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7일 수요일

스탈린그라드 삼부작 번역 기획안을 넣었을 때 제출했던 번역문의 일부


예전에 추진했다가 실패한 일이 떠오른 김에, 6년전 출판사 몇곳에 보냈던 원고의 일부분을 올려봅니다. 스탈린그라드 삼부작의 프롤로그입니다.


********


프롤로그

수하야 베레이카 강 일대, 1942 7 23

독일군은 리쥬코프(A. I. Liziukov) 소장을 세 방향에서 조여가고 있었다. 리쥬코프의 지휘를 받는 제2 전차군단의 절반은 포위망에 갇혀 있었고 그는 이들을 구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독일군을 저지하고 있었다.

리쥬코프는 3주전 까지만 하더라도 제5전차군의 지휘관이었다. 소련군은 독일군의 기갑군단에 준하는 대규모 기계화 부대를 만들기 위한 첫 번째 시도로 제5전차군을 편성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Stavka)는 제5전차군을 전차 641대로 증강했다. 그리고 그 무렵 러시아 남부의 도시 보로네지를 막 점령한 독일 48기갑군단의 후방을 차단하기 위해 제5전차군에게 남진하여 새로운 공세를 시작한 독일군의 측면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돈 강에 인접한 주요 도시였던 보로네지는 독일군이 동쪽의 스탈린그라드와 남쪽의 카프카즈로 진격하는데 아주 적절한 북쪽의 거점이 되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전투의 중점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리쥬코프가 상대하고 있는 것은 겨우 독일군의 기갑사단 한 개 뿐이라고 믿었으며, 5전차군은 독일군 기갑부대가 강행군 중인 보병사단들의 증원을 받기 전에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어진 독일군의 선봉 기갑부대를 분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시작부터 엉망으로 꼬였다. 소련군 지휘관과 참모 장교 중에는 대규모 기계화 부대를 전투에서 운용하는데 필요한 경험을 갖춘 사람이 소수에 불과했다. 리쥬코프의 전차군 사령부는 편성된 지 겨우 6주 밖에 되지 않았고 전차군 예하의 기갑사단급 부대였던 3개 전차군단은 4월에 막 편성된 상태였다. 소련군은 한 번의 작전에서 3개 전차군단은 커녕 3개 전차여단을 연계시켜 운용할 능력조차 없었다. 세 개의 전차군단은 강력하게 공격을 집중하는 대신 7 6일부터 10일 사이에 따로 따로 전투지역에 도착해 축차적으로 투입되었다. 게다가 소련군은 300대의 전차를 보유한 2개 기갑사단과 맞닥뜨렸으며 곧 수개의 보병사단이 여기에 증원되었다. 독일군의 압도적인 제공권은 리쥬코프의 임무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리쥬코프의 상급자들은 그를 도울 방도가 없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늘 하던대로 전투를 미시적인 부분 까지 통제하려 했으며 소련군 기갑국장을 포함한 고급 장교들과 함께 구체적인 지침을 연달아 내려 리쥬코프의 행동을 직접 감독하게 했다. 그동안 제5전차군을 지휘하는 전선군 사령부(집단군에 해당하는 소련군 부대단위)는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명령을 바꾸고 있었다.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은 연달아 세명이 교체됐다. 리쥬코프와 그의 예하 지휘관들이 이 와중에 교체된 지휘관이 내렸던 지시를 따르려고 조치를 취하면 소련군 최고사령부가 비판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리쥬코프는 독일군의 주의를 끄는데 성공했고 독일군은 북쪽 측면을 방어하기 위해서 대규모의 병력과 항공기를 집결시켜야 했다. 스탈린은 이러한 성공을 전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7 15일에 전차군 사령부를 해체하고 리쥬코프를 전차군단 사령관으로 좌천시켰다.

하지만 이것은 고난의 끝이 아니었다. 브랸스크 전선군은 모스크바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림을 받으면서도 독일군에 대한 반격을 계속했는데 독일군은 북쪽 측면을 방어하기 위해서 7 20일이 되자 제9기갑사단의 지원을 받는 보병사단들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소련군은 여러 차례의 반격 끝에 7 21일에서 22일에 걸쳐 소규모의 돌파구를 열 수 있었으나 한 개의 소총병사단과 선봉을 맡은 리쥬코프의 제2전차군단에 소속된 두 개 전차여단으로 편성된 공격 부대는 곧 독일군의 보병 및 기갑 부대에게서 세 방향으로 포위당했다.

알렉산드르 일리치 리쥬코프는 유능하고 용감한 지휘관으로 1941년 모스크바 전투 당시 서부전선군의 제20군 사령관 블라소프(A. A. Vlasov) 중장의 부사령관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것을 통해 처음으로 소연방영웅의 칭호를 받은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7 23, 리쥬코프는 1942년 한여름에 3주 동안 실패만 거듭한 끝에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말았다. 브랸스크 전선군이 반격을 위해 편성한 특수작전집단 지휘관인 치비소프(N. E. Chibisov) 중장은 리쥬코프에게 독일군의 후방 깊숙히 고립된 제2전차군단의 두 전차여단을 찾아내 후방으로 안전하게 이끌고 나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리쥬코프는 7 23일 오전 9시에 군단 정치위원과 함께 KV 중전차에 올라탔다. 그는 볼샤야 베레이카에 있는 군단사령부에서 직접 전차를 지휘해 남쪽으로 향했고 수하야 베레이카 강을 건너 그의 두 전차여단을 구출하기 위해서 독일군의 보병과 기갑부대를 돌파하려 했다. 리쥬코프의 전차는 독일군 방어선에서 조금 못 미친, 188.5 고지에서 서쪽으로 몇 백미터 떨어져 있는 레뱌즈예 마을 남쪽의 숲에서 대전차포에 맞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옴싹달싹 못하게 된 전차는 독일군의 집중 포화를 맞게 되었고 리쥬코프는 전차 승무원들에게 탈출하라고 명령했다. 해치를 열고 탈출하던 도중 조종수는 기관총에 부상을 입었고 무전수는 전사했다. 리쥬코프는 전차에서 탈출하다가 포화에 휩쓸려 전사했다.

독일군은 제5전차군과 그 예하의 군단과 여단이 지리멸렬한 상태로 제각각 공격을 감행한 것을 보고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련군의 참모 역량과 지휘관들의 능력에 대한 경멸감을 더 굳혔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군이 이런 식으로 반격을 거듭했기 때문에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에 도착하기도 전에 진격의 기세가 둔화되고 약화되었다. 그리고 리쥬코프가 자살적인 돌격을 감행한 지 불과 네 달도 지나지 않아 살아남은 소련군 기갑부대 지휘관들은 그들이 독일의 적수들과 충분히 맞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