에 대해서는 뭐라고 평할까요?

2008년 6월 22일 일요일

막장을 달리는 짐바브웨 사태

Mugabe's men bring rape and torture to Harare suburbs- GUARDIAN

Mugabe allies 'set up' political terror - GUARDIAN

Assassins in Zimbabwe Aim at the Grass Roots - The New York Times

Zimbabwe opposition asks voters to end Mugabe rule - The Washington Post/AP

Krieg gegen das eigene Volk - Frankfurter Allgemeine

Mugabe setzt auf Mord - Der Spiegel

요 며칠 사이에 짐바브웨에서 아주 난감한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물론 짐바브웨에서는 선거 때 마다 막장상태가 반복돼 오긴 했습니다만 이번엔 약간 더 난감해 보입니다.

짐바브웨 대통령 무가베가 선거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자신을 추종하는 민병대를 앞세워 정치테러를 자행하고 있다는군요. 소총, 그리고 칼과 돌팔매(!)로 무장한 민병대가 살인과 강간을 저지르며 대통령의 반대파와 유권자들에게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야당 당원에 대해서는 대량학살 이라고 불러도 될 수준의 테러가 가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당사자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테러의 마수가 뻗치고 있다니 할 말을 잃을 지경입니다. 이건 마치 이박사 치하의 대한민국을 살짝 업그레이드 한 듯한 막장 분위기로군요. 아니나 다를까 짐바브웨의 국가 경제도 엉망인걸 보니 그야 말로 이박사와 동급이라 해도 틀리진 않겠습니다. "Krieg gegen das eigene Volk"라는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의 기사 제목은 정말 짐바브웨 사태의 핵심을 잘 요약했다는 느낌입니다.
저 위에 링크는 하지 않았는데 AFP 통신의 한 보도에 따르면 무가베는 자신을 권좌에서 내려오라고 할 수 있는건 "신" 뿐이라고 떠들고 다닌다고 합니다. 아이고 맙소사. 역시 도킨스 옹이 옳았습니다. 정말 갖가지 쓰레기들이 신의 이름을 걸고 세상을 막장으로 만들고 있군요.
짐바브웨의 막장 상태를 보니 이렇게 집에 편하게 들어앉아 대통령을 씹을 자유가 있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2008년 3월 2일 일요일

국가에 의한 무장력의 독점 - 미국의 방식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지방 영주들이 중앙 정부와의 경쟁에서 도태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바로 ‘화약무기’입니다. J. Hale이 War and Society in Renaissance Europe에서 지적한 대로 화약무기의 도입은 막대한 재정 소모를 불러왔고 이것을 견디지 못하는 체제는 근대의 가혹한 경쟁에서 도태될 수 밖에 없었지요. 결국 근대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돈’이었던 셈 입니다.

사족이 길었습니다.;;;;

미국은 유럽의 근대국가와 달리 건국 이전부터 민병대라는 다소 괴이한 무장조직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민병대는 미국이 독립국가가 된 이후에도 헌법에 의거해 계속해서 존재했습니다. 즉 미국은 중앙정부가 무장력을 독점하지 못한 괴이한 근대국가였던 셈 입니다. 유사시가 아니면 국가가 통제할 수 없고 또 유사시에도 그 통제가 완전하지 못한 무장력이 합법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1908년의 민병대법 Militia Act 개정 이전까지 민병대, 즉 주 방위군의 해외파병은 불법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숫자에서 연방 정규군을 압도하고 있었다는 더 난감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1895년에 미국의 주방위군 병력은 총 115,699명이었는데 이건 당시 연방 정규군의 네 배에 달하는 규모였습니다.

그렇지만 민병대, 즉 주 방위군은 결국 1903년의 민병대법(Militia Act)과 1908년의 민병대법을 통해 연방정부의 강력한 통제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어떻게? 천하의 미리견이라고 별 다를게 있겠습니까? 바로 ‘돈’ 입니다.

19세기 미국의 군인들은 유럽식의 징병제를 미국이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군사제도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현역 장교들은 유럽, 특히 독일의 징병제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들이 보기에 민병대는 자원의 낭비에 불과했습니다.(프로이센의 징병제에 대한 미국의 시각 참조) 현역장교들은 1890년대부터 열심히 민병대 해체, 또는 축소와 강력한 연방 예비군 창설을 주장하고 있었고 각 주정부와 민병대 당국자들은 연방 정부의 간섭에 공개적으로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미국 전쟁부(Department of War)는 1880년부터 모든 주의 민병대 훈련에 연방군 장교의 참석과 검열을 의무화 했는데 이것은 주방위군 간부들의 반발을 사고 있었습니다. 많은 주 들이 전쟁부의 요구대로 연방군 편제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편제로 연대를 편성했습니다.

