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히토의 조카인 쿠니 쿠니아키(久邇邦昭)의 회고록이 올해 한국어로 번역됐습니다. 먼저 일본어판을 읽어보신 분들이 제게도 한번 읽어보라고 추천하셔서 한국어판을 구입했습니다. 읽어보니 과연 일본의 황족 답게 흥미로운 일화들을 많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병학교(해군사관학교)에 재학 중 패전을 맞았습니다. 이 회고록에서는 해군병학교장이었던 이노우에 시게요시(井上成美) 제독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해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노우에 제독이 해군병학교장으로서 보여준 교육 철학을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노우에 제독이 해군병학교 교장 재직 중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영어교육 폐지를 비판하고 해군병학교의 영어교육은 유지했다는 일화는 매우 잘 알려져 있습니다. 쿠니 쿠니아키는 회고록에서 이노우에 제독이 황국사관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거리를 두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전쟁 당시 일본이 천황을 신성시 하며 미쳐돌아갔던 걸 생각하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인물 중 히로히토 다음으로 흥미롭습니다. 제가 흥미롭게 읽은 부분을 인용해 봅니다.
이노우에 교장은 쇼와 19년(1944년) 8월 5일에 해군 차관으로 전임되었기 때문에 2월 7일에 에다지마(江田島)에 도착한 나와는 정확하게 6개월 겹쳤다. 그 교육 정책은 적어도 나의 준비교육기간중의 마무리 반년 동안, 변함없이 계속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노우에 교장은 사관학교 생활의 추억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에다지마 생활을 전체적인 그림으로 보면, 왠지 귀족적인 향기가 있었다. 사관학교 생활에는 리듬과 조화, 그리고 시와 꿈도 있는 삶이었다."
우리 집에도 왠지 자유의 향기가 있었던 것처럼 생각하지만, 해군의 전통으로서 영국 해군의 영향도 있고, 신사정신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의 존중이라는 것이 저류로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노우에 교장은 스위스와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의 각 대사관에 있는 동안 유럽 사람들의 기질 등에 대해 연구하고, 제1차 세계대전때, 영국 상류계급의 사람들이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는지를 듣게 되어 공감하고, 이런 정신을 사관학교 교육정책에 명확하게 반영하였다.
교장은 "사관이라는 것은 무엇을 어느 정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사관에게 자유재량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황이 어려울 무렵에 일부 영어 폐지론이나 군사학 우선 강경론이 있는 가운데, 가능한 철저한 보통학(일반교양) 교육을 주장한 것도 이런 생각에서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관이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좌우로 편광(偏光)하지 않는 전통적인 학문을 먼저 학생들에게 주지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당시 극구 칭찬을 받고 있었던 황국사관(皇國史觀)의 중심인물이었던 도쿄 대학 히라이즈미 키요시(平泉澄) 교수를 해군성 교육국이 학생교육을 위해서라고 칭하여, 종종 보내오는 것에 대하여, 막무가내로 강연을 학생들에게는 들려주지 않고, 교관에게만 듣게 했다. 편향된 부분은 학생들에게 전달하지 않도록 지시했다. 또한 육군사관학교가 입학시험에서 영어를 배제시켰으나, 그는 사관학교에서 전술한 바와 같이 계속 영영사전으로 영어만을 사용하는 수업을 진행시킨 것 등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모든 것을 정품(正品)으로 하는 것이 교육에서는 중요하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 당시 군사학을 우선으로 한시라도 빨리 가르쳐서, 실전에 도움이 되는 졸업생을 내보내는 것을 주장한 해군 요로(要路)의 사람들과 충돌한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세계정세의 판단이 정화갛고, 종전공작에 머리가 아프고, 일본의 패전이 가가운 것을 감안하고 패전 후에 일본의 부흥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납득이 간다. 투철한 판단력과 뛰어난 지혜를 가진 사람은 이러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쿠니 쿠니아키 지음, 박선술ㆍ세야마 미도리 번역, 이동건 엮음, 정구종 감수, 『소년 황족이 본 전쟁』, 고요아침, 2024, 131~133쪽.
그건 매우 유명한 일화인데 히라이즈미 키요시가 하던 짓을 봐서는 상당히 신빙성이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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