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10일 수요일

백선엽 회고록의 숙군 당시 박정희 구명에 관한 서술

백선엽의 회고록은 여러 차례 출간된 바 있습니다. 백선엽 회고록의 사료적인 가치는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창군 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 백선엽의 회고는 내용이 풍부한데다 백선엽의 지위 때문에 흥미로운 내용이 많습니다. 그런데 회고록이 여러 차례 나오다 보니 어떤 부분에서는 서술에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숙군당시 체포된 박정희가 구제되는 과정입니다.

여기서는 2009년 시대정신에서 간행한 『군과 나』와 2012년 책밭에서 간행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에 실린 내용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한편 숙군 과정에서 중형이 선고된 군인 중 유일하게 구제된 경우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박정희 소령이었다. 방첩대 수사반은 남로당 군사책 이재복李在福이 육군사관학교에 조직을 침투시켜 일부 중대장을 통해 생도들까지 좌익 활동에 가담시킨 사실을 포착했다. 이 수사에서 용의자의 한 사람으로 체포된 사람이 육사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했었고, 당시 육본 작전교육국 과장이던 박 소령이었다.

숙군 1단계 작업이 완결될 즈음인 1949년 초 어느 날, 방첩대 김안일 소령(준장 예편ㆍ육사)이 나에게 “박 소령이 국장님을 뵙고 꼭 할말이 있다고 간청하고 있으니 면담을 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박 소령이 조사 과정에서 군내 침투 좌익 조직을 수사하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점도 강조했다. 사실 사관학교 등 군내 좌익 조직 수사는 최초 단서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었다.

나는 면담을 승낙했다. 당시 내 사무실은 국방부와 방첩대 두 곳에 있었다. 내가 박 소령을 만난 곳은 명동 구 증권거래소 건물 3층 정보국장실이었다. 박 소령은 한참을 묵묵히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를 한번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작업복 차림의 그는 초췌해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태도는 전혀 비굴하지 않고 시종 의연한 자세였다. 평소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들어 알고 있었으나 어려운 처지에서도 침착한 그의 태도가 일순 나를 감동시켰다. 그래서였을까.

“도와드리지요.”

참으로 무심결에 내 입에서 이런 대답이 흘러나왔다.

약 20분간 면담을 마치고 그를 돌려보냈다. 나는 일단 내 입으로 한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당시 숙군 작업은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로버츠 미 군사고문단장도 간여하고 있었다. 나는 정보국 고문관 리드 대위로 하여금 참모총장 고문관 하우스만 대위와 로버츠 준장에게 박 소령 구명에 관해 양해를 구했다. 동시에 육군본부에 재심사를 요청했다. 육본은 참모회의를 거쳐 형집행정지를 내렸고, 박 소령을 불명예 제대시키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백선엽, 『군과 나』(시대정신, 2010), 416~417쪽.

2012년에 나온 회고록에서 서술하는 내용은 약간 미묘하게 다릅니다.

박정희 소장, 그는 내가 군대 생활을 하면서 자주 머리에 떠올렸던 인물은 아니었다. 그 또한 나와는 함께 근무한 적이 없어 개인적인 관계만을 따지면 특히 걸릴게 없는 사이였다. 그러나 그는 어느 한순간 숙명처럼 내 앞에 다가온 적이 있다. 아주 결정적인 장면이었으나, 나는 그가 나중에 5ㆍ16을 일으키고 대통령 자리에 오른 뒤 그를 떠올릴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만큼 그는 내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군인은 아니었다.

그는 1948년 좌익 남로당의 군사책이라는 혐의를 받아 숙군 작업에 걸려들었다. 단심인 군사재판에서 결국 무거운 혐의를 벗지 못해 사형을 판결 받고 말았다. 나는 당시 숙군작업을 모두 지휘하는 입장이었고, 그는 밧줄에 묶인 사형수로서 지금의 명동에 있던 증권거래소 지하 감방에 갇혀 있었다.

나는 이전에 내가 펴낸 회고록에서 이를 자세히 서술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1949년 1월 어느 날 그는 내 앞에 나타났다. 군 생활을 하면서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어 그의 얼굴을 나는 기억했다. 그는 수갑을 찬 상태였다. 그의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인 정보국 방첩과 김안일 과장이 그 만남을 주선했다.

나는 숙군을 지휘하는 정보국장이어서 김안일 과장이 마지막으로 그의 동기생인 박정희의 구명 가능성을 타진해보기 위해 만든 자리였다. 퇴근 무렵 내 사무실에 들어선 박정희 당시 소령은 구명을 위해 내 앞에 섰으나, 분위기는 매우 침착해 보였다. 그는 내가 먼저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권유에도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다소 긴 침묵이 흐른 뒤 그는 “한 번 살려 주십시요...” 라면서 말끝을 흐리다가 눈물을 비치고 말았다. 나는 그 모습이 어딘가 아주 애처로워 보였다. 당시 그의 혐의 자체는 무거웠으나 실제 남로당 군사책으로 활동한 흔적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숙군작업의 진행을 위해 솔직하게 남로당 군사 조직을 조사팀에게 제공해 개전의 여지를 보였다.

나는 그런 내력을 감안해 그의 구명 요청을 들은 뒤 “그럽시다. 한 번 그렇게 해 봅시다”라고 말했다. 이어 나는 육군 최고 지도부에 그의 감형을 요청했고, 결국 그는 풀려나 목숨을 구했다. 나는 또 군복을 벗게 된 그의 생계를 염려해 정보국 안에 민간인 신분으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그 후 나는 정보국에 김종필을 비롯한 나중의 5ㆍ16 핵심 멤버를 이룬 육사 8기생 31명을 선발해 정보국에 배치했다. 역사의 우연이라면 큰 우연이다. 나는 꺼져가는 박정희의 생명을 붙잡았고, 결국 육사 8기생까지 선발해 그와 만나게 한 셈이었다.

백선엽,『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책밭, 2012), 124~125쪽.

뭔가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서술입니다. 2012년에 나온 회고록에 실린 내용은 진영에 따라서 아주 재미있게 다룰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