그렇지만 1890년대 이후로는 주방위군 간부들도 기존의 민병대 체제로는 미래의 전쟁에 대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기관총과 신형 대포가 등장하고 있었는데 이런 신무기들은 점차 민병대나 주 정부 차원에서는 대량으로 장비하기가 어려워 졌던 것 입니다. 또한 미서전쟁에서 드러났듯 미국은 더 이상 고립된 지역강국이 아니라 세계패권국으로 나가고 있었고 주방위군이 변화를 거부한다면 미래의 전쟁에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것이 자명해졌습니다.

결국 주방위군은 자신의 역할을 연방군이 지향하는 연방 정부의 예비군과 헌법이 보장한 자유로운 인민의 민병대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했습니다. 다행히 미국 연방정부는 군대와 달리 예산상의 제약 문제로 대규모 연방군을 유지하는 것 보다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주방위군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쪽을 선호했습니다.(1890년대에 연방 정규군의 병사 1명을 1년간 유지하는데 1,000달러가 든 반면 주방위군은 1인당 24달러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연방정부와 주정부는 주방위군의 역할에 대해 절충점을 찾게 됩니다. 즉 주방위군을 현대화하는 대신 연방정부의 통제를 강화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 결과 제정된 1903년의 민병대법은 주방위군에 대한 연방정부의 통제 강화를 법적으로 보장하게 됩니다. 새로 개정된 민병대법은 과거의 민병대법이 18세 이상 45세의 모든 남성을 대상으로 한 것을 고쳐 민병대를 상설민병대(Organized Militia, 주방위군)과 18세 이상 45세의 모든 남성을 포괄하는 예비민병대(Reserve Militia)로 나누었습니다. 이 중 상설민병대인 주방위군은 연방정부의 예비군으로 기능하는 대신 연방정부로부터 장비와 예산, 각종 훈련에 대한 지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상설민병대에 대한 장비 및 물자, 예산 지원을 보장한 것은 바로 1903년 민병대법의 수정조항 1661조 였습니다. 단, 1903년의 민병대법은 대통령에 의한 민병대 동원 기간을 9개월로 한정하고 여전히 민병대의 동원을 국내로 한정하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법은 이전까지 연방정부의 지원을 무기에만 한정하던 것에서 지원대상을 수송수단, 기타 장비와 여름 훈련기간 동안 주방위군 대원의 월급을 지급하는 것 까지 확대시켜 연방정부의 영향력을 강화했습니다. 즉 돈으로 코를 꿴 셈입니다. 1903년의 민병대법에 의해 주방위군 대원은 대통령의 소집에 무조건적으로 응해야 했으며 또 연방군 군법의 적용을 받게 되었습니다.

민병대법 통과 이후 연방정부의 지원은 폭증해서 1903년~1910년의 기간 동안 한해 평균 430만 달러에 달했으며 1911~1915년 사이에는 한해 평균 500만 달러가 되었습니다. 1803년부터 1899년까지 연방 정부가 민병대에 지원한 예산이 모두 합쳐 2200만 달러에 불과했으니 물가의 상승을 감안하더라도 1903년 민병대법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왔는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이었던 것은 수정조항 1661조에 따른 예산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연방군’ 장교였습니다. 연방군의 검열관은 민병대법에 의해 주방위군의 훈련을 참관, 감독하고 예산 지원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이제는 주방위군이 연방의 간섭을 운운하며 저항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진 것 입니다.

1908년에는 전쟁부 장관 라이트(Luke E. Wright)에 의해 오늘날의 주방위군국(Bureau of National Guard)의 전신인 민병대과(Division of Militia Affairs)가 창설되었고 초대 국장으로는 해안포병단(Coprs of Coastal Atillery)의 위버(Erasmus M. Weaver) 중령이 임명됩니다. 민병대과는 주방위군에 대한 전쟁부의 통제를 더욱 더 강화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특히 민병대과는 주방위군의 예산과 조직, 편성, 훈련 뿐 아니라 유사시 동원까지 총괄하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민병대과는 1910년에는 장성급 직위로 격상되고 참모총장 직할 부서가 됩니다.

한편, 1908년의 민병대법 개정은 주방위군 대원의 동원 기간을 9개월에서 대통령의 직권에 따라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도록 했으며 추가로 대통령의 명에 따라 해외파병도 가능하도록 개정했습니다. 이로서 미국 헌법에 기초한 자율적 민병대는 사실상 사라지게 됩니다.

결국 국가에 의한 무장력 독점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었고 미국도 그 점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시기와 방식은 다소 달랐지만 지방의 무장력이 중앙과의 경쟁에서 굴복한 결정적인 원인이 돈이라는 점은 미국이나 유럽이나 마찬가지였던 셈 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프랑스로 망명해 루이 12세에게 이탈리아 원정을 부추긴 밀라노 사람 트리불치오(Gian Giacomo Trivulzio)가 남긴 명언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전쟁에는) 다음의 세가지가 필수적이다. 돈, 더 많은 돈, 그리고 더 더욱 많은 돈 이다.”

참고서적

Jerry Cooper, The Rise of the National Guard : The Evolution of the American Militia 1865-1920, University Press of Nevraska, 1997
Michael D. Doubler, Civilian in Peace, Soldier in War - The Army National Guard : 1636-2000,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