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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13일 화요일

"제프" 디트리히와 미국 정신과의사의 면담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당시 피고인들의 정신상담을 담당했던 미국 정신과의사 리언 골든슨Leon Goldensohn의 면담록을 읽는 중 입니다. 나치 독일의 굵직한 거물들이 나오니 재미있게 술술 잘 읽히는군요. 오늘은 “제프” 디트리히Josef Sepp Dietrich를 면담한 부분을 읽었는데 이것도 역시나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 하나를 발췌해 보지요. 1946년 2월 28일에 있었던 면담이라고 합니다.

골든슨 : 히틀러가 1940년 이전에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합니까?

디트리히 : 물론이오. 전쟁을 일으켰잖소. 전쟁에 진 패자는 한심해 보이는 법이지. 독일의 외교는 형편 없었소.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 부터 말이오.

골든슨 : 무슨 이야기입니까?

디트리히 : 지도를 한번 펼쳐봐요. 독일이 어디에 붙어 있습니까? 독일을 둘러싼 나라들을 한번 봅시다. 그리고 독일의 적국과 우방국을 찾아 보시오. 그러면 내가 하는 말이 무슨 소린지 알 게요.

Leon Goldensohn(Author), Robert Gellately(Editor), Nuremberg Interviews : An american psychiatrist’s conversations with the defendants and witnesses, (Vintage Books, 2004), p.283

양면전쟁을 두 번이나 경험한 군인다운 평가입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재미있는 또 다른 요소는 여러 인물들의 주관적인 인물평입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인물평이니 여러가지로 생각해 볼게 많습니다. 골든슨은 디트리히에게 롬멜에 대해 물어봅니다. 디트리히는 롬멜에 대해 꽤 냉정한 평가를 내립니다.

디트리히 : 롬멜 원수는 나와 대략 비슷한 연배였소. 기갑전에 능통한 장군이라고 하기는 조금 그랬지.

골든슨 : 롬멜 원수가 유능한 기갑부대 지휘관이 아니란 겁니까?

디트리히 : 평범한 수준이었소.

(디트리히는 롬멜에 대해 매우 냉정했다.)

디트리히 : 병과를 바꾸는건 어려운 일이오. 롬멜 원수는 보병전에 능통한 장군이라고 해야겠지. 롬멜 원수는 침착하지 못한 성격이라서 모든 것을 한번에 해치우길 원했소. 그리고 나면 흥미를 잃어버렸지. 나는 노르망디에서 그의 부하였소. 롬멜 원수가 좋은 장군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지. 성공을 거두면 괜찮았지만 상황이 역전되면 침울해 졌소.

Leon Goldensohn(Author), Robert Gellately(Editor), ibid., p.280

디트리히는 면담에서 자신이 카톨릭 신도임을 강조하면서 나치즘에 경도된 인물은 아니었다고 자신을 변호합니다. 이러한 자기 변론은 전후 서독에 거주한 무장친위대 출신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논조라 꽤 재미있습니다.  몇년전 포스팅 했던 “기이한 도덕적 먹이사슬”에 인용한 글 처럼 나치당의 사조직이 아니라 독일군의 일원이었음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2007년 1월 12일 금요일

뭔가 구린 보고서 - "히틀러 보고서"의 쿠르스크 전투 부분

스탈린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스탈린에게 올라가는 보고서는 베리야, 또는 그 아래 단계에서 상당히 손을 많이 본다는 것 입니다. 왜냐? 다 아시겠지만 우리의 강철의 지도자 동무의 심보가 뒤틀리면 피보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1949년에 작성돼 스탈린에게 제출된 “히틀러 보고서”의 영어판을 읽어 보게 됐습니다. 이것 역시 스탈린 동무에게 올라 가는 것이라 그런지 뭔가 구린 냄새가 곳곳에서 나더군요.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부분입니다.

1943년 6월, 히틀러는 쿠르스크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서 오버살츠베르크에서 동 프로이센의 “늑대굴”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무렵 터키군 총참모부의 사절단이 방문했다. 터키 사절단은 독일 국방군 총사령부의 초청을 받아 독일을 방문했다. 독일측은 동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터키 사절단에게 쿠르스크 공세를 위해 하리코프-벨고로드 지구에 집결한 독일 기갑부대의 기동훈련을 참관하도록 했다. 터키 사절단은 이 기동훈련을 참관한 뒤 늑대굴로 돌아와 히틀러를 접견했다. 터키 사절단은 히틀러와 다과를 하기에 앞서 카이텔, 요들과 함께 많은 대화를 나눴다. 터키 사절단은 히틀러를 접견한 뒤 독일 국방군 총사령부의 초대를 받아 프랑스를 방문했다. 히틀러는 터키 사절단과 대화를 나눈 뒤 매우 즐거워했다.

“터키인들은 믿을 수 있을 거야. 하리코프에서 우리 기갑사단의 기동을 참관한게 저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 같아.”

터키 사절단은 프랑스에 도착해 서부전구 총사령관 룬트슈테트 원수의 환대를 받았다. 히틀러는 룬트슈테트에게 터키 사절단이 동부 전선의 기갑사단들로부터 받은 깊은 인상을 활용할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대서양 방벽에서 가장 방어 준비가 잘 갖춰진 지역만 보여주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터키 사절단은 Cap Gris Nez에 있는 해안포대 “프리츠 토트”를 방문했다. 터키 사절단은 노획한 야포로 만든 해안 포대는 볼 수 없었다.

