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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4일 일요일

[번역글] 전차는 1918년에 영국군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을까?



불법날림번역 한 편 나갑니다. 원래 전차 등장 100주년을 맞아 기념 포스팅(?)을 하나 하려다가 정신이 없어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그냥 넘어가기는 찝찝해서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었던 논문 한편을 번역해 봅니다. 이 논문은 좀 오래된 논문인데, 1992년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27-3에 실린 팀 트래버스Tim Travers의 “Could the Tanks of 1918 Have Been War-Winners for the British Expeditionary Force?”입니다. 이 글은 1차대전 당시 전차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하는 전통적인 시각의 연구입니다. 전차 등장 100주년에 알맞은 글이 아닐까 싶네요. 이 글에서는 영국원정군 사령부가 전차 운용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상반되는 견해도 존재합니다. 관련된 글도 나중에 소개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 영국쪽 직제의 번역어는 마땅한게 생각나지 않아서 임시로 붙인게 많습니다. 적합한 번역어가 있으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번역어에 대한 조언 환영합니다.



전차는 1918년에 영국군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을까?

팀 트래버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차에 관해서는 다양한 평가와 주장이 있다. 가장 먼저 윌리엄스-엘리스Clough Williams-Ellis 소령, 풀러J. F. C. Fuller 소장, 리델 하트B. H. Liddell-Hart소령 등의 전차 옹호자들이 집필한 영국원정군 전차군단Tank Corps의 공간사에서는 전차를 제병협동전투의 한 요소였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전차야 말로 1918년의 승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혁명적인 무기체계였다는 주장을 견지했다. 하지만 그 뒤 영국 기갑병과에서는 1918년 당시의 전차에 약점이 많았고, 기계적인 신뢰성도 낮았으며, 손실율이 높았다는 점을 들어 비판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러한 비판적인 평가 중 하나로는 군사사가 존 터레인John Terraine의 주장이 있다. 그는  “1918년 당시의 전차는 기계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그것을 운용했던 인간의 관점에서 볼때 결코 승리를 가져다 준 무기가 아니었다.”라고 잘라말했다. 비드웰Bidwell과 그레이엄Graham은 터레인 보다는 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들은 전차를 보병과의 적절한 협동을 통해 운용했을때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당시 전차의 신뢰성이 부족했다는 점이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1)
 만약 전차를 올바르게 운용했고, 대량으로 투입할 수 있었다면 전차가 ‘승리의 무기’는 못 됐더라도 최소한 1918년 전역에서 보다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 하려면 밀접하게 연관된 두 가지의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첫 번째는, 1918년 당시 일련의 연속적인 공세작전을 펼칠 수 있을 만큼 많은 수의 전차를 확보해서 기계화 전략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핵심 무기체계로 사용할 수 있었는가 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1918년 전역에서 전차를 보다 효율적인 방식으로 운용했다면 더 큰 성과를 거두고 실제 역사와는 달리 막대한 손실도 없었을 것인가 이다. 만약 그렇다면 충분한 준비와 병과간 협동이 이루어진 주요 공세작전에서 전차를 보다 많이 운용했을 것이며, 공세에 투입할 수 있는 전차의 숫자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투입가능한 전차의 숫자에 대한 첫번째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기 전에, 1917년 말 부터 1918년 중반까지 영국 육군과 육군최고회의Army Council, 영국 전시 내각에서 ‘기계화 전쟁’이라고 불리게 될 전쟁 방식을 지지하는 집단과 전통적인 전쟁 방식을 지지하는 집단 간에 중요한 논쟁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 논쟁은 인력 부족 문제로 인해 시작되었는데, 캉브레Cambrai, 아멜Hamel, 아미앵Amiens 등의 성공적인 제병협동 공세로 인해 기계화 전쟁의 지지자들이 논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2)
기계화 전쟁의 지지자들은 기계화된 수단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며, 전차ㆍ항공기ㆍ기관총ㆍ박격포ㆍ화학무기와 포병에 중점을 두고 보병은  공격이나 방어시 이를 지원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전통적인 전쟁 방식의 지지자들은 보병(인력)을 중점에 두고 포병, 그리고 전차와 항공기 같은 기계들은 보병의 전진을 지원하는 보조적인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 육군은 이 두가지 주장으로 양분되지는 않았다. 많은 장교들이 두 주장 사이의 중간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 논쟁은 전쟁에 대한 태도와 관점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주장은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영국원정군 사령관 더글라스 헤이그Douglas Haig 장군은 전통적인 관점을 지지하고 있었다. 반면 군수장관 윈스턴 처칠, 전차 및 기관총 병과의 장교 대부분, 병기감Master General of the Ordnance 윌리엄 퍼즈Sir William Furse 장군, 총참모장CIGS 헨리 윌슨Henry Wilson 장군, 부참모장DCIGS 팀 해링턴Tim Harington 장군을 비롯한 집단은 기계화 전쟁을 지지했는데 기계화의 수준에 대한 입장은 상이했다.3)
기계화의 수준이 다양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중 하나는 퍼즈 장군의 입장이다. 퍼즈 장군은 공세시 보병을 대규모로 집중하는 것에 반대하고 그 대신 전차와 연막탄, 포병 활용을 늘리고 보병은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국 제1군 사령관 혼Lord Horne 장군은 1918년 6월에 다음과 같이 썼다.

“병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기계화 장비를 늘려 대응해야만 한다. 나는 이것을 기계력machine-power이라고 정의한다. 기계력이란 포병, 기관총, 자동소총, 전차를 비롯해  보병을 지원하여 적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포함한다.”

영국 제1군의 기관총 참모Machine Gun Advisor 린제이Lindsay 중령도 기계화를 지지하는 인물이었는데 그는 1918년 7월에 다음과 같이 썼다.

“미래의 공격 작전에서는 항공기, 전차와 같은 기계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며 자동화기와 박격포를 주무장으로 한 병력과 함께 작전을 펼칠 것이다.”4)

이 글에서는 해당 논쟁을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 논쟁이 특히 헤이그 장군과 영국원정군사령부 단위에서 전차를 평가하고 운용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제 전차의 숫자라는 첫번째 질문으로 돌아가자. 1918년 8월 8일 부터 12일에 걸쳐 진행된 아미앵의 보전포 협동 공세 이후 비슷한 규모의 공세를 계속할 만큼의 전차가 부족했다는 통념이 있다. 이러한 통념은 아미앵 공세 당시의 전차 손실 통계로 인해 생겨났는데, 통계를 오독한 결과였다. 여러 역사가 중, 존 터레인은 그의 저서 To Win a War에서 아미앵 공세가 끝난 1918년 8월 12일 당시 가동 가능한 전차는 단 여섯대만 남아있었으며, “독일 제국을 전차 여섯대로 무너트릴  수는 없은 것 이었다.”고 평했다. 마찬가지로 비드웰과 그레이엄도 아미앵 공세당시 414대의 전차가 투입됐으나 “공세 이틀째에는 185대로 줄어들었고, 사흘째에는 85대, 나흘째에는 38대,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6대로 줄어들었다.”고 서술했다. 이 통계는 영국육군 공간사Official History에서 인용한 것이기 때문에 정확할 것이다.5)
아미앵 공세에서 전차 손실이 많았다는 점은 확실하다. 당시에 작성된 영국육군 전차군단의 기록에도 유사한 통계가 나타난다. 영국육군 전차군단이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8월 8일 공세 시작당시에는 425대의 전차가 있었으나 8월 9일에는 145대로 줄어들었고, 8월 10일에는 74대, 8월 11일에는 39대만이 남아있었다. 이것은 8월 11일까지 386대의 전차가 손실처리되었다는 의미이다.(425대 중 39대 만이 남았으므로) 하지만 이 기록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수치는 해당 날자가 시작했을때 투입할 수 있었던 전차의 숫자를 집계한 것이지, 가동가능한 전차를 모두 집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풀러에 따르면 8월 8일 저녁 당시 전차 승무원들의 상태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장거리를 진격한 끝에, 그리고 하루 종일 격렬한 전투를 치른 탓에 극도로 피로한 상태였다.(가장 많이 진격한 곳에서는 7.5마일을 진격했다.) 이때문에 다음날의 작전을 위해 혼성중대를 편성하기 위해서라도 휴식이 필요했다. 예비 전차는 몇대 없는 상태였다….”

이 글에 따르면 문제는 실제 전차 손실 보다는 예비 전차가 부족했던데 있었다. 아미앵 공세의 마지막 날이었던 8월 12일에 전차군단 본부가 작전을 중단한 이유는 전차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령관GOC, General Officer Commanding 휴 엘리스Hugh Elles 소장이 전장의 지형을 공세에 부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아미앵 공세의 마지막날 영국군은 과거 솜 전투가 있었던 지역에 도착했다.) 그래서 제10전차대대만 제3군단을 지원해 계속 작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1918년 8월 17일 전쟁성War Office이 군수산업부Ministry of Munitions에 보낸 서신을 보면 “아미앵 방면의 작전에서 포병 사격에 의해 상실된 전차는 120대에 달한다.”는 내용이 있다. 즉 실제로 여러가지 원인으로 가동불능이 된 전차가 많기는 해도 독일군에 의해 격파된 전차는 425대 중 120대 정도에 불과했다는 뜻이다.6)
이 통계는 실제로 전투 손실 처리된 전차가 통념에 비해 훨씬 적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 통계를 뒷받침 해 줄 자료가 더 있다. 이 자료들에 따르면 아미앵 공세가 끝나고 5일이 지난 뒤인 1918년 8월 17일 당시의 전차 통계를 알 수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의 영국원정군이 1918년 8월 17일 당시 보유한 가동 가능한 전차의 숫자는 다음과 같았다. 마크V(병력 수송형) 122대, 마크V 중전차 242대, 마크IV 중전차 250대, 중형전차A 휘펫 124대, 야포 견인용 전차 29대, 수송용 전차Tank Tender 175대, 르노 경전차 10대, 장갑차 16대 등 총 968대의 기갑차량이 있었다.
이 통계에는 전장에서 회수해 수리중인 것은 빠져있다. 당시 마크V 중전차 153대가 수리중이었다. 그런데 이 문서에서는 별도로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영국군이 보유한 968대의 기갑차량 중에는 당시 프랑스의 훈련소에 배치되어 훈련용으로 사용되던 차량도 포함되어 있다.7) 그렇다면 5일간의 아미앵 공세에서 가동 가능한 전차 중 많은 수가 상실되었다는 주장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실제로는 격파됐다고 간주된 전차 중 많은 수가 경미한 수준의 손상, 일시적인 전열 이탈, 혹은 기계적 고장, 연료 부족, 또는 정비를 위해 후방으로 이동 했거나 승무원의 피로로 인해 작전 수행이 불가능해 진 것을 포함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승무원의 피로가 누적되어 작전 수행이 어려워 진 것이 가장 큰 문제였을 것이다. 전차 승무원들은 보통 하루 평균 여덟시간 이상의 작전을 버틸 수 없었다. 기계적 고장이나 전차 승무원의 피로와 같은 문제들은 대부분 단기간 내에 극복할 수 있는 것이었다.8)
즉 아미앵 전투 당시 다수의 전차와 전차 승무원은 일시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없는 상태였던 것이며, 단기간 내에 전열에 복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완전히 전투 불능이 되어 후방의 대규모 정비소에서 수리를 받아야 했던 차량은 386대가 아니라 200대 정도였을 것이다. 아미앵 공세 당시 전차군단이 대규모의 전차로 공세를 계속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원인은 예비 전차와 예비 승무원의 부족이었다. 전차 숫자를 추정할 수 있는 다른 요소는 심각한 손상을 입은 전차를 수리하는 속도이다. 영국군의 전차 정비 기간을 알 수 있는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1918년에는 정비에 소요되는 시간이 단축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8년 8월 하순에는 일주일에 수리되는 전차가 18대 정도였고 9월 초에는 20~30대 수준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10월 하순에는 일주일에 정비되는 마크V 중전차의 숫자가 33~35대 수준으로 늘어났다.9) 아미앵 공세와 그 직후에 전차군단의 가용 전력이 회복된 데는 전차 정비의 효율이 높아진 것이 부분적으로는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지만 큰 손상을 입은 전차를 수리한 것이 가용가능한 전차의 숫자에 큰 영향을 끼칠 수준은 아니었다. 아미앵 공세 이후 가용 가능한 전차의 숫자가 전차 생산량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18년 6월까지 400대의 마크V 중전차가 생산될 예정이었고, 동시에 마크IV 전차의 생산이 중단되면서 마크VIII 전차와 중형C 전차의 생산이 개시될 계획이었다. 하지만 군수산업부의 통계에 따르면 1918년 7월까지 생산된 전차는 129대에 불과했으며, 8월에는 81대가 생산되는데 그쳤다. 프랑스의 전장에 보급된 전차의 숫자는 1918년 9월 첫째주에 총 34대에 불과했으며, 10월에 배치된 숫자도 평균적으로 이 수준에 머물렀다.10)  다양한 생산차종과 영국의 노동력 및 생산 문제로 인한 전차 생산 부족은 전선에 배치된 전차의 숫자를 늘리는데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대규모 전투 직후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전차를 회수하는 것 때문에 일시적으로 가용가능한 전차의 숫자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전차의 높은 내구성과 전차 승무원들의 빠른 회복, 그리고 경미한 손상을 입은 전차를 신속하게 수리해 투입할 수 있는 능력 덕분에 전선에 배치된 전차의 숫자는 비교적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전차의 내구성은 전차를 완전히 파괴하고 승무원을 살상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는 점과 연관되어 있다.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된 전차는 극소수였다. 1918년 8월 8일에서 11월의 종전시까지 전투에 투입된 1,993대의 전차와 장갑차 중에서 손상을 입거나 참호에 빠져 회수된 것은 총 887대였다. 그러나 윌리엄스-엘리스와 풀러의 저작에 따르면 이중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을 입은 것은 15대에 불과했으며 완전 손실로 처리된 비율은 0.75%라는 극히 낮은 수준이었다. 비록 기록으로 남지는 않았으나, 전차군단 사령관이었던 엘리스 소장에 따르면 실제로는 이보다 약간 높은 손실율을 예측했다고 한다. 1918년 9월 5일, 엘리스는 8월 8일 부터 투입한 1,173대의 전차와 장갑차 중에서 30~40대 가량의 완전 손실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이것은 완전손실율이 2.5~3.4%라는 뜻이었다. 1918년 10월 말 엘리스는 실제로 완전 손실로 처리된 전차가 50대 정도로 완전손실율이 2.5%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어떤 통계를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더라도 손상을 입거나 참호에 빠진 전차와 장갑차는 대부분 수리를 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미한 손상은 승무원들이 직접 수리할 수 있었고 그렇지 않다면 회수하여 수리할 수 있었다. 영국군은 계속해서 진격했기 때문에 전장에 남은 전차들을 대부분 회수하는 것이 가능했다. 회수된 전차 중에서 수리할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된 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또한 1918년 10월 12일 전차군단의 기록을 보면 8월 8일 부터 전투에 투입되어 손상을 입거나 참호에 빠진 전차들은 사실상 모두 회수되었다.11)
전차와 전차 승무원들이 쉴새 없이 전투에 투입됐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배치된 가용가능한 전차의 숫자는 높은 수준을 꾸준히 유지했다. 일반적으로 전쟁 말기에는 영국원정군에 가용가능한 전차가 격감했을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마크IV, 마크V, 마크V*와 중형A 전차를 모두 합쳐서, 10일간의 격전에도 불구하고 8월 30일에는 261대(마크V 127대 포함), 9월 7일에는 177대(마크V 85대 포함), 10월 15일에는 357대(마크V 125대 포함), 10월 19일에는 317대(마크V 134대 포함), 11월 9일에는 235대(마크V 98대 포함)의 전차가 가용가능한 상태였다.  이것은 훈련소에 배치된 전차와 수리중인 전차는 제외한 통계다.12) 또한 이 통계로는 고질적으로 부족했던 예비부품 문제를 파악할 수 없다. 더 많은 예비부품이 있었다면 가용가능한 전차의 숫자는 더 많아졌을 것이다. 부품부족이 초래된 것은 기계화전투 보급국MWSD, Mechanical Warfare Supply Department의 앨버트 스턴Albert Stern대령의 책임이었는데, 그는 예비부품을 충분하게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차의 숫자만 늘리려 했다. 새로 생산된 전차 한대와 이에 필요한 완전한 예비 부품의 비율은 1대 3이 되는 것이 이상적이었다. 하지만 1918년 10월까지도 이 비율을 맞추지 못했다. 1917년에 추산한 바에 따르면 마크IV 전차 한대가 하루에 3마일씩 이동할 경우 14일간의 작전에 필요한 예비 부품은 20톤에 달했고, 한달간 작전할 경우에는 50톤이 필요했다. 그 결과 1916년 말 부터 1918년 말 까지 프랑스의 영국 전차군단과 기계화전투 보급국 간에는 ‘예비 부품을 확보하기 위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차군단의 전차 수리 능력은 실제로 필요한 수준에 미치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용가능한 전차의 숫자는 많은 편이었다.13)
전차의 내구성과 관련해서, 전차 자체가 생산되어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완전손실로 처리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전차 승무원은 어땠는가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전차 승무원도 대부분의 피격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918년 8월 23일의 전투에서, 한 지역에 투입된 전차 중 8대가 피격됐으나 인명 손실은 경상 1명에 그쳤다. 물론 피격된 전차가 ‘단기간 가동 불능’ 상태에 빠지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전차군단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부대였으며 이때문에 전차 승무원들은 쉴새없이 전투에 투입될 수 밖에 없었다. 이때문에 1918년 8월에는 장교의 사상율이 27.5%, 부사관과 사병의 사상율이 20.56%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것을 실제 사상자 숫자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아미앵 공세당시 전차군단의 사상자 숫자는 700여명에 불과했다. 사상율을 계산하는데는 부상, 전사, 포로가 된 인원 뿐만 아니라 일시적인 탈진, 그리고 전차의 부실한 환기로 인한 일산화탄소 중독 및 체온 상승으로 인한 손실까지 집계했다. 마찬가지로 마크V* 전차에 탑승한 보병들도 전차 내부의 과열로 인해 피해를 입었는데, 당시 전차 내부의 온도는 습구온도계 기준으로 화씨 86도에 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것은 인간이 체온 조절 능력을 상실하는 것 보다 겨우 3도 낮은 수준이었다.14)  아미앵 공세당시 전차 승무원의 사상율은 낮은 편이었지만, 만약 8월 8일 이후의 공세에서 더 많은 포병 지원을 받으면서 충분한 예비대와 함께 대규모로 작전을 펼칠수 있었다면 훨씬 더 낮아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의 서두에서 제기한 두 번째 문제로 넘어가도록 하자. 과연 1918년 당시 전차를 보다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을까?

