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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29일 수요일

레마겐 교두보 전투당시 미3군단장 밀리킨 소장 해임에 관한 잡설

포스팅 “패튼의 전과 과장에 대한 하지스의 비난”에 문기야님이 달아주신 댓글을 읽으니 레마겐 교두보 전투 당시 미3군단장 밀리킨 소장이 해임된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는군요.


먼저 사건의 개요를 살펴보는게 좋겠습니다. 미육군 공간사 The Last Offensive는 레마겐 교두보를 둘러싼 전투와 밀리킨 소장John Millikin의 해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1군사령관 하지스 장군은 작전 초기 부터 레마겐 철교와 교두보를 담당한 제3군단장 밀리킨 장군의 지휘를 불신하고 있었다. 하지스와 제1군 사령부의 참모장교들은 라인강 양안에 배치된 미군부대에 대한 통제가 형편없으며 라인강 동안의 미군부대 배치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부족하다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3월 9일 아이젠하워 장군이 라인강 동안의 교두보를 점진적으로 확대하라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하지스 장군은 제3군단의 진격이 느리고 독일군이 육안관측으로 레마겐 철교에 포격을 유도할 수 없도록 공세를 펼치지도 못하고 있다며 짜증을 냈다. 

밀리킨 장군은 3월 9일 제9기갑사단장 레오나드 장군에게 레마겐 철교 일대의 모든 군사활동을 통제하도록 하고 라인강 동안에 배치된 미군부대는 모두 제9보병사단장 크레이그 장군이 관할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하지스 장군의 불평은 끊이질 않았다. 제3군단은 얼마전 까지 패튼의 제3군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제1군 사령부는 밀리킨과 원활한 관계가 아니었다. 하지스와 그의 참모진은 공공연하게 “레마겐 교두보 일대의 지휘를 7군단장 콜린스 장군에게 넘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밀리킨 장군이 직면한 문제는 심각했다. 그는 직접 레마겐 다리까지 나가 지휘했지만 라인강 동안에 배치된 미군부대는 시간에 맞춰 정확한 보고를 하지 못했다. 이렇게 우발적으로 실시된 작전의 경우 초기에는 작전에 필요한 물자와 지원 부대를 충분히 확보할 수 없었다. 특히 통신부대가 부족했다. 차량통행이나 포격으로 레마겐 철교에 부설한 전화선은 자주 끊어졌고, 파편이나 라인강의 빠른 물살 때문에 강을 따라 가설한 전화선도 제 기능을 못했다. 레마겐 철교가 혼잡했기 때문에 연락장교들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고 무전통신도 큰 도움이 되질 못했다. 

레마겐 교두보로 재배치된 보병부대들은 도착하는 대로 시급히 필요한 지구에 축차적으로 투입됐다. 심지어 연대단위 편성 조차 유지하지 않은채 투입하기도 했고 여러 사단의 부대들이 뒤죽박죽으로 섞이는게 다반사였다. 작전 자체가 짧은 시간동안 우발적으로 일어난데다 지형 문제까지 있는 상태에서 이런식으로 부대를 운용하니 문제는 더 커졌다.
밀리킨 장군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두보를 신속하게 확장하는 것 보다는 체계적이로 점진적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3월 8일에 3단계에 걸쳐 교두보를 확장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1단계는 레마겐 철교의 북쪽과 남쪽으로 2.5마일을 진격해 독일군이 더이상 철교를 소화기로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2단계에 확장의 목표는 독일군의 포병관측을 중단시키는 것 이었다. 마지막 3단계는 북쪽으로는 본Bonn, 남쪽으로는 안더나흐Andernach, 그리고 동쪽으로는 고속도로까지 진출해 독일군이 교두보를 더이상 포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중략) 

밀리킨 장군은 교두보가 확대되는 경과를 바르게 파악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교두보의 부대를 가장 효과적으로 운용하려면 란Lahn 강 유역과 프랑크푸르트Frankfurt-카셀Kassel 회랑으로 진격해야 한다고 판단해 군단 주공을 동쪽과 동남쪽에 두기로 했다. 이것은 앞서 브래들리와 아이젠하워 장군도 동의한 것 이었다. 밀리킨은 이렇게 해야 독일군이 레마겐 철교에 포격을 유도하는 것을 가장 빨리 중단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스 장군은 제3군단이 제일 먼저 북쪽으로 진격해 콜린스 장군의 제7군단의 도하점을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작전 4일차인 3월 11일까지도 이 점을 밀리킨에게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이날 밀리킨은 처음으로 철교를 건너 라인강 동안의 교두보로 갔다. 하지스는 3군단이 북쪽으로 진격해야 하며 주공을 이 방향에 두어야 한다고 몇 번 언급하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물론 밀리킨은 이정도의 언급만으로 하지스의 의도를 이해했다. 그는 제78보병사단의 정면을 축소하고 제9보병사단의 대부분을 북동방향으로 진격하도록 했다. 다음날인 3월 12일 교두보 남쪽과 동남쪽을 인계받기 위해  제99보병사단의 주력이 도착했다. 밀리킨은 제99보병사단의 부대들을 원 소속사단으로 복귀시키도록 했다. 하지만 이미 북쪽으로 신속히 진출할 수 있는 기회는 사라졌다.

