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군사재판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군사재판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2년 5월 17일 목요일

국민동원에 특별히 유리한 정치사상은 존재하는 것일까?

지난번에 짤막한 소개글을 썼던 『패튼과 롬멜』은 패튼과 롬멜을 각각 미군과 독일군의 상징으로 하여 두 나라의 군대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쓰여졌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인 쇼월터는 미국의 장점으로 병사들의 자발성, 혹은 헌신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2차대전 기간 중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된 병사의 숫자를 비교하는 부분에서 잘 드러납니다. 쇼월터는 2차대전 중 군법에 의해 처형된 탈영병은 한명인 반면 독일군은 5만명에 달하는 병사를 처형했다고 지적합니다.1) 이러한 지적은 미국의 체제, 특히 정치문화가 독일의 파시즘에 비해 우월했다는 해석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쇼월터 또한 2차대전의 승리를 미국 자유주의의 우월성으로 받아들였던 지적풍조의 연장선상에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 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는 약간 회의적입니다. 일단 쇼월터는 1941년 12월 부터 1946년 3월까지 사형이 집행된 미군 병사가 146명에 달한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고 단지 탈영으로 처형된 병사 한명만을 언급함으로써 매우 극단적인 대비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게다가 독일군의 병사 처형에 대해서는 가장 높은 추정치인 5만명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전쟁 중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집행받고 처형된 독일군인의 숫자에 대해서는 연구자별로 큰 차이가 나는데 데이빗 키터만David Kitterman은 1만명에서 1만2천명 사이로 추산하고 있으며 관련 연구로서 많이 인용되는 메서슈미트Manfred Messerschmidt의 연구는 2만명 가량으로 추산합니다.2) 146명대 1만명으로 하더라도 독일군이 매우 많은 병사를 처형한 것은 틀림없습니다만 쇼월터의 서술방식은 약간 문제가 있다고 보여지는군요.

이데올로기적인 경직성이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이 군법을 가혹하게 적용하게 한 원인이 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례들을 보면 조금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1차대전을 예로 들면 독일군은 전쟁 기간 동안 150명에 사형을 선고하고 48명에 사형을 집행한 반면 프랑스의 경우는 2천여명에 사형을 선고하고 700여명에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미국과 비슷한 자유주의적 정치문화를 가진 영국군은 3,080명에 사형을 선고하고 346명을 실제로 처형했습니다.3)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정치문화를 가진 독일군에 비해 일곱배나 많은 병사를 처형한 것입니다. 정치문화도 중요한 요소이긴 합니다만 실제 전장의 환경이 어떠했는지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물론 절대적인 기준은 아닙니다만 병사에 대한 강압적인 처벌은 해당 군대가 그만큼 병사들을 통제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그리고 국민동원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는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국민 동원’의 신화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자발성이니 말입니다. 1차대전 당시 참혹한 서부전선에서 공화정 체제인 프랑스와 자유주의적인 정치문화를 가진 영국이 병사들에 대한 통제에 독일군 보다 더 어려움을 겪었음을 보여주는 징후가 나타나는 것은 꽤 흥미롭습니다.

물론 미국이 독일에 비해 훨씬 적은 병사를 처형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단순히 정치문화만 가지고 비교하기는 어려울 것 입니다. 독일군이 군법회의에서 사형집행을 크게 늘린 것은 1944년 하반기 이후부터였고 이것은 나치 체제의 이데올로기적 경직성 외에도 다른 요소들의 영향도 작용한 것으로 볼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독일과 동일한 조건에서 전쟁을 수행한 것이 아닌 이상 쇼월터와 같은 방식의 서술은 약간 위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같은 경우는 군사사에 관심을 가졌던 초기에 “자발적인 참여에 의한 국민동원”에 대한 환상이 있어서 한국의 징병제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 그런 쪽은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보고 들은 것이 조금 늘어나면서 처음에 가졌던 이상적인 생각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쇼월터의 글을 읽으니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최근 몇년간은 우리에게 뭔가 새로운 동원방식이 필요한게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마땅한 대안이라 할 만한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게 고민입니다. 그런 점에서 쇼월터의 주장을 접하니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1) 데니스 쇼월터 지음/황규만 옮김, 『패튼과 롬멜 : 현대 기동전의 두 영웅』, (일조각, 2012), 280쪽
2) Norbert Hasse, “Wehrmachtangehörige vor dem Kriegsgericht”, Rolf-Dieter Müller&Hans-Erich Volkmann(hrsg.) Die Wehrmacht : Mythos und Realität, (Oldenbourg, 1999), pp.480~481
3) Stephen G. Fritz, Frontsoldaten : The German Soldier in World War II,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1995), p.90

2008년 3월 29일 토요일

'영광의 탈출'이 될 뻔한 어떤 사건

Peter Schmoll의 Die Messerschmitt Werke im Zweiten Weltkrieg, 134~135쪽에는 전쟁말기에 있었던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가 실려있습니다.