영국원정군이 전차를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랬더라면 1918년의 전역에서 전차는 더욱 더 결정적인 병기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이유가 몇가지 있다. 전차가 보다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 첫 번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헤이그 장군과 영국원정군 사령부의 부정적인 태도에 있었다. 풀러가 지적한 것 처럼 비판의 대상은 전차 자체가 아니라 전차군단이 전차를 다루는 태도였다. 이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기계화 전쟁 방식과 전통적인 전쟁 방식을 두고 전개된 논쟁에서 헤이그 장군과 영국원정군 사령부가 취한 입장과는 별개로,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다. 전차군단은 자체적인 장성급 사령관과 참모부 조직을 갖추고 전차군단의 작전, 훈련, 정보 및 행정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전차 운용 교리와 개념을 독자적으로 개발하고 있었다. 1918년 6월, 전차군단 감찰감Director-General of the Tank Corps 캐퍼John. E. Capper 소장은 이 구조적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다른 모든 특수한 조직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상황은 전차에 관해 이렇다 할 경험이 없는 고급 지휘관들과 총참모부가 전차와 전차의 운용에 대해 제대로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 총참모부가 다른 병종과 동일하게 전차의 운용과 한계에 대해 연구하지 않는한 전차의 대규모 운용을 통해 실질적인 성공을 거두기란 어렵다.”

캐퍼 소장은 영국원정군 사령부 참모부가 전차를 병기로서 연구하고 이해하려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으며, 육군본부 참모부와 다른 고위 장성들도 전차에 대해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차군단 사령관도 포병과 마찬가지로 영국원정군 사령부에 병과 참모로 참여해야 하며, 육군본부 내에도 포병과 마찬가지로 전차병단Tank Group을 두고 고급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기갑전술학교를 세울 것을 제안했다. 엘리스 소장도 이 견해야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그동안의 가장 큰 과오는 총참모부가 전차에 관해서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으며, 이것이 육군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이때문에 각 야전군은 위로 부터 어떠한 지침도 받을 수 없었으며 받은 것은 기껏해야 제안 수준에 불과했다.”15)
이러한 조직 구조는 최종적으로 전차군단이 전장에서 필요로 한 것들이 대부분 묵살되도록 만들었다. 한 소령은 아미앵 공세와 같은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기 전에 예비 차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충분한 전차를 보급받아, 전차와 승무원을 교체해 가면서 효율성을 잃지 않고 공세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할 수 없었던 점을 지적했다. 1918년 10월, 풀러는 100%의 예비 차량이 없으면 ‘전차 부대의 전투 효율성은 전투 개시 72시간 내에 격감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풀러의 주장은 아미앵 고에 당시 가용 가능한 전차의 숫자가 격감했던 사실에서 도출한 것이었다. 비록 손실 원인의 대다수는 적의 공격 이외의 것이었지만, 리델 하트는 전차의 손실로 인해 투입 가능한 전차의 숫자가 감소했음을 지적했다. 그러므로 100%의 예비 차량을 갖추고 전차가 대규모로 공격에 투입된다면 다른 모든 요인들이 동일할 경우 전차가 큰 우위를 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충분한 예비 차량을 확보할 수 없었던 원인 중 하나는 전차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데 있었고, 또 하나는 영국원정군 사령부의 무관심 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전차의 숫자가 부족했던데 있었다. 영국육군의 공간사 저자 중 한명이었던 제임스 에드몬즈James Edmonds 준장은 전차의 부족을 초래한 원인이 전차를 소규모로 무분별하고 비효율적으로 분산 운용한데 있었다고 서술했다. 그는 이렇게 지적했다. “(아미앵 공세 이후) 공세작전에 전차를 집중적으로 투입하지 못하고, 심지어 그러한 계획조차 수립하지 못한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만약 공세 마다 충분한 숫자의 전차를 확보하고 충분한 예비 차량을 마련하는 한편, 초기 돌파를 달성한 뒤인 공세 2~3일 차에는 전차 부대를 후방으로 돌리는 등의 적절한 전술을 사용했다면 전차는 1918년의 전역에서 훨씬 큰 활약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16)

전술은 전차군단에 있어서 또 하나의 큰 문제였다. 전차는 아군 포병의 지원이 없을 경우 독일군의 포병 사격에 취약했으며, 보병의 근접지원, 연막이나 안개, 또는 여명의 보호 아래 움직여야 했으며, 기습적인 운용도 필요했다. 전차를 지원하기 위한 연막 및 포병 사격 훈련, 보병과의 사전 훈련(특히 오스트레일리아 군단이 전차와의 협동 작전에 탁월했다.) 강화, 항공기 정찰 및 적의 대전차 화점에 대한 공습 등이 실시됐다. 그러나 영국원정군 사령부와 고급 참모들은 전차를 단지 지원 수단으로 간주하고, 보병과 포병을 중시했기 때문에 전차군단의 요구 사항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이로인해 전차 부대는 필요이상으로 손실을 입었다. 예를들어 아미앵 전투 당시 제5전차여단은 공세 이틀째인 8월 9일에는 포병이 적절한 지원 사격을 해 주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제5전차여단의 보고에 따르면 이날 여명에 맞춰 연막의 보호를 받으며 공격을 시작했지만 해가 뜬 뒤에는 ‘포탄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 포병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고 공격에 나서야 했다. 이때문에 아미앵 공세가 진행되면서 전차에 대한 지원 체계는 무너지고 양적으로도 감소했다. 8월 11일 한 캐나다 여단 지휘관은 파르빌리에Parvillers 외곽에서 15대의 전차가(실제로는 16대 중 12대였다.) 단 1문, 혹은 1개 대전차포대에 의해 격파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보고를 했다. “이것은 극히 곤란한 상황에서 전차가 연달아 격파됐으며 보병의 지원을 받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엄청난 일 이지만 이걸 전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즉 전차 부대는 아무런 지원도 없이 소모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8월 21일 이후 독일군의 대전차 방어는 강화되었고, 전차 부대는 소규모의 취약한 집단으로 운용되기 시작하면서 역량 이상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러한 사례 중 하나는 전차군단의 고위 참모 장교 한명의 회고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8월 25일에 있었던 제9전차대대의 작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날 야간에 10대의 전차가 이동을 시작했다. 이 부대는 다음날 여명에 캐나다 제2보병사단과 함께 작전을 수행할 예정이었다. 전차병들은 피로한 상태였으며 정찰을 실시할 시간도 부족했고 보병과의 연락 체계도 없었기 때문에 만약 다음날 그대로 투입할 경우 성공을 거둘 수 없을 것이었다.”17)
전쟁이 끝나고 한참 지난 뒤 전차군단의 참모 장교였던 마텔le Q. Martel 장군은 일부 사단장들은 전차 부대가 할 수 있는 이상의 역할을 요구했다고 올바르게 지적했다. 하지만 전차부대 지휘관들이 이러한 요구에 반대할 경우 영국원정군 사령부와 그 예하 사령부의 지휘관들은 군기가 빠졌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사례 중 하나가 1918년 9월 27일에 캐나다 군단에서 있었다. 한 캐나다 여단장은 그의 여단에 배속된 전차가 세 대 밖에 되지 않았는데, 부를롱Bourlon 숲 외곽 까지 진출했을 때 배속된 전차 부대 지휘괸이 전차들을 후방으로 돌려 연료를 보급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전차들의 기계적 상태가 좋지 않고(마크IV로 추정) 승무원들의 상태도 좋지 않다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캐나다 여단장은 전차부대가 이렇다 할 지원을 해 주지 못했으며 전차 부대 지휘관과 그의 전차들 때문에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기는 싫었다고 비난했다.  이 여단장은 고작 세대 밖에 되지 않는 배속된 전차부대에 대해 잘 알지 못했으며, 이들의 처지를 이해할 생각도 없었다. 또 다른 사례가 있다. 제4전차여단은 1918년 9월 말에서 10월에 걸친 기동작전이 전차에 심각한 영향을 초래했다고 보고했다. 보병 지휘관들은 전차가 매일 기동하면서 받는 기계적 피로에 대해 이해하질 못했으며, 계속해서 기동을 하는 상황에서는 전차를 이틀 연속으로 운용할 수는 없다는 점도 이해하지 못했고, 네대의 전차만 투입해도 충분한 상황에서 세배나 되는 전차를 투입했으며, 단지 전차를 배속받았다는 이유 만으로 불필요하게 전차를 투입했다. 이 보고서에는 1918년 10월 5일 보르부아르Beaurevoir 마을에 대한 공격 사례를 기록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제25사단의 보병은 두 차례나 전차를 따라잡지 못했지만, 전차들은 독일군의 기관총 진지를 성공적으로 제압했다. 아마도 보병부대 지휘관들이 전차가 배속된다는 사실을 사전에 통보받지 못했기 때문에, 전차를 어떻게 운용해야 할 지 미처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 수 있다. 어쨌거나 이로 인해서 “보병과 전차 부대의 협동 작전이 이루어지지 못했다.”18)
이때문에 1918년 8월 말 부터 전쟁이 끝날 때 까지 두가지 방식의 완전히 상이한 전술이 사용됐다. 하나는 전차를 중심으로 한 기계화 전술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전통적인 방식의 전술이었다. 만약 전차가 화력 지원을 받고, 정찰 및 타 병과와의 연락을 취할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보병이 전차와의 협동작전을 위해 사전에 훈련을 받은 상태였다면 전차 부대는 보병의 피해를 줄이고 동시에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공식 문건인 ‘전차부대 주간 활동 요약Weekly Tank Notes’에는 아미앵 전투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군단이 전차와의 협동 작전에 탁월했으며, “전차를 일렬 종대로 운용했으며, 전차가 돌파를 하면 그것을 곧바로 활용하여” 보병의 손실이 적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안개가 낀 상태에서 보병의 근접지원을 받을 경우 전차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으며 보병의 손실도 적었다. 이를 입증해 주는 통계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군단은 아미앵 전투 당시 전차와의 협동 작전에 탁월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캐나다 군단은 전차와의 협동에서 나쁜 평가를 받았다. 캐나다 군단의 사상자는 3,500명이었는데 오스트레일리아 군단의 사상자는 3,000명 미만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 군단은 독일군 장교 183명, 사병 7,742명을 포로로 잡고 야포 173문을 노획했는데, 캐나다 군단은 장교 114명과 사병 4,919명을 포로로 잡고 야포 161문을 노획했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 군단과 여기에 배속된 전차 부대는 인접 부대인 제3군단이 Chippily 능선을 점령하는데 실패해 이 능선의 독일군의 포격과 기관총 사격에 측면을 공격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손실이 적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19)