(독일군의 반격에 대한 서술은 생략)

바이어라인Fritz Bayerlein 장군은 제130보병사단을 공격에 사용할 수 없다면 미군에 대한 효과적인 역습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라인강을 건넌 미군이 레마겐 교두보에 증원군을 더 투입한다면 미군을 격퇴할 만한 병력을 동원하는게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모델 원수의 판단 덕분에 밀리킨 장군이 주공을 투입한 지구에서 미군의 진격은 둔화됐다. 이때문에 하지스 장군은 계속해서 밀리킨의 지휘방식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

(독일군의 반격에 대한 서술은 생략) 

그동안 레마겐 교두보는 꾸준히 확장됐지만 그 속도는 느렸다. 하지스 장군은 밀리킨 장군의 지휘방식을 여전히 불신했다. 그는 3월 15일에 제12집단군사령관 브래들리 장군을 만나 밀리킨을 해임하는 방안을 의논했다. 

“레마겐 교두보에서 싸우고 있는 우리 장병들은 매우 존중합니다. 하지만 지휘관이 문제입니다.” 

브래들리는 하지스의 주장에 동의하고 밀리킨의 후임을 알아보라고 한 뒤 제1군 사령부를 떠났다. 이틀 뒤 제90보병사단을 지휘했던 밴 플리트 소장이 제1군 사령부에 도착해 제3군단장에 임명됐다. 하지스는 오후 3시가 되기 조금 전 밀리킨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쁜 소식이 있소.” 

그리고 하지스는 밀리킨이 제3군단장에서 해임됐다고 통보했다. 밀리킨은 하지스가 말을 마칠때 까지 기다렸다. 

“사령관님. 저도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레마겐 철교가 무너졌습니다.” 

Charles B. MacDonald, The Last Offensive, (Center of Military History, US ARmy 1993) , pp.223~229.



이 일화를 보면 하지스라는 인물은 꽤 주관이 강한 인물이었던 듯 합니다. 밀리킨 장군이 애초에 제3군단 주공을 동쪽과 동남쪽으로 한 것은 제12집단군사령관 브래들리 장군의 의도였기 때문입니다. 하지스가 상급 사령부의 의도에 반하여 자신의 의견을 관철한 것이죠. 미육군 공간사의 서술을 보면 확실히 밀리킨 소장이 억울한 측면이 있습니다.

밀리킨 소장의 해임이 결정된 3월 15일에 있었던 브래들리와 하지스의 회의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을 하는게 좋겠습니다. 1945년 3월 15일자 제1군 사령관 일지는 이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오경 브래들리 장군은 참모장 앨런 장군을 대동하고 제1군사령부를 방문했다. 브래들리 장군은 어제 대장으로 진급했지만 아직 별 세개만을 달고 있었다. 브래들리 장군과 하지스 장군, 그리고 참모진은 사령관 집무실에서 한시간 반 가량 비공개로 회의를 한 뒤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외출했다. 브래들리 장군은 라인강 서안에서 독일군의 저항이 모두 끝나기 전에는 교두보를 동쪽으로 확대하는데 힘을 쏟아서는 안된다는 연합군최고사령부SHAEF의 공식 방침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하지스 장군은 이 방침에 반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몽고메리의 제21집단군이 연합군최고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북쪽에서 대규모 도하를 하기 전에 ‘양동작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건을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몽고메리가 전화를 걸고 5분 뒤에 미 제1군이 라인강을 도하해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그는 더이상 양동작전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참모장 앨런 장군은 패치 장군이 패튼 장군에게 보낸 전문 이야기를 꺼냈다. 패치와 패튼은 서로 즐겁게 장난을 쳤다. 패치 장군은 “제3군이 라인강에 꼴지로 도착한 것을 축하함. 그럴 줄 알았음.”라는 전문을 보냈다. 패튼 장군은 답신으로 “라인강을 첫 번째로 도하할 부대가 전문을 보내줘 정말 감사함.” 그리고 브래들리 장군은 독일 장군 세명이 항복하기 위해 미군 부대를 찾아 돌아다녔다는 농담을 꺼냈다. 독일 장군들은 대공포병들을 발견하고는 그들에게 적의가 없으며 항복하겠다는 뜻을 보이려고 루거 권총을 땅바닥에 던졌다. 그러자 미군들은 루거 권총을 얻으려고 득달같이 달려들었지만 장군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우리는 연합군최고사령부가 레마겐 교두보 확대를 원하지 않았으며 기존에 세워둔 계획이 어그러졌다는 이유로 제1군이 라인강을 도하했다는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좋았던 분위기가 나빠졌다. 연합군최고사령부는 북쪽에서 라인강을 도하하는 쪽을 선호했고 우리 제1군이 확보한 교두보에 중점을 둘 의도가 없음이 확실했다.  

