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6일 금요일

한국전쟁 초기 미군의 대전차전 준비에 관한 잡담


사실 지금 할 이야기는 다들 잘 아시는 이야기라서 진부한 감이 없진 않습니다. 그래도 생각난 김에 적어 봅니다. 진부하더라도 참아 주시길.

1950년 7월 5일 스미스 특임대가 패배하자 미육군본부에서는 부랴부랴 대응책 마련에 나섭니다. 그 중 하나가 3.5인치 바주카포를 생산해 보급하는 것 이었는데 7월 7일에 미합동참모본부의 카이저(C. A. Kaiser) 대령이 합참 전술지원위원회(Tactical Support Board)의 피어슨(Albert Pierson) 준장에게 보낸 보고서를 보면 트루먼 행정부 초기의 군축으로 육군이 상당히 곤궁한 상황에 처해 있었음이 드러납니다.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의 허친슨(Hutchenson) 대령은 일본 및 한국의 보급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알려주었습니다. 
   a. 전쟁이 시작됐을 당시 육군은 일본에 60일치에 해당하는 모든 종류의 보급품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이 60일치의 보급품을 소모하기 전 까지는 일선 부대에 재보급을 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다만 여기에 3.5인치 바주카포와 무반동포는 해당되지 않는다.
   b. 3.5인치 바주카포 20문과 탄약 1,000발, 바주카포 운용 교육을 담당할 장교 1명과 사병 2명이 비행기 편으로 출발했으며 월요일인 7월 10일에 일본에 도착할 예정이다.
   c. 추가로 3.5인치 바주카포 100문과 탄약 4,000발을 곧 비행기 편으로 보급할 예정이다.
   d. 이에 더해 매 3일마다 3.5인치 바주카포 포탄 600발을 보급할 예정이다.
   e. 육군본부 작전참모부가 유럽 방면에 보내기 위해 비축하도록 한 분량을 제외하고, 최대 900문의 3.5인치 바주카포와 여분의 바주카포 포탄은 공장에서 생산되는 즉시 선박편으로 보급할 것이다.
"Memorandum for Brigadier General Albert Pierson"(1950. 7. 7), RG218 Records of U.S. Joint Chiefs of Staff, Chairman's File: General Bradley, 1949-53, Box1

e. 항을 보면 미국의 안보정책에서 제1순위에 있던 유럽 방면 마저 3.5인치 바주카포의 보급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이 터지고 소련제 전차에 일격을 당하고 나서야 황급히 3.5인치 바주카포 생산라인이 돌아가기 시작했음을 보여주죠.

그리고 '전차의 적'인 전차 이야기를 하자면 이쪽도 그리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한국전쟁 이전 미육군의 기갑전력 증강계획"에서 이야기 했던 것 처럼 1948년 이후 기갑전력을 확충하기 위한 여러가지 계획이 구상되고 있었지만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는 본 궤도에 오르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그동안 해외에 파병된 육군 부대들의 기갑전력은 꾸준히 악하되고 있었습니다. 1950년 7월 10일 홀싱어(J. W. Holsinger) 대령이 앤더슨(Webster Anderson) 대령에게 보낸 비망록은 개전 직후 극동군 사령부 예하의 기갑전력의 실상을 잘 보여줍니다.

"Memorandum for Colonel Webster Anderson, USA"(1950. 7. 10), RG218 Records of U.S. Joint Chiefs of Staff, Chairman's File: General Bradley, 1949-53, Box1
극동군사령부가 서류상으로는 승인된 전력 보다도 다소 많은 기갑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실제 가동률이 처참하게 낮아서 가용 전력이 형편 없었음이 드러납니다. 가장 상태가 양호한 M24의 경우 103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가동율도 100%에 달했지만 T-34/85를 상대로는 쓸만한 상대가 아니었지요. 실질적 주력인 M4 셔먼 전차의 경우 161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가동가능한게 단 두대 뿐이었고 M26 전차는 보유량 3대에 가동가능 1대라는 처참한 수준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불과 한달 남짓한 기간에 본토에 비축된 물자까지 한국전선에 전개한 능력은 경이롭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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