미시적인 단위에서 전차의 효율성을 평가할 수 있는 유용한 방법으로는 각 전차장(전차장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을 경우는 그 다음 계급)이 전투가 끝난뒤 2~3일 내에 작성하는 전투보고서Tank Battle Sheet를 분석하는 것이 있다. 전투보고서는 단차 단위의 전투에 대해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여기에는 각각의 전차가 지원한 부대, 작전 시작 및 종료 시간, 전차와 승무원의 상태, 승무원의 피해 상황, 6파운드 포탄과 기관총탄의 소모, 작전 시간, 전차와 전술 개선에 유용한 지적, 그리고 작전 진행 상황에 대한 서술 등이 실려있다. 기존의 연구들은 개별 전차의 전투 보고서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문서는 전차가 실제로 운용된 방법을 분석하는데 극도로 유용하다. 예를들어 아미앵 전투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제4보병사단과 함께 작전을 했으며, 위에서 언급한 Chippily 능선으로 부터 측면을 공격받았던 제8전차대대의 전투 보고서들을 살펴보면, 전차 승무원들은 일반적으로 아래에서 언급할 세 가지 상황 중 한가지를 겪었다. 첫 번째는 기계적 문제나 승무원의 상태 때문에 전차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한 경우이다. 예를 들자면 작전 중 전차의 기계적 문제로 인해 보병에 대한 지원에 실패했거나 아예 지원에 나서지 못한 경우라던가, 전차병들은 보병을 지원하려 했으나 차내의 연기와 열기 때문에 작전을 중단해야 했던 경우 등이다. 두 번째는 전차가 피격되거나 참호에 빠지기 전 까지 보병과 함께 좋은 결과를 얻은 경우이다. 세 번째는 전차가 피격되거나 참호에 빠지지 않고 보병과 함께 좋은 결과를 얻은 경우이다. 제8전차대대의 작전 결과를 모두 살펴본 결과 작전에 투입된 36대의 전차 중에서 8대가 첫번째 사례(기계적 문제)에 해당했으며, 16대가 두번째 사례(유용했지만 피격되거나 방기됨)에 해당되었으며, 12대가 세번째 사례(유용했으며 피해가 없었음)에 해당되었다.(1개 전차대대는 36대의 전차로 구성되었으며, 제8전차대대의 경우 마크V 전차와 6대의 훈련용 전차로 편성되었다.) 피격되거나 참호에 빠진 전차들은 거의 대부분 수리해서 다시 투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번째 사례와 세번째 사례를 합치면 제8전차대대는 잘 조직된 보전합동 작전으로 77%의 전차가 성공을 거뒀음을 알 수 있다.20)
 
그러나 전차를 평가하는데 있어 보다 위험한 방법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아미앵 공세에 참여한 전차장들이 그들의 작전을 서술한 글에서 당시의 상황과 분위기를 포착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세번째 사례에 해당되는 마크V 전차 9363호의 전차장이었던 브라운 중사의 기록을 살펴보자.(브라운 전차의 전차는 수컷형식으로 2문의 6파운드포와 4정의 기관총을 장비했다. 암컷형은 이와 달리 6정의 기관총을 장비했다.)

“오전 5시 집결지를 출발해 오전 7시 30분 공격개시선인 그린 라인에 도달했다. 오스트레일리아군 제13보병대대가 합류해 전차들을 그린 라인까지 인도했다. 작전 시작후 4시간 뒤 우리는 제13보병대대와 함께 그린 라인을 출발했다. 보병은 1/100야드의 속도로 따라왔다. 전진하는 도중 전차들이 급경사 지대를 통과할 때를 제외하면 보병들은 대형을 유지하며 잘 따라왔다. 우리는 적의 기관총과 보병들, 그리고 3문의 야포를 호치키스 기관총과 6파운드 포로 공격했다. 가까이 접근하자 적은 야포들을 버리고 달아났다. 작전을 마칠 무렵 우리는 참호가 구축된 가파른 능선에 도착했다. 나는 참호 중 하나로 들어가 약 50명의 적군을 포로로 잡았다. 보병이 도착한 뒤 총 300여명을 생포한 것으로 기억한다. 사수 한명, 홰틀링(부 조종수), 버처트(사수)가 피로와 차내의 열기로 약간 탈진했다. 작전 시작후 6시간 뒤 우리는 목표인 레드라인에 도착했다. 여기서 한시간 동안 보병이 재집결 하는 동안 우리는 전차 집결지인 던전 숲에서 반장의 지휘하에 집결했다.”21)

브라운 중사의 전차는 큰 문제 없이 작전에 성공했다. 하지만 머레이 중위의 9152호차는 이보다 운이 없었다. 이 차량의 사례는 위에서 언급한 두번째 사례에 해당된다.

“나의 전차는 오전 8시 20분 그린라인을 출발해 공격개시선 800야드 전방에서 적 보병과 조우했다. 여기서 부터 2km를 전진하는 동안 적의 기관총 진지와 보병들을 6파운드 포와 기관총으로 공격했다. 남북방향의 배수로에 도착했을때 … 은폐된 기관총 진지에서 완강하게 저항하는 적을 마주쳤다. 하지만 아군은 아무 손실 없이 보병을 적 기관총 진지로 돌입시켰다. 작전 지역의 지형 문제와 함께 내가 전차의 바깥에서 차량을 지휘해야 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이무렵 승무원 중 네명이 차내의 열기와 배기가스 때문에 탈진했고 주포를 조작할 수 없었다. 결국 내가 직접 6파운드 포를 조작해야 했다. 이때 전투가 가능한 승무원은 조종수, 사수 한명과 나 뿐이었다. 레드 라인으로 진격하면서 수많은 적을 쓰러트렸으며 레드 라인도 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나는 보병의 최종 목표로 전진했으며, 200야드 앞에서 50명 정도의 적을 포로로 잡았다. 이때 나는 좌익의 보병이 원래 목표에서 다소 못미친 지점에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나는 보병들에게 가서 지원을 부탁했으며 보병들은 전진했다. 나는 다시 전과확대선인 블루 라인으로 전진해 몇개의 적 참호를 마주쳤다. 조준 사격을 하자 참호에서 무장한 적 몇명이 나타났으며 내 조종수와 나는 15야드 거리에서 권총 사격으로 9명을 사살했다. 나머지 적 30여명은 항복했으며 나는 포로들을 아군 보병에게 인계했다. 그리고 나는 다른 마크V 전차들과 함께 계속 전진하다가 직격을 맞아 승무원 한명이 전사하고 네명이 부상당했다. 또 다른 명중탄으로 한쪽 궤도가 끊어졌다. 결국 나는 아군의 집결지로 돌아갔다.”22)

머레이 중위의 전차는 직격을 당할때 까지 먼 거리를 진격했는데, 이것은 두번째 사례에 속하는 다른 전차들도 비슷했다. 하지만 첫번째 사례에 속하는 전차의 전차장들은 기계적 고장으로 인해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조종수와 부조종수가 열기로 인해 탈진해 전차를 후퇴시켰다고 보고한 암컷형식인 9385호차의 전차장 셔우드Sherwood 중사와 같은 보고 사례도 있었다. 실제로 많은 전차장들이 차내의 열기와 탈진에 대해 보고했다. 하지만 제8전차대대의 전투보고서들을 분석해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점은 전차가 아미앵 공세가 성공하는데 있어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특히 독일군의 기관총 진지를 격파해 오스트레일리아군 보병의 손실을 줄이는데 기여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성공을 거둘수 있었던 원인은 오스트레일리아 제4보병사단의 작전 구역에서는 전차와 보병의 상호 지원이 잘 이루어졌으며, 전투보고서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했을때 전차가 보병을 선도하고 보병은 전차의 150~200야드 후방에서 근접하여 전진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Chippily 능선의 독일군이 측면에서 큰 피해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기습효과와 안개, 그리고 연막으로 제8전차대대의 작전은 성공적이었다.23)