그리고 하지스 장군은 브래들리 장군과 밀리킨 장군을 해임하고 새로 제3군단장을 임명하는 문제를 상의했다. 두 사람은 밀리킨 장군이 유능하긴 하지만 돌발상황에 대응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하지스 장군이 직접 개입하기 전 까지는 레마겐 교두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는 점에 동의했다. 밀리킨 장군은 패튼 장군 휘하에 있을때도 의견 충돌이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래서 패튼은 제3군단을 제1군에 떠넘긴 것이다. 새로운 제3군단장 후보로는 하몬Ernest N. Harmon, 밴 플리트, 개피Hugh Joseph Gaffey 등이 거론됐다. 하지스 장군은 하몬 소장을 선호했지만 브래들리 대장은 제15군 사령부가 하몬 장군의 인사이동에 찬성할지 의문이라고 답했다. 제3군단은 아직 하지스 장군의 의도대로 고속도로까지 진출하지 못했지만 0.5마일만 더 진격하면 되는 상황이다. 오늘 제99보병사단이 돌출부 남쪽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 (제9보병사단) 60보병연대는 로르샤이트Lorscheid를 점령했으며 (제9보병사단) 47보병연대는 적이 강력하게 방어하는 채석장을 점령하고 장교 2명과 사병 100명을 포로로 잡았다. 교두보 전체에 걸쳐 약 2,000야드를 진격했다. 하지스 장군은 제9보병사단의 성과가 평소 사단의 실력에 미치지 못한다고 약간 불만을 표했다. 하지스 장군은 저녁에 이렇게 말했다. 

“레마겐 교두보에서 싸우고 있는 우리 장병들은 매우 존중합니다. 하지만 지휘관이 문제입니다.” 

William C. Sylvan and Francis G. Smith Jr.. Normandy to Victory: The War Diary of General Courtney H. Hodges and the First U.S. Army (The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08) Kindle Locations 4619-4639.


이 일지에서도 하지스 장군이 상급 사령부에 상당한 불만이 있었음이 잘 나타납니다. 제1군이 라인강돌파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데 영국군인 몽고메리를 정치적으로 배려하는 듯한 움직임에 불만을 나타내고 있지요. 그리고 최대한 점잖은 표현을 쓰고 있지만 제3군단장 밀리킨 소장에 대해서도 격렬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국내에도 소개된 밴 플리트 평전 『승리의 신념: 밴 플리트 장군 일대기』에서는 밀리킨의 보직해임에 대해 미육군 공간사 보다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짝 다른 서술이 하나 보입니다. 이 부분도 직접 인용을 하겠습니다.



바로 이날 제3군단장 밀리킨 장군은 보직해임되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영국에서 근무하는 동안에도 하지스 장군과 존 밀리킨 장군간의 불협화음을 잘 알고 있었다. 밴은 과거에 패튼 장군이 자신 앞에서 ‘벌지’ 전투에 임하는 밀리킨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난한 사실을 기억하였다. 이제 밴 플리트 장군은 밀리킨이 물러나고 자신이 그 공백을 메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밴은 또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휘권인수가 좋지 않은 경우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다음날 아침 일찍 제1군사령부로 가기 위해 자신의 전용비행기를 준비시켰다. 브래들리의 전화를 받은 바로 그 다음날 아침, 밴 플리트 장군은 가볍게 짐을 꾸리고 전속부관과 운전병을 대동한 채 지휘관 전용항공기에 탑재 가능한 지프 1대만을 싣고 제1군사령부로 향했다. 

