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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1일 일요일

베트남 - 병력부족의 강대국 vs 인명손실에 관심없는 약소국

아프가니스탄에서 생고생하는 십자군 용사들에 대한 Sonnet님의 동정어린(?) 글들을 읽고 보니 지난 세기 머나먼 안남국의 평화를 위해 헌신한 美利堅의 반공십자군들이 떠올랐다. 사실 미국이 죽을 쑨 이유 역시 마찬가지 아니던가?

1960년대의 미군 역시 비정규전에는 토벌군과 게릴라의 전력비가 10:1에서 15:1은 되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미군은 이미 1950년대부터 고질적인 병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때문에 스틸웰 준장은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해 모든 지상군 사단이 비정규전을 수행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춰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고 1962년 1월 하우즈 위원회는 총 6개 사단(1, 2, 4, 25보병사단, 82, 101 공수사단)을 비정규전에 투입할 수 있도록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가 미국의 베트남 개입이 슬금 슬금 꼬여가던 시점이라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어쨌건 겨우 6개 사단은 효과적인 비정규전 수행에는 턱없이 모자란 전력이었다.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지상군 개입이 시작되기 전부터 미국내에는 베트남전 승리가 어렵다는 견해가 제법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중 하나로 1963년 가을에 있었던 워게임 SIGMA 1에서는 북폭과 함께 미군 병력을 60만까지 증강시켰음에도 불구하고 VC들을 저지하지 못한다는 결과가 나와 많은 미국 고위 장성들을 열받게 했다.(이 워게임 결과에 분통을 터트린 대표적인 인물이 반공의 글라디에이터 커티스 르메이다)

어쨌건 초기 미군의 파병은 VC 사냥에 필요한 기동대대를 확보하는게 가장 큰 목적이었다. 1966년 6월, 미군사고문단은 남베트남의 VC 병력을 117개 대대(각 대대는 450명)으로 추산하고 있었는데 당시 가용한 남베트남군과 미군, 연합군 병력은 172개 대대로 화력과 기동력의 차이(미 군사고문단은 미 해병대 1개 대대를 VC 대대의 300% 전력, 미 육군 1개 대대를 VC 대대의 200% 전력으로 평가했다)를 감안해도 전력비가 3:1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66년 6월 초에 웨스트모어랜드는 워싱턴에 44개 대대의 증원을 요청했는데 이 44개 대대가 증원되더라도 양측 전력비는 겨우 3:1을 상회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맥나마라는 이 정도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7월 말 존슨에게 예비군 235,000명을 소집하고 육군 병력을 증강할 것을 건의했는데 설사 이것을 합하더라도 별 다른 뾰족한 답이 없었다. 1966년에 44개 대대를 요청했던 웨스트모어랜드는 1967년에 추가 증원을 요청했고 미군병력은 계속해서 증강됐다. 미군은 1969년까지 112개 대대로 증강됐지만 결국은 막대한 인명피해만 낸 채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 아니던가.

강인한(또는 광신적인) 의지를 가지고 막대한 인명손실을 감당할 수 있는 상대와 싸운다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다. 미국의 9보병사단은 1969년 1월부터 2월까지 무려 168대 1의 사상자 교환비를 기록했다고 하지만 사단 작전구역에서 VC를 박멸하는데는 실패했다. 상대는 민족통일을 위해 시체로 태산을 쌓을 각오가 돼 있는 위인들이었으니 미군이 아무리 베트남인들을 죽여봐야 답이 없는게 당연했다.

하여간 베트남전과 마찬가지로 테러와의 전쟁역시 뾰족한 답이 없는 전쟁이다.

2006년 5월 8일 월요일

1차 세계대전과 미국의 흑인 부대(재탕)