마지막으로, 전차를 중심으로 한 전쟁 수행방식의 효율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사상자 통계를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아미앵 공세당시 영국원정군의 인명손실은 22,000명이었는 데, 전차의 지원 없이 작전한 프랑스 제1군의 사상자는 24,000명이었다. 8월 21일에서 9월 17일 사이에 영국원정군의 보병과 기병 사상자는 105,943명이었는데, 8월 1일 부터 31일 시기에 가용가능했던 전차의 숫자는 1,184대였다. 그리고 9월 18일에서 11월 11일까지 영국원정군의 보병 및 기병 사상자는 158,440명이었는데 9월 1일에서 10월 20일 사이에 가용가능한 전차의 숫자는 706대로 줄어들었다. 비록 기간이 완전히 같지는 않고 다른 변수도 고려해야 하지만 이와같이 대조되는 통계로 미루어 볼때 잘 준비된 대규모의 보전포 협동 작전이 적은 숫자의 전차의 지원을 받는 보병 공격보다 적은 수의 사상자를 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차군단이 아미앵 공세에서 입은 사상자는 앞서 언급한대로 대략 700명 정도였으며, 8월 8일에서 10월 10일 까지의 사상자는 총 3,188명이었다.24)
그리고 군수참모부의 자료Munutions files에 있는 일련의 통계자료들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를들어 1918년 7월 아멜Hamel에서 실시된 보전포 협동 작전에서 전차 2개대대의 지원을 받는 보병사단 한개는 전차의 지원이 없는 3개 보병사단에 필적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풀러도 1918년 7월에 낸 전차의 효율성에 대한 연구에서 전차를 중심으로 한 전투 수행 방식이 사상자를 크게 줄인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1918년 9월에 기계화 장비 보급 부부장ACMS, Assistant Controller of Mechanical Supply 데이비슨G. F. Davidson은 1,000야드의 공격정면에서 공격을 감행하려면 1야드 당 여러명의 소총병과 함께 1,000,000발의 소총탄이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10대의 전차만 배속시킨다면 전차 한대당 10명의 보병만 배속시키고 탄약 소모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했다.25)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 두 가지의 질문을 제기하려고 한다. 과연 1918년 전역에 기존에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많은 전차를 투입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1918년 전역에서 전차를 보다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을까?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아미앵 공세 직후 968대의 가용 가능한 전차와 장갑차가 있었으며, 아미앵 전투 부터 종전시 까지 가용가능한 ‘전차의 숫자가 많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전차의 숫자가 많았다’는 표현은 가용가능한 전차의 수가 충분했다는 것을 뜻하며, 아무런 계획 없이 마구잡이로 전차를 투입하는 대신 전차를 아껴서 사용하고 충분한 숫자를 모을 수 있었다면 1918년 말에도 대규모의 보전포 협동 작전을 펼칠 수 있을 만큼 많은 수의 전차를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적절한 운용이 무엇이냐는 두 번째 질문을 제기한다. 이에 대한 답은 충분한 예비 전차를 확보하고 전차에 대한 지원을 충분히 하는 상태에서 공세 시작 2~3일차 까지만 전차를 투입했다면 전차는 아미앵 전투 당시처럼 1918년 말에 있었던 일련의 대규모 공세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영국원정군 총사령부와 고위 지휘관들의 태도가 바뀌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1918년 8월 말 생포된 한 독일군 장교가 진술한 것 처럼, 영국군이 보전포 협동 공격을 해 올 경우에는 독일군의 방어선이 대부분 붕괴됐다. 하지만 이 포로는 다른 방식은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다고 평가했다.26) 이 주장을 입증하는 자료는 많다. 하지만 전차군단을 다른 방식으로 운용하고 지원을 했다면 어떤 결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완벽한 답을 할 수 는 없다. 그렇지만 전차만 가지고 전쟁을 승리할 수 는 없었지만 전차 덕분에 보병의 희생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는 주장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자료는 많다. 그리고 캉브레, 아멜, 아미앵에서 실시한 기습적인 보전포 협동 공격이 거둔 성공을 가지고 평가한다면, 전차는 적합한 지형이라면 어디에서건 돌파에 성공하여 기동전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1918년 당시의 전차는 기계적 신뢰성이 낮았고 전차 및 예비 부품 생산도 문제가 있었으며, 1939~40년 시기의 전차가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에 비교하기도 어렵다. 또한 1918년에 전차를 통해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영국의 동맹군들도 비슷한 수준으로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물론 1917~1918년 시기 전차의 문제가 기계적인 요소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요소에도 기인했으며, 정신적인 문제가 영국원정군 사령부와 전차의 중요성에 반대해 전차군단의 인력과 물자를 감축하려 한 고위 지휘관들에 기인하는 것이냐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만약 전차를 낭비하지 않고 적적하레 운용하는 한편 최고사령부 단위에서 전차 부대에 충분한 지원을 해 줬다면 전차는 훨씬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며 1918년에 연합군의 승리를 훨씬 더 적은 희생으로 앞당길 가능성도 있었다. 전차만 가지고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한 것은 아니며, 전차군단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주장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좀 더 공정하게 평가 한다면, 철학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전차는 반드시 필요한 무기였지만 1918년에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 꼽기에는 충분치 못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석
1. Major Clough Williams-Ellis and A. Williams-Ellis, The Tank Corps (London 1919); Brevet Colonel J.F.C. Fuller, Tanks in the Great War, 1914-1918 (London and New York 1920); Captain B.H. Liddell Hart, The Tanks. The History of the Royal Tank Regiment and its Predecessors, Vol. 1, 1914-1939 (London 1959); John Terraine, To Win A War. 1918. The Year of Victory (London 1978, Papermac edition, 1986), 117; the same idea is noted in Terraine, White Heat. The New Warfare, 1914-1918 (London 1982), 224, and in Daniel Dancocks, Spearhead to Victory: Canada and the Great War (Edmonton 1987), 556; Shelford Bidwell and Dominick Graham, Fire-
Power, British Army Weapons and Theories of War, 1904-1945 (London 1982, 1985), 137. A recent book, which emphasizes the problems of tank production is A. J. Smithers, A New Excalibur: The Development of the Tank, 1909-1939 (London 1986). 또한 David Fletcher, Landships: British Tanks in the First World War (HMSO:403 London 1984), 와 Fletcher in J.M. Winter, The Experience of World War I(London 1988), 100도 참고하라. 플레처는 “전차로 인해 전쟁에 승리했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하지만 전차는 참호전이라는 교착 상태에 해답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2. 이 논쟁은 Tim Travers, 'The Evolution of British Strategy and Tactics on the Western Front in 1918: GHQ, Manpower and Technology'.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54, 2 (April 1990), 179 ff.에서 다루고 있다.
3. ibid.
4. W.T. Furse, MGO, 'Notes on the Report of a Conference', 17 December 1917, J.F.C. Fuller papers, 1/299, Liddell Hart Centre for Military Archives, King's College, London University (hereafter KCL). General Lord Home, GOC First Army, to GHQ, 16 June 1918; and Lindsay to HQ, First Army, 2 July 1918; in 'Pr6cis of Lectures' by Lindsay on the Machine-Gun Corps, December 1918, Lindsay Papers, Royal Armoured Corps Tank Museum, Bovington, Dorset.
5. Terraine, To Win a War, 116; Bidwell and Graham, Fire-Power, 137; Brigadier-General Sir James Edmonds, Military Operations France and Belgium, 1918 (London 1947), vol. 4, 517, and vol. 5, 95.
6. 아미앵 공세 시작 당시 공식적인 전차 숫자에 대해서는 Tank Note #7, in MUN 4/4979/2, Public Record Office, Kew Gardens (hereafter PRO). J.F.C. Fuller, Tanks in the Great War. 224. For Elles on 12 August 1918, Minutes of Tank Corps Conferences, 12 August 1918, WO 158/840, PRO. For numbers lost to artillery fire, see Cubitt (War Office) to Ministry of Munitions, 17 August 1918, MUN 4/2799, PRO.등을 참고하라.
7. 'Return of tanks, week ending 17th August 1918', signed by J. Keane, Assistant Director of Artillery, MUN 4/348, PRO.  An exactly similar return for the week ending 19 August 1918 occurs in MUN 4/4979, PRO에는 1918년 8월 19일을 종결일로 하는 한 주간의 보고 내용이 실려있는데 거의 동일하다.
8. 5th Tank Brigade, 'Report of Operations with Australian Corps from 8 August to 15 August, 1918, Supplementary Report', vol. 4, 1/259, J.F.C. Fuller Papers, KCL.
9. Tank Note #4, concerning 21-25 August 1918, MUN 4/4979/2; Tank Board Committee, 5 September 1918, and 24 October 1918, MUN 4/4949/4; PRO.
10. Official M.W.D. '[Mechanical Warfare Department] Programme, 1st April 1918 to 30th March 1919'. MUN 4/348; 'Comparative Tables Showing Estimates of Tank Production 27 February 1918 and September 1918'. MUN 4/2801. On tank delivery, Tank Board Committee, 12 September 1918, and 10 October 1918, MUN 4/4979/4; PRO.
11. 전차 손실 통계는 Williams-Ellis, The Tank Corps, 271; Fuller, Tanks in the Great War, 286-7; and Major-General Elles, speaking at the Tank Board Committee, 5 September 1918, MUN 4/4979/4, PRO를 참고하라. 풀러는 같은 위원회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8월 8일 부터 21일 까지의 전차 통계를 정리했다. 회수한 장비의 통계는 Tank Note #10, 12 October 1918, MUN 4979/2, PRO를 참고하라.
12. 전차 숫자는 'Weekly Tank State' figures in MUN 4/6400, PRO, except for the 15 October figures which come from History of the Ministry of Munitions (HMSO: London 1922), 12 volumes, vol. 12, part 3, 69에 실린 자세한 통계에서 인용한 것이다.
13. 스턴에 대한 불평은 Liddell Hart, Talk with Sir John Keane (Assistant Director of the Artillery in 1918), 9 November 1947, 11/1947/20, Liddell Hart Papers, KCL을 참고하라.; 필요한 예비 부품 통계는 Lt.-Col Searle (Technical Advisor to Heavy Branch, Machine-Gun Corps [forerunner of the Tank Corps]). 'Report on Tanks', 24 March 1917, WO 158/838, PRO를 참고하라.; 예비 부품의 부족에 대한 불평은 Elles to Capper (Director-General Tank Corps), 26 April 1918; Capper to Elles, 29 April 1918; and Elles to Capper, 15 June 1918; WO 158/816, PRO을 참고하라.; 그리고 2년 뒤 예비부품 문제를 해결한 것은 Fuller to Tank Board, no date, in Tank Board Committee, 10 October 1918, MUN 4/4979/4, PRO를 참고하라.
14. Weekly Tank Note #4, Concerning Operations 21-25 August, 1918; 사상자의 백분율통계는, Weekly Tank Note #10, 12 October 1918; MUN 4/4979/2를 참고하라.; 마크V전차의 차내 과열 문제에 대해서는 Tank Corps HQ Report, 21 September 1918, MUN 4/4979/4를 참고하라.; 아미앵 전투 당시 전차군단의 사상자에 대해서는 Major-General Elles to GHQ, 20 October 1918, WO 95/94; PRO를 참고하라.
15. Fuller, Tanks in the Great War, xviii. Major-General Sir J.E. Capper to Elles, 'Proposed reorganization of the Tank Corps to bring it more into the Army', 18 June 1918; and Elles to Capper, 23 June 1918; WO 158/816, PRO.
16. J.F.C. Fuller to Tank Board, no date, in Tank Board Committee, 10 October 1918, MUN 4/4979/4, PRO; Edmonds, Military Operations France and Belgium. 1918, vol. 4, 156; Liddell Hart, The Tanks, 184.
17. 5th Tank Brigade. 'Report of Operations with the Australian Corps from 8 August to 15 August 1918', Appendix G; and 'Report on Operations with the Australian Corps, 23 August 1918', 4; vol. 4, Tank Corps Operations, 4th and 5th Brigade, J.F.C. Fuller Papers, 1/259, KCL. Brigadier-General Griesbach to 1 Canadian Division, 'Lessons from the recent fighting', 24 August 1918, 5, vol. 5, Griesbach Papers, MG30 El5, Public Archives, Canada. Major Hotblack (GSO 1,
Tank Corps HQ), '3rd Tank Brigade State [includes 9th Tank Battalion] 8pm 25 August 1918', 25 August 1918, WO 95/94, PRO.
18. Liddell Hart, Talk with General Martel, 29 March 1948, 11/1948/7/, Liddell Hart Papers, KCL. Brigadier-General Victor Odlum, GOC I th Canadian Brigade, 'Narrative of Operations . .. from September 27th to October 2nd, 1918', 4 December 1918, 2, vol. 22, Odlum Papers, MG30 E300, Public Archives, Canada. 4th Tank Brigade, 'Report on Operations, September 27 to October 17, 1918', 11, vol. 4, Tank Corps Operations, 4th and 5th Tank Brigades, J.F.C. Fuller Papers, 1/259, KCL.
19. Weekly Tank Notes #2 and #3, referring to Amiens, 8 August to 12 August 1918, MUN 4/4979/2, PRO. Terraine, To Win A War, 111.
20. 8th Tank Battalion Battle Sheets, Tank Museum, Bovington.
21. Ibid.
22. Ibid.
23. Ibid. Liddell Hart, The Tanks, 180-1.
24. Liddell Hart, The Tanks, 185, for French and BEF Amiens figures. The other statistics come from Edmonds, Military Operations France and Belgium, 1918, vol. 5, 562; 'Operations on the Western Front', Green File, 2, 'Total Estimated Casualties', Lawrence Papers, National Library of Scotland; Major-General Elles to GHQ, 29 October 1918, WO 95/94, PRO.
25. Tank Statistics, MUN 4/6400; J.F.C. Fuller, 'Notes on Tank Economics', 25 July 1918, MUN 4/4979/27; G.F. Davidson, ACMS, 'Comparison of Utility of Armament, CMS', 18 September 1918, MUN 4/6400; PRO.
26. General Sir John Coleridge to Edmonds, 12 March 1938, recalling the statement of the German officer captured on 21 August 1918, CAB 45/184, PRO.

2016년 8월 8일 월요일

[번역글] ‘우리의 친구 롬멜’: 전후 영국 대중문화가 묘사한 독일 국방군이라는 ‘훌륭한 적’

불법날림번역 한 편 나갑니다.


이글은 German History 26-4(2008)에 실린 패트릭 메이저Patrick Major의 ‘ Our Friend Rommel ’ : The Wehrmacht as ‘ Worthy Enemy ’ in Postwar British Popular Culture을 번역한 것 입니다. 얼마 전 어떤 분과 롬멜 숭배 이야기를 하다보니 이 글이 생각나더군요. 대중문화 이야기라서 그런지 꽤 재미있습니다. 깨끗한 독일군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영국 대중문화계가 담당한 역할을 비판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논문은 주로 1950년대의 영국 전쟁 영화들을 분석하고 있는데 제가 보지 못한 작품이 많아서 내용을 모르는 작품이 많습니다. 요즘은 유튜브에서 고전 영화들을 쉽게 감상할 수 있으니 검색해서 나오는 것들은 한번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 참고로 저는 롬멜이 꽤 재미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해서 여전히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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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친구 롬멜’: 전후 영국 대중문화가 묘사한 독일 국방군이라는 ‘훌륭한 적’


패트릭 메이저


영국 전쟁영화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은 거의 대부분  전쟁 시기에 선전목적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을 연구 대상으로 하고 있다.1)  이 시기의 영화들은 영국인의 자기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그 중 일부는 당시 사회상을 축소해 보여주기 까지 한다. 하지만 전쟁 중에 만들어진 영화들은 ‘적에 대한 묘사’ 즉 Feindbilder가 없었다. 직업군인 캔디 씨 이야기The Life and Death of Colonel Blimp (Powell and Pressburger, 1943)2)를 제외한 영화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독일군을 전형적인 프로이센 군국주의자나 허세에 찌든 나치주의자로 묘사한 것은 놀랄일도 아니다. 학문적 관심은 2차대전 당시의 영화에 집중되고 있으나 대중들은 2차대전 이후에 나온 영화들에서 묘사한 것들을 더 강하게 기억하고 있다.3)  이 사실은 10여년 전 존 램스덴John Ramsden이 문제를 제기하기 전 까지 학문적 관심을 받지 못했다.4)  1950년대 영국 영화계에서는 전쟁영화가 크게 흥행했으며 특히 50년대 후반에는 꾸준히 흥행 1, 2위에 올랐다. 또한 전후에 제작된 영화들은 영국과 독일의 화해 과정의 일환으로 독일군을 좀 더 미묘하게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흥미롭게 묘사했다. 또한 이 시기의 영화들은 과거의 현실을 매우 선별적으로 다루었다. 최근 노먼 데이비스Norman Davies가 지적 것 처럼, 2차대전의 기억은 냉전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두 가지로 구분 되었다.5) 필자가 아는 범위내에서 전후에 나온 영국의 2차대전 영화는 동부전선에서 전개된 독일 국방군과 붉은군대의 전쟁을 전혀 다루지 않았다. 물론 동부전선 같이 거대한 주제를 다루기에는 영국 영화계의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동부전선이라는 주제를 의도적으로 말소하려는 경향도 존재했던 것은 분명하다. 소련 영화 ‘베를린 함락(1949)’이 런던에서 개봉되었을때, 영국 외무성은 ‘이 영화 때문에 현 시점에서 독일에 대한 적대적인 기억이 되살아날 수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6)  물론 이때는 바로 독일연방공화국이 유럽방위공동체European Defence Community를 포함한 서유럽 동맹에 참여하기 위해서 일련의 조약 협상을 전개하던 시점이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영국 대중의 역사인식과 문화가 결코 정치적 주제에 무관심하지 않았으며,  2차대전의 다른 모든 전역 보다  북아프리카 전선을 재구성하는데 몰두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실제로, 북아프리카의 사막 전선은 영국 대중들에게 ‘명예로운 독일 국방군’이라는 이미지를 재구축하는데 매우 유용했다.


한 영화가 촉매제의 역할을 했다. 1951년 개봉한 20세기폭스사의 전기영화 ‘사막의 여우The Desert Fox’에서는 영국 배우 제임스 메이슨Jamese Mason이 독일 군인 에르빈 롬멜Erwin Rommel을 연기했다. 제임스 메이슨은 8년전에 카이로로 가는 다섯개의 무덤(빌리 와일더Billy Wilder 감독, 1943)에서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이라는 역할을 맡아 과장된 연기를 한 바 있었다. 그는 1943년 작품에서 이질적 느낌을 주기 위해 독일 억양의 영어를 썼지만 ‘사막의 여우’에서는 평범한 영어로 연기했다. 이 영화에서는 독일 아프리카 군단과 영국 제8군 사이의 기사도적인 상호 존중을 보여주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양측은 상대방의 포로를 각자의 응급 치료소에서 치료해주고, 롬멜은 히틀러가 연합군 특수부대원들을 총살하라는 명령서를 찢어 버리고 포로들을 제네바 조약에 의거하여 대우해 준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는 포로가 된 영국 장교가 롬멜을 멀리서 바라보고는 장교로서의 예의를 갖춰 경례하기까지 한다.
마지막에 언급한 일은 실화에 바탕을 둔 것이고 그 장면에 나오는 장교는 바로 그 실화의 주인공인 데스몬드 영Desmond Young 준장이었다. 그는 1950년 영국의 베스트셀러였던 Rommel의 저자였으며, 이 영화는 상당부분 그의 책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7)  이 책은 엄청난 베스트셀러였으며 출간된 첫 해에만 8쇄를 찍었다. 이 책은 원래 선데이 익스프레스에 연재되었던 글을 모아 편집한 것인데, 신뢰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 책 광고에 스바스티카 문양으로 장식을 하기도 했다.8)  이 책의 독일어 번역판도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예를 들어 1951년 이젤론Iserlohn에서 열린 아프리카 군단 출신 참전자들의 첫 번째 모임에서는 이 책이 불티나게 팔렸다.9)  
잘알려져 있다시피, 영은 이 책에서 영연방군 지휘관인 클로드 오킨렉 장군이 연합군 장병들 사이에서 롬멜의 명성이 높아지는 것을 걱정하면서 “우리 장병들 사이에 롬멜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지면서 그는 일종의 마법사나  악령 같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롬멜이 매우 활력적이고 유능한 인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결코 초인이 아니다.”10)라는 발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오킨렉의 이 발언은 영화 대본에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또한 윈스턴 처칠이 1950년에 낸 책에서 롬멜에게 한 찬사도 영화 대본에 들어갔다.