밴 플리트가 도착하여 신고를 마치자 하지스 중장은 그에게 밀리킨 장군을 대신하여 제3군단장의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밀리킨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어.”라고 하지스가 말했다. 이에 밴은 “밀리킨도 제가 제3군단의 지휘권을 인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하지스는 “아니, 자네가 가서 직접 말하게. 밀리킨에게 제1군사령부로 출두하라고 전해주게.”라고 대답하며 급한 업무를 핑계로 돌아섰다. 밴은 자신이 직접 밀리킨 장군에게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몹시 언짢았다. 또한 이러한 방식의 보직해임은 군 전통에 어긋나는 것 이었다. 브래들리나 하지스 둘 중 한 사람이 밀리킨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보직해임을 통보하거나, 보다 나은 것은 직접 밀리킨을 찾아가 보직해임시키는 용기를 보여줬어야 했다. 밴은 또한 그 자신이 밀리킨보다 후임이고, 몇 개월 전 제3군단의 벌지공격 때만 해도 제90사단장으로서 그의 휘하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난처해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밴은 지휘권을 인수하기 위해 즉시 이동하였다. 

밴 플리트는 지휘소에 있던 밀리킨을 찾아가 보직해임의 소식을 전했다. 밴은 당시 밀리킨의 표정에 나타났던 충격받은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직업군인으로서 보직해임을 당한다는 것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비극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고급장교의 경우 그 충격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보통 군 생활이 끝장났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직해임의 경우는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긴다. 설사 정황에 비추어 볼 때, 보직해임이 부당했다고 판단되더라도 그 오명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밴은 솔직히 밀리킨의 보직해임이 정당하다고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보직해임으로 자신이 득을 보게 되는 상황에서 밀리킨에게 그 소식을 직접 전해야하는 일에 몹시 당혹해 하였다. 

밴은 불편한 심정으로 밀리킨과 함께 군단 지휘소에 있으면서 이러한 소식을 밀리킨이 매우 기분 나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밀리킨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밴은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보직해임의 이유가 무엇인지 아무 것도 모른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밀리킨은 하지스에게 전화를 걸었고, 하지스는 그의 보직해임을 확인해 주었다. 끝내 밀리킨은 전화에다 대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데 여기도 반갑지 않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레마겐의 철교가 붕괴되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제1군사령부의 부대일지에는 3월 17일 하지스 장군이 밀리킨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보직해임되었고 후임으로 밴 플리트가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통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밴이 밀리킨의 지휘소에 도착하기 전에 이 전화가 걸려온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밀리킨이 하지스 장군에게 확인전화한 것을 그렇게 기록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폴 F. 브레임/육군교육사령부 번역실 옮김, 『승리의 신념 : 밴 플리트 장군 일대기』(봉명, 2002), 193~194쪽.


다시 미1군사령관 일지를 인용하겠습니다. 여기에는 위의 사실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후 두시에 하지스 장군은 지휘소에서 밴 플리트 장군을 만나 환영인사를 하고 약 한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하지스 장군은 브래들리 장군이 밀리킨 소장의 후임을 보내준 것을 아주 기뻐했다. 오후 2시 50분에 하지스 장군은 밀리킨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쁜 소식이 있소.” 그는 밀리킨에게 해임 사실을 알리고 원한다면 내일 군단사령부를 떠나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하지스 장군의 말이 끝나자 밀리킨 소장이 말했다. “사령관님. 저도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레마겐 철교가 무너졌습니다.” 

William C. Sylvan and Francis G. Smith Jr.. Normandy to Victory: The War Diary of General Courtney H. Hodges and the First U.S. Army (The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08) Kindle Locations 4661-4665.


하지스의 성격을 고려하더라도 밀리킨의 해임과 그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비록 벌지전투 시기 부터 군단지휘능력에 비판을 받아왔다고는 하나 레마겐 교두보 전투 자체는 무난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굳이 군단장을 교체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벌지전투 당시 미국 군단장들의 지휘방식에 대해 책을 쓴 해롤드 윈튼Harold R. Winton은 밀리킨에 대해 우호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의 평가는 이렇습니다.


밀리킨이 해임된데는 그의 책임도 없지 않다. 3월 11일에 제9보병사단 참모장은 하지스 장군의 부관에게 라인강 동안의 교두보가 혼란하기 때문에 군단장이 직접 전방을 시찰하면서 상황을 통제해야 하지만, 밀리킨은 교두보에 거의 오질 않는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밀리킨이 해임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제1군의 “일가족”이 아닌 아웃사이더였던데 있었다. 그는 좋지 못한 시기에 좋지 못한 장소에 있었던 것이다. 

Harold R. Winton, Corps Commanders of the Bulge: Six American Generals and Victory in the Ardennes,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7), pp.354~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