미국사와 관련된 책을 조금 읽다 보면 흑인에 대한 차별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장기간 존속되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당장 1960년대에 흑인 대학생들을 백인 학교에 입교 시키기 위해서 주 방위군을 동원해야 될 정도였으니. 흑인에 대한 인종적 차별이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없어 지지 않은 이유를 들자면 돌팔이 인류학자들의 인종 비교 연구가 과학이라는 탈을 쓰고 이른바 “식자층”에게 까지 널리 퍼졌다는 것이 있습니다. 흑인에 대한 차별이 과학의 탈을 쓰고 자행 되었으니 참 과학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흑인은 인종적으로 열등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보니 미국 정부는 흑인을 무장시키는 것을 별로 달가워 하지 않았습니다. 남북전쟁 때야 노예해방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 흑인 부대를 대규모로 조직했지만 남북전쟁이 끝난 뒤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1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 미국 전쟁성(War Department)는 흑인 부대를 대규모로 편성하는데 대해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물론 뉴욕 15 보병연대와 일리노이 8 보병연대같이 흑인 장교와 흑인 사병으로 편성된 주방위군 부대가 있긴 했습니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드문 예에 해당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의 참전이 결정되면서 흑인의 전쟁 동원이 필요해 지자 흑인 부대를 증편하는 방안이 전쟁성의 민병대 국(Militia Bureau)에서 나왔습니다. 민병대 국은 흑인 연대 세개를 편성해서 이것으로 독립 흑인 보병여단을 만들자는 안을 내 놓았습니다. 이에 대해서 당시 전쟁성 장관이었던 베이커는 흑인 주방위군 3개 연대와 징집한 흑인 연대 한 개로 임시 흑인 사단을 편성하자는 안을 내놓습니다.

이렇게해서 뉴욕 15 보병연대는 369 보병연대로, 일리노이 8 보병연대는 370 보병연대로, 그리고 기타 독립 흑인 보병부대들은 372 보병연대로 통합 되었고 새로 징집한 흑인 병사들로 371 보병연대가 편성 되었습니다. 이렇게 편성된 4개 흑인연대로 1918년 1월 5일에 93 보병사단이 편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단 직할대의 편성이 완료 되지 못 했기 때문에 93 보병사단은 보병연대 네개만 가진 연대들의 집합체가 되었습니다.

유럽전선에 투입된 93 보병사단은 프랑스군에 분산 배치되게 되었습니다. 1918년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장기간의 전쟁으로 병력 부족을 심하게 겪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미군 부대를 예하에 두려고 미국 정부에 요청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미국 원정군 사령관 퍼싱은 프랑스군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93 보병사단 예하의 4개 연대를 각각 프랑스군 사단에 배속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이렇게 해서 가장 먼저 프랑스에 도착한 제 369보병연대가 프랑스군 16 보병사단에 배속되어 전투를 치루게 됐습니다.
흥미롭게도 퍼싱은 당시 다른 미국 장군들과 달리 흑인 부대가 훌륭한 전투 부대이기 때문에 비전투 임무에 돌리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일각에서는 퍼싱이 흑인 사단을 해체해서 프랑스군에 배속시킨 것이 퍼싱의 인종 차별적 행동이라고 비판하는데 전쟁중의 퍼싱의 행동이나 언사를 보면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1918년 6월에 프랑스 정부가 퍼싱에게 흑인연대 8개를 프랑스군에 증원해 줄 수 없느냐고 했을 때 퍼싱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하는 군요.

“유색인종연대들(Colored regiments)은 미국 시민들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관은 이들 부대들을 다른 백인 부대들과 같은 방식으로 운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퍼싱이 최초로 편성된 흑인 연대 네개를 프랑스군에 배속 시킨 것은 프랑스와의 동맹을 고려한 정치적 행동이라는게 지배적인 의견입니다. 사실 1918년에는 미군의 전투경험과 대부대 운용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에 흑인 부대뿐 아니라 백인 부대들도 대대급으로 해체해서 영국군에 배속시키자는 주장도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사단 편제가 93사단은 사단 편제를 제대로 가지지 못해서 사단급 작전이 불가능 했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퍼싱도 어쩔 수 없는 백인인지라 흑인은 훌륭한 병사지만 장교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퍼싱 자신도 젊은 시절 잠시 흑인 부대를 지휘했었다고 하죠. 퍼싱은 백인 장교가 흑인 병사와 부사관을 지휘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운용 방식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프랑스군에 분산 배치된 흑인 병사들은 1918년 7월의 반격 작전에서 큰 활약을 했다고 합니다. 흑인 병사들의 용맹 때문에 이들을 지휘한 백인 장교들은 큰 감명을 받고 인종 차별적 태도를 버리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Halem’s Hell Fighters라는 명칭을 얻게 된 뉴욕 369 보병연대는 이때 보인 공적으로 1918년 12월 18일에 프랑스 정부의 부대 표창을 받게 됩니다.

그렇지만 흑인들에 대한 차별은 계속 이어져서 2차 대전때도 흑인들은 소규모 독립 부대로 참전하는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결국 인종별 부대를 편성하는 차별이 시정 된 것은 베트남전 부터였습니다.

미국 흑인들의 평등을 위한 투쟁은 지극히 당연한 인간적 평등을 얻기 위한 대가치고는 너무 비싼 대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