“롬멜의 정열과 대담함은 우리에게 심각한 재앙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는 영국 대중의 비난을 받을지라도 내가 1942년 하원 연설에서 표한 경의를 받을 자격이 충분한 인물이었다. 나는 당시 하원 연설에서 롬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매우 대담하고 유능한 적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초래한 재난과는 별개로, 나는 롬멜을 명장이라 부르겠습니다.’ 우리가 지금도 롬멜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조국에 충성하는 군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 히틀러가 하는 모든 일을 증오하게 되었고, 이 미치광이 폭군을 제거하고 그의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 1944년의 거사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롬멜은 이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암울한 현대 민주국가의 전쟁에서 기사도가 있을 곳은 없다. 대규모의, 그리고 압도적인 영향력의 무감각한 도살은 모든 감정을 압도해 버린다. 나는 아직도 롬멜에게 찬사를 바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때문에 비난을 받기는 했어도 말이다.”11)


영의 저작은 거의 대부분 롬멜의 부인과 아들, 그리고 롬멜의 전우들을 인터뷰해서 씌여졌기 때문에 롬멜을 긍정적으로 묘사한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 결과 영의 책은 거의 성인의 전기에 가깝다. 그의 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다시 군모를 쓰고 있는 롬멜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 아마도 나의 부친이 뱃사람이었고 내 유년기의 상당 기간을 바다에서 보냈기 때문인지 지금은 이 특별한 독일 장군을 이해할 수 있을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롬멜은 그의 마지막 임무를 받기 전에는 바다와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를 넬슨 휘하의 함장들, 낭만과는 거리가 먼 혼블로워와 같은 인물과 비교해 본다면 정말 그와 같은 유형의 사람임을 알 수 있다.”12)


영이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영국인의 심성에 낭만적 인물로 남은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롬멜을 비교하고자 했을 것이다. 물론 롬멜 전설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그가 1944년 7월 20일의 히틀러 암살 음모에 연루되어 자살을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 국방군의 지휘관 중 한명을 나치에 항거한 인물로 묘사한 것은 일각에서 심각한 우려를 불러왔다. 영은 당시의 복잡한 국제정세에서 롬멜에 동정적인 시각을 보이는 것이 어떤 정치적 함의를 가지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유치한 인물은 아니었다. 콘라트 아데나워Konrad Adenauer와 연합국 고등판무관Allied High Commissions은 냉전의 압력으로 서독 재무장을 고려하고 있었다. 포츠담 회담으로 독일의 무장력 보유가 금지된지 불과 5년이 지난 1950년, 독일에서는 재무장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전개되고 있었다. 영은 언론 인터뷰에서 실용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독일 민족의 상무정신을 없애지 못할 바에는 권장하는 쪽이 좋지 않겠습니까? 상무정신을 갖춘 우리 지도층 인사 중 다수는 훌륭한 친구 다음으로 좋은 것은 훌륭한 적이라고 생각하지요.”13)


1950년 초 영의 롬멜 평전은 영국에서 뜨거운 이슈가 됐다. 과거 롬멜과 싸웠던 군인들이 가장 긍정적인 평을 했다. 그들은 롬멜이 ‘착한 독일인’으로서 국가사회주의에 저항한 순교자일 뿐만 아니라 야전지휘관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고 찬양했다.
웨이벨과 오킨렉은 물론, 심지어 몽고메리 조차도 롬멜 만큼의 인기를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 억눌린 질투심을 가지고 있었다. 웨이벨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지난번 전쟁에서 상대한 적 중에서 멋진 야전지휘관이자 명예롭고 관대한 적수로서 대중의 감성을 자극한 인물은 오직 롬멜 한 명 뿐이었다. 다른 독일 장군들은 융통성이라곤 없고 사악한 재능만 있다는 인상을 주었으나,  이질적이게도 롬멜에게는 낭만적이고 기사도적인 아우라가 있었다.”14)


프랜시스 터커Francis Tuker 중장은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롬멜을 고대의 장군들과 비교하여 ‘우리 시대의 벨리사리우스’라고 칭했다.15)  과거 영국 8군에서 정보장교로 있었던 에녹 파웰Enoch Powell은 울버햄프턴의 토리당 후보로 출마해 선거 활동을 하던 중 “롬멜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어떤 장군 보다도 유능한 인물이었다”는 발언을 했다.16) 물론 의도한 것은 아니라하더라도 이와 같이 롬멜을 찬양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초기 괴벨스가 선전을 통해 만들어낸 ‘역동적인’ 롬멜 이미지와 유사한 면이 있었고,17) 당시에도 많은 논평자들이 그 점을 지적했다.18) 또한 롬멜 전설이 등장한 원인 중 하나로 영국 지휘관 중에는 매력적인 인물이 없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 측은 롬멜에 대항하기 위해 ‘몬티’ 전설을 만들어내려 했다.19) 이와 같은 현상은 몽고메리의 부하였던 브라이언 호록스Brian Horrocks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호록스는 롬멜 신화를 논파하기 위해 영국 제8군이 아프리카 군단을 정정당당하게 격파했다고 주장했다.20)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영화평론가는 롬멜을 저돌적이며 임기응변에 능하고, 가차없으면서도 진지하며, 강인하면서도 지적이고, 예의바른 직업 군인이며, 무모하지만 유능한 지휘관’으로 묘사하는 것은 ‘앵글로 색슨’적인 미덕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이라고 지적했다.21)  반면 몽고메리는 교조적인, 거의 ‘프로이센’ 적인 인물로 그려졌는데 이것은 아주 재미있는 문화적 역할 전도였다.


그러나 롬멜 전설의 내면을 고찰하는 보다 면밀한 사람들도 있었다. 한때 좌파였다가 독립적인 우파 비평가로 전향한 맬컴 머저리지Malcolm Muggeridge는 롬멜에 동정적인 사람들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과거를 잊고 용서하자는 태도를 보인 사람들과 같다고 비판했다. 그는 히틀러와 함께 자살한 괴벨스와 같은 완고한 나치들이 막판에 가라앉는 배에서 도망친 장군들 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머저리지는 롬멜 같이 윗 사람에 아부하는 거만한 꼭두각시들을 멀리해야만 독일이 ‘슬라브 제국주의의 위협’에 저항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독일이 서구 기독교 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한다면 롬멜과 같은 인간들을 제거하고, 그들이 만들어낸 시스템을 제거하고, 아프리카 전선의 ‘명예’가 강제수용소라는 이루 말할수 없는 불명예와 상관없다고 믿는 집단적인 정신병 성향을 영구히 벗어나야 하며, 포로가 된 연합군 장군 한명에게 보여준 ‘기사도 정신’이  수많은 불행하 사람들이 직면했던 한결같은 배신으로 점철되고 모든 문명화된 관습적 요소들을 잔인하게 무시한 대외정책과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22)


전통적으로 영국 보수층을 대변해온 텔레그래프지의 필진들은 머저리지의 주장에 동의하는 글을 썼다. 그러나 영국 좌파들은 불안감을 느꼈다. 과거 심리전 담당 장교였으며 전후 코벤트리의 노동당 하원의원이었던 리처드 크로스맨Richard Crossman은 국가사회주의에 대해 정확하게 평가했다. “롬멜이 매우 매력적이고 용맹하며 기사도적이므로 나치는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독일 문제를 잘못 바라보는 것이다. 당시에는 정치에 관심없던 독일인이라 하더라도 훌륭한 나치 당원인 동시에 훌륭한 동료가 될 수 있었다.”23) 크로스맨은 뒤에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전쟁 중 우리 영국인들은 롬멜을 릴리 마를렌Lili Marlene처럼 받아들였고 그를 명예 영국인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그가 크리켓 경기의 규칙을 따르듯 공정하게 전쟁을 수행하는 유일한 독일인 인것 처럼 묘사했다. 물론 이것은 그저 신화에 불과하다. 다른 독일 장군들도 친위대의 행동에 불쾌감을 느꼈다. 물론 아무리 생각 해도 롬멜이 신사적인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크로스맨은 “롬멜 숭배자들이 롬멜은 잔혹한 군국주의자인 다른 독일 장군들과 다른 유일한 인물이었다고 믿는 것은 친독파들의 신화가  아니”라는 점을 예리하게 파악했다. 크로스맨이 진정으로 비판한 것은 영이 롬멜을 반나치 저항인사로 묘사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독일 민족이 착한 독일인과 나쁜 독일인의 두 부류로 나뉜다는 자기 기만을 하고 있다. 나쁜 독일인은 군국주의자, 나치, 반 민주주의자, 그리고 잔혹 행위에 가담한 자들이다. 착한 독일인에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주주의자와 신사적인 인물들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롬멜은 깨끗한 전사였으므로 그는 결코 나치가 될 수 없으며, 롬멜과 같은 인물은 소련에 대항하는 민주주의의 훌륭한 동맹이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24)


마지막으로, 역사가 휴 트레버-로퍼Hugh Trevor-Roper도 이 논쟁에 참여했다. “이제 ‘우리의 친구 롬멜’은 마법사나 악령이 아니라 영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이것은 위험하다.” 로퍼는 롬멜이 초기에 히틀러를 지지했으며, 1938년에는 히틀러의 경호대장을 맡았던 전형적인 국방군 내의 국가사회주의 지지자였으며 전쟁 말기까지도 그랬다는 점을 지적했다. “우리가 무찌른 적을 높여주는 행위가 우리의 허영심을 충족시켜 줄진 모르나, 롬멜을 영웅이나 순교자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히틀러의 정책과 그가 수행한 전쟁은 심각한 범죄 행위였다.”25)


하지만 롬멜 평전에 대한 비판적 의견들은 롬멜 지지자들에 의해 상쇄되었으며 대중의 여론까지 양분됐다. 영의 롬멜 평전이 2년 뒤 영화로 만들어지자 이 영화는 영국 내에서 매우 우호적인 평을 받았다. 그리고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26)  타임스는 영화 평에서 이 영화를 독일인의 관점에서 보라고 조언했다.27) 만약 이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아프리카 군단이 연합군에 의해 패배한 것이 아니라 히틀러의 간섭으로 패배했다고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러너드 모슬리Leonard Mosley는 데일리 익스프레스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했다. “이 영화는 아주 잘 만들어졌다. 연기도 매우 훌륭하고 굉장히 재미있다. 그런데 문득 일어나서 스크린에 수류탄을 까 던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나를 아주 화나게 만들었다.”28) 물론 이런 악평은 드문 편이었다. 레스터 스퀘어Leicester Square의 오데온Odeon 극장에서 시사회가 있었을 때 시어즈라는 41세의 여성이 “살인자를 미화하지 말라!”고 외치며 항의해서 훈방 조치되는 등 자잘한 비판이 있었을 뿐이다.29) 이밖에 빈과 밀라노에서는 이 영화가 개봉하자 공산당이 주도한 폭동이 일어나 영화가 상영 중단되었다.30) 이에 비하면 영국내의 반응은 조용한 편이었다. 그리고 원작이 된 평전이 총선 기간 중 출간된 것 처럼 이 영화도 토리당의 1951년 재집권 선거운동 중에 개봉했다. 그리고 엘 알라메인 전투 기념일에 처칠과 몽고메리가 연설을 하자 BBC에서는 이 연설을 내보내는 것이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고 판단해, 연설 대신 ‘사막의 여우’ 영화 음악을 방송하는 기상천외한 행동을 했다.31)


