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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5일 화요일

독일의 완전 모병제에 대한 잡담

독일 날자로 7월 4일, 의무병역제도가 폐지된 이후 첫번째로 입대한 자원병들이 국방부장관의 환영을 받았다고 합니다.

De Maizière begrüßt die ersten freiwilligen Wehrdienstleistenden

Von der Wehrpflichtarmee zur Freiwilligenarmee

이날 여성 44명을 포함해 총 3,419명이 독일연방군에 자원입대했습니다. 지원병의 복무기간은 23개월로 별로 긴편은 아닌데 현재 독일연방군의 규모를 생각하면 부족한 것은 아닌것 같습니다.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독일연방군은 냉전시절에도 1962년 병역기간 연장 당시 늘린다고 늘린게  18개월이었고 1973년에는 다시 15개월로 줄일정도로 한국에 비하면 병역부담이 적은 편이었지요.1) 자원병도 2년이 안되는 걸 보니 참 묘합니다.

그런데 독일 국방부장관의 환영사에서 좀 묘한 느낌이 풍겨나옵니다.

"(입소한) 계층은 광범위합니다. 대학입학 자격을 획득한 사람 부터 학업을 마치지 못한 사람, 그리고 재입대한 사람까지, 독일전역에서 모인 사람들이, 여기 모두 함께 하고 있는것 입니다."
(Das Spektrum ist breit. Sie kommen aus ganz Deutschland, sind Abiturienten, Menschen ohne Schulabschluss, Wiedereinsteiger – da ist alles dabei.)

독일의 완전 모병제는 이제 막 시작되었지만 드메지에Thomas de Maizière 독일 국방부장관의 발언은 어딘가 과거 맥나마라의 발언과 비슷한 느낌이 풍기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빈곤층들은 마침내 조국의 방위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기술과 생활 방식등을 배워 사회생활로 복귀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으며 …. (중략) 이렇게 해서 인생의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악순환에서 벗어날 것 입니다.”2)

독일의 모병제가 다른 나라도 본받을 만한 괜찮은 모범사례가 될지 아니면 사회의 하층계급에게 국방의 부담을 떠넘기는 제도가 될지 궁금하군요.



1) Andre Uzulis, Die Bundeswehr : Eine politische Geschichte von 1955 bis heute, (Mittler&Sohn, 2005), s.36
2) George Q. Flynn, The Draft 1940~1973,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3), p.207

2006년 5월 8일 월요일

독일 육군의 장교집단과 사회계층 1900-1925 (재탕!)

19세기 유럽 사회의 가장 큰 사회적 변화를 몇 개 꼽는다면 시민 계층의 성장을 그 중 하나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하다 못해 가장 후진적이라는 러시아도 농노제를 폐지하는 개혁(?)을 단행했으니. 시민계층의 성장은 서유럽에서는 좀 보수적인 축에 끼는 독일에서도 활발했고 보수의 아성인 군대까지도 급속히 잠식해 들어갔다. 이미 독일 통일 전인 1860년의 통계를 보더라도 프로이센 군 장교단의 35%는 귀족이 아닌 시민 계층에 속하고 있었다.

시민 계급의 장교 진출은 1890년대부터 상비군이 증강되면서 더 활발해 졌다. 귀족층의 숫자는 제한 되어 있었고 귀족들만 가지고 장교단을 메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다. 특히 시민 계급은 포병, 공병 등 전문 병과에서는 이미 귀족 계층을 숫자상으로 압도하고 있었다. 비록 총 참모부 같은 핵심 보직의 경우 귀족 출신이 전체의 70%를 차지했지만 변화의 조짐은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었다. 병과의 핵심인 보병 병과에서도 고위 장교단을 제외하면 시민 계급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높았다. 특히 새로 임관되는 장교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떨어졌다.

1909년 독일군 보병 병과 장교단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아래와 같았다.(귀족 / 시민)

원수 1 / 0
상급대장 1 / 0
대장 30 / 2
중장 44 / 2
소장 75 / 31
대령 139 / 65
중령 109 / 105
소령 501 / 512
대위 945 / 1522
중위 631 / 1467
소위 1252 / 2929

다른 병과의 경우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 적었다. 예를 들어 1909년에 임관한 소위들의 기록을 보면 공병의 경우 257명 중 귀족은 8명, 포병의 경우 343명 중 귀족은 17명에 불과했다.
귀족이 시민계급 보다 다수를 차지한 병과는 기병이 유일했는데 1913년의 통계를 보면 기병장교의 80%가 귀족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반면 같은 년도의 통계를 보면 포병의 경우 귀족 출신 장교는 전체의 41%였고 보병병과의 경우 귀족 출신 장교가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의 48%에 불과했다. 1913년에 장교단에서 귀족 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은 30%대로 떨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시민 계층이 급속히 장교단을 잠식해 들어 갈 수 있었던 데는 독일의 뛰어난 교육 수준이 한 몫을 했다. 이미 바이에른의 경우 장교 임관 자격 중 하나로 아비투어(Abitur) 통과를 넣고 있었을 정도니까. 1912년의 통계를 보면 프로이센, 작센, 뷔르템베르크의 장교단에서 아비투어 소지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65.1%에 달했다고 한다. 시민 계층 출신의 장교들의 자질은 충분히 뛰어났기 때문에 귀족 출신들과 경쟁하는데 있어서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 소시민 계층 출신 장교단의 증가는 역시나 보수적인 러시아도 마찬가지여서 러시아는 1870년대부터 부르주아 계층을 장교단에 확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독일에 비해 국민 교육 수준이 크게 낮아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러시아의 하급 장교단으로 편입된 평민 계층의 상당수는 초등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군대 규모가 크게 증가했기 때문에 별 수 없이 장교로 쓸 수 밖에 없었다.

1차 대전이 발발한 뒤 군대의 사회 계급 구성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 떨어졌다. 국가 총동원으로 병력 규모가 급팽창 한데다가 극도의 소모전으로 장교의 손실이 커졌기 때문에 이제는 중산층은 물론 사회의 하위 계층까지 장교 집단으로 편입되었다. 1918년 7월의 기록을 보면 소위대행 부사관(Feldwebelleutnant)이 21,607명에 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전쟁을 거치면서 이제는 장성 집단에서도 시민 계급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졌다.

1925년의 기록을 보면 장군의 45.3%가 시민 계급이었으며 전체 장교 집단에서 귀족 출신 장교의 비중은 20%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독일 군대의 정치적 성향은 여전히 보수적 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군대의 장교 1,100의 사회 계층을 조사한 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 중 30%는 군인 집안 출신이고 30%는 공무원 계층, 16%는 자영업자, 그리고 나머지는 지주, 또는 공장주 등 중산층 이상 계층이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한다.
젝트가 가장 우려했던 것 중 하나가 시민 계급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커져서 군대가 정치적으로 불온한 색채를 띄게 되는 것 이었다고 하는데 최소한 장교단의 출신 계층만 가지고 본다면 그런 걱정은 기우였고 실제로도 독일 장교단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집단으로 남았다.