1943년 7월 5일, 벨고로드-쿠르스크-오룔 지구에서 공세가 개시됐다. 공세 첫날 히틀러는 그의 부관들에게 자이츨러로부터 전황 보고가 안 들어왔는지 확인하도록 닥달했다. 그날 오후 12시 30분, 자이츨러는 직접 보고를 하기 위해 히틀러를 찿았다. 히틀러는 자이츨러에게 흥분된 어조로 물었다.

“자이츨러. 쿠르스크의 전황은 어떤가?”

자이츨러는 전황에 대해서 모호한 어투로 얼버무렸다. 자이츨러는 현재 전황이 단편적으로 들어와 있다고 대답했다. 러시아군이 매우 완강히 저항하고 있다는 것 이었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덧 붙였다.

“기습의 효과는 전혀 없었습니다.”

히틀러는 자제력을 잃었다.

“페르디난트! 페르디난트 부대를 당장 투입하란 말이다!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전선을 돌파해야 한다!”

7월 6일, 자이츨러는 보병과 공병들이 러시아군의 방어선을 여전히 돌파하지 못했으며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그 뒤 기갑부대가 투입됐다. 히틀러는 격분했다. 히틀러는 기갑사단들을 예비대로 두고 피해가 어떻든 간에 보병과 공병 부대가 소련군의 방어선을 완전히 뚫기 전 까지는 투입하지 말 것을 명령했었다. 예비대 투입은 돌파구가 열린 다음에 할 계획이었다. 히틀러는 거듭해서 집중적인 타격을 입혀야 한다고 말했다. 이때 히틀러는 마치 열병을 앓는 사람 처럼 보였다. 히틀러는 매 시간 마다 자이츨러에게 러시아군의 방어선이 얼마나 뚫렸는지, 그리고 그의 히틀러 사단이 얼마나 진격했는지 등을 물어봤다.

그리고 며칠 되지 않아 자이츨러는 공세가 완전히 돈좌됐다고 보고했다. 독일군은 방어로 돌아섰고 일부 지구에서는 소련군이 공세를 시작했다. 페르디난트와 티거 전차는 방어진지에 배치된 대전차포와 T-34에 연달아 격파됐다. 히틀러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을 거부했다. 히틀러는 주먹으로 탁자를 치며 소리쳤다.

“이건 다 내 명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야!”

귄세는 히틀러의 명령을 받고 아돌프 히틀러 사단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출발했다. 귄세는 벨고로드에서 히틀러 사단 지휘관인 제프 디트리히를 만났다. 귄세는 착륙하기 전에 하늘에서 소련군의 강력한 방어선과 곳곳에 널려있는 독일 전차와 자주포의 잔해를 볼 수 있었다. 디트리히는 귄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진격 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10km였네. 하지만 피해가 너무 엄청났어. 작전을 시작할 때 내 사단은 150대의 전차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전투에 투입 가능한 게 20대도 되지 않네. 보병의 손실도 매우 큰 상태야. 다른 사단들의 상황도 이보다 나을게 없어. 러시아군의 방어선이 얼마나 종심 깊게 구축됐는지 아는가? 동 프로이센에 돌아가서 말로 보고하는건 쉽겠지. 그러나 여기서는 다르다네. 우리는 돌파를 하지 못했어.”

다음날 저녁 귄세는 동 프로이센으로 돌아갔다. 귄세가 보고를 위해 히틀러를 방문하자 히틀러는 피곤하다는 제스쳐를 취하며 말했다.

“잊어 버리게. 나도 알아. 디트리히 조차 실패했군. 나는 이번 공세로 전세를 완전히 뒤집으려고 했어. 러시아군이 이렇게 강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군.”

Ed. Henrik Eberle and Matthias Uhl, The Hitler Book, p.117~119

이미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연구를 많이 접하신 분들은 어떤 부분이 문제인지 잘 아실 것 입니다.

먼저 디트리히의 이야기를 보시죠.

“내가 진격 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10km였네. 하지만 피해가 너무 엄청났어. 작전을 시작할 때 내 사단은 150대의 전차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전투에 투입 가능한 게 20대도 되지 않네. 보병의 손실도 매우 큰 상태야. 다른 사단들의 상황도 이보다 나을게 없어. 러시아군의 방어선이 얼마나 종심 깊게 구축됐는지 아는가? 동 프로이센에 돌아가서 말로 보고하는건 쉽겠지. 그러나 여기서는 다르다네. 우리는 돌파를 하지 못했어.”


이제는 잘 알려져 있지만 SS 2기갑군단은 그다지 큰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쿠르스크 전투 기간 중이나 그 이후에도 전투 투입 가능한 전차가 20대 이하로 떨어진 사단은 없었지요.

그리고 그 다음. 히틀러의 이야기를 보시죠.

“잊어 버리게. 나도 알아. 디트리히 조차 실패했군. 나는 이번 공세로 전세를 완전히 뒤집으려고 했어. 러시아군이 이렇게 강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군.”


독일측이 쿠르스크 전투를 통해 일거에 전세의 역전을 노렸다는 것은 전형적인 소련의 해석입니다. 소련은 1970년대 까지도 독일군은 쿠르스크의 돌출부를 분쇄한 뒤 모스크바로 총 공세를 가할 계획이었다고 제멋대로 역사를 서술했습니다. 독일측의 의도는 쿠르스크 돌출부를 분쇄해 소련군의 주력 기동부대를 섬멸하고 전선을 단축해 방어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 이었지 더 큰 도박판에 올인 하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보고서는 주로 귄세 등 히틀러의 측근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 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증언 자체의 신뢰도는 둘째 치고 내용 자체에 구린 구석이 많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스탈린의 입맛에 맞춰 주기 위해 많은 부분에 손을 댄 것 같습니다. 신뢰도가 매우 떨어지는 구술 자료집이라고 판단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