저명한 영국 군사사가 리델 하트는 “과거 헐리우드가 역사를 다룬 방식을 본 경험 때문에 매우 비판적인 자세를 가지고 관람을 하러 갔다. 그러나 매우 즐거운 충격을 받았다”고 평했다.32) 리델하트는 다른 영국군 고위 장교들과 이 영화를 단체 관람했는데, 함께 관람한 장교들도 격찬을 했다. 리델 하트는 원작이 된 평전과 영화에 관한 논쟁에 부지런히 참여했다. 사실 그는 이 영화의 자문으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를 참여시키는데 큰 도움을 줬다. 리델하트는 The Other Side of the Hill(1948)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당시 포로 신세였던 룬트슈테트를 인터뷰한 경험이 있었다. 리델 하트는 이 책에서 국방군 장성들을 단순한 ‘군사 전문가’로 묘사했었다. 하지만 영국보다 1년 빠른 1950년에 낸 개정판의 독일어본에서는 롬멜에 대해 한 장을 추가했다.33)  리델 하트는 여기서 영국인들이 롬멜에 대해 매우 애정어린 존경을 바치고 있다고 썼다.34) 그러니 이후 서독의 재무장 논쟁에서 리델 하트가 독일에 우호적인 외국의 전문가로서 활동하고35) 독일 국방군 장교들의 자서전에 서문을 써준 것36)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리델 하트가 추락한 명성을 회복하고 자신이 전격전의 사상적 아버지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 국방군 고위 장교들의 복권을 도와주는 대신 자신의 주장을 지지해 달라는 밀약을 맺었을 가능성도 있다.37)  리델 하트는 The Rommel Papers(1953)의 영어판의 편집을 담당했다. 이 책은 1950년 독일에서 Krieg ohne Haß라는 제목으로 발행된 것 이었다. 리델 하트는 여기서 롬멜을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견주어 “사막전의 두 대가”라고 불렀다.39) 또한 리델 하트는 미국에 있던 롬멜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들이 반환되도록 도움을 줬다. 이 편지들은 영어판에 수록되어 롬멜의 인간적 면을 부각시켰다.
또한 리델 하트는 서독 영화계가 롬멜을 복권시키는 것을 도왔다. 이것은 전후 국방군 신화가 국제적 협력을 통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콘스탄틴 영화사가 만든 다큐멘터리 필름 ‘이것이 우리의 롬멜이다Das war unser Rommel(Wigankow, 1953)’은 비통한 추모의 감정과 상무적인 회상이 흥미롭게 결합된 작품이다. 이 영화는 독일 군인묘지 관리협회Volksbund Deutsche Kriegsgräberfürsorge e. V.의 주도로 제작됐는데, 롬멜을 습격하는 과정에서 전사한 영국 코만도 지휘관 조프리 케예스Geoffrey Keyes의 무덤에 독일 병사와 영국 병사가 함께 헌화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케예스가 전사하는 장면은 ‘사막의 여우’ 시작 장면에 나온다.)40) 그리고 이 영화는 롬멜의 무덤을 경건하게 비추면서 마무리 된다.(‘사막의 여우’ 시작 장면과 비슷하다.) 이 영화에는 독일 전시 선전영화에서 추려낸 장면과 영국에서  제작한 사막의 승리Desert Victory(1943) 에서 가져온 장면이 나오는데, 콘스탄틴 영화사는 후자의 공동감독인 데이빗 맥도날드David MacDonald를 편집에 참여시키기까지 했다. 또한 영화사는 기술 고문으로 롬멜의 참모장이었던 프리츠 바이어라인Fritz Bayerlein과 함께 리델 하트를 섭외하는데 엄청난 공을 들였다. 리델 하트는 “내가 기술 고문으로 참여하는 것은 영국에서 홍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콘스탄틴 영화사는 내가 하자는 대로 할 기세다.”라고 썼다.41)  ‘사막의 여우’가 영국과 독일의 고위 군사관계자들 간의 화해를 목적으로 했다면, 콘스탄틴 영화사의 작품은 일선 장병들 단위의 화해를 목표로 한 것 이었다. 영화의 화자는 아프리카 군단 출신의 고참병과 순진하면서도 어눌한 독일어를 쓰는 가상의 영국 참전병 ‘잭 엘리엇Jack Elliott’이다. 만약 리델 하트가 이 영화를 일방적인 영국의 선절물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자기기만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영국 제8군은 스승인 롬멜로 부터 전술을 배워나간다. 이 영화에서 롬멜은 이미 1942년에 10년 뒤에 닥칠 냉전의 전개를 예측하는 초인적인 통찰력을 보여준다. “독일은 서방과 생각을 일치시켜야 한다. 유럽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동을 멈춰야 한다. 오직 정치, 경제, 군사적 공동체를 만들어야만 미래의 유럽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화해란 독일의 자기 주장과 긴밀하게 엮여 있었다.  ‘이것이 우리의 롬멜이다’의 기술 고문 중 한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임스 메이슨은 롬멜의 역할을 잘 연기했다. 하지만 진짜로 롬멜과 함께 싸웠던 우리가 보기에는 시시하다. 우리는 진짜를 만들려는 것이다.”42)  그래서 이 영화는 경건한 시작과 마무리 사이에 기억을 더듬어 가며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마초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또 한편의 수정주의적 다큐멘터리 영화 ‘독일 군인은 이러했다So war der deutsche Landser(바우마이스터Baumeister 감독, 1955)’는 대중의 기억에서 모든 분야의 정상화를 촉구했다. 이 영화에서도 극영화와 마찬가지로 전쟁에 대한 추억과 합리화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해 롬멜을 미끼로 사용했다.


다른 영국 군사사가들도 롬멜을 숭배하는 분위기에 일조했으나 대개는 롬멜의 정치적 배경 보다 군사적 업적에 초점을 맞추었다.43)  이 점은 영의 롬멜 평전이나 영화에서 간과한 영역이었다. 하지만 곧 군사애호가들도 롬멜 숭배에 동참하려고 했다. 비록 약간의 변명이 필요하긴 했지만 말이다. 북아프리카 전역 참전자였으며  BBC 라디오 방송의 중견 간부이자 Today Programme을 만든 로날드 르윈Ronald Lewin은  군사사를 다루는 내용을 한 편 방송한 뒤,44) 두 번째 편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미화하는데 집착하지 않더라도, 사막의 순수함이 사막에서 벌어진 전쟁을 정화해 주는 불가사의한 방식이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주장해야 한다.”45)  퇴역장성 데이빗 프레이저David Fraser는 롬멜을 현대의 영웅으로 떠받드는데 그치지 않고, 롬멜의 최후의 순간 뿐 아니라 그가 전장에서 보여준 용맹을 서술하는데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46)  최근에 나온 북아프리카 전역을 다루는 책 한권은 롬멜의 사후에 나온 회고록의 제목을 부제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47) 영국의 평전 작가들은 전후 초기 서독의 작가들, 특히 노르망디 전역에서 롬멜의 참모장이었던 한스 슈파이델Hans Speidel 같은 인물 처럼 롬멜을 민주주의자로 묘사하는 신화에 빠지는 경향이 덜한 것으로 보인다.48) 대신 롬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정치적인 면은 탈색시키고 군사적인 측면만 부각시키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경향의 극단으로 나간 인물이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라는 비난을 받는 데이빗 어빙David Irving이다. 어빙은 롬멜이 히틀러에 저항했다는 주장은 무시하고, ‘비열한 인상을 주는 일반적인 나치와 반대되는 착한 나치라는 반(反)악당’을 만드는 대신 롬멜의 적수들을 공격한다.49) 어빙은 독일 연방군과 나토 건설에 기여한 슈파이델이 자신의 ‘후광’으로 사용하기 위해 롬멜 신화를 이용한 핵심적인 인물이라고 보았다.50)


이러한 군사사 연구와 함께 허구의 경계에 걸쳐있는 모험담들도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주제는 ‘롬멜의 황금’이다. 이것은 아프리카 군단이 황금을 약탈해 지중해 어디엔가 숨겨두었다는 이야기인데 가히 현대의 성배 전설이라 하겠다.51)  이 이야기는 로맨틱 스파이 스릴러 소설52)과 영화53)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또 롬멜은 연합군 암살특공대가 노리는 어려운 목표물이 되기도 했다.54) 이런 이야기는 특공대를 다룬 작품의 좋은 소재였다.55) 롬멜 암살이란 이야기를 다루는 하위장르 작품들까지 등장했다.56) 이 중에는 존 케리건John Kerrigan57)이란 필명으로 알려진 찰스 화이팅Charles Whiting이 있었다. 화이팅은 레오 케슬러Leo Kessler라는 필명으로 “SS Wotan” 시리즈58)를 집필하면서 롬멜을 소재로 다뤘다. ‘사막의 여우’의 감독이었던 헨리 해서웨이Henry Hatherway는 이 영화를 촬영하고 20년이 지난 뒤 리처드 버튼Richard Burton을 주연으로 후방 특수작전을 다룬 ‘롬멜 습격작전Raid on Rommel(1971)’을 감독했다. 1970년대 영국의 어린이들은 에어픽스사에서 출시한, 먼 곳을 가리키는 롬멜과 그의 전용 장갑차 모형을 조립하곤 했으며, 오늘날도 수많은 회사들이 섬유로 만든 제복에 원수봉을 들고 있는 12인치급 롬멜 액션 피겨를 생산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에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롬멜의 지휘봉’, ‘광란의 지휘차Krazy Kommand Kar’ 같은 제품을 판매했다.59)  롬멜은 이런 식으로 신화적인 존재가 되었고, 실제의 역사적 시공간과 단절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매우 조잡한 방식으로 다루어지기도 했다.


‘훌륭한 적’에 깔린 맥락


지금까지 언급한 대중문화계에서 이루어진 논쟁을 살펴보면, 대중들은 독일에 대해 노골적이고 자연스러운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애증의 감정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러한 애증의 감정은 비교적 최근의 반사적인 반응과는 다른 보다 미묘한 것이었다. ‘훌륭한 적’이라는 기묘한 존재에는 복잡한 담론이 존재한다. 여기에는 몇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다. 독일은 더 이상 영국을 직접적으로 위협하지 않았다. 냉전과 새로운 (혹은 오래된) 적 소련에 맞서 군사력을 증강해야 하는 상황에서 영국은 ‘현실정치적 입장에서’  독일연방공화국이라는 새로운 동맹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 했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의 등장으로 영국의 지위는 추락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까지 지키려고 했던 식민지들은 독립해 버렸다. 현대전쟁의 군사기술과 1949년 소련의 핵개발로 인한 핵무기 분야의 균형상태가 이루어지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영국과 같은 국가가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최후의 재래식 전쟁이라는 인식이 형성됐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최소한 전쟁 초반에는 독일이 ‘영국만의’ 숙적이라 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항복했으며 소련은 독일과 불편한 불가침 조약을 유지하며 공존하고 있었다. 미국은 1942년에야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독일에 우호적인 과거 인식은 당시 영국의 ‘반미주의’에 덧씌워진 가면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43년 2월 카세린 고개에서 실전경험이 없는 미군이 롬멜에게 참패를 당하자 영연방군 내부에서는 이를 ‘고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에녹 파웰Enoch Powell은 알제리에서 미군을 처음 만난 뒤 이렇게 썼다. “독일이나 일본 보다 더 큰 위협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우리의 가장 끔찍한 적 미국이었다.”60)  북아프리카 전선을 다룬 창작물에서는 미국을 영광스러운 과거에서 제거하려는 문화적 분리 경향이 나타난다. 험프리 보가트Humphrey Bogart가 토치 상륙작전이 일어나기 몇달 전 부터 추축군과 싸우는 내용의 실제 역사와는 담을 쌓은 사하라(졸탄 코르다Zoltan Korda 감독, 1943)라 록 허드슨Rock Hudson과 조지 페퍼드George Peppard가 출연한 토브룩(힐러 감독Hiller, 1967) 같은 작품을 제외하면, 북아프리카 전선을 다룬 영국 영화는 소수의 영국인 등장인물을 위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초라한 현실을 직면하기 보다는 ‘최고의 시간her finest hour’을 다시 체험하고 싶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싸울만한 가치가 있는 적을 상대로 했다는 점이다. 독일군을 다루는 태도는 이탈리아군을 다루는 태도와 대비된다. 이탈리아는 1943년 부터는 연합군에 협력했지만, 영국의 전쟁영화에서는 이탈리아군을 우습고 경멸스러운 존재로 묘사했다.61)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인들은 그들이 사랑했던 금단의 존재 아돌프 히틀러가 사라진데 대한  자각하지 못하는 금단증상을 겪었다는 심성사연구가 있다.62)  마찬가지로 영국인들도 친숙한 증오의 대상이 사라지면서 고통을 겪었지만 동시에 독일과의 화해를 통해 새로운 기쁨을 얻었다. 증오와 증오의 관계에서는 타자화 과정을 통해 종종 자신과 180도 대비되는 적의 거울상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애증의 관계에서는 적에게 자신과 유사한 이미지를 투영한다. 롬멜 논쟁에 참여했던 ‘한 심리학자’는 영국인들이 롬멜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려 한 것을 사냥꾼이 전리품을 챙기는 행위, 또는 동성애 성향을 가진 집단행위로 묘사했다.


“이런 신사적인 행동은 남자다움을 강조하는 사람, 전쟁의 정치적, 인간적 중요성을 외면하고 전쟁을 게임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63)


어렸을 때 맞은 경험에 대해서는 별 거 아니라고 회고하는 식이다.


“강한 사람에게 단련 받는 것을 즐기고 여성성 보다 남성성을 찬양하는 것은 훌륭한 전사를 만들어 주는 미덕이다…. [롬멜은] 우리 영국인들에게 패배를 안겨주었으며 팽팽한 대결 끝에 패배한 독일 장군이었다.”64)


