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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2일 월요일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이야기

어디에선가 많이 본 듯한 이야기 입니다.

○○○○년 11월 14일, ○○ 장군이 ○○에서 쓴 편지에는 ○○군단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내 군단의 ○○연대는 ○○소총을 장비하고 있었다. ○○연대는 ○○○○년형 ○○총을 장비하고 있었는데 이 총 중 대부분은 ○○에 ○○을 ○○ 개량을 했지만 일부는 ○○이 없었다. ... 내 군단에 소속된 ○○ 중대 중 일부는 ○○ 카빈, ○○ 소총이나 ○○ 소총을 장비했고 혹은 ○○를 가진 경우도 있었다."

○○○의 군단은 병사들이 장비한 소화기가 제각각 이어서 보급을 하기가 어려웠고 대부분의 병사가 10발에서 15발 정도의 실탄을 지급받았으며 총기 소제도구는 거의 없었다. ○○에서 예비군을 동원하던 한 장교는 절망감에 이렇게 빈정거렸다.

"정부에서 이런 속도로 장비를 보내주면 전쟁이 끝날때 까지도 싸울 준비가 안 돼 있을 것이다."

이 장교의 부대는 ○○를 사용하는 소총을 장비하고 ○○로 만든 ○○를 지급받았는데 이 ○○는 가을비가 내리자 곤죽처럼 돼 버렸다. 의료지원도 엉망이어서 ○○○의 ○○연대는 병사 2,460명에 군의관은 단 한명이었다. 상황이 이랬기 때문에 ○○군 보병대대들은 전투에 나가면 전투 개시 몇 분 만에 탄약을 모두 써 버리고 아군 부상자들을 전장에 남겨둔채 도망가는 수 밖에 없었다.

이건 도데체 어느나라 군대일까요? 1945년의 독일군을 연상케 하는 내용입니다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1870년의 프랑스군이라는군요.

원래 인용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1870년 11월 14일, 뒤리외(Louis Durrieu) 장군이 방돔에서 쓴 편지에는 18군단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내 군단의 45연대는 샤스포 소총을 장비하고 있었다. 70연대는 1822년형 수발총을 장비하고 있었는데 이 총 중 대부분은 총열에 강선을 파는 개량을 했지만 일부는 강선이 없었다. ... 내 군단에 소속된 프랑-티뢰르(franc-tireur) 중대 중 일부는 레밍턴 카빈, 샤프 소총이나 스파이서 소총을 장비했고 혹은 12구경 리볼버를 가진 경우도 있었다."

뒤리외의 군단은 병사들이 장비한 소화기가 제각각 이어서 보급을 하기가 어려웠고 대부분의 병사가 10발에서 15발 정도의 실탄을 지급받았으며 총기 소제도구는 거의 없었다. 노르망디에서 예비군을 동원하던 한 장교는 절망감에 이렇게 빈정거렸다.

"정부에서 이런 속도로 장비를 보내주면 전쟁이 끝날때 까지도 싸울 준비가 안돼 있을 것이다."

이 장교의 부대는 종이탄포를 사용하는 소총(Percussion Rifle)을 장비하고 마분지로 만든 군모를 지급받았는데 이 모자는 가을비가 내리자 곤죽처럼 돼 버렸다. 의료지원도 엉망이어서 뒤리외의 45연대는 병사 2,460명에 군의관은 단 한명이었다. 상황이 이랬기 때문에 프랑스군 보병대대들은 전투에 나가면 전투 개시 몇 분 만에 탄약을 모두 써 버린뒤 아군 부상자들을 전장에 남겨두고 도망가는 수 밖에 없었다.

Geoffrey Wawro, The Franco-Prussian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p.268~269

스당에서 나폴레옹 3세가 지휘하는 주력군이 섬멸되자 프랑스는 황급히 예비군을 긁어 모으고 해군 병사들도 보병으로 전환했는데 전쟁 초기의 막대한 장비 손실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이 때문에 기본 장비인 소총조차 제대로 지급을 못 했다고 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야포 부족으로 해군에서 차출한 120mm 해안포는 상당히 효과가 좋아서 프로이센군 조차 전쟁 초반보다는 프랑스군 포병이 나아졌다고 평을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절망적인 와중에도 쓸만한 물건이 하나씩 나오는 걸 보면 신기합니다. 120mm포의 이야기를 읽을땐 마치 독일 국민돌격대의 판저파우스트가 연상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