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히로히토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히로히토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4년 7월 20일 토요일

쿠니 쿠니아키가 회고하는 이노우에 시게요시 제독의 교육 철학

 히로히토의 조카인 쿠니 쿠니아키(久邇邦昭)의 회고록이 올해 한국어로 번역됐습니다. 먼저 일본어판을 읽어보신 분들이 제게도 한번 읽어보라고 추천하셔서 한국어판을 구입했습니다. 읽어보니 과연 일본의 황족 답게 흥미로운 일화들을 많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병학교(해군사관학교)에 재학 중 패전을 맞았습니다. 이 회고록에서는 해군병학교장이었던 이노우에 시게요시(井上成美) 제독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해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노우에 제독이 해군병학교장으로서 보여준 교육 철학을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노우에 제독이 해군병학교 교장 재직 중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영어교육 폐지를 비판하고 해군병학교의 영어교육은 유지했다는 일화는 매우 잘 알려져 있습니다. 쿠니 쿠니아키는 회고록에서 이노우에 제독이 황국사관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거리를 두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전쟁 당시 일본이 천황을 신성시 하며 미쳐돌아갔던 걸 생각하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인물 중 히로히토 다음으로 흥미롭습니다. 제가 흥미롭게 읽은 부분을 인용해 봅니다.


이노우에 교장은 쇼와 19년(1944년) 8월 5일에 해군 차관으로 전임되었기 때문에 2월 7일에 에다지마(江田島)에 도착한 나와는 정확하게 6개월 겹쳤다. 그 교육 정책은 적어도 나의 준비교육기간중의 마무리 반년 동안, 변함없이 계속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노우에 교장은 사관학교 생활의 추억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에다지마 생활을 전체적인 그림으로 보면, 왠지 귀족적인 향기가 있었다. 사관학교 생활에는 리듬과 조화, 그리고 시와 꿈도 있는 삶이었다."

우리 집에도 왠지 자유의 향기가 있었던 것처럼 생각하지만, 해군의 전통으로서 영국 해군의 영향도 있고, 신사정신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의 존중이라는 것이 저류로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노우에 교장은 스위스와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의 각 대사관에 있는 동안 유럽 사람들의 기질 등에 대해 연구하고, 제1차 세계대전때, 영국 상류계급의 사람들이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는지를 듣게 되어 공감하고, 이런 정신을 사관학교 교육정책에 명확하게 반영하였다.

교장은 "사관이라는 것은 무엇을 어느 정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사관에게 자유재량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황이 어려울 무렵에 일부 영어 폐지론이나 군사학 우선 강경론이 있는 가운데, 가능한 철저한 보통학(일반교양) 교육을 주장한 것도 이런 생각에서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관이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좌우로 편광(偏光)하지 않는 전통적인 학문을 먼저 학생들에게 주지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당시 극구 칭찬을 받고 있었던 황국사관(皇國史觀)의 중심인물이었던 도쿄 대학 히라이즈미 키요시(平泉澄) 교수를 해군성 교육국이 학생교육을 위해서라고 칭하여, 종종 보내오는 것에 대하여, 막무가내로 강연을 학생들에게는 들려주지 않고, 교관에게만 듣게 했다. 편향된 부분은 학생들에게 전달하지 않도록 지시했다. 또한 육군사관학교가 입학시험에서 영어를 배제시켰으나, 그는 사관학교에서 전술한 바와 같이 계속 영영사전으로 영어만을 사용하는 수업을 진행시킨 것 등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모든 것을 정품(正品)으로 하는 것이 교육에서는 중요하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 당시 군사학을 우선으로 한시라도 빨리 가르쳐서, 실전에 도움이 되는 졸업생을 내보내는 것을 주장한 해군 요로(要路)의 사람들과 충돌한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세계정세의 판단이 정화갛고, 종전공작에 머리가 아프고, 일본의 패전이 가가운 것을 감안하고 패전 후에 일본의 부흥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납득이 간다. 투철한 판단력과 뛰어난 지혜를 가진 사람은 이러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쿠니 쿠니아키 지음, 박선술ㆍ세야마 미도리 번역, 이동건 엮음, 정구종 감수, 『소년 황족이 본 전쟁』, 고요아침, 2024, 131~133쪽.