영국과 독일의 관계가 강화된 원인은 부분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문화적 친밀성이 바탕에 깔려있다. 영국의 문화는 이미 호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점은 영국인들 역시 독일과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을 ‘전사 민족’으로 생각했음을 보여준다.65) 규율과 의무, 그리고 헌신은 세계의 모든 보수주의자들을 묶어주는 가치였다. 전쟁을 ‘공정한 규칙’에 따라 치러야 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인들의 공정함에 대한 관념은 총력전의 시대에 맞지 않는 괴상한 것이었지만 이 때문에 패배한 적이라도 존중할 수 있었다. 북아프리카 전선의 싸움은 운동경기에 비유되었다. 몬티는 “아프리카에서 적에게 한방 먹이려 했었다.” 그리고 독일 국방군에 대한 억눌린 선망의 감정도 있었다. 독일군은 동등한 조건에서 대개 연합군 보다 우월했으나 물질적인 열세 때문에 패배했다.66) 장교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기동전을 수행했다는 점은 부분적으로 현대적인 소모전을 거부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즉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부터 벗어난 것으로 여겨졌다.) 동시에 나치 독일에 대한 전쟁을  ‘재군사화’ 하는 것은 이 전쟁에 대한 묘사를 순수하게 군사적인 것으로 한정하고 정치적 표현을 하지 않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독일 국방군이 서부전선에서 수행한 전투는 물론 동부전선에서 수행한 처참했던 소련과의 전투에 대해서도 명예를 회복시켜주려는 위험한 징조였다. 동부전선의 독일 국방군을 낭만적으로 묘사한 미국 대중문화를 연구한  최근의 연구서에서는 미국인들의 반공적 소망이 영화와 워게임, 그리고 역사재현단체 등을 통해 과거에 투영된 것이라고 지적했다.67)  롬멜이 저지른 과오는 밝혀지지 않는 것이 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롬멜은 비교적 평이 좋았고 이 때문에 더 많은 과오를 저지른 다른 독일군 장교들을 복권시키는데 이용됐다. 노샘프턴의 노동당 하원의원 레지널드 페이젯Reginald Paget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전범 재판에서 그를 변호하며  만슈타인의 지휘하에 벌어진 대게릴라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독일군이 빨치산을 상대로 공정한 규칙에 따라 싸웠어야 한다는 주장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68) 영국의 오드햄스Odhams 출판사는 건강 악화를 이유로 전범재판 기소를 피한 룬트슈테트의 전기69)를 발행하면서 룬트슈테트가 1944년 7월 20일의 히틀러 암살미수사건 관계자들을 폄하한 사실은 숨기고 넘어갔다.70) 1950년대 초반에는 영국과 독일에서 독일 국방군에 긍정적인 인상을 주고자 협력했기 때문에 독일군 장성들의 회고록을 두고 별다른 논쟁이 없었다. 영국에서 먼저 독일 국방군을 미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과거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선전기구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 수정주의적인 주장을 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파울 카렐Paul Carell은 동부전선에 대한 수정주의적 관점의 역사서를 기술하기 전에 먼저 롬멜에 대한 책을 집필했다.71) 파울 카렐의 저작들은 번역되어 영어권 국가에도 소개됐다. 파울 카렐을 격찬한 영국과 미국의 독자들은 그의 본명이 파울 카를 슈미트Paul Carl Schmitt이고 리벤트로프의 외무부에서 언론담당관으로 재직한 친위대 중령이었단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영화의 대본 같은 문화적 산물을 다룰 때는 냉전 정치의 배경 뿐만 아니라 해당 장르의 일반적인 규칙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훌륭한 적’이라는 소재는 정치적 필요 뿐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각본가들은 적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묘사하면 관객들이 흥미를 잃을 것이라고 걱정한다. 대부분의 선전 영화들은 사상 개조를 위한 줄거리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등장인물 중에는 다소 갱생의 여지를 가진 사람이 포함돼야 했다.  좋은 작품에는 사악한 인물과 대비되는, 흠은 있으나 본성은 착한 인물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작품 내에서 (현실에서는 한 사람에게 모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심리를 가진 상호보완적인 한 쌍의 등장인물을 등장 시키게 된 것이다. 전형적인 방식은 성별로 구분하여 착한 독일인은 여성, 사악한 나치는 남성으로 한 것이다. 대표적인 작품은 바실 디어든Basil Dearden이 1947년에 감독한 프리다Frieda라는 작품이 있다. 일링Ealing 영화사에서 제작한 이 작품은 영국인과 결혼해 영국에 이주한 독일인 신부가 주인공으로, 주인공과 대립하는 인물은 그녀의 오빠인 구제불능의 나치 광신자 리키Ricki이다. 주인공 프리다는 전통적인 여성 역할인 순종적 부인으로 가상의 마을 덴필드 주민들의 적대감을 해소해 나간다.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프리다 같은 사람이 당신의 동네에 살아도 되겠습니까?’라는 질문과 ‘예’라는 답을 받게 된다. 반면 독일 국방군 포로인 리키는 호전적이고 광신적인 말만 하다가 끝내 패배한다.72)
그러나 이런 이분법적인 방식에는 대가가 따른다. 전쟁 직후의 영화에 부정적인 이미지의 독일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주 많았다. 하지만 부정적인 이미지의 독일인은 전형적인 ‘사악한 나치’로 한정됐다. 영국인들이 떠올리는 사악한 나치의 스테레오타입은 그들의 상상속에서 거위걸음으로 행진하는 모습이었다. 전형적인 사악한 나치/착한 독일인을 대비시키는 구도는 포로수용소를 다룬 작품에서 잘 나타났다. 이 경우에는 연합군 포로들과 친위대/게슈타포를 상대로 두 개의 전쟁을 치루는 명예로운 수용소 지휘관이 등장인물이었다. 이런 소재를 다룬 초기의 영국영화로는 The Captive Heart(디어든Dearden 감독, 1946)가 있다. 카렐 슈테파넥Karel Stepanek이 연기한 게슈타포 요원 포르스터는 외알 안경을 쓰고 방수 코트를 입고 다니는 인물로 심지어는 수용소 경비병들과도 친하지 않은 인물이다. Albert, R.N.(길버트Gilbert 감독,1949)에 등장하는 자상한 이미지의 독일 해군 지휘관은 매부리코의 배우 안톤 디프링Anton Diffring이 연기한 친위대원과 갈등을 빚는다. 안톤 디프링이 연기한 친위대원은 이후의 작품에서 사악한 나치의 전형이 되었다. 이러한 대립 구도는 스스로를 패러디할 때 까지 꾸준히 계속됐다. The Colditz Story(해밀턴Hamilton 감독, 1955)에서는 포로수용소 생활을 마치 영국의 어린이들이 불량배들을 골탕먹이는 수준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이런 주제의 영화에도 작은 변형이 있었다. 초기의 작품들은 장교들 간의 이야기를 다루었던 반면, 후기의 포로 수용소 영화들은 병사 포로와 경비병들간의 무산계급적 연대를 보여주는 형태였다. 코미디 영화 The Password is Courage(스톤Stone 감독, 1962)에서 런던 출신의 딕 보가드는 모자라 보이는 독일군 부사관을 조롱하기도 하고 보호해 주기도 한다. 이 장르가 새로운 이야기 방식을 필요로 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탈주자The One That Got Away(워드 베이커Ward Baker 감독, 1957)에는 독일군이 포로로 나온다. 이 영화는 새로운 스타 하디 크뤼거Hardy Krüger의 영국 무대 대뷔작이었는데 당대의 영국배우들과 달리 강인하고 매력적인 외모를 지녔고 엄청난 남성성을 과시했기 때문에 영국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73) 영국 관객들은 수용소를 탈출하려는 독일 공군 조종사를 응원하게 되었다. 이것은 감독이 ‘동성애자, 프로이센 장교, 게슈타포의 고문 기술자, 또는 맥주에 쩔은 바이에른 인’ 같은 스테레오타입을 극복한 결과였다.74)  존 램스덴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영국과 독일의 화해에 있어 중요한 요인은 재정 문제였다고 한다. 영국 영화 업계는 영국 국내시장 만으로는 이윤을 늘릴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 유럽, 그리고 독일 영화 시장을 노렸다. ‘탈주자’는 서독에서 큰 흥행을 거뒀으며 300만 파운드를 벌어들였다.75)  아더 랭크J. Arthur Rank가 언론홍보자료에서 밝힌 것 처럼 영화배우들은 새로운 문화 외교관이었다. “외교부는 영화배우들에게 보너스를 줘야 합니다. ‘탈주자’는 ‘독일인’에 대한 반감과 편견을 없애는데 아주 효과가 좋았습니다.”76) 하디 크뤼거는 이 영화가 개봉한 뒤 해외 활동에 대한 공헌으로 독일연방공화국공로장을 받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첫 번째 언론회견에서 영국 기자가 크뤼거에게 과거 나치 활동에 연루되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크뤼거는 그런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크뤼거의 영화 데뷔작은 알프레드 바이더만의 1944년작 Junge Adler였다.77)


‘탈주자’는 영국과 독일의 화해를 다룬 가장 유명한 영화였다. 하지만 이 영화 말고도 다른 작품이 있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So Little Time(베넷 감독Bennett, 1952)에서 영국배우 마리우스 고링Marius Goring은 벨기에에 주둔한 독일 장교 역할을 맡았고 신인 배우 마리아 쉘Maria Schell이 젊은 여백작 역할을 맡았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적막은 독일 장교가 사랑의 노래를 부르면서 깨지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고링은 파웰Powell과 프레스버거Pressburger의 작품 Ill Met by Moonlight(1957)에서도 유사한 역할을 맡았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전쟁 중에는 가장 유명한 반독일영화 The Life and Death of Colonel Blimp(1943)을 제작했다. 이 영화에서는 안톤 월브룩Anton Walbrook이 귀족 집안의 독일 장교 역할을 맡아 영화의 막바지에 신념에 차 파시즘에 반대하게 된다.  Ill Met by Moonlight는 1944년 크레타에서 있었던 크라이페 장군 납치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로 주인공들이 산을 가로지르는 장면에서 영국인의 아마추어적인 모습과 독일인의 정확한 모습을 다소 코믹하게 대조시켰다.78)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크라이페 장군은 추격대가 찾을 수 있도록 조심해서 표시한 것들을 영국군 특공대가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제거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크라이페 장군은 영국 특공대의 진정한 프로페셔널리즘에 감복해 경례를 한다.
파웰과 프레스버거가 이전에 제작했던 라 플라타강 전투The Battle of the River Plate(1956) 에서도 피터 핀치Peter Finch가 연기한 랑스도르프Hans Langsdorff 함장에 대한 시선은 동정적이며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비극적인 영웅으로 묘사한다. 이 영화와는 반대로 전쟁 중에 같은 소재로 만들어진 For Freedom(엘비Elvey, 나이트Knight, 1940)에서는 독일측을 그리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았다. 라 플라타강 전투에서는 독일 장교의 기사도적인 모습과 그라프 쉬페호의 마지막 순간을 보도하는 무신경한 미국 언론의 모습을 대비시키고 있다. 이 영화를 본 영국 관객이 누구의 입장에 공감할 것인지는 명확하다.


또한 영국과 독일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독일인 배우를 사악한 나치로 캐스팅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벌지 전투The Battle of the Bulge(아나킨Annakin 감독, 1965)의 광신적인 기갑 장교는 로버트 쇼Robert Shaw가 연기했다. 폴 스코필드Paul Scofield는 The Train(프랑켄하이머Frankenheimer 감독, 1964) 에서 미술 애호가 이면서 인질을 가차없이 죽이는 인물을 연기했다. 영국에서 제작했거나 영국인 배우가 나오는 전쟁 영화 중 많은 수가 독일군의 제복에 대한 판타지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복장도착이라고 부를 만 하다. 나치 독일은 패망했지만 독일 국방군은 나치의 프로파간다에 나타난 것 보다도 더 멋지게 표현되었다. 스코틀랜드 작가 알래스테어 맥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나바론의 요새The Guns of Navarone(1961)에서 그레고리 펙과 데이빗 니븐은 독일군으로 위장하는데, 이와 같은 장면은 역시 맥린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독수리 요새Where Eagles Dare(1968)에도 나온다. 또한 급행탈출Von Ryan’s Express(1965)에서는 연합군 포로들이 탈출하면서 독일군으로 위장하는데 영국 군종장교가 인질로 잡은 독일 장교의 제복을 입는 장면은 이 영화에 코믹함을 더해준다. 독일군들도 위장한 영국 군종장교에게 속아넘어가는데 이중 한명은 카메라에 대고 ‘이런. 나치당원이잖아!’라고 말한다. 진지하게 말하면, 이런 복장도착은 도덕적 선을 넘는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행위이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폴란드계 작가 표트르 우클란스키Piotr Uklanski는  독일 국방군 제복을 입은 헐리우드 배우들을 촬영한 사진 전시회의 관람객들은 독일군을 미화하는 것에 동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한 바 있다.79) 또한 어떤 경우에는 관객들이  극중의 독일군에 완전히 동조하기까지 한다. ‘독수리 내리다The Eagle Has Landed(Sturges, 1976)는 카발칸티의 Went the Day Well?(1942)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1942년 작에서는 독일군 제5열이 냉담한 태도 때문에 민간인들에게 정체를 들키게 된다. 그러나 ‘독수리 내리다’의 관객들은 오히려 마이클 케인이 연기한 독일 공수부대원을 응원한다.80)


다시 북아프리카 전선 이야기로 돌아가자. 북아프리카 전선은 1950년대에 만들어진 여러편의 전쟁영화의 무대였다. 사막은 화해라는 서사의 완벽한 무대였으며 또한 자연이라는 공동의 적이 실존의 문제를 제기하는 장소였다. 영국 영화 ‘Ice Cold in Alex’(톰슨Thompson 감독, 1958)는 사악한 나치가 교화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영화에서 남아프리카군 낙오병으로 위장한 독일 스파이는 개심하여 연합군에 합류하는 ‘착한 독일인’이 된다. 이 영화는 텍스트적인 측면에서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히치콕의 ‘구명정Lifeboat’(1944)를 연상시킨다. 이 영화에서도 독일인은 괴력을 발휘해 자신의 적을 돕는다. 하지만 Ice Cold in Alex의 연합군은 독일인을 내쫒지 않으며 오히려 카타라 분지의 모래늪에 빠진 독일인을 구하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쓴다. 루츠 대위는 영화 마지막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장면에서 ‘모두가 사막이라는 거대한 적에 맞서 싸웠다’고 말한다.  이와 비슷하지만 보다 서정적이고 비극적인 작품으로는 프랑스-스페인-서독 합작영화 Un Taxi pour Tobrouk(데 라 파테유de La Patelliere감독, 1960이 있다. 이 영화에서 하디 크뤼거는 리노 벤투라와 협력해서 지뢰밭을 뚫고 나가지만 결국 연합군의 오인 사격에 쓰러지고 만다. 크뤼거는 ‘피닉스Flight of the Phoenix’(알드리치Aldrich 감독, 1965)에서 그가 기존에 했던 배역과 비슷하게 사막에 조난된 석유기술자들과 힘을 합쳐서 추락한 비행기가 다시 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술자를 연기했다. 1950년대 북아프리카 전선을 다룬 영화 중 나쁜 독일인을 묘사한 유일한 작품은 ‘젊은 사자들The Young Lions(드미트릭Dmytryk 감독, 1958) 정도이다. 이 영화에는 잠든 영국군 병사들을 학살하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이런 작품조차 불편한 부분은 제거했다. 원작 소설에 나오는 반영웅 캐릭터인 독일군 부사관은 부상당한 영국군 포로를 죽이라는 명령을 어쩔 수 없이 따른다. 하지만 영화판에서 말론 브란도가 연기한 크리스티안 디틀은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 어째서 그랬는가? 당시 20세기폭스사의 최고경영자였던 버디 아들러Buddy Adler는 이렇게 설명했다.
“각본에 좋은 독일인도 있다는 장면을 넣은 것은 매우 훌륭했다. 독일군인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나치는 아니라는 묘사이다. 만약 이런 장면을 넣지 않는다면 오늘날 서독이라 하더라도 이 영화를 상영하지 못할 것이다. … 잘 만든 영화는 독일에서 백만달러는 벌어들일 수 있다.”81)