1944년 2월 중순,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남동쪽 오버트라우블링(Obertraubling)에 있는 메서슈미트사의 시험비행장에서 특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소련군 포로 두명이 독일공군에 인도되기 위해 시험비행을 기다리던 Bf-109 한 대를 탈취해 탈출하려 한 것입니다. 이 사건을 목격한 독일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날은 날씨가 좋지 않아 오전의 시험비행이 취소되었습니다. 할일이 없어진(?) 시험비행사들이 아침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한대의 Bf-109가 활주로로 진입해 이륙을 시도했습니다. 이것을 목격한 메서슈미트사의 시험 비행사인 그로스(Ludwig Groß)는 시험비행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제지할 사이도 없이 비행기는 이륙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기는 제때 고도를 높이지 못해서 비행장의 담에 랜딩기어가 걸리면서 추락했습니다. 당장 주변에 있던 경비병들이 달려가 비행기에 타고 있던 소련군 포로 두 명을 체포했고 이 두 명의 포로는 군사재판에서 독일국방군의 자산에 손실을 입힌 혐의로 총살형을 언도 받았고 2월 14일에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탈출을 시도하다가 실패해 목숨을 잃은 두 명의 소련군 포로는 바실리 야레쉬(Васи́лий Яреш)소위와 드미트리 우테비코프(Дмитрий Утевиков) 소위라고 합니다. 이 두 사람은 포로가 된 뒤 메서슈미트 공장에서 강제노동을 하고 있었는데 이 두명 중 한명이 조종사여서 독일 비행기를 훔쳐 탈출하자는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불행히도 이들의 활극은 비극으로 끝났고 이 두 포로는 총살된 지 이틀 뒤인 2월 16일에 근처의 묘지에 매장되었다고 합니다. 성공했다면 하나의 멋진 이야기로 남았을 법한 이 사건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우울한 사실이지만 모두가 영화처럼 살 수 있는 건 아니지요.

2007년 6월 23일 토요일

1차대전 말기 영국육군의 규율과 사기문제 : 1917~1918

David Englander의 에세이, Discipline and morale in the British Army를 읽다 보니 1차 대전 당시 영국 육군에 대한 저자의 견해가 꽤 흥미롭습니다. 전쟁 이전의 영국 육군은 사병들이 자율적이고 능동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는데 노력하고 있었지만 전쟁에 참전한 이후 강압적이고 물리적인 방법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입니다. 특히 고위장성들이 물리적 징계가 군대의 규율을 잡고 전투 집단으로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고 생각했던 점은 의외입니다. Englander의 글에 따르면 헤이그의 경우 전쟁이 끝난 뒤 “야전징계 1호(Field Punishment No.1)"가 없었다면 프랑스에 주둔한 영국육군은 높은 수준의 규율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합니다.

이런 고위 장성들의 주장에 대해서 Englander는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취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1917~1918년 기간 동안 영국군 야전부대내의 범죄율을 보면 부대의 사기가 매우 저하되어 전투 능력을 감퇴시키고 있었다는 것 입니다. 특히 1918년 독일군의 춘계대공세에서 영국 제5군이 초기에 붕괴된 요인은 독일군의 병력 및 전술적 우위도 있지만 부대의 사기가 극히 위험한 수준까지 저하됐던 것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고 있습니다.

Englander가 제시한 통계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동시기의 프랑스 육군, 독일 육군과 비교해 봐야 할 수 있겠지만 결론 자체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영국 육군이 이런 방식을 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마도 1차 대전 이전까지 대규모 군대를 유지해 본 경험이 부족했던 것도 큰 원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표를 html로 그려 넣는 것 보다는 그냥 워드로 작성해서 그림파일로 만드는게 더 편한것 같군요. 앞으로 html로 표 만들일은 거의 없을 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