2012년 6월 29일 금요일

포츠담선언과 일본의 항복에 대한 몇가지 가정

저는 역사에 if를 대입하는 것을 꺼립니다. 재미있는 일이긴 한데 진지하게 하지 못하면 그냥 무의미한 말장난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좀 의미있는 if를 제시하려면 상당한 공부가 필요하지요. 그래서 저는 재미있기는 합니다만 if를 최대한 피합니다.

하세가와 츠요시의 Racing the Enermy : Stalin, Truman, and the surrender of Japan은 포츠담선언 직전 부터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수락하기 까지의 과정을 추적하는 흥미로운 저작입니다. 본문의 내용도 상당히 재미있게 서술되어 있지만 가장 흥미로운 점은 결론부분에 제시한 여러가지의 if 시나리오입니다. 포츠담선언의 내용과 형식에서 소련의 대일참전과 원자폭탄 투하 등 여러가지의 변수들을 고려한 if 시나리오들을 검토하고 있는데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재미있는 것은 포츠담선언에 대한 if 시나리오 입니다. 저자는 포츠담선언에 관해서는 세가지의 가능성을 검토해보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미국이 포츠담선언문에 일본의 천황제 존속을 명시했을 경우이고 두 번째는 미국이 포츠담선언문에 무조건 항복을 명시하되 소련이 서명국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경우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미국이 포츠담선언문에 천황제 존속을 명시하면서 소련이 서명국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경우입니다. 저자는 이 세가지 경우에 대해 다음과 같은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미국이 포츠담선언문에 천황제 존속을 명시했을 경우입니다. 실제로 이것은 미국 상당수의 미국 외교관들과 군인들의 지지를 받은 안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이 경우에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제시합니다. 먼저 미국이 천황제 존속을 명시하더라도 일본 국내의 주전파들이 항복을 받아들이는 것은 가능성이 매우 낮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다만 천황제 존속이라는 조건 때문에 히로시마에 첫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경우 주전파가 급속히 힘을 잃고 일본이 항복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었을 것으로 파악합니다.
그 러나 이 시나리오는 미국의 대중여론은 물론 정책 결정권자인 트루먼이 무조건항복을 원했기 때문에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트루먼이 진주만 기습으로 인한 확실한 ‘복수’를 위해 무조건 항복을 선호했으며 결정적으로 원자폭탄을 실전에 사용하기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두 번째는 미국이 포츠담선언문에 무조건 항복을 명시하되 소련이 서명국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는 일본이 소련을 통해 미국과 교섭하려는 희망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지만 그래도 주전파로 인해서 원자폭탄이 투하될 때 까지 싸움을 계속할 것 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천황제의 존치문제 때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더라도 주전파가 논의를 주도할 가능성이 높으며 결국에는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소련의 참전은 불가피 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세 번째는 미국이 포츠담선언문에 천황제 존속을 명시하는 한편 소련도 서명국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경우입니다. 포츠담선언에 관한 if 시나리오 중 가장 재미있는 시나리오 입니다. 이 경우는 천황제를 유지하는게 가능한데다가 소련의 참전도 확실해 지기 때문에 주전파가 설자리가 없어진다는 변수가 있습니다. 저자는 주전파에서 육해군을 유지하는 것 같은 세부적인 조건을 제시할 수도 있겠지만 영향력은 미미하리라 봅니다. 물론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될 때 까지도 주전파를 압도하지 못할 가능성은 있으나 이 경우에는 일본의 항복이 앞당겨질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트루먼과 번즈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스탈린 또한 동아시아에서 이권을 획득하기 위해 참전을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현가능성이 가장 낮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저자는 이렇게 세가지 가능성을 제시하고 그것들이 왜 실제로는 실현되기 어려웠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if 시나리오를 제시하면서 이것을 통해 실제 역사가 왜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었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죠. 꽤 흥미로운 서술 방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