여기서 영국의 역사와 독일의 역사가 교차한다. 1950년대의 영화는 물론 도서 출판은 갈수록 국제적인 사업이 되어갔다. 1990년대의 국방군 논쟁은 대부분 독일 내의 문제로서 다루어 졌으며 전후 독일, 그 중에서도 특히 서독의 전후 문제로 다루어졌다.82) 하지만 영국과 미국이 깨끗한 독일 국방군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공모한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깨끗한 독일 국방군이라는 신화화는 국제적인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 에르빈 롬멜은 끔찍한 전쟁 범죄자가 아니었을 것이며, 전쟁 범죄자라기 보다는 여행의 동반자와 같은 인물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막의 여우’에 대한 영화평 중 하나는 이런 영화는 당시의 독일에서 제작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외국인이 독일 역사의 한 장을 열었다. 이 영화는 히틀러의 테러에 저항한 ‘또 다른 독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완고한 사람들에게 증거가 될 것이다. 우리 독일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충분한 거리를 두고 설득력 있는 서사를 만들기 힘들었을 것이다.”83)


버벨 베스터만Bärbel Westermann은 이 영화로 인해 서독에서 전쟁 영화 제작에 대한 금기가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전쟁 영화 제작은 아무런 반성 없이 상무적 가치로 회귀하는 게 아니었다. 최근 이 학술지에 실린 논문 중 한편은 독일의 자유주의적 평론가들이 1957년 개봉한 영국의 반전영화 ‘콰이강의 다리’에 대해 대영제국을 찬미하고 있으며 인종주의적인 성향이 내재되어 있다고 비판했음을 지적했다.85) 몇몇 독일 평론가들은 ‘콰이강의 다리’가 국적을 불문하고 꺾이지 않는 전쟁 포로들의 의지를 보여준다고 평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들은 소련에 억류되었던 독일군 포로들을 생각했을 수도 있다. 즉 문화 창작물은 지리적 경계를 뛰어넘으면서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영국 영화제작자들은 좋은 의도에서 독일군을 훌륭하게 묘사했지만 여기에는 위험성이 있었다. 리델 하트와 같은 영국 역사가들은 암암리에 독일군이 전쟁법규에 저촉되는 행위를 저지른 지역을 포함해 독일 국방군의 모든 행적에서 과오를 제거했다. 이들의 저작은 다시 독일어로 번역되어 독일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어두운 과거에 정당성을 부여하도록 만들었다.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정치적 책임을 깔끔하게 흑백논리로 구분할 수 는 없겠지만, 그것은 최소한 검은색과 회색field gray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일 국방군을 ‘훌륭한 적’으로 재창조한 것은 전후 영국의 정체성을 남성적이고 탈 미국적으로 재건하고자 하는 필요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86) 영국인들은 비교적 최근의 과거로 부터  상무적인 기풍을 부활시키려다 반전영화가 아니라 다소 위험한 전쟁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좋은 독일인’에 대한 묘사는 ‘사악한 나치’에 대한 강박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대신 독일인들을 달래기 위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물이었다.


주석
1) Anthony Aldgate and Jeffrey Richards, Britain Can Take It: British Cinema in the Second World War (Oxford, 1986); James Chapman, The British at War: Cinema, State and Propaganda, 1939 – 1945 (London, 1998); S.P. ackenzie, British War Films, 1939 – 1945 (London, 2000).
2) Ian Christie, The Life and Death of Colonel Blimp: Powell and Pressburger (London, 1994); A.L. Kennedy, The Life and Death of Colonel Blimp (London, 1997).
3) Mark Connelly, We Can Take It! Britain and the Memory of the Second World War (Harlow, 2004), pp. 267 – 99.
4) John Ramsden, ‘ Refocusing “ The People’s War ” : British War Films of the 1950s ’ ,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 33 (1998), pp. 35 – 64, here p. 35.
5) Norman Davies, Europe at War, 1939 – 1945: No Simple Victory (London, 2006), p. 439.
6) Roberts to Strang, 29 Apr. 1952, The National Archives (Kew), FO 1110/528.
7) Desmond Young, Rommel (London, 1950).
8) Sunday Express (8 Jan. 1950).
9) Life (8 Oct. 1951).
10) Ibid ., p. 23.
11) Winston S. Churchill, The Grand Alliance (Boston, MA, 1950), p. 200.
12) Young, Rommel , p. 190.
13) Manchester Guardian (25 Jan. 1950).
14) Sunday Times (22 Jan. 1950).
15) Rommel: A Great Soldier ’ , Manchester Guardian (23 Jan. 1950).
16) Evening Standard (24 Jan. 1950).
17) Reuth, Rommel , pp. 121 – 61.
18) Cyril Kersh, The People (22 Jan. 1950); Jon Kimche, ‘ The White Knight ’ , Tribune (27 Jan. 1950).
19) E.T. Williams, ‘ The Rommel Legend ’ , Observer (22 Jan. 1950).
20) ‘ The Rommel Myth Debunked ’ , Picture Post (1 Apr. 1950), pp. 39 – 41.
21) George Malcolm Thomson, ‘ The fascinating story of a swashbuckling general ’ , Evening Standard (25 Jan. 1950).
22) ‘ Rommel: A Flattering and Unconvincing Portrait ’ , Daily Telegraph (23 Jan. 1950).
23) The New Statesman and Nation (28 Jan. 1950).
24) Picture Post, 1 Apr. 1950, p. 41.
25) Why should we idolise Rommel? ’ , Picture Post (18 Mar. 1950), pp. 25 – 9.
26) Johnson to Young, 26 Oct. 1951, Boston University — Howard Gotlieb Archival Research Center, Nunnally Johnson collection, box 7/61; see also Brian C. Etheridge, ‘ The Desert Fox, Memory Diplomacy, and the German Question in Early Cold War America’, Diplomatic History , 32 (2008), pp. 207 – 238.
27) The Times (10 Oct. 1951).
28) Daily Express (4 Oct. 1951).
29) ‘ War widows say “ Free wife who shouted at Rommel ” ’ , Herald (5 Nov. 1951).
30) Manchester Guardian (29 Feb. 1952); Rundschau am Montag (6 Oct. 1952).
31) Neue Zeitung (21 Oct. 1951).
32) Liddell Hart to editor of Daily Herald , 21 Nov. 1951, Liddell Hart Centre for Military Archives, King’s College London, Basil Liddell Hart papers, 9/24/34.
33) Basil Liddell Hart, The Other Side of the Hill: Germany’s Generals — Their Rise and Fall, with Their Own Account of Military Events, 1939 – 1945 (2nd edn, London, 1951), pp. 76 – 85. In German this appeared as Jetzt dürfen sie reden: Hitlers Generale berichten (Stuttgart, 1950).
34) Ibid ., p. 76.
35) Alaric Searle, ‘ A Very Special Relationship: Basil Liddell Hart, Wehrmacht Generals and the Debate on West German Rearmament, 1945 – 1953 ’ , War in History , 5 (1998), pp. 327 – 57.
36) 예를 들면, Heinz Guderian, Panzer Leader (London, 1952), pp. 11 – 15; Erich von Manstein, Lost Victories: The War Memoirs of Hitler’s Most Brilliant General (London, 1958), pp. 13 – 16 등이 있다.
37) John J. Mearsheimer, Liddell Hart and the Weight of History (London, 1988).
38) Basil Liddell Hart (ed.), The Rommel Papers (London, 1953); Erwin Rommel with Lucie Rommel and Fritz Bayerlein (eds), Krieg ohne Haß (Heidenheim, 1950).
39) Liddell Hart (ed.), Rommel Papers , p. xiv.
40) Illustrierte Film-Bühne , Nr. 1985.
41) BLH handwritten notes, LHCMA, Basil Liddell Hart papers, 9/24/35.
42) Daily Express (18 Sept. 1952).
43) Kenneth Macksey, Rommel : Battles and Campaigns (London, 1979).
44) Ronald Lewin, Rommel as a Military Commander (London, 1968).
45) Ronald Lewin, The Life and Death of the Afrika Korps (1977; Barnsley, 2003), p. 21.
46) David Fraser, Knight’s Cross: The Life of Field Marshal Erwin Rommel (London, 1994).
47) John Bierman and Colin Smith, Alamein: War without Hate (London, 2002).
48) Hans Speidel, Invasion 1944: Ein Beitrag zu Rommels und des Reiches Schicksal (Tübingen and Stuttgart, 1949), translated as Invasion 1944: Rommel and the Normandy Campaign (Chicago, 1950).
49) David Irving, The Trail of the Fox: The Life of Field Marshal Erwin Rommel (London, 1977), p. 5.
50) Ibid ., p. 408.
51) Peter Haining, The Mystery of Rommel’s Gold: The Search for the Legendary Nazi Treasure (London, 2004).
52) Maggie Davis, Rommel’s Gold (London, 1971).
53) Il Tesero di Rommel (Marcellini, 1955).
54) Michael Asher, Get Rommel: The Secret British Mission to Kill Hitler’s Greatest General (London, 2004).
55) Jon E. Lewis (ed.), The Mammoth Book of Special Forces: Over 30 Missions of Ultimate Danger Behind Enemy Lines, from the Attempted Assassination of Rommel to the Iraq War (Philadelphia, 2008).
56) Steven Pressfield, Killing Rommel (New York, 2008).
57) John Kerrigan, Kill Rommel (Sutton, 1995).
58) Leo Kessler (Charles Whiting), Rommel’s Last Battle (Sutton, 2006).
59) Dennis Showalter, Patton and Rommel: Men of War in the Twentieth Century (New York, 2005), p. 1.
60) Simon Heffer, Like the Roman: The Life of Enoch Powell (London, 1998), p. 75.
61) 심지어는 영국과 이탈리아의 화해를 목적으로 제작된 영화 The Best of Enemies (Hamilton, 1962) 조차도 이탈리아군을 만화에 나올법한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로 묘사했다. 사실 이탈리아군을 희화하 하는 것은 전쟁 중에 제작된 Five Graves to Cairo (Wilder, 1943)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62) Alexander and Margarete Mitscherlich, Die Unfähigkeit zu trauern: Grundlagen kollektiven Verhaltens (Munich, 1967).
63) ’ Why Rommel goes down with Sportsmen ’ , Picture Post (1 April 1950), p. 43
64) Ibid.
65) Michael Paris, Warrior Nation: Images of War in British Popular Culture (London, 2000).
66) John Laffin, Jackboot: The Story of the German Soldier (1965; Thrupp, 2003), p. vii.
67) Ronald Smelser and Edward J. Davies, The Myth of the Eastern Front: The Nazi-Soviet  War in American Popular Culture (Cambridge, 2008), esp. pp. 187 – 222.
68) R.T. Paget, Manstein: His Campaigns and His Trial (London, 1951), p. 139.
69) Guenther Blumentritt, Von Rundstedt: The Soldier and the Man (London, 1951).
70) Donald Bloxham, Genocide on Trial: War Crimes Trials and the Formation of Holocaust History and Memory (Oxford, 2001), p. 46.
71) Paul Carell, Die Wüstenfüchse: Tatsachenbericht (Hamburg, 1958), 이 책은 2년뒤 영어로 번역됐다. 또한 Wigbert Benz, Paul Carell: Ribbentrops Pressechef Paul vor und nach 1945 (Berlin, 2005)를 참고하라.
72) Charlotte Brunsdon and Rachel Moseley, ‘ She’s a foreigner who’s become a British subject: Frieda ’ , in Alan Burton et al. (eds), Liberal Directions: Basil Dearden and Postwar British Film Culture (Trowbridge, 1997), pp. 129 – 36.
73) Melanie Williams, ‘ “ The Most Explosive Object to Hit Britain since the V2! ” : The British Films of Hardy Krüger and Anglo-German Relations during the 1950s ’ , Cinema Journal , 46, 1 (2006), pp. 85 – 107.
74) Roy Ward Baker, The Director’s Cut: A Memoir of 60 Years in Film and Television (London, 2000), p. 99.
75) Sue Harper and Vincent Porter, British Cinema of the 1950s: The Decline of Deference (Oxford, 2003), p. 48.
76) J. Arthur Rank, ‘ Presse-Information ’ for Einer kam durch , Bundesarchiv-Filmarchiv, 3364.
77) Ramsden, Don’t Mention the War , pp. 295 – 324.
78) Michael Powell, Million Dollar Movie (New York, 1995), p. 352.
79) Piotr Uklanski, The Nazis (Zurich, 1999).
80) S.P. Mackenzie, ‘ Nazis into Germans: Went the Day Well ? (1942) and The Eagle Has Landed (1976) ’ , Journal of Popular Film and Television , 31 (2003), pp. 83 – 92.
81) Buddy Adler, ‘ Memorandum on First Draft Continuity of 4/25/57 ’ , 15 May 1957,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Doheny Library, 20th Century-Fox collection.
82) Michael Schornstheimer, ‘ “ Harmlose Idealisten und draufgängerische Soldaten ” : Militär und Krieg in den Illustriertenromanen der fünfziger Jahre ’ , in Hannes Heer and Klaus Naumann (eds), Vernichtungskrieg: Verbrechen der Wehrmacht 1941 bis 1944 (Hamburg, 1995), pp. 634 – 50.
83) Kurier (11 Oct. 1952). Emphasis in original.
84) Bärbel Westermann, Nationale Identität im Spielfilm der fünfziger Jahre (Frankfurt/Main, 1990), pp. 51 – 67.
85) Anne-Marie Scholz, ‘ The Bridge on the River Kwai (1957) Revisited: Combat Cinema, American Cinema and the German Past ’ , German History , 26 (2008), pp. 219 – 50.
86) Christine Geraghty, British Cinema in the 1950s: Gender, Genre and the ‘ New Look ’ (London and New York, 2000), pp. 175 – 95. 존 레논이 출연했으며, 전쟁영화들을 비튼 독특한 코미디 영화 How I Won the War (Lester, 1967)는 이러한 장르에 대한 자기 비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남성적인 기독교 문화와 독일 파시즘을 동일하게 묘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